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2)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다
2-2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 


고부 농민 봉기, 위대한 첫 걸음

이제부터 동학농민운동(갑오농민전쟁)에 대해서 배워봅시다! 동학 농민 운동의 시발점이 된 것은 바로 고부입니다. 이곳이 왜 동학농민운동의 시초가 되었을까요? 먼저 고부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고부는 전라도에 있습니다.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구요? -_-; 전라도 하면 곡창지대입니다. 또 당연한 소리군요; 곡창지대면 쌀이 많이 난다는 얘기인데 쌀농사를 지으려면 가장 필요한게 뭘까요? 바로 물입니다! 고부 지역에는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잘 짓기 위해 둑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광산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병갑이라는 신임 군수(이름만 딱 봐도 나쁜 놈 같죠?)가 부임하더니 새로운 둑을 하나 더 짓는 겁니다. 이미 둑이 있는데 말이죠. 그리고는 너네 물값내라 하는 겁니다. 미치고 팔짝 뛰겠죠?

 

<고부 농민 봉기의 원인이 되었던 만석보>

조병갑의 횡포에 대해 고부의 농민들은 항의 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요. 정부가 이 사태를 해결해 줄 기미가 안 보이자 농민들은 스스로 무장을 하고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전봉준 등은 동지를 모은 다음 고부 관아를 점령했습니다. 농민들은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를 조병갑이 오기 이전 상태로 되돌리려 했습니다.


전주성을 점령한 1차 봉기

정부는 이 사태에 깜짝 놀라 고부 군수를 새로 임명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했습니다. 하지만 이 안핵사라는 놈이 농민들의 억울한 사정을 잘 들어줘야 하는데 농민들을 폭도로 몰아가며 또 정부에서 금지한 사교인 동학 교도가 봉기에 관여했다면서 가혹한 탄압을 가했습니다. 열이 받을 대로 받은 농민들은 중앙 정부가 더 이상 자기 편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자신들에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동학을 찾아갑니다.

당시 전라도에서 가장 큰 동학 교세가 있던 곳이 무장(전북 고창)으로 손화중이 이끌던 곳이였는데 이곳을 찾아간 전봉준은 손화중과 함께 대규모 농민군을 조직하여 봉기했습니다. 이들은 다시 고부를 점령하고 해산하지 않고 백산으로 모입니다.

<백산, 산이라고 하기에는 쪼금 민망하다. 전북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 축제가 열리는 곳이라 이 정도 높이만 되어도 주변이 훤히 보인다>

백산에서 동학 농민군은 농민군 4대 강령을 발표하고 제폭구민(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백성을 구한다), 보국안민(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구호를 앞세워 이 농민 봉기가 단순히 지역 단위 농민 봉기로만 끝날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전봉준의 연설이 끝나자 백산에 모여 있던 흰띠를 두른 농민군이 일제히 일어났는데 이 모습이 마치 하얀 산이 일어난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 지역의 명칭이 백산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

백산에 모인 농민군들은 자신들이 천명한 것을 직접 실천하기 위해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악정에 시달리고 있는 고을들을 차례로 해방시켰습니다. 고을에 들를 때마다 새롭게 가세하는 농민군은 그 수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이제 농민군은 전라도에서 가장 큰 도시 전주성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를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뒤집어 말하면 전주와 나주가 전라도의 대표 도시라는 뜻이다. 이 도시가 함락되었다는 것은 전라도 전부가 함락되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진은 전주성의 모습> 

농민군의 규모가 커지자 자신감을 얻은 농민군 지도자들은 감영(각 도의 관찰사가 기거하는 곳)이 있던 전주성을 공격했고 전주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이로써 전라도 전부가 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나 진배없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에 놀란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고자 청의 병사를 끌어들였는데 이것이 바로 엄청난 실수였습니다.

서로 군대를 파견할 때 알려주기로 한 톈진 조약에 의거하여 일본군이 조선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었습니다! 의도치 않았던 일본군 까지 들어오자 정부는 크게 당황했습니다. 당황한 것은 농민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외세의 개입을 원친 않았던 정부와 농민군은 그릇된 정치를 바로잡을 것을 약속하고 전주 화약을 맺었습니다. 이에 따라 농민군이 점령한 전라도 각 지역에는 개혁을 실천해나갈 집강소가 설치되었고 정부는 농민군의 요구를 받아들여 교정청을 설치하여 자체적인 개혁을 실천해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청과 일 양군에 철병을 요구했습니다. 이것으로 동학농민운동은 1차 봉기가 종결됩니다.

 <농민군의 집강소 통치, 물론 상상도해서 그린거다^^>


외세 맞선 2차 봉기, 농민군의 뜨거운 피가 금강에 흐르다

그러나 한 번 들어온 외국군대가 빈손으로 나갈리가 있나요? 청과 일 양국은 조선에 서로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서로 으르렁 대고 있었던 처지입니다. 게다가 임오군란, 갑신정변으로 인해 청의 영향력에 한발 밀린 일본은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철병 요구를 무시한 일본은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인질로 잡아 청군을 자극했고 이것은 청일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한반도에서 다른 나라의 전쟁이 일어나는 비극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사태를 농민군은 가만히 볼 수 만은 없었습니다. 농민군은 2차 봉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봉기한 농민군은 논산에서 1차 봉기 때 가담하지 않은 동학 교단과 합세하여 그 세를 더욱 늘렸습니다. 남접과 북접 세력이 연합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서울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동학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서울로 북상하던 도중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마주했습니다. 그런데 일본군에는 정부군도 섞여있었습니다. 정부군은 일본군과 손을 잡고 농민군을 토벌하기로 한 것이죠. 안타까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농민군은 일본군과 정부군에 맞서 열심히 싸웠지만 그들의 화력에 밀려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이 흘린 피는 분명 우리 한국사에 거대한 이정표가 되었으며 지금도 끊임없이 흘러 우리 역사에 나아가야할 방향을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해봅니다.

백성들이 들고 일어서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부족하다

동학농민운동의 의의는 바로 민중들이 스스로 들고 일어났다는 겁니다. 갑신정변과 같은 근대 운동이 민중의 지지가 없어서 실패했음을 감안한다면 동학농민운동은 민중들이 스스로 무기를 잡고 일어나 개혁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근대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민중이 스스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처럼 동학농민운동도 시민혁명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이 결국 실패하고 시민혁명이 되지 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미래 전망이 구체적으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동학농민운동은 분명 낡은 정치를 개혁하고 외세를 배척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운동입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정치를 개혁해나가고 자신들이 정권을 잡은 다음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흥선대원군을 다시 모셔오는 정도였습니다. 이는 당시 민중들이 많이 배운 계층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계획을 제시할 수 없었던 한계가 드러납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부르주아라는 엘리트 계층과 민중들이 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개화파들은 유길준을 제외하고 동학농민운동을 폭도로 규정했습니다. 만약 개화파와 동학농민운동이 손을 잡았다면 우리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동학농민운동은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끝났습니다. 하지만 동학농민군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계속 영학당, 활빈당 등으로 활동하면서 나중에 항일 의병 운동을 전개해나가는 데 큰 초석이 되었습니다.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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