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SETTING THE STAGE

이 부분은 대항해시대로 표현되는 유럽의 지리상의 대발견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파트를 설명하면 괜히 가슴이 두근두근 합니다. 왜냐고요? 바로 아래를 보시죠.

역덕들의 시간을 잡아먹었던 갓겜 대항해시대4, 이 일러스트는 하이레딘 발바로사이다.

많은 초, 중학생들이 세계지도를 알고 도시 이름을 알 수 있게 해주었던 갓겜 대항해시대가 바로 오늘 설명하는 이 시대를 다루고 있습니다. 대항해시대는 코에이(돈에이, 내 돈 ㅠㅠ)에서 제작된 게임으로 사실 역사적 고증은 안드로메다로 가는 게임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흡입력이 대단해 저도 이 게임하느라 날밤새서 아프다고 핑계대고 학교를 안(...) 간적도 있는데 그만큼 유럽의 지리상의 발견은 많은 미디어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주로 모험과 낭만이 가득한 시대로 묘사되는 이 시기가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것만큼 행복한 시대였는지 알아보도록 합시다.

1. For “God, Glory, and Gold”

유럽 지리상의 발견에 가장 큰 동기는 바로 돈이었습니다. 뭐 새삼스러울게 있나요. 예나지금이나 인간의 재물욕은 엄청나서 하나뿐인 목숨을 걸기도 했지요.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은 동방의 신기한 향신료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역사를 바꾼 향신료가 바로 후추입니다. 후추는 같은 무게의 금으로 거래될 만큼 어마어마한 향신료였습니다. 예전에는 유럽사람들이 고기를 저장하기 위해 후추가 필요했다고 설명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같은 무게의 금으로 거래될 만큼 귀한 후추를 고기 저장에 사용했다면 고기가 금보다 비싸다는 얘기가 되겠죠? 실제로는 저장 용도보다는 내가 이만큼 재력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요즘 말로 플렉스죠(...) 중세 요리를 보면 이런 경향을 눈여겨 볼 수 있습니다. 최초의 요리사라고도 알려진 프랑스의 기욤 티렐(타이유방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이 남긴 요리책 Le Viandier를 보면 중세 요리의 특징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요리는 색을 중요시하여 염료를 쓰질 않나(...) 음식 재료와 금을 바른다거나(...) 아무튼 기상천외한 방법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어마어마한 향신료 사용법이었는데요. 그만큼 귀족들 사이에서 동방에서 건너온 향신료, 특히 후추는 일종의 과시용으로 요리에 자주 쓰였습니다. 이제 유럽에서는 후추가 그야말로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이 후추를 북이탈리아 도시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들여왔습니다. 이들의 주된 무역루트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동방의 인도와 유럽을 이어주는 중개무역을 했습니다.

중세 유럽 상업, 북 이탈리아 도시가 지중해를 중심으로 동방의 향신료를 들여온다.

이 중세 유럽 무역은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던 11세기에 눈을 뜨기 시작해 십자군 전쟁이 최종적으로 패퇴한 13세기 이후에도 계속해서 성행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15~16세기 새로운 제국의 출현으로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바로 오스만 제국의 등장입니다.

오스만 제국의 팽창 과정, 13세기에 보잘것 없던 소국이 16세기에는 대제국으로 올라서게 된다.

오스만 제국은 소아시아 반도에서 성장한 작은 국가였는데 15세기에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면서 급격한 팽창을 이루게 됩니다. 지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동지중해 일대가 사실상 오스만의 제해권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북이탈리아 도시였던 베네치아가 오스만에 타협도 하고 저항도 했지만 결국 그 세력이 줄어들어 그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게 되자 중개 무역이 서서히 쇠퇴하게 됩니다. 물론 이유는 그것뿐만은 아니였습니다. 중개무역이 쇠퇴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이탈리아 상인들의 독과점 때문이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가격으로 후추를 들여오자 다른 유럽 국가들이 이렇게 된 바에야 직접 구해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항해시대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종교에 있습니다. 한창 십자군 전쟁이던 1145년 독일 역사가 오토는 동방의 사제왕 요한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야기인 즉슨 정통 기독교도는 아니지만(네스토리우스교) 어쨌든 기독교도인 세례명 요한인 왕이 예루살렘의 교회를 돕기 위해 진군했는데 그 군세가 대단해 페르시아 지역에 그 위세가 진동하고 그를 막으려 했던 이교도들은 대패했다는 이야기다. 티그리스강에 다다랐을 때 배가 없어 철수했다는 이 사제왕 요한의 이야기가 십자군 전쟁의 주요 거점이었던 에데사를 잃었던 유럽인들에게는 한줄기 희망이 되었습니다. 실제 이 사제왕 요한은 가공의 인물인 것을 이제 역사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습니다. 동방에 크리스트교가 퍼지긴 하였으나 강력한 군대를 가진 기독교 왕국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네스토리우스교의 동방 기독교 전파가 와전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이 이야기는 십자군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유럽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콜럼버스가 항해를 떠나는 이유 중에 하나도 이 사제왕 요한의 이야기가 언급될 만큼 유럽인들을 바다로 이끌었던 강력한 동기 중 하나였습니다. 

대항해시대의 마지막 이유는 바로 기술의 발전인데요. 동기가 있음 뭐합니까? 바다에 나가면 바로 꼬르륵인데(...) 13세기유럽의 바다를 주름잡았던 것은 갤리선으로 노를 저어 항해를 하는 배입니다. 이것은 먼 바다 항해에는 적합하지 않은 배였습니다. 14세기가 되자 좀 더 개량된 배가 나오는데 캐러벨이라는 배입니다. 이 캐러벨에는 삼각돛이 달려있는데 이 삼각돛이야 말로 바람을 거슬러가는 항해를 가능하게 해준 물건입니다. 캐러벨의 도입으로 드디어 유럽은 먼 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 역량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콜럼버스의 항해에 사용되었던 두 캐러벨 선(핀타, 니냐호)

또한 천문관측 기구인 아스트롤라베(astrolabe)와 중국에서 도입된 나침반이 배의 위치를 알려주어 보다 안전한 항해가 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뭐 거창하게 말은 했지만 실제로 유럽의 원양항해는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그 시작은 미미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고 얘기했던가요? 유럽인들은 끊임없는 도전은 미미한 시작과는 달리 엄청난 성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2. Portugal Leads the Way

유럽의 대항해시대를 이끈 나라는 바로 포르투갈입니다. 보통 해양왕국하면 영국을 생각할텐데 지도를 놓고 보면 대서양으로 가는 출입구는 사실 이베리아 반도가 더 타당하고 이베리아 반도 중에 가장 서쪽에 위치한 포르투갈이 바다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13세기 포르투갈은 이미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을 완전히 내쫓는데 성공합니다. (1249년) 1492년에 걸려서야 레콩키스타가 완수되는 에스파냐와 비교한다면 약 250년이나 이른 것입니다. 하지만 지중해로의 진출은 일찌감치 에스파냐에 의해 차단당해 포르투갈이 영토를 늘리려면 아프리카를 공략하거나 서쪽으로 나서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유럽인들에겐 서쪽이나 아프리카나 모두 미지의 영역이었습니다. 이 미지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개척한 것인 항해 왕자 엔히끄입니다. 엔히끄는 1415년 아프리카 도시 세우타를 점령한 것을 계기로 아프리카 서부 해안가를 탐험대를 적극적으로 보내게 됩니다. 이로써 유럽인들에게는 괴물이나 사는 곳이었던 아프리카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가 들어오게 되고 항해 학교를 세우면서 이후 대항해시대를 이끌어 나가는 인재를 양성하게 됩니다.

엔히끄의 후원 아래 탐험하게 된 루트, 실제로 엔히끄는 리스본을 벗어난 적이 없다.

엔히끄가 뿌린 씨앗은 그의 사후 비로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1488년 바톨로우메 디아스가 아프리카 최남단을 발견함으로써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에 이르는 직접 항로 개척이 가능함을 알렸으며 1498년에는 바스쿠 다 가마가 아프리카 최남단을 돌아 인도에 직접이르게 됩니다. 이로써 유럽인이 오래도록 꿈꿔왔던 인도로 가는 직접 항로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3. Spain Also Makes Claims

포르투갈이 이렇게 동쪽으로 가는 항로 개척에 앞서가고 있을 무렵 옆에 에스파냐도 대항해시대에 참가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포르투갈과는 달리 1492년까지 무슬림 세력과 싸우느라 바다로 눈을 돌릴 여력이 없었던 에스파냐에게 그라나다가 함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지배를 종식되면서 드디어 여유가 생깁니다. 이런 에스파냐를 찾아온 한 남자가 크리스토발 콜론(이탈리아어 크리스토포로 콜롬버, 영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이었습니다. 이 남자는 어딘가 좀 모자란 구석이 있었는데 당연히 동쪽에 있는 인도를 서쪽으로 가면 더 빨리 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콜럼버스가 지구가 둥그니까 서쪽으로 가도 인도에 다다를 수 있다고 주장했고 아무도 안 믿었는데 에스파냐가 운 좋게 믿어서 성공했다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전혀 역사적 사실과 다릅니다. 콜럼버스는 수포자로(문과가 또) 직선으로 15000km 달하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거리를 3700km로 줄여서 계산하여(...) 서쪽으로 가면 동쪽으로 가는 것보다 더 빨리갈수 있다는 헛소리를 했습니다. 사실 포르투갈의 적극적인 항해로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상식이었고 많은 항해 지식이 집적되어 있었던 포르투갈은 올바른 지구 둘레 거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콜럼버스가 에스파냐보다 먼저 포르투갈을 찾아 자신이 서쪽 항로로 인도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 이 인간이 사기꾼(...)임을 깨닫고 쫓아낸 것이죠. 에스파냐도 이 인간이 심히 사기꾼스럽지만 밑져야 본전이다라고 생각해 베팅한 게 대박이 터진 셈이 됩니다. 즉, 콜럼버스의 향해는 아메리카 대륙이 없었다면 원래 바다 한 가운데서 굶어죽을 운명이었던 것인데 우연인지 기적인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함으로써 기사회생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우습게 된 쪽은 포르투갈이었습니다. 콜럼버스를 시원하게 무시했었는데 그가 인도에 이르는 서쪽 항로를 발견해버리니 당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1492년에는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최남단을 도는 항로는 뚫은 상태이나 인도에 이르는 항로는 아직 개척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에스파냐가 서쪽으로 인도에 다다랐다고 주장하니 그 동안 공들인 인도 항로가 날아가게 생겼던 것입니다. 포르투갈은 재빨리 인도에 대한 선제 점유권을 주장하면서 콜럼버스가 진짜 인도에 다다른 것인지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년간 항해 지식의 축적으로 포르투갈은 콜럼버스가 실제로 인도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고 어쩌면 그가 발견한 곳이 새로운 대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뭐 이유가 뭐가 됐던 간에 이제 동쪽으로 향하는 항로는 포르투갈이 서쪽으로 향하는 항로는 에스파냐가 앞장 서서 개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양 국가 간에 묘한 라이벌구도가 형성되서 어디까지가 우리 땅이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 두 국가의 싸움을 종식시켜 준 사람이 바로 교황입니다. 교황이 1494년 지구에 가상의 경계선을 그어 그 경계선 동쪽은 포르투갈이 서쪽은 에스파냐가 차지한다는 기상천외한 조약을 맺게 됩니다. 이게 그 유명한 토르테시야스 조약입니다. (대항해시대3를 해봤다면 잊을 수가 없는 악덕 조약-_-) 

왼쪽 가상의 경계가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 그어진 경계선, 오른쪽은 사라고사 조약에 의해 그어진 경계선이다. 솔직히 이게 뭔짓인가 싶다.

이 조약으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지구를 양분(...)하는 비범함을 보여줍니다. 뭐 실제로는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해안가의 도시와 인도 도시 일부를 점으로 지배하는 것에 불과했고 에스파냐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여 청동기에 의존하고 있던 아메리카 토착 문명(아즈텍, 잉카 등)을 점령하는 로또를 맞아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게 됩니다. 바야흐로 에스파냐는 해상 제국을 이루게 됩니다.

4. Trading Empires in the Indian Ocean

에스파냐가 해상 제국을 이루고 있는 동안 포르투갈도 가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에스파냐 보다 넓은 영역을 차지하지는 못하였으나 인도양으로 이르는 주요한 거점인 호르무즈, 인도의 주요 도시인 고아와 캘리컷, 말라카 해협에 위치한 말라카를 점령하여 인도양으로 이르는 길목을 포르투갈이 본격적으로 통제하게 됩니다. 이때 유럽인들은 배에 대포를 싣는다는기발한(?) 발상으로 이 지역을 주름잡았던 이슬람 상인들을 밀어내게 됩니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기세가 서서히 위축됩니다. 결정적으로 포르투갈은 1580년 ~ 1640년까지 에스파냐에 합병 되면서 해외 식민지의 통제력을 잃었고 에스파냐는 1581년에 유럽 지역 자신의 영지였던 네덜란드가 독립하고 1588년 칼레 해전을 통해 영국에게 자랑하던 무적함대가 대패하게 됨으로써 해상 왕국으로서의 위세가 꺾이게 됩니다. 그 빈곳을 비집고 들어간 나라가 영국과 네덜란드입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각각 동인도 회사를 세워 식민지 경영에 나섰으며 특히 네덜란드의 경우 인도네시아 경영에 집중하면서 포르투갈의 빈자리를 빠르게 메꾸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의 성공을 너무 크게 평가하면 안 되는 것이 아메리카 대륙을 제외하고는 유라시아 대륙 쪽은 이들의 지배가 항구에 머물렀으며 내륙까지 퍼지는 것은 제한적이었습니다. 결국 대항해시대의 가장 큰 수확이라면 아직 청동기 단계이고 유라시아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던 아메리카를 유럽이 먼저 발견한 것이며 이를 통해 유럽은 본격적인 부상을 할 수 있게된 것입니다. 콜럼버스의 계산 실수가 세계를 뒤 바꾼 셈이 된 것이죠.

Special Question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후 세계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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