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조선 중기 선조 재위 시 출현한 붕당에서부터 조선 후기 붕당까지 그 전개과정을 계보로 그리고 간략히 설명글 쓰기(A4).

작성방법

손으로 써서 제출

제출요령

1) 3,5반 6월 20일까지. 4반은 6월 21일까지 한국사 수업시간에 제출
2) 제출기한 엄수, 기한을 넘길 시 모두 0점 처리. 

채점

기본점수 4점, 미제출시 0점. 만점은 10점. 

과제 작성 예시

1학년 0반 0번 김중근

계보도를 그리고 계보도에 관한 설명 서술. 예를 들면 동인과 서인이 어떻게 분파되었는가에 대해 서술. 

참고자료

한국사 교과서 p 80
lahistoria.tistory.com/30

'과거 안에서(고등학교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사 수행 평가 공지  (6) 2011.04.08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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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3) 근대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다
3-1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추진된 갑오개혁 


근대가 시작되다


보통 조선이 근대가 시작된 것에 대해 여러 역사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립니다. 조선 후기 부터라는 설도 있고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하고 난 다음부터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제 생각으로는 갑오개혁 부터 근대라고 보는게 타당합니다. 왜 그럴까요? 근대라는 것은 대중과 대량으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중이 출현하기 위한 필수조건은 뭔가요? 네, 바로 신분제 철폐지요. 신분제가 철폐되어 나와 너의 다름 구분이 사라지고 모두 같은 '국민'일 필요가 있는 거죠. 바로 갑오개혁을 통해 달성되는 것입니다.

 <근대에 들어서면 신분제가 사라지고 대중이라는 새로운 집단이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왕과 국가를 구분하지 못하던 시대를 넘어 갑오개혁을 통해 왕실과 국가가 분리됨으로써 조선은 근대국가체제를 갖추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러면 이처럼 조선에 근대를 가져다 준 갑오개혁은 어떤 사건이고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갑오개혁이 시작되다

갑오개혁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갑오개혁이 어떤 과정을 통해 추진되었는지 부터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먼저 지난 시간에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배웠지요?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이 들어왔고 동시에 일본군도 진주했다는 것을 배웠을 겁니다. 결국 조선을 두고 양국 군대는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발빠르게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면서 조선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고자 했습니다. 경복궁을 점령한 이후 일본은 개혁을 한다는 명목 아래 조선에 일본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개혁을 추진하는데 그것이 바로 갑오개혁입니다.

<경복궁 수정전, 예전에 집현전이 있었던 이 자리는 갑오개혁 당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었다>

일본의 무력으로 인해 시작되었던 갑오개혁은 총 3차에 걸쳐서 진행됩니다. 1차 개혁은 군국기무처라는 기구를 설치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개혁을 해 나갔습니다. 1차 개혁을 할 당시에는 청일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때였으므로 일본의 간섭이 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비교적 일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개혁이 진행되어갔습니다. 1차 개혁의 성과로 가장 큰 것이 신분제를 없앤 것입니다. 이 신분제가 없어지면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근대로 진입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분제가 없어졌다고 해서 바로 양반과 평민이 평등해졌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원래 그렇잖아요? 학생인권조례 발표되도 갑자기 여러분 인권이 막 신장되고 그러나요? 아니죠? ^^; 그만큼 어떤 일이 이제 시작되었다고 해서 바로 그 효과가 나타나는 건 아니랍니다.

<갑오개혁의 신분제 폐지는 진정한 평등을 위한 험난한 여정에 첫걸음일 뿐이었다. 아직도 평등을 위한 많은 난관이 남아있다.>

신분제 폐지 외에도 여러가지 개혁 성과가 있습니다. 6조가 8아문으로 바뀌고 과거제가 폐지되고 경찰제도가 실시되었습니다. 뭔 얘기인지 모르겠다고요? 쉽게 말하면 근대식 제도가 들어왔다는 얘기죠.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제 한복을 벗고 서양식 제복을 갖춰입은 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다지 어울리진 않겠죠? 이 서양식 제복에 적응하려면 또 긴 세월이 걸릴겁니다.

<근대제도를 막 받아들인 조선의 모습이 매우 어색했을 것이다. 전현무의 뉴스 진행처럼 ㅋㅋ>

그리고 또 한 가지 1차 개혁의 중요한 성과는 바로 왕실과 국가의 분리입니다. 전근대 시절에 왕은 곧 국가였습니다. 이 말 아시죠? 짐은 곧 국가다. 바로 태양왕 루이 14세가 한 말인데 전근대 시절의 국가의 모습을 짐작하게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즉, 국가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는 국민이 아니라 왕이었던 거죠. 하지만 갑오개혁 때 왕실과 국가가 분리됩니다. 어느 대목에서 그걸 알 수 있느냐 하면 국가 재정이 왕실과 분리되어 하나의 기관이 돈을 관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왕실을 위해 국가재정을 쓰기도 했지만 이제는 국가 돈은 국가의 것이고 왕실 돈은 왕실의 것으로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입김이 거세지다

이렇듯 1차 개혁이 진행되던 와중에 9월 새롭게 다시 2차 갑오개혁이 시작됩니다. 1차 개혁에서 2차 개혁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되는 것은 바로 청일전쟁입니다. 1894년 9월 쯤되면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실히 보이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자신의 입맛대로 개혁을 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개혁에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갑신정변 이후 일본에 망명해 있었던 급진개화파 박영효를 불러 그를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홍범 14조라는 개혁의 지침이 발표되고 지방제도도 8도에서 23부로 바뀝니다.

<갑오개혁의 기본 방향을 얘기한 홍범 14조(위), 8도에서 23부의 행정단위도 개편된다(아래)>

이렇게 갑오개혁이 진행되던 와중에 끝내 청나라는 일본에 굴복하고 맙니다. 시모노세키에서 청과 일본은 강화 조약을 맺고 일본은 청으로 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요동 반도와 대만을 넘겨 받기로 합의했죠. 그러나 만주에 자신에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침을 흘리고 있던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으로 하여금 요동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게 반환하게 합니다. 이것이 삼국간섭입니다. 이것을 본 조선 측 인사들은 러시아가 킹왕짱 힘이 세다는 것을 깨닫고 일본을 버리고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려했습니다.

<어이쿠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가 형님이었구나, 굽신굽신>

이 상황을 보자 일본은 열불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기껏 조선이라는 나라를 집어삼키려고 청나라와 전쟁까지 불사했는데 갑자기 못 보던 러시아가 떡 하니 나타나 형님을 자처하다니 미칠 노릇이죠. 그래서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는 데 그것이 바로 을미사변입니다. 을미사변은 당시 공공연하게 일본을 무시하고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려고 했던 명성황후를 시해함으로써 조선의 주도권을 다시 일본으로 빼앗아 오려는 사건이었습니다.

<을미사변 상상도,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신을 태우고 있다>

을미사변 이후로 다시 주도권을 잡은 일본은 중단되었던 개혁을 다시 시행합니다. 이것이 3차 갑오개혁이며 을미개혁으로도 부르는 것입니다. 을미개혁은 가장 큰 내용이 바로 단발령입니다. 단발령은 상투를 자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유교국가였던 조선에서 천인공노할 짓이었죠. 부모님이 물려준 머리를 자른다는 것은 유교국가였던 조선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아무튼 단발령에 대한 엄청난 반발이 유생층에 나타났는데요. 이것이 곧 최초의 의병인 을미의병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단발령이 공포된 이후 강제로 길가에서 강제로 머리를 자르고 있는 모습>

그러나 일본은 너무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조선의 왕비를 시해한 것도 모자라 선비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상투까지 자르게 하니 일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었습니다. 게다가 을미사변을 계기로 고종은 신분은 큰 위협을 느꼈죠. 자칫하다가 자기도 저꼴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고종은 겁을 집어먹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데 이것이 바로 아관파천입니다. 이로 인해 일본이 했던 모든 개혁은 중단되고 말았고 조정의 대신들도 모두 친일파에서 친러파로 돌어서게 되었습니다.

강요된 근대

갑오개혁은 비록 1차 개혁 때는 자율적으로 추진된 측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간에 그 시작이 일제에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사항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해도 인상 구기고 그 일을 하면 잘 될 턱이 있나요? 그리고 강요해서 시행된 개혁은 불안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예로 갑오개혁 때 신분제가 폐지되는 긍정적인 면이 있었지만 국방력 강화나 상공업 진흥 정책, 당장 농민들에게 급했던 토지 제도에 관한 논의는 아무것도 없었던 거죠. 결국 강요된 개혁과 근대는 우리에게 많은 아픔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몸에 좋은 거라도 억지로 먹이면 병난다. 강요된 개혁과 근대도 마찬가지다>

갑오개혁으로 인해 우리의 근대는 이제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이 근대의 출발이 왜곡된 형태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바로 잡는 것이 한국사에 과제로 남게 되었습니다.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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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2)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다
2-2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 


고부 농민 봉기, 위대한 첫 걸음

이제부터 동학농민운동(갑오농민전쟁)에 대해서 배워봅시다! 동학 농민 운동의 시발점이 된 것은 바로 고부입니다. 이곳이 왜 동학농민운동의 시초가 되었을까요? 먼저 고부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고부는 전라도에 있습니다.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구요? -_-; 전라도 하면 곡창지대입니다. 또 당연한 소리군요; 곡창지대면 쌀이 많이 난다는 얘기인데 쌀농사를 지으려면 가장 필요한게 뭘까요? 바로 물입니다! 고부 지역에는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잘 짓기 위해 둑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광산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병갑이라는 신임 군수(이름만 딱 봐도 나쁜 놈 같죠?)가 부임하더니 새로운 둑을 하나 더 짓는 겁니다. 이미 둑이 있는데 말이죠. 그리고는 너네 물값내라 하는 겁니다. 미치고 팔짝 뛰겠죠?

 

<고부 농민 봉기의 원인이 되었던 만석보>

조병갑의 횡포에 대해 고부의 농민들은 항의 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요. 정부가 이 사태를 해결해 줄 기미가 안 보이자 농민들은 스스로 무장을 하고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전봉준 등은 동지를 모은 다음 고부 관아를 점령했습니다. 농민들은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를 조병갑이 오기 이전 상태로 되돌리려 했습니다.


전주성을 점령한 1차 봉기

정부는 이 사태에 깜짝 놀라 고부 군수를 새로 임명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했습니다. 하지만 이 안핵사라는 놈이 농민들의 억울한 사정을 잘 들어줘야 하는데 농민들을 폭도로 몰아가며 또 정부에서 금지한 사교인 동학 교도가 봉기에 관여했다면서 가혹한 탄압을 가했습니다. 열이 받을 대로 받은 농민들은 중앙 정부가 더 이상 자기 편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자신들에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동학을 찾아갑니다.

당시 전라도에서 가장 큰 동학 교세가 있던 곳이 무장(전북 고창)으로 손화중이 이끌던 곳이였는데 이곳을 찾아간 전봉준은 손화중과 함께 대규모 농민군을 조직하여 봉기했습니다. 이들은 다시 고부를 점령하고 해산하지 않고 백산으로 모입니다.

<백산, 산이라고 하기에는 쪼금 민망하다. 전북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 축제가 열리는 곳이라 이 정도 높이만 되어도 주변이 훤히 보인다>

백산에서 동학 농민군은 농민군 4대 강령을 발표하고 제폭구민(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백성을 구한다), 보국안민(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구호를 앞세워 이 농민 봉기가 단순히 지역 단위 농민 봉기로만 끝날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전봉준의 연설이 끝나자 백산에 모여 있던 흰띠를 두른 농민군이 일제히 일어났는데 이 모습이 마치 하얀 산이 일어난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 지역의 명칭이 백산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

백산에 모인 농민군들은 자신들이 천명한 것을 직접 실천하기 위해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악정에 시달리고 있는 고을들을 차례로 해방시켰습니다. 고을에 들를 때마다 새롭게 가세하는 농민군은 그 수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이제 농민군은 전라도에서 가장 큰 도시 전주성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를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뒤집어 말하면 전주와 나주가 전라도의 대표 도시라는 뜻이다. 이 도시가 함락되었다는 것은 전라도 전부가 함락되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진은 전주성의 모습> 

농민군의 규모가 커지자 자신감을 얻은 농민군 지도자들은 감영(각 도의 관찰사가 기거하는 곳)이 있던 전주성을 공격했고 전주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이로써 전라도 전부가 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나 진배없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에 놀란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고자 청의 병사를 끌어들였는데 이것이 바로 엄청난 실수였습니다.

서로 군대를 파견할 때 알려주기로 한 톈진 조약에 의거하여 일본군이 조선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었습니다! 의도치 않았던 일본군 까지 들어오자 정부는 크게 당황했습니다. 당황한 것은 농민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외세의 개입을 원친 않았던 정부와 농민군은 그릇된 정치를 바로잡을 것을 약속하고 전주 화약을 맺었습니다. 이에 따라 농민군이 점령한 전라도 각 지역에는 개혁을 실천해나갈 집강소가 설치되었고 정부는 농민군의 요구를 받아들여 교정청을 설치하여 자체적인 개혁을 실천해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청과 일 양군에 철병을 요구했습니다. 이것으로 동학농민운동은 1차 봉기가 종결됩니다.

 <농민군의 집강소 통치, 물론 상상도해서 그린거다^^>


외세 맞선 2차 봉기, 농민군의 뜨거운 피가 금강에 흐르다

그러나 한 번 들어온 외국군대가 빈손으로 나갈리가 있나요? 청과 일 양국은 조선에 서로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서로 으르렁 대고 있었던 처지입니다. 게다가 임오군란, 갑신정변으로 인해 청의 영향력에 한발 밀린 일본은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철병 요구를 무시한 일본은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인질로 잡아 청군을 자극했고 이것은 청일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한반도에서 다른 나라의 전쟁이 일어나는 비극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사태를 농민군은 가만히 볼 수 만은 없었습니다. 농민군은 2차 봉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봉기한 농민군은 논산에서 1차 봉기 때 가담하지 않은 동학 교단과 합세하여 그 세를 더욱 늘렸습니다. 남접과 북접 세력이 연합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서울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동학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서울로 북상하던 도중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마주했습니다. 그런데 일본군에는 정부군도 섞여있었습니다. 정부군은 일본군과 손을 잡고 농민군을 토벌하기로 한 것이죠. 안타까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농민군은 일본군과 정부군에 맞서 열심히 싸웠지만 그들의 화력에 밀려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이 흘린 피는 분명 우리 한국사에 거대한 이정표가 되었으며 지금도 끊임없이 흘러 우리 역사에 나아가야할 방향을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해봅니다.

백성들이 들고 일어서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부족하다

동학농민운동의 의의는 바로 민중들이 스스로 들고 일어났다는 겁니다. 갑신정변과 같은 근대 운동이 민중의 지지가 없어서 실패했음을 감안한다면 동학농민운동은 민중들이 스스로 무기를 잡고 일어나 개혁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근대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민중이 스스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처럼 동학농민운동도 시민혁명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이 결국 실패하고 시민혁명이 되지 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미래 전망이 구체적으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동학농민운동은 분명 낡은 정치를 개혁하고 외세를 배척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운동입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정치를 개혁해나가고 자신들이 정권을 잡은 다음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흥선대원군을 다시 모셔오는 정도였습니다. 이는 당시 민중들이 많이 배운 계층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계획을 제시할 수 없었던 한계가 드러납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부르주아라는 엘리트 계층과 민중들이 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개화파들은 유길준을 제외하고 동학농민운동을 폭도로 규정했습니다. 만약 개화파와 동학농민운동이 손을 잡았다면 우리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동학농민운동은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끝났습니다. 하지만 동학농민군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계속 영학당, 활빈당 등으로 활동하면서 나중에 항일 의병 운동을 전개해나가는 데 큰 초석이 되었습니다.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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