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
3) 삼국, 교류와 경쟁 속에서 발전하다
3-2 삼국 간의 상호 항쟁이 본격화되다

싸움을 하기 전에 헬스를 해 몸의 근력을 키우자!

지난 시간까지는 삼국이 어떻게 고대국가로서 기틀을 잡아가는 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삼국 간에 치열했던 항쟁에 대해서 배워 봅시다.

<테크트리 올리고 발전을 했으면(위) 전쟁을 하는 건 당연지사!(아래)>

여러분이 좋아하는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에서도 보면 적과 싸우기 전에 먼저 발전을 열심히 하지요? 미네랄 캐고 가스 채취하고 건물 올리고 그래야지만 자신이 원하는 병력을 뽑을 수 있으니까요. 삼국 간의 항쟁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고대국가 기틀을 다지고 내정을 충분히 다진 뒤에 밖으로 뻗어 나가게 됩니다. 

이때 삼국이 내정을 다지는 와중에 공통적인 특성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바로 율령 반포와 불교 수용입니다. 율령 반포와 불교 수용은 고대 국가들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도대체 율령과 불교가 어떤 역할을 했기에 왕권을 강화하는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일까요? 이제부터 하나 하나씩 살펴보죠.

자 먼저 율령은 어떻게 왕의 힘을 강화시켜주었을까요? 국가를 원활하게 통치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바로 법입니다. 여러분들은 잘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살다보면 우리는 늘 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만 살고 있습니다. 

<법을 어기게 되면 우리는 감옥에 갇혀 사회와 격리됩니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현대와 같은 법이 존재할까요? 옛날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다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때 당시에도 법이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사용하는 법과 형태가 다를 입니다. 어떤 형태였는지 한 번 볼까요?

A라는 사람이 물건을 훔치다가 잡혔습니다. 그러면 마을에 나이가 많고 지혜로운 사람 앞으로 끌려갑니다. 이 사람을 B라고 해봅시다. B는 경험과 지식이 많으므로 이전에 마을에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는지 생각해보고 그때 이 같은 경우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참고하여 판결을 내립니다. 이러한 형태를 관습법이라 합니다.

관습법은 공동체 안에서의 약속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왕과 같은 권력자도 관습법을 따라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다면 왕의 말을 잘 따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맞아요. 왕의 말을 곧 법으로 만들어 기록하면 됩니다! 이것을 율령이라고 합니다.

율령에 대해서는 알아보았으니 이제 불교가 어떻게 왕권을 강화시켰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봅시다. 불교하면 종교 같은데 불교가 어째서 왕권을 강화시키게 되었을까요? 그 당시에는 선생님이 앞서 설명했던 애니미즘, 샤머니즘, 토테미즘, 천손사상 등의 신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수많은 종교가 난립하면 모시는 신의 수는 어떨까요? 천차만별이겠지요?

<온갖 잡신들이 판치는 세상이었던 고대>

하지만 불교가 유입되면서 이런 신들은 정리가 되기 시작합니다. 불교는 이런 토착신앙 보다 잘 짜여진 교리를 바탕으로 한 고등종교였습니다. 불교의 유입으로 인해 여러 많은 신들이 불교 안으로 흡수되었습니다. 이제 부처의 말씀만을 따르면 되는 상황이 도래하게 된 것이죠.

<불심으로 대동단결!>

왕은 불교가 온갖 잡신을 통합하고 부처 중심의 세상을 만들자 이것을 이용합니다. 즉, 부처를 국왕과 동일 선상에 놓는 사상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온갖 잡신들이 부처에 의해 통합된 것처럼 여러 귀족들이 국왕의 힘 앞에 통합되기를 바란 것이죠. 그리고 이런 국왕의 의도는 잘 먹혀 들어가 불교를 통해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하는데 성공합니다. 

또한 이 시기 국가들은 전성기를 맞으면서 독자적인 천하관을 내세우는데요. 그 증거로 대왕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거나 독자적인 연호 사용, 역사 편찬이 있습니다. 특히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것은 시간 마저 자국 왕을 중심으로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그 국가의 자신감을 나타내어 주는 좋은 증거입니다. 

이제 고대국가들은 율령 반포와 불교 수용을 통하여 내부에 축적된 힘을 밖으로 뻗어내기 시작합니다. 본격적으로 삼국항쟁의 막이 오른 것입니다. 그 치열했던 싸움의 현장을 만나러 가보시죠!

먼저 치고나가는 백제

고구려, 백제, 신라 중에서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것은 바로 백제였습니다. 저번 시간에 말했던 것처럼 백제는 나름대로 명당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삼국 항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정하게 됩니다. 백제는 율령 반포시기가 정확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대체로 근초고왕 때 율령 반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하는데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야말로 추측에 불과합니다. ^^; 

백제의 전성기를 주도한 왕은 근초고왕으로 남쪽으로는 한반도 남부의 큰 세력이었던 마한 전 지역을 통합했고 북으로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했습니다. 심지어 백제와 고구려의 싸움으로 고구려의 왕이었던 고국원왕이 죽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 만큼 백제와 고구려 간의 싸움이 치열했던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서울 석촌동에 있는 백제고분군, 현재 근초고왕의 고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진짜 그런지는 확실치 않다>

또한 백제에 관해서는 신기한 기록이 중국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백제가 중국에 자신의 군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 백제가 실제로 중국을 공략할만한 능력이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백제가 요서에 공략했다는 기록은 중국 남쪽 왕조 사서에만 편중되어서 나오기 때문에 그것 역시 고려해봐야할 점입니다. 최근 역사학자들은 백제 해상 무역왕국으로 중국의 요서, 산둥과 일본 규슈 지방을 연결하는 중심 국가가 아니었는지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고구려라는 깡패국가의 왕을 없앨정도로 잘 나가던 백제는 5세기에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왜냐구요? 그 분이 오셨습니다 ㄷㄷㄷ

<형왔다. 내 앞에서 다 버러우 타는거다>

그 분의 출현

고구려는 백제 전성기인 4세기 후반에 전연이라는 중국 왕조 중 하나에 해당되는 나라에 침입을 받고 백제의 공격으로 왕이 죽는 등 큰 위기에 빠졌습니다. 이런 큰 국가적 위기 상황에 소수림왕이 등극하게 됩니다. 소수림왕은 전연에 대항하기 위해 또 다른 중국의 왕국인 전진과 친교를 맺어 전연을 견제하기에 이릅니다. 

<5호 16국 시대 당시의 지도, 고구려는 전진과 친교를 맺어 전연을 견제하는데 성공했다>


바깥이 안정되자 소수림왕은 내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하여 인재를 인재를 기르고 율령을 반포했습니다. 또한 삼국 중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이때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아니었고 이미 민간에 퍼져 있는 불교를 공인해주는 수준이었을 걸로 짐작합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소수림왕은 이 같은 개혁 조치로 고구려 왕권은 매우 견고해져서 이제 귀족을 압도할 수준이 되었습니다.

<귀족들은 이 본좌 앞에서 망언을 할 수 없다!>

내치를 다진 소수림왕 이후 드디어 우리는 그분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다 아시죠? 바로 우리나라의 레전드 아니고 그냥 전설인 깡패. 광개토대왕! 중국, 백제, 왜, 가야, 부여 이놈저놈 가리지 않고 마구 패줍니다. 이때 고구려의 국력은 크게 확장됩니다. 교과서에 있는 지도를 참조해봅시다. ^^

광개토대왕 사후 주변 이웃 나라는 편할줄 알았더니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들인 장수왕은 중국과의 싸움은 멈췄지만 한반도 남쪽에 있는 백제, 신라만을 패야겠다고 결심하고 수도를 과감히 남쪽 평양성으로 천도(427)합니다.
 

<난 무조건 한놈만... 아니 두놈만 패!>

장수왕의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동맹을 맺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나제동맹(433)이고 나중에 결혼동맹으로 까지 발전합니다. 하지만 제가 고구려는 깡패국가라고 했지요? 중국도 막 패던 국가였는데 백제, 신라가 편먹는다고 해서 뭐 어쩔 수 있겠습니까? 가볍게 발려주시고 백제는 급기야 한강유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수도였던 한성이 함락되고 왕이 죽는 참사가 일어납니다. 백제는 부랴부랴 웅진으로 천도(475)했지만 한 동안 고구려의 기침소리에도 놀래야만 했습니다.

믿을 놈 하다 없다!

<고구려의 침략으로 인해 왕을 잃은 백제는 한 동안 쭈구리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침략을 받고 한동안 쭈구리 신세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백제는 서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안구에 습기차던 시절을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하는데요. 무령왕 시절에는 남쪽 중국 왕조와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국제 사회에서 그 위치를 인정받고 22담로를 두어 지방 통치 조직을 정비하였습니다. 백제가 본격적으로 다시 비상하기 시작하는 것은 성왕 시절입니다. 성왕은 그 동안 임시 수도 역할을 하던 웅진에서 넓은 벌판의 부여로 수도를 천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고치고 중앙에 관서를 22부로 재정비하고 불교를 적극 장려했습니다.

국력이 다시 강해진 백제는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슬슬 다시 넘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뭔가 찝찝하지요. 백제 혼자서 고구려를 당해낼 자신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를 치기 위해 신라와 협력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한강 하류 지역은 백제가 한강 상류 지역은 신라가 차지하기로 하늘땅 별땅 약속을 했지요. 하지만...

<여성분들이 제일 믿지 말아야 하는 말이다 ㅠ 백제에게는 신라 믿지?가 여기에 해당된다>

세상에 믿을 놈이 하나도 없습니다. 신라가 아주 상큼하게도 배신을 때려줍니다. 바로 진흥왕은 과감하게 백제와의 약속을 깨고 한강 하류마저 점륭하면서 한강 유역을 다시 신라가 차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신라는 언제 이만큼 힘을 키운걸까요? 우리가 아는 신라는 매우 조그마한 나라로 광개토대왕이 겨우 목숨 구해준 걸로 아는데 그 동안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시골 촌놈이 드디어 성공하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비해 고대국가 발전이 가장 느린 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라는 나라가 동남쪽으로 치우쳐 있을 뿐아니라 그나마도 소백산맥으로 가로 막혀 있어서 외부에 자극을 받아들이기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만큼 족장의 세력이 매우 오래 남아있었습니다. 이런 신라가 본격적으로 나라가 말전하는 것은 지증왕때입니다. 지증왕은 지방 제도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적 국가가 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활발한 정복산업을 벌여 이사부를 시켜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마립간이라 불리던 왕의 칭호도 세련되게 중국식으로 '왕'으로 고쳤습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뉴요커의 트렌드에 따라간거죠.

<울릉도와 독도는 이때부터 우리나라 역사에 편입되었다>

법흥왕 때는 신라는 더욱 발전을 하게 됩니다. 이때 율령이 반포되면서 왕은 다른 귀족보다 더 우월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왕은 귀족회의에 최고 대표자가 되지 않게 됩니다. 이제 귀족회의의 최고 대표자는 상대등이 됩니다. 또한 병부가 설치되면서 통치 체제가 정비되고 우여곡절 끝에 불교가 공인 되면서 신라는 통합의 길로 나아갑니다. 또한 오랜 숙원 산업이던 금관가야를 병합하면서 영토가 더 넓어지게 되지요.

진흥왕 때는 법흥왕 때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앞서 말했던 것처럼 백제와 연합을 하여 한강 상류를 차지한 뒤 백제를 배신하고 한강 하류마저 빼앗는 쾌거를 이룩하게 됩니다.

<이순재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열연했던 진흥왕, 미실에게 독살당할 만큼 허접한 왕은 아니었다>

한강 하류를 빼앗긴 성왕은 정말 화가 났습니다.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건 개로왕이 고구려에게 패배하여 죽은 이후 오랜 숙원 사업이었으니까요. 성왕은 다시 한 번 군사를 모아 쳐들어가지만 안 될놈은 안 된다고 그만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포기하면 편할텐데 안 될놈은 뭘 해도 안 된다, 안습의 성왕>

어쨌든 진흥왕의 정복사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대가야를 정복하여 마침내 가야연맹이 멸망했으며 함경도 지역 일부까지 진출합니다. 원래 잘 나가면 자랑을 하고 싶기 마련이지요? 진흥왕도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인증'을 하기에 이릅니다.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 순수비를 통해서 자시느이 업적을 자랑하고 인증한 것이죠.

<진흥왕이 부릅니다. 나 이런 사람이야!>

신라는 이후 한강 유역을 바탕으로 드디어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인적, 물적 자원을 확충해서 삼국 항쟁에서 주도권을 차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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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덧 벌써 두번째 중단원이 끝났네요? 관련된 수능 기출 문제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실시된 모의고사 문제를 풀어봅시다. ^^

<201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사회탐구영역 국사 17번문제>

문제를 보면 한국사 초기 국가들에 대한 설명을 묻는 것입니다. (가) 나라를 살펴보면 국동대혈이라는 큰 굴과 함께 10월에 제사를 지낸다는 단서가 나오지요? 국동대혈은 고구려에 있는 큰 동굴입니다. 예전에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그림과 같이 설명이 나와있었습니다. 10월에 제사를 지낸다는 것을 보아 고구려임이 더 확실해지네요. 고구려가 10월에 동맹이라는 제천행사를 지내니까요. (나)는 5월에 씨부리기를 마치고 신께 제사를 지낸다는 점, 제사를 지내는 사람의 이름이 천군이라는 점을 볼 때 삼한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럼 보기를 보지요.

ㄱ. (가)에는 마가, 우가, 저가, 구가가 있었다는 이는 부여의 사출도를 말합니다. (가)는 고구려로 틀린 설명입니다. ㄴ. (나)에는 신지, 읍차의 지배자가 있었다는 설명은 맞습니다. 삼한 지역의 정치적 지배자는 신지, 읍차로 불렸습니다. ㄷ. (가)와 (나)에서는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데 맞는 설명입니다. 고구려에서는 10월에 동맹이라는 행사가 있고 삼한에서는 10월에 계절제를 드리지요. ㄹ (가)와 (나)는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했다는데 (가)는 고구려로 고대국가로 성장했고 (나)의 삼한은 그러지 못했으므로 틀린 설명입니다. 정답은 ③입니다.

<2011학년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주관 9월 모의고사 사회탐구영역 국사 1번 문제>

이 문제는 고조선에 관한 연대기적 사고를 얼마나 잘 할 수 있는 가를 파악하는 문제입니다. (가)는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하였다는 걸 봐서는 위만 조선이 막 성립될 무렵의 얘기입니다. 따라서 기원전 194년 이전입니다. (나)는 왕검성이 함락되고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설명이므로 기원전 108년 이후의 일입니다. 이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일은 위만이 준왕을 쫓아내서 왕위를 찬탈했다는 것과 위만 조선이 중계무역을 했던 것, 한나라와 전쟁을 벌인 것이 있습니다.

ㄱ. 법 조항이 60여조로 증가한 것은 108년 이후의 일로 (나) 이후의 일이 되기 때문에 정답이 될 수 없습니다. ㄴ. 연나라와 요서 지역을 경계로 대립하였던 것은 기원전 4세기 정도의 일로 (가)보다 훨씬 이전의 일입니다. ㄷ. 지배층의 내분이 일어났던 것은 한나라와 전쟁을 하면서 일어났던 일로 (가)와 (나) 사이의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ㄹ. 남방의 진이 중국과 통교하는 것을 막은 것은 중계무역을 했던 일로 (가)와 (나)사이의 일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⑤입니다.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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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
3) 삼국, 교류와 경쟁 속에서 발전하다
3-1 삼국,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로 성장하다

고대국가? 뭔지 모르겠다구! ㅠㅠ

자 오늘도 한국사를 배워봅시다. 이제 한국사는 본격적으로 삼국시대에 대해 배우게 될텐데요. 그 유명한 배째 실랴고그랴에 대해서 배웁시다!

<아 죄송합니다 ㅠ 구석기 시대 유머를 하다니--; 내가 무리수다!>

흠흠. 자 각설하고 수업을 시작합시다. 먼저 삼국에 대해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이겁니다. '고대 국가'! 그런데 당최 고대국가가 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교과서를 읽어보면 대충 족장이 중앙관리로 편입되서 어쩌구 이렇게 설명이 되는데 이해가 잘 안됩니다. 솔직히 여러분들이 이해하기에는 약간 벅찰 수도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해하지 않으면 또 안 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저랑 같이 좀 더 쉽게 배워봅시다.

단도직입적으로 제가 설명을 먼저 드리면 연맹 왕국은 초등학교 단계, 고대 국가는 중, 고등학교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다구요? 선생님을 족장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은 어디에 계시죠? 주로 교실에서 함께 생활을 하시죠? 교무실이 있고 교장 선생님이 계셔도 초등학교 선생님은 주로 자기가 맡은 반에 머물러 계십니다. 국가에 이 상황을 대입해볼까요? 족장(초등학교 선생님)은 연맹 왕국(초등학교)를 형성하기는 했지만 주로 자신의 지역(교사가 맡은 반)에 주로 머물러 있으며 여전히 자신의 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왕 역시 일개 족장에 불과하므로 다른 족장에게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못하고 왕권은 상대적으로 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왕권이 강해지면 연맹왕국이 고대 국가로 변하게 됩니다. 중, 고등학교 예를 들어볼까요? 선생님들은 이제 대부분 교무실에 계시게 되죠? 담임을 맡은 반이라 하더라도 예전처럼 온종일 그 자신의 반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국가 상황에 대입하면 왕권이 강해져서 족장(중, 고등학교 선생님)은 그 힘을 잃고 자신의 지역(자신이 맡은 반)에서 중앙(교무실)로 오게 됩니다. 이때 더 이상 이들은 족장이라 불리지 못하고 귀족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자 이제 이해가 되시나요?

<초등학교에 연맹왕국(위)을 대입하고 중, 고등학교에 고대국가(아래)를 대입해보자>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점이 드는 것이 있네요. 족장들이 중앙으로 올라오면서 귀족이 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원래 자신들이 다스리던 지역은 이제 누가 다스리게 될까요? 바로 왕의 힘이 드디어 지방까지 침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지방의 조직이 정비되고 동시에 중앙으로 올라온 족장들에게 알맞는 관직을 주기 위해 중앙 관제도 정비됩니다. 따라서 연맹왕국에서 고대국가로 전환하려면 네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왕위세습권을 확보할 것, 두번째는 왕권의 강화로 족장들이 예전에 권한을 상실하고 중앙 귀족으로 편입될 것, 세번째는 족장이 다스리던 지역을 왕의 힘으로 통합하여 지방 조직을 정비할 것, 네번째는 중앙으로 뽑혀온 족장들에게 알맞은 관직을 주기 위해 중앙 관제를 정비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왕의 권한이 강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귀족(이전에 족장)의 힘은 막강해서 국가 운영의 주요 사항을 귀족회의를 통해서 결정하였습니다.

고대 국가, 내가 일등!

이런 고대 국가로 가장 먼저 발전했던 것은 바로 고구려입니다. 고구려는 이전 시간에 말했던 것처럼 활발한 정복 전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왕의 권한이 강해졌습니다. 고구려의 고대국가 기틀을 다진 태조왕은 한 군현을 공략하고 옥저를 공략하면서 왕권을 크게 강화했습니다. 이로 인해 태조왕 때 계루부 고씨에 의한 왕위세습이 확정되었습니다.

<전쟁은 위험 부담이 크긴 하지만 승리시 왕권의 강화를 가져온다>

한편 고국천왕은 부족적 전통을 가진 5부를 행정적 5부로 개편했습니다. 이 말은 잘 이해가 안 되시죠? 이전에 소노부, 계루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 5부가 동, 서, 남, 북, 중의 단순한 방위를 뜻하는 행정적 5부로 바뀌었다는 말인데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해가 안 가긴 마찬가지입니다. -_-; 좀 더 부연 설명을 드리면 부족적 5부(소노부, 계루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였던 시절에는 왕족인 계루부는 물론이고 다른 부들까지 독자적인 관직체계를 가지고 있거나 상당한 군사를 보유하고 있었으니 국가 안에 또 다른 작은 국가가 있는 셈입니다. 이런 것이 고국천왕 시절에 행정적 5부로 개편되면서 국가 안에 작은 국가라는 성격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이해가 되시죠? 왕위 계승도 이 시절에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뀌어 왕권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에게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구려의 역사는 중국과 투쟁의 역사라 말해도 좋을 만큼 중국과의 전쟁이 끊이질 않았는데 3세기에 특히 위기를 맞습니다. 중국의 삼국 중 하나인 위(여러분들이 익히 잘 아시는 삼국지의 그 위나라입니다)의 장수 관구검이 침입하여 큰 위기를 맞았으나 고구려 장수들의 활약으로 겨우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관구검의 침입 경로와 고구려의 대응>

그리고 4세기 초에는 미천왕이 중국 대륙이 5호 16국 시대(삼국을 통일한 진이 8왕의 난으로 분열된 틈을 타 다섯의 유목민들이 중국 대륙을 공격하여 16개의 나라가 명멸한 세운 혼란한 시대)를 맞아 혼란한 틈을 타 낙랑을 공격하여 오랜 숙원이던 한사군현의 완전한 축출을 313년에 달성했습니다.
명당에 자리 잡은 백제

백제는 고구려에 비하면 상당히 짧은 시간 안에 고대 국가 체제를 갖춘 편입니다. 고구려가 고대 국가 체제를 늦게 갖춘 이유를 들자면 한사군과의 투쟁이 4세기까지 지속되고 지속적으로 중국 침입에 시달려온 것이 있습니다. 반면 백제는 한강 유역에 자리 잡아 비교적 빠르게 국가 체제를 갖추어 나갔습니다.

<로또도 명당이 있듯이 백제 역시 자리를 잘 잡았다. 명당은 바로 한강유역!>

한강 유역이라는 비교적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은 백제는 고대 국가로 자리를 잡아 나가면서 남쪽의 나름대로 세력을 보유하고 있던 마한을 대신한 세력으로 자리 잡아 나갔습니다. 3세기에는 고이왕이 활발한 정복활동을 보이면서 왕권을 더욱 다져나갔고 내부적으로 6좌평이라는 관제와 관리 복색을 제정하여 지배체제를 정비하여 고대 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참, 그리고 백제가 고구려와 같은 부여 계통이라는 것은 아시죠? 예전에는 삼국사기 기록에 따라 백제를 건국했던 세력이 고구려계 유이민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고구려, 백제 모두 공통의 분모를 부여 계통으로 생각하고 있는 학설이 나오고 있습니다. 뭐가 되었든 간에 고구려와 백제는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위는 고구려의 돌무지 무덤인 장군총, 아래는 백제의 돌무지 무덤인 석촌동 고분군. 비슷한 양식이다>

가장 발전이 느렸던 신라

이제 삼국 중에서 가장 발전이 느렸던 신라에 대해서 얘기해봅시다. 신라는 상대적으로 한반도 남동쪽에 치우친 바람에 유이민들이 많이 들어오지 않았고 토착세력들이 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신라는 원래 진한의 한 소국이었던 사로국에서 출발하였으며 6부족 연맹체였습니다. 그런데 이 신라라는 나라는 희한한 것이 박, 석, 김씨 세 명의 왕이 돌아가면서 왕을 했습니다.

<왕도 돌아가면서 하자!>

왕을 돌아가면서 하니 그게 어디 왕 같았겠습니까? 그래서 신라에서는 왕을 왕이라 부르지 않고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등으로 불렀습니다. 특히 이사금이라는 뜻은 그 이름의 연원이 옛말에 이(齒)가 많은 사람, 즉 연장자는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한 것에서 유래하였죠. 왕의 칭호를 봐서도 왕권이 다른 국가보다 상당히 '허접'했음을 우리는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왕권이 본격적으로 강해진 것은 4세기 후반 내물왕때입니다. 내물왕은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여서 진한 전역을 장악하고 자신이 가, 간들 중에 가장 으뜸이라는 뜻의 마립간(대군장)을 왕호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때가 되면 박, 석, 김이 돌아가면서 왕을 하던 것이 이제는 오로지 김씨만 혼자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들이 내물왕 혼자 힘으로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르기 대장, 내물왕. 가야, 왜한테 다굴맞자 고구려에게 일러 바친다>

내물왕이 다스리는 신라는 당시 가야, 왜 연합에게 엄청난 다굴을 맞고 당시 동북아의 최강자였던 고구려에게 일러 바칩니다. 당시 고구려는 자신이 주도하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내물왕의 신라를 자신의 휘하로 삼아 고구려가 명실공히 천하의 중심임을 선포하고 싶었습니다. 서로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자 고구려는 가야와 왜의 공격을 쫓아내었고 신라는 이를 이용하여 내부적으로 마립간의 권위를 높였습니다. 대신 한동안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지요.

대단한 초등학생이었던 가야

우리는 보통 이런 말을 많이 듣곤 합니다. 얘는 머리는 좋은 데 공부를 안해서... 그 말에 딱 맞는 국가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가야였습니다. 가야는 낙동강 하류 지역에 자리 잡은 연맹 왕국이었습니다. 비교적이 철이 풍부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지요. 3세기 즈음에는 금관가야가 가야 연맹의 대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를 전기 가야 연맹이라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역에서 생산되는 철을 바탕으로 낙랑과 왜를 연결시키는 중계 무역을 하면서 계속 해서 수준 높은 철기 문화를 발전시킵니다.

<왼쪽은 가야의 철제 갑옷, 오른쪽은 가야 보다 더 늦은 시기의 일본의 철제 갑옷. 가야의 기술력을 알 수 있다>

위에 있는 그림만 봐도 가야가 수준 높은 철기 문화를 향유 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겠지요? 이처럼 가야는 장래가 촉망 받는 국가였으나 신라를 지원하기 위해 내려온 고구려 군대에 패배하면서 쇠락의 길에 빠져듭니다. 전기 가야 연맹이 쇠퇴하자 5세기 후반 부터는 전기 가야 연맹을 대신하여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 연맹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이미 고대 국가의 기틀을 갖춘 백제와 신라 틈바구니 끼어서 성장하지 못하다가 결국 신라에 병합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관복의 색깔에 담겨 있는 이치

삼국이 고대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중앙 관제를 정리하는데 그 중에서 두드러진 특징이 관복의 색깔을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백제는 6품 이상은 자줏빛 옷을 입고 11품 이상은 붉은 옷, 16품 이상은 푸른 옷을 입게 했습니다. 신라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1~5품은 자색, 6~9품은 비색, 10~11품은 청색, 12~17품은 황색을 입게 했습니다. 아마 고구려도 그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왜 구태여 관리의 품계에 따라 색깔을 다르게 넣었을까요? 연맹국가에서 고대국가로 넘어가는 시기와 관련 지어 한 번 잘 생각해보세요. ^^ 정답은 수업 시간에 공개됩니다.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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