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2) 유교 정치의 이상을 꽃피운 조선
2-4 국제 관계의 안정 속에서 실리를 취하다
2-5 동아시아 정세 변화로 왜란과 호란이 일어나다 


사대와 조공은 나쁜 건가?

우리가 보통 조선하면 중국에게 사대를 해서 자존심이 없는 나라로 많이 비춰집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옳은 얘기일까요? 


 <사대와 조공은 그저 굽신굽신의 상징인가?>

우리는 지금부터 사대와 조공의 본질을 이해해 보도록 합시다. 자, 먼저 현대 외교 관계를 생각해보죠. 지금 국제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국제 기구가 있지요? 맞습니다. 바로 UN(국제연합)입니다. 국제연합은 국제평화군이라는 것을 운용하면서 분쟁 지역에 개입하고 평화를 수호하려 노력합니다. 즉, 국제사회에 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려는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과거에도 이러한 것이 있지 않았을까요?

과거에도 이러한 것이 존재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대관계를 통해서 얻어지는 조공-책봉관계입니다. 사대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인데 사대를 함으로해서 작은 나라 큰 나라에게 안정을 보장받습니다. 그럼 사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느냐? 여러분 친구 사이에 친해질려면 어떻게 하죠? 선물을 주죠. 예전에 국제사회에서 오가던 선물을 조공이라고 했습니다. 작은 나라는 조공이라는 선물을 받쳤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라고 선물을 받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큰나라는 작은 나라에게 벼슬을 내리는 데 이것을 책봉이라 하며 조공의 답례입니다. 이와 같은 국제사회의 질서를 조공-책봉관계라고 하는데 이것은 큰 나라가 작은 나라 모두를 상대해야 하는 위험을 덜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의 침입을 덜고 이웃나라가 침입을 할 시 큰 나라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조선이 건국할 당시 명나라가 가장 큰 나라이며 명이 국제질서를 주도하고 있었습니다.이런 국제질서에 가담한다는 것은 조선으로서는 국제사회에서 안전을 보장받는 동시에 명이라는 문명국의 혜택을 받는 국가라는 점을 확고히 하면서 대외적으로 조선의 위치를 높일 수 있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사대는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고 오히려 장점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명과는 사대를 주변국과는 교린을 유지했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제 사대 관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셨을 겁니다. 이제 사대관계를 이해했으니 사대를 넘어서 교린이라는 외교관계를 이해해봅시다. 교린은 주변 이웃 국가들과 관계를 맺는 방법으로 이는 사대와 같은 상하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였습니다. 이해되시나요? 특히 북방의 여진과 남쪽의 일본과 이 교린 관계를 맺었습니다. 

북방의 여진족을 조선은 회유하기 위해 귀순을 장려하거나 무역소를 설치하기도 했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자 세종때는 4군6진을 개척하여 북방의 영토를 개척했습니다. 이로서 오늘날의 국경성이 거의 완비되었습니다. 일본과의 관계는 여진족 보다 더 심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초기에는 이를 다스리려 쓰시마섬을 정복하는 강경책을 폈지만 나중에는 회유책으로 돌아서 3포를 개항하고 무역을 제한적으로 허락했습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쌀, 면화 등이 부족하여 우리나라 수입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명이 주도하는 국제질서가 붕괴되고 대외관계가 혼란에 빠지다

16세기 후반 명이 주도하는 국제질서가 동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일본의 정치상황이 혼란해지면서 명이 주도하던 국제질서에서 이탈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알고 있을 일본의 전국시대, 왜냐? 게임의 소재로 엄청 사용되었거든 ㅋㅋ>

자 여기서 일본 전국시대가 게임의 소재로 쓰인 것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전국시대 상황이 도래하면서 일본을 대표할만할 세력이 없어졌다는 뜻이죠. 전국시대 이전에 일본은 무로마치 막부라는 일본 세력을 대표할만한 정치세력이 있었지만 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무로마치 막부는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대표성을 상실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명나라에게 책봉받을 만한 일본의 정치세력이 없어졌다는 뜻이며 자연히 일본이 명나라가 주도하는 국제질서에서 이탈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탈! 일본이 맛이 가면서 국제질서가 동요된다>

일본은 명이 주도하던 국제질서에서 튕겨져 나가자 평화롭던 대외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일본의 중앙정부는 더 이상 일본을 대표하지 못하고 지방에 대한 힘을 상실하자 지방에 왜구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3포왜란, 을묘왜변 등 제법 큰 규모의 왜란을 일으키면서 평화롭던 국제사회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던 조선은 국방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원래는 양인들은 모두 군대를 가야하는 양인개병제가 채택되었지만 포를 납부하면 군역을 면제해주는 방군수포제가 확대되면서 국방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일본의 침입을 막기가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반면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한 상황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하면서 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이제 다시 일본을 대표할만한 정부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통일된 일본은 명이 주도한 국제질서에 다시 복속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전국시대 혼란기를 거치면서 자신들의 강함을 깨닫고 자부심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천하질서를 꿈꾸기 시작했고 이것이 조선의 비극이었던 임진왜란의 출발점입니다.

<동래순절도,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했다. 뒤에 퇴각하는 조선군의 모습이 있다>

일본군이 처음에 조선에 처들어올때의 명분은 바로 정명가도! 명나라를 치게 길을 빌려달라였습니다. 이 문장의 담겨져 있는 뜻을 보더라도 일본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천하관을 꿈꿨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세계관을 위한 첫번째 대상이 된 것이 바로 조선이었죠. 임진왜란의 진행과정에 대해서 부연설명을 일일이 하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여러분들도 잘 알것이고 전쟁 후에 임진왜란이 끼친 영향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죠 ^^

임진왜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은 수군과 의병 그리고 명의 원군에 있었습니다. 수군의 승리를 통해 제해권을 장악하여 일본의 서해진출 계획을 꺾었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거점만 점령한 상태였기 때문에 각지에서 일어났던 의병들은 일본군을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마지막으로 명나라 원군이 참전하면서 아직까지는 명이 주도하는 국제질서 체제가 원활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조선은 그에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명이 참전함으로써 과시하게 되어 일본군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후금이 흥기하고 새로운 국제질서가 수립되다

임진왜란은 명이 이끄는 국제질서의 확실한 사망선고와 파탄을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이제 더 이상 명나라 주도하는 국제질서에 속하지 않고 벗어나 독자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패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어나 일본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출병을 한 탓에 국력이 많이 쇠약해져 여진족의 침입을 막아내기가 힘들어졌으며 이는 결국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건국되는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누가뭐라해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조선이었습니다. 조선은 전국토가 황폐해졌으며 각 종 토지 대장과 호적등이 소실되어 세금을 걷는데 큰 지장이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임란으로 동요된 국제질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여진족의 강성은 이후에 국제사회의 판도를 뒤흔들 만한 큰 사건이었습니다.


<여진의 흥기로 명과 조선은 다시 혼란의 소용돌이로 들어간다>

 여진족은 강성해지자 후금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명의 영토를 빼앗으며 성장해나갔습니다. 조선은 필연적으로 명과 후금 사이에서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고 이때 임금이었던 광해군은 이 두 나라 사이에서 눈치를 보면서 이른 바 후세에 중립외교로 평가받는 외교 전략을 펼칩니다. 뭐 하지만 이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많으니까 수업시간에 더 깊이 다뤄 보도록 합시다 ^^

여하튼 이런 광해군의 정책에 반대하던 세력으로 서인이 있었는데 서인은 광해군이 자신이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자 유교 윤리를 어겼다는 이유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세웁니다. 이것이 인조 반정이었습니다. 조선의 정치관계가 급변하던 이 시기에 대외관계도 급변하는데 조선을 건드리지 않으려던 후금의 칸 누르하치가 죽고 조선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던 홍타이자가 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후금의 2대 칸 홍타이지, 그는 아버지와 달리 대 조선 강경파였다>

후금은 명이 주도하던 국제질서를 깨고 자신만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구축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명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에 가장 충실한 나라인 조선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후금은 조선을 명이 이끄는 국제질서에서 이탈시킴으로 해서 자신이 꿈꾸는 국제질서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 같은 이유로 총 2번에 걸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습니다.

<서인정권은 후금과 거리를 두고 싶어했다>

당시 조선은 서인정권이 들어서면서 광해군이 집권하던 시절에 비해 후금과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서인정권의 태도 역시 호란을 일으킨 하나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이 모든 것들 맞물려 호란이 일어났는데 첫번째 정묘호란 때는 형제관계를 맺는 것으로 사태가 수습되었으나 두번째 병자호란 때는 그런 것으로 사태가 수습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후금의 칸이 황제를 칭했기 때문입니다. 황제라는 것은 명이 주도하는 국제질서를 완벽히 거부하고 자신의 질서를 재구축하겠다는 얘기였고 조선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전쟁이 발발했으며 이 전쟁의 중요성은 청태종인 홍타이지가 직접 군대를 지휘한데서 드러납니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항전했지만 강성한 청의 군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의 임금이었던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했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청나라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선은 정신적으로 항복하지 않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청을 여전히 오랑캐로 여기고 중화의 정통 계승자는 조선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나중에 소중화의식, 조선중화론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청에게 당한 치욕을 씻자는 의미로 청을 정벌하자는 북벌론이 대두하기도 합니다.

 <청에게 모욕을 갚자는 북볼론, 하지만 현실성은 없었다>

 청은 왜 조선에게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강요했을까?

 <치욕적인 항복의식이었던 삼배구고두례>

http://gall.dcinside.com/list.php?id=chuno&no=70041&page=1&search_pos=-70258&k_type=1000&keyword=%EB%8C%80%EA%B8%B0%EB%A6%AC&bbs=(인조의 삼전도 항복의식)

 청은 남한산성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세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번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라는 것을 강요했습니다. 또한 청 태종 자신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삼전도비를 세울 것을 지시했는데 청은 왜 이토록 조선에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강요했던 것일까요? 당시 국제관계 속에서 이를 파악해봅시다 ^^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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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2) 유교 정치의 이상을 꽃피운 조선
2-2 사림,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다
2-3 민족 문화가 크게 발전하다 


선비가 숲을 이루다

고려 왕조는 500년 동안 호족, 문벌귀족, 무신, 권문세족, 신진사대부 총 4번의 권력 교체가 일어났지만 조선은 단 한 번의 권력 교체가 일어났습니다. 그 주인공들이 바로 사림(士林: 선비 사, 수풀 림)입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조선은 우리가 알기로 선비의 나라라고 알고 있는데 왜 갑자기 선비들이 숲처럼 등장했다고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

<선비들이 숲처럼 많이 등장하다!>

사림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먼저 알아보는게 가장 좋겠지요? ^^ 여러분들 조선이 개국할 당시 조선 개국에 반대하는 온건 신진사대부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나요? 이들은 성리학 이론에 충실하여 충신불사이군을 내세우며 조선 개국에 끝내 반대했습니다. 일부는 죽임을 당하거나 또 일부는 은둔했는데 은둔하기만 하면 심심하잖아요? 또한 이들은 공부도 많이 했기 때문에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은둔하고 있는 동안 제자들에게 전수했습니다. 그래서 이들 밑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리학을 공부했습니다. 바로 이들이 사림입니다.

세월이 오랜 시간 지나자 사림의 수가 늘어났습니다. 사림의 수가 늘어나고 조선이 개국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자 사림들이 서서히 정치에 참여하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은 세상을 다스리는 학문인 성리학을 공부했기 때문이었죠. 세상을 다스리는 학문을 공부했는데 언제까지 숨어 있을 수 있었을까요? 드디어 성종 때가 되면 이들은 서서히 조선의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합니다.

<사림들이 정치세력으로 등장함에 따라 당시 부패했던 훈구세력과 날카롭게 대립한다>

그렇다면 사림들이 정치세력으로 전면적으로 나서기 전에 정치를 담당하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그들은 바로 조선 개국에 적극 참여했으며 세조 때의 정변을 통해 공신으로 지위를 굳힌 훈구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개국초에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개국했습니다. 이들은 성리학에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나라를 운영하면서 다른 학문도 받아들일 필요성을 느끼고 탄력적으로 다른 학문도 받아들였습니다.

언뜻 들으면 탄력적이라는 말은 좋은 말 같지요? 하지만 탄력적이라는 얘기는 그만큼 원리 원칙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말도 됩니다. 훈구파들은 원리 원칙을 어기고 공신인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등 세월이 지나면서 부패해졌습니다. 성리학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사림들은 이런 훈구파들이 눈에 차지 않았습니다. 곧 사림들은 훈구파와 날카롭게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http://home.ebs.co.kr/reViewLink.jsp?command=vod&client_id=home2441&menu_seq=4&enc_seq=3009391&out_cp=naver(훈구와 사림의 다툼)

<훈구와 사림의 비교>

특히 사림들은 바른 말을 잘했기 때문에 삼사 등으로 주로 진출하여 왕과 대신들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비판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성리학적 정치에 이상향이었던 향촌 자치 등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이 같은 주장은 훈구 세력에게는 굉장히 기분 좋지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때문에 훈구세력은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4차례 사화를 일으켰습니다. 사화는 선비들이 화를 당했다는 뜻으로 사림들이 훈구 세력에게 정치적으로 패배한 사건을 의미합니다. 사림들은 4차례 사화를 당하면서 큰 위기에 빠집니다.

사림, 굴하지 않고 결국 그들의 세상을 열다

앞에서 제가 사림들이 크게 4차례 사화를 당했다고 했지요? 사화라는 게 규모가 상당히 커서 대부분의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사림은 결국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여 훈구 세력을 밀어내고 정치적 주도권을 잡습니다. 역사는 이유가 중요하다고 제가 항상 수업 시간에 얘기했죠? 이들은 어째서 중앙 정치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을까요?

<사림은 향약을 통해 향촌 지역의 민심을 장악했다>

사림들은 향약을 보급하면서 백성들에게 까지 성리학을 보급했는데 이것을 통해 향촌에서 사림의 지지 기반을 확고히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또한 각 지역에 성리학을 공부하는 한편 자신들이 받드는 선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서원을 만들어 자신들끼리 결속을 다졌습니다.

<공부하겠다는 데 반대할 명분이 있을까? 사림은 서원을 세워 자신들의 제자를 키우고 결속력을 강화한다>

결국 이 두 가지 발판을 이용해 사림들은 정치적 주도권을 훈구 세력으로부터 빼앗아 올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정치 세력의 주도권을 잡은 이후로 조선은 이제 백성들까지 성리학적 질서를 받아들이는 단계까지 오게됩니다.

하지만 성공한 세력들은 저 마다의 견해 차이가 존재하는 법. 사림은 정치 주도권을 장악한 이후에 정치적 견해 차이와 이조 전랑(이조 정랑과 이조 좌랑을 합쳐 부르는 말로 3품 이하 문관들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다)의 자리를 가지고 사림 간에 첨예하게 대립하게 됩니다. 특히 이조 전랑 자리는 자신들의 학맥에 있는 사람을 등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리였기 때문에 대립이 격화되었으며 결국 선조 때 동인과 서인으로 사림이 분열되면서 이후 이들의 정치를 붕당 정치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붕당 정치는 소모적인 당쟁이 아니며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하여 서로 나은 대안을 제시하고 서로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견제하는 어찌보면 정당 정치의 기초적 형태라는 것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

<조선 붕당의 흐름, 여기서 국사 공부를 좌절했던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ㅠ>

민본 사상을 바탕에 둔 문화가 싹트다

자, 이제 문화사 얘기를 해봅시다. 정치사와 문화사를 나누는 것도 상당히 웃긴 일이긴 하지만 교과서 구성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할 수 없지요. ^^; 원래 문화라는 것은 그 당시 정치 세력과 시대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조선은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수립된 나라이기 때문에 조선 전기 문화는 이 민본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이 민본사상의 완성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훈민정음입니다.

<훈민정음은 백성들이 의사소통을 쉽게 하고 유교 윤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고 창제되었다>

<조선의 문화>

훈민정음은 백성들도 문자를 알고 공부를 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만든 문자로써 만약 백성들이 글을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 창제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했던 문자입니다. 그러나 조선 왕조에서는 백성을 근본으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유교윤리를 보급하려 했기에 훈민정음 창제로 그것이 이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백성을 중심으로 생각했던 사례는 조선 전기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백성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농사를 위해 우리 실정에 맞는 농서인 농사직설이 편찬되었고 또한 농사에 필요한 날짜와 절기를 알기 위해 새로운 달력인 칠정산이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수 많은 천체 관측기구가 만들어지고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 농사에 필요한 기상 관측을 위해 조선 왕조가 노력했던 흔적이 보입니다. 또한 우리 나라 풍토에 알맞는 의서들도 만들어졌고 국방력 강화를 위한 신기전, 화차, 거북선등도 이때에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모든 문화와 기술의 경향은 한마디로 민본에 있습니다. 백성을 근본에 두고 백성을 생각했던 마음이 문화나 기술에도 적극 반영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민본외에도 조선 전기 문화를 결정지었던 중요한 특징이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주성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명나라와 대립하기도 하는 등 중국이라고 해서 무조건 한 수 접어주는 모습은 조선 초에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대 역시 작은 나라로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강구되었을 뿐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런 자주적 기풍이 문화에도 반영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때 적극적으로 단군의 후예라는 인식이 성립되었다. 고려 시기만 해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자주적 기풍은 민족적 기원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져 단군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졌습니다. 뭐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정했으니 그것만 봐도 단군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지요 ^^ 또한 우리 민족 사서인 동국통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이 편찬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정한 것에는 또 다른 불편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기자 조선 계승의식입니다. 기자 조선이란 말이 좀 생소할 수도 있는데 지금부터 알아봅시다 ^^

<기자의 초상화, 물론 상상도이다 ^^;>

기자는 중국 현자 중에 한 사람으로 중국 은나라 주왕의 폭정에 대해 적극 간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원래 우리도 그렇지만 싫은 소리 계속하면 짜증나잖아요? 그래서 주왕도 기자를 감옥에 가둡니다. 주왕은 이후 주나라의 무왕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는데 이때 기자도 풀려납니다. 주 무왕은 기자를 등용하려 했지만 기자가 거부하는데 여기서 재밌는 기록이 하나 전해옵니다. 그것은 주 무왕에 의해 이 기자가 조선왕에 봉해졌다는 얘기입니다. 이를 기자조선설이라고 하는데 이에 따르면 우리 단군조선 이후에 중국인인 기자가 조선을 지배했다는 얘기됩니다. 지금이야 이 얘기가 불쾌한 얘기지만 그 당시에는 중국이 문명의 상징이었으니까 기자가 조선에 왔다는 것 자체를 매우 자랑스러워 했고 그랬기에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은 기자의 조선을 잇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역사는 역시 한가지 면만 생각하면 안 되겠죠? ^^

마지막으로 지리 서적에 관한 얘기를 해야겠네요. 우리는 보통 조선 왕조 내내 지리학적 지식이 부족하다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만들 때도 논란이 많았던 것으로 아는데 그것은 좀 큰 오해입니다 ^^; 특히 조선의 건국 초에는 나라를 다스릴 정보가 많이 필요했으므로 적극적으로 지리서적을 편찬했습니다. 팔도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조선의 지리학적 지식이 후기에 비해 크게 보잘 것 없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팔도지리지>

그리고 대동여지도 얘기 중에 가장 웃긴 것이 전국 답사를 해서 지도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김정호가 초인도 아니고 모든 조선 땅을 돌아보지 않았을 겁니다 ^^; 답사를 가기도 했겠지만 예전 지도 역시 참고한 끝에 대동여지도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죠. 아시겠죠? ^^

성리학이 심화되어 조선에 만발하다

조선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성리학입니다. 하지만 조선 왕조가 처음부터 성리학의 꽃을 피웠던 것은 아닙니다. 한 학문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려면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요. 게다가 처음 조선의 개국을 주도했던 사대부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성리학만을 고집하지는 않아서 탄력적으로 다른 학문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건 훈구파할 때 배웠지요? ^^ 하지만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점점 사림 세력들이 정치 주도권을 잡아나가는 과정에서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연구가 뿌리 내리기 시작합니다.

 

<퇴계 이황, 동양의 주자로 불리지만 우리에겐 천원 할배에 불과하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나타나는 것이 이기론입니다. 이기론은 성리학에 가장 중심이 되는 원리로 조선시대 수많은 유학자들이 이를 연구했습니다. 특히 퇴계 이황은 이기론을 정립하는 데 큰 공헌을 세운 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이언적의 주리론을 더욱 심화 발전 시켰습니다. 이황의 주리론은 세상을 움직이는 근본원리인 이를 중요시한 것입니다.


 <5천원 아저씨인 율곡 이이,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5만원권 여사로 아들 위에 있다 ^^;>

반면 율곡 이이는 서경덕의 주기론을 계승하면서 이황의 주리론도 나름대로 받아들여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그의 주기론은 실제 나타나는 현상인 기를 중요시했습니다. 두 학자의 이와 같은 차이는 그 당시 정치상황을 감안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황의 경우 아직 사림이 정치적 주도 세력으로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적인 기를 강조하기 보다는 원리, 원칙을 강조하는 이를 깊게 연구했고 이제 사림이 완전히 정치적 주도 세력으로 떠오른 율곡 이이 대에는 현실적 현상을 연구하는 기를 연구한 것입니다. 이 같은 정치 상황 차이에 주목 한다면 두 학자의 학문적 차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이런 학문 차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입장차이로도 이루어져 나중에 붕당이 탄생하는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성리학자들의 학맥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림의 계보, 영남은 경상도 지방을 뜻하며 기호는 경기와 충청 지방을 말한다>

 정치세력에 따라 바뀌었던 양반문화

조선의 지배층은 양반으로 이들이 향유했던 문화를 바로 양반문화라고합니다. 하지만 양반이라고 해도 조선 초기와 중기 양반에 대한 성격은 사뭇달랐습니다. 개국초의 양반들은 훈구파라고 불리우며 성리학 외에도 다양한 문화를 수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그런 그들의 성격이 그들이 향유했던 문화에도 나타났는데요. 유교를 고집한 그림 보다는 도교나 노장사상이 녹아있는 그림도 제법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몽유도원도나 고사관수도에 나타납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의 꿈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으며 당대 유명한 문사들이 이 그림에 대한 찬을 달았다>

하지만 사림이 집권하고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양반 문화에 변화가 생기는데 주로 소박함, 지조 등을 나타내는 작품들이 나타납니다. 서원이 많이 건축되었으며 선비의 지조를 나타내는 매화, 난, 국화, 대나무를 그린 사군자의 문인화가 유행했습니다. 또한 도자기도 화려함 보다는 소박, 담백한 맛이 있는 백자가 유행했습니다.

 <사림들의 단아함이 느껴지는 백자, 허접해 보인다고? 이 백자는 미국에서 경매 결과 12억원에 팔렸다>

또한 한글 보급이 확대되면서 그에 따른 가사. 시조 문학이 발전했으며 황진이, 신사임당 같은 여류 문인들의 활동도 눈에 두드러졌습니다. 

사림들이 학맥에 따라 정치적 입장이 달랐던 까닭은?

사림들이 주도권을 잡은 이후로 붕당정치가 전개되어 나가는데 이 붕당은 주로 같이 공부를 한 사이거나 스승과 제자 사이에 주로 형성되었습니다. 정당에 일종이라고도 볼 수 있는 붕당이 왜 학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지 그 이유를 말할 수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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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2) 유교 정치의 이상을 꽃피운 조선
2-1 민본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통치 체제를 갖추다

조선은 무능한 나라일까?

우리가 역사를 배우면서 까고 까고 또 까는 나라가 하나 있습니다. 이토록 미칠 듯이 무한 까임을 당하는 나라가 바로 조선입니다. 여러분 조선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나요? 실질적 정치에는 관심없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했던 양반들, 상복을 몇 년 입느냐로 싸웠던 정치싸움, 무능력한 지배층 때문에 일본에게 망한 치욕스러운 나라. 이 모두가 사실은 일본이 설정한 '식민사학'이 조선을 깎아내리는 틀이라는 걸 알고 계십니까?

<일본이 설정한 식민사학의 잔재는 조선을 무능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러나 조선이 그렇게 무능했던 나라였을까요? 결론부터 얘기하면 아니였습니다. 조선이 건국의 이념으로 삼은 성리학은 백성을 어떻게 하면 잘 살게 할지 고민하는 학문이었습니다. 거기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어디까지나 공론(공공의 의견)을 중시하며 움직였습니다. 이러한 것만 봐도 조선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백성을 생각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조선이 세워지는 과정을 함께 살펴보도록 합시다. ^^

최초의 역성 혁명이 일어나다

고려 말기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권문세족들은 산과 강을 경계로 토지를 소유할 만큼 엄청난 토지를 차자하고 있었으며 또한 세금도 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고려 초기 부터 국가 종교였던 불교도 타락할 대로 타락하여 농민을 쥐어짜고 있었습니다. 농민들은 결국 세상을 등지고 산에 숨거나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 바로 신진 사대부였습니다. 이들은 성리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에 통감하고 권문세족과 불교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등장했습니다. 이들 신진 사대부는 처음에는 고려를 개혁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가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 새 왕국을 개창할 결심을 합니다.

이들은 이성계와 같은 신흥무인층과 손을 잡았는데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떠나는 도중 돌연 군사를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남아있던 권문세족들을 모두 제거하여 신진 사대부들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권력을 잡은 신진 사대부들은 토지 개혁(과전법)을 통하여 권문세족들의 토지를 빼앗고 자신들의 경제 기반을 다졌으며 국가 재정기반도 확충시켰습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고려 왕조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정몽주 일파는 온건파로 가고 새로운 나라를 나라를 개국하자는 정도전 일파는 개국파로 나뉘어 첨예한 대립을 거듭하다 온건파였던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게 맞아 죽습니다. 이로써 조선 건국에 방해되는 인물은 없어지고 1392년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가 개창됩니다.

<정몽주가 죽었다고 전해지는 선죽교, 아직도 혈흔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왕권과 신권의 절묘한 조화

조선은 백성을 근본을 삼고 덕에 의해 통치하는 유교 정치 이념에 따라 정부기구를 조직했습니다. 따라서 왕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신하가 왕권을 견제함으로써 정치 참여 인원을 늘려 왕이 잘못해도 바로 잡을 수 있는 정치체제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조선의 중앙 정치 기구>

의정부는 대신들이 모여 회의하는 합좌 기구로 고려시대 식목도감, 도병마사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며 삼국시대의 귀족회의에서부터 그 기원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의정부 밑에서 실질적으로 행정 업무를 담당한 6조가 있었습니다. 보통은 국왕은 의정부를 거쳐서 6조의 업무를 보고 받았지만 왕권이 강할 때는 의정부의 동의 없이 직접 6조와 연결되었습니다. 의정부와 국왕이 상의하는 것을 의정부 서사제라 하며 의정부를 통하지 않고 국왕이 직접 6조와 통하는 것을 6조 직계제라 합니다. 6조 직계제는 태종과 세조 때 시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정치기구에서 보다 눈에 띄는 것은 바로 3사로 대표되는 왕권을 견제하는 신권기구들이였습니다. 3사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으로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사헌부, 국왕의 정치를 비판하는 사간원, 학술기관으로 국왕과 신하들이 같이 모여서 공부하면서 정책을 논의하던 홍문관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고려시대 대간이 가지고 있던 간쟁, 서경, 봉박의 권리를 가지고 국왕을 견제했습니다.

<통초오옥 하여 주시옵소서~ㅠㅠ 왕이 듣기에는 짜증났겠지만 신권은 왕권을 견제하고 정치 참여의 폭을 넓혔다>

하지만 이렇게 신권만 강대했던 기구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의 비서 기관이었던 승정원과 왕의 특명에 의해 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가 있었는데 이것은 왕권을 유지하거나 강화하는 기구였습니다. 이 같은 조선의 통치체제는 경국대전이라는 책에 수록됨으로써 조선이 명실상부한 법치국가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왕의 힘이 모든 지방에 미치다

조선은 건국하면서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것을 천명하는데 그 의지가 어디에서 나타나냐면 바로 지방정치체제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조선은 8도로 행정구역을 나누고 향, 소, 부곡을 모두 폐지하여 행정구역을 모두 일원화하였습니다. 고려와 차이점이 느껴지시나요? ^^ 또한 고려때는 일부 지역만 지방관이 파견되었다면 조선은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어 왕이 직접 백성들을 돌보겠다는 뜻을 나타내었습니다.

<조선의 행정구역, 오늘날 행정구역과 거의 비슷하다>

지방 군현에 파견된 수령은 행정, 사법, 군사권 등 막대한 권한을 모두 장악했습니다. 수령의 힘이 강해지자 이때까지 지방에 강력한 유력자였던 향리는 그 지위가 격하되어 수령을 보좌하는 역할로 하락했습니다. 누군가 머리 속에 떠오르지요? 바로 이방이 그들입니다 ^^;

<지방의 향리들은 이제 이방과 같은 위치로 크게 격하되었다>

또한 각 도에는 관찰사가 파견되었습니다. 고려 시대때 안찰사가 파견되었던 것이랑 비교해볼 수 있겠지요? ^^ 이들은 각 군, 현에 파견된 수령을 관리, 감독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고려시대 안찰사가 임시직이었던 것에 비하여 관찰사는 그 지위가 보장되어서 안찰사보다 훨씬 힘이 강했답니다.

또한 향촌의 자치를 어느 정도 인정했는데 그것을 유향소라는 기구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유향소는 지방에 덕망있는 인사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수령을 보좌하면서 서울에 있는 경재소와 수시로 연락했습니다. 중앙 정부는 경재소를 통해 유향소를 통제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의 장악력을 높였습니다.

진정한 과거제가 시작되다

우리나라 본격적인 과거제의 시작은 고려시대부터입니다. 그러나 고려시대 과거제는 조선시대에 비해 약간 미흡하다고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하나는 과거를 치지 않고도 음서로 관직 진출이 가능했으며 무과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조선시대 들어서 이 두 가지를 보완하여 음서가 존재했지만 매우 낮은 관직만 허용했으며 무과를 새로 개설했습니다.


<조선시대 무과 재현 모습>

조선시대 과거는 크게 문과, 무과와 기술직을 뽑는 잡과로 구분되었습니다. 과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문과는 소과와 대과로 구분되어 소과는 초시와 복시를 통과하면 생원과 진사라는 호칭을 주고 지금의 대학과 비슷한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습니다. 여기서 공부를 한 사람들은 대과에 도전하는 데 대과 역시 초시, 복시로 나뉘고 여기서 선발된 33명은 임금 앞에서 보는 시험인 전시를 통하여 순위가 매겨졌습니다.


 
<조선시대 과거 재현>

조선의 과거제도는 음서의 폭이 좁아지고 과거의 제도가 정교화 됨에 따라 고려 시대가 가지고 있던 귀족적 특성이 떨어져 나가고 관료적인 체제로 정비되었습니다.

양인과 천민으로만 신분이 구별되다

이제 조선의 신분제도를 살펴볼 차례네요 ^^ 조선 시대로 들어서면서 고려시대때 존재했던 향, 소, 부곡이 차별 받던 평민들이 없어집니다. 이들은 대개 양인의 신분으로 편입되었으며 양인은 군대를 가고 세금을 내는 신분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과거 응시 자격도 있어 벼슬을 하는데 법적으로는 아무 제한이 없었습니다. 다만 돈이 없어서 시험을 준비하지 못할 뿐이었습니다 ㅠㅠ

조선은 법적으로는 두 개의 신분 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바로 양인과 천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사회가 복잡하게 됨에 따라 양인들은 양반, 중인, 상민으로 분화되어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이라는 4개의 계급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양반 혹은 사족들은 군역을 면제 받는 특혜를 누렸으며 중인들은 주로 기술직을 맡았습니다. 지금의 의사나 통역관 같은 전문직들이죠 ^^ 상민의 대부분은 농민이었습니다. 천민은 대부분 노비였으며 이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물건처럼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농자천하지대본! 농민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국가가 되다

계속 하는 얘기지만 조선은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삼은 나라였습니다. 유교 정치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민생 안정이며 민생이 안정 되려면 백성들이 농사를 안심하고 지어야만 했습니다.

<농사는 조선 시대 최대의 관심사였다. 수많은 농사 관련 서적과 농사에 대한 토론이 이를 반증한다>

나라에서는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않고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방지하기 이해 사, 농, 공, 상이라는 말을 만들어 직업을 차별했고 이를 토대로 백성들을 농토에서 떠나지 못하게 강하게 결박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은 화폐 유통이 다른 나라보다 많이 늦어졌지만 16세기에 이르면 상공업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고 상공업과 무역이 활성되었습니다.

하지만 후대 상공업과 무역이 발달해도 여전히 가장 중요했던 것은 농사였겠지요? ^^ 왜냐하면 국가의 주요수입원은 농사를 짓는 데서 나왔으니까요. 농사를 잘 짓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세금을 어떻게 걷느냐 입니다. 특히 세종 시절에는 이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을 도입했습니다.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은 그 토지의 사정을 보고 세금을 걷는 방식입니다. 전분 6등법은 토지의 비옥도를 보고 토지가 비옥하냐 비옥하지 않느냐에 따라 1~6등전으로 등급을 매겨 세금을 징수하는 방법이고 연분 9등법은 그해에 농사가 어떻게 되었느냐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까지의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농민들이 세금을 깎으려고 했겠지요? ^^ 조선후기로 갈수록 이런 현상이 두드러져 인조 때 가면 세금이 최하 4두로 고정되는 영정법으로 바뀝니다.

농민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세금을 걷느냐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관리에게 월급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화폐가 유통되기 어려웠던 시절로 주로 토지를 매개로 월급을 주었습니다. 최초에 시행되었던 관리들의 월급제도는 과전법으로 경기도 지역의 토지의 수조권(세금을 걷을 권리)을 관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전은 관리가 죽으면 반납해야했지만 수신전(미망인에게 지급), 휼양전(미성년인 자식에게 지급)의 명목으로 세습이 가능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현직 관리들에게 줄 과전이 부족해졌고 세조 때는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마저 잘 안되자 성종 때는 관리들이 수조권을 직접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직접 수조권을 행사하여 대신 관리의 과전에서 대신 세금을 받아 다시 관리에게 그 수익금을 지급하는 관수관급제로 바뀌었습니다.

<부동산에 대한 규제가 심해지면 부동산을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커지는 것처럼 관료들은 수조권을 받기 어려워지자 토지를 소유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규제가 심해지면 다른 수단을 강구하게 되는게 인간이죠 ^^; 결국 관료들은 과전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기 보다는 자신이 직접 토지를 사유화하는 길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결국 국가는 관료들에게 수조권을 주는 것을 포기하고 녹봉만 지급하게 되었습니다.

평민들은 왜 과거를 볼 수 없었나?

조선시대 평민들은 법적 신분은 모두 양인으로 과거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과거를 보지도 않았거니와 과거를 보기도 힘들었는데 어떤 이유에서 그랬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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