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1) 청과 일본, 근대 개혁 운동을 전개하다
1-3 일본, 부국강병과 대외 팽창을 도모하다 


흑선(黑船:검을 흑, 배 선), 일본을 깨우다

일본의 개화 과정의 대해서 알아봅시다. 일본은 인공섬 데지마에서 교역하던 네덜란드를 통해서 유럽 열강들의 소식을 듣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을 뿐. 서양 열강에 대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답답했던지 네덜란드 국왕 빌럼 2세는 아편전쟁의 경과를 일본 측에게 전하고 개국을 권유하기도 했습니다만 에도 막부는 가뿐하게 씹어주셨습니다 -_-

 <네덜란드 국왕 빌렘 2세, 신경 좀 써주려다가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_-;>

일본은 중국과 자신들은 다르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일단 섬나라니까 안심했던 측면도 없지 않아 있지요. 하지만 불안은 서서히 다가왔고 확실히 현실이 되었습니다. 일본 앞바다에 4척의 검은 배가 출현한 것입니다.

 <에도만에 상륙하는 페리제독의 쿠로후네(흑선)>

http://blog.naver.com/philosophy78?Redirect=Log&logNo=130054628419&jumpingVid=4D1509A929A6713F241077E9C9BFDF19CC52(쿠로후네의 모습을 그린 일본 사극)

일본에 열강들의 증기선이 나타났던 건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일반 사람들이 많이 사는 에도(도쿄) 앞바다에 증기선이 나타났던 것은 처음이라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당시 이 흑선을 이끌었던 페리제독은 일본에 개국과 통상을 요구했습니다. 막부는 1년 간의 시간을 달라 요구했고 미국은 알겠다면서 1년의 유예기간을 주고 철수합니다. 1년의 시간을 얻으면 뭔가 대책을 강구해야 할텐데 설마 진짜 다시 오겠어? 라는 생각이 막부를 지배했습니다. 여러분이랑 비슷하죠? ^^;; 하지만 미국은 약속을 칼같이 지켜 1년뒤인 1854년 7척의 흑선을 거느리고 에도 앞바다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막부는 흑선에 위용에 겁을 집어먹고 결국 불평등조약인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드디어 일본이 개국한 것입니다.

처음 미국의 관계에서 불평등 조약을 맺었던 일본은 이후 다른 나라들과도 불평등 조약을 맺었습니다. 최혜국 대우와 치외법권 등 안 좋은 조건은 다 붙었죠. 이런 조약 아래서 다른 열강들과 장사를 하니 제대로 될리가 있겠습니까? 무역은 만년 적자에 물가능 폭등했습니다. 모든 비난의 화살은 막부에 퍼부어졌으며 일반 백성들의 열강들에 대한 적개심이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왕을 높이고 서양 오랑캐를 몰아내자!

이때 이런 분위기를 이용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존왕양이파입니다. 말이 좀 어렵지요? 이제부터 선생님과 함께 존왕양이가 무슨 뜻인지 알아봅시다.

<메이지 천황, 메이지 천황 이전까지 일본 천황에게 실권은 없었다>

존왕이라는 것은 왕을 존중한다는 것, 즉 일본의 최고 통치자인 천황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아니 근데 최고 통치자인 천황을 뭐하러 더 높인다는 겁니까? 그 이유는 천황이 실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1185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이후부터 무사들이 막부에 모여서 정치를 하던 나라였습니다. 즉, 실권은 천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사들의 집단인 막부에 있었습니다. 막부의 최고 권력자인 쇼군이 사실상 일본 전체를 통치하고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천황은 그냥 일개 허수아비였지요.

존왕양이파들은 막부가 잘못된 정치를 했기 때문에 일본 상황이 힘들다고 판단하여 실권을 다시 천황에게 돌려주자는 운동을 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존왕입니다. 

그렇다면 양이는 무엇일까요? 양이는 더 쉽지요. 서양 오랑캐라는 뜻으로 서구 열강을 배척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양이는 생각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지 한번 볼까요?

<존왕양이파의 대표였던 조슈와 사쓰마의 위치>

당시 존왕양이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곳이 바로 조슈번과 사쓰마번이였습니다. 이 번이라는 것은 지방 영주를 뜻하는 것으로 조그만 나라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좋아요. 조슈와 사쓰마는 상대적으로 에도(도쿄)에서 먼 거리에 있어서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힘을 키웠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강력하게 양이를 추진하여 서구 열강들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때 가볍게 서구 열강들에게 발렸습니다-_-; 힘의 차이를 느낀 조슈와 사쓰마는 양이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서양의 기술을 배우는 것으로 선회했습니다. 

막부를 토벌하고 왕정이 복고되다

자, 그렇다면 존왕과 양이 중에 존왕만 남았네요? 그렇다면 존왕을 하게 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할까요? 천황에게 실권을 주면 간단하죠? 하지만 실권은 막부가 가지고 있지요. 그렇다면 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막부를 토벌하자! 도막파는 이렇게 결성됩니다.

<바람의 검심에 토막파의 암살자로 묘사되는 켄신>

토막파들은 결국 막부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그들이 원하던 존왕을 성공시킵니다. 드디어 막부가 무너지고 명실공히 일본의 최고 실질적 통치자는 천황이 됩니다. 

<교토에 있던 메이지 천황이 에도로 향하면서 왕정복고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http://club.cyworld.com/ClubV1/Home.cy/52945471(대정봉환)
http://blog.naver.com/philosophy78?Redirect=Log&logNo=130054628484&jumpingVid=D3B8E05174B9246F0780D3B32D2F617EC61B(천황의 나라, 일본)

하지만 천황이 실질적 통치자가 되었을까요? 잉? 아니죠. 천황이 왕정복고에서 어떤 역할을 했나요? 아무것도 없죠. 실질적인 역할을 토막파가 모두 맡아서 했으며 이 토막파들은 천황을 전면에 앞세우고 실질적은 정치는 자신들이 행하게 됩니다. 이러나 저러나 천황은 실권이 없게되네요. 

메이지 유신

아무튼 토막파는 천황을 중심으로 내세우면서 대규모 개혁을 단행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입니다. 메이지 유신은 서양을 따라잡겠다는 일념하에 시행되었던 개혁으로 주로 식산흥업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식산흥업이란 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서양의 산업화를 따라잡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더불어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여 이때까지 자신의 지역에서 왕처럼 행세하던 지방 영주들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아 중앙으로 일원화 시킵니다.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일본의 급진 사무라이들>

또한 서양이 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한 것을 따라잡기 위해 신분제 철폐를 단행하고 백성에게 국민 교육과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부과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서양을 급히 따라잡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실질적으로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도입했다고 생각한다면 곤란합니다. 

이외에도 외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이와쿠라 사절단을 파견합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불평등조약의 개정이라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으나 서양문물을 2년 동안 충분히 체험하여 일본의 근대화를 이끄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와 대외팽창, 기묘한 동거관계

우리는 민주주의 하면 보통 평화적인 것으로 알고있지요? 하지만 메이지 유신 시기에 일본의 민주주의는 그다지 평화적이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시기 일본은 서양 나라들과 불평등한 조약 때문에 대외무역에서 큰 적자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 밖으로 뻣어나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그 나라의 재물을 빼앗고자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 훗카이도가 일본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지금의 오키나와였던 류큐 왕국이 일본에 병합됩니다. 또한 타이완을 침략하기도 하는 등 대외 팽창에 온 힘을 모두 기울였지요.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이 대두한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 그의 주장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이여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재밌는 것은 대외팽창을 꾀하던 시기 일본은 민주주의 기본이 틀이 잡혔다는 것입니다. 헌법이 만들어지고 의회가 만들어졌는데 그렇다면 왜 일본은 대외팽창과 민주주의 동시 발전이라는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일본의 민주주의는 어디까지나 서구의 제도 겉모습을 흉내냈다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서구를 빨리 따라잡기 위해 서구 제도를 가져오긴 했지만 그것이 서구의 민주주의처럼 원활하게 운영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형적으로 천황 1인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명령 체계를 더 일사분란하게 하는 데 그 의미가 있었습니다.

천황에게 집중된 권력 좋기만 한걸까?

일본은 대일본 제국 헌법을 만들면서 모든 권력을 천황에게 집중했는데 과연 이것이 천황에게 좋기만 했을까요? 헌법을 만들 당시 왜 천황에게 권력을 집중시켰는지 생각해보고 이를 통해 토막파들이 얻으려고 했던 점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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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1) 청과 일본, 근대 개혁 운동을 전개하다
1-1 서양 세력, 동아시아에 다가오다
1-2 청, 내우외환 속에서 개혁을 시도하다 


포함외교, 감히 누가 누굴 야만이라고 하는가?

여러분들 유럽에 대표적인 나라 중에 영국이 있지요? 영국 하면 신사의 나라로 알고있는데 지금 우리가 배우는 시기 서양 세력은 과연 신사적이기만 했을까요? 

<서구 열강들이 주로 썼던 방식은 포함외교, 대포로 무장한 배를 다른 나라 앞바다에 들이밀고 장사를 요구한다>
 
얘들은 신사적이기는 커녕 상당히 불량배스러운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군함은 물론이고 상선도 대포로 무장시킨 다음 다른 나라 앞바다에 나타나 무장한 배로 상대방을 협박하고 장사를 요구했습니다. 이를 포함외교라고도 합니다. 이런 포함외교를 펼치면서 이들은 아시아에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이들은 교역하던 물품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_-(신사랑 거리가 점점 멀어지죠?), 또 아메리카 대륙에서 삥 뜯어온 은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아시아로부터는 도자기, 비단, 향료 등을 수입했습니다.

중국, 갑부가 되다

유럽 아이들이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을 착취하면서 돈을 좀 만졌지만 실제로 그 돈은 전부 중국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특히 중국산 비단, 도자기, 차 등은 유럽 대륙에서 엄청난 인기였으므로 유럽 국가들은 중국과 무역에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고도 이들 물품을 수입했습니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돈 없어서 중국 물건을 못샀는데 지금은 돈 좀 버니까 그걸 막 사들인 거죠.

<유럽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은은 대부분 중국으로 빨려들어간다>

당시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청은 이런 유럽인들의 무역을 허용했는데 오직 광저우를 통해서 무역하도록 했습니다. 이때 무역 형태는 공행무역으로 청나라 정부로부터 서양인과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가 받은 상인인 공행을 통해서만 무역할수있도록 했습니다.  이런 제한적 무역형태는 유럽인들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었고 유럽은 일방적으로 손해만 보는 형태였습니다만 청의 경우 유럽과의 무역을 조공의 한 형태로 생각했고 유럽의 제품도 전혀 필요없었기 때문에 이런 무역형태는 아편전쟁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서양과 통교한 나라, 일본

일본은 해양 국가로 일찍부터 서양과 통교했습니다. 특히 네덜란드와는 깊은 관계를 가졌습니다. 일본은 전국시대 이미 포르투갈 및 에스파냐와 접촉해서 크리스트교를 받으들이고 유럽의 총과 화약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때 들어온 포르투갈 총을 개량한게 임진왜란 때 쓰인 무기 조총입니다.

 <임진왜란 때 쓰인 무기 조총은 포르투갈 총을 개량한 것이다>

전국 시대가 끝나고 에도 막부가 들어서자 서양 나라에 대한 통상을 거부하고 크리스트교를 금지했습니다. 다만 네덜란드 만은 계속 교역을 했습니다. 네덜란드와의 교역은 인공섬인 데지마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일본은 데지마를 통해 서양 소식을 계속 접하면서 서양 학문을 연구하는 학풍도 생겨났는데 이것을 난학이라고 합니다. 

아편전쟁, 열강 제국주의 얼굴을 중국에 들이밀다

이전까지 중국과 나름대로  평화적인 무역을 하던 영국은 청과의 무역 손해가 점점 심해졌습니다. 이 손해를 메꿀 방법을 곰곰히 생각을 해보다가 생각난 것이 바로 아편입니다.

 <19세기말 삼각 무역의 형태>

영국은 막대한 무역 적자를 메꾸기 위해 당시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인도를 끌어들였습니다. 영국은 중국에 안 팔리는 면직물을 인도에 팔고 인도에서 아편을 생산해서 청에게 팔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청은 아편 무역으로 인해 막대한 은을 영국에 지불하게 되고 영국은 이로써 청과의 무역 손해를 메꿀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 국민은 아편에 중독되어 갔습니다. 청나라 정부는 아편의 심각성을 느끼고 임칙서를 광저우에 파견하여 불법 아편 무역을 모두 적발하고 아편을 모두 파기했습니다.

영국은 이것을 핑계삼아 중국을 공격했는데 이것이 바로 제 1차 아편전쟁입니다. 청나라는 영국 군에 화력에 밀려 아편전쟁에서 크게 패했습니다. 영국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달은 청은 강화조약을 체결하는데 그것이 난징조약입니다. 이것은 청나라 최초의 근대조약이자 불평등조약입니다. 상하이를 비롯한 5개 항구가 개항되고 파기한 아편의 손해 배상으로 은 600만냥을 지불했으며 홍콩을 영국에게 넘겨주었습니다.

http://cafe.naver.com/killhistory.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880&(아편전쟁)

또한 이듬해 다시 조약이 개정되면서 더욱 더 불평등한 조약이 맺어지는데 이 조약에는 영국의 영사가 자국민 재판을 본국의 법으로 하는 치외법권이 포함되어 있으며 외국과 어떤 조약을 체결할 때 가장 유리한 대우의 조약을 상대국에도 부여하는 최혜국 조약까지 삽입되면서 청나라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과 일본에게도 알려지며 동아시아에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나다

청나라가 비참하게 패배한 후 청나라 사정은 날로 악화되었습니다. 전쟁 배상금을 갚느라 백성들의 생활은 곤궁해졌습니다. 나라의 상황이 안 좋으면 안 좋을수록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기 마련! 청나라 크리스트교 사상에 영향을 받고 부패한 만주족 국가 청나라를 타도하자는 움직임의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태평천국 운동은 토지를 고르게 분배하고 남녀가 평등한 사회 건설을 주장했습니다. 이런 사상은 백성들의 지지를 크게 받았고 날로 세력이 확장되었습니다. 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요? 이렇게 나라가 혼란한 와중에 무역 개방의 확대를 요구하며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전쟁은 애로호 사건을 기점으로 일어났는데 애로호 사건이란 청의 관리가 영국의 배에 올라 이 배의 승무원들을 해적 행위를 한 혐의로 연행하고 영국 국기를 내린 사건입니다. 영국에서는 이를 영국 국기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여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제2차 아편저쟁도 가뿐하게 발려주신(-_-;) 청나라는 톈진 조약과 베이징 조약을 통해 더 안습적인 상황으로 빠집니다. 더 많은 항구가 개항되고 크리스트교 포교와 아편 무역도 공인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러시아는 베이징 조약을 중재했다는 이유로 청의 연해주를 그냥 먹어버리는 상황까지 발생합니다.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는 꿈에 그리던 얼지 않은 항구를 획득한다>

열강들은 청나라를 굴복시키자 태평천국운동이 거슬리기 시작합니다. 태평천국운동은 멸만흥한(만주족 청을 멸망시키고 한나라 국가를 다시 세운다)이라는 구호를 내세우기도 했지만 반외세적 성향을 강하게 보였습니다. 따라서 열강들은 이 운동을 진압해야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 지배층도 이들의 평등 사상을 용납하지 못해 같이 진압에 나서면서 태평천국운동은 진압되었습니다. 

중국의 몸으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

서양에게 크게 패하자 중국 내부에서 변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태평천국 운동의 진압과정에서 서양 무기의 우수성을 실감했던 사람들은 중국의 몸으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원칙(중체서용) 아래 양무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양무운동은 주로 서양의 기술 중 무기 기술에 관심이 있었다>

양무운동은 주로 서양의 기술 중 무기 기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서양의 과학기술이 보급되어 무기는 물론 교통과 통신 수단이 정비되었습니다. 하지만 중체서용이라는 것 자체가 한계가 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중국의 정신을 지킨다는 점에서 제도상의 변화는 꾀할 수 없었고 또 문명이라는 것을 정신과 기술로 무자드르듯이 나누기가 어려웠죠. 기술이 들어오면 정신도 들어오기 마련이니까요. 어쩄든 이와 같은 점 때문에 양무운동은 실패로 끝났는데 양무운동이 실패로 끝났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청프전쟁과 청일전쟁의 패배입니다. 이에 청의 낡은 제도를 개혁하자는 변법자강론이 등장했습니다. 

영국은 왜 청나라에 아편을 팔았는가?

오늘 아편전쟁에 대해서 공부했는데요. 아편은 마약류로 무역 상품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곤란한 것입니다. 그럼 왜 영국은 이처럼 무역상품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아편을 청에게 팔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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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4) 흥선대원군, 10년 권세를 쥐다
4-2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실시하다 


외국과 마찰이 일어나다

조선 후기, 서양 열강들이 서서히 조선에 접근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안 좋은 의도로 말이죠 ^^; 자신들의 상품을 팔 시장 확대 측면도 있었고 자신들이 믿는 종교를 포교한다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열강들과 조선이 접촉하면서 곳곳에서 마찰이 일어납니다. 대표적으로 천주교 박해사건이 있습니다. 

<병인박해때 많은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 선교사가 죽은 절두산>

1860년, 러시아가 청으로부터 연해주를 획득하고 조선에 국경을 맞대면서 러시아는 조선에 무역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흥선대원군은 국내에 들어와있던 프랑스 선교사 세력을 이용하여 러시아를 막으려고 했으나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습니다. 국내에서 천주교를 금지 시켜야 한다는 여론도 거세지자 흥선대원군은 대대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병인박해(1866)입니다.

외국과의 마찰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병인 박해가 일어나던 해에 미국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과 무역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나타났는데 이들은 약탈 행위를 자행하고 사람을 죽이는 행위까지 하자 평안 감사였던 박규수의 명으로 제너럴 셔먼호는 파괴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상선이던 제너럴 셔먼호>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조선에 들어와 무역을 요구했으나 모두 거절 당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오페르트는 미국인 자본가와 프랑스 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덕산군 관아를 습격하고 밤늦게 흥선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이에 격노한 흥선 대원군은 서양 세력에 더 강경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서양 세력이 침공하다

프랑스는 병인박해에 대한 책임을 조선에 물어 1866년에 침공했습니다. 총 두차례 걸쳐 침입한 프랑스 군은 1차 침입 때는 강화도 침략을 위해 이 근처 지리를 작성하고 해도만을 작성했습니다. 2차 침입에서는 본격적으로 강화도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들은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 조선군에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로부터 프랑스군은 한달 동안이나 강화도를 점령하였습니다.

<프랑스 함대의 1, 2차 침입로>

양헌수는 프랑스의 막대한 화력을 인지하고 정면 공격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심야에 군을 움직여 정족산성을 점령하였습니다. 프랑스 군은 이를 알아차리고 정족산성을 공격했지만 조선군을 이기지 못하고 후퇴했습니다. 이 싸움으로 인해 프랑스 군대는 충분히 조선에 복수를 했다고 판단 군을 철수시켰습니다. 그들은 후퇴하면서 외규장각 도서와 은괴 등을 약탈했습니다. 썩을 놈들이죠? -_-

하지만 세상은 넓고 썩은 놈들은 많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열강 세력이 침입을 감행하는데 그들은 바로 미국입니다.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핑계로 신미년에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며 쳐들어왔습니다. 이것이 신미양요입니다. 미국은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강화도를 공격했습니다. 이때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이 격렬하게 항전했지만 어재연 장군이 죽는 등 미국에 크게 패했습니다.

 <미군에게 빼앗긴 어재연 장군의 수(帥:장수 수)자 깃발>

 큰 승리를 거두고 미군은 이제 곧 자신들이 요구하는 통상을 조선이 곧 수용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왠걸 우리의 흥선대원군은 똥고집 쟁이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장기전에 대비하며 서양 오랑캐랑 상종을 하지 않겠다고 천명했습니다. 미군은 자신들의 예상이 빗나가자 적잖이 당황했으며 여러 가지 사정이 겹치자 결국 철수하고 맙니다. 흥선대원군은 신미양요를 승리한 전쟁으로 인식하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움으로써 서양 세력과 통상하지 않겠다는 뜻을 천명했습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했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는 내용의 척화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승리한 전쟁인가?

과거 우리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서구에 맞서서 승리한 전쟁으로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파견된 서양 군대의 규모나 전투의 면면을 들여다 보면 조선의 힘이 강해서 승리한 전쟁이라고 보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자유롭게 얘기해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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