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3) 근대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다
3-1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추진된 갑오개혁 


근대가 시작되다


보통 조선이 근대가 시작된 것에 대해 여러 역사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립니다. 조선 후기 부터라는 설도 있고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하고 난 다음부터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제 생각으로는 갑오개혁 부터 근대라고 보는게 타당합니다. 왜 그럴까요? 근대라는 것은 대중과 대량으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중이 출현하기 위한 필수조건은 뭔가요? 네, 바로 신분제 철폐지요. 신분제가 철폐되어 나와 너의 다름 구분이 사라지고 모두 같은 '국민'일 필요가 있는 거죠. 바로 갑오개혁을 통해 달성되는 것입니다.

 <근대에 들어서면 신분제가 사라지고 대중이라는 새로운 집단이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왕과 국가를 구분하지 못하던 시대를 넘어 갑오개혁을 통해 왕실과 국가가 분리됨으로써 조선은 근대국가체제를 갖추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러면 이처럼 조선에 근대를 가져다 준 갑오개혁은 어떤 사건이고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갑오개혁이 시작되다

갑오개혁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갑오개혁이 어떤 과정을 통해 추진되었는지 부터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먼저 지난 시간에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배웠지요?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이 들어왔고 동시에 일본군도 진주했다는 것을 배웠을 겁니다. 결국 조선을 두고 양국 군대는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발빠르게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면서 조선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고자 했습니다. 경복궁을 점령한 이후 일본은 개혁을 한다는 명목 아래 조선에 일본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개혁을 추진하는데 그것이 바로 갑오개혁입니다.

<경복궁 수정전, 예전에 집현전이 있었던 이 자리는 갑오개혁 당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었다>

일본의 무력으로 인해 시작되었던 갑오개혁은 총 3차에 걸쳐서 진행됩니다. 1차 개혁은 군국기무처라는 기구를 설치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개혁을 해 나갔습니다. 1차 개혁을 할 당시에는 청일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때였으므로 일본의 간섭이 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비교적 일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개혁이 진행되어갔습니다. 1차 개혁의 성과로 가장 큰 것이 신분제를 없앤 것입니다. 이 신분제가 없어지면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근대로 진입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분제가 없어졌다고 해서 바로 양반과 평민이 평등해졌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원래 그렇잖아요? 학생인권조례 발표되도 갑자기 여러분 인권이 막 신장되고 그러나요? 아니죠? ^^; 그만큼 어떤 일이 이제 시작되었다고 해서 바로 그 효과가 나타나는 건 아니랍니다.

<갑오개혁의 신분제 폐지는 진정한 평등을 위한 험난한 여정에 첫걸음일 뿐이었다. 아직도 평등을 위한 많은 난관이 남아있다.>

신분제 폐지 외에도 여러가지 개혁 성과가 있습니다. 6조가 8아문으로 바뀌고 과거제가 폐지되고 경찰제도가 실시되었습니다. 뭔 얘기인지 모르겠다고요? 쉽게 말하면 근대식 제도가 들어왔다는 얘기죠.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제 한복을 벗고 서양식 제복을 갖춰입은 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다지 어울리진 않겠죠? 이 서양식 제복에 적응하려면 또 긴 세월이 걸릴겁니다.

<근대제도를 막 받아들인 조선의 모습이 매우 어색했을 것이다. 전현무의 뉴스 진행처럼 ㅋㅋ>

그리고 또 한 가지 1차 개혁의 중요한 성과는 바로 왕실과 국가의 분리입니다. 전근대 시절에 왕은 곧 국가였습니다. 이 말 아시죠? 짐은 곧 국가다. 바로 태양왕 루이 14세가 한 말인데 전근대 시절의 국가의 모습을 짐작하게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즉, 국가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는 국민이 아니라 왕이었던 거죠. 하지만 갑오개혁 때 왕실과 국가가 분리됩니다. 어느 대목에서 그걸 알 수 있느냐 하면 국가 재정이 왕실과 분리되어 하나의 기관이 돈을 관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왕실을 위해 국가재정을 쓰기도 했지만 이제는 국가 돈은 국가의 것이고 왕실 돈은 왕실의 것으로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입김이 거세지다

이렇듯 1차 개혁이 진행되던 와중에 9월 새롭게 다시 2차 갑오개혁이 시작됩니다. 1차 개혁에서 2차 개혁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되는 것은 바로 청일전쟁입니다. 1894년 9월 쯤되면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실히 보이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자신의 입맛대로 개혁을 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개혁에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갑신정변 이후 일본에 망명해 있었던 급진개화파 박영효를 불러 그를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홍범 14조라는 개혁의 지침이 발표되고 지방제도도 8도에서 23부로 바뀝니다.

<갑오개혁의 기본 방향을 얘기한 홍범 14조(위), 8도에서 23부의 행정단위도 개편된다(아래)>

이렇게 갑오개혁이 진행되던 와중에 끝내 청나라는 일본에 굴복하고 맙니다. 시모노세키에서 청과 일본은 강화 조약을 맺고 일본은 청으로 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요동 반도와 대만을 넘겨 받기로 합의했죠. 그러나 만주에 자신에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침을 흘리고 있던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으로 하여금 요동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게 반환하게 합니다. 이것이 삼국간섭입니다. 이것을 본 조선 측 인사들은 러시아가 킹왕짱 힘이 세다는 것을 깨닫고 일본을 버리고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려했습니다.

<어이쿠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가 형님이었구나, 굽신굽신>

이 상황을 보자 일본은 열불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기껏 조선이라는 나라를 집어삼키려고 청나라와 전쟁까지 불사했는데 갑자기 못 보던 러시아가 떡 하니 나타나 형님을 자처하다니 미칠 노릇이죠. 그래서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는 데 그것이 바로 을미사변입니다. 을미사변은 당시 공공연하게 일본을 무시하고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려고 했던 명성황후를 시해함으로써 조선의 주도권을 다시 일본으로 빼앗아 오려는 사건이었습니다.

<을미사변 상상도,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신을 태우고 있다>

을미사변 이후로 다시 주도권을 잡은 일본은 중단되었던 개혁을 다시 시행합니다. 이것이 3차 갑오개혁이며 을미개혁으로도 부르는 것입니다. 을미개혁은 가장 큰 내용이 바로 단발령입니다. 단발령은 상투를 자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유교국가였던 조선에서 천인공노할 짓이었죠. 부모님이 물려준 머리를 자른다는 것은 유교국가였던 조선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아무튼 단발령에 대한 엄청난 반발이 유생층에 나타났는데요. 이것이 곧 최초의 의병인 을미의병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단발령이 공포된 이후 강제로 길가에서 강제로 머리를 자르고 있는 모습>

그러나 일본은 너무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조선의 왕비를 시해한 것도 모자라 선비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상투까지 자르게 하니 일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었습니다. 게다가 을미사변을 계기로 고종은 신분은 큰 위협을 느꼈죠. 자칫하다가 자기도 저꼴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고종은 겁을 집어먹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데 이것이 바로 아관파천입니다. 이로 인해 일본이 했던 모든 개혁은 중단되고 말았고 조정의 대신들도 모두 친일파에서 친러파로 돌어서게 되었습니다.

강요된 근대

갑오개혁은 비록 1차 개혁 때는 자율적으로 추진된 측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간에 그 시작이 일제에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사항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해도 인상 구기고 그 일을 하면 잘 될 턱이 있나요? 그리고 강요해서 시행된 개혁은 불안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예로 갑오개혁 때 신분제가 폐지되는 긍정적인 면이 있었지만 국방력 강화나 상공업 진흥 정책, 당장 농민들에게 급했던 토지 제도에 관한 논의는 아무것도 없었던 거죠. 결국 강요된 개혁과 근대는 우리에게 많은 아픔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몸에 좋은 거라도 억지로 먹이면 병난다. 강요된 개혁과 근대도 마찬가지다>

갑오개혁으로 인해 우리의 근대는 이제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이 근대의 출발이 왜곡된 형태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바로 잡는 것이 한국사에 과제로 남게 되었습니다.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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