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원 3단원에 해당하는 프린트입니다. ^^ 시험기간 얼마 안남았는데 열심히 하세요 ^^

Posted by Avila
,

V 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3 근대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다
3-3 대한 제국, 황제권을 강화하여 국권을 공고히 하겠다 


아, 쪽팔려...

이 시간에는 고종과 대한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해봐야겠네요. 먼저 이전에 우리가 배웠던 역사적 사실을 잠깐 되짚어 봐야겠네요. 이 전에 일본이 친러파가 득세한 우리나라 정치 상황을 역전 시키기 위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에 대해 배웠죠? 자신의 아내가 죽자 고종은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잘못하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부랴부랴 러시아 공사관으로 야반도주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아관파천입니다.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고종의 모습>

아관파천 후 1년이나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릅니다. 그러나 일국의 왕이 남의 나라 대사관에서 지낸다는 게 얼마나 쪽팔린 일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고종에게 환궁을 요구합니다. 각지에서 환궁에 대한 요청이 계속 오자 고종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자기도 쪽팔리겠죠? 그래도 일국의 왕이라는 사람이 남의 나라 대사관 신세를 졌으니까요. 

 <사람으로서, 아니 왕으로서 쪽팔려 ㅠㅠ>

그래서 이 쪽팔림을 만회하고자  엄청나게 화려한 행사를 기획합니다. 바로 황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죠. 이런 결단이 가능했던 것은 청일전쟁에서 종주국으로 자처하던 청의 패배 때문이었습니다. 청의 간섭이 없어지자 조선은 황제국을 칭하게 되고 고종은 황제가 되었습니다.

 <고종이 즉위식을 거행했던 원구단 황궁우, 황제만이 쓸 수 있는 팔각 지붕을 사용했다>

겉으로 강해보이는 황제, 하지만...

고종이 황제국임을 선포하고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꿉니다. 겉으로는 광장히 강해보이는 황제였고 의식도 화려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만큼 황제는 강했을까요?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먼저 고종이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환궁한 사정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먼저 경운궁의 위치를 볼까요?
 

<경운궁(덕수궁)의 위치 , 주변에 각국의 대사관이 포진한 모습이 보인다. 여차하면 그쪽으로 튀겠다는 얘기다>

각 국 공사관이 궁궐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는 일본이 다시 한 번 을미사변 같은 행위를 할 경우 여차하면 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대한제국의 상황은 위태로웠습니다. 이 위태로워 보이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고종이 빼어든 카드는 바로 황제권 강화였습니다.

<내가 킹왕짱이다! 고종은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대한국 국제를 반포한다>

고종은 개혁을 추진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황제권의 강화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황제권을 정점으로한 개혁을 구상했고 황제를 가장 권력의 중심에 두는 대한국 국제를 반포했습니다. 대한국 국제는 지금의 헌법과 유사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1조에 대한제국이 자주 독립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제2조, 3조에서는 대한제국이 만세불면의 전제 정치이며 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명시하여 황제가 권력의 정점에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고종은 막강한 황제권 아래 구본신참(옛 것을 기본으로 하고 새것을 첨가한다)을 구호로 삼아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아무래도 개혁의 구호가 구본신참인 것을 볼 때 독립협회나 갑오개혁, 갑신정변에서 추구했던 개혁 보다는 상당히 보수적인 색깔이 강했습니다. 제도의 변화는 미미한 편이었고 서양의 기술과 기계를 받아들이는 동도서기론 입장에 좀 더 가까웠죠.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앞에서 동도서기론을 내세웠던 개혁들이 실패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결국 대한제국의 개혁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주변 열강들의 간섭 속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래도 건질 것이 있었다

대한제국의 개혁은 거의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건질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광무양전이라고 불리는 토지 조사 사업이었습니다. 

 <우오오오 득템!! 광무개혁 성과는 미미했지만 광무양전의 개혁 성과는 건질 것이 있었다>

광무양전은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말이 어렵다구요? 쉽게말해서 국가가 토지 소유권에 대해 확인해준 거죠. 이게 왜 중요하냐구요? 국가라는 강한 힘을 가진 기구가 토지에 대해 누구 것인지 확인해주면 바로 그 다음부터 국가가 토지 거래에 관해 관여할 수 있게 되는거죠. 즉, 국가가 토지에 관련한 사항 등을 장악했다는 의미가 되죠. 또한 이전에 명분상 토지를 가지고 있던 사람과 실제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일치시킴으로써 토지를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게 했습니다. 아 이런 삐이이이이~ 어렵다고요? ㅠㅠ

쉽게말해 개인과 개인 간의 거래에 국가라는 강력한 힘을 가진 기구가 끼어들었다는 거죠. 개인 간의 사적인 거래가 국가가 관여해서 공적인 거래로 바뀌는 거고 앞으로 토지에 관한 거래를 국가가 장악하겠다는 뜻이죠. 사적인 영역이 공적인 영역으로 바뀌는 순간이며 이게 근대화를 설명하는 핵심 사항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자 이래도 모르겠으면 나랑 광무양전이라는 인연이 없다--;; 생각하시고 광무양전은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해주었다 라고만 이해하셔도 될 것 같아요. ^^ 제가 설명을 제대로 못하는 불찰이죠 뭐 ^^;;

간도 색다르게 보자

교과서에서 간도와 독도를 다루고 있는데 사실 이 부분은 상당히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런걸까요? 이제부터 저랑 알아가봅시다 ^^

(주의!! 이 뒤에 얘기는 동의하기 힘들수도 있고 교과서에 서술된 내용이라는 차이가 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은 항상 여러 가지 시선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역사 교과서는 역사에 관한 이야기만 담고 있는게 아니라 정치적 이야기를 항상 내포하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이와 관한 문제는 나중에 제가 따로 다뤄보도록 할게요 ^^)

간도에 대한 문제의 처음 시작은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던 때로 거슬로 올라갑니다. 청나라는 만주 지역을 자신들이 일어난 신성한 지역이라고 하여 그 일대를 봉금지대로 설정해놓습니다. 이것은 여기에 살던 만주족(청을 세운 민족)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한족(기존에 중국에 살던 민족)의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족의 유입은 차단할 수 있었으나 조선 사람이 이곳에 때때로 넘어가는 일이 생겼습니다.

<크크 빈집이다-_-!! 사람이 많이 살지 않던 만주 지역에 조선인이 자주 넘어감으로써 문제가 생긴다>

조선인들은 이곳에서 인삼을 캐거나 하는 일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청나라 사람들과 다툼이 생기면서 청나라 조정에서 봉금 지역이었던 만주에 조선인들이 자주 넘어가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러자 국경 문제도 마무리 지을겸, 만주족이 신성시 여기던 백두산을 자신의 영토로 삼기 위해서 사절단을 조선에 파견합니다. 협상결과 동쪽은 압록강 서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국경을 삼는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 당시만해도 사람들은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인식했던듯 합니다.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도 보면 그 사실이 나와있고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확실히 국경선을 그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것처럼 토문강은 송화강 지류라고 인식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럼 이런 주장은 왜 나오게 되는걸까요?

문제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뒤 170년뒤에 일어납니다. 이때는 세도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였습니다. 여러분 알죠? 세도정치가 어떤 정치형태인지? 막 to the 장 -_-

<이딴 정권 아래서 살 수 없다 ㅠㅠ, 세도정치를 피해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로 넘어온다>

세도정치를 피해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로 넘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만주, 연해주 등지에 많은 조선인들이 살게되고 조선인들만의 부락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청나라는 남하해오던 러시아의 압박을 느껴 만주 지역에 봉금을 차츰해제하고 한족의 이주를 허용합니다. 근데 막상 봉금을 해제하니 어라?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죠. 청과 조선은 다시 국경분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때 새삼스럽게 다시 문제가 된 것이 바로 동위토문이라는 백두산 정계비의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170년전 백두산 정계비는 굉장히 애매하게 국경을 정한 것이었기고 실제 토문강이 어떤 위치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런 애매함 때문에 청나라는 토문강을 두만강이라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조선은 이제 만주 지역을 직접 관리를 의사를 내비치면서 토문강을 송화강의 한 지류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양국이 만주 지역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전에는 별 문제가 없던 것이 문제가 되고 말았죠.

<두만강과 토문강의 위치, 출처는 http://nestofpnix.egloos.com. 간도문제에 대해 명쾌한 정리가 있기도합니다>

이렇게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면서 합의점에 도달하지못하고 있을 때,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청나라가 일본에게 패배를 하게됩니다. 청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대한제국은 간도에 관리를 파견하고 이 지역을 함경도 행정구역으로 편입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간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게된 배경입니다.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나라가 간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저는 회의적이라고 봅니다. 역사적 증거도 빈약하거니와 만약 역사적으로 간도가 명백히 우리 것이라는 가정을 깔아도 지금 간도를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이미 간도 지역에는 조선족 보다는 한족이 많이 삽니다. 게다가 조선족 사람들은 과연 자기 스스로를 한국인이라 생각할까요? 우리는 늘 조선족이라하면 멸시하는 태도를 가지면서 이럴 때만 한민족이라 찾으면 조선족 입장에서는 얼마나 웃기게 생각할까요? 아무튼 간도 영유권에 관해서는 저는 조금 회의적입니다.

그렇다면 독도는?

음, 이제 독도가 남았군요. 이 인간 간도에서 대해서 말하는 꼬락서니 보니 독도에 대해서 이상하게 얘기하는거 아니야? -_- 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절.대.로.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독도는 대한민국 영토임이 분명합니다.

<독도는 우리영토입니다. 흠, 이런 생각까지 인증해야한다니 조금 슬프네요ㅠ>

독도에 대한 영토분쟁은 왜 발생하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공도정책 때문에 그렇습니다. 공도정책이란 조선 초기에 시행된 정책으로 섬에서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섬에 떨어져 살면서 왕명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길까는 우려때문에 생긴겁니다. 하지만 섬을 비운다고 사람이 안 살겠습니까? 바로 사람이 살기 시작하는데 일본인들이 이 주변에 고기 많은 것을 알고 접근해왔습니다. 이것 때문에 조선정부와 일본정부 간에 다툼이 발생했고 그 중심에 안용복이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들어와 고기잡는 모습을 보고 분계한 안용복은 일본인들을 쫓으려고 하다가 일본 어부들에 의해 사로잡혀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울릉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며 조선인 어부의 출입을 막아달라고 조선정부에 서찰을 보냅니다. 이 서찰을 보고 일본의 흉계를 알아챈 조선 정부는 처음에는 외교적 마찰을 피하려고 했으나 후에 일본인의 울릉도 출입에 대해 엄히 꾸짖고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조선정부는 섬에 사람이 살지 않도록 지시했지만 영토를 포기하지 않고 관리를 하려는 시도를 보여줬고 이를 통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조선 말기가 되면 공도정책을 포기하고 울릉도에 사람이 살게됨으로써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로 확고히 굳어지게 됩니다.

자 어딘가 비슷해보이지 않나요? 만주 지역이 빈땅이어서 인삼을 캐러갔던 조선인과 울릉도가 빈땅이서 고기를 잡으러 갔던 일본인의 모습이? 간도와 독도 문제는 어딘가 닮은 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유리한대로 간도와 독도를 제 각각 해석할 수 있지만 그것은 옳지 못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사태이던 간에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밀지 말고 한 가지 잣대를 적용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참, 그리고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http://orumi.egloos.com/4500362의 포스팅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역사에 관한 재밌는 사실이 많은 블로그로 꼭 한번 들려보세요 ^^

Posted by Avila
,

V. 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3. 근대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다
3-2 독립 협회, 민중과 더불어 국권·민권 운동에 나서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독립을 외치다

혹시 여러분 독립문에 대해서 아시나요? 서대문쯤 가면 있는데 본 적이... 없겠죠? -_-;; 그럼 이쯤에서 사진을 한 번 보여드리는게 맞을 듯 싶네요. 바로 요겁니다.

<서대문구에 있는 독립문의 모습>

얼라 보니 이거 왠지 어디서 본 기억이 있지 않나요?  바로 프랑스의 개선문의 모습을 본 떠서 만든 것입니다. 이 독립문의 모습이야 말로 우리에게 이 문을 만들 것을 계획한 단체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그 단체가 뭘까요? 바로 독립협회입니다.

자, 그러면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왜 만들었을까요? 독립문은 누구로부터의 독립을 말할까요? 일본? 틀렸습니다. 바로 청나라입니다. 지금까지 제 이야기를 잘 쫓아오셨다면 개항기 때 우리나라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나라가 청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자 우리나라에 대한 영향이 사실상 없어졌습니다. 이 기회를 노려 독립문이 세워진거죠. 독립문 자리는 예전에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이라는 문을 헐고 그곳에 세워졌습니다. 

<영은문의 모습, 영은은 맞을 영(迎)과 은혜 은(恩)을 써서 은혜를 맞이한다는 뜻이 있다.>

이렇게 독립문을 세워 청나라로 부터 독립 의지를 굳건히 한 독립협회는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말로써 독립을 지키는 것이 아닌 실력으로써 독립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을 추진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민중과 함께 하다

독립협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민중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민중을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그건 바로 지나 날의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독립협회를 세운 사람 중 한 사람이 서재필이라는 사람인데 서재필은 갑신정변에 참여했었습니다. 우리가 갑신정변에 대해 앞서 배웠듯이 갑신정변은 민중의 지지가 없어서 실패했습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실패를 거울 삼아 이제는 민중의 지지를 얻고자 했습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신문 창간이었습니다.

<독립신문 창간호, 독립신문은 한글로 발행된 최초의 신문이다>

독립신문은 한글로 발행된 최초의 신문입니다. 이것이 왜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수단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독립신문이 한글로 발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문이라는 것은 대중이 즐겨 보는 매체 중 하나입니다. 대중들은 누구나 쉽게 신문을 구해서 사회 전반에 관련된 분위기를 익힙니다.

<대중들은 신문을 읽으면서 사회가 돌아가는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신문이 중요한 이유는 이전까지 정치와는 무관했던 대중들이 신문을 읽으면서 정치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그에 대해 반응을 나타내고 혹은 참여 또한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신문이 대중들이 읽을 수 없는 언어로 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실제로 한성순보가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서 창간되기는 했지만 한자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대중들이 신문을 읽는 데는 무리가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우 이게 무슨 글자야 ㅠㅠ, 한자로 쓰여진 한성순보는 대중이 읽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한 것이 바로 독립신문입니다. 독립신문은 순우리말로 씌여졌기 때문에 대중들이 읽는 데 무리가 없었습니다. 또한 독립신문은 한글판 말고도 영문판으로도 발행되어 외국인들도 우리나라의 사정에 대해서 알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독립신문의 발행은 독립협회가 앞으로 개혁에 관한 활동을 하는 데 큰 밑그림을 그리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독립신문 말고도 독립협회의 민중을 위한 행보는 계속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만민 공동회입니다. 만민 공동회는 일종의 정치 집회로 볼 수 있습니다. 드디어 신민(臣民)이 국민(國民)으로 바뀌는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왜 그러냐고요?

<만민공동회의 모습, 최초의 정치집회라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자, 생각해봅시다. 조선 왕조 내내 백성은 다스림을 받는 존재, 은혜를 베풀어야 될 존재로 파악했습니다. 즉, 능동적으로 어떤 것을 요구하거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대규모 참여활동이라고 해봤자 농민봉기 정도가 있겠지요. 이마저도 조선 정부는 이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진압하려고 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백성들이 이제 신문을 통해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그에 맡게 자신들의 요구를 내비치는 대규모 집회를 가짐으로써 백성은 더 이상 다스림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직접 나라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존재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이후에 만민공동회는 대한제국에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정부까지 합세한 관민공동회로 발전하게 됩니다. 관민공동회에서는 백정 박성춘이 연설하게 됨으로써 신분제도의 모순까지 해결하려는 의지까지 보여줬습니다. 또한 헌의 6조를 고종에게 올려 개혁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관민공동회에서 백정이었던 박성춘이 연설하는 모습>

본격적인 개혁을 추진하다

이제 민중의 지지를 얻게 된 독립협회는 본격적인 개혁운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독립협회가 가장 중시한 것은 바로 의회설립운동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서양의 여러나라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나름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알려지는 일본 모두 의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회가 있다는 것은 왕 혼자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없고 대중의 의견을 모아 정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근대화의 모범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의회인 국회의 모습, 지금이야 국회가 막장처럼 보이지만 국회라는 기관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다>

독립협회는 의회를 설립하고 궁극적으로 왕에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켜 왕도 의회에서 만든 헌법에 따라 통치를 하게 만들려 했습니다. 이런 통치 형태를 입헌 군주제 라고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영국이 있습니다. 영국은 오랫동안 의회가 국왕의 권력을 견제하는데 성공했고 지금은 사실상 의회에서 나라를 다스리고 국왕은 그냥 상징적인 존재로만 남았지요.

아무튼 이런 형태를 만들기 위해 중추원이라는 곳을 의회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와 더불어 중추원이 실제 힘을 갖기 위해 헌의 6조를 고종에게 올렸습니다. 헌의 6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민이 한마음으로 힘을 합하여 전제 황권을 견고하게 할것
2.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3. 국가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표할 것
4.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것.
5. 칙임관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에 그 뜻을 물어서 중의에 따를것
6.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헌의 6조의 내용, 근대국가가 갖춰야할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다.>

헌의 6조를 보면 외국인에 의지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독립의지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조항에서는 중추원의 기능이 나오고 있는데 사실상 중추원을 의회로 구성하려 했던 의도가 엿 보입니다. 기타 조항들은 근대 국가가 갖추어야 하는 조건들인 재정을 일원화하고 공개하는 것, 인권 존중과 법적 절차 등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조항들은 그냥 뜬구름 잡기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행이 되었습니다. 특히 첫번째 조항과 관련해서 러시아의 이권침탈을 저지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군사 교관, 재정 고문이 철수되고 러시아가 세운 한러 은행을 폐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진정 이렇게 좋은 일만 했을까요?

독립협회, 치명적 한계

독립협회는 치명적 한계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진화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사회진화론이란 사회도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강한 국가가 약한 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이론이었습니다. 이게 맞는 말 같다구요? 그럼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것은 당연한 일이 되겠네요? 그렇죠?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인을 고문하는 일본인의 모습, 사회진화론에 따르면 이 같은 행위는 비난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사회진화론은 적극적으로 부정되야 합니다. 이것은 맞는 이론도 아니거니와 열강들이 자신들의 침략 행위를 미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죠. 그러나 독립협회 인사들은 그것을 꿰둟어 보지 못했고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한 가지 실수는 일본을 너무 우호적으로 봤다는 점입니다. 열강의 이권침탈을 저지한다고는 했지만 오히려 일본에 대해서는 관대했습니다. 독립협회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일본은 같은 동아시아 국가고 서구 열강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달랐을까요? 슬프게도 이후의 역사가 증명하듯 일본은 서양보다 더하면 더했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놈이 그놈이여... 독립협회는 일본에 대해 큰 착각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실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데 어쨌거나 독립협회도 민중을 그저 무지한 존재로 파악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민중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은 인식했으나 여전히 민중은 무지하며 계몽의 대상으로 파악하여 그들은 낮은 존재로 파악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엘리트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던 한계였습니다. 

독립협회의 해산과 의의

어쨌든 개혁을 추진하면서 한계를 가지고 있던 독립협회는 결국 해산을 당하고 마는데 그것은 고종 황제에 의해서 였습니다. 독립협회의 세력이 커지자 독립협회를 두려워 한 세력들이 독립협회가 황제를 없애고 공화정을 만드려고 한다고 모함했고 자신의 권한이 축속될 것을 두려워 한 고종은 황국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독립협회와 대립하게 한 다음 강제로 해산 시켜버렸습니다. 

한계가 있는 독립협회였지만 민중과 함께 개혁을 추구하고자 했다는 점과 근대화 국가를 뚜렷하게 지향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많은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이제 역사의 흐름은 이전보다 보수적 변화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부분은 다음 광무개혁과 대한제국의 성립에서 알아보도록 합시다. ^^ 
Posted by Avila
,

주제

조선 중기 선조 재위 시 출현한 붕당에서부터 조선 후기 붕당까지 그 전개과정을 계보로 그리고 간략히 설명글 쓰기(A4).

작성방법

손으로 써서 제출

제출요령

1) 3,5반 6월 20일까지. 4반은 6월 21일까지 한국사 수업시간에 제출
2) 제출기한 엄수, 기한을 넘길 시 모두 0점 처리. 

채점

기본점수 4점, 미제출시 0점. 만점은 10점. 

과제 작성 예시

1학년 0반 0번 김중근

계보도를 그리고 계보도에 관한 설명 서술. 예를 들면 동인과 서인이 어떻게 분파되었는가에 대해 서술. 

참고자료

한국사 교과서 p 80
lahistoria.tistory.com/30

'과거 안에서(고등학교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사 수행 평가 공지  (6) 2011.04.08
Posted by Avila
,

V 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3) 근대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다
3-1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추진된 갑오개혁 


근대가 시작되다


보통 조선이 근대가 시작된 것에 대해 여러 역사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립니다. 조선 후기 부터라는 설도 있고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하고 난 다음부터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제 생각으로는 갑오개혁 부터 근대라고 보는게 타당합니다. 왜 그럴까요? 근대라는 것은 대중과 대량으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중이 출현하기 위한 필수조건은 뭔가요? 네, 바로 신분제 철폐지요. 신분제가 철폐되어 나와 너의 다름 구분이 사라지고 모두 같은 '국민'일 필요가 있는 거죠. 바로 갑오개혁을 통해 달성되는 것입니다.

 <근대에 들어서면 신분제가 사라지고 대중이라는 새로운 집단이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왕과 국가를 구분하지 못하던 시대를 넘어 갑오개혁을 통해 왕실과 국가가 분리됨으로써 조선은 근대국가체제를 갖추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러면 이처럼 조선에 근대를 가져다 준 갑오개혁은 어떤 사건이고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갑오개혁이 시작되다

갑오개혁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갑오개혁이 어떤 과정을 통해 추진되었는지 부터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먼저 지난 시간에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배웠지요?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이 들어왔고 동시에 일본군도 진주했다는 것을 배웠을 겁니다. 결국 조선을 두고 양국 군대는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발빠르게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면서 조선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고자 했습니다. 경복궁을 점령한 이후 일본은 개혁을 한다는 명목 아래 조선에 일본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개혁을 추진하는데 그것이 바로 갑오개혁입니다.

<경복궁 수정전, 예전에 집현전이 있었던 이 자리는 갑오개혁 당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었다>

일본의 무력으로 인해 시작되었던 갑오개혁은 총 3차에 걸쳐서 진행됩니다. 1차 개혁은 군국기무처라는 기구를 설치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개혁을 해 나갔습니다. 1차 개혁을 할 당시에는 청일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때였으므로 일본의 간섭이 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비교적 일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개혁이 진행되어갔습니다. 1차 개혁의 성과로 가장 큰 것이 신분제를 없앤 것입니다. 이 신분제가 없어지면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근대로 진입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분제가 없어졌다고 해서 바로 양반과 평민이 평등해졌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원래 그렇잖아요? 학생인권조례 발표되도 갑자기 여러분 인권이 막 신장되고 그러나요? 아니죠? ^^; 그만큼 어떤 일이 이제 시작되었다고 해서 바로 그 효과가 나타나는 건 아니랍니다.

<갑오개혁의 신분제 폐지는 진정한 평등을 위한 험난한 여정에 첫걸음일 뿐이었다. 아직도 평등을 위한 많은 난관이 남아있다.>

신분제 폐지 외에도 여러가지 개혁 성과가 있습니다. 6조가 8아문으로 바뀌고 과거제가 폐지되고 경찰제도가 실시되었습니다. 뭔 얘기인지 모르겠다고요? 쉽게 말하면 근대식 제도가 들어왔다는 얘기죠.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제 한복을 벗고 서양식 제복을 갖춰입은 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다지 어울리진 않겠죠? 이 서양식 제복에 적응하려면 또 긴 세월이 걸릴겁니다.

<근대제도를 막 받아들인 조선의 모습이 매우 어색했을 것이다. 전현무의 뉴스 진행처럼 ㅋㅋ>

그리고 또 한 가지 1차 개혁의 중요한 성과는 바로 왕실과 국가의 분리입니다. 전근대 시절에 왕은 곧 국가였습니다. 이 말 아시죠? 짐은 곧 국가다. 바로 태양왕 루이 14세가 한 말인데 전근대 시절의 국가의 모습을 짐작하게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즉, 국가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는 국민이 아니라 왕이었던 거죠. 하지만 갑오개혁 때 왕실과 국가가 분리됩니다. 어느 대목에서 그걸 알 수 있느냐 하면 국가 재정이 왕실과 분리되어 하나의 기관이 돈을 관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왕실을 위해 국가재정을 쓰기도 했지만 이제는 국가 돈은 국가의 것이고 왕실 돈은 왕실의 것으로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입김이 거세지다

이렇듯 1차 개혁이 진행되던 와중에 9월 새롭게 다시 2차 갑오개혁이 시작됩니다. 1차 개혁에서 2차 개혁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되는 것은 바로 청일전쟁입니다. 1894년 9월 쯤되면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실히 보이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자신의 입맛대로 개혁을 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개혁에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갑신정변 이후 일본에 망명해 있었던 급진개화파 박영효를 불러 그를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홍범 14조라는 개혁의 지침이 발표되고 지방제도도 8도에서 23부로 바뀝니다.

<갑오개혁의 기본 방향을 얘기한 홍범 14조(위), 8도에서 23부의 행정단위도 개편된다(아래)>

이렇게 갑오개혁이 진행되던 와중에 끝내 청나라는 일본에 굴복하고 맙니다. 시모노세키에서 청과 일본은 강화 조약을 맺고 일본은 청으로 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요동 반도와 대만을 넘겨 받기로 합의했죠. 그러나 만주에 자신에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침을 흘리고 있던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으로 하여금 요동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게 반환하게 합니다. 이것이 삼국간섭입니다. 이것을 본 조선 측 인사들은 러시아가 킹왕짱 힘이 세다는 것을 깨닫고 일본을 버리고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려했습니다.

<어이쿠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가 형님이었구나, 굽신굽신>

이 상황을 보자 일본은 열불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기껏 조선이라는 나라를 집어삼키려고 청나라와 전쟁까지 불사했는데 갑자기 못 보던 러시아가 떡 하니 나타나 형님을 자처하다니 미칠 노릇이죠. 그래서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는 데 그것이 바로 을미사변입니다. 을미사변은 당시 공공연하게 일본을 무시하고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려고 했던 명성황후를 시해함으로써 조선의 주도권을 다시 일본으로 빼앗아 오려는 사건이었습니다.

<을미사변 상상도,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신을 태우고 있다>

을미사변 이후로 다시 주도권을 잡은 일본은 중단되었던 개혁을 다시 시행합니다. 이것이 3차 갑오개혁이며 을미개혁으로도 부르는 것입니다. 을미개혁은 가장 큰 내용이 바로 단발령입니다. 단발령은 상투를 자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유교국가였던 조선에서 천인공노할 짓이었죠. 부모님이 물려준 머리를 자른다는 것은 유교국가였던 조선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아무튼 단발령에 대한 엄청난 반발이 유생층에 나타났는데요. 이것이 곧 최초의 의병인 을미의병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단발령이 공포된 이후 강제로 길가에서 강제로 머리를 자르고 있는 모습>

그러나 일본은 너무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조선의 왕비를 시해한 것도 모자라 선비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상투까지 자르게 하니 일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었습니다. 게다가 을미사변을 계기로 고종은 신분은 큰 위협을 느꼈죠. 자칫하다가 자기도 저꼴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고종은 겁을 집어먹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데 이것이 바로 아관파천입니다. 이로 인해 일본이 했던 모든 개혁은 중단되고 말았고 조정의 대신들도 모두 친일파에서 친러파로 돌어서게 되었습니다.

강요된 근대

갑오개혁은 비록 1차 개혁 때는 자율적으로 추진된 측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간에 그 시작이 일제에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사항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해도 인상 구기고 그 일을 하면 잘 될 턱이 있나요? 그리고 강요해서 시행된 개혁은 불안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예로 갑오개혁 때 신분제가 폐지되는 긍정적인 면이 있었지만 국방력 강화나 상공업 진흥 정책, 당장 농민들에게 급했던 토지 제도에 관한 논의는 아무것도 없었던 거죠. 결국 강요된 개혁과 근대는 우리에게 많은 아픔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몸에 좋은 거라도 억지로 먹이면 병난다. 강요된 개혁과 근대도 마찬가지다>

갑오개혁으로 인해 우리의 근대는 이제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이 근대의 출발이 왜곡된 형태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바로 잡는 것이 한국사에 과제로 남게 되었습니다.
Posted by Avila
,

V 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2)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다
2-2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 


고부 농민 봉기, 위대한 첫 걸음

이제부터 동학농민운동(갑오농민전쟁)에 대해서 배워봅시다! 동학 농민 운동의 시발점이 된 것은 바로 고부입니다. 이곳이 왜 동학농민운동의 시초가 되었을까요? 먼저 고부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고부는 전라도에 있습니다.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구요? -_-; 전라도 하면 곡창지대입니다. 또 당연한 소리군요; 곡창지대면 쌀이 많이 난다는 얘기인데 쌀농사를 지으려면 가장 필요한게 뭘까요? 바로 물입니다! 고부 지역에는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잘 짓기 위해 둑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광산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병갑이라는 신임 군수(이름만 딱 봐도 나쁜 놈 같죠?)가 부임하더니 새로운 둑을 하나 더 짓는 겁니다. 이미 둑이 있는데 말이죠. 그리고는 너네 물값내라 하는 겁니다. 미치고 팔짝 뛰겠죠?

 

<고부 농민 봉기의 원인이 되었던 만석보>

조병갑의 횡포에 대해 고부의 농민들은 항의 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요. 정부가 이 사태를 해결해 줄 기미가 안 보이자 농민들은 스스로 무장을 하고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전봉준 등은 동지를 모은 다음 고부 관아를 점령했습니다. 농민들은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를 조병갑이 오기 이전 상태로 되돌리려 했습니다.


전주성을 점령한 1차 봉기

정부는 이 사태에 깜짝 놀라 고부 군수를 새로 임명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했습니다. 하지만 이 안핵사라는 놈이 농민들의 억울한 사정을 잘 들어줘야 하는데 농민들을 폭도로 몰아가며 또 정부에서 금지한 사교인 동학 교도가 봉기에 관여했다면서 가혹한 탄압을 가했습니다. 열이 받을 대로 받은 농민들은 중앙 정부가 더 이상 자기 편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자신들에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동학을 찾아갑니다.

당시 전라도에서 가장 큰 동학 교세가 있던 곳이 무장(전북 고창)으로 손화중이 이끌던 곳이였는데 이곳을 찾아간 전봉준은 손화중과 함께 대규모 농민군을 조직하여 봉기했습니다. 이들은 다시 고부를 점령하고 해산하지 않고 백산으로 모입니다.

<백산, 산이라고 하기에는 쪼금 민망하다. 전북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 축제가 열리는 곳이라 이 정도 높이만 되어도 주변이 훤히 보인다>

백산에서 동학 농민군은 농민군 4대 강령을 발표하고 제폭구민(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백성을 구한다), 보국안민(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구호를 앞세워 이 농민 봉기가 단순히 지역 단위 농민 봉기로만 끝날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전봉준의 연설이 끝나자 백산에 모여 있던 흰띠를 두른 농민군이 일제히 일어났는데 이 모습이 마치 하얀 산이 일어난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 지역의 명칭이 백산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

백산에 모인 농민군들은 자신들이 천명한 것을 직접 실천하기 위해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악정에 시달리고 있는 고을들을 차례로 해방시켰습니다. 고을에 들를 때마다 새롭게 가세하는 농민군은 그 수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이제 농민군은 전라도에서 가장 큰 도시 전주성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를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뒤집어 말하면 전주와 나주가 전라도의 대표 도시라는 뜻이다. 이 도시가 함락되었다는 것은 전라도 전부가 함락되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진은 전주성의 모습> 

농민군의 규모가 커지자 자신감을 얻은 농민군 지도자들은 감영(각 도의 관찰사가 기거하는 곳)이 있던 전주성을 공격했고 전주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이로써 전라도 전부가 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나 진배없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에 놀란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고자 청의 병사를 끌어들였는데 이것이 바로 엄청난 실수였습니다.

서로 군대를 파견할 때 알려주기로 한 톈진 조약에 의거하여 일본군이 조선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었습니다! 의도치 않았던 일본군 까지 들어오자 정부는 크게 당황했습니다. 당황한 것은 농민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외세의 개입을 원친 않았던 정부와 농민군은 그릇된 정치를 바로잡을 것을 약속하고 전주 화약을 맺었습니다. 이에 따라 농민군이 점령한 전라도 각 지역에는 개혁을 실천해나갈 집강소가 설치되었고 정부는 농민군의 요구를 받아들여 교정청을 설치하여 자체적인 개혁을 실천해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청과 일 양군에 철병을 요구했습니다. 이것으로 동학농민운동은 1차 봉기가 종결됩니다.

 <농민군의 집강소 통치, 물론 상상도해서 그린거다^^>


외세 맞선 2차 봉기, 농민군의 뜨거운 피가 금강에 흐르다

그러나 한 번 들어온 외국군대가 빈손으로 나갈리가 있나요? 청과 일 양국은 조선에 서로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서로 으르렁 대고 있었던 처지입니다. 게다가 임오군란, 갑신정변으로 인해 청의 영향력에 한발 밀린 일본은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철병 요구를 무시한 일본은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인질로 잡아 청군을 자극했고 이것은 청일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한반도에서 다른 나라의 전쟁이 일어나는 비극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사태를 농민군은 가만히 볼 수 만은 없었습니다. 농민군은 2차 봉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봉기한 농민군은 논산에서 1차 봉기 때 가담하지 않은 동학 교단과 합세하여 그 세를 더욱 늘렸습니다. 남접과 북접 세력이 연합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서울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동학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서울로 북상하던 도중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마주했습니다. 그런데 일본군에는 정부군도 섞여있었습니다. 정부군은 일본군과 손을 잡고 농민군을 토벌하기로 한 것이죠. 안타까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농민군은 일본군과 정부군에 맞서 열심히 싸웠지만 그들의 화력에 밀려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이 흘린 피는 분명 우리 한국사에 거대한 이정표가 되었으며 지금도 끊임없이 흘러 우리 역사에 나아가야할 방향을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해봅니다.

백성들이 들고 일어서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부족하다

동학농민운동의 의의는 바로 민중들이 스스로 들고 일어났다는 겁니다. 갑신정변과 같은 근대 운동이 민중의 지지가 없어서 실패했음을 감안한다면 동학농민운동은 민중들이 스스로 무기를 잡고 일어나 개혁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근대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민중이 스스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처럼 동학농민운동도 시민혁명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이 결국 실패하고 시민혁명이 되지 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미래 전망이 구체적으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동학농민운동은 분명 낡은 정치를 개혁하고 외세를 배척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운동입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정치를 개혁해나가고 자신들이 정권을 잡은 다음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흥선대원군을 다시 모셔오는 정도였습니다. 이는 당시 민중들이 많이 배운 계층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계획을 제시할 수 없었던 한계가 드러납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부르주아라는 엘리트 계층과 민중들이 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개화파들은 유길준을 제외하고 동학농민운동을 폭도로 규정했습니다. 만약 개화파와 동학농민운동이 손을 잡았다면 우리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동학농민운동은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끝났습니다. 하지만 동학농민군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계속 영학당, 활빈당 등으로 활동하면서 나중에 항일 의병 운동을 전개해나가는 데 큰 초석이 되었습니다.
 

Posted by Avila
,

V 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1) 동아시아 삼국의 역사적 갈림길
1-2 위기의 청, 반외세 개혁 운동을 펼치다 


중체서용, 한계에 부딪히다

여러분 청나라가 중체서용 정신에 입각해서 양무운동을 시행했다는 걸 알고 계시죠? 이 양무운동이 결국 실패를 하고 맙니다. 왜냐구요? 바로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게 너무도 극명하게 패했기 때문이죠. 조그만 일본에게 패하자 청나라는 이때까지 개혁에 부족한 점은 무엇이었는지 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했고 결국 그 답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서양의 무기와 기술 뿐 아니라 사상과 제도를 받아들일 필요성이었습니다. 캉유웨이, 량 치차오 등 젊은 관료들은 이런 필요성을 인식하여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개혁하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참고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자는 운동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변법자강운동입니다.

http://blog.naver.com/hjj204?Redirect=Log&logNo=120123958692&jumpingVid=DB34909A8CE9029A2EB25CAA732847BA922E(1분부터, 변법자강운동)

캉유웨이는 중국은 무너진 집, 난파된 배라 표현하고 중국인을 새장 속의 새, 가마솥에 갇힌 물고리라 표현하여 통렬한 자기 비판을 가했습니다. 그는 이런 비판과 더불어 이런 중국의 상황을 구하기 위해 과거제 폐지, 근대적 기업과 학교를 설립하는 등 서양 사상과 제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개혁이 시작되면 원래 기득권은 가만 있지 않죠. 보수적 기득권이 일어났으니 그들은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었습니다.

 


<청을 망친 장본인 중에 한 명인 서태후, 화려한 치장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원래 서태후는 당시 황제였던 광서제가 어리 다는 핑계로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서 인지 수렴첨정을 거두고 광서제에게 직접 정치를 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태후의 권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죠. 서태후는 개혁을 하려는 신진 관료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보더니 결국 칼을 빼들었습니다. 무술정변을 일으켜 개혁파 세력을 모조리 검거했습니다. 개혁파 일부는 죽고 일부는 망명을 떠난 것을 끝으로 청을 살리고자 했던 마지막 개혁의 불씨가 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서태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1076 네이버 캐스트로 가보세요 ^^)

의화단 운동과 열강의 침탈 가속화

변법자강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열강의 중국 침략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중국 민중들은 외국인을 거의 혐오하는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런 민중의 민심이 반영이 되어 의화단이라는 단체가 생겨났는데 이들은 서양 열강이 가지고 들어온 크리스트교를 배격하고 손오공이나 저팔계 따위를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의화단 운동의 세력 범위>

애초에 의화단은 청나라에 우호적인 입장은 아니었으나 서태후가 이들을 잘 구슬려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습니다. 서태후는 이들을 이용하여 열강의 침략에 맞서려고 했습니다. 의화단은 청에 지원을 엎고 부청멸양(청나라를 부흥시키고 서양세력을 멸망시키자)이라는 구호를 앞세워 베이징을 점령했습니다. 이들이 서양 선교사를 비롯하여 크리스트교 신자를 잡아넣자 8개 열강들이이 연합하여 베이징으로 진격했습니다.

 <의화단 운동으로 인해 8개 열강들이 연합해 청나라를 공격했다>

결국 열강을 막아낼 힘이 없었던 청나라는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의화단 운동은 진압되었고 청나라는 열강들과 굴욕적인 신축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열강의 군대가 베이징에 주둔했으며 청나라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배상금을 매겼습니다. 의화단 운동의 진압을 끝으로 청나라는 더 이상 회생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반쪽 자리 혁명

의화단 운동이 실패한 후에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 세력들은 개혁을 선언했으나 진정성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 한편으로 청 정부는 외국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민간 철도를 국유화하여 그 철도를 담보로 외국에 차관을 얻고자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청조의 멸망으 더 앞당겼습니다. 각지에서 철도 국유화 반대 운동이 일어났고 이때 청조를 타도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던 쑨원의 동료들과 그 사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우창에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해혁명입니다.

 <쑨 원, 정치적 야망보다 중국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혁명은 들불처럼 번져 남부 중국을 대다수 장악하기에 이릅니다. 이때 쑨 원이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고 공화제 국가를 선언하니 이것이 바로 중국 최초의 공화정 국가 중화민국입니다. 그러나 아직 청조는 멸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북양군이 북쪽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과 대결하면 혁명이 성공할 수 없을 것을 직감한 쑨 원은 자신의 권력보다 중국을 걱정해 통크게 자신의 임시대총통직을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해주고 임시헌법을 준수활 것을 당부했습니다. 위안스카이 역시 이 제의를 받아들여 결국 청조가 멸망하기에 이르고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대로 끝났다면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을텐데 배신의 흑역사가 다시 시작됩니다-_-;

 <배신의 흑역사는 계속된다! ㅋㅋ 위안스카이는 쑨 원과의 약속을 가뿐히 개무시한다>

중화민국이 들어서자 임시헌법에 따라 선거를 하고 대의원을 선출했는데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공화당은 크게 패하고 고 쑹 자오런이 이끄는 국민당이 압승하자 위안스카이는 쑹 자오런을 암살-_-하고 임시헌법을 준수하겠다는 쑨 원과의 약속을 개무시합니다. 한술 더떠서 위안스카이는 황제가 되려고 까지 했는데 그의 부하들도 이건 오바라고 생각했는지 그에게 등을 돌립니다. 결국 위안 스카이는 쓸쓸히 죽음을 맞게 되는데 이렇게 되자 중국을 통치하는 권력 부재 상태가 오게 되고 중국은 군인들이 힘을 키워 지방 각지에서 난립하는 군벌의 시대로 진입하게 됩니다.

V 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2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다
2-1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는 농민들 


썩을 세상 못살겠다!

자, 그렇다면 동아시아 주변 나라들의 상태를 살펴보았으니 조선 내부의 상황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이후에 청나라가 계속 조선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죠? 거기다 일본까지 우리나라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청, 일 양국 상인들은 영국산 면제품을 마구 팔아 우리나라 소상공인들은 거의 몰락하게 됩니다. 게다가 일본에 막대한 양의 쌀이 수출되면서 농민들의 상황은 점점 안 좋아집니다. 나라가 어려우면 정치라도 열심히 해야지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일파들은 더욱 가혹한 수탈행위를 자행하며 지방관의 매관매직이 아주 성행했습니다. 참다 참다 못한 농민들이 전국에서 계속 봉기를 일으키는 안 좋은 상황은 계속 되었습니다.

 

<ㅠㅠ 대체 언제쯤 이 흑역사는 막을 내릴 것인가?>

시궁창에 한줄기 빛이 들다

하지만 이렇게 막장인 상황에도 꽃은 피듯이, 농민들의 희망이 되는 사상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동학입니다. 동학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을 내세워 농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었습니다. 더불어 외세를 배척하여 지배층과 외세 양쪽 모두 수탈이 대상이 되었던 농민들에게 동학은 한줄기 빛과도 같았습니다.

 

<시멘트 바닥을 뚫고 민들레가 꽃을 피우듯, 어려운 상황에서도 동학 사상이 농민들에게 빛이 되었다>

동학은 제2대 교주 최시형이 동학 모임 장소인 접소에 책임자인 접주를 두고 전국을 포와 접으로 나눈 포접제를 정비하자 교세가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특히 남쪽 지역에서 농민들의 큰 지지를 받았습니다. 교세가 제법 모인 동학도들은 자신감이 생겨 정부의 탄압으로 처형당한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달라는 교조신원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습니다. 최초에는 주로 교조 신원에 관한 것만 논의되었으나 보은 집회(1893. 3)에서 종교적 요구를 넘어 탐관오리 숙청, 외세 배척을 내세우면서 정치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소규모 농민 봉기가 거대한 동학 농민 운동으로 발전할 불씨를 남겼습니다.
 

Posted by Avila
,
V 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1) 동아시아 삼국의 역사적 갈림길
1-1 조선을 놓고 벌어진 두 차례의 전쟁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 일본

예전부터 아시아의 최고의 강자는 중국이었습니다. 아시아의 나라들은 거의 대부분 중국의 권위를 인정했고 중화가 주도하는 천하질서 속에 편입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부자가 망해도 3년이라고 서구 열강에게 청이 거의 반(半)식민지 상태에 떨어졌어도 아시아 각국의 나라는 청을 우습게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막 근대화를 시작하여 비상하려던 나라인 일본에게도 청은 여전히 껄끄러운 상대였습니다.

일본은 청을 늘 조심스럽게 대했으나 결국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조선이었습니다. 청은 조선을 자국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한 동쪽 울타리로 삼으려 했으며 사대-조공 관계를 실질적인 속국 관계로 변화시키려 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이익선 정책과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이익선 안에 두어 그 어떤 나라도 조선에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는 것을 막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청이 자꾸 조선을 넘보니 일본은 이익선을 위협받는 처지에 놓였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청과의 전쟁을 결심하게 됩니다.

<청일전쟁의 모습을 그린 일본 측 그림>

청과 전쟁을 하기 위해 일본은 청을 개화를 반대하는 '문명의 적'으로 묘사합니다. 청을 조선 개화에 반대자로 그리며 일본 국민들에게 청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던 중 조선에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합니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할 힘이 없었던 조선 정부는 청에 파병을 요청하는데 일본은 이를 기회로 여겼습니다. 일본은 톈진 조약과 조선 내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파병했습니다. 

청나라는 양무운동으로 국력이 크게 향상되었다고 생각했고 일본을 얕잡아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서양 열강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청은 일본을 얕본 대가를 치루고 마는데 너무나 손쉽게 일본과 전쟁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청일전쟁 패배 후 중국은 시모노세키 조약이라는 굴욕적인 조약을 맺게 됩니다. 청은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을 할양했으며 배상금 2억냥을 지불했는데 이는 청나라 3년 예산이었으며 일본 메이지 정부의 4년치 예산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중국이 주도하던 동아시아 질서가 완전히 와해된 것입니다. 이제 중국은 허접임이 만처하에 입증되었고 동아시아의 강자는 명실공히 일본이 되었습니다.

<중국이 허접임이 증명되자 열강들이 중국 분할에 더 박차를 가한다>

러시아가 새로운 일본의 라이벌로 등장하다

일본은 청을 꺾고 살짝 기고만장해졌습니다. 이런 일본에 새로운 라이벌이 등장했으니 바로 러시아였습니다. 러시아는 청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청처럼 열강이 되려 했던 나라가 아니라 진짜 서구 열강이었던 나라입니다. 당시 러시아는 남하정책을 추진했고 청의 만주 지역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만약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점거하게 되면 러시아의 만주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했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를 우려한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삼국간섭을 단행하여 랴오둥 반도를 다시 청에 반환시킵니다. 하지만 이게 정말 청나라 예뻐서 돌려준걸까요? 아니죠. 결국 러시아 자신이 그 땅을 차지하려는 의도가 너무나도 짙게 깔려있었습니다.

러시아는 랴오둥 반도를 청에게 다시 돌려준 대가로 랴오둥 반도에 있는 항구인 뤼순, 다롄을 조차받습니다. 조차라는 말은 빌린다는 건데 말이 빌리는 거지 거의 뺏은 거나 다름없지요.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은 조선을 두고 러시아와 대립을 하게 되는데 러시아는 청과는 매우 다른 나라였습니다. 왜냐구요? 러시아는 진짜, 정말, 레알 서구 열강이었거든요. 열강 흉내내려다가 털린 청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조선(korea)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러시아가 대결을 벌이고 있다>

러시아를 꺾고 제국주의 열강으로 인정받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러시아와 직접 맞서는 것은 곤란하다고 판단해서 조선 정부가 친러로 돌아서는 것을 막고자했습니다. 그래서 을미사변을 강행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고종은 완전히 일본에 등을 돌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피하는 데 이를 아관파천이라 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일본도 러시아와 직접 대결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일본 혼자서 러시아와 맞서 싸운다는 것은 부담이었겠지만 당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이 일본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영일동맹을 묘사한 그림, 일본의 여신인 아마테라스와 영국의 상징 브라타니아가 함께 그려져 있다>

다른 서양 열강이 지원을 해주자 일본은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하여 러시아에게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분할 점령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일본보다 조선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러시아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 아래 러시아군을 기습했는데 이것이 바로 러일전쟁입니다.

<러일전쟁, 일본 뒤에 영국과 미국이 지원해주고 있다>

http://blog.naver.com/aias9?Redirect=Log&logNo=10098269985&jumpingVid=C3D0542F0DDD6238FC19539917A6A68D3809(러일전쟁)

러일전쟁은 놀랍게도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이는 동아시아 나라가 서구 열강을 격파한 최초의 전쟁으로 일본은 엄청난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운이 어느 정도 작용했는데 러시아는 수도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쟁을 하느라 힘이 없었고 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강화조약이 성립했는데 이것이 바로 포츠머스 조약입니다.

<러일전쟁 승리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인정 받는다>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명실상부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이후 서양과 맺었던 불평등 조약을 모두 수정하였고 조선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다른 열강들에게 인정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 좋은 것마은 아니었는데 청일전쟁 끝에 얻을 수 있었던 막대한 배상금은 러일전쟁 때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러시아랑 다시 싸워서 이길 수 있을지 일본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양보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어찌되었든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제국주의 열강에 합류한 것은 물론 한국의 지배를 인정 받았습니다. 또한 영국과 미국이 각 각 제2차 영일도맹,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승인해주었으니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데 남은 장애물은 아무것도 남질 않게 되었습니다.

히비야 폭동은 왜 일어났을까?

러일전쟁이 종결되고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의 히비야 공원에서는 전쟁을 지속하고 강화하는 것을 반대했는데 어째서 일본이 승리한 전쟁에 강화 조약을 체결하는데도 국민들인 반대했을까요? 한 번 잘 생각해봅시다. ^^ 
Posted by Avila
,

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5) 열강의 경제 침탈이 가속화되다
5-1 일본과 청 상인의 경제 침투
5-2 청과 일본의 경제 침탈에 맞서다 


개항으로 외세의 경제 침탈이 심화되다


개항 이후 조선은 본격적으로 세계 자본주의 시장체제에 편입되었습니다. 하지만 개항 과정이 폭력적이고 조선에서 준비도 전혀 없었습니다. 또한 외국과 체결한 조약이 모두 불평등조약이어서 조선의 취약한 경제 상태가 그대로 열강 앞에 노출되어 있었지요. 

특히 일본과 청은 조선의 경제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나라였습니다. 일본은 강화도 조약의 유리한 조항 내용을 이용하여 조선 경제를 적극적으로 잠식해나갔습니다. 급격한 공업화를 하느라 농업이 몰락했던 일본은 쌀이 많이 부족했는데 주로 쌀과 잡곡, 콩을 많이 수입했습니다. 조선에 주로 수출했던 제품은 주로 영국산 면제품이었습니다. 일본은 영국산 면제품을 중국에서 싼 값에 사들여 조선에는 비싼 값에 팔아 그 대금으로 쌀과 잡곡, 콩을 수입하는 형태였습니다. 이것을 미, 면 교환체제라고 부릅니다. 

<인천항에서 수출되는 쌀, 일본은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조선쌀 수입에 열을 올렸다>

일본은 이런 무역을 하면서 일본 화폐를 사용하고 수출입 상품에 관세를 매기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치외법권 마저 적용되면서 약탈에 가까운 무역 활동을 벌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농촌 면공업은 거의 몰락했으며 쌀값은 폭등했습니다. 쌀값 폭등으로 인해 지주 계층은 더 큰 이익을 거두기도 했지만 대다수 농민은 몰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인 계층도 일본 상인의 진출로 말미암아 몰락했는데 그 중 일부는 일본 상인이 개항 초기에 개항장에서만 무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여 일본 상인 대신 내륙에 물건을 팔아줌으로써 부를 축적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청나라는 어땠을까요? 청은 조선이 개항하던 초기에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임오군란 이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면서 조선 내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청수륙무역장정에는 청나라 상인들은 정부에가만 받으면 개항장 밖에 장사를 할 수 있다는 조약이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 상인들은 개항장을 넘어 내륙까지 적극적으로 진출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시죠? 다른 나라들은 모두 최혜국 조항이 있었다는 것을요. 이후 다른 나라들도 최혜국 대우 조항에 의해 내륙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내륙과 개항장을 연결해주던 중개상인들은 몰락헀습니다.

<청과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액>

위 그래프를 보면 청나라가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은 이후 꾸준히 조선에서 영향력을 확대해나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나라 상인들의 세력이 확대해 나가자 일본은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결국 조선에서 청나라 상인의 세력 확장 때문에 나중에 전쟁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청일전쟁입니다.

한편 조선 정부는 계속 손해를 보는 무역 체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특히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무관세 규정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1883년 조일통상장정에서 관세권이 설정되고 쌀의 무제한 수출을 막는 방곡령 선포등이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주는 게 있으면 잃는 법도 있는 법. 일본의 요구로 최혜국 대우 조항이 들어가고 맙니다.

경제 침탈을 막기 위한 노력

그렇다면 조선은 외국 상인들의 경제적 침탈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을까요? 그건 아니었습니다. 외국 자본에 대항하기 위한 움직임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요. 외국 상인들의 막대한 자본과 경쟁하기 위해 조선의 상인들은 동업자들을 모아 자본의 규모를 불려 상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 중 대동상회는 꽤 큰 규모의 회사로 발전하여 해외 무역에도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정부에서는 일본의 경제 침탈에 맞서 세곡을 효율적으로 운반하기 위해 증기선을 구입하기도 하고 해운 회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일본 자본에 잠식되는 슬픈 현실을 맞이하긴 하지만요 ^^;

<광제호의 모습>

이외에도 일본 상인들이 무분별하게 곡물을 사가는 행위를 막기 위해 방곡령이 시행되기도 했습니다. 방곡령이란 곡식이 나가는 걸 금지한다는 뜻으로 일본이 제한 없이 쌀을 수입해가는 걸 방지하는 법령이었습니다. 처음에 방곡령이 일어난 곳은 함경도로 당시 함경도 관찰사인 조병식이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선포하는 것 까지는 매우매우 좋았는데 일본이 또 다시 트집을 잡기 시작합니다. 일본은 방곡령 통보를 늦게 받았다는 구실을 달아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해 배상금을 받아내는 행위를 저지릅니다-_- 나쁜 놈들이죠?

이외에도 청, 일본 상인들의 상권 확대에 맞서 시전 상인이 철시 운동을 벌이는 등 적극적으로 우리 상권을 수호하려 노력했습니다. 이후 시전 상인들은 황국 중앙 총상회를 조직해서 상권 수호 운동을 더욱 발전시켜나갔습니다.

Posted by Avila
,

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4) 근대 국가 건설을 지향하다
4-2 갑신정변, 최초로 근대 국가 수립을 지향하다 


개화당,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임오군란 이후 청의 입김이 거세지면서 급진개화파 보다는 온건개화파가 힘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온건개화파는 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청을 모델로 한 양무운동식 개화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급진개화파가 꿈꾸던 개혁을 실행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 불리한 상황을 역전하고자 급진개화파의 김옥균은 한 가지 승부수를 띄웁니다. 당시 조선은 개화 정책 추진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빠져있었습니다. 당시 온건개화파들은 이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청에서 파견한 서양인 고문이던 뮐렌도르프의 의견을 채택했습니다. 뮐렌도르프는 당오전이라는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여 재정난을 바로 잡으려고 했습니다.

<청나라에서 파견한 독일인 고문 묄렌도르프(위), 그가 발행한 당오전(아래>

그러나 당오전은 대표적인 악화입니다. 화폐의 액면 가치는 상평통보에 5배지만 실제 가치는 2배밖에 안 되어 혼란만 초래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옥균은 자신이 직접 재정난을 타계하고자 고종에게 일본에 차관을 들여오겠다고 했습니다. 고종의 허락을 얻은 김옥균은 차관을 반드시 들여오겠다고 장담했으나 결과는 시망-_-; 고종은 크게 실망했고 온건개화파 역시 당오전의 실패를 급진 개화파에게 덮어 씌우면서 급진개화파는 급격하게 고종의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급진개화파가 절망에 빠져있을 때, 청나라가 프랑스와 전쟁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청나라는 프랑스와 전쟁에 병력을 보충하고자 조선에 있는 청나라 군사 절반을 빼내갔습니다. 급진개화파는 더 이상 고종의 신임을 얻지 못하겠다고 판단하고 청나라 군사가 절반으로 줄어 있을 때를 노려 쿠데타를 감행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갑신정변입니다.


<갑신정변 전개과정>

<갑신정변 진행도>

급진개화파는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군사를 타국에서 빌릴 결심을 했습니다. 처음에 미국과 접촉했으나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나 청국의 세력 확대를 불편한 눈으로 지켜보던 일본 공사가 이들을 지원하기로 결심하고 거사 날짜가 잡혔습니다. 거사 날짜는 지금의 우체국에 해당되는 우정국이 개국하는 축하연으로 잡았습니다. 이날 급진개화파들은 온건개화파들을 주살하고 자신들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이들은 갑신 정강 14개조를 발표하여 그들의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주요 내용은 청과 사대 관계 청산, 내각 제 수립, 문벌 폐지, 재정 일원화, 상업의 자유로운 발전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정권은 3일로 끝났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갑신정변 소식들은 청군은 곧바로 군대를 다시 조선으로 파견했고 이 소식을 접한 일본은 청군과 대결을 피하여 철수 했습니다. 결국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급진 개화파 인물들은 대부분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갑신정변의 주모자였던 김옥균은 정변 실패후 일본에 망명한 뒤에 암살당했다>

근대 국가의 청사진은 제시했으나...

갑신정변의 의의와 한계는 분명합니다. 먼저 의의부터 살펴보죠. 이들은 청의 간섭을 배제하고 사대 관계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는 점이 높게 사줄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대와 조공 관계는 속국 관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평등한 관계라고 보기에도 힘들다>

먼저 사대와 조공은 굉장히 애매한 관계라는 점입니다. 사대와 조공을 한다고 해서 그 나라가 완전히 속국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죠. 어찌됐든 사대와 조공을 하는 나라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한 것이고 엄연한 독립국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대 받는 나라와 사대 하는 나라가 평등한 관계라고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애매한 국가관계는 근대국가끼리 맺는 조약에 늘 걸림돌이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청나라가 조선과 서구 열강 사이에서 조약을 맺을 때 다리를 놔준 것이죠.

또 중요한 점은 이들이 평등을 내세웠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들은 태생이 기득권층이므로 진정한 평등을 바라지 않았을 겁니다. 근대국가가 되는 필수적인 요소가 평등이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한 것이지 이들은 평민들의 삶을 공감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간에 평등을 주장했다는 것이 앞으로 조선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알려줬다는 점에서 높이살만한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들은 소수 엘리트 지식인이에 불과했고 평민들의 삶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평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것이 이들의 한계였습니다. 즉, 위에서 개혁을 하면 자연스럽게 아래에 있는 백성들을 그대로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엘리트들이 범하는 전형적인 오류입니다.

<천한 것들이 까라면 까야지 뭔 말이 많어?>

마지막으로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또 다른 외세에 의존하려고 했다는 점은 갑신정변의 큰 약점이기도 합니다.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의 입김은 더욱 거세지며 일본은 책임을 오히려 조선 측에 돌리면서 조선의 상황은 더욱 안 좋아집니다. 특히 갑신정변 이후 텐진 조약이 체결되는데 이 조약은 청과 일본이 군대를 파견하기 전에 서로에게 알려준다는 조항이 들어가는데 이것이 이후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 때 일본이 개입하는 빌미를 만들고 마니 정말 슬픈이지요.

중립화론이 고개를 들고 개화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다

갑신정변 이후 갈수록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고종은 이 내정 간섭을 막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입니다. 갑신정변에 별로 교훈을 얻지 못했나 봅니다-_- 이 사실을 알아 챈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거합니다. 이렇게 되자 청, 영국, 일본, 러시아 4개국이 조선을 두고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독일 부영사였던 부들러는 이런 열강들의 각축을 막고자 조선을 중립화하면 어떻게냐고 제의를 했습니다. 유길준 역시 비슷한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중립화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중립화론은 실패로 끝났지만 개화에 대한 노력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갑신정변은 비록 실패했으나 여전히 개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정부는 동도서기론 입장에서 외국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근대 학교인 육영 공원, 군사 학교인 연무 공원, 광산을 전담하는 광무국, 전신사무를 관장하던 전보국 등을 설치했습니다. 

<육영공원의 모습, 외국인 교사가 조선 사람을 가르치고 있다>

한편으로 갑신정변을 진압하기는 했지만 청의 간섭에 부담을 느낀 조선은 일본과 미국에 공사관을 설치했습니다. 원래 열강들은 조선에 공사가 아닌 영사를 파견했습니다. 영사는 공사보다 급이 한 단계 낮은데 이것은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한다는 얘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은 일본과 미국에 공사관을 설치했습니다. 즉, 조선이 청에 종주권에 안에 있는 나라가 아닌 동등한 나라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이었지요.

하지만 이 같은 개화 노력은 민씨 일파의 부패와 청의 간섭 때문에 성과를 거두기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농민들은 갈수록 힘들어지는 상황에 정부의 개화 정책은 공감을 얻기가 힘들었습니다. 


Posted by Avil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