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SETTING THE STAGE

제가 이걸 왜 한다 그랬는지 지금 격렬하게 후회중인데(...) 그래도 개학전 과제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이제 Ch 16입니다. 우리는 유럽인이 도래하기 전 아메리카 문명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뭐 안다해도 마야, 아즈텍, 잉카의 이름 정도만 아는 것에서 그치죠. 하지만 북아메리카에도 복잡한 사회가 존재했으며 마야, 아즈텍, 잉카도 우리가 알고 있는 단편적인 사실보다 훨씬 더 자세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이번 시간에 확인할 수 있을겁니다.

1. Complex Societies in the West

먼저 북아메리카의 서쪽 지역에 대해 알아보죠. 먼저 교과서에서 언급하는 곳은 태평양을 접하고 있는 북서부 해안가 지대입니다. 지도를 보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북아메리카 지역의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화 분포도, 북서 해안지대는 왼쪽 끝 짙은 초록색 부분

교과서에서는 포틀래치(potlatch)라는 문화를 설명하면서 이 북서부 해안가의 원주민 사회의 복잡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포틀래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나누어 주는 의식으로 이 지역 원주민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였습니다. 포틀래치를 여는 사람에게는 나눠주는 재산의 정도에 따라 그 지위를 높일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포틀래치에 대접받은 사람은 반드시 답례를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다툼이 전쟁으로 까지 이어집니다. 이런 독특한 의식은 경제학에서 먼저 주목하여 포틀래치경제라 하여 증여경제를 설명하는 사례로 꼽히고 있습니다. 일부는 이것이 잉여를 남기지 않고 부의 평등을 이루는 자본주의 오점을 고치는 것이라고 하고 있는데 뭐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건 좀... 아무튼 역사학적 관점에서 보면 포틀래치라는 의식이 나타나는 것은 결국 잉여생산물의 집적과 그로 인한 지위의 차이가 나타난다는 것이고 이것은 곧 계급 발생으로 이어지는 것이니 문명이 싹트기 위한 징조라고 보여집니다. 즉, 북아메리카 지역도 역사적 빈공간이 아니라는 점이죠. 

서쪽 해안가와 다르게 대분지(Great Basin) 지역(지도에는 빨간색 부분)에는 다른 문명을 만들어 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나사지(Anasazi)가 그들 입니다. 대분지 지역은 강수량은 적고 건조한 기후인데 이 기후에 맞추어서 그들이 사는 문명이 발달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푸에블로(pueblos)라는 유적이 있습니다. 스페인어로 도시나 마을이라는 뜻인데 대체로 흙을 이용해 만든 대규모 집단 부락 유적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왜 영어가 아니고 스페인어냐면 사실 이 지역은 과거 스페인 식민통치 지역이었기 때문에 스페인어의 영향이 강합니다. 원래 멕시코 영역이기도 했고요. 아무튼 절벽에도 대규모 취락을 만들기도 했는데 메사 베르데(Mesa Verde, 스페인어로 녹색 탁자)라는 것입니다. 

위가 메사 베르데, 아래가 푸에블로 보니토

이 유적을 보면 이 지역 기후에 맞는 촌락을 형성한 것이 눈에 띕니다. 돌과 벽돌로 만들어진 대규모 촌락은 1000명의 사람과 600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는 아주 복잡한 공동체를 위한 것이였습니다. 지하에는 키바(kivas)라고 부르는 종교 의식에 쓰이는 공간이 따로 있었습니다. 문자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문명의 실체가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 정도의 대규모 집단 촌락을 운영할 정도면 상당히 발전된 문명이 있었음이 틀림 없습니다. 시기는 대체적으로 AD 1000 ~ 1300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북아메리카에는 푸에블로 문명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시시피강 동쪽으로 지도에는 Eastern Woodlands라고 표시된 이 지역에는 마운드 빌더(딱히 우리 나라말로 번역하기가 마땅치가 않네요, Mound Builders) 문화가 꽃을 피웠습니다. 미시시피 문화라고도 아는데 아주 거대한 구릉을 만드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마운드 빌더죠. 대체로 무덤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크기가 어마어마 합니다. 대표적인 유적인 카호키아를 보여드리죠.

카호키아의 Monk 's Mound로 여러 마운드 중에 가장 규모가 크다.

카호키아이 존재하는 여러 마운드 중 Monk 's Mound라 불리는 가장 거대한 규모의 구조물입니다. 높이가 30 m, 길이가 290m, 폭이 255m로 쿠푸왕의 피라미드 이런 거랑은 비교하지 못하겠지만 일반적인 규모의 이집트 피라미드 보다 크고 아즈텍에 있는 뒤에 얘기할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태양의 피라미드보다 큰 크기입니다. 사실 인류가 피라미드형 구조물을 만드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비교적 구조가 간단하며 대형구조물로써 튼튼하게 만드려면 피라미드형 구조가 제일 쉬워 많이 쓰이는 것일 뿐입니다. 카호키아에는 Monk 's Mound외에도 이런 류의 마운드가 여러 개 몰려 있습니다. 비단 카호키아 뿐만이 아니라 미시시피 동부 일대에는 이런 구조의 문화 유적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 문명은 AD 800 ~ 1500까지 번성했으며 유럽인이 도래하기 전에 이미 쇠퇴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 정도 건축물을 만드려면 많은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이 출현했던 것으로 보이나 기록이 없으니 알 길이 없습니다. 단 중요한 것은 푸에블로나 마운드 빌더나 고립된 문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서로 교류하기도 했으며 북쪽의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그리고 앞으로 살펴볼 남쪽의 메소 아메리카 지역과도 교류하기도 했습니다. 즉, 문명이라 혼자 고립되서 발전하는 것은 어렵다는 얘기겠지요. 

1500년 경 북아메리카 북동부 지역. 이로쿼이, 알곤킨, 이누이트 부족의 세력 범위

북아메리카 문명 중 마지막에 다뤄볼 이들은 이로쿼이 어족입니다. 이들은 단독 부족은 아니고 이로쿼이어를 쓰는 부족 집단인데 대표적으로 모호크, 세네카, 카유가, 오논다가, 오네이다 등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체로키도 있는데 일단 이 예를 든 다섯 부족이 훗날 이로쿼이 연맹을 결성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메리카 원주민 하면 흔히 하는 착각 중 하나가 자연과 어울려 살며 원래는 평화롭게 살았는데 유럽애들이 건너와서 그 착한 사람들이 무기를 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건 대표적인 오해 중 하나로 이들도 다른 문명과 다르게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 이로쿼이 연맹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로쿼이 연맹은 유럽인들이 도래하기 전에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연맹이 현성되기 전에는 이로쿼이 어족 안에서도 맹렬한 투쟁이 있었고 이로쿼이 연맹이 형성된 이후에는 주로 알곤킨이라고 불리는 캐나다 북동부 해안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과 투쟁을 이어나갔습니다. 즉, 이들도 사람이란 얘기죠. 왜 우리는 식민지배를 당한 민족에게 사실은 평화를 사랑했는데 어쩔 수 없이... 라는 이미지를 씌우는 지 모르겠습니다. 이들도 다른 인류 문명과 다르지 않게 투쟁하기도 하고 교류하기도 했습니다. 특별한 취급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아무튼 간에 이 이로쿼이 연맹은 프렌치-인디언 전쟁하고도 관련이 있으니 그때 더 자세히 다루고 이만 줄이겠습니다.

2. Maya Create City-States

이제 우리는 시선을 좀 더 아래로 내려서 메소 아메리카라고 불리는 지역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역사를 배웠다면 상당히 생소한 용어일텐데요. 지리적 개념으로 따지면 멕시코를 포함한 중미 지역을 메소 아메리카라고 하는데 라틴 아메리카와는 구별되는 이들만의 독특한 특징과 역사가 있습니다. 대체로 라틴 아메리카하면 멕시코까지 포함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이 지역에 발달된 마야나 아즈텍을 보면 페루나 칠레에서 성장하는 잉카 문명을 보면 그 발전양상이 달라 분리해서 파악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메소아메리카라고 불리는 지역

이 지역에 발달된 문화에 대해선 지난 2학기에 올멕을 비롯한 문화를 배워서 알겁니다. 그런 문화들의 영향을 받아 바로 마야인데요. 사실 우리가 마야, 아즈텍, 잉카를 동시대에 나온 문명처럼 취급하는데 이렇게 취급하면 마야가 상당히 섭섭할 겁니다. 사실 마야는 올멕 문명과 거의 동시대에 시작한 문명입니다. BC 1200경에 발굴되는 마야 문명의 유적이 있는 만큼 아즈텍과 잉카에 비해서는 매우 오래된 문명입니다. 고전 마야라고 불리는 문명이 AD 250 ~ 900년 경에 유카탄 반도에서 발전하게 됩니다. 마야는 단일한 국가 체제는 아니였습니다. 몇 개의 도시 국가가 느슨한 연합체를 유지하였는데 각 도시국가를 다스리는 군주가 있었으며 아마도 사제의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티칼, 체첸 이트사, 팔렌케와 같은 도시들이 마야를 대표했는데 이 도시들은 피라미드로 대표 되는 종교 사원을 중심으로 고도로 발달된 도시 문명을 발달시켰습니다. 

티칼의 모습

사실 피라미드 하면 이집트를 많이 떠올리지만 실제로 피라미드의 수는 이 메소아메리카 지역이 훨씬 많습니다. 아무튼 이런 건축물을 볼 때 복잡한 사회 체계를 유지했음은 분명합니다. 마야의 경우 다행스러운 것이 문자가 해독되어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주고 있습니다. 다만 마야문자는 여러 문자 중에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데 어떤 것은 표의문자고 어떤 것은 표음문자라 매우 헷갈립니다. 표의문자처럼 쓰는 것도 한글처럼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방식이 여러가지라 해독하는 학자들이 고생을 좀 했었죠. 우리가 해독할 것은 아니니 넘어가고 이 문자를 통해 알게 된 것은 마야는 매우 조직적이고 정밀한 행정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마야는 앞서 말한 것처럼 단일 국가는 아니였으나 여러 도시 국가의 연합으로 각 도시 국가는 정밀한 호구 조사 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통해 확고한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빽빽한 열대우림 지역에서 이 정도로 정교한 국가를 갖추었다는 것이 우리로선 상상하기 힘듭니다. 마야의 정교한 행정망을 뒷받침 해준 것은 농업입니다. 대체로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주식은 옥수수인데요. 이 옥수수야말로 메소아메리카 문명을 만든 핵심이었습니다. 

왼쪽이 옥수수의 원형인 테오신테, 오른쪽이 현대 옥수수(출처:http://www.seehint.com/hint.asp?md=156&no=13017)

보시면 원래 야생에서 옥수수는 인간이 먹을만한 것이 아닙니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이후로 끊임없이 식물 품종을 개량해온 것은 사실이나 이 정도로 식물 품종을 개량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무슨 이유에서 이런 코딱지 만한 식물을 오늘날 옥수수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이 옥수수가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인구를 지탱하게 됩니다. 옥수수는 단위면적당 생산량으로 따지면 쌀보다도 더 훌륭합니다. 게다가 매우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죠. 영화 인터스텔라도 보면 인류가 거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최후에 생산하는 식량이 바로 이 옥수수인 걸 보면 옥수수의 생존력을 인정할합니다. 다만 이렇게 수많은 장점이 있는 옥수수에게 치명적인 단점은 지력을 매우 극심하게 소모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그다지 마야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야가 발달한 지역은 열대우림 지역으로 원래는 농사를 짓기 적합한 땅이 아니지만 화전 농법을 통해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화전농법은 땅의 회복속도가 더뎌 오래 쓸 수 있는 방법은 아니지만 마야같은 열대우림 지역에서는 정말 빠른 속도로 다시 열대우림이 원상복구 되기 때문에 아주 적절했습니다. 

마야인들의 뼈와 살을 만든 것이 옥수수라면 마야인들의 정신을 만든 것은 바로 종교입니다. 마야는 굉장히 많은 종류의 신을 믿었습니다. 마야인들의 신화가 포폴 부(Popol Vuh)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다양한 신들이 나옵니다. 재밌는 것이 인간 탄생에 대한 이야기에는 처음에는 인간을 진흙 그 다음에는 나무로 만들었다가 최종적으로 옥수수로 만드는 것이 나옵니다. 이런 것을 볼때 역시 옥수수가 마야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남달랐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꽤 정교한 신화체계를 가지고 있는 마야 신화에 따르면 이 지구는 평평하고 각 귀퉁이는 동쪽은 빨간색, 서쪽은 검은색, 남쪽은 노란색, 북쪽은 흰색 그리고 중앙은 녹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면 동양의 전통적인 오방색하고도 어느 정도 닮은 모습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어 재밌습니다. (그런데 이거 보고 역시 한민족이 메소아메리카를 점령했다 환국 만세 하지는 마세요 -_-;)

정교한 마야 달력, 260일 짜리 촐킨(tzolkin)과 365일 짜리 하압(haab)이 합쳐져 돌아간다.

마야의 종교 생활과 땔래야 땔 수 없는 것이 바로 달력입니다. 마야는 두 가지 달력을 보유하고 있는데 하나는 제례력인 촐킨입니다. 이것은 주로 종교의례에 쓰이는 달력인데 20일이 한달로 구성되어 있고 총 13개달로 260일짜리 달력입니다. 또 하나인 하압은 태양력으로 일반적으로 쓰이던 것인데 이것 역시 20일이 한달로 18개 달로 구성되어 있고 18개 달에 속하지 않는 5일이 합쳐서 365일을 이룹니다. 이 두 개의 달력은 정교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365.2420 일을 1년으로 봅니다. 실제 365.2422일이 지구의 공전주기이고 현재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력이 365.2425일이니까 그레고리력보다 더 정교한 달력입니다. (하지만 그레고리력이 그래서 좋지 않냐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레고리력은 정확도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윤년 발생 횟수가 작으면서도 정교합니다. 실제로 음력하고 비교해보면 윤년 발생 횟수가 그레고리력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많아 날짜가 맨날 헷갈리죠.) 이 두 개의 달력인 촐킨과 하압은 52년 주기로 겹치게 됩니다. 마야인들에게서 52가 그래서 매우 중요한 숫자였습니다. 이것때문에 2012년에 지구가 멸망한다고 한바탕 난리를 친적이 있는데...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마야는 바퀴를 알았지만 수레를 쓰지 못했고 심지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고대인들인데 지구가 멸망할 것을 어떻게 예측했을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마야인들은 2012년이 끝인 달력을 만든게 아니고 그 주기를 끝으로 새로운 주기가 시작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오해는 금불입니다.

마야인들의 종교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적 중 하나가 달력말고 공놀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축구하고도 비슷한 면이 있는데 손을 사용하지 않고 발과 팔꿈치, 허리, 어깨를 이용하여 구멍을 공을 넣는 게임입니다. 그런데 단순한 게임하고는 달라요. 이것은 종교의식이었습니다. 학자들은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재연한 게임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이 게임의 승리한 팀의 선수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죠. 이것도 이견이 있습니다만 아무튼 이 게임이 결국 인신공양하고 연결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위에 보이는 동그란 구멍에 공을 집어 넣는 게임이 마야 볼게임이다. 

인신공양 풍습이 이뿐만이 아닙니다. 마야는 그들이 믿는 신에게 사람의 피와 같은 것들을 바쳐 그들을 만족시켜 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야의 도시인 체첸 이트사 거대한 우물이 있는데 이것을 세노테라고 불렀습니다. 이 세노테에 어린 여자나 동물을 바쳐 비를 기원했습니다. 마야의 농법은 언뜻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나 비가 안 오면 매우 취약한 농법입니다. 따라서 가뭄에 대한 기록이 마야 문명 곳곳에 남아 있으며 이에 대한 종교 의식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런 모습을 보고 단편적으로 마야 문명의 잔인성을 거론하기는 곤란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인신공양은 거의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풍습으로 멀리 갈것도 없이 우리나라도 삼국시대에 순장이 행해졌습니다. 메소아메리카 지역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인신공양에 대해 너무 초점을 맞춰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인신공양 풍습에 의미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나치게 이 지역만의 독특한 특징으로 비추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세노테의 모습

이렇게 마야 문명을 살펴봤는데 번성했던 고전 마야 문명은 갑작스럽게 900년경에 자취를 감춥니다. 이후 10세기말 무렵 톨텍 부족과 힘을 합쳐 신 마야 문명이 일어서긴 하는데 고전 마야 문명에 비해서는 그 성취 수준이 오히려 떨어집니다. 신 마야 문명은 15세기 말엽 이미 쇠퇴하였으며 유럽인들이 당도했을때는 이미 그 생명이 다해가는 시점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마야 문명이 멸망했는지를 두고 이때까지는 옥수수를 이용한 화전 농업의 지력 상실로 설명해왔으나 최근에는 화전 농업보다는 가뭄과 소빙하기 이론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뭐가 됐든 간에 확실한 증거가 없어 뭐가 맞다고 속단하기에는 이릅니다.

3. The Valley of Mexico

이제 눈을 돌려 유카탄 반도 위에 멕시코로 가보죠. 열대우림 지역이였던 유카탄 반도와는 다르게 멕시코는 고원지대였습니다. 여기서 테오티우아칸, 톨텍과 같은 문명들이 싹을 틔웠죠. 테오티우아칸의 경우 BC 200년경 부터 650년까지 번성한 문명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상을 초월하는 문명입니다. 도시가 가장 번영했던 6세기에는 인구가 2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당시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인구밀도입니다. 또한 매우 많은 피라미드가 조성되어 있는데 대표적으로 태양의 피라미드와 달 피라미드가 있습니다. 태양의 피라미드는 무려 높이가 74m입니다. 그 밖에도 수로, 신전, 대광장등 엄청난 건축물이 모여 있는 곳이고 심지어 대부분의 건축물은 기원전에 조성되었다고 하니 이 문명의 위대함을 짐작해볼 수 있겠습니다. 

테오티우아칸의 모습, 가장 큰 건축물이 태양의 피라미드이다.

이 도시는 750년경 갑자기 버려졌는데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멸망에도 불구하고 테오티우아칸은 메소아메리카 지역에 굉장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것은 바로 종교였습니다. 테오티우아칸 이후에 들어서는 톨텍, 아즈텍 문명들은 모두 테오티우아칸 신화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만약 테오티우아칸이 완전히 발굴되어 톨텍과 아즈텍 문명 사이의 연결고리가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면 아즈텍의 비밀도 많이 밝혀질 것이라 생각됩니다.

테오티우아칸 뒤를 이어 멕시코 고원의 패권을 차지했던 것은 톨텍입니다. 톨텍은 매우 강인한 전사들로 900년경 멕시코 고원의 지배자가 됩니다. 이들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테오티우아칸의 종교 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여 더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다 토필친 케찰코아틀이란 사람이 왕이 되면서 톨텍 사회 안에 변화의 움직임이 포착됩니다. 토필친은 인신 공양이 횡행하던 이 지역 문명을 개선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받드는 신인 케찰코아틀(자신이 섬기는 신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도 써서 이름이 같은 겁니다)을 주신으로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테스칼틀리포카를 모시는 다른 그룹이 이에 반발하여 토필친을 쫓아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토필친은 동쪽으로 가 후기 마야 문명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는 떠나면서 자신은 다시 돌아온다는 얘기를 남기기도 했는데 이 이야기가 아즈텍 제국과 연관이 있으니 기억해둡시다. 아무튼 1200년경에 토필친이 추방되고 그에 맞물려 톨텍 문명도 쇠락을 맞이하게 됩니다. 톨텍 문명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것은 바로 아즈텍이었습니다.

4. The Aztec Empire

톨텍이 몰락한 멕시코 고원은 대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강력한 힘을 가진 제국이 무너진 뒤 혼란상이 되는 것은 로마 때도 그랬고 중국에서 왕조가 교체될 때도 그랬으니 특이한 일은 아닙니다. 아무튼 이 때에 멕시카라고 불리는 유목민족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바로 아즈텍을 세우게 됩니다. 상당히 호전적인 민족이었던 이들을 눈여겨 본 쿨우아칸은 이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게 됩니다. 이후 쿨우아칸 세력권에서 벗어난 멕시카인들은 자신들만의 도시를 찾아나서게 됩니다. 전설에 따르면 아즈텍인들이 모시는 여러 신 중 태양신인 우이트실로포츠틀리가 독수리가 선인장에 앉아 열매(후에 이 열매는 뱀으로 자주 묘사됩니다. 선인장 열매는 인신공양 희생자의 심장을 의미합니다)를 먹고 있는 곳을 멕시카인들의 터전으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1325년 텍스코코 호수 한 가운데서 독수리가 선인장에 앉아 열매를 먹고 있는 모습을 본 멕시카인들은 신의 계시가 이루어진 곳이라 여겨 그곳에 테노치틀란이라고 부르는 그들의 도시를 건설하게 됩니다.

아즈텍 제국의 핵심인 삼각동맹, 네모 안에 텍스코코 호수를 중심으로 테노치틀란, 텍스코코, 틀라코판 세 도시가 보인다. 주황색이 아즈텍 제국의 영역이다.

테노치틀란이 성립될 당시에는 멕시카 부족은 전혀 멕시코 고원을 지배하는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멕시코 고원의 유력한 부족은 테파넥족이었으며 이들이 세운 아스카포트살코라는 도시 국가에 대체로 종속된 상태였습니다. 멕시카 부족이 세운 테노치틀란은 아스카포트살코의 동맹국의 일원으로서 그 밑에서 영향력을 쌓아가다 1428년 아스카포트살코의 통치자였던 막스틀라가 혼란한 통치를 이어가자 이웃 도시였던 텍스코코, 틀라코판(타쿠바)를 끌여들여 아스카포트살코를 멸망시키고 독립국이 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이 세 도시 국가는 이른바 삼각동맹이라는 것을 구축하게 되고 이것이 후에 아즈텍 제국이 됩니다.

삼각동맹을 중심으로 한 아즈텍 제국은 본격적인 팽창에 나섭니다. 그들은 스페인이 도착하기 1519년까지 멕시코 고원의 대부분을 점령했습니다. 물론 아즈텍을 제국으로 부르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는데 이 삼각동맹은 여러 도시 국가들을 자신의 종속국으로 만들고 공납을 착취할 뿐 직접적인 통치를 가하지는 않았습니다. 종속된 국가의 풍습은 인정되었으며 그 국가의 지도자들도 자리를 유지했습니다. 이것은 아즈텍만의 특이한 점은 아니었고 이 일대에 들어선 메소아메리카 국가들이 대체로 이러한 형태를 띄었습니다. 발달되지 못했던 교통망과 행정망으로 인하여 이렇게 지배하는 것이 그들의 최선이었을 겁니다. 아즈텍의 경우에는 복속된 도시 국가들 수가 어마어마해서 빨아들이는 공물의 양이 어마어마 했습니다. 이러한 공물로 인해 테노치틀란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어마어마한 시장이 들어서게 됩니다. 당시 테노치틀란의 인구가 20만에서 40만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는 16세기 다른 유럽 국가들의 도시 인구가 5만에서 10만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의 도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테노치틀란은 호수 위에 떠있는 도시로 그 당시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정교하고 복잡한 도시였다.

많은 사람이 도시에 집중되다보니 먹을 것을 해결하는 것이 테노치틀란의 주요한 과제였습니다. 이것을 해결해 준 것이 호수를 이용한 관개 농업입니다. 치남파라고 불리는 농사 기법은 호수 위에 농작물 재배지를 띄워 재배하는 방식으로 높은 생산력을 자랑했습니다. 따라서 20~40만인 인구도 거뜬하게 부양할 수가 있었죠. 실제로 테노치틀란이 빨아들이는 공물은 대체로 사치품이나 공예품이었고 식료품이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치남파를 이용한 식량 공급이 상당히 안정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즈텍 제국의 또 다른 특징은 종교입니다. 아즈텍인들은 톨텍인들의 신앙을 받아들여 한층 더 발전시켰는데요. 그들이 믿는 주요한 신인 우이트실로포츠틀리는 태양의 신으로 아즈텍인들은 밤에 우이트실로포츠틀리가 끊임없이 투쟁하여 아침해 해가 떠오른다고 믿고 있었고 이 아침에 해를 떠오르게 하려면 많은 양의 산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인신공야이 행해졌는데 이 아즈텍인들의 인신공양의 규모는 다른 메소아메리카 문명에 비해 거의 역대급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즈텍 사본에 나타난 아즈텍의 인신공양을 나타낸 그림

아즈텍의 인신공양은 거의 일년 내내 행해졌으며 이 인신공양을 감당하기 위해 주변 부족들로부터 포로를 공급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전쟁을 통해 상대방의 목숨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사로잡아 일단 포로로 만들고 인신공양의 희생물로 쓰려는 꽃전쟁의 형태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아즈텍 제국의 마지막 황제 목테수마 2세 때에는 이런 행위가 절정에 다다랐습니다. 위에 서술했다시피 테노치틀란의 인구는 다시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고 이를 지탱하기 위해 더 많은 희생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변 부족들의 불만이 높아져만 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 바로 스페인의 콘키스타도르들입니다. 이 뒤에 이야기는 개학 이후에 이어나가겠습니다.

4. The Inca Build an Empire

이제 눈을 더 남쪽으로 돌려 봅시다. 남아메리카(라틴 아메리카랑 헷갈리지 마세요!) 지역에 자리 잡은 잉카 제국을 살펴보겠습니다. 안데스 산맥 고원 지대에는 차빈(BC 900 BC ~ 200 BC), 모체(AD 100~700), 나스카(BC 100 ~ AD 800) 등 발달한 문명이 있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우아리(AD 500 ~ 900), 티아우아나코(AD 550 ~ 1000) 등의 문화가 꽃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치무(AD 900 – 1470) 문화가 예전 모체 문화가 들어선 자리에 들어서 잉카 제국이 들어서기 까지 번영을 누렸습니다. 이런 앞서 문화를 바탕으로 잉카가 발전한 것입니다. 척봐도 매우 생소한 문화가 많이 있죠? 우리의 경우 Ch 9에서 잘 배웠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잉카 보다 앞선 문명의 위치가 그려진 지도

잉카는 안데스 산맥 고원에서 13세기에 도시 국가로서 출발하게 됩니다. 잉카 제국의 황제는 태양신 인티의 후손으로 여겨졌는데 왕족으로 불리는 11개 씨족 중 한 사람이 선택되었습니다. 황제의 혈통은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체로 남매 간에 결혼을 했습니다. 뒤에 살펴볼 망코 잉카도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했습니다. 이거 보고 또 미개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근친상간은 꽤 오래전부터 인류에 나타나있던 풍습이니 이 정도는 그러려니하고 넘어가야합니다. 아무튼 잉카의 최초의 군주는 망코 카팍인데 1대인 망코 카팍부터 8대 군주까지는 솔직히 전설에 가까운 인물이고 잉카 제국의 판도도 기껏해야 수도인 쿠스코를 중심으로 한 도시 국가였습니다. 잉카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기록을 남기고 제국으로 확장되는 것은 9대인 파차쿠티(Pachacuti, 1438~1471)부터 입니다. 생각보다 연대가 오래되지 않아서 놀라셨죠? 우리가 이 지역 문명에 대해 생소하다보니 종종 이런 착각을 하는데 아즈텍도 그렇고 잉카도 그렇고 오래 존속되지 않고 짧게 존속하다가 망한 나라들입니다. 그러면 잉카가 확보한 판도를 보겠습니다.

잉카 제국의 판도

잉카는 수레를 쓸 수 없었던 문명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넓은 영역을 다스렸습니다. 잉카 사람들은 자신들의 왕국을 4방위 제국이라고 불렀는데 동서남북으로 뻗어있는 세상에서 자신들이 사는 쿠스코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쿠스코를 중심으로 동쪽은 안티수유, 서쪽은 쿤티수유, 남쪽은 코야수유, 북쪽은 친차이수유라고 불렀죠. 잉카 제국의 영역은 철을 사용할 줄 모른다는 점을 감안할 때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다만 잉카의 지배 방식 역시 아즈텍 제국과 거의 유사했습니다. 수도인 쿠스코 주변만을 확실하게 통치하고 나머지 주변부는 대체로 공물을 받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수레나 철을 사용할 수 없었던 문명에서 취할 수 있었던 최선의 확장 방식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아즈텍과는 차이나는 점이 있었는데 잉카는 최소한 하나의 제국으로 만들기 위한 필요한 조처를 취했습니다.

잉카는 자신들의 언어인 케추아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정복한 지역의 지배 계층의 아들을 쿠스코로 불러 올려 잉카식으로 교육 시켰습니다. 또한 잉카 전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도로를 만들었는데 놀랍게도 오늘날도 사용될 정도라고 합니다. 길이는 총 5229km 달할 정도로 엄청난 길이었습니다. 말도 없고 수레도 없었기 때문에 이 도로는 사람만 다니는 길이였는데 일반적인 평민들은 갈 수 없고 귀족들이나 특별한 임무를 띄고 소식을 전하는 차스키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말을 대신하여 잉카의 길을 달려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현재도 남아 있는 잉카 제국의 길
차스키의 모습

이런 도로망은 제국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겁니다. 하지만 언어와 도로망만 갖추었다고 해서 모든 지역이 통일성을 갖는 것은 아니죠. 잉카는 독특한 부역 체계를 통해 지역의 통일성을 유지했습니다. 잉카는 기본적으로 아이유(Ayllu, IU아님 죄송)라는 혈족 단위를 중심으로 사회를 구성했습니다. 아이유는 10단위(10000, 5000, 1000, 500, 100, 50 및 10)에 따라 구성되었으며 각 아이유 마다 대표자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가족 대표는 푸릭 10가정은 충카를 구성하여 충카 카마욕이라 불렀고 100가정은 파차카를 구성하여 파차카 카마욕 1000가정은 우아랑가를 구성하여 우이랑가 카마욕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88개의 주에 파견된 행정관이 있었고 이 행정관은 위에 얘기했던 4방위를 관리하던 귀족이 있었습니다. 중앙집권적 행정 제도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상당히 짜임새 있는 행정망을 가진 것을 알 수가 있죠. 이런 감시 체제 하에 잉카에게 반란을 꿈꾼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고 반란이 일어난다면 조속히 진압이 가능했습니다.

이 아이유와 함께 같이 부여 되던 세금이 바로 미타(mita)입니다. 잉카는 아즈텍이나 마야와는 다르게 상업을 권장하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생산과 유통 과정을 모두 국가가 통제하는 시스템이었는데요. 이들이 피지배층에게 부여한 세금이 일종의 강제 노동인 미타입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농한기 때는 이 강제 노동인 미타를 이행해야 했습니다. 미타를 하면 대신 먹을 거리를 제공해주기도 했습니다. 잉카 같은 경우 일찍부터 감자를 썩지 않고 오래 보존하는 방법과 보존식 음식은 츄노를 개발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가능했습니다. 음식 저장한 게 뭐 대단하거라고 하실 수 있는데 대단한겁니다. 음식은 곧 군량으로 연결되며 군량을 비축해 나른다는 것은 대규모의 원정을 감행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마야는 엉성한 도시 문명의 연합으로 끝났지만 잉카가 제국을 이룬 것은 이 음식의 지분이 적진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런 잉카에게도 아쉬운 점이 있는데 마야와는 다르게 문자가 전하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잉카의 영역을 생각해본다면 문자 없이 어떻게 거대한 영역을 통치했을까 의문이 남는데 그것을 보완해주는 것이 키푸라는 것입니다.

키푸의 모습

키푸는 줄을 묶은 매듭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인데 매듭을 길게 묶거나 짧게 묶어 정보를 다르게 하고 줄의 색깔을 달리하여 다양하게 정보를 저장했습니다. 공물의 숫자를 저장하거나 군대를 동원하는 등의 행정적인 정보를 간단하게 기록했는데 아무래도 역사 기록을 남기는 것과는 좀 거리가 멀어서 잉카 제국의 역사적 실체를 접근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정복자의 시선인 스페인 입장에서 남긴 것이기 때문에 적절한 사료 비판과 고고학적 증거에 기대 잉카 제국의 모습을 추측해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종교 얘기로 가보겠습니다. 잉카와 황제는 태양신 인티의 후손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그러다보니 잉카에서는 태양신을 굉장히 중요하게 모셨습니다. 이 태양의 신을 받을어 모시는 사람을 선발했는데 결혼하지 않은 처녀 만을 선발했고 이들을 마마쿠나라 불렀습니다. 태양의 처녀로 알려진젊은 여성들의 종교 의식을 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교사, 직조공, 맥주 제조사로서 활동했습니다. 또한 남자들도 선발했는데 야마쿠나로 알려진 젊은이들은 또한 국가와 종교 활동에 봉사했습니다. 그렇다고 태양신만 받들어 모시지 않았습니다. 잉카나 아즈텍, 마야 문명은 기본적으로 다신교로 여러 신을 모셨고 잉카는 태양신 인티 뿐만 아니라 창조신인 비라코차를 섬겼습니다. 뿐만아니라 우아카라는 독특한 종교 관념이 있었습니다. 우아카는 태양의 신전 안에 자리를 잡지 못했을 뿐 이 세상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는데 그들이 살고 있는 장소 또는 그 신의 상징을 의미했다. 예를 들어 보통의 인간을 일반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초인적인 힘이나 그런 초인적인 힘을 가진 사람을 우아카라고 불렀습니다.

공중 도시, 마추픽추

이제 마지막으로 잉카 제국의 도시인 마추픽추를 볼건데요. 예전에는 마추픽추를 잉카 제국의 마지막 도시인 빌카밤바(Vilcabamba)와 헷갈렸고 제가 예전에 배울 때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마추픽추는 잉카 제국보다 더 먼저 성립된 건물이 있기도 하고 해서 잉카 최후의 도시라는 타이틀은 사라졌습니다. 애초에 왜 이 도시가 세워지고 버려졌는 지는 역사의 미스테리입니다. 다만 여전히 이렇게 높은 지대에 세워진 도시 임에도 불구하고 관개시설, 건축술, 보관기술 등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곳 입니다. 이로써 잉카제국에 대한 설명은 얼추 끝이 났군요. 개학 이후에는 어떻게 잉카가 멸망하는 지를 저와 같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Special Question

- 북아메리카 문명에서 마야, 아즈텍, 잉카와 같은 국가가 출현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 인신공양 풍습은 메소 아메리카와 잉카 제국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이 지역에서 인신 공양을 계속해서 고집한 이유는 무엇일까?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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