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4) 근대 국가 건설을 지향하다
4-2 갑신정변, 최초로 근대 국가 수립을 지향하다 


개화당,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임오군란 이후 청의 입김이 거세지면서 급진개화파 보다는 온건개화파가 힘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온건개화파는 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청을 모델로 한 양무운동식 개화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급진개화파가 꿈꾸던 개혁을 실행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 불리한 상황을 역전하고자 급진개화파의 김옥균은 한 가지 승부수를 띄웁니다. 당시 조선은 개화 정책 추진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빠져있었습니다. 당시 온건개화파들은 이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청에서 파견한 서양인 고문이던 뮐렌도르프의 의견을 채택했습니다. 뮐렌도르프는 당오전이라는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여 재정난을 바로 잡으려고 했습니다.

<청나라에서 파견한 독일인 고문 묄렌도르프(위), 그가 발행한 당오전(아래>

그러나 당오전은 대표적인 악화입니다. 화폐의 액면 가치는 상평통보에 5배지만 실제 가치는 2배밖에 안 되어 혼란만 초래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옥균은 자신이 직접 재정난을 타계하고자 고종에게 일본에 차관을 들여오겠다고 했습니다. 고종의 허락을 얻은 김옥균은 차관을 반드시 들여오겠다고 장담했으나 결과는 시망-_-; 고종은 크게 실망했고 온건개화파 역시 당오전의 실패를 급진 개화파에게 덮어 씌우면서 급진개화파는 급격하게 고종의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급진개화파가 절망에 빠져있을 때, 청나라가 프랑스와 전쟁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청나라는 프랑스와 전쟁에 병력을 보충하고자 조선에 있는 청나라 군사 절반을 빼내갔습니다. 급진개화파는 더 이상 고종의 신임을 얻지 못하겠다고 판단하고 청나라 군사가 절반으로 줄어 있을 때를 노려 쿠데타를 감행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갑신정변입니다.


<갑신정변 전개과정>

<갑신정변 진행도>

급진개화파는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군사를 타국에서 빌릴 결심을 했습니다. 처음에 미국과 접촉했으나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나 청국의 세력 확대를 불편한 눈으로 지켜보던 일본 공사가 이들을 지원하기로 결심하고 거사 날짜가 잡혔습니다. 거사 날짜는 지금의 우체국에 해당되는 우정국이 개국하는 축하연으로 잡았습니다. 이날 급진개화파들은 온건개화파들을 주살하고 자신들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이들은 갑신 정강 14개조를 발표하여 그들의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주요 내용은 청과 사대 관계 청산, 내각 제 수립, 문벌 폐지, 재정 일원화, 상업의 자유로운 발전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정권은 3일로 끝났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갑신정변 소식들은 청군은 곧바로 군대를 다시 조선으로 파견했고 이 소식을 접한 일본은 청군과 대결을 피하여 철수 했습니다. 결국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급진 개화파 인물들은 대부분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갑신정변의 주모자였던 김옥균은 정변 실패후 일본에 망명한 뒤에 암살당했다>

근대 국가의 청사진은 제시했으나...

갑신정변의 의의와 한계는 분명합니다. 먼저 의의부터 살펴보죠. 이들은 청의 간섭을 배제하고 사대 관계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는 점이 높게 사줄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대와 조공 관계는 속국 관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평등한 관계라고 보기에도 힘들다>

먼저 사대와 조공은 굉장히 애매한 관계라는 점입니다. 사대와 조공을 한다고 해서 그 나라가 완전히 속국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죠. 어찌됐든 사대와 조공을 하는 나라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한 것이고 엄연한 독립국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대 받는 나라와 사대 하는 나라가 평등한 관계라고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애매한 국가관계는 근대국가끼리 맺는 조약에 늘 걸림돌이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청나라가 조선과 서구 열강 사이에서 조약을 맺을 때 다리를 놔준 것이죠.

또 중요한 점은 이들이 평등을 내세웠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들은 태생이 기득권층이므로 진정한 평등을 바라지 않았을 겁니다. 근대국가가 되는 필수적인 요소가 평등이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한 것이지 이들은 평민들의 삶을 공감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간에 평등을 주장했다는 것이 앞으로 조선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알려줬다는 점에서 높이살만한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들은 소수 엘리트 지식인이에 불과했고 평민들의 삶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평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것이 이들의 한계였습니다. 즉, 위에서 개혁을 하면 자연스럽게 아래에 있는 백성들을 그대로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엘리트들이 범하는 전형적인 오류입니다.

<천한 것들이 까라면 까야지 뭔 말이 많어?>

마지막으로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또 다른 외세에 의존하려고 했다는 점은 갑신정변의 큰 약점이기도 합니다.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의 입김은 더욱 거세지며 일본은 책임을 오히려 조선 측에 돌리면서 조선의 상황은 더욱 안 좋아집니다. 특히 갑신정변 이후 텐진 조약이 체결되는데 이 조약은 청과 일본이 군대를 파견하기 전에 서로에게 알려준다는 조항이 들어가는데 이것이 이후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 때 일본이 개입하는 빌미를 만들고 마니 정말 슬픈이지요.

중립화론이 고개를 들고 개화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다

갑신정변 이후 갈수록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고종은 이 내정 간섭을 막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입니다. 갑신정변에 별로 교훈을 얻지 못했나 봅니다-_- 이 사실을 알아 챈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거합니다. 이렇게 되자 청, 영국, 일본, 러시아 4개국이 조선을 두고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독일 부영사였던 부들러는 이런 열강들의 각축을 막고자 조선을 중립화하면 어떻게냐고 제의를 했습니다. 유길준 역시 비슷한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중립화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중립화론은 실패로 끝났지만 개화에 대한 노력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갑신정변은 비록 실패했으나 여전히 개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정부는 동도서기론 입장에서 외국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근대 학교인 육영 공원, 군사 학교인 연무 공원, 광산을 전담하는 광무국, 전신사무를 관장하던 전보국 등을 설치했습니다. 

<육영공원의 모습, 외국인 교사가 조선 사람을 가르치고 있다>

한편으로 갑신정변을 진압하기는 했지만 청의 간섭에 부담을 느낀 조선은 일본과 미국에 공사관을 설치했습니다. 원래 열강들은 조선에 공사가 아닌 영사를 파견했습니다. 영사는 공사보다 급이 한 단계 낮은데 이것은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한다는 얘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은 일본과 미국에 공사관을 설치했습니다. 즉, 조선이 청에 종주권에 안에 있는 나라가 아닌 동등한 나라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이었지요.

하지만 이 같은 개화 노력은 민씨 일파의 부패와 청의 간섭 때문에 성과를 거두기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농민들은 갈수록 힘들어지는 상황에 정부의 개화 정책은 공감을 얻기가 힘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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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4) 근대 국가 건설을 지향하다
4-1 개화사상은 어떻게 형성·발전 하였을까? 


북학론, 개화사상의 뿌리가 되다

한 시대를 주름 잡았던 사상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상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자극을 주었던 다른 사상이 있고 시대 환경이 그 사상을 만드는 것이죠. 개화사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이 일본과 서구에 문을 열었던 그 시기에 개화사상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고 이전부터 개화 사상의 뿌리가 되는 사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북학론이었습니다.

북학론은 청과 적극적인 교류를 주장하던 사람들이였습니다. 당시 청에는 많은 서양 선교사와 서양 서적들이 있었는데 이것을 통해 북학파 실학자들은 자연스럽게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됩니다. 천주교도 그렇게 해서 들어오게 된 것이구요. 

<정약전의 영정, 그는 천주교 신자였다. 서양 서적을 공부하다 신자가 된 사례다>

이처럼 청과 교류를 주장했던 사람들은 서양 문물도 같이 접했고 또한 그런 사상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전파하면서 개화사상까지 이어져오게 됩니다. 하지만 개화사상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이런 양반들 보다는 중인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오경석은 역관 출신으로  청에 일찍부터 드나들면서 청의 사정과 서양문물에 대해 남들보다 일찍 눈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중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힘이 없었고 대신 양반 자제들을 뽑아 가르치기로 결심합니다. 또한 이런 이들의 개화사상에 공감한 양반이 있었으니 그니 북한론을 주장했던 박지원의 손자였던 박규수였습니다.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 이 세 사람이 함께 개화사상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서양의 나라와 역사를 소개한 해국도지, 유럽나라의 모습을 그린 부분이다>

이들은 주로 해국도지, 영환지략이라는 새로운 책을 통해 서양의 지리와 문물, 역사를 접하고 당시 국제 정세와 서양에 대해 남들보다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양의 침략에 맞서려면 하루 빨리 개항을 하여 서양의 발달된 기술을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표적인 통상개화론자인 박규수 역시 어디까지나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을 뿐입니다. 즉, 유교적 원리는 지키면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얘기였지요. 뭐 그래도 기존의 유학자보다는 훨씬 더 개방적인 인물이었다고 봐야겠습니다.

개화파가 형성되나 개화의 방법을 서로 달리 생각하다

어찌되었든 간에 개화사상을 가진 이 세명 밑으로 상당히 똘똘한 양반 자제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바로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으로 나중에 조선의 개화를 이끌어갈 주역으로 성장하는 사람들이죠. 주로 박규수의 사랑방에 모여서 당시 정세에 대해 토론해나가며 조선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모색했습니다.

 <박규수 집터에 있는 백송, 이곳에서 개화파 인물들이 꿈을 키웠다>

특히 김옥균은 벼슬길에 나서면서 일본에 조사 시찰단으로 파견되었는데 그곳에서 서양 기술 뿐만 아니라 사상과 제도까지 받아들일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이런 사상을 문명개화론이라 부릅니다. 주로 김옥균과 같이 동문수학했던 박영효, 서광범 등은 김옥균의 입장에 대체로 동의했습니다.

반면 이들과 다르게 개화를 모색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으로 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들입니다. 이들은 청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유교 논리를 고수하며 서양의 기술만 받아들이고자 했는데 이를 동도서기론이라 합니다. 개화 방법에 있어서 두 가지 입장차이가 나타난 것입니다.

문명개화론을 주장하는 입장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범으로 삼아 근대적인 사상과 제도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했습니다. 또한 임오군란으로 청국의 영향력이 강해진 시점에서 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청과의 사대관계를 폐지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생각이 달랐는데 그들은 청이 조선이 개화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존재이며 서양의 사상과 제도까지는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입장차이는 서로 다른 당파 성립으로 이어졌습니다. 급진개화를 주장하는 김옥균 일파는 자신들을 개화당 또는 독립당으로 부르고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는 김홍집 일파를 수구당 또는 사대당으로 불렀습니다. 이들의 갈등의 골은 깊어져만 갔습니다. 

왜 하필 사랑채야?

여러분 박규수 사랑채에 모여서 당시 조선의 정세에 대해 얘기를 하곤 했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왜 하필 사랑채에서 얘기를 했을까요? 이번 기회에 한옥의 구조에 대해서 조금 알아보는 시간을 수업시간에 가지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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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3) 개화 정책의 추진과 반발
3-3 임오군란, 개화에서 소외된 민중의 반발 


청나라, 조선을 지배하려 하다

조선이 근대화와 개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나라는 어느 나라일까요? 일본이라구요? 뙈행! 단순히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ㅎㅎ

 <아니라고 이것들아! 땡이라고 ㅋㅋ>

조선의 근대화에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은 바로 청나라입니다. 왜 청나라가 일까요? 여러분 생각을 조금 더 하면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청나라는 오랫 동안 조선에 영향력을 끼치던 나라였습니다. 어떻게요? 바로 사대와 조공을 통해서 말이죠. 

기본적으로 사대와 조공은 종속관계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전에도 설명했지만 사대를 하면서 작은 나라는 안정과 주변국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릴 수 있습니다. 큰 나라는 작은 나라의 침입에서 해방되고 내부에 더 신경을 쓸 수 있지요. 따라서 이 관계는 기본적으로 서로 간섭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즉, 근대화 이후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가 관계를 맺는 방법인 식민지, 보호국은 사대와 조공과 질적으로 다른 관계였습니다.  

<조선을 지배하려는 두  나라, 청과 일본. 러시아가 두 나라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다>

하지만 청이 제국주의 침략을 받고 나라가 어려워지자 사대와 조공 관계를 달리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청은 제국주의 침략에서 벗어나고 동시에 스스로도 제국주의 길을 걷기 위해 사대와 조공 관계를 근대적 식민지, 보호국 관계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청은 사대와 조공 관계를 이용하여 서구 열강으로부터 조선을 보호국화 하려 했으며 이런 청의 시도는 개화파에게 크나큰 위협으로 느껴졌습니다.

개화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

청나라의 위협과 더불어 일반 백성들은 개화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개항 이후 조선은 기본적으로 일본, 서양 열강들에 불평등 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무역에 있어서 막대한 손해가 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은 많은 양의 쌀을 제한 없이 사들여가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불만은 계속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중앙에서는 신식군대와 구식군대의 차별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구식 군대였던 2군영에 대한 대우가 매우 형편없었는데 13개월 만에 지급받은 쌀에는 쌀보다 겨와 모래가 훨씬 많았습니다. 결국 쌓여있던 구식 군인들의 불만은 폭발했고 이들은 임오군란(1882)에 일으켰습니다.

 
<임오군란의 전개과정>

임오군란은 구식 군인의 불만에서 부터 시작되었지만 개화 정책으로 인한 일반 백성들의 불만도 이때같이 터져나오게 됩니다. 서울 하층민들과 합세한 구식군인들은 정부 고관대작(특히 민씨일가)의 집을 불태우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습니다. 이들은 나아가 창덕궁까지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찾으려 했으나 찾는데 명성황후는 이미 종적을 감춘지 오래였습니다. 사태가 커지자 이들은 흥선대원군에게 지지를 호소했고 결국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은 재집권하면서 그 간 개혁을 진행시키던 통리기무아문이나 별기군을 없애고 기존의 삼군부와 5군영 체제로 바꿉니다. 

하지만 민씨 일가는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민씨 일가는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청에게 연락을 취했고 청은 이것을 기회로 여겨 일본 군대의 출동을 막고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신속히 군대를 출동시켜 임오군란을 진압시켰습니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군란의 책임을 물어 청나라로 압송됩니다.

 

<임오군란을 통해 조선 내 청세력이 확대된다. 청나라 대표 군인이던 위안스카이가 임오군란 후 조선에 주둔한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 내에서 청의 세력은 날로 확대되어 갑니다. 청나라는 군란을 진압한 후에도 3000명의 군사를 조선에 주둔시켰습니다. 이때 중국의 유명한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위안스카이도 우리나라에 오게 됩니다. 또한 뮐렌도르프 등 외국 고문을 파견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고히했습니다. 이어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라는 조약에서는 조선을 청의 속방으로 규정하면서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 내륙 시장까지 진출할 수 있는 특권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한편 일본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는데 이들은 임오군란 당시 일본 공사관이 불탄 책임을 물어 제물포조약을 조선 측에 강요했습니다. 주요 내용으로는 사과 사절단 파견과 주모자 처벌, 배상금 지불, 공사관 경비를 위한 일본군 주둔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었는데 고종은 이 요구를 모두 수용하고 맙니다.

청나라는 왜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을까?

오늘 배운 내용을 보면 청나라가 계속해서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만들려고 하는 움직임이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청은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을까요? 당시 청나라의 국제적 입장을 고려해서 얘기해보도록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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