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SETTING THE STAGE

아시아 다음으로 면적과 인구가 많은 아프리카, 그들의 역사는 동정 받아서도 오해받아서도 안 된다.

아프리카의 역사는 많은 오해와 몰이해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글을 쓰는 저마저도 아프리카 대륙의 역사에 대해 자신있게 서술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아프리카 인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그들의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Ch8에서 배웠듯이 그리오(Griots)라 불리는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그들의 역사와 전통을 전파했고 문자를 써 자신들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쉽사리 역사를 파악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또한 지중해나 사하라 이남 사헬 지역에 존재했던 몇몇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아프리카 대륙 중심부에 있던 여러 부족들의 역사는 지리적 격리로 인해 수백년 동안이나 자세한 정보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역사의 무대로 본격적으로 끌려나왔던 시기는 바로 19세기~20세기 제국주의 시기. 이들에 대한 정보는 당연히 서구에 의한 왜곡된 것들 뿐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현대에 아프리카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동정적인 시선으로 아프리카사를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랑케가 모든 역사는 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듯이 어떤 역사를 볼때도 동정적인 시선으로 보고나 얕잡아 보거나 지나치게 찬양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의미있는 성취를 진행했습니다. 오해, 동정, 편견을 걷어내고 진정한 아프리카의 역사를 만나보도록 합시다.

1. Stateless Societies, lineage

아프리카 부족의 분포도

 

단일민족이라는 말에 익숙한 우리에게 아프리카의 역사는 생소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습니다. 아프리카에는 1민족 1국가라는 허상을 기초로 만들어진 근대 민족주의 국가 발달 과정을 밟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근대 국가의 탄생은 식민지에서 독립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 식민지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멋대로 그어진 경계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1민족 1국가와는 너무나 다른 형태로 국가를 형성했습니다. 식민지 시기 이전에 북아프리카와 사하라 이남의 일부 사헬 지역을 제외하면 아프리카에는 국가가 없는 채로 역사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최근에는 그렇지 않다는 주장도 있지만 어쨌든 기존의 통념에 따라본다면 아프리카의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중앙집권적 행정력이 마련되지 못하였고 이는 국가 권력의 부재로 이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회에의 질서가 없었냐면 아닙니다. 아프리카에는 lineage라는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부족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공통의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믿는 혈연 집단인데 국가 권력자만큼의 강제적인 힘은 없지만 그들 혈족 집단안에서 존경과 연륜을 통해 일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혈족 집단이야 말로 아프리카의 핵심이었습니다.

2. Muslim States

우리가 아프리카의 종교 하면 대체로 이슬람을 떠올립니다. 실제로 아프리카 북부 지역은 강력한 이슬람 영향권 아래 있습니다. 하지만 사하라 사막을 넘어가면 이슬람의 영향력은 급감합니다. 아프리카의 이슬람은 이 지중해와 맞닿아있는 북부 지역에 집중되었는데 특히 마그레브(Maghrib)라 불리우는 지역에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이들 지역에 주인은 베르베르 족으로 강인한 사막의 유목민족입니다. 이슬람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베두인과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만 둘은 본질적으로 다른 민족과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지역에 거주하는 베르베르인의 모습

이들은 이슬람을 처음 받아들였던 베두인처럼 열성적으로 이슬람을 믿었고 그 모습은 지나칠 정도로 순수하고 종교적 열정으로 가득찼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베두인을 비롯한 아랍인들은 초기 이슬람 정신에서 멀어졌으며 자신들이 이 이슬람 세계의 정신을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 중 한명이 압드 알라 이븐 야신(Abd Allah Ibn Yasin)이었습니다. 이븐 야신은 이슬람의 가르침을 퍼트렸고 이들을 따르는 사람을 알 무라비트(al-Murabitun, people of the ribat, rirbat이라는 요새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라 불렀고 나중에는 알 모라비드(Almoravid)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야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고 결국 이들은마그레브에 중요한 정치세력이 되어 나라를 건설(1040~1147)하게 됩니다. 모로코의 중요한 도시이자 세계 문화 유산이기도 한 마라케시가 이때 알 모라비드의 수도가 됩니다.

알 모라비드의 세력권, 분홍색

마그레브를 평정한 이들은 바다 건너까지 그들의 세력을 확장합니다. 바로 스페인입니다. 당시 스페인 남부 지역은 강력한 후옴미아드조가 쇠퇴하고 작은 이슬람 국가들이 난립하던 타이파(Taifa, 1009~1110) 시대였습니다. 당시 북부의 기독교 왕국들의 침입을 막아내기 힘들었던 타이파는 바다 건너 한창 세력을 떨치고 있던 알 모라비드 왕조에 구원을 요청합니다. 알 모라비드 왕조는 이들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이 쇠락한 원인을 정신력(...)에서 찾았습니다. 쉽게 얘기해 너희들 이슬람 정신은 쇠퇴하여 너무 세속적이고 우리처럼 초기 순수했던 이슬람 정신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얘기였습니다. 실제 스페인 남부 지역의 타이파 왕국들은 이슬람 교조주의하고 거리가 멀었고 북부의 기독교 왕국들하고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알 모라비드 왕조 입장에서는 타락한 것으로 보였겠죠. 아무튼 알 모라비드 왕조는 순식간에 북부 기독교 왕국들을 제압하고 남부 타이파 이슬람 왕국들을 통합합니다. 그후 교조주의적 가르침을 내세우며 스페인 남부와 마그레브 지역을 지배했죠. 그들은 사하라 사막 이남까지 그 세력을 뻐쳐 가나 제국의 멸망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운다고 알 모라비드 왕조가 서서히 세력이 약해집니다.

12세기 중엽 알모라비드 왕조를 비판하며 등장한 이븐 투마르(Ibn Tumart)는 알 모라비드 왕조가 이슬람의 순수성을 저버렸다고 비판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봤죠?) 이들은 쿠란에 나와 있는 문자 그대로를 수행해야 한다 하면서 신의 단일성을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아틀라스 산맥에서 세력을 키웠으며 유일신을 믿는 자들이라는 무와히둔(al-Muwahhidun)이라고 불렸으며 나중에는 알 모하데(Almohad)라 불렸습니다. 이들은 세력이 약해진 알 모라비드를 쫓아내고 알 모하데 왕조(1121~1269)를 건립합니다. 

알 모하데 왕조의 영역

이들 역시 스페인 남부와 마그레브 지역을 100여년 동안 지배하다 북쪽 스페인 남부 영역은 기독교 왕국들에게 밀려나고 마그레브 지역은 마린 왕조에게 밀려나게 됩니다. 하지만 마그레브 지역의 특징은 이 두 왕조에서 비롯된 것이 많아서 역사적으로 가지는 중요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Gold-Salt Trade

자 이제 사하라 사막 이남의 역사를 알아봅시다. 맨 처음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비교적 아프리카 북부 지역의 역사를 우리가 잘 아는 이유는 이 지역이 지중해를 중심으로 다른 지방하고 교류가 잦았을 뿐아니라 이 영향으로 문자를 썼고 기록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하라 사막이라는 거대한 자연 방벽으로 인해 사하라 이남 지역의 역사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지역이 역사에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 사하라 사막을 가로지르는 사하라 횡단 무역 덕분입니다. 

사하라 사막을 가로 지르면서 소금과 금을 교환하는 이 무역으로 인해 와가두(가나), 말리, 송가이 제국이 생겨났다.

 

마그레브 지역은 전통적으로 소금이 많이 생산되었습니다. 반면 사하라 이남 지역에서는 금이 많이 생산되었습니다. 현재도 이 지역 금 생산량은 세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 교류가 일어난다고 맨큐가 얘기했던가요? 아무튼 이렇게 무역이 시작 됩니다. 이 부유한 무역로를 바탕으로 강력한 제국이 세 개가 출현하는 와가두(가나), 말리, 송가이 제국입니다.

와가두(가나) 제국의 존재는 이 지역의 상업을 담당했던 베르베르 족들에 의해 알려지게 됩니다. 사막을 가로지는 횡단 무역을 했던 베르베르족은 이 무렵 다수가 이슬람 신자였고 덕분에 아랍어를 이용해 이들에 대해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통상 우리가 가나 제국이라고 알고 있는 이 국가는 가나는 이 제국의 통치자를 부르는 이름(즉, 왕을 가나라고 부르는 것)이며 실제 제국의 이름은 와가두라고 하는데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부터 이 사하라 지역 이남의 역사는 문자로는 기록되어 있으나 철저히 외부인의 시선(주로 이슬람)으로 기록된 것이나 문자로 기록되지 않아 구전으로 내려와서 정확도가 떨어지는 것, 고고학적 성과로 발견된 역사 유물은 있지만 기록이 없어서 상상력에 의지되어 서술된 부분뿐이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 와가두 제국은 기원전 1500년경 부터 이 지역에 국가라고 보기에는 애매하지만 공동체 조직이 생겨났으며 기원후 300년경에는 소국들이 생겨났다고 보고 있습니다. 소닌케(Soninke) 족에 의해 세워진 이 와가두 제국에는 대략 9세기를 전후하여 이슬람이 전해졌다고는 보는데 이 이슬람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이슬람권 학자들과 비 이슬람권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아무래도 아프리카에서 이슬람 영향력을 더 높이고자 하는 쪽은 그것을 별로 좋지 않게 보는 쪽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역사학적 관점으로 보면 썩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이 지역의 이슬람 영향력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사하라 이남 지역의 독특한 특수성을 본다면 대략 역사적 실체가 드러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근에 발굴된 쿰비 사레의 모습

아무튼 다시 와가두 제국 얘기로 돌아와보면 이슬람 학자 알 바크리(Al Bakri)가 남긴 기록을 볼 때 가나는 상당히 부유한 왕국이었던 것 같습니다. 머리에 황금 장식을 했을 뿐만 아니라 수도였던 쿰비 사레에는 무슬림들이 모여사는 구역이 따로 있고 집들이 빼곡히 들어서있는 대도시였습니다. 실제로 최근에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나왔습니다만 왕가 무덤이 발굴되지 않아 수도는 아니지 않을까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잘 나가던 와가두 제국은 1076년 북쪽의 알 모라비드의 침입으로 수도가 점령되 쇠퇴기를 맞이합니다. 제국은 이제 껍데기만 남게 되고 유력한 몇몇 왕국의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3세기에 새로운 제국 말리가 탄생하게 됩니다. 말리는 망데 족(Mande Peoples)이 세운 국가로 순디아타(Sundiata)가 첫번째 군주였습니다. 순디아타는 엄청난 군사적 성공을 거두며 흩어졌던 가나의 영역을 다시 통합하고 영토를 더욱 넓혀 말리 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군사적으로 훌륭했지만 공포로 대중을 지배하던 순디아타에게는 여러 명의 양자가 있었는데 이 양자들이 서로 순디아타의 뒤를 이으려고 싸움을 했고 결국 왕조가 몇 번 교체되는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그 중에 제일 황당한 건 바다 끝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말리의 황제가 대서양 원정을 떠났는데 결국 돌와오지 못한 일이 있겠네요. (...) 뭐 아메리카 대륙을 콜럼버스보다 무려 200년 앞서 발견했다고도 하는데 기록이 없으니 믿을 수는 없고 확실한 건 황제가 죽고 남겨진 말리 제국은 개판 5분전이 되었다는 것이겠네요. 이 말리 제국을 수습할 새로운 황제는 그 이름도 유명한 만사 무사입니다.

만사 무사의 메카 순례 여행길

와가두 제국 때부터 서서히 퍼지기 시작한 이슬람은 이제 완전히 자리 잡아 말리 제국 대에 이르면 제국의 지배자들도 이슬람을 신봉하게 됩니다. 만사 무사도 그 중 하나였죠. 이슬람의 5대 의무 중 하나인 메카 순례를 위해 만사 무사는 여행을 떠나는 데 이때 말리 제국의 부유함을 과시하기 위해 순례길에 금을 뿌리고 다녔고 이로 인해 그가 지나간 곳은 금값이 똥값이 되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BBC에서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던 인물로 꼽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이슬람 신자이자 방대한 분량의 여행기를 작성한 이븐 바투타가 말리에 대한 묘사를 남겼는데 황금에 대한 묘사는 빠지질 않습니다. 만사 무사에 대한 기록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사람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음은 분명해보입니다. 이븐 바투타 기록록에서 재미있는 것은 말리의 부유함을 찬양함과 동시에 이슬람 율법을 지키지 않는 말리에 대한 실망감이 엿보인다는 것인데요. 이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지역이 이슬람을 받아들이긴 했으나 아프리카 토착 신앙과의 조화를 엿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사하라 이남 지역으로 가면 이슬람 종교 비율이 줄어드는데 그만큼 사하라 사막이라는 장벽이 이슬람의 유입을 어느 정도 막으면서 전통적인 신앙을 어느 정도 지켜주었다는 점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하라 사막을 지나면서 이슬람교 비율이 떨어지는 것이 눈에 보인다. 아마 예전에는 저 비율이 더 적었을 것이다.

1400년 초반에 이르면 말리 제국이 서서히 쇠퇴하게 됩니다. 쇠퇴의 이유로 만사 무사의 지나친 사치를 꼽기도 합니다. 이것은 후대의 평가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리오들 사이에서 전해져 오는 몇몇 전승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아무튼 직접적인 원인이 확실하진 않지만 말리가 쇠퇴하면서 송아이(Songhai) 부족이 새롭게 떠오르게 됩니다. 송아이 족의 순니 알리(Sunni Ali)는 쇠퇴해 가는 말리 제국을 격파하여 속국으로 삼고 송아이 제국을 일으키게 됩니다. 새로게 일어서 송아이 제국은 가오(Gao)를 중심으로 발전합니다. 이때 재밌는 것이 와가두, 말리, 송아이 중심 도시들이 차츰 동편으로 이동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하라 횡단 무역의 주요 도시들, Koumbi Saleh(와가두), Timbuktu(말리), Gao(송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와가두 제국의 수도였던 쿰비 살레, 말리 제국의 수도는 아니였지만 교역의 중심지였던 팀북투, 송아이 제국의 수도였던 가오를 보면 점차 동쪽으로 무역의 중심지가 이동하는 모습입니다. 아마 추측하건데 사하라 사막 확장과 그에 따른 무역로 변경을 이유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하라 사막은 점차 확대되고 있는데 그것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순니 알리 이후 쿠데타를 일으켜 순니 알리의 아들을 쫓아냈던 아스키아 무함마드(Askia Muhammad)는 송아이 제국에 관료제와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습니다. 이는 앞선 와가두, 말리 제국을 앞서는 것으로 그 어느 때보다 이 지역은 안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사하라 이남 지역인 이 지역은 항상 마그레브 지역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마그레브 지역의 사드 왕조는 화약 무기로 무장했었는데 화약 무기가 보급이 안 되었던 송아이 왕조는 사드 왕조의 침입에 굴복하고 맙니다. 이후 이 지역은 소규모 왕국이 난립하다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가 되고 맙니다.

4. Other Peoples of West Africa

와가두, 말리, 송아이 제국은 사하라 횡단 무역을 장악하고 사하라 이남 지역의 강국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들이 자리 잡은 더 남쪽, 니제르 강 하류에는 서아프리카의 여러 부족들이 이들 제국의 영향을 받아 나라를 수립하게 됩니다. 주로 살펴볼 이들은 하우사(Hausa), 요루바(Yoruba), 에도(Edo) 부족입니다. 

현재 하우사, 요루바, 에도 민족의 분포. 대체로 나이지리아에 산다

먼저 살펴볼 부족은 바로 하우사입니다. Ch8에서 배웠던 Nok이 바로 하우사 부족이 살던 곳입니다. 현재 하우사 부족들은 대체로 이슬람을 믿습니다. 말리 제국의 영향일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하우사 부족의 국가들은 1000~1200년에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송아이 제국의 짧은 지배를 받았으나 독립했고 여러 소왕국들이 병립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가야 연맹과 비슷한 느낌이랄까요? 

빨간색 동그라미가 하우사 부족 국가들입니다. 그 아래 오요(요루바 부족의 국가) 왕국과 베냉 왕국(에도 부족의 국가)도 보입니다.

이들 왕국을 모두 통합하는 강력한 왕국은 출현하지 못했습니다. 대체로 이들 왕국은 사하라 횡단 무역의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면서 성장해나갔습니다. Kano, Katsina 왕국은 직물과 염색 천, 가죽 등을 공급했으며 Zazzau 왕국은 노예를 공급했습니다. 하우사 왕국들은 통치자들이 성벽을 쌓고 그 바깥 영역을 다스렸기 때문에 노예가 어느 정도 필요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서 본인들도 노예를 부리고 외부에도 공급한 것이죠. 

다음 살펴볼 부족은 바로 요루바입니다. 요루바 부족은 자신만의 특색있는 신앙으로 주목 받습니다. 이웃의 하우사 부족은 대부분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나 요루바는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갔습니다. 물론 지금은 기독교가 55%, 이슬람 35% 지만 전통신앙을 고수하는 자가 10% 정도는 됩니다. 요루바의 전통신앙은 아프리카의 토속 신앙 중에서도 가장 체계적입니다. 요루바족의 신령계는 최고신 오로란(Ororan)과 400이 넘는 신령 오리샤(Orisha)들로 되어 있고, 그 외에 무수히 많은 조상의 영혼을 숭배합니다. 이들의 신앙과 점술은 독특하여 세계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어 있습니다. 종교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연구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페에서 종교 의식을 하고 있는 주술사들

요루바 부족이 가장 신성시 여기는 곳은 바바로 이페(Ife)입니다. 요루바 부족이 세운 나라들은 하우사 부족이 세운 나라들 처럼 통합되지 못했습니다. 이페를 비롯하여 여러 군소 국가가 난립해있는데요.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이페가 가장 중요한 곳이어서 다른 요루바 나라들에게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요루바 신앙에 따르면 이페는 창조의 근원지에요. 우리나라로 따지면 환웅이 처음으로 하강한 신다수 정도될까요? 아무튼 이 이페를 중심으로 요루바의 여러 국가들이 성장해나갑니다. 그 중에서 오요가 17세기 무렵에는 강성해져서 제국을 이루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후에 역시 제국주의 열강들이 침략해오면서 요루바 부족의 나라도 점령되게 됩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부족은 바로 에도 부족입니다. 이 에도 부족이 세운 왕국은 베냉 왕국인데 여기 공부하면서 제 멘탈이 터질뻔 했습니다. 왜냐하면 베냉 왕국은 현재 베냉 공화국과 별 연관이 없거든요... 저는 베냉 공화국과 베냉 왕국 사이에 연관이 있는 줄 알고 겁나 공부했는데 지도를 봐도 위치가 다르고 인종적으로도 크게 연관이 없더군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이지리아에 베냉 시티가 있는데 그 주변에서 번성한 국가가 베냉 왕국이었습니다. 공부하시는 분들은 주의하시길 ㅠㅠ (와가두 제국도 마찬가지. 와가두도 가나라고 불리긴 하나 현재 가나하고 예전 와가두(가나) 제국하고는 위치가 겹치지 않습니다.)

베냉 왕국의 지도자는 오바(Oba)라 불렸으며 가장 유명한 사람은 교재에도 나와 있는 에와레(Ewuare, 1440경~80경 재위)입니다. 이 시기 베냉은 니제르 강 삼각주와 라고스 지역까지 영역을 뻗쳤습니다. 베냉 시티를 중심으로 한 도시 국가에서 확실한 영역 국가로 자리잡은 것이죠. 16세기에는 포르투갈인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는데 이 시기 가장 중요한 상품은 바로 노예였습니다. 노예 무역하면 일방적으로 서양인에 의해 수탈당한 이미지가 있는데 그 실상을 보면 아프리카 토착 국가들도 깊게 관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냉 왕국은 니제르 강 하구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에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접촉이 수월했고 베냉 왕국을 통해 아프리카 내륙으로 유럽의 상품과 노예가 교류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8세기~19세기에 이르면 왕국 내부에 왕위 계승 전쟁과 제국주의 열강의 대두로 예전과 같은 힘을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베냉은 1897년 영국의 원정으로 식민지로 전락하는데 이 원정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 중 하나가 인신공양 풍습이었습니다.

베냉 왕국의 인신 공양 모습

사실 베냉왕국의 인신공양은 이 시기에만 행해졌던 것이 아니라 13세기부터 아주 제한적으로 행해졌습니다. 인신공양하면 뭔가 끔찍할 것 같지만 사실은 인류 역사가 있었을 때부터 굉장히 빈번히 행해진 의식이었으며 세계 각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문화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하더라도 인신공양 풍습은 옹호받을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지리적 문화적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형적인 지배체제를 유지한 열강들이 인신공양 풍습을 없앴다고 해서 '신사의 나라'라고 으시대는 꼴을 봐주기가 힘든 부분입니다.

5. East Coast Trade Cities

자 이제는 서아프리카에서 눈을 동아프리카로 돌려보겠습니다. Ch8에서 반투 민족이 아프리카 대륙 각지로 퍼지는 모습을 배웠을 겁니다. 동아프리카는 지리적으로 아라비아 반도와 인접해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이슬람권과 접촉이 잦았습닏니다. 특히 아프리카의 뿔이라고 불리는 지역의 남쪽으로부터 펼쳐진 해안가는 이슬람 상인이 많이 드나들었던 지역으로 이 지역 사람들이 이슬람권과 접촉하여 반투어와 아랍어가 섞인 스와힐리어가 탄생되었는데요. 이 스와힐리어는 지금 아프리카 어족 중 가장 많은 화자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스와힐리어의 분포도

스와힐리어를 쓰는 지역 중 가장 유명한 곳은 바로 킬와입니다. 킬와는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에서도 아주 풍요로운 도시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킬와, 뭄바사, 모가디슈 같은 동아프리카 해안가 도시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연결해주는 아주 중요한 무역 거점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들 도시들은 앞서 얘기했다시피 아랍어를 쓰는 이슬람 상인들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여기에도 이슬람이 포교 됩니다. 하지만 이 지역의 대부분 사람들을 개종하는 데 실패했고 몇몇 지배층들에게 이슬람이 전파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슬람 상인들은 주로 노예를 상품으로 무역을 전개했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점은 이슬람 상인들의 노예 무역은 18세기~19세기 제국주의 열강들의 노예 무역의 규모와는 궤를 달리합니다. 따라서 노예 무역의 책임을 이슬람 상인에게 덮어 쓰우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5세기까지 번영하던 동아프리카 해안가 도시들은 포르투갈의 진출로 인해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될 점은 이들은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처럼 나라 전체를 지배할만한 거점을 확보하지 못했으며 기껏해야 동아프리카 해안가 몇몇 도시들을 확보했을 뿐입니다. 이런 동아프리카 해안가의 포르투갈의 지배는 17세기 말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6. Southern Africa and Great Zimbabwe

이제 눈을 돌려 아프리카 남부로 가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아프리카 하면 찌는듯한 더위, 열대우림, 사바나, 사막 같은 것만을 생각할텐데 남부 아프리카는 여러분이 생각는 아프리카 기후에서 많이 벗어난 곳입니다. 강수량이 적당하고 토양질이 좋아 농사를 짓기 아주 적당하고 사람살기 좋은 곳입니다. 이곳에서 무역을 기반으로 한 무역이 싹트게 됩니다. 남아프리카의 해안 도시 소팔라에서 내륙으로 들어간 곳에 그레이트 짐바브웨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는 안 쪽에는 주거 구역으로 보이는 건물 흔적이 있다.

12세기에서 15세기까지 쇼난 족이 만들었던 이 거대한 건축물은 남아프리카에 거대한 정치 집단이 존재했던 강력한 증거 입니다. 1871년 이 유적이 유럽인에 의해 발견될 때만 해도 '흑인들은 이런 건물을 만들 능력이 없다'는 인종 차별적 생각에 젖어있었던 유럽인들은 이집트나 페니키아, 그리스인들 업적으로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들이 여기로 오는 게 훨씬 어렵고 이 지역에 강력한 문명이 있음을 유추하는 게 훨씬 더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문자로 별로 기록된 것이 없기 때문에 어떤 목적으로 이 건물이 만들어졌고 왜 포기되었는 지는 알길이 없습니다. 다만 아프리카 대륙을 암흑으로 생각하는 관행을 버려야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유적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무타파 제국이 남았는데요. 쇼난 족의 구전에 따르면 그레이트 짐바브웨가 쇠퇴하자 무토타(Mutota)라는 사람이 북쪽으로 갔고 풍요로운 대지가 그곳에 있음을 알리고 정착했다고 합니다. 고고학적 증거로 그레이트 짐바브웨와 무타파 제국 사이의 연관성이 밝혀졌기 때문에 현재는 거의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세운 후계 국가로 믿는 추세긴 합니다. 아무튼 이런 무타파 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동아프리카 해안가를 지배했던 포르투갈이 제국을 넘보기 시작합니다. 하만 숫적으로 워낙 열세였던 포르투갈이었기 때문에 무타파 제국의 정치에 관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보통 서세동점의 시작을 16세기 대항해시대라고 보는데 실제 그 위력을 따지면 변변치 못함이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더 알아보고 싶으신 분은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라는 책을 추천해드리고 싶네요.

7. Special Question

- 위의 아프리카사 서술은 우리 교과서를 참고하였는데 여기서도 서구에 편향된 시각이 보입니다. 어떤 부분이 서구 편향적인 부분일까요?

- 아프리카는 다른 대륙에 있었던 국가들에 비해 중앙집권적 행정망이 잘 갖춰지지 않은 편이긴 했습니다. 자원, 인구 모두 풍부했던 이곳에서 중앙집권적 행정망이 늦어졌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에 대한 토론은 인트라넷에 소개했던 마이크로소프트 팀즈를 통해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Avil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