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1) 동아시아 삼국의 역사적 갈림길
1-1 조선을 놓고 벌어진 두 차례의 전쟁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 일본

예전부터 아시아의 최고의 강자는 중국이었습니다. 아시아의 나라들은 거의 대부분 중국의 권위를 인정했고 중화가 주도하는 천하질서 속에 편입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부자가 망해도 3년이라고 서구 열강에게 청이 거의 반(半)식민지 상태에 떨어졌어도 아시아 각국의 나라는 청을 우습게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막 근대화를 시작하여 비상하려던 나라인 일본에게도 청은 여전히 껄끄러운 상대였습니다.

일본은 청을 늘 조심스럽게 대했으나 결국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조선이었습니다. 청은 조선을 자국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한 동쪽 울타리로 삼으려 했으며 사대-조공 관계를 실질적인 속국 관계로 변화시키려 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이익선 정책과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이익선 안에 두어 그 어떤 나라도 조선에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는 것을 막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청이 자꾸 조선을 넘보니 일본은 이익선을 위협받는 처지에 놓였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청과의 전쟁을 결심하게 됩니다.

<청일전쟁의 모습을 그린 일본 측 그림>

청과 전쟁을 하기 위해 일본은 청을 개화를 반대하는 '문명의 적'으로 묘사합니다. 청을 조선 개화에 반대자로 그리며 일본 국민들에게 청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던 중 조선에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합니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할 힘이 없었던 조선 정부는 청에 파병을 요청하는데 일본은 이를 기회로 여겼습니다. 일본은 톈진 조약과 조선 내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파병했습니다. 

청나라는 양무운동으로 국력이 크게 향상되었다고 생각했고 일본을 얕잡아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서양 열강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청은 일본을 얕본 대가를 치루고 마는데 너무나 손쉽게 일본과 전쟁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청일전쟁 패배 후 중국은 시모노세키 조약이라는 굴욕적인 조약을 맺게 됩니다. 청은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을 할양했으며 배상금 2억냥을 지불했는데 이는 청나라 3년 예산이었으며 일본 메이지 정부의 4년치 예산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중국이 주도하던 동아시아 질서가 완전히 와해된 것입니다. 이제 중국은 허접임이 만처하에 입증되었고 동아시아의 강자는 명실공히 일본이 되었습니다.

<중국이 허접임이 증명되자 열강들이 중국 분할에 더 박차를 가한다>

러시아가 새로운 일본의 라이벌로 등장하다

일본은 청을 꺾고 살짝 기고만장해졌습니다. 이런 일본에 새로운 라이벌이 등장했으니 바로 러시아였습니다. 러시아는 청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청처럼 열강이 되려 했던 나라가 아니라 진짜 서구 열강이었던 나라입니다. 당시 러시아는 남하정책을 추진했고 청의 만주 지역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만약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점거하게 되면 러시아의 만주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했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를 우려한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삼국간섭을 단행하여 랴오둥 반도를 다시 청에 반환시킵니다. 하지만 이게 정말 청나라 예뻐서 돌려준걸까요? 아니죠. 결국 러시아 자신이 그 땅을 차지하려는 의도가 너무나도 짙게 깔려있었습니다.

러시아는 랴오둥 반도를 청에게 다시 돌려준 대가로 랴오둥 반도에 있는 항구인 뤼순, 다롄을 조차받습니다. 조차라는 말은 빌린다는 건데 말이 빌리는 거지 거의 뺏은 거나 다름없지요.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은 조선을 두고 러시아와 대립을 하게 되는데 러시아는 청과는 매우 다른 나라였습니다. 왜냐구요? 러시아는 진짜, 정말, 레알 서구 열강이었거든요. 열강 흉내내려다가 털린 청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조선(korea)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러시아가 대결을 벌이고 있다>

러시아를 꺾고 제국주의 열강으로 인정받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러시아와 직접 맞서는 것은 곤란하다고 판단해서 조선 정부가 친러로 돌아서는 것을 막고자했습니다. 그래서 을미사변을 강행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고종은 완전히 일본에 등을 돌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피하는 데 이를 아관파천이라 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일본도 러시아와 직접 대결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일본 혼자서 러시아와 맞서 싸운다는 것은 부담이었겠지만 당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이 일본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영일동맹을 묘사한 그림, 일본의 여신인 아마테라스와 영국의 상징 브라타니아가 함께 그려져 있다>

다른 서양 열강이 지원을 해주자 일본은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하여 러시아에게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분할 점령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일본보다 조선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러시아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 아래 러시아군을 기습했는데 이것이 바로 러일전쟁입니다.

<러일전쟁, 일본 뒤에 영국과 미국이 지원해주고 있다>

http://blog.naver.com/aias9?Redirect=Log&logNo=10098269985&jumpingVid=C3D0542F0DDD6238FC19539917A6A68D3809(러일전쟁)

러일전쟁은 놀랍게도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이는 동아시아 나라가 서구 열강을 격파한 최초의 전쟁으로 일본은 엄청난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운이 어느 정도 작용했는데 러시아는 수도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쟁을 하느라 힘이 없었고 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강화조약이 성립했는데 이것이 바로 포츠머스 조약입니다.

<러일전쟁 승리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인정 받는다>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명실상부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이후 서양과 맺었던 불평등 조약을 모두 수정하였고 조선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다른 열강들에게 인정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 좋은 것마은 아니었는데 청일전쟁 끝에 얻을 수 있었던 막대한 배상금은 러일전쟁 때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러시아랑 다시 싸워서 이길 수 있을지 일본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양보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어찌되었든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제국주의 열강에 합류한 것은 물론 한국의 지배를 인정 받았습니다. 또한 영국과 미국이 각 각 제2차 영일도맹,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승인해주었으니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데 남은 장애물은 아무것도 남질 않게 되었습니다.

히비야 폭동은 왜 일어났을까?

러일전쟁이 종결되고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의 히비야 공원에서는 전쟁을 지속하고 강화하는 것을 반대했는데 어째서 일본이 승리한 전쟁에 강화 조약을 체결하는데도 국민들인 반대했을까요? 한 번 잘 생각해봅시다. ^^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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