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3. 근대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다
3-2 독립 협회, 민중과 더불어 국권·민권 운동에 나서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독립을 외치다

혹시 여러분 독립문에 대해서 아시나요? 서대문쯤 가면 있는데 본 적이... 없겠죠? -_-;; 그럼 이쯤에서 사진을 한 번 보여드리는게 맞을 듯 싶네요. 바로 요겁니다.

<서대문구에 있는 독립문의 모습>

얼라 보니 이거 왠지 어디서 본 기억이 있지 않나요?  바로 프랑스의 개선문의 모습을 본 떠서 만든 것입니다. 이 독립문의 모습이야 말로 우리에게 이 문을 만들 것을 계획한 단체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그 단체가 뭘까요? 바로 독립협회입니다.

자, 그러면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왜 만들었을까요? 독립문은 누구로부터의 독립을 말할까요? 일본? 틀렸습니다. 바로 청나라입니다. 지금까지 제 이야기를 잘 쫓아오셨다면 개항기 때 우리나라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나라가 청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자 우리나라에 대한 영향이 사실상 없어졌습니다. 이 기회를 노려 독립문이 세워진거죠. 독립문 자리는 예전에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이라는 문을 헐고 그곳에 세워졌습니다. 

<영은문의 모습, 영은은 맞을 영(迎)과 은혜 은(恩)을 써서 은혜를 맞이한다는 뜻이 있다.>

이렇게 독립문을 세워 청나라로 부터 독립 의지를 굳건히 한 독립협회는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말로써 독립을 지키는 것이 아닌 실력으로써 독립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을 추진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민중과 함께 하다

독립협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민중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민중을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그건 바로 지나 날의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독립협회를 세운 사람 중 한 사람이 서재필이라는 사람인데 서재필은 갑신정변에 참여했었습니다. 우리가 갑신정변에 대해 앞서 배웠듯이 갑신정변은 민중의 지지가 없어서 실패했습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실패를 거울 삼아 이제는 민중의 지지를 얻고자 했습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신문 창간이었습니다.

<독립신문 창간호, 독립신문은 한글로 발행된 최초의 신문이다>

독립신문은 한글로 발행된 최초의 신문입니다. 이것이 왜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수단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독립신문이 한글로 발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문이라는 것은 대중이 즐겨 보는 매체 중 하나입니다. 대중들은 누구나 쉽게 신문을 구해서 사회 전반에 관련된 분위기를 익힙니다.

<대중들은 신문을 읽으면서 사회가 돌아가는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신문이 중요한 이유는 이전까지 정치와는 무관했던 대중들이 신문을 읽으면서 정치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그에 대해 반응을 나타내고 혹은 참여 또한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신문이 대중들이 읽을 수 없는 언어로 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실제로 한성순보가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서 창간되기는 했지만 한자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대중들이 신문을 읽는 데는 무리가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우 이게 무슨 글자야 ㅠㅠ, 한자로 쓰여진 한성순보는 대중이 읽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한 것이 바로 독립신문입니다. 독립신문은 순우리말로 씌여졌기 때문에 대중들이 읽는 데 무리가 없었습니다. 또한 독립신문은 한글판 말고도 영문판으로도 발행되어 외국인들도 우리나라의 사정에 대해서 알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독립신문의 발행은 독립협회가 앞으로 개혁에 관한 활동을 하는 데 큰 밑그림을 그리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독립신문 말고도 독립협회의 민중을 위한 행보는 계속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만민 공동회입니다. 만민 공동회는 일종의 정치 집회로 볼 수 있습니다. 드디어 신민(臣民)이 국민(國民)으로 바뀌는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왜 그러냐고요?

<만민공동회의 모습, 최초의 정치집회라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자, 생각해봅시다. 조선 왕조 내내 백성은 다스림을 받는 존재, 은혜를 베풀어야 될 존재로 파악했습니다. 즉, 능동적으로 어떤 것을 요구하거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대규모 참여활동이라고 해봤자 농민봉기 정도가 있겠지요. 이마저도 조선 정부는 이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진압하려고 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백성들이 이제 신문을 통해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그에 맡게 자신들의 요구를 내비치는 대규모 집회를 가짐으로써 백성은 더 이상 다스림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직접 나라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존재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이후에 만민공동회는 대한제국에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정부까지 합세한 관민공동회로 발전하게 됩니다. 관민공동회에서는 백정 박성춘이 연설하게 됨으로써 신분제도의 모순까지 해결하려는 의지까지 보여줬습니다. 또한 헌의 6조를 고종에게 올려 개혁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관민공동회에서 백정이었던 박성춘이 연설하는 모습>

본격적인 개혁을 추진하다

이제 민중의 지지를 얻게 된 독립협회는 본격적인 개혁운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독립협회가 가장 중시한 것은 바로 의회설립운동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서양의 여러나라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나름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알려지는 일본 모두 의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회가 있다는 것은 왕 혼자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없고 대중의 의견을 모아 정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근대화의 모범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의회인 국회의 모습, 지금이야 국회가 막장처럼 보이지만 국회라는 기관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다>

독립협회는 의회를 설립하고 궁극적으로 왕에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켜 왕도 의회에서 만든 헌법에 따라 통치를 하게 만들려 했습니다. 이런 통치 형태를 입헌 군주제 라고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영국이 있습니다. 영국은 오랫동안 의회가 국왕의 권력을 견제하는데 성공했고 지금은 사실상 의회에서 나라를 다스리고 국왕은 그냥 상징적인 존재로만 남았지요.

아무튼 이런 형태를 만들기 위해 중추원이라는 곳을 의회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와 더불어 중추원이 실제 힘을 갖기 위해 헌의 6조를 고종에게 올렸습니다. 헌의 6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민이 한마음으로 힘을 합하여 전제 황권을 견고하게 할것
2.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3. 국가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표할 것
4.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것.
5. 칙임관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에 그 뜻을 물어서 중의에 따를것
6.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헌의 6조의 내용, 근대국가가 갖춰야할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다.>

헌의 6조를 보면 외국인에 의지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독립의지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조항에서는 중추원의 기능이 나오고 있는데 사실상 중추원을 의회로 구성하려 했던 의도가 엿 보입니다. 기타 조항들은 근대 국가가 갖추어야 하는 조건들인 재정을 일원화하고 공개하는 것, 인권 존중과 법적 절차 등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조항들은 그냥 뜬구름 잡기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행이 되었습니다. 특히 첫번째 조항과 관련해서 러시아의 이권침탈을 저지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군사 교관, 재정 고문이 철수되고 러시아가 세운 한러 은행을 폐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진정 이렇게 좋은 일만 했을까요?

독립협회, 치명적 한계

독립협회는 치명적 한계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진화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사회진화론이란 사회도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강한 국가가 약한 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이론이었습니다. 이게 맞는 말 같다구요? 그럼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것은 당연한 일이 되겠네요? 그렇죠?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인을 고문하는 일본인의 모습, 사회진화론에 따르면 이 같은 행위는 비난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사회진화론은 적극적으로 부정되야 합니다. 이것은 맞는 이론도 아니거니와 열강들이 자신들의 침략 행위를 미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죠. 그러나 독립협회 인사들은 그것을 꿰둟어 보지 못했고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한 가지 실수는 일본을 너무 우호적으로 봤다는 점입니다. 열강의 이권침탈을 저지한다고는 했지만 오히려 일본에 대해서는 관대했습니다. 독립협회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일본은 같은 동아시아 국가고 서구 열강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달랐을까요? 슬프게도 이후의 역사가 증명하듯 일본은 서양보다 더하면 더했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놈이 그놈이여... 독립협회는 일본에 대해 큰 착각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실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데 어쨌거나 독립협회도 민중을 그저 무지한 존재로 파악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민중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은 인식했으나 여전히 민중은 무지하며 계몽의 대상으로 파악하여 그들은 낮은 존재로 파악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엘리트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던 한계였습니다. 

독립협회의 해산과 의의

어쨌든 개혁을 추진하면서 한계를 가지고 있던 독립협회는 결국 해산을 당하고 마는데 그것은 고종 황제에 의해서 였습니다. 독립협회의 세력이 커지자 독립협회를 두려워 한 세력들이 독립협회가 황제를 없애고 공화정을 만드려고 한다고 모함했고 자신의 권한이 축속될 것을 두려워 한 고종은 황국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독립협회와 대립하게 한 다음 강제로 해산 시켜버렸습니다. 

한계가 있는 독립협회였지만 민중과 함께 개혁을 추구하고자 했다는 점과 근대화 국가를 뚜렷하게 지향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많은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이제 역사의 흐름은 이전보다 보수적 변화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부분은 다음 광무개혁과 대한제국의 성립에서 알아보도록 합시다. ^^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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