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1) 민족을 재통일하여 발전한 고려
1-4 고려와 이웃 나라들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

우리 보통 하는 말이 있지요?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그런데 역사에서도 이런 말이 어울리는 나라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려입니다.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야 ^^;;>

고려는 유난히 외침이 많았던 나라입니다. 초기에는 거란의 3차례에 걸친 침입이 있었고 그 이후 여진족의 잦은 침입으로 여진족을 정벌하러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고려중기에는 몽골에 여러 차례 침입을 해와 전 국토가 초토화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또한 고려 후기에는 중국의 홍건적, 일본의 왜구들이 계속 침입하였습니다. 이처럼 고려는 수 많은 외침을 받았고 어떤 때는 그 침략을 훌륭히 막아내었지만 그렇지 못하여 굴복했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고려의 북쪽 국경은 점점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우리나라의 북쪽 국경 변천과정, 고려 후기에 가면 상당한 정도로 영토가 확장된다>

유난히 외부의 침략도 많았지만 그것을 잘 이겨내었던 고려. 지금부터 고려가 어떻게 외부 침략을 이겨내고 혹은 굴복하면서 북쪽의 영토가 어떤 과정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지 살펴보겠습니다.

호족, 거란에 굴하지 않는다

고려의 대외관계 변화는 고려 지배층의 성격에 따라 파악해볼 수 있습니다. 고려 초기 지배층은 호족들로 이들은 지방의 유력가였고 자기 지역에서는 왕과 같았기 때문에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중국 것보다는 우리나라 것에 만족했고 당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당당한 사람들이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는 때에 고려를 넘보는 외부 세력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거란이었습니다. 거란은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송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고 중국 본토를 넘보고 있었습니다. 거란은 송나라 치기 위해서는 배후의 고려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또한 고려는 송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고려 정벌의 필요성이 부각되었습니다. 

 <송과 고려는 친선, 거란은 고려와 적대 관계에 놓여 있었다. 요는 후방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한편 고려는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고 태조 왕건때 부터 적극적인 북진 정책을 펴나가고 있었던 상태로 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던 거란과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 더 관계가 나빠져 거란이 선물로 보내온 낙타 50여 마리를 굶겨 죽였습니다. 

거란은 고려가 계속 송과 손을 잡아 자신들과 대적할 경우 국제사회에서 고립될 위험이 있으므로 고려 정벌을 단행하기에 이릅니다. 총 3차례에 걸쳐서 거란이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고려의 지배층들인 호족은 거란에 침입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1차 침입에서는 서희가 외교 담판을 벌여 거란군이 물러가고 강동 6주를 차지했습니다. 대신 고려 역시 송과 국교를 단절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거란 역시 어느 정도 목적은 달성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끊겠다고 한 말은 사실이었을까요? 우리 모두 알고 있지요? 그간의 배신의 흑역사들을 ㅋㅋ 당연히 이것도 구라였습니다 ^^;

 <그럼 바구니에 있는 다시다는 뭔가? ㅋ 거란 역시 구라빨에 속아넘어가고 말았다>

고려가 계속 거란 몰래 송과 교류를 하자 거란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알지요? 깨달았을 때가 가장 늦었다는 것을 ㅋㅋ 거란은 송과의 관계를 끊고 고려 국왕이 요나라 황제를 알현하라는 조건을 걸고 재차 침입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고려는 잘 막아내었고 3차 침입에서는 강감찬이 구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침으로써 고려-거란 전쟁은 고려의 승리로 돌아갑니다.

 
<귀주대첩>

고려가 거란에 승리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는 고려, 송, 요 삼국이 세력 균형을 이루어 평화가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평화롭다고 해서 마냥 평화를 만끽하면 안되겠죠? 고려는 이 시기 또 다른 외침에 대비하여 북쪽에 천리 장성을 쌓았습니다. 

이 시대 마지막 호족들, 여진을 정벌하다

거란-고려 전쟁에서 고려의 승리로 한동안 고려는 안정을 찾았지만 12세기 초무렵 여진족이 고려 북쫑 변경에 나타나 고려에 깔짝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꼴을 눈뜨고는 못보는 우리 호족들은 여진족을 토벌하기 위해 전략을 짭니다. 이때 윤관을 대장으로 한 별무반이 새롭게 조직되는데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으로 구성되어 여진족을 토벌했습니다. 이들은 동북방 지역에 9성을 쌓고 여진족을 몰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윤관이 쌓은 동북9성>

하지만 동북지방은 여진족들의 중요한 터전이었기 때문에 여진족들은 이 동북 9성을 빼았으려 쉴새없이 쳐들어 왔으며 한편으로는 다시는 나쁜 짓 안하겠다며 고려 국왕한테 애걸복걸 하기도 했습니다. 

 <동북9성 제발 주세요 ㅠㅠ 흐헝 ㅠㅠ 돌려주셔서 감사해요 ㅠㅠ>

결국 여진에 간청과 동북9성을 끝까지 지키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고려 정부는 동북9성을 반환하기로 합니다. 동북9성을 발판으로 성장한 여진은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을 건국합니다. 여진이 세운 금나라는 매우 강성하여 송나라 마저 정복하여 남쪽으로 밀어내기에 이릅니다. 이제 강대해진 금은 고려와 입장이 반대가 되어 군신관계를 요구합니다. 예전에 호족들이었다면 이 제의를 받아들이기 곤란했지만 그 동안 고려 내부에서도 지배층의 변동이 있어 문벌귀족이 지배세력이었습니다. 이들은 변화보다 안정을 추구했기 때문에 금과의 사대관계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로써 동아시아에서 유지되었던 세력균형을 깨어지고 금이라는 강자가 국제사회를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몽골과 맞선 무신들

금이 일어서고 한 동안 국제사회는 금에 의해 주도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13세기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나라를 끝장내는 종결자가 등장했으니 그 이름도 유명한 징기스칸이었습니다. 


 <몽골제국의 판도, 그들의 말발굽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당연히 몽골은 고려와도 접촉을 했는데 그 첫만남은 유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강동성 전투에서 몽골과 고려는 처음으로 만난 이후 몽골은 과대한 공물을 고려에게 요구했습니다. 특히 몽골 사신은 오만방자한 행동을 하여 고려 사람들의 불만을 샀습니다. 이처럼 양국 간에 관계가 지극히 좋지 않을 때 불미스러운 사거인 발생하는데 몽골의 사신이었던 제구유가 고려와 몽골 국경지대에서 피살당하자 양국 간의 관계는 겉잡을 수 없이 나빠졌습니다. 몽골은 고려와의 관계를 끊고 살리타가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니 이것이 고려-몽골 전쟁의 시작입니다.

1차 침입은 개경에서 방어했지만 몽골과의 육지에서 싸우면 질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챈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항전 태세를 갖춥니다. 결국 이렇게 되면 불쌍한 것은 백성들입니다. 총 일곱차례에 걸쳐 40년이나 침입한 몽골군은 육지를 철저히 휩쓸었고 백성들이 농사를 짓는 농토는 황폐화되었으며 수많은 문화 유산들이 불에 탔습니다.

<몽고의 침입, 고려의 백성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백성들은 이렇게 힘이 든 와중에도 몽골군과 맞서 싸워 승리하기도 했는데 처인성에서는 당시 일반 군현보다 신분이 떨어지는 부곡민을 이끌고 몽골 장수 살리타를 죽였습니다. 또한 충주성에서는 노비로 구성된 군대가 몽골군을 물리쳤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활약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쟁으로 인한 신분 상승이라는 강력한 동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40년 동안의 몽골항쟁은 백성들에게 극심한 고통만 남긴 채 몽골에 항복하는 것으로 결론이 맺어졌습니다. 더불어 몽골과의 항전을 주장하던 무신정권도 종말을 맞고 맙니다. 그런데 이때 무신정권 하에서 큰 세력을 누리던 무신들의 사병 집단인 삼별초는 몽골과의 항전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삼별초 항쟁의 지도, 삼별초는 민족적 항쟁인가?>

삼별초는 진도,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겨가며 몽골과의 항전을 수행했지만 결국 고려 관군과 몽골군 연합에 진압되고 맙니다. 이들이 몽골군에 대항한 것은 어디까지나 무신정권 하에서 누려오던 자신의 권력을 놓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지 민족적 대의를 가지고 몽골군에게 대항했던 것은 아닙니다. 특히 제주도까지 옮겨서 수행했던 항전은 제주도 백성들에게도 고통이었습니다. 제주도 백성들에게 삼별초나 몽골군이나 마찬가지 침략군이었습니다.

삼별초 항쟁이 마무리되고 더 이상 고려에는 몽골에 대항할만한 세력이 없어졌습니다. 몽골은 고려에 굴욕적인 강화 조건을 강요했습니다. 고려 국왕은 원나라 황제의 딸과 결혼을 해야 했으며 다루가치가 파견되어 고려 내정에 간섭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외왕내제 체제를 유지하며 대내적으로 황제국 행세를 하던 고려는 더 이상 황제국을 자처할 수 없었으며 폐하는 전하로, 짐은 과인으로 태자는 세자로 그 격이 제후국으로 떨어졌습니다. 또한 몽골이 준비하던 일본원정 준비도 고려가 담당해야 했으며 영토의 일부마저 빼앗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굴욕적인 강화조치는 공민왕의 개혁 조치로 사라지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 남아있었습니다. 공민왕의 개혁 시기에도 외침이 끊임없었는데 이때는 왜구, 홍건적들이 줄기차게 침공했고 이들을  최영, 이성계 등이 막아내면서 고려 후기에 신흥 무인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고려 후기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이들을 격퇴하면서 신흥 무인세력이 성장한다>

고려, Korea를 알리다

우리나라의 영어 이름이 Korea인건 다들 아시죠? 그런데 우리나라의 외국 명칭이 고려라는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우리나라의 기록이 서양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루브룩이라는 선교사가 몽골 동쪽에 카울리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당시 프랑스 국왕이었던 루이 9세에게 보고하면서 최초로 등장했습니다. 이후 카울레, 카우리로불리다가 차츰 코리아로 자리를 잡아가게 됩니다. ^^

자, 그럼 코리아라는 이름을 알리게 된 고려의 대외관계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11세기에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면서 고려, 송, 요 간에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는 걸 여러분은 잘 아실 겁니다. 특히 고려는 그 당시 우수했던 송의 문하를 받아들이기 위해 송과의 교류에 적극 신경을 썼습니다. 특히 송의 상인들과 고려의 상인들은 수시로 송과 고려를 왔다갔다 했습니다. 송의 상인들의 활발한 교역 덕분에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고려에 들어오게 됩니다. 아라비아 상인들은 '대식국' 사람들로 기록이 되어 있으며 이들은 국제 무역항이었던 벽란도를 통해 서역의 물건이었던 수은, 향료, 산호 등을 가지고 왔습니다. 

 <고려 초기 교역>

 고려 후기에도 교역은 끊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고려가 원에 복속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려는 원제국의 일원으로 활발해지는 동서 문화 교류에 일원이 되었습니다. 

쌍화점의 의미

여러분 쌍화점이라는 고려가요를 아시나요?

 <이거 말고-_->

쌍화점은 회회아비가 등장하고 회회아비가 한 여인에 손목을 쥐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이 고려가요를 보고 고려 시대 상이 어땠을지 고려의 대외관계와 고려 여성의 지위를 감안해서 생각해시기 바랍니다. ^^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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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사회탐구영역 국사 5번문제>

제시한 자료를 읽고 정답을 추론하는 문제입니다. (가)는 동모산에 성을 쌓았다는 내용만 봐도 발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발해 남쪽에 있었던 (나)는 신라라는 것을 금방알 수 있겠죠? 그럼 선택지를 분석해봅시다. ① 발해 지역은 논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곳은 아니었고 주로 밭농사와 목축을 했습니다. ② 발해가 있던 시대는 남북조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발해는 당과 교류했습니다. 또한 발해는 북방 유목 민족이었던 돌궐과도 활발한 교류를 했습니다. ③ 신라에 이슬람 상인이 드나들었고 그 증거로 이슬람 지도에 신라가 표시되기도 했습니다. ④ 서시와 남시를 증설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데 695년으로 통일신라 시기에 해당합니다. ⑤ 발해와 신라는 동해안을 따라 이어진 교통로인 신라도를 이용해 교류했습니다. 따라서 옳지 않은 것은 ②입니다.

<2010학년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주관 9월 모의고사 사회탐구영역 국사 15번 문제>

제 기억에 이 문제가 난이도가 상당해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틀렸던 문제입니다. 먼저 지도를 보면 (가), (나), (다)가 발해의 5대 교통로에 해당됩니다. (가)는 조공도, (나)는 일본도, (다)는 신라도입니다. (라)는 신라가 당항성을 통해 당과 교류했던 것이고 (마)는 신라와 일본간의 교역로에 해당합니다. 먼저 지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바다에 풍랑이 심할까 염려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것을 봐서 적어도 교역로는 바다라는 얘기가 됩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가), (나), (다), (라), (마) 모두 바닷길이니 큰 힌트가 되진 못하네요 ^^; 그렇다면 팔려는 물건으로 구별하는 수밖에는 팔려는 것이 모피, 인삼, 말 등으로 북방에서 나는 교역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모피는 발해에서 나던 대표적 교역품 중 하나였습니다. 따라서 (다), (라), (마)를 제외합시다. 또한 돌아올때 비단과 책을 구한다고 했는데 이것을 보아 일본과 교역을 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비단과 책을 수입한 나라는 대대로 중국이었습니다. 일본은 주로 은이나 유황 등의 제품을 들여왔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①입니다.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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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1) 민족을 재통일하여 발전한 고려
1-3 문벌 귀족 사회가 동요하다 


오늘 수업은 잠깐 혼란 스러울 수도 있을 거에요. 교과서 중간을 건너뛰고 고려의 문화부터 해야되서 그래요 ^^ 너무 혼란스러워 하지 마시고 차분히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 

막장드라마! 문벌 귀족

여러분 막장 드라마 많이 보죠? 막장 드라마 보면 항상 나오는 패턴이 뭔가요? 사실은 내가 내 딸이다 부터 시작해서 둘이 남매여서 이루어지면 안 되는데 사실 그 아이가 병원에서 바꿔치기 되어서 어쩌고 저쩌고...; 참 복잡하시죠? 

<ㅠㅠ 얽히고 섥혀있는 가족 관계. 내가 이래서 드라마를 안 본다;>

그러나 여러분 고려시대에도 막장 드라마가 존재했다면 그것이 믿어지십니까? 긴 설명이 필요없고 고려 왕실과 그 당시 문벌 귀족의 하나였던 경원 이씨와의 가계도를 살펴봅시다.

<인종의 어머니인 문경 태후의 동생과 인종이 결혼했으니 인종은 이모들과 결혼한 셈이 된다>

딱 봐도 한 사람의 딸 들이 고려 왕들에게 시집을 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 당시 문벌귀족들은 혼인을 통해 자신들의 세력 기반을 다지고 앞 시간에 얘기했던 과거, 음서를 통해 관직을 독점했습니다. 또한 관직에 나가면서 그에 대한 댓가로 받는 과전과 더불어 5품 이상 관리나 공신이었던 이들은 공음전 역시 받아 경제적으로도 탄탄한 기반한 구축했습니다.


 <세상은 돈과 권력! 문벌귀족은 이 모두를 음서와 공음전으로 확실히 틀어쥐었다>

이렇게 자기들끼리만 해쳐먹은니까 다른 사람들이 배가 많이 아프겠죠? 그래서 문벌귀족에 반발하는 반란이 일어났는데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도 바로 이런 문벌귀족이 독점적인 세력을 형성한 상태에서 일어났습니다. 

문벌귀족의 대표적인 세력 중 하나였던 경주이씨의 이자겸은 그 위세가 자못대단했습니다. 인종 때에 이르러서는 두 딸을 왕에게 시집보내고 주요관직을 자신이 차지하고 왕에게 행해야하는 여러 격식을 폐지하여 왕처럼 지냈습니다. 왕처럼 지내다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결국 자신이 왕을 하고 싶겠지요? 그래서 이자겸은 척준경이라는 사람과 함께 1126년에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이자겸의 난이라고 합니다. 척준경은 당시 최고의 무장으로 강력한 군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윤관이 동북 9성을 개척할 때 여진족을 미친듯이 쓸어버리는데 적진에 돌입하여 적장을 배고 포로 두명을 구출해오는 등의 엄청난 일을 합니다. 그만큼 척준경의 무력이 강대했다는 뜻이죠. 아무튼 이런 강력한 척준경과 손을 잡았으니 이자겸이 눈에 뵈는 게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는 것이 자신을 철석같이 도울 줄만 알았던 척준경이 배신을 때립니다. ㅠㅠ

<아 그렇게 잘해줬것만 ㅠㅠ 성왕, 신라에 이은 또 하나의 배신의 역사가 탄생되다 ㅋ>

여진족도 바르던 척준경인데 이자겸쯤이야 허접이겠죠? 가뿐히 이자겸을 제거합니다. 이로써 문벌귀족 사회는 더욱 더 혼란이 가중되기에 이릅니다. 강대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없어지면 그 권력을 가지기 위해 다른 사람이 달려들기 마련이죠.

문벌귀족 사회의 혼란에 또 다시 기름을 들이부은 것은 바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었습니다. 묘청은 스님인데 이 스님은 배짱이 장난아니었나 봅니다. 풍수지리설을 내세우면서 서경에 천도하고 칭제(황제를 칭하고) 건원(연호를 쓰면)을 하면 주변 36개 나라가 모두 조공을 하고 당시 동북아의 최강국가였던 금나라를 정벌할 수 있을거라는 희대의 사기를 칩니다!

<벌거벗은 임금님급의 사기를 치는 묘청, 처음에 국왕이었던 인종도 혹한다>

하지만 옆에서 보고 있던 문벌귀족 역시 당하고 있지 만은 않았습니다. 수도를 서경으로 천도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온갖 기득권이 있는 개경을 떠난다는 얘기와 일맥상통합니다. 수도를 떠나서 뉴타운 개발되면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는 것은 당연지사! 문벌귀족들은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안 된다고 소리칩니다.

<통촉 ㅠㅠ 문벌귀족들은 떼쓰기 스킬을 시전한다>

게다가 서경에 연이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자 막상 천도하려고 했던 인종 역시 떨떠름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생각처럼 서경천도가 진행되지 않자 묘청은 자작극을 꾸미기 시작합니다. 연못에다가 떡을 던져 떡에 있는 기름이 연못 위에 떠오르자 오색 영롱한 기운이 연못에 떠올랐다고 구라를 칩니다! -_- 구라도 길어지면 속는 사람이 알아차리는 법. 이로 인해 인종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서자 묘청은 서경을 중심으로 하여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로 정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결국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게 1년만에 제압당했습니다.

칼을 쓰는 무인의 시대

문벌귀족 사회는 일단 큰 위기는 넘겼으나 이 두번의 커다란 난은 그들에게 시한부 선언을 한거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문벌귀족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계속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며 개혁에 대한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더구다 오만방자해진 그들은 무신을 툭하면 무시했습니다. 특히 하급 군인들은 생계수단이었던 군인전마저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번번히 국가 잡역에 동원되자 불만이 높아졌습니다. 이와중에 무신들의 불만에 기름을 들이붓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문벌귀족 김부식의 아들이었던 김돈중은 무신 중 높은 위치에 있었던 정중부의 수염을 태웠는데 정중부가 이에 화가 나 김돈중을 크게 혼내자 김돈중의 아버지였던 김부식은 오히려 정중부를 벌주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무신들의 불만은 한계점에 이르렀고 결국 정중부, 이의방 등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켰는데 이를 무신정변(1170)이라고 합니다.
 

<무신정변, 보현원에서 문신들이 제거되고 무신들의 시대가 열리다>

무신들은 무력으로 그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았습니다. 조위총, 김보당 같은 인물들이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문벌귀족과 깊은 연관이 있던 교종의 불교사원인 귀법사도 난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무신들 간에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도 끊이지 않았는데 정중부, 이의방, 경대승, 이의민 등이 차례로 권력을 잡아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다 최충헌이 권력을 잡은 이후 무신정권도 안정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최씨정권은 총 4대에 걸쳐 60년간 유지되었습니다. 이들은 도방과 삼별초라는 사병집단을 두어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했으며 교정도감, 정방을 통해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또한 최씨 정권의 2대 집권자인 최우부터는 문신을 등용하기도 했는데 능문능리(能文能吏 : 능할 능, 글월 문, 능할 능, 아전 리)를 앞세운 관료를 등용했습니다. 능문능리란 학문이나 이론적 인재보다는 실재 행정에 밝은 인재를 뜻합니다. 이때 신진사대부들이 등용되기도 했으며 이규보 등이 유명했습니다.

몽골의 침입으로 등장한 권문세족

무신들의 정권은 정확히 100년이 지속되었는데 이들이 무너진 이유는 바로 몽골의 침입 때문이었습니다. 새롭게 초원의 강자로 등장한 몽골은 고려를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몽골의 압력에 무신정권은 강경하게 대응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강경하게 대응한 이유는 이들이 애국지사이거나 민족의 영웅이여서 그런게 아니고 몽골에 굴복하면 그들의 권력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신들이 넘치는 기상과 절개가 있어서 몽골에 항복 안 한게 아니다. 그들은 단지 권력의 노예였을 뿐>

어쨌든 당시 세계최강이었던 몽골과의 전쟁은 고려의 패배로 끝나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무신들은 권력을 잃게 되고 대신 원나라와 친한 권문세족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권문세족은 원나라 황제의 고려 출신 황후였던 기황후의 친인척 관계이거나 혹은 원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였습니다. 이들은 학문적 소양이 많이 딸렸고 믿을 것을 오로지 원나라 밖에 없었습니다. 네, 전형적인 간신배가 연상되죠? ^^;

<딸랑딸랑. 머리에 든 건 없어도 간신배 짓은 잘할 수 있다 ^^;>

어쨌든 권문세족들은 원나라와 친하게 지낸 덕분에 큰소리를 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배운 건 별로 없지만 원나라한테 샤바샤바를 잘한 덕에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했고 중신들의 회의기구였던 도평의사사를 장악하여 엄청난 권력을 누렸습니다. 이들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고려 국와은 몽골 침입이후 대대로 몽골 공주와 결혼을 했기 때문에 원나라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원과 친했던 권문세족들을 건드릴 수 없었고 이를 안 권문세족들은 토지를 마음대로 늘리고 백성들을 쥐어 짜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당시 권문세족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는지 청산별곡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렇게 권문세족들의 횡포가 심해지자 이를 못 마땅하게 지켜본 세력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신진 사대부였습니다. 이들은 무신정권 때부터 천천히 관직에 진출했고 공민왕의 반원 개혁 정치 때 급격한 성장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성리학을 공부하여 학문적 소양이 우수한 편이었고 경제적으로 중소 지주로서 권문세족들의 대토지 소유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원나라를 싫어했고 대신 중원에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명에 대해 우호적이었습니다. 지금 이들의 힘은 미약했지만 나중에 조선의 건국을 이끌어 가는 주요 세력이 되었습니다.

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1) 민족을 재통일하여 발전한 고려
1-5 개방성을 띤 고려사회, 1-6 귀족 문화의 꽃이 피다

신분상승이 가능하며 진취적 여성이 있던 고려 시대

잠시 고려의 대외 관계는 건너뛰고 고려의 문화를 먼저 배워봅시다 ^^ 고려의 대외 관계는 할 얘기가 많아서 나중에 자세히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고려시대는 신라 사회와 비교하여 제한적이긴 하지만 신분 상승이 가능했습니다. 신라는 골품제라는 특유의 신분제가 있기 때문에 진골이 아니라면 높은 관직과 관등을 차지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고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방의 향리들은 과거를 통해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었고 군인들은 외적의 침입이 많았기 때문에 군공을 쌓아 무관으로 출세할 수도 있었습니다.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 진골이 아니라면 1~5품의 관등에 오를 수 조차 없었다>

특히 하극상(부하가 상관의 목을 치는!)의 시대였던 무신정권 기에는 천민 출신이지만 최고 권력자까지 오른 이의민이라는 인물까지 등장했습니다. 이에 자극 받은 하층민들은 신분 해방 운동을 벌였습니다. 신분해방운동에는 대표적으로 만적의 난이 있습니다. 만적은 이의민 집의 종으로 자신의 주인기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결국 난은 실패로 돌아갑니다만 신분 해방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대몽항쟁기간에는 군공이 쌓이면서 특수 행정 구역이었던 향, 소, 부곡이 일반 군현으로 승격되는 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인생역전! 전란은 백성들에게 괴로움을 가져다 주지만 신분 상승의 기회도 동시에 가져다 준다>

고려의 신분제 사회에 대해서 알아보았으니 이제 여성에 대해 알아봅시다.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여성사를 매우 좋아한답니다. ^^ (관심있으시면 한국 여성사 편지라는 책을 읽어보세요. 나는 좀 더 수준이 있는 책을 원한다고 하시면 '대중독재와 여성'이라는 책을 읽어보세요. 뒤에 책은 매우 많이 어렵습니다 ^^;;) 고려는 여성에 관해서는 개방된 사회였습니다. 어떻게 여성에 관해 개방된 사회인지 알 수 있냐면 재산 상속에 관한 것을 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어떤 사회든 재산 분배의 형태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느냐를 보면 그 계층이 그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자녀가 여자라도 균분 상속이 가능했습니다. 이것 한 가지만 봐도 여성이 상당히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고려가요 중 하나인 서경별곡에 보면 적극적인 여성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어 이 당시 고려 시대 여성들이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적극적인 여성에 관한 재미있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

박유가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 지금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처를 하나 두는데 그치고 있으며 아들이 없는 자들까지도 감히 첩을 두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청컨데 여러 신하,관료들로 하여금 여러 처를 두게 하되 품위에 따라 그 수를 점차 줄이도록 하여 보통 사람에 이르러서는 1인 1첩을 둘 수 있도록 하며 여러 처에서 낳은 아들들도 역시 본처가 낳은 아들처럼 벼슬을 할 수 있게 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나라 안에 원한을 품고 있는 남자와 여자들이 없어지고 인구도 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부녀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원망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때마침 연등회 날 저녁 박유가 왕의 행차를 호휘하여 따라갔는데 어떤 노파가 그를 손가락질하면서 "첩을 두고자 요청한 자가 바로 저 놈의 늙은이다."라고 하니,듣는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서로 가리키니 거리마다 여자들이 무더기로 손가락질하였다. 당시 재상들 가운데 그 부인을 무서워하는 자들이있었기 때문에 그 건의를 정지하고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다.                 <고려사>

이 같은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은 몽골이 우리나라에게 항복을 받으면서 수많은 공녀를 자신의 나라로 매년 끌고 갔는데 이로 인해 인구가 줄어들 것을 두려워하여 그에 대한 방편으로 박유가 일부다처제를 제안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엄청 혼나죠 ^^ 특히 재상들은 자신의 부인이 무서워서 이 법안에 찬성하지 않았다는 점을 봐도 고려시대에 여성의 지위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 재상들은 공처가였나 보다 ^^;>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운 고려

고려하면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화려한 문화입니다. 특히 고려 청자를 박물관에서 실물로 직접 본 사람이 있으면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연신 감탄을 하게 될 것입니다.

<국보 74호로 지정된 청자 오리형 수적(벼루에 물을 붓는 용기)>

하지만 고려 청자는 고려 귀족 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고려 시대에 이런 문화만 있었다고 생각하면 경기도 오산입니다. ^^ 음... 미안합니다-_-

<또 다시 무리수인가-_-;>

자 어쩄든 화려한 귀족문화로 대표되는 고려 청자 말고도 고려의 문화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고려는 불교가 국교인 국가로 불교에 관련된 유물과 유적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특히 여러 외적의 침입으로 인해 부처에 힘을 빌어 외적을 물리치려는 의도가 담긴 대장경이 많이 제조되었습니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이탈리아 장인들이 한땀 한땀... 아니 승려들이 한 글자 한 글자 정성들여 글자를 새겼다>

특히 몽골의 침입을 막기위해 제조된 팔만대장경은 2007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고 1995년에는 이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런 불교 문화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유학이 강조되고 과거가 실시 되면서 유교도 발전을 했습니다. 개인 문집이 많이 편찬되었는데 이규보의 동국이상집이 대표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알아볼 것은 고려 초기에 호족 문화에 관해서입니다. 호족들이 지배층일 당시 아직 사회가 혼란했으므로 호족들은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고 다른 사람들을 제압하기 위해 주로 규모가 큰 문화 유산들을 만들어내었습니다. 특히 관촉삭 석조 미륵보살 입상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대형 문화 유산을 건립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의 뒷모습,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대신 대형으로 만들다보니 세련된 맛은 떨어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도 이런 유산들은 그 당시 호족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어서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문벌귀족들은 왜 막장드라마를 썼는가?

선생님이 앞에 문벌귀족들이 막장드라마처럼 친인척끼리 결혼을 하기도 했다고 설명했지요? 이들이 왜 이런 결혼 형태를 보여주었는지를 잘 생각해봅시다. ^^ 정답은 수업 시간에 공개됩니다.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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