1. Industrialization in the United States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주변 나라로 퍼지게 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바 없이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하면 그것을 감추고 숨기려고 노력했습니다. 영국도 예외는 아니여서 산업혁명을 이끌었던 방직기, 방적기 기술을 은폐하려 노력하였는데 감춘다고 감춰지나요? 결국 다른 나라로 산업혁명의 기술이 조금씩 흘러들어가면서 산업혁명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산업혁명 후발 주자로 가장 많은 혜택을 본 나라는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이때 당시만 해도 아주 운이 좋게 독립한 신생국으로 유럽에 비하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국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지금과는 매치가 안 되서 어리둥절하실 수도 있지만 실상이 그랬습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게 여러 원인이 있지만 이 산업혁명 덕분이라는 걸 빼놓을 수 없습니다.

미국 산업혁명의 아버지이자 배반자 슬레이터라고 불리는 새뮤엘 슬레이터

사진에 나온 분은 새뮤엘 슬레이터인데 미국에서는 미국 산업혁명 시스템을 이끈 아버지로 평가 받지만 영국에서는 배반자(the Traitor)라고 불립니다. 그도 그럴것이 수력 방적기 기술을 미국으로 가져 갔거든요. 뭐 솔직히 지금 관점으로 보자면 산업 스파이...(그것도 국가 핵심기술)인데 저런 호칭이 붙은 것도 이해는 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술을 새뮤얼 슬레이터만 가져갔냐 하면 또 그건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미국은 이때 막 독립한 신생국이었고 영국이랑 같은 언어를 공유했습니다. 지어 이때는 막 독립한 때라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도 분화가 되기 이전이라 더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모호한 점 때문에 많은 영국인들이 미국에 건너가서 새로운 부의 창출을 꿈꾸었고 이들이 미국 산업화에 큰 이바지를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한 나라였다가 떨어져 나온 것이 미국에는 행운이 된 셈입니다. 이들의 노력으로 미국의 아주 폭발적으로 산업화가 진행됩니다. 그리고 미국의 산업화 조건은 영국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영국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광대한 토지와 자원이 있었고 막대한 미개척 지대를 개척해나가면서 미국의 산업은 그야 말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이런 미국의 성장세를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철도입니다.

1913년 철도의 길이, 미국의 엄청난 철도 길이에 놀랄 수 밖에 없다.

그래프에서 보시는 것처럼 미국은 1913년 전 세계 어느 나라와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은, 아니 전 세계의 철도망을 합쳐도 상대가 될만한 철도 체제를 구축합니다. 제가 앞선 시간에 철도야 말로 산업혁명의 총아라고 말씀드렸는데 산업혁명 후발주자였던 미국이 이제는 당당히 초일류 국가로 들어선 것을 철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 통계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1인당 소득이나 산업화 수준도 1900년 초반 대면 이미 영국을 넘어서게 됩니다. 영국의 아성에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은 이미 준비가 되어있었던 상태였습니다. 그나마 미국의 문제였던 남북갈등도 1865년 남북전쟁 종결로 봉합되자 미국은 날개를 단 셈이 되었습니다. 대체로 1800년대 후반이 되면 내전에 쏟았던 에너지를 산업화에 쏟으면서 미국은 당당히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아 그리고 이 시점에 미국이 폭발적으로 철도를 확장하게 된 것은 주식회사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철도 같은 기간 사업은 당장에 들어갈 돈이 많기 때문에 쉽사리 사업에 손을 댈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안해낸 방법이 주식인데 회사 권리의 일부를 주식이라는 형태로 팔아서 주식을 산 사람들에게 회사의 이익을 배당해주고 대신 자본금을 얻는 형태였죠. 이런 회사를 주식회사라고 하는데 역사전공이라 더 자세히 얘기할 자신이 없어서 여기까지만 하고 빤스런하겠습니다. ㅠㅠ

2. Continental Europe Industrializes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시작되었고 이제 마침내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시기가 18세기 후반인데 이때 유럽 대륙은 프랑스 혁명에다 나폴레옹 전쟁까지 겪고 있어 난리도 아니였기 때문에 산업혁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늦어졌지만 결국 산업혁명은 서서히 스며들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19세기 초반부터 유럽 대륙의 산업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됩니다. 유럽 대륙의 산업화도 미국과 비슷하게 산업스파이(...) 비슷한 사람들이 활약하게 됩니다. 벨기에 쪽에는 윌리엄 코커릴이란 사람이 영국에서 기계를 불법적으로 들여와 유럽 대륙에 산업혁명이 확산되는 기여를 하게 됩니다. 

유럽 대륙 쪽에서 가장 눈부신 산업혁명을 이루어낸 쪽은 바로 독일입니다. 원래 독일은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초기만해도 나라가 산산히 갈라져 있기 때문에 산업화를 추진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중반부터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정치적으로 통일의 기운을 타자 그것에 발 맞추어 산업화도 기지개를 펴게 됩니다. 

1840~1900까지 유럽 철도망의 길이를 그래프로 나타내었다. 독일과 러시아의 철도망 증가가 눈에 띈다.

독일은 영국보다 넓은 영토와 자원을 비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잠재력은 무궁무진했습니다. 다만 정치적으로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힘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프로이센이 독일 여러 나라들 중 중심을 잡고 통일운동을 펴나가자 정치적으로 빠르게 안정되더니 1871년에 독일 통일이 달성되었습니다. 독일은 이 1800년대 후반에 완벽히 산업화의 궤도에 오르게 되더니 영국을 거의 추월하게 됩니다. 미국도 그렇고 독일도 그렇고 왜 이렇게 산업화에 뒤쳐진 국가들이 산업화를 시작하자마자 빠르게 선진국을 추월하게 되었는 지는 두 가지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한데 후발성 이득과 경로의존성입니다.

후발성 이득과 경로의존성의 예는 멀리 갈 것 없이 우리나라 즉, 한강의 기적 사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후발성이득은 뒤쳐진 채 출발한 사람이 매우 약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먼저 출발한 사람의 경로를 보고 그 사람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압축적으로 경험하거나 혹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 더 빠르게 발전할 수 있다는 예시 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한국전쟁 이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으나 앞선 선진국들의 산업화 사례를 보고 배워 굉장히 빠르게 산업화를 달성할 수가 있었습니다. 19세기 후반 독일 역시 앞서 나간 영국의 산업화를 빨리 배웠기 때문에 영국보다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죠. 경로 의존성은 일단 시작된 방향을 틀기가 어렵다는 건데 예를 들어 영국 같은 경우 일찍부터 산업화가 시작되어 가스등 인프라가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가스등이 처음 개발될 때는 그것이 좋은 것이었지만 뒤이어 전기등이 개발되었을 때는 이 가스등 인프라가 오히려 전기등을 보급하는 데 발목을 잡게 되는 것이죠. 즉, 산업화를 하지 않아 아무것도 없는 나라가 더 빠르게 산업화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한국전쟁 이후 폐허 속에 다시 산업을 일으켰기 때문에 경로의존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 2가지를 무기로 독일과 미국은 가파르게 산업화를 달성할 수 있었고 그 주변 나라 역시 빠르게 성장해나갑니다. 이처럼 혁명은 처음 시작은 어려우나 한번 시작되면 무서운 기세로 전파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3. Laissez-faire Economics

산업혁명이 전개되면서 그에 맞는 새로운 경제 이론이 나오게 됩니다. 산업혁명 이전에 유럽을 지배하던 사상은 중상주의였는데요. 중상주의는 강력한 보호무역을 표방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 보호무역을 행하던 16~17세기 유럽 경제 발전은 아메리카 대륙 착취에 기인한 것이어서 이렇다할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미칠듯한 인플레이션 현상인 가격혁명을 맞봐야했습니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이런 보호무역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이 서서히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은 당시 자유주의적 정치적 흐름을 경제에도 끌고 들어왔는데요. 정부의 시장 개입을 최소화하면 시장은 알아서 잘 돌아가리라는 자유방임주의를 내세웠습니다. 사실 이 파트부터 역사보다는 경제에 훨씬 가까운 파트인데요. 좀 자신 없어서 수업말고 개학연기 기간에 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더 망한 느낌... ㅠ 설명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이해해주세요. 그럼 자유 방임주의부터 봅시다.

자유방임주의의 어원은 정부는 걍 가만히 있으라는 거다. 사실 오늘날 자유방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거랑 별반 다를 바 없는 뜻이다.

Laissez-faire는 영어 같지가 않죠? 불어인데 대강 뜻이 걍 내비둬 정도 입니다. 직연하면 leave it alone 정도가 될거에요. 쉽게 말해 뭘 하려고 하지 말고 내비두라는 것입니다. 언어의 어원은 이런데 프랑스의 유명한 장관인 콜베르가 사업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떻게하면 정부가 사업을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겠소?'라고 묻자 그걸 듣던 르 깡드르라는 사람이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는 패기 넘치는 대답을 한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대체로 중상주의의 반대되는 위치에서 나왔기 때문에 중농주의자들 중에 자유방임주의자가 많았습니다.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의 대표인 애덤 스미스 역시 중농주의에 조금 더 우호적인 시각을 가진 인물이었죠. 애덤 스미스는 우리나라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하지만 정작 그의 저작 국부론에는 한번 밖에는 언급이 안 됩니다. 실제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의미는 시장 원리라기 보다는 개인의 이기적 경제활동 추구가 사회 전체 부의 증가와 연결된다는 의미로 비슷하지만 묘하게 다른 뉘앙스입니다. 아무튼 이 얘기는 여기서 다룰 사안은 아니고 우리가 다룰 것은 애덤 스미스의 세 가지 원칙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경쟁은 인간에게 더 나은 상품을 만들도록 하고, 가격은 수요자를 만족 시키기 위한 가능한 최저 수준에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합리적인 수준의 설명이었고 오늘날에도 충분히 통하고 있습니다. 이런 스미스의 생각을 맬서스, 리카도와 같은 학자들이 더 발전시켰는데 이들을 고전 경제학자라고 부릅니다. 맬서스는 맬서스의 덫으로도 유명한 경제학자인데 인구 증가가 식량 증가보다 더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전쟁이나 전염병으로 인구가 조정되고 전쟁이나 전염병이 일어나지 않아서 인구가 조정되지 않는다면 생계 유지 수단이 없는 사람들은 비참한 상태에 이른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맬서스는 한발 더 나아가서 빈민층은 최대한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아니면 전쟁 한번 내서 억지로 인구를 조정해야(...) 한다는 신박한 이론을 냈는데 도덕적인 내용은 차지하고서라도 당시에는 슬프게도 상당히 설득력 있는 설명이었습니다. 지금이야 맬서스의 덫이 깨진지 오래였지만 실제로 1840년대까지만 보면 맬서스의 말이 상당히 현실성이 있었습니다.

리카도는 맬서스의 이론을 한 발 더 발전시킵니다. 이 사람은 비교우위, 노동가치설로 유명한 사람인데 우리 교과서에서는 그거보다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리카도는 하층민 노동자는 영원히 가난할 것이다라는 이론을 만들었는데 그 이론에 따르면 만약 인구가 적다면 노동자는 생활 수준이 향상되어 인구가 증가되게 될 것입니다. 인구가 증가 되면 자연스럽게 임금은 하락되겠죠. 이렇게 되면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이 안 좋아져서 다시 인구는 감소하고 이렇게 되면 임금이 다시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리카도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임금의 변동은 있어도 결국은 노동자의 자연가격(노동자가 삶을 영위하는 최저 수준의 소득)에 맞춰진다는 것이였습니다. 뭐 얼핏 생각하면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이지요. 이처럼 고전경제학파들은 인구에 주목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했고 맬서스처럼 하층민에 전혀 우호적이지 않은 발언을 쏟아내다보니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이즈음 자유방임주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들이 나오는데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지 않았더니 몇몇 큰 기업들이 가격을 담합하여 건강한 시장을 파괴하거나 독과점이 일어나는 형태가 나타나게 됩니다. 몇몇 자본가들만이 이런 상황에서 부를 착취했고 빈부격차는 이제 엄청난 속도로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시장을 내버려두면 안 되는 상황이 왔고 노동자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이때 자유방임주의를 비판하고 나온 사상이 바로 사회주의입니다.

4. The Rise of Socialism

처음에 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나온 것은 공리주의였습니다. 벤담, 밀과 같은 사람들인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한 번쯤 들어본 말이죠? 결국 이들은 많은 수의 사람이 행복을 누리려면 정부가 개입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소수의 독점 자본주의는 이제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이 시작된 것이죠. 공리주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사회주의입니다. 비참한 노동자들의 삶을 목격한 오웬 같은 사람은 뉴 라나크, 뉴 하모니와 같이 협동 조합을 만들어 아동의 노동을 금지시키고 대신 교육을 하여 이상적인 형태로 부를 재분배하려고 했습니다. 푸리에, 생시몽 같은 사람들도 이런 생각에 동의했는데요. 그들은 이런 빈부격차의 문제점이 몇몇 소수자의 부의 독점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자유시장 의존하기 보다는 경제를 계획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요. 그들은 공장, 광산, 철도 및 기타 주요 산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빈곤을 종식시키고 평등을 촉진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주요 산업이나 부의 생산수단을 공공의 품으로 귀속 시키냐? 인간은 착하니까 잘 설득하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겁니다. 음, 말이 안되죠.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만은 인간은 이기적 존재이고 이때까지 저랑 역사 배웠으면 아실테지만 수많은 전쟁들이 별 시덥잖은 이유로도 일어나는 것을 보면 이들의 믿음은 순진함을 넘어 어리석어까지 보였습니다. 이러던 차에 진짜 사회주의라고 부를만한 것이 등장합니다.

5. Marxism: Radical Socialism

이제 본격적으로 마르크스가 주장한 사회주의에 대해 다루어 보겠습니다. 갑자기 사회주의에 대해 설명하려니까 묘한 긴장감이 감도네요? 으어어어....

판사님 이 뒷부분은 저희집 고양이이자 사회주의 전문가 마르크스가 작성했습니다!

이 뒷페이지는 저희 집 고양이(다들 아시죠? ㅋㅋ) 마르크스가 작성한 걸로 하겠습니다. 요즘은 저희 애 때문에 격리되서 본가로 가 있는데 이 파트를 설명한다하니 득달이 같이 달려왔네요 ㅋㅋㅋ 자 마르크스는 이 위에 사회주의자들을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비판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정리하면서 인간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로 정의했는데요. 그러면서 현재 자본주의의 상황은 유산자(가진자)인 브르주아와 무산자(못 가진자) 프롤레타리아의 대립으로 보았습니다. 브르주아는 자신이 소유한 생산수단을 내놓지 않을 겁니다. 결국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요원한 거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냐? 어떻게하긴 뭘 어떻게 해요 폭력으로 뺏는다는 겁니다. 이걸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유산자 계급에 대해 무산자 계급이 가진 유일한 무기는 바로 단결이라고 본겁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한 유명한 말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가 탄생된 거죠. 여기서 앞에 말인 만국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내 노동자만 단결한다고 해서 이 문제(빈부격차)가 풀리지 않거든요. 만약에 국내 노동자들이 고분고분하지 않다? 그러면 외국인 노동자를 들여오게 되고 이러면 자본가 vs 노동자의 싸움이 아닌 외국인 노동자 vs 내국인 노동자의 싸움으로 번지죠. 만약 자본가가 공장을 이전해도 마찬가지 양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해야지만 빈부격차가 해소된다고 봤습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생산수단을 몰수하면 그때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시작되어 생산수단이 완전히 사회화 되고 경제적으로 평등해질 때까지 정부가 사회를 통제하는 겁니다. 그리고 완전한 경제적 평등이 달성되면 자연스래 정부의 역할이 희미해져 계급없는 사회가 달성되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지는 완전한 공산사회가 달성될 것이라 보았습니다. 

마르크스가 작성한 짧은 문서인 공산당 선언에는 공산주의의 핵심이 담겨 있었고 그 파급력은 전 유럽뿐만 아니라 이후에 전 세계까지 뻣어 나갑니다. 실제로 현실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을 탄생시키기도 하죠. 하지만 마르크스 살아 생전에는 크게 사회주의가 기를 펴지는 못합니다. 1848년, 마르크스의 예언대로 곳곳에서 혁명이 시작되었으나 완전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고 프랑스에 들어선 파리 꼬뮌도 마르크스가 생각한 공산주의하고는 모습이 달랐습니다. 만국의 노동자 단결을 위해 창설된 단체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무정부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서로 뒤엉켜 주도권 다툼만 하다 1876년에 해산되고 맙니다. 그 후에 인터내셔널이 다시 들어서긴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미 죽은 이후였죠. 그러나 마르크스의 주장은 노동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단결이 유일한 무기임을 깨달은 노동자들은 서서히 자신들만의 조직을 갖추게 됩니다.

6. Labor Unions and Reform Laws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지킬 방법을 고민합니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말처럼 단결하기로 결심하는데 이른바 노조의 탄생입니다. 처음에 탄생된 노조는 숙련공 중심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숙련공들은 대체하기 힘든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해고가 쉽지 않아 높은 협상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노조가 만들어졌을 때부터 정부는 사실상 노조의 단체 행동을 인정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 노조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1799년에 단결금지법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단체 행동을 원천 봉쇄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암암리에 노조에 가입하면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영국은 1824년에 단결금지법을 폐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1886년 AFL(미국노동자연맹)이 헤이마켓 사건으로 결성되게 됩니다. 사실 미국은 AFL 이전에 노동기사단이라는 상당히 급진적인 단체가 노동운동을 주도하게 되는 데 헤이마켓 사건도 이들 주도로 일어나게 됩니다. 헤이마켓 사건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싶지만 간략히 말하면 8시간 노동을 위한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발포했고 이후에 일어난 시위에서 노동자 측에서 경찰을 향해 폭탄을 던지면서 시위가 겉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됩니다. 결국 이 운동을 주도한 지도부가 체포되는데 증거불충분이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사형 판결을 받으면서 이후 세계적으로 노동운동이 퍼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정작 미국은 이런 과격한 시위를 본 이후로 점차 노조가 온건한 성향으로 변했고 이전에만 해도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정치 조직이 있었으나 지금은 진보라고 해봤자 온건한 민주당이 좌파 쪽 입장을 대변하는 미국 정치지형을 변하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뭐 그건 나중에 미국사 얘기할 시간이 있으면 더 자세하게 다루고 싶지만 개학 연기로 시간이 없... ㅠㅠ

세계 노동운동의 큰 전환점을 준 헤이마켓 사건, 이 사건이 일어난 5월 1일이 바로 노동절이다

아무튼 노동자들이 단결하기 시작하자 정부와 자본가들도 위기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되겠다 생각을 해서 무분별한 자본가들을 규제하기 시작합니다. 영국에서 1820년대와 1830년대에 공장과 광산에서 아동 노동과 노동 조건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의회는 1833년 공장법을 통과시켰는데요. 이 법에 따르면 9세 이하의 아이들을 고용하는 것을 불법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예전에는 9세 이하의 아이들도 고용했다는 끔찍한 얘기겠죠. 실제로 이 기간에 조사되었던 사례들이 사료로 남아있어 산업혁명기 끔찍했던 노동사태를 우리가 접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또 다른 제약은 9세에서 12세 사이의 아이들은 하루에 8시간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3세에서 17세 사이의 젊은이들은 12시간 이상 일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1842년 광산법은 여성과 어린이들이 지하에서 일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1847년에는 10시간법 제정되어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과 어린이들의 근무 시간을 10시간으로 제한했죠.

미국도 아동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1904년에는 전국 아동 노동위원회를 조직되었습니다. 이들은 정치인들에게 아동 노동을 금지하고 최대 노동 시간을 정하도록 압력을 가했습니다. 이후 각 주들은 여성의 노동 시간과 나중에 남성의 노동 시간을 제한할 수 있게 되었죠. 개혁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후에 유럽과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고 여성 인권이 신장되는 등 산업혁명이 진행될수록 인권도 개선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호레이스만 같은 경우 아동의 공교육을 주장했고 토크빌 같은 경우 교도소의 인권 향상을 주장했습니다. 죄지은 사람이 무슨 인권이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죄수들을 사회에 적응시켜 재범율을 낮춘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납득할 수 있는 주장입니다. 아무튼 산업화 속에서 인권이 서서히 전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이것으로 산업혁명 파트는 종료가 되었는데 사실 역사라기 보다는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적 관점에서 같이 봐야될 사건이 많습니다. 이후에 조금 더 깊이 공부하실 생각이라면 다양한 관점에서 산업혁명을 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Special Question

- 만국의 노동자는 왜 단결하지 못하였는가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데 한번 쯤은 얘기해보고 싶어 선정했습니다. 팀즈에서 토론을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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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SETTING THE STAGE

안녕하세요. 또 늦었네요 하하 ㅠㅠ 제가 그렇죠 뭐...;; 이번 시간은 산업혁명입니다. 요즘 매일 4차 산업혁명 시대다 이런 얘기가 나오고 있어서 아마도 많이 들어보셨을 건데요. 제가 얘기할 산업혁명은 1차 산업혁명입니다. 아마 다음 시간에는 2차 산업혁명을 얘기할 것 같군요. 1차 산업혁명은 이전까지 인간이 쓰던 동력을 본격적으로 기계가 대체하던 시대를 얘기합니다. 주로 소비재(오늘 이야기는 면방직 공업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공업의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이어서 2차 산업혁명 때는 본격적으로 전기가 들어오고 석유가 개발되면서 중화학 공업이 발달되게 되는데 1차 산업혁명의 시기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이라면 2차 산업혁명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라고 볼 수 있겠네요.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서 역사, 경제, 인접 사회과학 분야에서 많은 의견들이 오고 갔으나 사실 딱 잘라서 이거다라고 할 수 있는 이론이 없습니다. 사실 요즘은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부적합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혁명하면 빠른 시간 안에 급격한 변화를 얘기하는데 실제로 산업혁명은 체제 전환이 놀라울 정도로 일어난 것은 사실이나 기간이 제법이 길어 과연 혁명이라는 말이 어울리냐는 논란이 있습니다. 뭐가 됐든 간에 인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중요한 사실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산업혁명을 배워봅시다.

1. The Agricultural Revolution Paves the Way

산업혁명은 사실 농업의 발전이 이끌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저 인간이 무슨 도그 사운드(...)를 하나 싶지만 농업이 산업혁명의 근간이 된 것이 사실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모든 문명의 기반은 농업에 있었습니다. 유럽은 도시 중심의 상업 문명이고 아시아는 농촌 중심의 농업 문명이나 하는 헛소리가 예전에 잠시 유행한 적이 있는데 본질적으로 인류 문명은 농업 문명입니다. 유럽이든 아시아든 농촌 인구가 전체 인구에 차지하는 비중이 월등히 높았으며 도시가 존재하긴 했으나 오늘날과 같은 형태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산업혁명 이전의 대부분의 도시는 절대적으로 농촌에 의지하고 있었으며 대체로 거래되던 물품도 농촌에서 생산된 것을 도시로 가져와 파는 형태가 많았습니다. 아무튼 그만큼 인류에게 있어 농업에 대한 비중이 높다는 것을 꼭 얘기하고 싶네요. 아무튼 18세기에 농업 기술의 혁신적인 발전으로 영국에 큰 변화가 생깁니다. 중세 유럽의 농사법은 대체적으로 삼포제라고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농지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가을에 농사를 짓는 추경지에는 주로 겨울밀, 봄에 농사를 짓는 춘경지에는 귀리, 콩, 보리 그리고 마지막 휴경지는 농사를 짓지 않고 묵혀둠으로써 지력을 회복시켰습니다. 과거 2단계 경작에 비해 상당히 생산성이 높은 방법이었으나 휴경지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이 문제점을 18세기 노퍽 지방에서 유행한 농법이 해결합니다.

노퍽 농법의 흐름, 휴경지를 없애고 순무나 클로버를 심어 지력을 회복하고 수확한 순무나 클로버를 동물 사료로 제공했다.

노퍽은 3단계 윤작인 삼포제를 대체하는데 휴경지를 없애는 것이 핵심입니다. 원래는 휴경해서 지력을 회복해야 할 휴경지에 순무나 클로버를 심어 지력 회복에 도움을 주고 순무나 클로버는 수확하여 가축의 사료로 씀으로써 땅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연달아 짓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으로 인해 곡식의 생산량이 늘었을 뿐 아니라 가축들의 영양 상태도 좋아져 고기도 훨씬 더 많이 생산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파종기(seed drill)도 개발되어 더 고르게 씨를 뿌려 생산력이 높아집니다. 이쯤되자 토지를 가지고 있던 지주 계층들은 땅이 곧 돈이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전에는 가축들이 풀을 뜯거나 농민들이 떨어진 열매를 주워가서 허기를 채우던 공유지를 농경지로 변경하는 운동을 벌입니다. 이것이 제2차 인클로저 운동 입니다. 인클로저는 울타리를 친다는 뜻인데 공유지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끔 울타리를 친다는 뜻입니다. 이로써 이들은 더 큰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작은 땅을 일구어 살던 영세농들의 삶이 힘들어집니다. 이들은 흉년이 오거나 하면 공유지에 들어가 떨어진 열매를 줍거나 수확을 마친 밭에서 이삭을 주어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곳에 울타리를 쳐버리니 당장 생계를 이어가기가 힘들어집니다. 이렇게 되니 많은 수의 농민들이 살길을 찾아 도시로 가게 됩니다. 또한 농업 기술의 발달로 선진적 농업 기술을 받아들여 농사를 잘 짓는 다고 소문난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지주로 부터 대량으로 땅을 빌려 (차지농) 그 땅을 운용해 수익을 창출함으로써 새로운 신흥 계층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듣다보니 이거 어디서 많이 본 흐름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이것은 조선후기 농업기술의 발달로 조선의 농민 계층을 분화하는 현상과 거의 같은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교과서에 이런 서술이 있는 것은 과거 일제에 의해 자본주의와 산업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꺠기 위해 조선에서도 자본주의의 싹이 트고 있었다는 이른바 자본주의 맹아론에 입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본주의 맹아론은 이미 역사학계에서 거의 사장된 이론인데 아직까지 교과서에 실려있는 것이 안타깝기는 합니다. 조선이 자발적으로 산업화를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움츠러들 필요는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산업혁명은 이식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왜 일어났는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거칠게 말하면 거의 우주의 기운이 모여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그 여파가 주변 국가에 이식되었기 때문에 영국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국가 일본이나 서유럽도 마찬가지로 산업화가 이식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거지로 우리도 가능했다고 하기보다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영국과 무엇이 달랐고 조선만의 특징은 무엇인지를 제대로 공부하는 게 나은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시 영국이야기로 돌아오면 이런 농업 혁명이 잉여 노동력을 도시에 공급했고 (최근에는 아니라는 이론도 있지만 원론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영국의 안정된 정치체제가 이에 맞물려 기술 혁신을 일으켜 산업혁명을 일으켰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잉여 노동력이 있고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다고 해서 갑자기 기술 혁신이 일어날리는 없지 않습니까? 영국을 산업혁명으로 이끌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2. Changes in the Textile Industry

영국의 산업혁명을 이끌었던 산업은 바로 면직물 공업이었습니다. 그깟 면이 무슨 산업혁명을 일으켜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 있으실텐데 제가 길게 설명하는 것보다는 굽본좌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 3화를 보시면 이해가 아주 쉽게 됩니다. (https://www.justoon.co.kr/content/home/09qh02k1cc6e/viewer/09rf2ms1bbd7) 이 만화는 유료지만 1화부터 3화까지는 무료라 저스툰 아이디만 만들면 무료로 볼 수 있습니다. (예아! 그리고 3화를 본 나머지 너무 재밌어서 128화까지 유료 결제하는 것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만화에서 설명하는 것을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영국의 전통 산업인 모직물 공업이 면직물 공업으로 대체되었는데 이 면직물을 만들려면 목화에서 실을 뽑아 옷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과정이 너무 귀찮은 거죠. 당시 아메리카 대륙 발견으로 쌓여 있는 잉여 자본, 도시로 투입되던 잉여 노동력이 면직물 공업에 모두 투하되고 기술 혁신이 일어나게 됩니다. 실로 직접 옷감을 짜기 귀찮아 옷감을 짜는 기계를 만들더니 (방직기) 이후 옷감이 너무 많이 만들어지니 옷감을 만들 실이 무족하여 목화에서 실을 뽑는 기계를 만들어냅니다. (방적기) 방직기와 방적기가 서로 생산량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사람 손으로 기계를 돌리지 말고 다른 힘으로 기계를 돌리면 어떻게 될까까지 생각이 미쳐 처음에는 수력을 사용하는 기계가 나중에는 증기 기관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인이었던 헤론이 고안해낸 증기 기관, 사실 증기 기관은 예전에도 많이 썼다.

사실 증기 기관은 산업혁명 때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인인 헤론이 에올리스의 공이라는 증기 기관을 만들었고 그 이후에도 비슷한 동력 장치가 여럿 나왔습니다. 그러나 상용화 되지 못한 건 노예의 존재, 생각보다 약한 동력이라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본격적으로 석탄을 활용하게 되면서 약한 동력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고 드디어 인간이나 동물의 힘이 아닌 다른 것을 동력으로 삼아 기계를 돌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혁신은 곧 면직물이 아닌 다른 산업분야에도 급격하게 파급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교통 분야죠.

3. Improvements in Transportation 

증기 기관 동력으로 사용되자 운송기관에 접목할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배고 또 하나는 마차였습니다. 배는 아시다 시피 증기선이 만들어졌습니다. 증기선을 이용하여 이제는 바람의 힘을 이용하는 범선이 아닌 증기선이 대세가 되면서 더 빠른 속력과 바람의 제약으로 인해 항해가 힘들었던 곳 까지 무난하게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석탄 저장소를 곳곳에 지어야 된다는 한계가 있었지만 이전에 비해서는 엄청난 발전이었죠. 그리고 증기 기관의 발전으로 인해 마차도 엄청난 영향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어떤 생각을 하게 되냐면 말이 이끄는 수레를 증기기관으로 대체하면 어떨까라고 말이죠. 증기기관차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04년 리처드 트레비식에 의해서 입니다. 트레비식에 의해 만들어진 기차는 결합이 좀 있었고 대중화 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개발자은 했지만 상용화되지 못했습니다. 상용화된 것은 조지 스티븐슨에 의해서 였습니다. 스티븐슨은 트레비식의 증기가관차를 개량하여 '로코모션(Locomotion)’을 개발했으며 이후 로켓(Roket)'호 만들어져 1829년 맨체스터-리버풀 사이에 기념비적인 첫 여객 노선을 개통하게 되었습니다.

1829년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의 철도 노선, 이로써 노스 웨스트 더비가 열릴 수 있게 되었다 ㅋㅋ(죄송 개드립 좀 처보고 싶었습니다. 맨유는 1878, 리버풀은 1892 창설이니 철도가 더 먼저 개통입니다~)

 

왜 하필 이 두 도시가 먼저 개통되었냐면 맨체스터는 내륙 공업 지대, 그리고 리버풀은 항구 도시로써 이 두 도시를 연결함으로써 얻는 효과가 컸기 때문입니다. 1829년 철도가 처음 깔리면서 이후에 철도망이 폭발적으로 확장됩니다. 철도의 발명은 인류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는데요. 이제는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던 지역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예컨대 말 타고 3일 걸리던 거리를 철도로 하루 만에 주파하게 되면 당연히 그에 따른 인간의 삶도 크게 바뀔 수 밖에는 없겠죠. 또한 철도로 인구의 대량 수송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값싸게 먼 거리를 왔다갔다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리적 장벽의 붕괴는 물자의 이동을 더욱 손쉽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물자를 빠르게 공급받을 수 있게 된 공장은 대량 생산 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제 공장에는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고 지리적 장벽이 붕괴되었기 때문에 농촌의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욱 쉽게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인 도시화가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4. Industrialization Changes Life

유럽의 도시들은 16~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20만이면 엄청 큰 도시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1800~1850년 사이에 십만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도시가 22개에서 47개로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게 됩니다. 지금이야 도시하면 세련된 이미지지만 이 시대에 도시는 위생과 청결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산적해 있었습니다. 인구 증가에 따라 치안은 안 좋아졌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예전에는 사람의 이동이 별로 많지 않고 태어난 그곳에서 계속 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기 쉽지 않았지만 이제는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졌으며 범죄를 저지르고 언제든지 도망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또한 급격한 인구 증가로 사람을 수용할 주거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으며 공장 폐수와 생활 폐수가 무분별하게 버려져 도시의 위생상태는 말 그대로 최악이었습니다.

산업혁명 기의 도시의 모습

도시에서 삶의 질만 좋지 않은 건 아니였습니다.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장도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일단 주6일 근무에 16시간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8시간 근무에 주5일 근무가 정착된 우리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버티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 물론 요즘도 대부부 8시간 근무하는 건 아니죠, 대한민국 평균 근로시간이 OECD 국가 중 최상입니다. 뭐 일단 우리 학교만 봐도... 아닙니다 잊어주세요) 게다가 근무시간에 더불어 노동자들은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요즘이야 산업재해 같은 개념이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공장에서 일하다 다치면 공장주들은 그것을 빌미로 노동자를 해고했습니다. 물론 어떠한 보상도 주지 않고 말이죠. 게다가 자본가들은 더 값싼 노동력을 찾기 위해 성인 남자에 비해 저 임금인 어린이, 여성을 고용했습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가족 모두 일에 소비하는 시간이 중세보다 산업혁명이 월등히 많다고 할 정도라고 합니다. 사람을 대시하는 동력을 개발한 시대였는데 인간이 더 일을 해야 한다니 참 아이러니 합니다. 4차 산업혁명도 마냥 장밋빛은 아닐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노동자들은 열악한 상황에 처했지만 그래도 돈을 버는 계층은 다 있었습니다. 먼저 자본가들이 당연히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지주를 재치고 점점 높은 지위를 차지해나갑니다. 지주들은 자본가들의 성공을 보고 그들의 부를 '저급'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들의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자본가와 대지주 사이에 숙련공, 전문직 종사자, 부농 등의 중산층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들은 자본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자신만의 기술을 가지고 있어 어느 정도 부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노동자들에 비해 해고의 위험이 덜했습니다. 노동자들은 해고하면 금방 대체제를 구할 수 있었지만 이들은 전문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니 대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열악한 고용 상태에 처한 노동자들은 새로운 기계 도입으로 인해 자신의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 하여 기계 파괴 운동(러다이트 운동)에 나서기도 했지만 그것은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본질적인 해결책을 가지게 되는 것은 바로 사회주의 출현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5. Positive Effects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위에 안 좋은 얘기만 잔뜩 늘어놓았는데 그럼 산업혁명은 우리에게 비극이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사실 역사 교과서에는 안 좋은 습관이 하나 있는데 늘 피지배층을 암울하게 묘사한다는 겁니다. 한국사 교과서 보면 농민은 늘 몰락(...)하죠. 어떻게 그 질긴 목숨을 이어가나 신기합니다. 그렇다고 서구권 교과서에서는 피지배층에 대한 묘사를 섬세하게 하냐면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우리 교과서도 보면 피지배층이 상당히 불쌍하게 나오죠. 그런데 이런 부분은 어디까지나 과장된 측면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언제 우리내 삶이 편한적이 있었냐는 거죠 ㅎㅎ 당장 산업혁명으로 인해 피지배계층은 착취당하는 것처럼 보이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생활환경이 개선되고 있었습니다. 가장 명확한 증거가 바로 인구 증가입니다.

16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인구 그래프, 산업혁명이 진행된 국가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차이가 눈에 띈다.

산업혁명은 이른바 맬서스의 덫이라고 불리는 인구 증가의 한계를 돌파하게 해주었습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인구증가가가 이루어지고 더 이상 인구가 부양할 능력이 안 되면 전염병이 돌거나, 전쟁이 일어나 인구가 감소되었습니다. 쉽게 얘기해 그래프가 우상향이 안 된다는 얘기였죠.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인구 부양력을 높일 수 있게 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늘어난 인구는 고대나 중세와 다르게 구매력을 갖추게 됩니다. 이른바 대중이 등장하게 되었죠. 공장에서 막대하게 찍어내는 상품은 몇몇 귀족을 위한 사치품이 아니라 이들을 타겟으로 생산된 것이었습니다. 이제 과거에는 그림의 떡이었던 상품이 기술혁신으로 인해 대중에게 싼 가격에 공급되게 됩니다. 쉬운 예로 15세기 조선의 왕보다 21세기 평범한 대한민국 서민의 삶의 질이 훨씬 높다는 겁니다. 예전에는 누가 매일 고기를 먹는 것을 상상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우리는 살을 빼려고 억지로 고기를 안 먹으니 얼마나 생활 수준이 높아졌는 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결국 산업혁명이 막 일어날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으나 장기적 관점에서 봤을 때 전체적인 생활 수준은 올라간 것이죠. 물론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노동자의 삶이 별로 힘들지 않았다거나 결국 역사가 발전할 건데 노동자의 저항은 역사 발전을 가로 막았다거나 하는 단순한 생각은 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Special Question

- 철도의 등장으로 이전과는 매우 달라지게 된 개념들이 무엇이 있을까요?

- 철도는 산업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산업니다. 철도를 만들기 위한 기술이 사실상 산업혁명을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이처럼 앞으로 진행될 4차 산업혁명 기술이 모두 집약된 산업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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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SETTING THE STAGE

제가 이걸 왜 한다 그랬는지 지금 격렬하게 후회중인데(...) 그래도 개학전 과제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이제 Ch 16입니다. 우리는 유럽인이 도래하기 전 아메리카 문명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뭐 안다해도 마야, 아즈텍, 잉카의 이름 정도만 아는 것에서 그치죠. 하지만 북아메리카에도 복잡한 사회가 존재했으며 마야, 아즈텍, 잉카도 우리가 알고 있는 단편적인 사실보다 훨씬 더 자세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이번 시간에 확인할 수 있을겁니다.

1. Complex Societies in the West

먼저 북아메리카의 서쪽 지역에 대해 알아보죠. 먼저 교과서에서 언급하는 곳은 태평양을 접하고 있는 북서부 해안가 지대입니다. 지도를 보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북아메리카 지역의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화 분포도, 북서 해안지대는 왼쪽 끝 짙은 초록색 부분

교과서에서는 포틀래치(potlatch)라는 문화를 설명하면서 이 북서부 해안가의 원주민 사회의 복잡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포틀래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나누어 주는 의식으로 이 지역 원주민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였습니다. 포틀래치를 여는 사람에게는 나눠주는 재산의 정도에 따라 그 지위를 높일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포틀래치에 대접받은 사람은 반드시 답례를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다툼이 전쟁으로 까지 이어집니다. 이런 독특한 의식은 경제학에서 먼저 주목하여 포틀래치경제라 하여 증여경제를 설명하는 사례로 꼽히고 있습니다. 일부는 이것이 잉여를 남기지 않고 부의 평등을 이루는 자본주의 오점을 고치는 것이라고 하고 있는데 뭐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건 좀... 아무튼 역사학적 관점에서 보면 포틀래치라는 의식이 나타나는 것은 결국 잉여생산물의 집적과 그로 인한 지위의 차이가 나타난다는 것이고 이것은 곧 계급 발생으로 이어지는 것이니 문명이 싹트기 위한 징조라고 보여집니다. 즉, 북아메리카 지역도 역사적 빈공간이 아니라는 점이죠. 

서쪽 해안가와 다르게 대분지(Great Basin) 지역(지도에는 빨간색 부분)에는 다른 문명을 만들어 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나사지(Anasazi)가 그들 입니다. 대분지 지역은 강수량은 적고 건조한 기후인데 이 기후에 맞추어서 그들이 사는 문명이 발달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푸에블로(pueblos)라는 유적이 있습니다. 스페인어로 도시나 마을이라는 뜻인데 대체로 흙을 이용해 만든 대규모 집단 부락 유적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왜 영어가 아니고 스페인어냐면 사실 이 지역은 과거 스페인 식민통치 지역이었기 때문에 스페인어의 영향이 강합니다. 원래 멕시코 영역이기도 했고요. 아무튼 절벽에도 대규모 취락을 만들기도 했는데 메사 베르데(Mesa Verde, 스페인어로 녹색 탁자)라는 것입니다. 

위가 메사 베르데, 아래가 푸에블로 보니토

이 유적을 보면 이 지역 기후에 맞는 촌락을 형성한 것이 눈에 띕니다. 돌과 벽돌로 만들어진 대규모 촌락은 1000명의 사람과 600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는 아주 복잡한 공동체를 위한 것이였습니다. 지하에는 키바(kivas)라고 부르는 종교 의식에 쓰이는 공간이 따로 있었습니다. 문자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문명의 실체가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 정도의 대규모 집단 촌락을 운영할 정도면 상당히 발전된 문명이 있었음이 틀림 없습니다. 시기는 대체적으로 AD 1000 ~ 1300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북아메리카에는 푸에블로 문명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시시피강 동쪽으로 지도에는 Eastern Woodlands라고 표시된 이 지역에는 마운드 빌더(딱히 우리 나라말로 번역하기가 마땅치가 않네요, Mound Builders) 문화가 꽃을 피웠습니다. 미시시피 문화라고도 아는데 아주 거대한 구릉을 만드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마운드 빌더죠. 대체로 무덤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크기가 어마어마 합니다. 대표적인 유적인 카호키아를 보여드리죠.

카호키아의 Monk 's Mound로 여러 마운드 중에 가장 규모가 크다.

카호키아이 존재하는 여러 마운드 중 Monk 's Mound라 불리는 가장 거대한 규모의 구조물입니다. 높이가 30 m, 길이가 290m, 폭이 255m로 쿠푸왕의 피라미드 이런 거랑은 비교하지 못하겠지만 일반적인 규모의 이집트 피라미드 보다 크고 아즈텍에 있는 뒤에 얘기할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태양의 피라미드보다 큰 크기입니다. 사실 인류가 피라미드형 구조물을 만드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비교적 구조가 간단하며 대형구조물로써 튼튼하게 만드려면 피라미드형 구조가 제일 쉬워 많이 쓰이는 것일 뿐입니다. 카호키아에는 Monk 's Mound외에도 이런 류의 마운드가 여러 개 몰려 있습니다. 비단 카호키아 뿐만이 아니라 미시시피 동부 일대에는 이런 구조의 문화 유적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 문명은 AD 800 ~ 1500까지 번성했으며 유럽인이 도래하기 전에 이미 쇠퇴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 정도 건축물을 만드려면 많은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이 출현했던 것으로 보이나 기록이 없으니 알 길이 없습니다. 단 중요한 것은 푸에블로나 마운드 빌더나 고립된 문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서로 교류하기도 했으며 북쪽의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그리고 앞으로 살펴볼 남쪽의 메소 아메리카 지역과도 교류하기도 했습니다. 즉, 문명이라 혼자 고립되서 발전하는 것은 어렵다는 얘기겠지요. 

1500년 경 북아메리카 북동부 지역. 이로쿼이, 알곤킨, 이누이트 부족의 세력 범위

북아메리카 문명 중 마지막에 다뤄볼 이들은 이로쿼이 어족입니다. 이들은 단독 부족은 아니고 이로쿼이어를 쓰는 부족 집단인데 대표적으로 모호크, 세네카, 카유가, 오논다가, 오네이다 등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체로키도 있는데 일단 이 예를 든 다섯 부족이 훗날 이로쿼이 연맹을 결성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메리카 원주민 하면 흔히 하는 착각 중 하나가 자연과 어울려 살며 원래는 평화롭게 살았는데 유럽애들이 건너와서 그 착한 사람들이 무기를 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건 대표적인 오해 중 하나로 이들도 다른 문명과 다르게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 이로쿼이 연맹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로쿼이 연맹은 유럽인들이 도래하기 전에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연맹이 현성되기 전에는 이로쿼이 어족 안에서도 맹렬한 투쟁이 있었고 이로쿼이 연맹이 형성된 이후에는 주로 알곤킨이라고 불리는 캐나다 북동부 해안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과 투쟁을 이어나갔습니다. 즉, 이들도 사람이란 얘기죠. 왜 우리는 식민지배를 당한 민족에게 사실은 평화를 사랑했는데 어쩔 수 없이... 라는 이미지를 씌우는 지 모르겠습니다. 이들도 다른 인류 문명과 다르지 않게 투쟁하기도 하고 교류하기도 했습니다. 특별한 취급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아무튼 간에 이 이로쿼이 연맹은 프렌치-인디언 전쟁하고도 관련이 있으니 그때 더 자세히 다루고 이만 줄이겠습니다.

2. Maya Create City-States

이제 우리는 시선을 좀 더 아래로 내려서 메소 아메리카라고 불리는 지역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역사를 배웠다면 상당히 생소한 용어일텐데요. 지리적 개념으로 따지면 멕시코를 포함한 중미 지역을 메소 아메리카라고 하는데 라틴 아메리카와는 구별되는 이들만의 독특한 특징과 역사가 있습니다. 대체로 라틴 아메리카하면 멕시코까지 포함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이 지역에 발달된 마야나 아즈텍을 보면 페루나 칠레에서 성장하는 잉카 문명을 보면 그 발전양상이 달라 분리해서 파악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메소아메리카라고 불리는 지역

이 지역에 발달된 문화에 대해선 지난 2학기에 올멕을 비롯한 문화를 배워서 알겁니다. 그런 문화들의 영향을 받아 바로 마야인데요. 사실 우리가 마야, 아즈텍, 잉카를 동시대에 나온 문명처럼 취급하는데 이렇게 취급하면 마야가 상당히 섭섭할 겁니다. 사실 마야는 올멕 문명과 거의 동시대에 시작한 문명입니다. BC 1200경에 발굴되는 마야 문명의 유적이 있는 만큼 아즈텍과 잉카에 비해서는 매우 오래된 문명입니다. 고전 마야라고 불리는 문명이 AD 250 ~ 900년 경에 유카탄 반도에서 발전하게 됩니다. 마야는 단일한 국가 체제는 아니였습니다. 몇 개의 도시 국가가 느슨한 연합체를 유지하였는데 각 도시국가를 다스리는 군주가 있었으며 아마도 사제의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티칼, 체첸 이트사, 팔렌케와 같은 도시들이 마야를 대표했는데 이 도시들은 피라미드로 대표 되는 종교 사원을 중심으로 고도로 발달된 도시 문명을 발달시켰습니다. 

티칼의 모습

사실 피라미드 하면 이집트를 많이 떠올리지만 실제로 피라미드의 수는 이 메소아메리카 지역이 훨씬 많습니다. 아무튼 이런 건축물을 볼 때 복잡한 사회 체계를 유지했음은 분명합니다. 마야의 경우 다행스러운 것이 문자가 해독되어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주고 있습니다. 다만 마야문자는 여러 문자 중에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데 어떤 것은 표의문자고 어떤 것은 표음문자라 매우 헷갈립니다. 표의문자처럼 쓰는 것도 한글처럼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방식이 여러가지라 해독하는 학자들이 고생을 좀 했었죠. 우리가 해독할 것은 아니니 넘어가고 이 문자를 통해 알게 된 것은 마야는 매우 조직적이고 정밀한 행정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마야는 앞서 말한 것처럼 단일 국가는 아니였으나 여러 도시 국가의 연합으로 각 도시 국가는 정밀한 호구 조사 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통해 확고한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빽빽한 열대우림 지역에서 이 정도로 정교한 국가를 갖추었다는 것이 우리로선 상상하기 힘듭니다. 마야의 정교한 행정망을 뒷받침 해준 것은 농업입니다. 대체로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주식은 옥수수인데요. 이 옥수수야말로 메소아메리카 문명을 만든 핵심이었습니다. 

왼쪽이 옥수수의 원형인 테오신테, 오른쪽이 현대 옥수수(출처:http://www.seehint.com/hint.asp?md=156&no=13017)

보시면 원래 야생에서 옥수수는 인간이 먹을만한 것이 아닙니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이후로 끊임없이 식물 품종을 개량해온 것은 사실이나 이 정도로 식물 품종을 개량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무슨 이유에서 이런 코딱지 만한 식물을 오늘날 옥수수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이 옥수수가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인구를 지탱하게 됩니다. 옥수수는 단위면적당 생산량으로 따지면 쌀보다도 더 훌륭합니다. 게다가 매우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죠. 영화 인터스텔라도 보면 인류가 거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최후에 생산하는 식량이 바로 이 옥수수인 걸 보면 옥수수의 생존력을 인정할합니다. 다만 이렇게 수많은 장점이 있는 옥수수에게 치명적인 단점은 지력을 매우 극심하게 소모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그다지 마야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야가 발달한 지역은 열대우림 지역으로 원래는 농사를 짓기 적합한 땅이 아니지만 화전 농법을 통해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화전농법은 땅의 회복속도가 더뎌 오래 쓸 수 있는 방법은 아니지만 마야같은 열대우림 지역에서는 정말 빠른 속도로 다시 열대우림이 원상복구 되기 때문에 아주 적절했습니다. 

마야인들의 뼈와 살을 만든 것이 옥수수라면 마야인들의 정신을 만든 것은 바로 종교입니다. 마야는 굉장히 많은 종류의 신을 믿었습니다. 마야인들의 신화가 포폴 부(Popol Vuh)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다양한 신들이 나옵니다. 재밌는 것이 인간 탄생에 대한 이야기에는 처음에는 인간을 진흙 그 다음에는 나무로 만들었다가 최종적으로 옥수수로 만드는 것이 나옵니다. 이런 것을 볼때 역시 옥수수가 마야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남달랐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꽤 정교한 신화체계를 가지고 있는 마야 신화에 따르면 이 지구는 평평하고 각 귀퉁이는 동쪽은 빨간색, 서쪽은 검은색, 남쪽은 노란색, 북쪽은 흰색 그리고 중앙은 녹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면 동양의 전통적인 오방색하고도 어느 정도 닮은 모습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어 재밌습니다. (그런데 이거 보고 역시 한민족이 메소아메리카를 점령했다 환국 만세 하지는 마세요 -_-;)

정교한 마야 달력, 260일 짜리 촐킨(tzolkin)과 365일 짜리 하압(haab)이 합쳐져 돌아간다.

마야의 종교 생활과 땔래야 땔 수 없는 것이 바로 달력입니다. 마야는 두 가지 달력을 보유하고 있는데 하나는 제례력인 촐킨입니다. 이것은 주로 종교의례에 쓰이는 달력인데 20일이 한달로 구성되어 있고 총 13개달로 260일짜리 달력입니다. 또 하나인 하압은 태양력으로 일반적으로 쓰이던 것인데 이것 역시 20일이 한달로 18개 달로 구성되어 있고 18개 달에 속하지 않는 5일이 합쳐서 365일을 이룹니다. 이 두 개의 달력은 정교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365.2420 일을 1년으로 봅니다. 실제 365.2422일이 지구의 공전주기이고 현재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력이 365.2425일이니까 그레고리력보다 더 정교한 달력입니다. (하지만 그레고리력이 그래서 좋지 않냐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레고리력은 정확도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윤년 발생 횟수가 작으면서도 정교합니다. 실제로 음력하고 비교해보면 윤년 발생 횟수가 그레고리력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많아 날짜가 맨날 헷갈리죠.) 이 두 개의 달력인 촐킨과 하압은 52년 주기로 겹치게 됩니다. 마야인들에게서 52가 그래서 매우 중요한 숫자였습니다. 이것때문에 2012년에 지구가 멸망한다고 한바탕 난리를 친적이 있는데...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마야는 바퀴를 알았지만 수레를 쓰지 못했고 심지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고대인들인데 지구가 멸망할 것을 어떻게 예측했을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마야인들은 2012년이 끝인 달력을 만든게 아니고 그 주기를 끝으로 새로운 주기가 시작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오해는 금불입니다.

마야인들의 종교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적 중 하나가 달력말고 공놀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축구하고도 비슷한 면이 있는데 손을 사용하지 않고 발과 팔꿈치, 허리, 어깨를 이용하여 구멍을 공을 넣는 게임입니다. 그런데 단순한 게임하고는 달라요. 이것은 종교의식이었습니다. 학자들은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재연한 게임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이 게임의 승리한 팀의 선수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죠. 이것도 이견이 있습니다만 아무튼 이 게임이 결국 인신공양하고 연결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위에 보이는 동그란 구멍에 공을 집어 넣는 게임이 마야 볼게임이다. 

인신공양 풍습이 이뿐만이 아닙니다. 마야는 그들이 믿는 신에게 사람의 피와 같은 것들을 바쳐 그들을 만족시켜 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야의 도시인 체첸 이트사 거대한 우물이 있는데 이것을 세노테라고 불렀습니다. 이 세노테에 어린 여자나 동물을 바쳐 비를 기원했습니다. 마야의 농법은 언뜻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나 비가 안 오면 매우 취약한 농법입니다. 따라서 가뭄에 대한 기록이 마야 문명 곳곳에 남아 있으며 이에 대한 종교 의식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런 모습을 보고 단편적으로 마야 문명의 잔인성을 거론하기는 곤란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인신공양은 거의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풍습으로 멀리 갈것도 없이 우리나라도 삼국시대에 순장이 행해졌습니다. 메소아메리카 지역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인신공양에 대해 너무 초점을 맞춰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인신공양 풍습에 의미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나치게 이 지역만의 독특한 특징으로 비추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세노테의 모습

이렇게 마야 문명을 살펴봤는데 번성했던 고전 마야 문명은 갑작스럽게 900년경에 자취를 감춥니다. 이후 10세기말 무렵 톨텍 부족과 힘을 합쳐 신 마야 문명이 일어서긴 하는데 고전 마야 문명에 비해서는 그 성취 수준이 오히려 떨어집니다. 신 마야 문명은 15세기 말엽 이미 쇠퇴하였으며 유럽인들이 당도했을때는 이미 그 생명이 다해가는 시점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마야 문명이 멸망했는지를 두고 이때까지는 옥수수를 이용한 화전 농업의 지력 상실로 설명해왔으나 최근에는 화전 농업보다는 가뭄과 소빙하기 이론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뭐가 됐든 간에 확실한 증거가 없어 뭐가 맞다고 속단하기에는 이릅니다.

3. The Valley of Mexico

이제 눈을 돌려 유카탄 반도 위에 멕시코로 가보죠. 열대우림 지역이였던 유카탄 반도와는 다르게 멕시코는 고원지대였습니다. 여기서 테오티우아칸, 톨텍과 같은 문명들이 싹을 틔웠죠. 테오티우아칸의 경우 BC 200년경 부터 650년까지 번성한 문명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상을 초월하는 문명입니다. 도시가 가장 번영했던 6세기에는 인구가 2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당시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인구밀도입니다. 또한 매우 많은 피라미드가 조성되어 있는데 대표적으로 태양의 피라미드와 달 피라미드가 있습니다. 태양의 피라미드는 무려 높이가 74m입니다. 그 밖에도 수로, 신전, 대광장등 엄청난 건축물이 모여 있는 곳이고 심지어 대부분의 건축물은 기원전에 조성되었다고 하니 이 문명의 위대함을 짐작해볼 수 있겠습니다. 

테오티우아칸의 모습, 가장 큰 건축물이 태양의 피라미드이다.

이 도시는 750년경 갑자기 버려졌는데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멸망에도 불구하고 테오티우아칸은 메소아메리카 지역에 굉장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것은 바로 종교였습니다. 테오티우아칸 이후에 들어서는 톨텍, 아즈텍 문명들은 모두 테오티우아칸 신화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만약 테오티우아칸이 완전히 발굴되어 톨텍과 아즈텍 문명 사이의 연결고리가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면 아즈텍의 비밀도 많이 밝혀질 것이라 생각됩니다.

테오티우아칸 뒤를 이어 멕시코 고원의 패권을 차지했던 것은 톨텍입니다. 톨텍은 매우 강인한 전사들로 900년경 멕시코 고원의 지배자가 됩니다. 이들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테오티우아칸의 종교 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여 더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다 토필친 케찰코아틀이란 사람이 왕이 되면서 톨텍 사회 안에 변화의 움직임이 포착됩니다. 토필친은 인신 공양이 횡행하던 이 지역 문명을 개선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받드는 신인 케찰코아틀(자신이 섬기는 신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도 써서 이름이 같은 겁니다)을 주신으로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테스칼틀리포카를 모시는 다른 그룹이 이에 반발하여 토필친을 쫓아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토필친은 동쪽으로 가 후기 마야 문명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는 떠나면서 자신은 다시 돌아온다는 얘기를 남기기도 했는데 이 이야기가 아즈텍 제국과 연관이 있으니 기억해둡시다. 아무튼 1200년경에 토필친이 추방되고 그에 맞물려 톨텍 문명도 쇠락을 맞이하게 됩니다. 톨텍 문명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것은 바로 아즈텍이었습니다.

4. The Aztec Empire

톨텍이 몰락한 멕시코 고원은 대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강력한 힘을 가진 제국이 무너진 뒤 혼란상이 되는 것은 로마 때도 그랬고 중국에서 왕조가 교체될 때도 그랬으니 특이한 일은 아닙니다. 아무튼 이 때에 멕시카라고 불리는 유목민족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바로 아즈텍을 세우게 됩니다. 상당히 호전적인 민족이었던 이들을 눈여겨 본 쿨우아칸은 이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게 됩니다. 이후 쿨우아칸 세력권에서 벗어난 멕시카인들은 자신들만의 도시를 찾아나서게 됩니다. 전설에 따르면 아즈텍인들이 모시는 여러 신 중 태양신인 우이트실로포츠틀리가 독수리가 선인장에 앉아 열매(후에 이 열매는 뱀으로 자주 묘사됩니다. 선인장 열매는 인신공양 희생자의 심장을 의미합니다)를 먹고 있는 곳을 멕시카인들의 터전으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1325년 텍스코코 호수 한 가운데서 독수리가 선인장에 앉아 열매를 먹고 있는 모습을 본 멕시카인들은 신의 계시가 이루어진 곳이라 여겨 그곳에 테노치틀란이라고 부르는 그들의 도시를 건설하게 됩니다.

아즈텍 제국의 핵심인 삼각동맹, 네모 안에 텍스코코 호수를 중심으로 테노치틀란, 텍스코코, 틀라코판 세 도시가 보인다. 주황색이 아즈텍 제국의 영역이다.

테노치틀란이 성립될 당시에는 멕시카 부족은 전혀 멕시코 고원을 지배하는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멕시코 고원의 유력한 부족은 테파넥족이었으며 이들이 세운 아스카포트살코라는 도시 국가에 대체로 종속된 상태였습니다. 멕시카 부족이 세운 테노치틀란은 아스카포트살코의 동맹국의 일원으로서 그 밑에서 영향력을 쌓아가다 1428년 아스카포트살코의 통치자였던 막스틀라가 혼란한 통치를 이어가자 이웃 도시였던 텍스코코, 틀라코판(타쿠바)를 끌여들여 아스카포트살코를 멸망시키고 독립국이 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이 세 도시 국가는 이른바 삼각동맹이라는 것을 구축하게 되고 이것이 후에 아즈텍 제국이 됩니다.

삼각동맹을 중심으로 한 아즈텍 제국은 본격적인 팽창에 나섭니다. 그들은 스페인이 도착하기 1519년까지 멕시코 고원의 대부분을 점령했습니다. 물론 아즈텍을 제국으로 부르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는데 이 삼각동맹은 여러 도시 국가들을 자신의 종속국으로 만들고 공납을 착취할 뿐 직접적인 통치를 가하지는 않았습니다. 종속된 국가의 풍습은 인정되었으며 그 국가의 지도자들도 자리를 유지했습니다. 이것은 아즈텍만의 특이한 점은 아니었고 이 일대에 들어선 메소아메리카 국가들이 대체로 이러한 형태를 띄었습니다. 발달되지 못했던 교통망과 행정망으로 인하여 이렇게 지배하는 것이 그들의 최선이었을 겁니다. 아즈텍의 경우에는 복속된 도시 국가들 수가 어마어마해서 빨아들이는 공물의 양이 어마어마 했습니다. 이러한 공물로 인해 테노치틀란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어마어마한 시장이 들어서게 됩니다. 당시 테노치틀란의 인구가 20만에서 40만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는 16세기 다른 유럽 국가들의 도시 인구가 5만에서 10만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의 도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테노치틀란은 호수 위에 떠있는 도시로 그 당시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정교하고 복잡한 도시였다.

많은 사람이 도시에 집중되다보니 먹을 것을 해결하는 것이 테노치틀란의 주요한 과제였습니다. 이것을 해결해 준 것이 호수를 이용한 관개 농업입니다. 치남파라고 불리는 농사 기법은 호수 위에 농작물 재배지를 띄워 재배하는 방식으로 높은 생산력을 자랑했습니다. 따라서 20~40만인 인구도 거뜬하게 부양할 수가 있었죠. 실제로 테노치틀란이 빨아들이는 공물은 대체로 사치품이나 공예품이었고 식료품이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치남파를 이용한 식량 공급이 상당히 안정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즈텍 제국의 또 다른 특징은 종교입니다. 아즈텍인들은 톨텍인들의 신앙을 받아들여 한층 더 발전시켰는데요. 그들이 믿는 주요한 신인 우이트실로포츠틀리는 태양의 신으로 아즈텍인들은 밤에 우이트실로포츠틀리가 끊임없이 투쟁하여 아침해 해가 떠오른다고 믿고 있었고 이 아침에 해를 떠오르게 하려면 많은 양의 산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인신공야이 행해졌는데 이 아즈텍인들의 인신공양의 규모는 다른 메소아메리카 문명에 비해 거의 역대급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즈텍 사본에 나타난 아즈텍의 인신공양을 나타낸 그림

아즈텍의 인신공양은 거의 일년 내내 행해졌으며 이 인신공양을 감당하기 위해 주변 부족들로부터 포로를 공급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전쟁을 통해 상대방의 목숨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사로잡아 일단 포로로 만들고 인신공양의 희생물로 쓰려는 꽃전쟁의 형태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아즈텍 제국의 마지막 황제 목테수마 2세 때에는 이런 행위가 절정에 다다랐습니다. 위에 서술했다시피 테노치틀란의 인구는 다시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고 이를 지탱하기 위해 더 많은 희생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변 부족들의 불만이 높아져만 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 바로 스페인의 콘키스타도르들입니다. 이 뒤에 이야기는 개학 이후에 이어나가겠습니다.

4. The Inca Build an Empire

이제 눈을 더 남쪽으로 돌려 봅시다. 남아메리카(라틴 아메리카랑 헷갈리지 마세요!) 지역에 자리 잡은 잉카 제국을 살펴보겠습니다. 안데스 산맥 고원 지대에는 차빈(BC 900 BC ~ 200 BC), 모체(AD 100~700), 나스카(BC 100 ~ AD 800) 등 발달한 문명이 있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우아리(AD 500 ~ 900), 티아우아나코(AD 550 ~ 1000) 등의 문화가 꽃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치무(AD 900 – 1470) 문화가 예전 모체 문화가 들어선 자리에 들어서 잉카 제국이 들어서기 까지 번영을 누렸습니다. 이런 앞서 문화를 바탕으로 잉카가 발전한 것입니다. 척봐도 매우 생소한 문화가 많이 있죠? 우리의 경우 Ch 9에서 잘 배웠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잉카 보다 앞선 문명의 위치가 그려진 지도

잉카는 안데스 산맥 고원에서 13세기에 도시 국가로서 출발하게 됩니다. 잉카 제국의 황제는 태양신 인티의 후손으로 여겨졌는데 왕족으로 불리는 11개 씨족 중 한 사람이 선택되었습니다. 황제의 혈통은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체로 남매 간에 결혼을 했습니다. 뒤에 살펴볼 망코 잉카도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했습니다. 이거 보고 또 미개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근친상간은 꽤 오래전부터 인류에 나타나있던 풍습이니 이 정도는 그러려니하고 넘어가야합니다. 아무튼 잉카의 최초의 군주는 망코 카팍인데 1대인 망코 카팍부터 8대 군주까지는 솔직히 전설에 가까운 인물이고 잉카 제국의 판도도 기껏해야 수도인 쿠스코를 중심으로 한 도시 국가였습니다. 잉카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기록을 남기고 제국으로 확장되는 것은 9대인 파차쿠티(Pachacuti, 1438~1471)부터 입니다. 생각보다 연대가 오래되지 않아서 놀라셨죠? 우리가 이 지역 문명에 대해 생소하다보니 종종 이런 착각을 하는데 아즈텍도 그렇고 잉카도 그렇고 오래 존속되지 않고 짧게 존속하다가 망한 나라들입니다. 그러면 잉카가 확보한 판도를 보겠습니다.

잉카 제국의 판도

잉카는 수레를 쓸 수 없었던 문명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넓은 영역을 다스렸습니다. 잉카 사람들은 자신들의 왕국을 4방위 제국이라고 불렀는데 동서남북으로 뻗어있는 세상에서 자신들이 사는 쿠스코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쿠스코를 중심으로 동쪽은 안티수유, 서쪽은 쿤티수유, 남쪽은 코야수유, 북쪽은 친차이수유라고 불렀죠. 잉카 제국의 영역은 철을 사용할 줄 모른다는 점을 감안할 때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다만 잉카의 지배 방식 역시 아즈텍 제국과 거의 유사했습니다. 수도인 쿠스코 주변만을 확실하게 통치하고 나머지 주변부는 대체로 공물을 받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수레나 철을 사용할 수 없었던 문명에서 취할 수 있었던 최선의 확장 방식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아즈텍과는 차이나는 점이 있었는데 잉카는 최소한 하나의 제국으로 만들기 위한 필요한 조처를 취했습니다.

잉카는 자신들의 언어인 케추아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정복한 지역의 지배 계층의 아들을 쿠스코로 불러 올려 잉카식으로 교육 시켰습니다. 또한 잉카 전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도로를 만들었는데 놀랍게도 오늘날도 사용될 정도라고 합니다. 길이는 총 5229km 달할 정도로 엄청난 길이었습니다. 말도 없고 수레도 없었기 때문에 이 도로는 사람만 다니는 길이였는데 일반적인 평민들은 갈 수 없고 귀족들이나 특별한 임무를 띄고 소식을 전하는 차스키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말을 대신하여 잉카의 길을 달려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현재도 남아 있는 잉카 제국의 길
차스키의 모습

이런 도로망은 제국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겁니다. 하지만 언어와 도로망만 갖추었다고 해서 모든 지역이 통일성을 갖는 것은 아니죠. 잉카는 독특한 부역 체계를 통해 지역의 통일성을 유지했습니다. 잉카는 기본적으로 아이유(Ayllu, IU아님 죄송)라는 혈족 단위를 중심으로 사회를 구성했습니다. 아이유는 10단위(10000, 5000, 1000, 500, 100, 50 및 10)에 따라 구성되었으며 각 아이유 마다 대표자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가족 대표는 푸릭 10가정은 충카를 구성하여 충카 카마욕이라 불렀고 100가정은 파차카를 구성하여 파차카 카마욕 1000가정은 우아랑가를 구성하여 우이랑가 카마욕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88개의 주에 파견된 행정관이 있었고 이 행정관은 위에 얘기했던 4방위를 관리하던 귀족이 있었습니다. 중앙집권적 행정 제도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상당히 짜임새 있는 행정망을 가진 것을 알 수가 있죠. 이런 감시 체제 하에 잉카에게 반란을 꿈꾼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고 반란이 일어난다면 조속히 진압이 가능했습니다.

이 아이유와 함께 같이 부여 되던 세금이 바로 미타(mita)입니다. 잉카는 아즈텍이나 마야와는 다르게 상업을 권장하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생산과 유통 과정을 모두 국가가 통제하는 시스템이었는데요. 이들이 피지배층에게 부여한 세금이 일종의 강제 노동인 미타입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농한기 때는 이 강제 노동인 미타를 이행해야 했습니다. 미타를 하면 대신 먹을 거리를 제공해주기도 했습니다. 잉카 같은 경우 일찍부터 감자를 썩지 않고 오래 보존하는 방법과 보존식 음식은 츄노를 개발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가능했습니다. 음식 저장한 게 뭐 대단하거라고 하실 수 있는데 대단한겁니다. 음식은 곧 군량으로 연결되며 군량을 비축해 나른다는 것은 대규모의 원정을 감행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마야는 엉성한 도시 문명의 연합으로 끝났지만 잉카가 제국을 이룬 것은 이 음식의 지분이 적진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런 잉카에게도 아쉬운 점이 있는데 마야와는 다르게 문자가 전하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잉카의 영역을 생각해본다면 문자 없이 어떻게 거대한 영역을 통치했을까 의문이 남는데 그것을 보완해주는 것이 키푸라는 것입니다.

키푸의 모습

키푸는 줄을 묶은 매듭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인데 매듭을 길게 묶거나 짧게 묶어 정보를 다르게 하고 줄의 색깔을 달리하여 다양하게 정보를 저장했습니다. 공물의 숫자를 저장하거나 군대를 동원하는 등의 행정적인 정보를 간단하게 기록했는데 아무래도 역사 기록을 남기는 것과는 좀 거리가 멀어서 잉카 제국의 역사적 실체를 접근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정복자의 시선인 스페인 입장에서 남긴 것이기 때문에 적절한 사료 비판과 고고학적 증거에 기대 잉카 제국의 모습을 추측해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종교 얘기로 가보겠습니다. 잉카와 황제는 태양신 인티의 후손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그러다보니 잉카에서는 태양신을 굉장히 중요하게 모셨습니다. 이 태양의 신을 받을어 모시는 사람을 선발했는데 결혼하지 않은 처녀 만을 선발했고 이들을 마마쿠나라 불렀습니다. 태양의 처녀로 알려진젊은 여성들의 종교 의식을 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교사, 직조공, 맥주 제조사로서 활동했습니다. 또한 남자들도 선발했는데 야마쿠나로 알려진 젊은이들은 또한 국가와 종교 활동에 봉사했습니다. 그렇다고 태양신만 받들어 모시지 않았습니다. 잉카나 아즈텍, 마야 문명은 기본적으로 다신교로 여러 신을 모셨고 잉카는 태양신 인티 뿐만 아니라 창조신인 비라코차를 섬겼습니다. 뿐만아니라 우아카라는 독특한 종교 관념이 있었습니다. 우아카는 태양의 신전 안에 자리를 잡지 못했을 뿐 이 세상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는데 그들이 살고 있는 장소 또는 그 신의 상징을 의미했다. 예를 들어 보통의 인간을 일반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초인적인 힘이나 그런 초인적인 힘을 가진 사람을 우아카라고 불렀습니다.

공중 도시, 마추픽추

이제 마지막으로 잉카 제국의 도시인 마추픽추를 볼건데요. 예전에는 마추픽추를 잉카 제국의 마지막 도시인 빌카밤바(Vilcabamba)와 헷갈렸고 제가 예전에 배울 때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마추픽추는 잉카 제국보다 더 먼저 성립된 건물이 있기도 하고 해서 잉카 최후의 도시라는 타이틀은 사라졌습니다. 애초에 왜 이 도시가 세워지고 버려졌는 지는 역사의 미스테리입니다. 다만 여전히 이렇게 높은 지대에 세워진 도시 임에도 불구하고 관개시설, 건축술, 보관기술 등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곳 입니다. 이로써 잉카제국에 대한 설명은 얼추 끝이 났군요. 개학 이후에는 어떻게 잉카가 멸망하는 지를 저와 같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Special Question

- 북아메리카 문명에서 마야, 아즈텍, 잉카와 같은 국가가 출현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 인신공양 풍습은 메소 아메리카와 잉카 제국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이 지역에서 인신 공양을 계속해서 고집한 이유는 무엇일까?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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