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1) 민족을 재통일하여 발전한 고려
1-1 후삼국을 통일하고 새 시대를 열다

통합의 리더십, 왕건

한국사의 여러 인물 중 여러분이 존경하는 다양한 인물이 있을 겁니다. ^^ (없으면 할 수 없고요 ㅠㅠ) 안중근 의사, 이순신 장군, 유관순 열사, 세종대왕, 광개토 대왕 기타 등등이 있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왕건이란 인물을 가장 좋아합니다. 왜 그러냐고요? 왕건이야 말로 진정한 통합의 리더십을 지녔던 사람이기에 그랬습니다 ^^

<진정한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했던 왕건>

왕건은 어찌되었든 후삼국의 통일을 이끈 승리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유리한 기록이 다소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가 늘 승자만을 위해 노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것을 감안할 때 왕건이 발휘했던 통합은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숙적이었던 견훤을 끌어안고 혼란한 시대를 도래하게 한 장본인이었던 신라 역시 끌어 안았습니다. 또한 수많은 호족들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게 됩니다. 이런 포용적인 힘 때문에 왕건의 출신이 그다지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결국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어찌되었든 분열된 나라를 다시 통합하고 일어선 고려라는 나라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봅시다. ^^

고구려 계승을 천명한 고려, 후삼국을 통일하다

신라 하대에 들어서면 강력한 왕권이 후퇴되고 귀족들이 발호하면서 나라는 혼란스러움의 극을 달립니다. 이런 혼란한 시대에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진 틈을 타 지방에서 호족들이 그 힘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전제왕권이 약해지자 각 지방에서 카라, 소시, 2NE1 등등이 일어나 혼란에 빠진... 응? -_-;;>

지금 우리 시대에 각 종 걸그룹이 들이 난립하듯이 지방에 호족들이 난립하면서 각자의 세력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 호족들은 자신이 다스리던 지방에서 장군, 성주 등을 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이런 호족들을 규합하고 큰 세력으로 성장해난 것이 후고구려의 궁예, 후백제의 견훤, 고려의 왕건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왕건은 해상 무역을 통해 성장한 호족으로 처음에는 넓은 기반이 없었으나 궁예의 부하로 많은 전공을 세웠고 특히 나주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자신의 세력 발판을 마련합니다. 이후 궁예가 내가 미륵불(석가모니가 입멸한 뒤 56억 7천만년--;; 후에 중생을 구제하고자 나타나는 미래불)-_-!이라는 무리수를 두자 과감히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이 스스로 왕이 되어 고려를 건국합니다.

<나는 미륵 ㅋㅋㅋ(왼쪽 궁예), 이 새끼가 드디어 미쳤구나-_-;(오른쪽 왕건)>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고 특유의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호족 세력을 통합했으며 밖으로는 중국 5대(중국의 당이 망하고 북중국에 들어선 다섯 왕조를 5대라 한다. 또 같은 시기 북중국을 제외한 지방에서 10개국이 들어서는데 이들을 10국이라 하고 이 시대를 통칭 5대십국이라 한다. 960년 송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오대십국 시대는 종료된다)와 외교관계를 맺어 대외관계를 안정시키고 후백제와 경쟁했습니다. 반면 신라에는 우호적인 태도로 다가가 신라의 민심을 사는데 성공했고 이는 결국 신라전체가 935년에 고려에 귀순하는 사태로 이어집니다.

신라가 귀순을 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힘이 있다고 돈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행동을 하는데는 명분과 대의가 있어야했습니다. 명분과 대의가 따르는 행동은 정당화가 되었으며 그것은 백성의 마음을 모으는 힘을 발휘합니다.

<대의는 추상적인 가치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실질적인 효과를 낸다>

신라가 고려에 귀순했다는 사실이 왕건에게 대의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신라 왕이 가지고 있던 정통성이 왕건에게 가는 역사적 순간이었고 이로 인해 후삼국 간의 싸움은 결정적으로 고려에 기울었습니다. 왕건이 견훤에게 수많은 패배를 당하고도 결국 마지막에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신라를 병합한 왕건은 후백제를 계속 압박했습니다. 이 당시 후백제는 내부의 심각한 왕위계승으로 인한 갈등을 겪고 있었는데 심지어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쫓겨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합니다. 왕건은 견훤을 받아들여 자신의 후백제 토벌의 정당성을 한층 더 공공히 다졌고 결국 936년에 후백제군을 격파함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했습니다.

한편 발해가 거란에게 926년에 멸망하는 데 이때 발해 왕자 대광현이 많은 유민을 이끌고 고려에 귀순해옵니다. 왕건은 이들을 받아들여 진정한 의미의 민족 재통일을 달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통일 이후 왕건의 통합정책

원래 창업(나라를 여는 일)보다 수성(나라를 지키는 일)이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이제 막 통일을 한 왕건의 앞에는 수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습니다.

<통일하면 다 끝일 줄 알았지? 통일 이후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이다>

왕건이 해결해야 할 첫번째 일은 첫째도 민생안정, 둘째도 민생안정이었습니다. 신라 하대 귀족들의 과도한 수탈로 인해 피폐해진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금 부담을 가볍게 해주었고 흑창(곡식이 부족할 때 곡식을 꾸어주고 추수한 후에 갚게 하는 구제 기관, 고구려에 진대법도 이와 유사하다. 조선시대에 환곡으로 계승되었다)을 설치하여 백성들의 구제에 앞장 섰습니다. 그리고 흩어진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기 위해 불교를 적극 장려하여 연등회, 팔관회 등의 행사를 개최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모았습니다.

<다시 한 번 불심으로 대동단결! 불교는 민심을 모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생안정과 더불어 또 하나의 관심은 강대한 호족 세력을 어떻게 지배하느냐였습니다. 호족은 자기 지방에서는 왕처럼 지냈으므로 이들을 통제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건이 생각해낸 기발한 아이디어가 바로... 결혼-_-;

<왕건은 무려 29명의 부인을 받아들인다. 하렘인가-_-;>

왕건은 무려 29명의 여인을 자신의 부인으로 맞아들입니다. 하지만 이건 왕건이 순전히 여자를 밝혀서가 아니라;; 유력 호족들과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회유하기 위함이였습니다. 이외에도 자신의 성인 왕씨 성을 하사하여 자신의 일족으로 만드는 등의 정책을 펴나갔습니다. 이렇게 당근을 주는 정책을 펴는 반면 한편으로는 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기인제도와 사심관 제도를 사용했습니다. 기인제도는 일종의 볼모 제도로서 지방 호족의 자제를 서울에 인질로 잡아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 호족이나 잡아들이지 않고 그 지방의 유력한 호족의 자제만 잡아들였으니 그 당시에는 이런 장면도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너 임마 세력 얼마나 강해? 내 아들 볼모로 서울에 잡혀갔거든 깝치지마라-_->

 이런 기인제도 외에도 사심관 제도로 당시 취약했던 지방 통치를 보완했습니다. 사심관 제도는 중앙에 올라온 지방의 유력자를 자기 출신 지역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자신의 지역을 통치하게끔 한 제도였습니다.

이외에도 왕건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나라 이름을 고려로 삼은 것만 보아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왕건은 적극적인 북진 정책을 펴나면서 평양을 서경으로 삼아 중시했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적대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청천강까지 영토를 넓힐 수 있었습니다.

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1) 민족을 재통일하여 발전한 고려
1-2 새로운 통치 체제를 마련하다

유교가 새 시대의 원리가 되다

왕건의 후삼국 통일 이후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 사회를 지배하던 원리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신라는 골품제로 인해 여러모로 폐쇄적인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는 이런 폐쇄성을 극복해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폐쇄성을 극복하기 위해 새롭게 채택된 시대의 운영원리는 바로 유교였습니다.

이 시대에는 불교, 풍수지리설 등이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지만 정치에서는 유교 이념이 운영 원리로 채택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불교나 풍수지리설은 정치면에서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안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만약 다른 나라가 침범을 해왔을 때 불교 운영 원리를 따른다면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퇴각시킨다라는 정책을 채택한다면? -_-;; 가뭄이 들어 백성이 신음하는데 이게 다 욕심에서 비롯된 거라며 참선을 하면? -_-;; 답이 안 나오죠? 이 같은 이유로 불교나 풍수지리설은 현실적인 운영원리로 적합하지 못합니다.

<불교나 풍수지리설은 그 꿈은 높지만 현실운영원리로 들어가면 별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유교적 운영원리가 처음부터 확고히 고려 사회의 지배적 이념으로 자리 잡았던 것은 아닙니다. 유교적 운영원리는 광종 때부터 서서히 그 위치를 다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광종은 강대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던 호족을 누르기 위해 노비안검법(예전에 양인이었던 노비를 해방하는 법으로 당시 노비는 호족의 경제력과 군사력에 직결되어 있었기에 호족들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을 실시하는 한편 호족 자제들을 아무런 기준 없이 등용하던 인사 정책을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제도로 바꿉니다.

<과거제의 실시는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등용할 뿐 아니라 왕에게 충성하는 인재를 뽑을 수 있게 된다>

성종 때에 이르면 신라 6두품 세력들이 대거 정치에 참여하면서 유교 정치가 비로소 현실이 되기 시작합니다. 최승로는 시무 28조라는 유교 정치 이념을 제시했고 성종은 최승로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이로써 2성 6부의 중앙 관제가 마련되고 12목의 지방장관이 파견되면서 고려는 중앙 집권화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국자감이라는 교육기관도 정비되어 유학 교육은 더욱 장려되었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운영원리인 유교는 보다 합리적인 길을 제시했고 이로 인해 고려는 신라 보다는 좀 더 개방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통치의 구조가 완성되다

성종 때 유교적 운영원리가 지배 원리로 확고히 자리잡게 되자 이 유교적 운영원리에 맞추어 중앙 통치 조직과 지방행정도 조직됩니다. 중앙의 정치기구와 지방행정이 조직된다는 의미는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뼈대가 완성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고려 때 완성된 중앙 정치 조직과 지방 행정 조직을 하나씩 살펴볼까요? ^^

성종 때 조직된 2성 6부제는 당의 3성 6부제를 모방한 것이었으나 고려 만의 독자성이 잘 녹아있는 제도였습니다. 말하자면 짜장면에 된장 넣은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찾아보니까 진짜 있더군요. 된장 짜장면-_-;;>

최고 중앙 관서는 중서성과 문하성을 합친 중서문화성이고 이곳의 장관인 문하시중이 국정을 총괄하는 가장 높은 관직이었습니다. 상서성은 실질적 행정을 담당하는 6부를 총괄했습니다만 실상 중서문화성에 아래에 있는 기관이었지요. 중추원은 군사 기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아주 중요한 기구였습니다만 삼사는 당의 제도와는 다르게 회계만을 담당하여 그 격이 떨어지는 기관이 되었습니다.

독자적인 고려만의 기구도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레알 된장기구인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입니다.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중서문화상과 중추원의 고관들인 재신과 추밀(줄여서 재추) 모여 회의를 하는 기구로 귀족들이 모여 회의를 하던 귀족 회의의 전통을 계승한 기구입니다. 또한 어사대는 감찰 기관으로 정치 잘잘못을 논하고 관리의 비리를 감사했습니다. 어사대는주로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더불어 대간으로 불렸습니다. 이들 대간은 왕의 잘못을 논하는 간쟁, 왕명을 시행하지 않고 돌려보내는 일종의 거부권인 봉박, 관리 임명과 법령의 개폐에 동의하는 서경권을 가졌습니다. 이런 기구가 존재했다는 것은 고려가 왕권과 신권이 조화된 정치를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의 중앙 정치 기구>

이제 지방 행정 기구를 알아볼까요? 고려의 행정 구역이 본격적으로 뼈대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성종 때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지방에 12목을 파견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이후 현종 때 8목으로 확정되면서 오도와 양계, 경기로 행정 구역이 정해집니다.

<5도 양계의 지도>

여기서 5도는 일반 행정 구역입니다. 이곳에는 안찰가 파견되어 도내를 순찰하는 임무를 맡았고 그 아래 주, 군, 현에는 지방관이 파견되는데 지방관이 파견되는 지역보다 그렇지 않은 지역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고려의 중앙통치구조는 완비되지 않았고 그 당시에는 그런 짜임새 있는 지방 통치 체제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적은 인원만을 파견했던 것입니다. 

이외에도 고려의 지방행정 구역에 특이점은 바로 특별행정 구역에 있었습니다. 향, 소, 부곡은 특수 행정 구역으로 특정 물건을 생산해서 바치는 등의 일을 맡은 사람들이 주로 사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 사는 백성들의 처지는 다른 일반 행정 구역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낮았습니다. 이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속현도 일반 주현에 속해 있는 사람들 보다 더 낮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또 하나 고려에 존재했던 특별 구역 중 하나는 양계로 국경지역에 설치되어 군사적 임무를 맡았습니다. 양계는 일반 행정 구역인 도에서 처럼 주, 군, 현이 설치되지 않았고 군사적 요충지인 진이 설치되어 국경 방어를 담당했습니다. 고려는 이처럼 일반행정구역과 특수행정구역이라는 이원적 조직을 운영하여 각 지방을 다스렸습니다. 

<고려의 이원적 지방 행정 체제>

지방과 중앙에 대해서 살펴보았으니 이제 군사제도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고려는 군사제도 역시 이원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중앙군은 왕의 친위 부대인 2군과 수도 및 국경을 방어하는 6위로 구성되었습니다. 중앙군은 직업 군인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이들은 병역복무에 대한 대가로 군적에 올라 군인전이라는 토지를 지급 받고 그 역할이 자손에게 대대로 세습되었습니다. (이에 관련해서 다른 가설도 있습니다만 교과서에 실린 전통적 견해를 따라 서술) 지방군은 일반 농민으로 구성되었으며 5도의 일반 군현을 지키는 주현군과 양계의 국경 수비를 전담하는 상비군인 주진군이 있었습니다.

관료와 귀족의 만남

보통 고려의 사회를 귀족 사회라고 표현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고려 사회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특징이 귀족의 특성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귀족의 특징인 무엇인가요? 바로 능력보다 혈통을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흥 AB형도 아닌 것들 천하다! 귀족은 능력보다 혈통을 중요시한다>

자 그렇다면 고려시대에는 어떤 점 때문에 능력보다 혈통을 더 중요시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음서와 공음전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려시대는 신라와 달리 골품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보고 인재를 등용했는데 이 과거 시험에서 공신 혹은 왕가의 친척이나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에게는 과거를 보지 않고도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어마어마한 혜택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음서입니다. 이는 어떤 한 가문이 대대로 관직을 세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귀족적 특성이 다분히 있는 것입니다. 

또한 토지제도에서도 귀족적 특성이 엿보입니다. 고려의 토지제도는 전시과로서 관리로 국가에 일을 하는 사람에게 일정한 토지를 주고 그 토지에서 내는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이때 지급되는 토지가 밭(전지)과 떌감을 벨 수 있는 숲(시지)을  동시에 주어씩 때문에 전시과라고 부른 것입니다. 전시과는 국가에 봉사하는 기간 즉, 현직 관리로 일하는 기간만 받을 수 있는데 5품이상 관리는 여기서 제외가 되어 세습이 가능한 토지를 받았습니다. 이를 공음전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고려의 5품이상의 관리들은 음서와 공음전의 혜택을 기반으로 성장해나갔습니다. 이들이 바로 고려의 지배세력이 되는 문벌귀족들입니다.

 미숙한 고려 사회?

고려는 조선과 다르게 지방에 모든 행정관이 파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를 보고 고려 사회는 조선 보다 미성숙한 사회라고 보기도 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고려 시대 때 왜 조선보다 지방에 행정관이 적게 파견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 자유롭게 얘기해봅시다. ^^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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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
4) 남북으로 나뉘어 발전하다
4-2 발해의 건국과 발전

고구려 옛 땅에서 고구려의 뜻을 이은 나라가 일어나다

오늘은 발해의 역사를 배워볼 차례네요. 발해의 역사는 현재 중국, 러시아, 한국 이 세 나라가 서로 자기의 역사라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관련된 영상 하나를 잠깐 보죠.


<한국의 입장에서 본 발해사>

위의 동영상은 한국의 입장에서 발해를 바라본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죠? 하지만 이 주장의 한 가지 헛점이 있는데 고구려마저 중국사라고 주장하면 다시 고구려사를 한국사라고 주장해야 되는 맹점이 있습니다. 실제 여러분의 예상대로 중국은 발해사에 이어 고구려사 마저 자국사로 귀속시키려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결국 계속 합의점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실제 존재했던 역사들이 왜곡될 위험이 있습니다.

사실 과거의 역사를 현대 어떤 나라의 역사에 귀속시킨다는 것은 참 웃긴 일입니다. 과거에 존재했던 나라들이 현대의 나라와 얼마나 연관이 있고 우리가 자신들의 후손이라는 걸 알 수 있을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고구려인의 역사는 고구려인에게 돌려주자는 것입니다. 발해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소모적인 역사 점유 논쟁만 계속되면 훌륭했던 이 두 나라의 역사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참 슬픈일이죠. 정치적 입장 때문에 두 나라의 역사를 없애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발해의 역사는 어떤 모습일까요? 확실한 것은 발해는 고구려 옛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의 정신을 이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점입니다.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은 구당서에 따르면 고(구)려 별종으로 나오고 신당서에 따르면 속말말갈이 나옵니다. 하지만 대조영의 출신이 어떻든 간에 그는 고구려 사람으로 살았음은 분명하고 고구려를 계승하려 했음은 지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일본에 보낸 국서에도 발해의 왕은 고(구)려국왕으로 칭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제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네요. 발해는 고구려 뒤를 이은 나라이며 고구려의 정신을 간직한 사람들이 살았다고 말입니다.

발전하는 발해

발해는 건국 과정에서 당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면서 일어섰기 때문에 당과의 관계가 불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고구려를 멸망시킨는데 한 몫을 했던 신라와도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었지요. 발해는 주변이 적으로 둘러 쌓인 상황에서 무력으로 그 영역을 확장시켜 나갑니다. 특히 무왕 때는 흑수 말갈을 제압하고 과감하게 수군을 동원하여 당나라의 산둥 지방을 공격했습니다. 이쯤되면 뭔가 이미지가 떠오르죠?

<형 잊었냐? 나 고구려의 후예 거든?>

네, 깡패국가였던 고구려의 정신을 발해가 확실히 계승하고 있는 것이 보이죠? ㅋㅋ 하지만 언제까지 깡패로 살 수는 없는 법. 문왕 때는 과감히 손을 씻기로 결심합니다.

 
<문왕, 손 씻고 착실한 국가가 되기로 결심하다>

문왕은 험악했던 당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내실을 다져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받아들였습니다만 그것을 발해만의 독자적인 형식으로 운영했습니다.

 
 
 
 
 
 
 
 
 
 
황제
 
 
 
 
 
 
 
 
 
 
 
 
 
 
 
 
 
 
 
 
 
 
 
 
 
 
 
 
 
 
 
 
 
 
 
 
 
 
 
 
 
 
 
 
 
 
 
 
 
 
 
 
 
 
 
 
 
문하성
 
 
 
 
 
상서성
 
 
 
 
 
중서성
 
 
 
 
 
 
 
 
 
 
 
 
 
 
 
 
 
 
 
 
 
 
 
 
 
 
 
 
 
 
 
 
 
 
 
 
 
 
 
 
 
 
 
 
 
 
 
 
 
 
 
 
 
 
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










 
 
 
 
 
 
 
 
 
 
 
 
 
 
 
 
 
 
 
 
 
 
 
 
 
 
 
 
 
 
 
 
 
 
 
 
 
 
 
 
 
 
 
 
 
 
 
 
 
 
 
 
 
 
 
 
 
 
 
 
 
 
 
 
 
   
 
선조성
 
 
 
 
 
정당성
 
 
 
 
 
중대성
 
 
 
 
 
 
 
 
 
 
 
 
 
 
 
 
 
 
 
 
 
 
 
 
 
 
 
 
 
 
 
 
 
 
 
 
 
 
 
 
 
 
 
 
 
 
 
 
 
 
 
 
 
 
충부
 
인부
 
의부
 
지부
 
예부
 
신부









<위는 당나라의 3성 6부, 아래는 발해의 3성 6부. 발해는 실무기관인 정당성(상서성)에 권력이 집중되었다>

발해의 3성 6부는 당나라의 3성 6부와 다르게 실무기관이었던 정당성에 그 권력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당성 아래의 6부 역시 둘로 나누어 충, 인, 의는 좌사정에 속하고 지, 예, 신은 우사정에 속했던 것도 특이했던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왕 때 신라와의 친선 관계도 도모하여 사신을 교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라와의 관계는 발해 역사 내내 별로 좋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조금 더 다루어 보죠 ^^

발해는 9세기 초 선왕 때 들어가면 전성기를 맞는데 이때 신라와도 직접 국경을 맞대었으며 지방행정 구역도 5경 15부 62주로 정리가 됩니다.

<발해의 지방 행정 구역>

<전성기 발해의 강역도>

이렇게 발전을 거듭하는 발해를 보고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이 동아시아에서 장안 다음 가는 큰 도시라였던 걸 봐서는 발해의 국력이 어느 정도 인지 가늠할 수 있겠지요?

또한
발해는 오랜기간 동안 연호를 썼던 국가로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으며 비록 발해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왕으로 책봉 받기는 했으나 내부적으로 황제국가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외왕내제(外王內帝:바깥 외, 임금 왕, 안 내, 임금 제) 체제라 합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천손이라 칭하는 것을 보아서는 발해인들 스스로 큰 자부심을 가졌던 것이 여실히 보입니다.

발해의 멸망, 그러나 그들의 문화는 남았다

이렇게 잘 나가던
발해도 10세기 초에 거란에 의해 멸망 당하고 맙니다. 발해 멸망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는데 백두산 화산 폭발설, 귀족들 내분설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설득력을 얻고 있지 못합니다.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를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은 약 200년간이나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어느 운동 하나 성공하지 못하고 발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발해가 향유했던 문화는 아직 까지 남아 있습니다. 특히 배층의 문화였던 고구려 문화에 당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피지배층이 대부분 말갈족이었기 때문에 말갈 문화 요소도 뒤섞여 발해는 다분히 다문화적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위는 발해 집자리의 온돌(고구려 문화), 중간은 정효공주묘(중국식 전축묘), 맨 아래는 말갈계 토기가 섞여 있다>

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
4) 남북국으로 나뉘어 발전하다
4-3 남북국, 활발한 국제 교규를 통해 발전하다

남북국, 활발한 교류를 통해 국제 사회에 존재감을 알리다

남북국 시대에 남국이었던 신라, 북국이었던 발해는 활발한 교류를 전개했습니다. 특히 신라는 통일 이후 안정을 누리면서 당과의 교류를 다져나갔습니다. 어느 정도였나면 당과 자주 왕래하던 산둥 반도 지역에 신라 마을인 신라방과 신라촌이 세워졌으며 신라소라는 관청, 신라원이라는 절까지 세워졌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왕래가 자주 있었는지 짐작할만 합니다.

<산둥 반도 일대는 지금의 코리아 타운과 비슷한 곳이였을 것이다>

또한 신라는 당과의 교류에만 그쳤던 것이 아니라 동남아, 서역과도 활발한 교류를 전개했습니다. 특히 이슬람 서적인 지라학 총서에는 신라의 모습이 소개되기 까지 했습니다.

<이슬람의 지도에 신라는 섬나라로 묘사되어 있다. 신라 모습의 묘사에는 다소 과장이 섞여 있긴 하다 ^^>

또 신라의 국제 교류하면 이 사람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바로 해상왕 장보고! 그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당시에 국제교류를 주도했습니다. 이때 신라에서 들어오는 교역품에는 타슈켄트의 보석, 캄보디아와 보르네오 그리고 자바 지방의 모직물, 스마트라와 참파의 향료 등이었는데 귀족들이 사치가 심하자 흥덕왕이 교서를 내려 금지시킬 정도였습니다. 장보고의 청해진이 어느 정도로 국제 교역을 활성화시켰는지 알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위는 왕건이자, 장보고이자, 대조영인 그 분 ^^; 아래는 청해진 유적지입니다>

이제 발해의 교역을 살펴봅시다. 발해는 건국 초부터 꾸준히 일본과 교류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시 일본으로 가는 바닷길이 굉장히 위험함에도 일본과의 교류 관계를 유지하려 했는데 그 이유는 건국 초 당과 적대 관계, 신라와 적대 관게였기 때문에 신라의 배후를 위협할만한 세력을 찾기 위해 그 파트너를 일본으로 고른 것이었습니다. 물론 발해 생각처럼 일본인 움직여 주진 않았습니다. ^^; 이후 당과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유학생을 파견했는데 유독 신라와의 관계만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발해인이 당에 사신으로 갔을 때 신라인보다 상석을 요구한 경우가 있었고 당시 당에 유학간 유학생들이 치는 시험인 빈공과에서 발해와 신라는 라이벌 의식을 보이면서 서로 1등을 차지하려고 경쟁하였습니다.

<승부다! 너한테 만은 안 진다!>

하지만 늘 싸울 수만은 없었겠지요? 발해, 신라는 서로의 필요에 따라 교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증거로 신라도라는 무역로가 남아있습니다.

<발해의 5대 교통로>

고대의 교역과 현대의 교역은 어떤 점이 다를까?

이제 퀴즈를 한 번 풀어보지요. 고대 시절에도 교역이 활성했다는 것을 앞선 수업 시간에 배웠겠지요? 하지만
교역이 활발하다고 해서 그것이 현대의 교역과 같을까요? 대의 교역과 현대의 교역은 어떤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을 계급사회가 같는 특징과 결부시켜서 해석해봅시다. 정답은 수업시간에 공개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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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
4) 남북국으로 나뉘어 발전하다
4-1 통일 신라의 발전

남북국 시대?

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한국사는 본격적으로 남북국 시대로 접어듭니다. 그런데 가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 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럼 나라가 하나만 있어야지 왜 남북국시대죠? 적어도 남국과 북국이 있다는 소리인데 이게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_-!


<이것이 레알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이다>

흠, 사정을 한 번 들어볼까요? 바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수한 이후 동시대에 공존한 나라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나라는 고구려 유민 출신이었던 대조영이 세웠던 발해입니다.

<발해 지도>

남북국 시대라는 말은 발해 역시 한국사의 하나의 영역으로 간주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라를 남국, 발해를 북국으로 파악해 이 두 나라의 역사를 모두 한국사로 파악함으로써 한국사가 전개되었던 지역을 좀 더 넓게 보는 것이죠.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남북국이라고? 그럼 삼국통일하려고 이때까지 뼈빠지게 싸운 나는 뭐가 되냐?-_->

바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다는 의미가 자칫 퇴색해져 버리는 겁니다. 발해를 한국사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면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이라고 할 수 있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상당히 어색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통일하려고 당나라 끌어들이고 수많은 전쟁터를 누볐던 김춘추, 김유신 등은 조금 허탈해지겠죠? ^^; 따라서 역사학계에서는 이 용어를 가지고 논란이 있으며 아직 마땅한 대체어를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실제 그 당시 역사기록에도 신라가 발해를 북국으로 불렀던 것이 남아있는 만큼 남북국이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도 타당해보이며 한국사를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그 취지는 좋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초의 민족의식이 싹트다

신라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로서 민족의 통일을 이루어냈다고 평가합니다. 그렇다면 민족이란 무엇일까요?  이 부분을 하기 전에 여러분이 생각하는 민족의 정의는 무엇인지 묻고 싶네요. 우리가 민족하는 말은 많이 쓰지만 정작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가르키는지 모를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약간 오덕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그 의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


<오덕오덕할수도 있지만 16분 34초부터 17분까지만 보세요 ^^>

자 어떻습니까? 민족이라는 것은? 민족을 형성하는 요인 중에는 혈연, 지역, 언어 기타 등등도 있겠지만 자기 자신이 어떤 민족인지 자각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우리는 민족이라고 자각을 할 수 있었던 시절이 언제부터였을까요? 역사학자들은 조심스럽게 그것이 삼국통일 이후 부터 천천히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삼국통일 이전에 고조선이라는 최초의 국가가 있고 부여, 옥저, 동예, 삼한, 가야,고구려, 백제, 신라 수많은 나라가 난립했지만 그 어느 나라도 우리는 고조선의 후손이며 우리 모두는 한민족이다라고 내세운 나라는 없었습니다. 다만 서로 비슷한 말을 쓰고 풍습이 비슷하다는 정도였지요.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민족이 될 수 없었지요.

<언어와 풍습이 같다고 민족이 될 수 있나? 2프로 부족하다!>

서로 같은 민족이 되기에는 어색했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백성들은 통일된 이후 본격적으로 하나가 되어가기 시작합니다. 신라는 일통삼한(一統三韓: 하나 일, 거느릴 통, 석 삼, 한나라 한)을 내세우며 세 나라가 마침내 하나의 집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내적으로는 옛 고구려, 백제 지배층을 신라의 골품 제도 안으로 편입시켜 같은 지배층으로 인정했으며 지방 행정 구역도 9주로 개편하여 신라, 백제, 고구려 지역에 각 3주씩 설치하여 모두 같은 국민이라는 것을 표방했습니다. 그리고 병역의무도 신라인은 물론 고구려, 백제, 말갈 사람까지 모두 포함하여 중앙군단인 9서당을 편성했습니다. 지금이야 군대가는 것이 매우 싫겠지만 군대를 가서 병역의무를 진다는 것은 그 나라의 국민으로 인정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군대에 피정복민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피정복민을 이제 동등한 백성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죠 ^^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세 나라 백성은 완전히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일단 신라의 통일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라 고구려, 백제의 백성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아무래도 백제의 백성이 많게 됩니다. 제가 동등하게 9주를 설치했다고 하지만 사실 새롭게 설치된 주는 주로 백제, 가야 지역에 편중되어 있습니다.

<새롭게 설치된 주들은 주로 백제, 가야 지역이다. 고구려 옛 땅은 기존의 한주, 삭주, 명주가 확장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 지배층을 신라 지배층과 같은 골품제도 안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점으로 인해 시간이 지나 결국 고구려, 백제는 신라가 약해진 틈을 타 서로 자신들의 뿌리를 다시 찾습니다. 그것이 결국 후삼국시대로 이어지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완전한 하나의 민족이 되지 못했기에 이들이 다시 찢어지는 것은 예견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신라왕은 킹왕짱!

신라의 민족 융합책을 보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통일 이후 신라의 발전 양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 먼저 신라는 천년이나 지속되었던 왕국인 만큼 이에 따른 시대 구분도 존재합니다.

 

상대

중대

하대

시기

건국(BC57)~진덕여왕(AD654)

무열왕(654)~혜공왕(780)

선덕왕(780)~경순왕(935)

왕위계승

성골

무열왕 직계

내물왕 방계

주요관직

-

시중

상대등

정치체제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

전제 왕권

귀족 연립 체제


위의 표는 신라 시기에 대한 시대 구분 표입니다. 통일 이후 신라 전성기에 해당되는 시기는 중대로 이 시기는 무열왕의 직계 후손들이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면서 왕권을 공고히 다지며 전제왕권(專制王權, 오로지 전, 절제할 제, 임금 왕, 권세 권)을 구축했습니다. 그런데 전제왕권은 무엇일까요?


<영화 300에 나오는 크세르크세르 1세가 대표적인 전제왕권의 예라고 볼 수 있다>

전제왕권은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나라를 지배하는 형태입니다. 과연 전제왕권이라는 표현이 옳으냐는 문제점도 있긴 하지만 교과서에서 일단 전제왕권으로 표현하고 있는 만큼 그 문제는 살짜쿵 넘어가보도록 해보죠 ^^ 시간이 난다면 재밌는 사실들!에서 좀 더 다뤄볼까 합니다.

그렇다면 신라의 왕은 어떻게 해서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게 되었을까요?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독점하는 데 이 방법처럼 빠른게 없습니다. 바로 숙청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문왕 뒤를 이어 즉위한 신문왕은 귀족 세력들을 하는 꼬라지를 보니 통일된 국가를 이끌어갈 자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신문왕, 귀족들을 없애버릴 결심을 하다>

마침 김흠돌의 모반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귀족 세력를 싸그리 없애버리게 됩니다. 귀족 세력의 힘이 꺽이게 되자 이제까지 귀족을 대표했던 상대등 보다 왕명을 수행하는 집사부의 시중의 권한이 더 강해지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말 안 듣고 뻣뻣한 진골 귀족들보다 왕의 말을 잘 들었던 6두품 세력들을 주로 등용하여 자신을 보좌하게 했습니다. 이런 전제왕권 시기에 지방행정 조직도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되며 유학 사상이 강조되며 국학이라는 교육기관이 설치되어 전제 왕권을 뒷받침했습니다.

토지제도도 왕권이 강해짐에 따라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귀족들이 소유했던 녹읍(녹읍 안에 살던 백성들 노동력 징발 가능)을 폐지하고 대신 관료전(관료전 안에 살던 백성들 노동력 징발 불가, 조세를 걷을 수 있는 권리만 있음)을 지급했습니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함으로써 귀족을 통해서 백성을 지배하기 보다는 왕이 직접 백성을 지배하겠다는 의도를 보였습니다. 어때요? 이 시기 신라 왕의 힘이 킹왕짱이라는 게 느껴지시나요?

전제 왕권이 무너지고 혼란한 시절이 도래하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영원할 것 같던 신라왕의 힘도 결국 쇠퇴하고 맙니다. 혜공왕 말기에 귀족들이 96각간의 난을 일으키는데 이 때 이후로 강대하던 왕의 힘도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 심지어 혜공왕은 이찬 김지정이 일으킨 반란에 죽는 참사가 일어납니다. 혜공왕이 죽고 선덕왕이 왕위에 오르는 이 시대를 신라 하대로 부르며 이후부터는 내물왕 방계들이 왕이 됩니다.

이쯤되면 왕의 힘이라는 게 거의 없어지는 게 당연합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잘 생각해봅시다. 이때까지 왕이 혼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는데 그 권력을 휘두르던 왕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죠? 자연스럽게 왕이 휘두르던 권력은 귀족들에게 분산되고 귀족들은 그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면서 나라는 개막장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겁니다.

<신라 하대의 상황, 개판이다>

자 어느 정도 개판이었을까요?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완전히 회복하여 이제까지 왕이 지급해주던 관료전은 폐지되고 다시 녹읍이 부활됩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마음대로 토지를 소유하며 자신들의 토지 규모를 늘리고 농민들을 쥐어 짜 자신들의 뱃속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이제 왕도 해보고 싶어서 서로 왕이 되겠다고 치고 받고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로 155년 20명의 왕이 교체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왕의 권력은 더욱 더 보잘 것 없이 됩니다.

<155년 동안 20명의 왕이 교체되었다고? ㅋ 그러고도 니가 왕이니?>

왕의 힘은 갈수록 약해지고 귀족들을 막을 만한 사람은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조용히 힘을 키우던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지방에 호족이었습니다. 호족들은 자신의 근거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여 백성들을 실질적으로 다스렸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해상왕 장보고도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 해상호족의 일족으로 볼 수 있지요.

<장보고도 일종의 호족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당에서 유학했던 6두품 세력들도 신라 말기 혼란한 상황을 보면서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유교를 깊이 공부했기 때문에 고대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는 골품제를 비판했습니다. 이렇듯 신라 하대 사회에서 호족, 6두품 세력들이 성장하고 있었고 새로운 사상도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불교 경전 보다 참선을 중요시 하는 선종이 나타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으며 풍수지리설 역시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같은 사상의 변화 역시 새로운 사회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5소경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자 이제 문제를 풀어봐야지요? 신라는 통일 이후 수도가 동쪽에 치우친 것을 보완하기 위해 5소경을 만듭니다. 이 5소경에는 그 지역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멸망한 나라의 지배계층을 주로 이주시켰는데 어떤 이유에서 그랬을까요? 정답은 수업시간에 공개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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