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3 근대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다
3-3 대한 제국, 황제권을 강화하여 국권을 공고히 하겠다 


아, 쪽팔려...

이 시간에는 고종과 대한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해봐야겠네요. 먼저 이전에 우리가 배웠던 역사적 사실을 잠깐 되짚어 봐야겠네요. 이 전에 일본이 친러파가 득세한 우리나라 정치 상황을 역전 시키기 위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에 대해 배웠죠? 자신의 아내가 죽자 고종은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잘못하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부랴부랴 러시아 공사관으로 야반도주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아관파천입니다.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고종의 모습>

아관파천 후 1년이나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릅니다. 그러나 일국의 왕이 남의 나라 대사관에서 지낸다는 게 얼마나 쪽팔린 일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고종에게 환궁을 요구합니다. 각지에서 환궁에 대한 요청이 계속 오자 고종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자기도 쪽팔리겠죠? 그래도 일국의 왕이라는 사람이 남의 나라 대사관 신세를 졌으니까요. 

 <사람으로서, 아니 왕으로서 쪽팔려 ㅠㅠ>

그래서 이 쪽팔림을 만회하고자  엄청나게 화려한 행사를 기획합니다. 바로 황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죠. 이런 결단이 가능했던 것은 청일전쟁에서 종주국으로 자처하던 청의 패배 때문이었습니다. 청의 간섭이 없어지자 조선은 황제국을 칭하게 되고 고종은 황제가 되었습니다.

 <고종이 즉위식을 거행했던 원구단 황궁우, 황제만이 쓸 수 있는 팔각 지붕을 사용했다>

겉으로 강해보이는 황제, 하지만...

고종이 황제국임을 선포하고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꿉니다. 겉으로는 광장히 강해보이는 황제였고 의식도 화려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만큼 황제는 강했을까요?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먼저 고종이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환궁한 사정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먼저 경운궁의 위치를 볼까요?
 

<경운궁(덕수궁)의 위치 , 주변에 각국의 대사관이 포진한 모습이 보인다. 여차하면 그쪽으로 튀겠다는 얘기다>

각 국 공사관이 궁궐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는 일본이 다시 한 번 을미사변 같은 행위를 할 경우 여차하면 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대한제국의 상황은 위태로웠습니다. 이 위태로워 보이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고종이 빼어든 카드는 바로 황제권 강화였습니다.

<내가 킹왕짱이다! 고종은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대한국 국제를 반포한다>

고종은 개혁을 추진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황제권의 강화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황제권을 정점으로한 개혁을 구상했고 황제를 가장 권력의 중심에 두는 대한국 국제를 반포했습니다. 대한국 국제는 지금의 헌법과 유사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1조에 대한제국이 자주 독립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제2조, 3조에서는 대한제국이 만세불면의 전제 정치이며 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명시하여 황제가 권력의 정점에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고종은 막강한 황제권 아래 구본신참(옛 것을 기본으로 하고 새것을 첨가한다)을 구호로 삼아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아무래도 개혁의 구호가 구본신참인 것을 볼 때 독립협회나 갑오개혁, 갑신정변에서 추구했던 개혁 보다는 상당히 보수적인 색깔이 강했습니다. 제도의 변화는 미미한 편이었고 서양의 기술과 기계를 받아들이는 동도서기론 입장에 좀 더 가까웠죠.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앞에서 동도서기론을 내세웠던 개혁들이 실패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결국 대한제국의 개혁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주변 열강들의 간섭 속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래도 건질 것이 있었다

대한제국의 개혁은 거의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건질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광무양전이라고 불리는 토지 조사 사업이었습니다. 

 <우오오오 득템!! 광무개혁 성과는 미미했지만 광무양전의 개혁 성과는 건질 것이 있었다>

광무양전은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말이 어렵다구요? 쉽게말해서 국가가 토지 소유권에 대해 확인해준 거죠. 이게 왜 중요하냐구요? 국가라는 강한 힘을 가진 기구가 토지에 대해 누구 것인지 확인해주면 바로 그 다음부터 국가가 토지 거래에 관해 관여할 수 있게 되는거죠. 즉, 국가가 토지에 관련한 사항 등을 장악했다는 의미가 되죠. 또한 이전에 명분상 토지를 가지고 있던 사람과 실제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일치시킴으로써 토지를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게 했습니다. 아 이런 삐이이이이~ 어렵다고요? ㅠㅠ

쉽게말해 개인과 개인 간의 거래에 국가라는 강력한 힘을 가진 기구가 끼어들었다는 거죠. 개인 간의 사적인 거래가 국가가 관여해서 공적인 거래로 바뀌는 거고 앞으로 토지에 관한 거래를 국가가 장악하겠다는 뜻이죠. 사적인 영역이 공적인 영역으로 바뀌는 순간이며 이게 근대화를 설명하는 핵심 사항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자 이래도 모르겠으면 나랑 광무양전이라는 인연이 없다--;; 생각하시고 광무양전은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해주었다 라고만 이해하셔도 될 것 같아요. ^^ 제가 설명을 제대로 못하는 불찰이죠 뭐 ^^;;

간도 색다르게 보자

교과서에서 간도와 독도를 다루고 있는데 사실 이 부분은 상당히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런걸까요? 이제부터 저랑 알아가봅시다 ^^

(주의!! 이 뒤에 얘기는 동의하기 힘들수도 있고 교과서에 서술된 내용이라는 차이가 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은 항상 여러 가지 시선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역사 교과서는 역사에 관한 이야기만 담고 있는게 아니라 정치적 이야기를 항상 내포하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이와 관한 문제는 나중에 제가 따로 다뤄보도록 할게요 ^^)

간도에 대한 문제의 처음 시작은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던 때로 거슬로 올라갑니다. 청나라는 만주 지역을 자신들이 일어난 신성한 지역이라고 하여 그 일대를 봉금지대로 설정해놓습니다. 이것은 여기에 살던 만주족(청을 세운 민족)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한족(기존에 중국에 살던 민족)의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족의 유입은 차단할 수 있었으나 조선 사람이 이곳에 때때로 넘어가는 일이 생겼습니다.

<크크 빈집이다-_-!! 사람이 많이 살지 않던 만주 지역에 조선인이 자주 넘어감으로써 문제가 생긴다>

조선인들은 이곳에서 인삼을 캐거나 하는 일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청나라 사람들과 다툼이 생기면서 청나라 조정에서 봉금 지역이었던 만주에 조선인들이 자주 넘어가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러자 국경 문제도 마무리 지을겸, 만주족이 신성시 여기던 백두산을 자신의 영토로 삼기 위해서 사절단을 조선에 파견합니다. 협상결과 동쪽은 압록강 서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국경을 삼는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 당시만해도 사람들은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인식했던듯 합니다.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도 보면 그 사실이 나와있고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확실히 국경선을 그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것처럼 토문강은 송화강 지류라고 인식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럼 이런 주장은 왜 나오게 되는걸까요?

문제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뒤 170년뒤에 일어납니다. 이때는 세도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였습니다. 여러분 알죠? 세도정치가 어떤 정치형태인지? 막 to the 장 -_-

<이딴 정권 아래서 살 수 없다 ㅠㅠ, 세도정치를 피해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로 넘어온다>

세도정치를 피해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로 넘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만주, 연해주 등지에 많은 조선인들이 살게되고 조선인들만의 부락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청나라는 남하해오던 러시아의 압박을 느껴 만주 지역에 봉금을 차츰해제하고 한족의 이주를 허용합니다. 근데 막상 봉금을 해제하니 어라?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죠. 청과 조선은 다시 국경분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때 새삼스럽게 다시 문제가 된 것이 바로 동위토문이라는 백두산 정계비의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170년전 백두산 정계비는 굉장히 애매하게 국경을 정한 것이었기고 실제 토문강이 어떤 위치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런 애매함 때문에 청나라는 토문강을 두만강이라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조선은 이제 만주 지역을 직접 관리를 의사를 내비치면서 토문강을 송화강의 한 지류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양국이 만주 지역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전에는 별 문제가 없던 것이 문제가 되고 말았죠.

<두만강과 토문강의 위치, 출처는 http://nestofpnix.egloos.com. 간도문제에 대해 명쾌한 정리가 있기도합니다>

이렇게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면서 합의점에 도달하지못하고 있을 때,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청나라가 일본에게 패배를 하게됩니다. 청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대한제국은 간도에 관리를 파견하고 이 지역을 함경도 행정구역으로 편입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간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게된 배경입니다.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나라가 간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저는 회의적이라고 봅니다. 역사적 증거도 빈약하거니와 만약 역사적으로 간도가 명백히 우리 것이라는 가정을 깔아도 지금 간도를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이미 간도 지역에는 조선족 보다는 한족이 많이 삽니다. 게다가 조선족 사람들은 과연 자기 스스로를 한국인이라 생각할까요? 우리는 늘 조선족이라하면 멸시하는 태도를 가지면서 이럴 때만 한민족이라 찾으면 조선족 입장에서는 얼마나 웃기게 생각할까요? 아무튼 간도 영유권에 관해서는 저는 조금 회의적입니다.

그렇다면 독도는?

음, 이제 독도가 남았군요. 이 인간 간도에서 대해서 말하는 꼬락서니 보니 독도에 대해서 이상하게 얘기하는거 아니야? -_- 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절.대.로.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독도는 대한민국 영토임이 분명합니다.

<독도는 우리영토입니다. 흠, 이런 생각까지 인증해야한다니 조금 슬프네요ㅠ>

독도에 대한 영토분쟁은 왜 발생하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공도정책 때문에 그렇습니다. 공도정책이란 조선 초기에 시행된 정책으로 섬에서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섬에 떨어져 살면서 왕명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길까는 우려때문에 생긴겁니다. 하지만 섬을 비운다고 사람이 안 살겠습니까? 바로 사람이 살기 시작하는데 일본인들이 이 주변에 고기 많은 것을 알고 접근해왔습니다. 이것 때문에 조선정부와 일본정부 간에 다툼이 발생했고 그 중심에 안용복이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들어와 고기잡는 모습을 보고 분계한 안용복은 일본인들을 쫓으려고 하다가 일본 어부들에 의해 사로잡혀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울릉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며 조선인 어부의 출입을 막아달라고 조선정부에 서찰을 보냅니다. 이 서찰을 보고 일본의 흉계를 알아챈 조선 정부는 처음에는 외교적 마찰을 피하려고 했으나 후에 일본인의 울릉도 출입에 대해 엄히 꾸짖고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조선정부는 섬에 사람이 살지 않도록 지시했지만 영토를 포기하지 않고 관리를 하려는 시도를 보여줬고 이를 통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조선 말기가 되면 공도정책을 포기하고 울릉도에 사람이 살게됨으로써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로 확고히 굳어지게 됩니다.

자 어딘가 비슷해보이지 않나요? 만주 지역이 빈땅이어서 인삼을 캐러갔던 조선인과 울릉도가 빈땅이서 고기를 잡으러 갔던 일본인의 모습이? 간도와 독도 문제는 어딘가 닮은 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유리한대로 간도와 독도를 제 각각 해석할 수 있지만 그것은 옳지 못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사태이던 간에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밀지 말고 한 가지 잣대를 적용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참, 그리고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http://orumi.egloos.com/4500362의 포스팅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역사에 관한 재밌는 사실이 많은 블로그로 꼭 한번 들려보세요 ^^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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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대를 후세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궁금해하곤 한다. 아마도 좋은 시대로 기억되기 힘들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하나쯤은 있는 핸드폰, 컴퓨터, 자가용... 이런 것들을 쓸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희생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커피도 이런 어린 아이들의 노동력을 대가로 하고 있다>

 
끊임없이 물질을 만들고 소비해야 이 사회가 유지되기 때문에 그렇기에 그 사회에 도태되지 않기 위해 수많은 젊음들이 자신을 채찍질 하고 있다. 영어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따고 인간관계가 마저 소위 말하는 스펙의 일부로 들어가는 요즘 사회. 후대 역사가가 분명 광기의 시대라 평가할 이 시대.

그래도 우리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에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어제 무한도전에서 나온 '말하는 대로'가 바로 이런 위로와 위안이 아닐까?

<지친 20대에게 바치는 노래, 말하는 대로>

위로와 위안이 필요한 이 시대. 정말 꼭 필요한 위로와 위안을 받은 것 같다. 이 시대가 비록 힘들더라도 힘을 내자 20대 들아. 내 친구들아.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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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3. 근대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다
3-2 독립 협회, 민중과 더불어 국권·민권 운동에 나서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독립을 외치다

혹시 여러분 독립문에 대해서 아시나요? 서대문쯤 가면 있는데 본 적이... 없겠죠? -_-;; 그럼 이쯤에서 사진을 한 번 보여드리는게 맞을 듯 싶네요. 바로 요겁니다.

<서대문구에 있는 독립문의 모습>

얼라 보니 이거 왠지 어디서 본 기억이 있지 않나요?  바로 프랑스의 개선문의 모습을 본 떠서 만든 것입니다. 이 독립문의 모습이야 말로 우리에게 이 문을 만들 것을 계획한 단체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그 단체가 뭘까요? 바로 독립협회입니다.

자, 그러면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왜 만들었을까요? 독립문은 누구로부터의 독립을 말할까요? 일본? 틀렸습니다. 바로 청나라입니다. 지금까지 제 이야기를 잘 쫓아오셨다면 개항기 때 우리나라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나라가 청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자 우리나라에 대한 영향이 사실상 없어졌습니다. 이 기회를 노려 독립문이 세워진거죠. 독립문 자리는 예전에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이라는 문을 헐고 그곳에 세워졌습니다. 

<영은문의 모습, 영은은 맞을 영(迎)과 은혜 은(恩)을 써서 은혜를 맞이한다는 뜻이 있다.>

이렇게 독립문을 세워 청나라로 부터 독립 의지를 굳건히 한 독립협회는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말로써 독립을 지키는 것이 아닌 실력으로써 독립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을 추진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민중과 함께 하다

독립협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민중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민중을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그건 바로 지나 날의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독립협회를 세운 사람 중 한 사람이 서재필이라는 사람인데 서재필은 갑신정변에 참여했었습니다. 우리가 갑신정변에 대해 앞서 배웠듯이 갑신정변은 민중의 지지가 없어서 실패했습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실패를 거울 삼아 이제는 민중의 지지를 얻고자 했습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신문 창간이었습니다.

<독립신문 창간호, 독립신문은 한글로 발행된 최초의 신문이다>

독립신문은 한글로 발행된 최초의 신문입니다. 이것이 왜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수단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독립신문이 한글로 발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문이라는 것은 대중이 즐겨 보는 매체 중 하나입니다. 대중들은 누구나 쉽게 신문을 구해서 사회 전반에 관련된 분위기를 익힙니다.

<대중들은 신문을 읽으면서 사회가 돌아가는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신문이 중요한 이유는 이전까지 정치와는 무관했던 대중들이 신문을 읽으면서 정치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그에 대해 반응을 나타내고 혹은 참여 또한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신문이 대중들이 읽을 수 없는 언어로 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실제로 한성순보가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서 창간되기는 했지만 한자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대중들이 신문을 읽는 데는 무리가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우 이게 무슨 글자야 ㅠㅠ, 한자로 쓰여진 한성순보는 대중이 읽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한 것이 바로 독립신문입니다. 독립신문은 순우리말로 씌여졌기 때문에 대중들이 읽는 데 무리가 없었습니다. 또한 독립신문은 한글판 말고도 영문판으로도 발행되어 외국인들도 우리나라의 사정에 대해서 알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독립신문의 발행은 독립협회가 앞으로 개혁에 관한 활동을 하는 데 큰 밑그림을 그리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독립신문 말고도 독립협회의 민중을 위한 행보는 계속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만민 공동회입니다. 만민 공동회는 일종의 정치 집회로 볼 수 있습니다. 드디어 신민(臣民)이 국민(國民)으로 바뀌는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왜 그러냐고요?

<만민공동회의 모습, 최초의 정치집회라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자, 생각해봅시다. 조선 왕조 내내 백성은 다스림을 받는 존재, 은혜를 베풀어야 될 존재로 파악했습니다. 즉, 능동적으로 어떤 것을 요구하거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대규모 참여활동이라고 해봤자 농민봉기 정도가 있겠지요. 이마저도 조선 정부는 이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진압하려고 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백성들이 이제 신문을 통해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그에 맡게 자신들의 요구를 내비치는 대규모 집회를 가짐으로써 백성은 더 이상 다스림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직접 나라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존재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이후에 만민공동회는 대한제국에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정부까지 합세한 관민공동회로 발전하게 됩니다. 관민공동회에서는 백정 박성춘이 연설하게 됨으로써 신분제도의 모순까지 해결하려는 의지까지 보여줬습니다. 또한 헌의 6조를 고종에게 올려 개혁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관민공동회에서 백정이었던 박성춘이 연설하는 모습>

본격적인 개혁을 추진하다

이제 민중의 지지를 얻게 된 독립협회는 본격적인 개혁운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독립협회가 가장 중시한 것은 바로 의회설립운동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서양의 여러나라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나름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알려지는 일본 모두 의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회가 있다는 것은 왕 혼자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없고 대중의 의견을 모아 정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근대화의 모범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의회인 국회의 모습, 지금이야 국회가 막장처럼 보이지만 국회라는 기관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다>

독립협회는 의회를 설립하고 궁극적으로 왕에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켜 왕도 의회에서 만든 헌법에 따라 통치를 하게 만들려 했습니다. 이런 통치 형태를 입헌 군주제 라고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영국이 있습니다. 영국은 오랫동안 의회가 국왕의 권력을 견제하는데 성공했고 지금은 사실상 의회에서 나라를 다스리고 국왕은 그냥 상징적인 존재로만 남았지요.

아무튼 이런 형태를 만들기 위해 중추원이라는 곳을 의회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와 더불어 중추원이 실제 힘을 갖기 위해 헌의 6조를 고종에게 올렸습니다. 헌의 6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민이 한마음으로 힘을 합하여 전제 황권을 견고하게 할것
2.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3. 국가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표할 것
4.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것.
5. 칙임관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에 그 뜻을 물어서 중의에 따를것
6.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헌의 6조의 내용, 근대국가가 갖춰야할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다.>

헌의 6조를 보면 외국인에 의지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독립의지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조항에서는 중추원의 기능이 나오고 있는데 사실상 중추원을 의회로 구성하려 했던 의도가 엿 보입니다. 기타 조항들은 근대 국가가 갖추어야 하는 조건들인 재정을 일원화하고 공개하는 것, 인권 존중과 법적 절차 등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조항들은 그냥 뜬구름 잡기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행이 되었습니다. 특히 첫번째 조항과 관련해서 러시아의 이권침탈을 저지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군사 교관, 재정 고문이 철수되고 러시아가 세운 한러 은행을 폐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진정 이렇게 좋은 일만 했을까요?

독립협회, 치명적 한계

독립협회는 치명적 한계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진화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사회진화론이란 사회도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강한 국가가 약한 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이론이었습니다. 이게 맞는 말 같다구요? 그럼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것은 당연한 일이 되겠네요? 그렇죠?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인을 고문하는 일본인의 모습, 사회진화론에 따르면 이 같은 행위는 비난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사회진화론은 적극적으로 부정되야 합니다. 이것은 맞는 이론도 아니거니와 열강들이 자신들의 침략 행위를 미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죠. 그러나 독립협회 인사들은 그것을 꿰둟어 보지 못했고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한 가지 실수는 일본을 너무 우호적으로 봤다는 점입니다. 열강의 이권침탈을 저지한다고는 했지만 오히려 일본에 대해서는 관대했습니다. 독립협회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일본은 같은 동아시아 국가고 서구 열강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달랐을까요? 슬프게도 이후의 역사가 증명하듯 일본은 서양보다 더하면 더했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놈이 그놈이여... 독립협회는 일본에 대해 큰 착각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실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데 어쨌거나 독립협회도 민중을 그저 무지한 존재로 파악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민중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은 인식했으나 여전히 민중은 무지하며 계몽의 대상으로 파악하여 그들은 낮은 존재로 파악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엘리트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던 한계였습니다. 

독립협회의 해산과 의의

어쨌든 개혁을 추진하면서 한계를 가지고 있던 독립협회는 결국 해산을 당하고 마는데 그것은 고종 황제에 의해서 였습니다. 독립협회의 세력이 커지자 독립협회를 두려워 한 세력들이 독립협회가 황제를 없애고 공화정을 만드려고 한다고 모함했고 자신의 권한이 축속될 것을 두려워 한 고종은 황국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독립협회와 대립하게 한 다음 강제로 해산 시켜버렸습니다. 

한계가 있는 독립협회였지만 민중과 함께 개혁을 추구하고자 했다는 점과 근대화 국가를 뚜렷하게 지향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많은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이제 역사의 흐름은 이전보다 보수적 변화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부분은 다음 광무개혁과 대한제국의 성립에서 알아보도록 합시다. ^^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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