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
3) 삼국, 교류와 경쟁 속에서 발전하다
3-3 삼국 간의 항쟁, 최후의 승자는 신라

17:1의 전설을 쓰다

자, 벌써 삼국통일까지 왔네요. 이제 삼국이 어떻게 통일 되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성장을 했던 시기는 중국의 5호 16국 시대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중국에 수많은 나라들이 난립하면서 서로가 자기 잘났다고 떠들어대던 시기였습니다. 자기들끼리 치고박고 싸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고구려, 백제, 신라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삼국은 이 틈을 이용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죠.

<미자, 옥자, 말자, 숙자... 이건 장난이고 수많은 나라가 난립한다! 결국 지도는 걸레가 된다>

하지만 드디어 5호 16국의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한 왕조가 나타났으니 그것이 바로 '수'입니다.(589년, 수가 중원을 통일함) 중국에 통일왕조가 출현하면 필연적으로 주변에 있는 나라는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중국은 자신이 늘 천하의 중심을 자처했으므로 중국 왕조가 통일되면 주변의 국가들과의 충돌은 피할수가 없게 됩니다. 특히나 고구려 같은 깡패국가는 중국이 보기에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지요. 따라서 중국 통일 왕조였던 수나라는 고구려를 제압하고자 했습니다. 수는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 새롭게 한강 유역을 차지했던 신라와 연합을 합니다. 이것은 뒤이어 일어난 당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중국과 신라의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고구려는 돌궐, 신라에게 배신당한 백제, 백제와 친한 왜와 손을 잡았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십자외교로 동서지연과 남북진영의 대립은 이제 현실이 되었습니다.


 
<동서진영과 남북진영이 십자형으로 들어섰다해서 십자외교라 불린다>

동서진영과 남북진영의 심화되면서 고구려에는 전쟁 위기가 고조됩니다. 전쟁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먼저 수나라의 요서 지역에 선빵을 날립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현이 남기신 유명한 말이 있다. 선빵은 필승!>

고구려의 선빵에 놀란 수나라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달달 긁어모아서 113만에 이르는 대군을 조직했습니다.

<고구려야 형 왔다. 딱 10초 준다. 항복해라>

하지만 고구려는 대단한 깡패였습니다. 고구려는 깡패 중에 깡패였던 을지문덕 장군을 출동시켰고 을지문덕 장군은 살수에서 수의 군대를 싸그리 몰살 시켰습니다. 이때 살아서 돌아간 자는 2700명에 불과했다고 중국 사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17:1의 전설을 만들어낸 고구려, 다 덤벼라!>

엄청난 물량을 쏟아붇고도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못한 수나라는 결국 자신이 먼저 멸망하고 맙니다. 수가 망한 뒤를 이은 나라가 바로 당나라 입니다. 당나라는 수가 망한 것을 거울 삼아 처음에는 고구려에게 우호적으로 접근했습니다. 하지만 당태종이 즉위하면서 고구려를 적극적으로 공격하겠다는 뜻을 드러냈습니다.

고구려는 이에 대비하여 요동에 천리장성을 쌓고 전쟁에 대비했습니다. 당 태종은 고구려를 공략하기 하기 직접 군사를 공격했지만 결국 안시성에서 고구려에게 패배하고 맙니다.

<당의 고구려 침입 경로>

고구려는 이처럼 중국에 침입을 훌륭하게 막아냄으로써 결과적으로 백제, 신라까지도 보호하는 이른바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파도 심하면 둑이 깎여 나가듯 수, 당과의 전쟁으로 인해 고구려의 국력은 크게 약해지기에 이릅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무너지다

고구려가 수, 당과 치열한 싸움을 할 동안에 신라는 백제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나라가 큰 위험에 처했습니다. 결국 백제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내고자 김춘추를 보내 고구려에 접근했으나 고구려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싸늘했습니다. 과거 고구려의 땅이었던 곳을 내놓지 않으면 동맹을 맺어줄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결국 라는 백제를 무너뜨려줄 파트너로 당을 골랐습니다. 당 역시 계속된 고구려 공략 실패로 돌파구가 필요했기에 신라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로써 나-당 연합군이 결성되었습니다.

나-당 연합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백제는 지배층 사이의 내분과 의자왕의 실정으로 이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계백이 이끄는 5천의 결사대가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고 백제가 멸망했습니다.(660)


<백제의 마지막을 다룬 영화, 황산벌>

백제가 멸망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의 제2의 타겟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초유의 깡패국가!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멋지게 막아냅니다. 그러나속된 전쟁으로 국력은 쇠퇴하였고 권력을 혼자 독점했던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고구려 지도층은 구심점을 잃고 분열을 하였습니다. 결국 고구려는 668년에 재침입한 나-당 연합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고구려와 나당연합군 간에 전쟁을 그린 영화 평양성>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저는 야구를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뉴욕 양키스의 선수였던 요게 베라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저는 이 말이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직후에 신라에게 해당된다고 봅니다. 백제, 고구려가 멸망했지만 당나라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신라에게 대동강이남의 땅을 준다는 약속을 어기고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 고구려 땅에 안동도호부, 신라 땅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땅 모두를 통치하겠다는 야욕을 보였습니다. 신라는 속고 말았던 것이죠. 아마도 백제 성왕의 저주가 아닌지?;;

<믿지 말라니까 그러네... 자기가 속이고 나서 당하냐?>

더욱이 신라를 괴롭혔던 것은 백제, 고구려가 멸망당한 이후에도 잔존세력들의 끊임없는 부흥운동이었습니다. 특히나 백제 지역의 부흥 운동은 워낙 거세서 다시 한 번 나-당 연합군이 나서서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백제 부흥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백제 부흥운동은 신라가 적극적으로 진압했지만 고구려 부흥운동을 달랐습니다. 어차피 고구려 지역을 모두 수복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한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뒤에서 도와주어 당군을 몰아낼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나라는 당나라 나름대로 고구려의 마지막 보장왕을 조선왕에 봉하며 고구려 유민을 회유하고자 했지만 고구려를 부흥하려는 움직임을 멈추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는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당나라의 야욕에 맞설 결심을 하고 고구려, 백제 유민을 규합하여 당에 대항했습니다. 매소성에서 당의 20만 대군을 대파하고 기벌포에서 당의 수군을 물리침으로써 신라는 당나라를 이 땅에서 몰아내고 마침내 삼국통일을 달성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보였던 나당 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돌아갔다>

보통 신라의 통일 업적에 대해서는 모두 잘 아실 것 같습니다. 뭐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한계가 있으나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어쩌구 이런 말이 있는데 저는 구태여 그런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 다만  신라는 당시 시대 상황에 최선을 다한 행동을 보여준 것이고 또한 신라가 마지막에는 당군을 스스로 몰아냄으로써 대동강 이북 지역에 일종에 힘의 공백 상태를 만들어내었다는 점을 놓게 평가하고 싶네요. 이 때문에 발해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국가
3) 삼국, 교류와 경쟁 속에서 발전하다
3-4 활발한 문화 교류를 통해 발전한 삼국

같은 말을 쓰면 하는 생각도 비슷해진다

삼국과 가야는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진 특징은 한자를 받아들이고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특징인지 잘 모르시겠다면 대답해드리는 것이 인지상정! 지도를 보시죠.

<색칠한 부분이 한자문화권, 동북아공동체가 논의될 수 있는 바탕은 한자에 있다>

한, 중, 일 삼국은 겉으로 볼 때 서로 상당히 다른 문화를 공유하고 있지만 대신 이 삼국이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한자문화권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한자를 사용했던 것으로 나타나지만 삼국시대 때 활발히 중국문화를 수용하면서 한자 문화가 단단히 뿌리내리게 됩니다.

<광개토대왕비의 한자, 한자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이 정도 글을 써내기가 불가능하다>

이로써 한자를 기반으로 한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중국에서 들어오는 학문과 종교를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됩니다. 사람이 같은 말을 쓰면 사고가 비슷해진다고 하듯이 우리나라는 한자의 영향으로 인해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삼국간에 교류 양상을 보면 고구려는 자리 잡은 위치로 인해 북방 민족, 서역, 북중국의 나라와 교류하였으며 백제는 뱃길을 통해 주로 남중국, 왜와 교류하였습니다. 신라는 처음에는 중국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서 고구려를 통해 중국과 교류했지만 이후 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직접 중국과 교류할 수 있게되었습니다. 가야는 백제처럼 뱃길을 통해 중국, 왜와 교류하면서 철기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신라에 정복당한 뒤에는 신라 문화 형성에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삼국의 서로 다른 문화>

삼국은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다른 문화를 향유해온 것 같지만 알고보면 세 나라가 교류도 많이 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신라에 불교를 전해주었고 백제는 건축가를 보내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인 황료사의 9층 목탑을 건축하는데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삼국은 모두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기와나 반가상 같은 비슷한 형태를 보이는 예술품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열린 고대

보통 고대를 열린 시대라고 말을 많이 합니다. 이 말 뜻은 상대적으로 폐쇄적이었던 조선, 명,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비해 이때는 동북아시아의 나라들이 아주 멀리 떨어진 국가와도 교류를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로 고구려 사신이 중앙아시아의 도시 중 하나인 사마르칸트 벽화에 등장하기도 하고 신라에서는 동로마제국의 유리병인 로만 글라스가 수입되기도 했습니다.

<사마르칸트 지역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사신(위)와 경주에서 출토된 유리 봉수병>

이처럼 이 시기 역사는 한반도에만 국한해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국제적인 문화 흐름이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 지금 세계화하고 있지만 이 시기 이미 세계는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

일본과 한국의 나라들, 깊은 관계를 맺다

앞서 고대가 열린 고대라고 말씀드렸죠? 이 시기에 먼 나라와의 교류도 활발했지만 가까운 나라와의 교류는 그 보다 훨씬 더 활발했습니다. 특히 일본은 삼국과 가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발전을 했습니다. 

삼국 중 일본과 가장 친했던 백제는 유교와 의학, 천문과 역법을 전해주었고 불교와 더불어 불상 조각, 건축을 전파함으로써 일본 고대 문화 중 하나인 아스카 문화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고구려 역시 불교, 회화와 같은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었습니다. 특히 고구려의 승려인 담징은 5경과 종이, 먹을 전달해주었고 호류지의 금당벽화를 그려주기도 하는 등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 다른 고구려 승려 혜관은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기도 했습니다. 신라는 조선술과 축제술(먹고 노는 기술이 아니라 둑이나 제방을 쌓는 기술을 뜻해요 ^^)을 전파했습니다. 가야는 일본의 토기인 스에키에 영향을 주었으며 가야의 철이 일본에 수출되어 일본에서 철기 문화가 발달하는데 영향을 주었답니다. ^^

<백제 건축자들이 만든 호류지(법륭사, 위)와 담징이 호류지 금당에 그린 벽화(아래)>

자 여기까지는 교과서에서 전하는 얘기. 하지만 고대 한-일 관계를 단순히 이렇게만 파악할 수 있을까요? 한국은 늘 문화를 일방적으로 전파하는 쪽이었을까요? 

<위는 우리나라 광주에서 발견된 일본양식의 무덤, 아래는 일본에서 발견되는 무덤>

<왼쪽 위는 백제 고분군에서 나온 신발과 왼쪽 아래는 일본에서 출토된 신발, 오른쪽 위는 신라의 말안장과 아래는 일본에서 출토된 말안장>

위에서는 보는 것처럼 일본과 비슷한 형태의 유물이 우리나라에서 다수 출토되고 있지만 대다수는 근, 현대 일본과의 좋지 않은 추억 때문에 이런 유물들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역사를 마주 대하지 못하겠지요? 어쨌든 이런 유물이 출토된다는 것은 일본과 한국 간에 보다 긴밀한 관계가 있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해서 일본이 한국의 남방 영토를 점유했다는 임나일본부설, 남선경영설이 신빙성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 한국과 일본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는 관계가 아니 서로 밀접하게 연관이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모두 잘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네요 ^^

말과 풍습이 달랐던 백제

중국 역사책에 보면 백제에 관한 재밌는 기록이 보입니다. 백제 지배층과 지배를 받는 피지배계층 간에 언어가 다르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또한 백제는 삼국 중에 가장 많은 무덤 양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백제는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살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비추어 볼때 백제가 왜 멸망했는지에 대한 궁금증 중 하나를 풀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위의 자료를 보고 백제가 멸망한 이유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 정답은 수업시간에 공개됩니다. ^^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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