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2) 유교 정치의 이상을 꽃피운 조선
2-2 사림,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다
2-3 민족 문화가 크게 발전하다 


선비가 숲을 이루다

고려 왕조는 500년 동안 호족, 문벌귀족, 무신, 권문세족, 신진사대부 총 4번의 권력 교체가 일어났지만 조선은 단 한 번의 권력 교체가 일어났습니다. 그 주인공들이 바로 사림(士林: 선비 사, 수풀 림)입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조선은 우리가 알기로 선비의 나라라고 알고 있는데 왜 갑자기 선비들이 숲처럼 등장했다고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

<선비들이 숲처럼 많이 등장하다!>

사림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먼저 알아보는게 가장 좋겠지요? ^^ 여러분들 조선이 개국할 당시 조선 개국에 반대하는 온건 신진사대부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나요? 이들은 성리학 이론에 충실하여 충신불사이군을 내세우며 조선 개국에 끝내 반대했습니다. 일부는 죽임을 당하거나 또 일부는 은둔했는데 은둔하기만 하면 심심하잖아요? 또한 이들은 공부도 많이 했기 때문에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은둔하고 있는 동안 제자들에게 전수했습니다. 그래서 이들 밑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리학을 공부했습니다. 바로 이들이 사림입니다.

세월이 오랜 시간 지나자 사림의 수가 늘어났습니다. 사림의 수가 늘어나고 조선이 개국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자 사림들이 서서히 정치에 참여하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은 세상을 다스리는 학문인 성리학을 공부했기 때문이었죠. 세상을 다스리는 학문을 공부했는데 언제까지 숨어 있을 수 있었을까요? 드디어 성종 때가 되면 이들은 서서히 조선의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합니다.

<사림들이 정치세력으로 등장함에 따라 당시 부패했던 훈구세력과 날카롭게 대립한다>

그렇다면 사림들이 정치세력으로 전면적으로 나서기 전에 정치를 담당하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그들은 바로 조선 개국에 적극 참여했으며 세조 때의 정변을 통해 공신으로 지위를 굳힌 훈구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개국초에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개국했습니다. 이들은 성리학에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나라를 운영하면서 다른 학문도 받아들일 필요성을 느끼고 탄력적으로 다른 학문도 받아들였습니다.

언뜻 들으면 탄력적이라는 말은 좋은 말 같지요? 하지만 탄력적이라는 얘기는 그만큼 원리 원칙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말도 됩니다. 훈구파들은 원리 원칙을 어기고 공신인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등 세월이 지나면서 부패해졌습니다. 성리학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사림들은 이런 훈구파들이 눈에 차지 않았습니다. 곧 사림들은 훈구파와 날카롭게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http://home.ebs.co.kr/reViewLink.jsp?command=vod&client_id=home2441&menu_seq=4&enc_seq=3009391&out_cp=naver(훈구와 사림의 다툼)

<훈구와 사림의 비교>

특히 사림들은 바른 말을 잘했기 때문에 삼사 등으로 주로 진출하여 왕과 대신들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비판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성리학적 정치에 이상향이었던 향촌 자치 등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이 같은 주장은 훈구 세력에게는 굉장히 기분 좋지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때문에 훈구세력은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4차례 사화를 일으켰습니다. 사화는 선비들이 화를 당했다는 뜻으로 사림들이 훈구 세력에게 정치적으로 패배한 사건을 의미합니다. 사림들은 4차례 사화를 당하면서 큰 위기에 빠집니다.

사림, 굴하지 않고 결국 그들의 세상을 열다

앞에서 제가 사림들이 크게 4차례 사화를 당했다고 했지요? 사화라는 게 규모가 상당히 커서 대부분의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사림은 결국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여 훈구 세력을 밀어내고 정치적 주도권을 잡습니다. 역사는 이유가 중요하다고 제가 항상 수업 시간에 얘기했죠? 이들은 어째서 중앙 정치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을까요?

<사림은 향약을 통해 향촌 지역의 민심을 장악했다>

사림들은 향약을 보급하면서 백성들에게 까지 성리학을 보급했는데 이것을 통해 향촌에서 사림의 지지 기반을 확고히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또한 각 지역에 성리학을 공부하는 한편 자신들이 받드는 선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서원을 만들어 자신들끼리 결속을 다졌습니다.

<공부하겠다는 데 반대할 명분이 있을까? 사림은 서원을 세워 자신들의 제자를 키우고 결속력을 강화한다>

결국 이 두 가지 발판을 이용해 사림들은 정치적 주도권을 훈구 세력으로부터 빼앗아 올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정치 세력의 주도권을 잡은 이후로 조선은 이제 백성들까지 성리학적 질서를 받아들이는 단계까지 오게됩니다.

하지만 성공한 세력들은 저 마다의 견해 차이가 존재하는 법. 사림은 정치 주도권을 장악한 이후에 정치적 견해 차이와 이조 전랑(이조 정랑과 이조 좌랑을 합쳐 부르는 말로 3품 이하 문관들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다)의 자리를 가지고 사림 간에 첨예하게 대립하게 됩니다. 특히 이조 전랑 자리는 자신들의 학맥에 있는 사람을 등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리였기 때문에 대립이 격화되었으며 결국 선조 때 동인과 서인으로 사림이 분열되면서 이후 이들의 정치를 붕당 정치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붕당 정치는 소모적인 당쟁이 아니며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하여 서로 나은 대안을 제시하고 서로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견제하는 어찌보면 정당 정치의 기초적 형태라는 것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

<조선 붕당의 흐름, 여기서 국사 공부를 좌절했던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ㅠ>

민본 사상을 바탕에 둔 문화가 싹트다

자, 이제 문화사 얘기를 해봅시다. 정치사와 문화사를 나누는 것도 상당히 웃긴 일이긴 하지만 교과서 구성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할 수 없지요. ^^; 원래 문화라는 것은 그 당시 정치 세력과 시대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조선은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수립된 나라이기 때문에 조선 전기 문화는 이 민본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이 민본사상의 완성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훈민정음입니다.

<훈민정음은 백성들이 의사소통을 쉽게 하고 유교 윤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고 창제되었다>

<조선의 문화>

훈민정음은 백성들도 문자를 알고 공부를 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만든 문자로써 만약 백성들이 글을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 창제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했던 문자입니다. 그러나 조선 왕조에서는 백성을 근본으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유교윤리를 보급하려 했기에 훈민정음 창제로 그것이 이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백성을 중심으로 생각했던 사례는 조선 전기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백성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농사를 위해 우리 실정에 맞는 농서인 농사직설이 편찬되었고 또한 농사에 필요한 날짜와 절기를 알기 위해 새로운 달력인 칠정산이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수 많은 천체 관측기구가 만들어지고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 농사에 필요한 기상 관측을 위해 조선 왕조가 노력했던 흔적이 보입니다. 또한 우리 나라 풍토에 알맞는 의서들도 만들어졌고 국방력 강화를 위한 신기전, 화차, 거북선등도 이때에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모든 문화와 기술의 경향은 한마디로 민본에 있습니다. 백성을 근본에 두고 백성을 생각했던 마음이 문화나 기술에도 적극 반영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민본외에도 조선 전기 문화를 결정지었던 중요한 특징이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주성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명나라와 대립하기도 하는 등 중국이라고 해서 무조건 한 수 접어주는 모습은 조선 초에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대 역시 작은 나라로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강구되었을 뿐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런 자주적 기풍이 문화에도 반영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때 적극적으로 단군의 후예라는 인식이 성립되었다. 고려 시기만 해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자주적 기풍은 민족적 기원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져 단군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졌습니다. 뭐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정했으니 그것만 봐도 단군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지요 ^^ 또한 우리 민족 사서인 동국통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이 편찬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정한 것에는 또 다른 불편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기자 조선 계승의식입니다. 기자 조선이란 말이 좀 생소할 수도 있는데 지금부터 알아봅시다 ^^

<기자의 초상화, 물론 상상도이다 ^^;>

기자는 중국 현자 중에 한 사람으로 중국 은나라 주왕의 폭정에 대해 적극 간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원래 우리도 그렇지만 싫은 소리 계속하면 짜증나잖아요? 그래서 주왕도 기자를 감옥에 가둡니다. 주왕은 이후 주나라의 무왕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는데 이때 기자도 풀려납니다. 주 무왕은 기자를 등용하려 했지만 기자가 거부하는데 여기서 재밌는 기록이 하나 전해옵니다. 그것은 주 무왕에 의해 이 기자가 조선왕에 봉해졌다는 얘기입니다. 이를 기자조선설이라고 하는데 이에 따르면 우리 단군조선 이후에 중국인인 기자가 조선을 지배했다는 얘기됩니다. 지금이야 이 얘기가 불쾌한 얘기지만 그 당시에는 중국이 문명의 상징이었으니까 기자가 조선에 왔다는 것 자체를 매우 자랑스러워 했고 그랬기에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은 기자의 조선을 잇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역사는 역시 한가지 면만 생각하면 안 되겠죠? ^^

마지막으로 지리 서적에 관한 얘기를 해야겠네요. 우리는 보통 조선 왕조 내내 지리학적 지식이 부족하다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만들 때도 논란이 많았던 것으로 아는데 그것은 좀 큰 오해입니다 ^^; 특히 조선의 건국 초에는 나라를 다스릴 정보가 많이 필요했으므로 적극적으로 지리서적을 편찬했습니다. 팔도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조선의 지리학적 지식이 후기에 비해 크게 보잘 것 없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팔도지리지>

그리고 대동여지도 얘기 중에 가장 웃긴 것이 전국 답사를 해서 지도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김정호가 초인도 아니고 모든 조선 땅을 돌아보지 않았을 겁니다 ^^; 답사를 가기도 했겠지만 예전 지도 역시 참고한 끝에 대동여지도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죠. 아시겠죠? ^^

성리학이 심화되어 조선에 만발하다

조선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성리학입니다. 하지만 조선 왕조가 처음부터 성리학의 꽃을 피웠던 것은 아닙니다. 한 학문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려면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요. 게다가 처음 조선의 개국을 주도했던 사대부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성리학만을 고집하지는 않아서 탄력적으로 다른 학문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건 훈구파할 때 배웠지요? ^^ 하지만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점점 사림 세력들이 정치 주도권을 잡아나가는 과정에서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연구가 뿌리 내리기 시작합니다.

 

<퇴계 이황, 동양의 주자로 불리지만 우리에겐 천원 할배에 불과하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나타나는 것이 이기론입니다. 이기론은 성리학에 가장 중심이 되는 원리로 조선시대 수많은 유학자들이 이를 연구했습니다. 특히 퇴계 이황은 이기론을 정립하는 데 큰 공헌을 세운 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이언적의 주리론을 더욱 심화 발전 시켰습니다. 이황의 주리론은 세상을 움직이는 근본원리인 이를 중요시한 것입니다.


 <5천원 아저씨인 율곡 이이,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5만원권 여사로 아들 위에 있다 ^^;>

반면 율곡 이이는 서경덕의 주기론을 계승하면서 이황의 주리론도 나름대로 받아들여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그의 주기론은 실제 나타나는 현상인 기를 중요시했습니다. 두 학자의 이와 같은 차이는 그 당시 정치상황을 감안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황의 경우 아직 사림이 정치적 주도 세력으로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적인 기를 강조하기 보다는 원리, 원칙을 강조하는 이를 깊게 연구했고 이제 사림이 완전히 정치적 주도 세력으로 떠오른 율곡 이이 대에는 현실적 현상을 연구하는 기를 연구한 것입니다. 이 같은 정치 상황 차이에 주목 한다면 두 학자의 학문적 차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이런 학문 차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입장차이로도 이루어져 나중에 붕당이 탄생하는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성리학자들의 학맥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림의 계보, 영남은 경상도 지방을 뜻하며 기호는 경기와 충청 지방을 말한다>

 정치세력에 따라 바뀌었던 양반문화

조선의 지배층은 양반으로 이들이 향유했던 문화를 바로 양반문화라고합니다. 하지만 양반이라고 해도 조선 초기와 중기 양반에 대한 성격은 사뭇달랐습니다. 개국초의 양반들은 훈구파라고 불리우며 성리학 외에도 다양한 문화를 수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그런 그들의 성격이 그들이 향유했던 문화에도 나타났는데요. 유교를 고집한 그림 보다는 도교나 노장사상이 녹아있는 그림도 제법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몽유도원도나 고사관수도에 나타납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의 꿈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으며 당대 유명한 문사들이 이 그림에 대한 찬을 달았다>

하지만 사림이 집권하고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양반 문화에 변화가 생기는데 주로 소박함, 지조 등을 나타내는 작품들이 나타납니다. 서원이 많이 건축되었으며 선비의 지조를 나타내는 매화, 난, 국화, 대나무를 그린 사군자의 문인화가 유행했습니다. 또한 도자기도 화려함 보다는 소박, 담백한 맛이 있는 백자가 유행했습니다.

 <사림들의 단아함이 느껴지는 백자, 허접해 보인다고? 이 백자는 미국에서 경매 결과 12억원에 팔렸다>

또한 한글 보급이 확대되면서 그에 따른 가사. 시조 문학이 발전했으며 황진이, 신사임당 같은 여류 문인들의 활동도 눈에 두드러졌습니다. 

사림들이 학맥에 따라 정치적 입장이 달랐던 까닭은?

사림들이 주도권을 잡은 이후로 붕당정치가 전개되어 나가는데 이 붕당은 주로 같이 공부를 한 사이거나 스승과 제자 사이에 주로 형성되었습니다. 정당에 일종이라고도 볼 수 있는 붕당이 왜 학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지 그 이유를 말할 수 있을까요? ^^ 

Posted by Avil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