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1) 동아시아 삼국의 역사적 갈림길
1-2 위기의 청, 반외세 개혁 운동을 펼치다 


중체서용, 한계에 부딪히다

여러분 청나라가 중체서용 정신에 입각해서 양무운동을 시행했다는 걸 알고 계시죠? 이 양무운동이 결국 실패를 하고 맙니다. 왜냐구요? 바로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게 너무도 극명하게 패했기 때문이죠. 조그만 일본에게 패하자 청나라는 이때까지 개혁에 부족한 점은 무엇이었는지 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했고 결국 그 답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서양의 무기와 기술 뿐 아니라 사상과 제도를 받아들일 필요성이었습니다. 캉유웨이, 량 치차오 등 젊은 관료들은 이런 필요성을 인식하여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개혁하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참고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자는 운동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변법자강운동입니다.

http://blog.naver.com/hjj204?Redirect=Log&logNo=120123958692&jumpingVid=DB34909A8CE9029A2EB25CAA732847BA922E(1분부터, 변법자강운동)

캉유웨이는 중국은 무너진 집, 난파된 배라 표현하고 중국인을 새장 속의 새, 가마솥에 갇힌 물고리라 표현하여 통렬한 자기 비판을 가했습니다. 그는 이런 비판과 더불어 이런 중국의 상황을 구하기 위해 과거제 폐지, 근대적 기업과 학교를 설립하는 등 서양 사상과 제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개혁이 시작되면 원래 기득권은 가만 있지 않죠. 보수적 기득권이 일어났으니 그들은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었습니다.

 


<청을 망친 장본인 중에 한 명인 서태후, 화려한 치장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원래 서태후는 당시 황제였던 광서제가 어리 다는 핑계로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서 인지 수렴첨정을 거두고 광서제에게 직접 정치를 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태후의 권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죠. 서태후는 개혁을 하려는 신진 관료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보더니 결국 칼을 빼들었습니다. 무술정변을 일으켜 개혁파 세력을 모조리 검거했습니다. 개혁파 일부는 죽고 일부는 망명을 떠난 것을 끝으로 청을 살리고자 했던 마지막 개혁의 불씨가 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서태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1076 네이버 캐스트로 가보세요 ^^)

의화단 운동과 열강의 침탈 가속화

변법자강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열강의 중국 침략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중국 민중들은 외국인을 거의 혐오하는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런 민중의 민심이 반영이 되어 의화단이라는 단체가 생겨났는데 이들은 서양 열강이 가지고 들어온 크리스트교를 배격하고 손오공이나 저팔계 따위를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의화단 운동의 세력 범위>

애초에 의화단은 청나라에 우호적인 입장은 아니었으나 서태후가 이들을 잘 구슬려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습니다. 서태후는 이들을 이용하여 열강의 침략에 맞서려고 했습니다. 의화단은 청에 지원을 엎고 부청멸양(청나라를 부흥시키고 서양세력을 멸망시키자)이라는 구호를 앞세워 베이징을 점령했습니다. 이들이 서양 선교사를 비롯하여 크리스트교 신자를 잡아넣자 8개 열강들이이 연합하여 베이징으로 진격했습니다.

 <의화단 운동으로 인해 8개 열강들이 연합해 청나라를 공격했다>

결국 열강을 막아낼 힘이 없었던 청나라는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의화단 운동은 진압되었고 청나라는 열강들과 굴욕적인 신축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열강의 군대가 베이징에 주둔했으며 청나라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배상금을 매겼습니다. 의화단 운동의 진압을 끝으로 청나라는 더 이상 회생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반쪽 자리 혁명

의화단 운동이 실패한 후에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 세력들은 개혁을 선언했으나 진정성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 한편으로 청 정부는 외국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민간 철도를 국유화하여 그 철도를 담보로 외국에 차관을 얻고자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청조의 멸망으 더 앞당겼습니다. 각지에서 철도 국유화 반대 운동이 일어났고 이때 청조를 타도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던 쑨원의 동료들과 그 사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우창에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해혁명입니다.

 <쑨 원, 정치적 야망보다 중국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혁명은 들불처럼 번져 남부 중국을 대다수 장악하기에 이릅니다. 이때 쑨 원이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고 공화제 국가를 선언하니 이것이 바로 중국 최초의 공화정 국가 중화민국입니다. 그러나 아직 청조는 멸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북양군이 북쪽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과 대결하면 혁명이 성공할 수 없을 것을 직감한 쑨 원은 자신의 권력보다 중국을 걱정해 통크게 자신의 임시대총통직을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해주고 임시헌법을 준수활 것을 당부했습니다. 위안스카이 역시 이 제의를 받아들여 결국 청조가 멸망하기에 이르고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대로 끝났다면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을텐데 배신의 흑역사가 다시 시작됩니다-_-;

 <배신의 흑역사는 계속된다! ㅋㅋ 위안스카이는 쑨 원과의 약속을 가뿐히 개무시한다>

중화민국이 들어서자 임시헌법에 따라 선거를 하고 대의원을 선출했는데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공화당은 크게 패하고 고 쑹 자오런이 이끄는 국민당이 압승하자 위안스카이는 쑹 자오런을 암살-_-하고 임시헌법을 준수하겠다는 쑨 원과의 약속을 개무시합니다. 한술 더떠서 위안스카이는 황제가 되려고 까지 했는데 그의 부하들도 이건 오바라고 생각했는지 그에게 등을 돌립니다. 결국 위안 스카이는 쓸쓸히 죽음을 맞게 되는데 이렇게 되자 중국을 통치하는 권력 부재 상태가 오게 되고 중국은 군인들이 힘을 키워 지방 각지에서 난립하는 군벌의 시대로 진입하게 됩니다.

V 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2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다
2-1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는 농민들 


썩을 세상 못살겠다!

자, 그렇다면 동아시아 주변 나라들의 상태를 살펴보았으니 조선 내부의 상황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이후에 청나라가 계속 조선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죠? 거기다 일본까지 우리나라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청, 일 양국 상인들은 영국산 면제품을 마구 팔아 우리나라 소상공인들은 거의 몰락하게 됩니다. 게다가 일본에 막대한 양의 쌀이 수출되면서 농민들의 상황은 점점 안 좋아집니다. 나라가 어려우면 정치라도 열심히 해야지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일파들은 더욱 가혹한 수탈행위를 자행하며 지방관의 매관매직이 아주 성행했습니다. 참다 참다 못한 농민들이 전국에서 계속 봉기를 일으키는 안 좋은 상황은 계속 되었습니다.

 

<ㅠㅠ 대체 언제쯤 이 흑역사는 막을 내릴 것인가?>

시궁창에 한줄기 빛이 들다

하지만 이렇게 막장인 상황에도 꽃은 피듯이, 농민들의 희망이 되는 사상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동학입니다. 동학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을 내세워 농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었습니다. 더불어 외세를 배척하여 지배층과 외세 양쪽 모두 수탈이 대상이 되었던 농민들에게 동학은 한줄기 빛과도 같았습니다.

 

<시멘트 바닥을 뚫고 민들레가 꽃을 피우듯, 어려운 상황에서도 동학 사상이 농민들에게 빛이 되었다>

동학은 제2대 교주 최시형이 동학 모임 장소인 접소에 책임자인 접주를 두고 전국을 포와 접으로 나눈 포접제를 정비하자 교세가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특히 남쪽 지역에서 농민들의 큰 지지를 받았습니다. 교세가 제법 모인 동학도들은 자신감이 생겨 정부의 탄압으로 처형당한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달라는 교조신원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습니다. 최초에는 주로 교조 신원에 관한 것만 논의되었으나 보은 집회(1893. 3)에서 종교적 요구를 넘어 탐관오리 숙청, 외세 배척을 내세우면서 정치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소규모 농민 봉기가 거대한 동학 농민 운동으로 발전할 불씨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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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1) 동아시아 삼국의 역사적 갈림길
1-1 조선을 놓고 벌어진 두 차례의 전쟁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 일본

예전부터 아시아의 최고의 강자는 중국이었습니다. 아시아의 나라들은 거의 대부분 중국의 권위를 인정했고 중화가 주도하는 천하질서 속에 편입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부자가 망해도 3년이라고 서구 열강에게 청이 거의 반(半)식민지 상태에 떨어졌어도 아시아 각국의 나라는 청을 우습게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막 근대화를 시작하여 비상하려던 나라인 일본에게도 청은 여전히 껄끄러운 상대였습니다.

일본은 청을 늘 조심스럽게 대했으나 결국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조선이었습니다. 청은 조선을 자국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한 동쪽 울타리로 삼으려 했으며 사대-조공 관계를 실질적인 속국 관계로 변화시키려 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이익선 정책과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이익선 안에 두어 그 어떤 나라도 조선에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는 것을 막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청이 자꾸 조선을 넘보니 일본은 이익선을 위협받는 처지에 놓였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청과의 전쟁을 결심하게 됩니다.

<청일전쟁의 모습을 그린 일본 측 그림>

청과 전쟁을 하기 위해 일본은 청을 개화를 반대하는 '문명의 적'으로 묘사합니다. 청을 조선 개화에 반대자로 그리며 일본 국민들에게 청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던 중 조선에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합니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할 힘이 없었던 조선 정부는 청에 파병을 요청하는데 일본은 이를 기회로 여겼습니다. 일본은 톈진 조약과 조선 내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파병했습니다. 

청나라는 양무운동으로 국력이 크게 향상되었다고 생각했고 일본을 얕잡아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서양 열강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청은 일본을 얕본 대가를 치루고 마는데 너무나 손쉽게 일본과 전쟁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청일전쟁 패배 후 중국은 시모노세키 조약이라는 굴욕적인 조약을 맺게 됩니다. 청은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을 할양했으며 배상금 2억냥을 지불했는데 이는 청나라 3년 예산이었으며 일본 메이지 정부의 4년치 예산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중국이 주도하던 동아시아 질서가 완전히 와해된 것입니다. 이제 중국은 허접임이 만처하에 입증되었고 동아시아의 강자는 명실공히 일본이 되었습니다.

<중국이 허접임이 증명되자 열강들이 중국 분할에 더 박차를 가한다>

러시아가 새로운 일본의 라이벌로 등장하다

일본은 청을 꺾고 살짝 기고만장해졌습니다. 이런 일본에 새로운 라이벌이 등장했으니 바로 러시아였습니다. 러시아는 청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청처럼 열강이 되려 했던 나라가 아니라 진짜 서구 열강이었던 나라입니다. 당시 러시아는 남하정책을 추진했고 청의 만주 지역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만약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점거하게 되면 러시아의 만주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했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를 우려한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삼국간섭을 단행하여 랴오둥 반도를 다시 청에 반환시킵니다. 하지만 이게 정말 청나라 예뻐서 돌려준걸까요? 아니죠. 결국 러시아 자신이 그 땅을 차지하려는 의도가 너무나도 짙게 깔려있었습니다.

러시아는 랴오둥 반도를 청에게 다시 돌려준 대가로 랴오둥 반도에 있는 항구인 뤼순, 다롄을 조차받습니다. 조차라는 말은 빌린다는 건데 말이 빌리는 거지 거의 뺏은 거나 다름없지요.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은 조선을 두고 러시아와 대립을 하게 되는데 러시아는 청과는 매우 다른 나라였습니다. 왜냐구요? 러시아는 진짜, 정말, 레알 서구 열강이었거든요. 열강 흉내내려다가 털린 청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조선(korea)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러시아가 대결을 벌이고 있다>

러시아를 꺾고 제국주의 열강으로 인정받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러시아와 직접 맞서는 것은 곤란하다고 판단해서 조선 정부가 친러로 돌아서는 것을 막고자했습니다. 그래서 을미사변을 강행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고종은 완전히 일본에 등을 돌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피하는 데 이를 아관파천이라 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일본도 러시아와 직접 대결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일본 혼자서 러시아와 맞서 싸운다는 것은 부담이었겠지만 당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이 일본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영일동맹을 묘사한 그림, 일본의 여신인 아마테라스와 영국의 상징 브라타니아가 함께 그려져 있다>

다른 서양 열강이 지원을 해주자 일본은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하여 러시아에게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분할 점령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일본보다 조선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러시아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 아래 러시아군을 기습했는데 이것이 바로 러일전쟁입니다.

<러일전쟁, 일본 뒤에 영국과 미국이 지원해주고 있다>

http://blog.naver.com/aias9?Redirect=Log&logNo=10098269985&jumpingVid=C3D0542F0DDD6238FC19539917A6A68D3809(러일전쟁)

러일전쟁은 놀랍게도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이는 동아시아 나라가 서구 열강을 격파한 최초의 전쟁으로 일본은 엄청난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운이 어느 정도 작용했는데 러시아는 수도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쟁을 하느라 힘이 없었고 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강화조약이 성립했는데 이것이 바로 포츠머스 조약입니다.

<러일전쟁 승리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인정 받는다>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명실상부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이후 서양과 맺었던 불평등 조약을 모두 수정하였고 조선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다른 열강들에게 인정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 좋은 것마은 아니었는데 청일전쟁 끝에 얻을 수 있었던 막대한 배상금은 러일전쟁 때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러시아랑 다시 싸워서 이길 수 있을지 일본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양보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어찌되었든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제국주의 열강에 합류한 것은 물론 한국의 지배를 인정 받았습니다. 또한 영국과 미국이 각 각 제2차 영일도맹,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승인해주었으니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데 남은 장애물은 아무것도 남질 않게 되었습니다.

히비야 폭동은 왜 일어났을까?

러일전쟁이 종결되고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의 히비야 공원에서는 전쟁을 지속하고 강화하는 것을 반대했는데 어째서 일본이 승리한 전쟁에 강화 조약을 체결하는데도 국민들인 반대했을까요? 한 번 잘 생각해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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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5) 열강의 경제 침탈이 가속화되다
5-1 일본과 청 상인의 경제 침투
5-2 청과 일본의 경제 침탈에 맞서다 


개항으로 외세의 경제 침탈이 심화되다


개항 이후 조선은 본격적으로 세계 자본주의 시장체제에 편입되었습니다. 하지만 개항 과정이 폭력적이고 조선에서 준비도 전혀 없었습니다. 또한 외국과 체결한 조약이 모두 불평등조약이어서 조선의 취약한 경제 상태가 그대로 열강 앞에 노출되어 있었지요. 

특히 일본과 청은 조선의 경제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나라였습니다. 일본은 강화도 조약의 유리한 조항 내용을 이용하여 조선 경제를 적극적으로 잠식해나갔습니다. 급격한 공업화를 하느라 농업이 몰락했던 일본은 쌀이 많이 부족했는데 주로 쌀과 잡곡, 콩을 많이 수입했습니다. 조선에 주로 수출했던 제품은 주로 영국산 면제품이었습니다. 일본은 영국산 면제품을 중국에서 싼 값에 사들여 조선에는 비싼 값에 팔아 그 대금으로 쌀과 잡곡, 콩을 수입하는 형태였습니다. 이것을 미, 면 교환체제라고 부릅니다. 

<인천항에서 수출되는 쌀, 일본은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조선쌀 수입에 열을 올렸다>

일본은 이런 무역을 하면서 일본 화폐를 사용하고 수출입 상품에 관세를 매기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치외법권 마저 적용되면서 약탈에 가까운 무역 활동을 벌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농촌 면공업은 거의 몰락했으며 쌀값은 폭등했습니다. 쌀값 폭등으로 인해 지주 계층은 더 큰 이익을 거두기도 했지만 대다수 농민은 몰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인 계층도 일본 상인의 진출로 말미암아 몰락했는데 그 중 일부는 일본 상인이 개항 초기에 개항장에서만 무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여 일본 상인 대신 내륙에 물건을 팔아줌으로써 부를 축적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청나라는 어땠을까요? 청은 조선이 개항하던 초기에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임오군란 이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면서 조선 내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청수륙무역장정에는 청나라 상인들은 정부에가만 받으면 개항장 밖에 장사를 할 수 있다는 조약이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 상인들은 개항장을 넘어 내륙까지 적극적으로 진출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시죠? 다른 나라들은 모두 최혜국 조항이 있었다는 것을요. 이후 다른 나라들도 최혜국 대우 조항에 의해 내륙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내륙과 개항장을 연결해주던 중개상인들은 몰락헀습니다.

<청과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액>

위 그래프를 보면 청나라가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은 이후 꾸준히 조선에서 영향력을 확대해나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나라 상인들의 세력이 확대해 나가자 일본은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결국 조선에서 청나라 상인의 세력 확장 때문에 나중에 전쟁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청일전쟁입니다.

한편 조선 정부는 계속 손해를 보는 무역 체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특히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무관세 규정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1883년 조일통상장정에서 관세권이 설정되고 쌀의 무제한 수출을 막는 방곡령 선포등이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주는 게 있으면 잃는 법도 있는 법. 일본의 요구로 최혜국 대우 조항이 들어가고 맙니다.

경제 침탈을 막기 위한 노력

그렇다면 조선은 외국 상인들의 경제적 침탈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을까요? 그건 아니었습니다. 외국 자본에 대항하기 위한 움직임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요. 외국 상인들의 막대한 자본과 경쟁하기 위해 조선의 상인들은 동업자들을 모아 자본의 규모를 불려 상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 중 대동상회는 꽤 큰 규모의 회사로 발전하여 해외 무역에도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정부에서는 일본의 경제 침탈에 맞서 세곡을 효율적으로 운반하기 위해 증기선을 구입하기도 하고 해운 회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일본 자본에 잠식되는 슬픈 현실을 맞이하긴 하지만요 ^^;

<광제호의 모습>

이외에도 일본 상인들이 무분별하게 곡물을 사가는 행위를 막기 위해 방곡령이 시행되기도 했습니다. 방곡령이란 곡식이 나가는 걸 금지한다는 뜻으로 일본이 제한 없이 쌀을 수입해가는 걸 방지하는 법령이었습니다. 처음에 방곡령이 일어난 곳은 함경도로 당시 함경도 관찰사인 조병식이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선포하는 것 까지는 매우매우 좋았는데 일본이 또 다시 트집을 잡기 시작합니다. 일본은 방곡령 통보를 늦게 받았다는 구실을 달아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해 배상금을 받아내는 행위를 저지릅니다-_- 나쁜 놈들이죠?

이외에도 청, 일본 상인들의 상권 확대에 맞서 시전 상인이 철시 운동을 벌이는 등 적극적으로 우리 상권을 수호하려 노력했습니다. 이후 시전 상인들은 황국 중앙 총상회를 조직해서 상권 수호 운동을 더욱 발전시켜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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