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
4) 남북으로 나뉘어 발전하다
4-2 발해의 건국과 발전

고구려 옛 땅에서 고구려의 뜻을 이은 나라가 일어나다

오늘은 발해의 역사를 배워볼 차례네요. 발해의 역사는 현재 중국, 러시아, 한국 이 세 나라가 서로 자기의 역사라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관련된 영상 하나를 잠깐 보죠.


<한국의 입장에서 본 발해사>

위의 동영상은 한국의 입장에서 발해를 바라본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죠? 하지만 이 주장의 한 가지 헛점이 있는데 고구려마저 중국사라고 주장하면 다시 고구려사를 한국사라고 주장해야 되는 맹점이 있습니다. 실제 여러분의 예상대로 중국은 발해사에 이어 고구려사 마저 자국사로 귀속시키려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결국 계속 합의점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실제 존재했던 역사들이 왜곡될 위험이 있습니다.

사실 과거의 역사를 현대 어떤 나라의 역사에 귀속시킨다는 것은 참 웃긴 일입니다. 과거에 존재했던 나라들이 현대의 나라와 얼마나 연관이 있고 우리가 자신들의 후손이라는 걸 알 수 있을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고구려인의 역사는 고구려인에게 돌려주자는 것입니다. 발해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소모적인 역사 점유 논쟁만 계속되면 훌륭했던 이 두 나라의 역사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참 슬픈일이죠. 정치적 입장 때문에 두 나라의 역사를 없애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발해의 역사는 어떤 모습일까요? 확실한 것은 발해는 고구려 옛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의 정신을 이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점입니다.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은 구당서에 따르면 고(구)려 별종으로 나오고 신당서에 따르면 속말말갈이 나옵니다. 하지만 대조영의 출신이 어떻든 간에 그는 고구려 사람으로 살았음은 분명하고 고구려를 계승하려 했음은 지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일본에 보낸 국서에도 발해의 왕은 고(구)려국왕으로 칭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제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네요. 발해는 고구려 뒤를 이은 나라이며 고구려의 정신을 간직한 사람들이 살았다고 말입니다.

발전하는 발해

발해는 건국 과정에서 당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면서 일어섰기 때문에 당과의 관계가 불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고구려를 멸망시킨는데 한 몫을 했던 신라와도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었지요. 발해는 주변이 적으로 둘러 쌓인 상황에서 무력으로 그 영역을 확장시켜 나갑니다. 특히 무왕 때는 흑수 말갈을 제압하고 과감하게 수군을 동원하여 당나라의 산둥 지방을 공격했습니다. 이쯤되면 뭔가 이미지가 떠오르죠?

<형 잊었냐? 나 고구려의 후예 거든?>

네, 깡패국가였던 고구려의 정신을 발해가 확실히 계승하고 있는 것이 보이죠? ㅋㅋ 하지만 언제까지 깡패로 살 수는 없는 법. 문왕 때는 과감히 손을 씻기로 결심합니다.

 
<문왕, 손 씻고 착실한 국가가 되기로 결심하다>

문왕은 험악했던 당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내실을 다져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받아들였습니다만 그것을 발해만의 독자적인 형식으로 운영했습니다.

 
 
 
 
 
 
 
 
 
 
황제
 
 
 
 
 
 
 
 
 
 
 
 
 
 
 
 
 
 
 
 
 
 
 
 
 
 
 
 
 
 
 
 
 
 
 
 
 
 
 
 
 
 
 
 
 
 
 
 
 
 
 
 
 
 
 
 
 
문하성
 
 
 
 
 
상서성
 
 
 
 
 
중서성
 
 
 
 
 
 
 
 
 
 
 
 
 
 
 
 
 
 
 
 
 
 
 
 
 
 
 
 
 
 
 
 
 
 
 
 
 
 
 
 
 
 
 
 
 
 
 
 
 
 
 
 
 
 
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










 
 
 
 
 
 
 
 
 
 
 
 
 
 
 
 
 
 
 
 
 
 
 
 
 
 
 
 
 
 
 
 
 
 
 
 
 
 
 
 
 
 
 
 
 
 
 
 
 
 
 
 
 
 
 
 
 
 
 
 
 
 
 
 
 
   
 
선조성
 
 
 
 
 
정당성
 
 
 
 
 
중대성
 
 
 
 
 
 
 
 
 
 
 
 
 
 
 
 
 
 
 
 
 
 
 
 
 
 
 
 
 
 
 
 
 
 
 
 
 
 
 
 
 
 
 
 
 
 
 
 
 
 
 
 
 
 
충부
 
인부
 
의부
 
지부
 
예부
 
신부









<위는 당나라의 3성 6부, 아래는 발해의 3성 6부. 발해는 실무기관인 정당성(상서성)에 권력이 집중되었다>

발해의 3성 6부는 당나라의 3성 6부와 다르게 실무기관이었던 정당성에 그 권력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당성 아래의 6부 역시 둘로 나누어 충, 인, 의는 좌사정에 속하고 지, 예, 신은 우사정에 속했던 것도 특이했던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왕 때 신라와의 친선 관계도 도모하여 사신을 교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라와의 관계는 발해 역사 내내 별로 좋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조금 더 다루어 보죠 ^^

발해는 9세기 초 선왕 때 들어가면 전성기를 맞는데 이때 신라와도 직접 국경을 맞대었으며 지방행정 구역도 5경 15부 62주로 정리가 됩니다.

<발해의 지방 행정 구역>

<전성기 발해의 강역도>

이렇게 발전을 거듭하는 발해를 보고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이 동아시아에서 장안 다음 가는 큰 도시라였던 걸 봐서는 발해의 국력이 어느 정도 인지 가늠할 수 있겠지요?

또한
발해는 오랜기간 동안 연호를 썼던 국가로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으며 비록 발해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왕으로 책봉 받기는 했으나 내부적으로 황제국가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외왕내제(外王內帝:바깥 외, 임금 왕, 안 내, 임금 제) 체제라 합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천손이라 칭하는 것을 보아서는 발해인들 스스로 큰 자부심을 가졌던 것이 여실히 보입니다.

발해의 멸망, 그러나 그들의 문화는 남았다

이렇게 잘 나가던
발해도 10세기 초에 거란에 의해 멸망 당하고 맙니다. 발해 멸망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는데 백두산 화산 폭발설, 귀족들 내분설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설득력을 얻고 있지 못합니다.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를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은 약 200년간이나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어느 운동 하나 성공하지 못하고 발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발해가 향유했던 문화는 아직 까지 남아 있습니다. 특히 배층의 문화였던 고구려 문화에 당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피지배층이 대부분 말갈족이었기 때문에 말갈 문화 요소도 뒤섞여 발해는 다분히 다문화적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위는 발해 집자리의 온돌(고구려 문화), 중간은 정효공주묘(중국식 전축묘), 맨 아래는 말갈계 토기가 섞여 있다>

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
4) 남북국으로 나뉘어 발전하다
4-3 남북국, 활발한 국제 교규를 통해 발전하다

남북국, 활발한 교류를 통해 국제 사회에 존재감을 알리다

남북국 시대에 남국이었던 신라, 북국이었던 발해는 활발한 교류를 전개했습니다. 특히 신라는 통일 이후 안정을 누리면서 당과의 교류를 다져나갔습니다. 어느 정도였나면 당과 자주 왕래하던 산둥 반도 지역에 신라 마을인 신라방과 신라촌이 세워졌으며 신라소라는 관청, 신라원이라는 절까지 세워졌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왕래가 자주 있었는지 짐작할만 합니다.

<산둥 반도 일대는 지금의 코리아 타운과 비슷한 곳이였을 것이다>

또한 신라는 당과의 교류에만 그쳤던 것이 아니라 동남아, 서역과도 활발한 교류를 전개했습니다. 특히 이슬람 서적인 지라학 총서에는 신라의 모습이 소개되기 까지 했습니다.

<이슬람의 지도에 신라는 섬나라로 묘사되어 있다. 신라 모습의 묘사에는 다소 과장이 섞여 있긴 하다 ^^>

또 신라의 국제 교류하면 이 사람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바로 해상왕 장보고! 그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당시에 국제교류를 주도했습니다. 이때 신라에서 들어오는 교역품에는 타슈켄트의 보석, 캄보디아와 보르네오 그리고 자바 지방의 모직물, 스마트라와 참파의 향료 등이었는데 귀족들이 사치가 심하자 흥덕왕이 교서를 내려 금지시킬 정도였습니다. 장보고의 청해진이 어느 정도로 국제 교역을 활성화시켰는지 알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위는 왕건이자, 장보고이자, 대조영인 그 분 ^^; 아래는 청해진 유적지입니다>

이제 발해의 교역을 살펴봅시다. 발해는 건국 초부터 꾸준히 일본과 교류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시 일본으로 가는 바닷길이 굉장히 위험함에도 일본과의 교류 관계를 유지하려 했는데 그 이유는 건국 초 당과 적대 관계, 신라와 적대 관게였기 때문에 신라의 배후를 위협할만한 세력을 찾기 위해 그 파트너를 일본으로 고른 것이었습니다. 물론 발해 생각처럼 일본인 움직여 주진 않았습니다. ^^; 이후 당과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유학생을 파견했는데 유독 신라와의 관계만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발해인이 당에 사신으로 갔을 때 신라인보다 상석을 요구한 경우가 있었고 당시 당에 유학간 유학생들이 치는 시험인 빈공과에서 발해와 신라는 라이벌 의식을 보이면서 서로 1등을 차지하려고 경쟁하였습니다.

<승부다! 너한테 만은 안 진다!>

하지만 늘 싸울 수만은 없었겠지요? 발해, 신라는 서로의 필요에 따라 교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증거로 신라도라는 무역로가 남아있습니다.

<발해의 5대 교통로>

고대의 교역과 현대의 교역은 어떤 점이 다를까?

이제 퀴즈를 한 번 풀어보지요. 고대 시절에도 교역이 활성했다는 것을 앞선 수업 시간에 배웠겠지요? 하지만
교역이 활발하다고 해서 그것이 현대의 교역과 같을까요? 대의 교역과 현대의 교역은 어떤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을 계급사회가 같는 특징과 결부시켜서 해석해봅시다. 정답은 수업시간에 공개되요 ^^
Posted by Avila
,
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
4) 남북국으로 나뉘어 발전하다
4-1 통일 신라의 발전

남북국 시대?

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한국사는 본격적으로 남북국 시대로 접어듭니다. 그런데 가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 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럼 나라가 하나만 있어야지 왜 남북국시대죠? 적어도 남국과 북국이 있다는 소리인데 이게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_-!


<이것이 레알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이다>

흠, 사정을 한 번 들어볼까요? 바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수한 이후 동시대에 공존한 나라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나라는 고구려 유민 출신이었던 대조영이 세웠던 발해입니다.

<발해 지도>

남북국 시대라는 말은 발해 역시 한국사의 하나의 영역으로 간주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라를 남국, 발해를 북국으로 파악해 이 두 나라의 역사를 모두 한국사로 파악함으로써 한국사가 전개되었던 지역을 좀 더 넓게 보는 것이죠.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남북국이라고? 그럼 삼국통일하려고 이때까지 뼈빠지게 싸운 나는 뭐가 되냐?-_->

바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다는 의미가 자칫 퇴색해져 버리는 겁니다. 발해를 한국사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면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이라고 할 수 있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상당히 어색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통일하려고 당나라 끌어들이고 수많은 전쟁터를 누볐던 김춘추, 김유신 등은 조금 허탈해지겠죠? ^^; 따라서 역사학계에서는 이 용어를 가지고 논란이 있으며 아직 마땅한 대체어를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실제 그 당시 역사기록에도 신라가 발해를 북국으로 불렀던 것이 남아있는 만큼 남북국이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도 타당해보이며 한국사를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그 취지는 좋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초의 민족의식이 싹트다

신라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로서 민족의 통일을 이루어냈다고 평가합니다. 그렇다면 민족이란 무엇일까요?  이 부분을 하기 전에 여러분이 생각하는 민족의 정의는 무엇인지 묻고 싶네요. 우리가 민족하는 말은 많이 쓰지만 정작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가르키는지 모를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약간 오덕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그 의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


<오덕오덕할수도 있지만 16분 34초부터 17분까지만 보세요 ^^>

자 어떻습니까? 민족이라는 것은? 민족을 형성하는 요인 중에는 혈연, 지역, 언어 기타 등등도 있겠지만 자기 자신이 어떤 민족인지 자각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우리는 민족이라고 자각을 할 수 있었던 시절이 언제부터였을까요? 역사학자들은 조심스럽게 그것이 삼국통일 이후 부터 천천히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삼국통일 이전에 고조선이라는 최초의 국가가 있고 부여, 옥저, 동예, 삼한, 가야,고구려, 백제, 신라 수많은 나라가 난립했지만 그 어느 나라도 우리는 고조선의 후손이며 우리 모두는 한민족이다라고 내세운 나라는 없었습니다. 다만 서로 비슷한 말을 쓰고 풍습이 비슷하다는 정도였지요.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민족이 될 수 없었지요.

<언어와 풍습이 같다고 민족이 될 수 있나? 2프로 부족하다!>

서로 같은 민족이 되기에는 어색했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백성들은 통일된 이후 본격적으로 하나가 되어가기 시작합니다. 신라는 일통삼한(一統三韓: 하나 일, 거느릴 통, 석 삼, 한나라 한)을 내세우며 세 나라가 마침내 하나의 집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내적으로는 옛 고구려, 백제 지배층을 신라의 골품 제도 안으로 편입시켜 같은 지배층으로 인정했으며 지방 행정 구역도 9주로 개편하여 신라, 백제, 고구려 지역에 각 3주씩 설치하여 모두 같은 국민이라는 것을 표방했습니다. 그리고 병역의무도 신라인은 물론 고구려, 백제, 말갈 사람까지 모두 포함하여 중앙군단인 9서당을 편성했습니다. 지금이야 군대가는 것이 매우 싫겠지만 군대를 가서 병역의무를 진다는 것은 그 나라의 국민으로 인정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군대에 피정복민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피정복민을 이제 동등한 백성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죠 ^^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세 나라 백성은 완전히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일단 신라의 통일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라 고구려, 백제의 백성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아무래도 백제의 백성이 많게 됩니다. 제가 동등하게 9주를 설치했다고 하지만 사실 새롭게 설치된 주는 주로 백제, 가야 지역에 편중되어 있습니다.

<새롭게 설치된 주들은 주로 백제, 가야 지역이다. 고구려 옛 땅은 기존의 한주, 삭주, 명주가 확장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 지배층을 신라 지배층과 같은 골품제도 안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점으로 인해 시간이 지나 결국 고구려, 백제는 신라가 약해진 틈을 타 서로 자신들의 뿌리를 다시 찾습니다. 그것이 결국 후삼국시대로 이어지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완전한 하나의 민족이 되지 못했기에 이들이 다시 찢어지는 것은 예견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신라왕은 킹왕짱!

신라의 민족 융합책을 보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통일 이후 신라의 발전 양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 먼저 신라는 천년이나 지속되었던 왕국인 만큼 이에 따른 시대 구분도 존재합니다.

 

상대

중대

하대

시기

건국(BC57)~진덕여왕(AD654)

무열왕(654)~혜공왕(780)

선덕왕(780)~경순왕(935)

왕위계승

성골

무열왕 직계

내물왕 방계

주요관직

-

시중

상대등

정치체제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

전제 왕권

귀족 연립 체제


위의 표는 신라 시기에 대한 시대 구분 표입니다. 통일 이후 신라 전성기에 해당되는 시기는 중대로 이 시기는 무열왕의 직계 후손들이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면서 왕권을 공고히 다지며 전제왕권(專制王權, 오로지 전, 절제할 제, 임금 왕, 권세 권)을 구축했습니다. 그런데 전제왕권은 무엇일까요?


<영화 300에 나오는 크세르크세르 1세가 대표적인 전제왕권의 예라고 볼 수 있다>

전제왕권은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나라를 지배하는 형태입니다. 과연 전제왕권이라는 표현이 옳으냐는 문제점도 있긴 하지만 교과서에서 일단 전제왕권으로 표현하고 있는 만큼 그 문제는 살짜쿵 넘어가보도록 해보죠 ^^ 시간이 난다면 재밌는 사실들!에서 좀 더 다뤄볼까 합니다.

그렇다면 신라의 왕은 어떻게 해서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게 되었을까요?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독점하는 데 이 방법처럼 빠른게 없습니다. 바로 숙청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문왕 뒤를 이어 즉위한 신문왕은 귀족 세력들을 하는 꼬라지를 보니 통일된 국가를 이끌어갈 자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신문왕, 귀족들을 없애버릴 결심을 하다>

마침 김흠돌의 모반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귀족 세력를 싸그리 없애버리게 됩니다. 귀족 세력의 힘이 꺽이게 되자 이제까지 귀족을 대표했던 상대등 보다 왕명을 수행하는 집사부의 시중의 권한이 더 강해지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말 안 듣고 뻣뻣한 진골 귀족들보다 왕의 말을 잘 들었던 6두품 세력들을 주로 등용하여 자신을 보좌하게 했습니다. 이런 전제왕권 시기에 지방행정 조직도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되며 유학 사상이 강조되며 국학이라는 교육기관이 설치되어 전제 왕권을 뒷받침했습니다.

토지제도도 왕권이 강해짐에 따라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귀족들이 소유했던 녹읍(녹읍 안에 살던 백성들 노동력 징발 가능)을 폐지하고 대신 관료전(관료전 안에 살던 백성들 노동력 징발 불가, 조세를 걷을 수 있는 권리만 있음)을 지급했습니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함으로써 귀족을 통해서 백성을 지배하기 보다는 왕이 직접 백성을 지배하겠다는 의도를 보였습니다. 어때요? 이 시기 신라 왕의 힘이 킹왕짱이라는 게 느껴지시나요?

전제 왕권이 무너지고 혼란한 시절이 도래하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영원할 것 같던 신라왕의 힘도 결국 쇠퇴하고 맙니다. 혜공왕 말기에 귀족들이 96각간의 난을 일으키는데 이 때 이후로 강대하던 왕의 힘도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 심지어 혜공왕은 이찬 김지정이 일으킨 반란에 죽는 참사가 일어납니다. 혜공왕이 죽고 선덕왕이 왕위에 오르는 이 시대를 신라 하대로 부르며 이후부터는 내물왕 방계들이 왕이 됩니다.

이쯤되면 왕의 힘이라는 게 거의 없어지는 게 당연합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잘 생각해봅시다. 이때까지 왕이 혼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는데 그 권력을 휘두르던 왕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죠? 자연스럽게 왕이 휘두르던 권력은 귀족들에게 분산되고 귀족들은 그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면서 나라는 개막장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겁니다.

<신라 하대의 상황, 개판이다>

자 어느 정도 개판이었을까요?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완전히 회복하여 이제까지 왕이 지급해주던 관료전은 폐지되고 다시 녹읍이 부활됩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마음대로 토지를 소유하며 자신들의 토지 규모를 늘리고 농민들을 쥐어 짜 자신들의 뱃속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이제 왕도 해보고 싶어서 서로 왕이 되겠다고 치고 받고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로 155년 20명의 왕이 교체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왕의 권력은 더욱 더 보잘 것 없이 됩니다.

<155년 동안 20명의 왕이 교체되었다고? ㅋ 그러고도 니가 왕이니?>

왕의 힘은 갈수록 약해지고 귀족들을 막을 만한 사람은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조용히 힘을 키우던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지방에 호족이었습니다. 호족들은 자신의 근거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여 백성들을 실질적으로 다스렸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해상왕 장보고도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 해상호족의 일족으로 볼 수 있지요.

<장보고도 일종의 호족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당에서 유학했던 6두품 세력들도 신라 말기 혼란한 상황을 보면서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유교를 깊이 공부했기 때문에 고대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는 골품제를 비판했습니다. 이렇듯 신라 하대 사회에서 호족, 6두품 세력들이 성장하고 있었고 새로운 사상도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불교 경전 보다 참선을 중요시 하는 선종이 나타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으며 풍수지리설 역시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같은 사상의 변화 역시 새로운 사회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5소경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자 이제 문제를 풀어봐야지요? 신라는 통일 이후 수도가 동쪽에 치우친 것을 보완하기 위해 5소경을 만듭니다. 이 5소경에는 그 지역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멸망한 나라의 지배계층을 주로 이주시켰는데 어떤 이유에서 그랬을까요? 정답은 수업시간에 공개됩니다. ^^
Posted by Avila
,

대단원 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국가의 프린트입니다. 주로 내용 요약 정리에 해당됩니다. 열공하세요 ^^

Posted by Avila
,
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
3) 삼국, 교류와 경쟁 속에서 발전하다
3-3 삼국 간의 항쟁, 최후의 승자는 신라

17:1의 전설을 쓰다

자, 벌써 삼국통일까지 왔네요. 이제 삼국이 어떻게 통일 되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성장을 했던 시기는 중국의 5호 16국 시대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중국에 수많은 나라들이 난립하면서 서로가 자기 잘났다고 떠들어대던 시기였습니다. 자기들끼리 치고박고 싸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고구려, 백제, 신라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삼국은 이 틈을 이용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죠.

<미자, 옥자, 말자, 숙자... 이건 장난이고 수많은 나라가 난립한다! 결국 지도는 걸레가 된다>

하지만 드디어 5호 16국의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한 왕조가 나타났으니 그것이 바로 '수'입니다.(589년, 수가 중원을 통일함) 중국에 통일왕조가 출현하면 필연적으로 주변에 있는 나라는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중국은 자신이 늘 천하의 중심을 자처했으므로 중국 왕조가 통일되면 주변의 국가들과의 충돌은 피할수가 없게 됩니다. 특히나 고구려 같은 깡패국가는 중국이 보기에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지요. 따라서 중국 통일 왕조였던 수나라는 고구려를 제압하고자 했습니다. 수는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 새롭게 한강 유역을 차지했던 신라와 연합을 합니다. 이것은 뒤이어 일어난 당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중국과 신라의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고구려는 돌궐, 신라에게 배신당한 백제, 백제와 친한 왜와 손을 잡았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십자외교로 동서지연과 남북진영의 대립은 이제 현실이 되었습니다.


 
<동서진영과 남북진영이 십자형으로 들어섰다해서 십자외교라 불린다>

동서진영과 남북진영의 심화되면서 고구려에는 전쟁 위기가 고조됩니다. 전쟁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먼저 수나라의 요서 지역에 선빵을 날립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현이 남기신 유명한 말이 있다. 선빵은 필승!>

고구려의 선빵에 놀란 수나라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달달 긁어모아서 113만에 이르는 대군을 조직했습니다.

<고구려야 형 왔다. 딱 10초 준다. 항복해라>

하지만 고구려는 대단한 깡패였습니다. 고구려는 깡패 중에 깡패였던 을지문덕 장군을 출동시켰고 을지문덕 장군은 살수에서 수의 군대를 싸그리 몰살 시켰습니다. 이때 살아서 돌아간 자는 2700명에 불과했다고 중국 사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17:1의 전설을 만들어낸 고구려, 다 덤벼라!>

엄청난 물량을 쏟아붇고도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못한 수나라는 결국 자신이 먼저 멸망하고 맙니다. 수가 망한 뒤를 이은 나라가 바로 당나라 입니다. 당나라는 수가 망한 것을 거울 삼아 처음에는 고구려에게 우호적으로 접근했습니다. 하지만 당태종이 즉위하면서 고구려를 적극적으로 공격하겠다는 뜻을 드러냈습니다.

고구려는 이에 대비하여 요동에 천리장성을 쌓고 전쟁에 대비했습니다. 당 태종은 고구려를 공략하기 하기 직접 군사를 공격했지만 결국 안시성에서 고구려에게 패배하고 맙니다.

<당의 고구려 침입 경로>

고구려는 이처럼 중국에 침입을 훌륭하게 막아냄으로써 결과적으로 백제, 신라까지도 보호하는 이른바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파도 심하면 둑이 깎여 나가듯 수, 당과의 전쟁으로 인해 고구려의 국력은 크게 약해지기에 이릅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무너지다

고구려가 수, 당과 치열한 싸움을 할 동안에 신라는 백제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나라가 큰 위험에 처했습니다. 결국 백제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내고자 김춘추를 보내 고구려에 접근했으나 고구려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싸늘했습니다. 과거 고구려의 땅이었던 곳을 내놓지 않으면 동맹을 맺어줄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결국 라는 백제를 무너뜨려줄 파트너로 당을 골랐습니다. 당 역시 계속된 고구려 공략 실패로 돌파구가 필요했기에 신라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로써 나-당 연합군이 결성되었습니다.

나-당 연합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백제는 지배층 사이의 내분과 의자왕의 실정으로 이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계백이 이끄는 5천의 결사대가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고 백제가 멸망했습니다.(660)


<백제의 마지막을 다룬 영화, 황산벌>

백제가 멸망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의 제2의 타겟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초유의 깡패국가!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멋지게 막아냅니다. 그러나속된 전쟁으로 국력은 쇠퇴하였고 권력을 혼자 독점했던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고구려 지도층은 구심점을 잃고 분열을 하였습니다. 결국 고구려는 668년에 재침입한 나-당 연합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고구려와 나당연합군 간에 전쟁을 그린 영화 평양성>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저는 야구를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뉴욕 양키스의 선수였던 요게 베라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저는 이 말이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직후에 신라에게 해당된다고 봅니다. 백제, 고구려가 멸망했지만 당나라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신라에게 대동강이남의 땅을 준다는 약속을 어기고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 고구려 땅에 안동도호부, 신라 땅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땅 모두를 통치하겠다는 야욕을 보였습니다. 신라는 속고 말았던 것이죠. 아마도 백제 성왕의 저주가 아닌지?;;

<믿지 말라니까 그러네... 자기가 속이고 나서 당하냐?>

더욱이 신라를 괴롭혔던 것은 백제, 고구려가 멸망당한 이후에도 잔존세력들의 끊임없는 부흥운동이었습니다. 특히나 백제 지역의 부흥 운동은 워낙 거세서 다시 한 번 나-당 연합군이 나서서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백제 부흥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백제 부흥운동은 신라가 적극적으로 진압했지만 고구려 부흥운동을 달랐습니다. 어차피 고구려 지역을 모두 수복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한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뒤에서 도와주어 당군을 몰아낼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나라는 당나라 나름대로 고구려의 마지막 보장왕을 조선왕에 봉하며 고구려 유민을 회유하고자 했지만 고구려를 부흥하려는 움직임을 멈추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는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당나라의 야욕에 맞설 결심을 하고 고구려, 백제 유민을 규합하여 당에 대항했습니다. 매소성에서 당의 20만 대군을 대파하고 기벌포에서 당의 수군을 물리침으로써 신라는 당나라를 이 땅에서 몰아내고 마침내 삼국통일을 달성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보였던 나당 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돌아갔다>

보통 신라의 통일 업적에 대해서는 모두 잘 아실 것 같습니다. 뭐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한계가 있으나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어쩌구 이런 말이 있는데 저는 구태여 그런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 다만  신라는 당시 시대 상황에 최선을 다한 행동을 보여준 것이고 또한 신라가 마지막에는 당군을 스스로 몰아냄으로써 대동강 이북 지역에 일종에 힘의 공백 상태를 만들어내었다는 점을 놓게 평가하고 싶네요. 이 때문에 발해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국가
3) 삼국, 교류와 경쟁 속에서 발전하다
3-4 활발한 문화 교류를 통해 발전한 삼국

같은 말을 쓰면 하는 생각도 비슷해진다

삼국과 가야는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진 특징은 한자를 받아들이고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특징인지 잘 모르시겠다면 대답해드리는 것이 인지상정! 지도를 보시죠.

<색칠한 부분이 한자문화권, 동북아공동체가 논의될 수 있는 바탕은 한자에 있다>

한, 중, 일 삼국은 겉으로 볼 때 서로 상당히 다른 문화를 공유하고 있지만 대신 이 삼국이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한자문화권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한자를 사용했던 것으로 나타나지만 삼국시대 때 활발히 중국문화를 수용하면서 한자 문화가 단단히 뿌리내리게 됩니다.

<광개토대왕비의 한자, 한자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이 정도 글을 써내기가 불가능하다>

이로써 한자를 기반으로 한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중국에서 들어오는 학문과 종교를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됩니다. 사람이 같은 말을 쓰면 사고가 비슷해진다고 하듯이 우리나라는 한자의 영향으로 인해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삼국간에 교류 양상을 보면 고구려는 자리 잡은 위치로 인해 북방 민족, 서역, 북중국의 나라와 교류하였으며 백제는 뱃길을 통해 주로 남중국, 왜와 교류하였습니다. 신라는 처음에는 중국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서 고구려를 통해 중국과 교류했지만 이후 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직접 중국과 교류할 수 있게되었습니다. 가야는 백제처럼 뱃길을 통해 중국, 왜와 교류하면서 철기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신라에 정복당한 뒤에는 신라 문화 형성에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삼국의 서로 다른 문화>

삼국은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다른 문화를 향유해온 것 같지만 알고보면 세 나라가 교류도 많이 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신라에 불교를 전해주었고 백제는 건축가를 보내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인 황료사의 9층 목탑을 건축하는데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삼국은 모두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기와나 반가상 같은 비슷한 형태를 보이는 예술품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열린 고대

보통 고대를 열린 시대라고 말을 많이 합니다. 이 말 뜻은 상대적으로 폐쇄적이었던 조선, 명,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비해 이때는 동북아시아의 나라들이 아주 멀리 떨어진 국가와도 교류를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로 고구려 사신이 중앙아시아의 도시 중 하나인 사마르칸트 벽화에 등장하기도 하고 신라에서는 동로마제국의 유리병인 로만 글라스가 수입되기도 했습니다.

<사마르칸트 지역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사신(위)와 경주에서 출토된 유리 봉수병>

이처럼 이 시기 역사는 한반도에만 국한해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국제적인 문화 흐름이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 지금 세계화하고 있지만 이 시기 이미 세계는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

일본과 한국의 나라들, 깊은 관계를 맺다

앞서 고대가 열린 고대라고 말씀드렸죠? 이 시기에 먼 나라와의 교류도 활발했지만 가까운 나라와의 교류는 그 보다 훨씬 더 활발했습니다. 특히 일본은 삼국과 가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발전을 했습니다. 

삼국 중 일본과 가장 친했던 백제는 유교와 의학, 천문과 역법을 전해주었고 불교와 더불어 불상 조각, 건축을 전파함으로써 일본 고대 문화 중 하나인 아스카 문화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고구려 역시 불교, 회화와 같은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었습니다. 특히 고구려의 승려인 담징은 5경과 종이, 먹을 전달해주었고 호류지의 금당벽화를 그려주기도 하는 등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 다른 고구려 승려 혜관은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기도 했습니다. 신라는 조선술과 축제술(먹고 노는 기술이 아니라 둑이나 제방을 쌓는 기술을 뜻해요 ^^)을 전파했습니다. 가야는 일본의 토기인 스에키에 영향을 주었으며 가야의 철이 일본에 수출되어 일본에서 철기 문화가 발달하는데 영향을 주었답니다. ^^

<백제 건축자들이 만든 호류지(법륭사, 위)와 담징이 호류지 금당에 그린 벽화(아래)>

자 여기까지는 교과서에서 전하는 얘기. 하지만 고대 한-일 관계를 단순히 이렇게만 파악할 수 있을까요? 한국은 늘 문화를 일방적으로 전파하는 쪽이었을까요? 

<위는 우리나라 광주에서 발견된 일본양식의 무덤, 아래는 일본에서 발견되는 무덤>

<왼쪽 위는 백제 고분군에서 나온 신발과 왼쪽 아래는 일본에서 출토된 신발, 오른쪽 위는 신라의 말안장과 아래는 일본에서 출토된 말안장>

위에서는 보는 것처럼 일본과 비슷한 형태의 유물이 우리나라에서 다수 출토되고 있지만 대다수는 근, 현대 일본과의 좋지 않은 추억 때문에 이런 유물들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역사를 마주 대하지 못하겠지요? 어쨌든 이런 유물이 출토된다는 것은 일본과 한국 간에 보다 긴밀한 관계가 있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해서 일본이 한국의 남방 영토를 점유했다는 임나일본부설, 남선경영설이 신빙성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 한국과 일본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는 관계가 아니 서로 밀접하게 연관이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모두 잘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네요 ^^

말과 풍습이 달랐던 백제

중국 역사책에 보면 백제에 관한 재밌는 기록이 보입니다. 백제 지배층과 지배를 받는 피지배계층 간에 언어가 다르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또한 백제는 삼국 중에 가장 많은 무덤 양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백제는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살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비추어 볼때 백제가 왜 멸망했는지에 대한 궁금증 중 하나를 풀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위의 자료를 보고 백제가 멸망한 이유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 정답은 수업시간에 공개됩니다. ^^


Posted by Avila
,
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
3) 삼국, 교류와 경쟁 속에서 발전하다
3-2 삼국 간의 상호 항쟁이 본격화되다

싸움을 하기 전에 헬스를 해 몸의 근력을 키우자!

지난 시간까지는 삼국이 어떻게 고대국가로서 기틀을 잡아가는 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삼국 간에 치열했던 항쟁에 대해서 배워 봅시다.

<테크트리 올리고 발전을 했으면(위) 전쟁을 하는 건 당연지사!(아래)>

여러분이 좋아하는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에서도 보면 적과 싸우기 전에 먼저 발전을 열심히 하지요? 미네랄 캐고 가스 채취하고 건물 올리고 그래야지만 자신이 원하는 병력을 뽑을 수 있으니까요. 삼국 간의 항쟁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고대국가 기틀을 다지고 내정을 충분히 다진 뒤에 밖으로 뻗어 나가게 됩니다. 

이때 삼국이 내정을 다지는 와중에 공통적인 특성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바로 율령 반포와 불교 수용입니다. 율령 반포와 불교 수용은 고대 국가들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도대체 율령과 불교가 어떤 역할을 했기에 왕권을 강화하는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일까요? 이제부터 하나 하나씩 살펴보죠.

자 먼저 율령은 어떻게 왕의 힘을 강화시켜주었을까요? 국가를 원활하게 통치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바로 법입니다. 여러분들은 잘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살다보면 우리는 늘 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만 살고 있습니다. 

<법을 어기게 되면 우리는 감옥에 갇혀 사회와 격리됩니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현대와 같은 법이 존재할까요? 옛날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다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때 당시에도 법이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사용하는 법과 형태가 다를 입니다. 어떤 형태였는지 한 번 볼까요?

A라는 사람이 물건을 훔치다가 잡혔습니다. 그러면 마을에 나이가 많고 지혜로운 사람 앞으로 끌려갑니다. 이 사람을 B라고 해봅시다. B는 경험과 지식이 많으므로 이전에 마을에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는지 생각해보고 그때 이 같은 경우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참고하여 판결을 내립니다. 이러한 형태를 관습법이라 합니다.

관습법은 공동체 안에서의 약속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왕과 같은 권력자도 관습법을 따라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다면 왕의 말을 잘 따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맞아요. 왕의 말을 곧 법으로 만들어 기록하면 됩니다! 이것을 율령이라고 합니다.

율령에 대해서는 알아보았으니 이제 불교가 어떻게 왕권을 강화시켰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봅시다. 불교하면 종교 같은데 불교가 어째서 왕권을 강화시키게 되었을까요? 그 당시에는 선생님이 앞서 설명했던 애니미즘, 샤머니즘, 토테미즘, 천손사상 등의 신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수많은 종교가 난립하면 모시는 신의 수는 어떨까요? 천차만별이겠지요?

<온갖 잡신들이 판치는 세상이었던 고대>

하지만 불교가 유입되면서 이런 신들은 정리가 되기 시작합니다. 불교는 이런 토착신앙 보다 잘 짜여진 교리를 바탕으로 한 고등종교였습니다. 불교의 유입으로 인해 여러 많은 신들이 불교 안으로 흡수되었습니다. 이제 부처의 말씀만을 따르면 되는 상황이 도래하게 된 것이죠.

<불심으로 대동단결!>

왕은 불교가 온갖 잡신을 통합하고 부처 중심의 세상을 만들자 이것을 이용합니다. 즉, 부처를 국왕과 동일 선상에 놓는 사상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온갖 잡신들이 부처에 의해 통합된 것처럼 여러 귀족들이 국왕의 힘 앞에 통합되기를 바란 것이죠. 그리고 이런 국왕의 의도는 잘 먹혀 들어가 불교를 통해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하는데 성공합니다. 

또한 이 시기 국가들은 전성기를 맞으면서 독자적인 천하관을 내세우는데요. 그 증거로 대왕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거나 독자적인 연호 사용, 역사 편찬이 있습니다. 특히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것은 시간 마저 자국 왕을 중심으로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그 국가의 자신감을 나타내어 주는 좋은 증거입니다. 

이제 고대국가들은 율령 반포와 불교 수용을 통하여 내부에 축적된 힘을 밖으로 뻗어내기 시작합니다. 본격적으로 삼국항쟁의 막이 오른 것입니다. 그 치열했던 싸움의 현장을 만나러 가보시죠!

먼저 치고나가는 백제

고구려, 백제, 신라 중에서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것은 바로 백제였습니다. 저번 시간에 말했던 것처럼 백제는 나름대로 명당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삼국 항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정하게 됩니다. 백제는 율령 반포시기가 정확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대체로 근초고왕 때 율령 반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하는데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야말로 추측에 불과합니다. ^^; 

백제의 전성기를 주도한 왕은 근초고왕으로 남쪽으로는 한반도 남부의 큰 세력이었던 마한 전 지역을 통합했고 북으로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했습니다. 심지어 백제와 고구려의 싸움으로 고구려의 왕이었던 고국원왕이 죽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 만큼 백제와 고구려 간의 싸움이 치열했던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서울 석촌동에 있는 백제고분군, 현재 근초고왕의 고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진짜 그런지는 확실치 않다>

또한 백제에 관해서는 신기한 기록이 중국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백제가 중국에 자신의 군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 백제가 실제로 중국을 공략할만한 능력이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백제가 요서에 공략했다는 기록은 중국 남쪽 왕조 사서에만 편중되어서 나오기 때문에 그것 역시 고려해봐야할 점입니다. 최근 역사학자들은 백제 해상 무역왕국으로 중국의 요서, 산둥과 일본 규슈 지방을 연결하는 중심 국가가 아니었는지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고구려라는 깡패국가의 왕을 없앨정도로 잘 나가던 백제는 5세기에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왜냐구요? 그 분이 오셨습니다 ㄷㄷㄷ

<형왔다. 내 앞에서 다 버러우 타는거다>

그 분의 출현

고구려는 백제 전성기인 4세기 후반에 전연이라는 중국 왕조 중 하나에 해당되는 나라에 침입을 받고 백제의 공격으로 왕이 죽는 등 큰 위기에 빠졌습니다. 이런 큰 국가적 위기 상황에 소수림왕이 등극하게 됩니다. 소수림왕은 전연에 대항하기 위해 또 다른 중국의 왕국인 전진과 친교를 맺어 전연을 견제하기에 이릅니다. 

<5호 16국 시대 당시의 지도, 고구려는 전진과 친교를 맺어 전연을 견제하는데 성공했다>


바깥이 안정되자 소수림왕은 내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하여 인재를 인재를 기르고 율령을 반포했습니다. 또한 삼국 중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이때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아니었고 이미 민간에 퍼져 있는 불교를 공인해주는 수준이었을 걸로 짐작합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소수림왕은 이 같은 개혁 조치로 고구려 왕권은 매우 견고해져서 이제 귀족을 압도할 수준이 되었습니다.

<귀족들은 이 본좌 앞에서 망언을 할 수 없다!>

내치를 다진 소수림왕 이후 드디어 우리는 그분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다 아시죠? 바로 우리나라의 레전드 아니고 그냥 전설인 깡패. 광개토대왕! 중국, 백제, 왜, 가야, 부여 이놈저놈 가리지 않고 마구 패줍니다. 이때 고구려의 국력은 크게 확장됩니다. 교과서에 있는 지도를 참조해봅시다. ^^

광개토대왕 사후 주변 이웃 나라는 편할줄 알았더니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들인 장수왕은 중국과의 싸움은 멈췄지만 한반도 남쪽에 있는 백제, 신라만을 패야겠다고 결심하고 수도를 과감히 남쪽 평양성으로 천도(427)합니다.
 

<난 무조건 한놈만... 아니 두놈만 패!>

장수왕의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동맹을 맺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나제동맹(433)이고 나중에 결혼동맹으로 까지 발전합니다. 하지만 제가 고구려는 깡패국가라고 했지요? 중국도 막 패던 국가였는데 백제, 신라가 편먹는다고 해서 뭐 어쩔 수 있겠습니까? 가볍게 발려주시고 백제는 급기야 한강유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수도였던 한성이 함락되고 왕이 죽는 참사가 일어납니다. 백제는 부랴부랴 웅진으로 천도(475)했지만 한 동안 고구려의 기침소리에도 놀래야만 했습니다.

믿을 놈 하다 없다!

<고구려의 침략으로 인해 왕을 잃은 백제는 한 동안 쭈구리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침략을 받고 한동안 쭈구리 신세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백제는 서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안구에 습기차던 시절을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하는데요. 무령왕 시절에는 남쪽 중국 왕조와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국제 사회에서 그 위치를 인정받고 22담로를 두어 지방 통치 조직을 정비하였습니다. 백제가 본격적으로 다시 비상하기 시작하는 것은 성왕 시절입니다. 성왕은 그 동안 임시 수도 역할을 하던 웅진에서 넓은 벌판의 부여로 수도를 천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고치고 중앙에 관서를 22부로 재정비하고 불교를 적극 장려했습니다.

국력이 다시 강해진 백제는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슬슬 다시 넘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뭔가 찝찝하지요. 백제 혼자서 고구려를 당해낼 자신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를 치기 위해 신라와 협력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한강 하류 지역은 백제가 한강 상류 지역은 신라가 차지하기로 하늘땅 별땅 약속을 했지요. 하지만...

<여성분들이 제일 믿지 말아야 하는 말이다 ㅠ 백제에게는 신라 믿지?가 여기에 해당된다>

세상에 믿을 놈이 하나도 없습니다. 신라가 아주 상큼하게도 배신을 때려줍니다. 바로 진흥왕은 과감하게 백제와의 약속을 깨고 한강 하류마저 점륭하면서 한강 유역을 다시 신라가 차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신라는 언제 이만큼 힘을 키운걸까요? 우리가 아는 신라는 매우 조그마한 나라로 광개토대왕이 겨우 목숨 구해준 걸로 아는데 그 동안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시골 촌놈이 드디어 성공하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비해 고대국가 발전이 가장 느린 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라는 나라가 동남쪽으로 치우쳐 있을 뿐아니라 그나마도 소백산맥으로 가로 막혀 있어서 외부에 자극을 받아들이기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만큼 족장의 세력이 매우 오래 남아있었습니다. 이런 신라가 본격적으로 나라가 말전하는 것은 지증왕때입니다. 지증왕은 지방 제도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적 국가가 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활발한 정복산업을 벌여 이사부를 시켜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마립간이라 불리던 왕의 칭호도 세련되게 중국식으로 '왕'으로 고쳤습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뉴요커의 트렌드에 따라간거죠.

<울릉도와 독도는 이때부터 우리나라 역사에 편입되었다>

법흥왕 때는 신라는 더욱 발전을 하게 됩니다. 이때 율령이 반포되면서 왕은 다른 귀족보다 더 우월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왕은 귀족회의에 최고 대표자가 되지 않게 됩니다. 이제 귀족회의의 최고 대표자는 상대등이 됩니다. 또한 병부가 설치되면서 통치 체제가 정비되고 우여곡절 끝에 불교가 공인 되면서 신라는 통합의 길로 나아갑니다. 또한 오랜 숙원 산업이던 금관가야를 병합하면서 영토가 더 넓어지게 되지요.

진흥왕 때는 법흥왕 때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앞서 말했던 것처럼 백제와 연합을 하여 한강 상류를 차지한 뒤 백제를 배신하고 한강 하류마저 빼앗는 쾌거를 이룩하게 됩니다.

<이순재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열연했던 진흥왕, 미실에게 독살당할 만큼 허접한 왕은 아니었다>

한강 하류를 빼앗긴 성왕은 정말 화가 났습니다.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건 개로왕이 고구려에게 패배하여 죽은 이후 오랜 숙원 사업이었으니까요. 성왕은 다시 한 번 군사를 모아 쳐들어가지만 안 될놈은 안 된다고 그만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포기하면 편할텐데 안 될놈은 뭘 해도 안 된다, 안습의 성왕>

어쨌든 진흥왕의 정복사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대가야를 정복하여 마침내 가야연맹이 멸망했으며 함경도 지역 일부까지 진출합니다. 원래 잘 나가면 자랑을 하고 싶기 마련이지요? 진흥왕도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인증'을 하기에 이릅니다.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 순수비를 통해서 자시느이 업적을 자랑하고 인증한 것이죠.

<진흥왕이 부릅니다. 나 이런 사람이야!>

신라는 이후 한강 유역을 바탕으로 드디어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인적, 물적 자원을 확충해서 삼국 항쟁에서 주도권을 차지하였습니다.
Posted by Avila
,

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
3) 삼국, 교류와 경쟁 속에서 발전하다
3-1 삼국,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로 성장하다

고대국가? 뭔지 모르겠다구! ㅠㅠ

자 오늘도 한국사를 배워봅시다. 이제 한국사는 본격적으로 삼국시대에 대해 배우게 될텐데요. 그 유명한 배째 실랴고그랴에 대해서 배웁시다!

<아 죄송합니다 ㅠ 구석기 시대 유머를 하다니--; 내가 무리수다!>

흠흠. 자 각설하고 수업을 시작합시다. 먼저 삼국에 대해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이겁니다. '고대 국가'! 그런데 당최 고대국가가 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교과서를 읽어보면 대충 족장이 중앙관리로 편입되서 어쩌구 이렇게 설명이 되는데 이해가 잘 안됩니다. 솔직히 여러분들이 이해하기에는 약간 벅찰 수도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해하지 않으면 또 안 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저랑 같이 좀 더 쉽게 배워봅시다.

단도직입적으로 제가 설명을 먼저 드리면 연맹 왕국은 초등학교 단계, 고대 국가는 중, 고등학교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다구요? 선생님을 족장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은 어디에 계시죠? 주로 교실에서 함께 생활을 하시죠? 교무실이 있고 교장 선생님이 계셔도 초등학교 선생님은 주로 자기가 맡은 반에 머물러 계십니다. 국가에 이 상황을 대입해볼까요? 족장(초등학교 선생님)은 연맹 왕국(초등학교)를 형성하기는 했지만 주로 자신의 지역(교사가 맡은 반)에 주로 머물러 있으며 여전히 자신의 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왕 역시 일개 족장에 불과하므로 다른 족장에게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못하고 왕권은 상대적으로 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왕권이 강해지면 연맹왕국이 고대 국가로 변하게 됩니다. 중, 고등학교 예를 들어볼까요? 선생님들은 이제 대부분 교무실에 계시게 되죠? 담임을 맡은 반이라 하더라도 예전처럼 온종일 그 자신의 반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국가 상황에 대입하면 왕권이 강해져서 족장(중, 고등학교 선생님)은 그 힘을 잃고 자신의 지역(자신이 맡은 반)에서 중앙(교무실)로 오게 됩니다. 이때 더 이상 이들은 족장이라 불리지 못하고 귀족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자 이제 이해가 되시나요?

<초등학교에 연맹왕국(위)을 대입하고 중, 고등학교에 고대국가(아래)를 대입해보자>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점이 드는 것이 있네요. 족장들이 중앙으로 올라오면서 귀족이 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원래 자신들이 다스리던 지역은 이제 누가 다스리게 될까요? 바로 왕의 힘이 드디어 지방까지 침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지방의 조직이 정비되고 동시에 중앙으로 올라온 족장들에게 알맞는 관직을 주기 위해 중앙 관제도 정비됩니다. 따라서 연맹왕국에서 고대국가로 전환하려면 네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왕위세습권을 확보할 것, 두번째는 왕권의 강화로 족장들이 예전에 권한을 상실하고 중앙 귀족으로 편입될 것, 세번째는 족장이 다스리던 지역을 왕의 힘으로 통합하여 지방 조직을 정비할 것, 네번째는 중앙으로 뽑혀온 족장들에게 알맞은 관직을 주기 위해 중앙 관제를 정비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왕의 권한이 강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귀족(이전에 족장)의 힘은 막강해서 국가 운영의 주요 사항을 귀족회의를 통해서 결정하였습니다.

고대 국가, 내가 일등!

이런 고대 국가로 가장 먼저 발전했던 것은 바로 고구려입니다. 고구려는 이전 시간에 말했던 것처럼 활발한 정복 전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왕의 권한이 강해졌습니다. 고구려의 고대국가 기틀을 다진 태조왕은 한 군현을 공략하고 옥저를 공략하면서 왕권을 크게 강화했습니다. 이로 인해 태조왕 때 계루부 고씨에 의한 왕위세습이 확정되었습니다.

<전쟁은 위험 부담이 크긴 하지만 승리시 왕권의 강화를 가져온다>

한편 고국천왕은 부족적 전통을 가진 5부를 행정적 5부로 개편했습니다. 이 말은 잘 이해가 안 되시죠? 이전에 소노부, 계루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 5부가 동, 서, 남, 북, 중의 단순한 방위를 뜻하는 행정적 5부로 바뀌었다는 말인데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해가 안 가긴 마찬가지입니다. -_-; 좀 더 부연 설명을 드리면 부족적 5부(소노부, 계루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였던 시절에는 왕족인 계루부는 물론이고 다른 부들까지 독자적인 관직체계를 가지고 있거나 상당한 군사를 보유하고 있었으니 국가 안에 또 다른 작은 국가가 있는 셈입니다. 이런 것이 고국천왕 시절에 행정적 5부로 개편되면서 국가 안에 작은 국가라는 성격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이해가 되시죠? 왕위 계승도 이 시절에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뀌어 왕권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에게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구려의 역사는 중국과 투쟁의 역사라 말해도 좋을 만큼 중국과의 전쟁이 끊이질 않았는데 3세기에 특히 위기를 맞습니다. 중국의 삼국 중 하나인 위(여러분들이 익히 잘 아시는 삼국지의 그 위나라입니다)의 장수 관구검이 침입하여 큰 위기를 맞았으나 고구려 장수들의 활약으로 겨우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관구검의 침입 경로와 고구려의 대응>

그리고 4세기 초에는 미천왕이 중국 대륙이 5호 16국 시대(삼국을 통일한 진이 8왕의 난으로 분열된 틈을 타 다섯의 유목민들이 중국 대륙을 공격하여 16개의 나라가 명멸한 세운 혼란한 시대)를 맞아 혼란한 틈을 타 낙랑을 공격하여 오랜 숙원이던 한사군현의 완전한 축출을 313년에 달성했습니다.
명당에 자리 잡은 백제

백제는 고구려에 비하면 상당히 짧은 시간 안에 고대 국가 체제를 갖춘 편입니다. 고구려가 고대 국가 체제를 늦게 갖춘 이유를 들자면 한사군과의 투쟁이 4세기까지 지속되고 지속적으로 중국 침입에 시달려온 것이 있습니다. 반면 백제는 한강 유역에 자리 잡아 비교적 빠르게 국가 체제를 갖추어 나갔습니다.

<로또도 명당이 있듯이 백제 역시 자리를 잘 잡았다. 명당은 바로 한강유역!>

한강 유역이라는 비교적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은 백제는 고대 국가로 자리를 잡아 나가면서 남쪽의 나름대로 세력을 보유하고 있던 마한을 대신한 세력으로 자리 잡아 나갔습니다. 3세기에는 고이왕이 활발한 정복활동을 보이면서 왕권을 더욱 다져나갔고 내부적으로 6좌평이라는 관제와 관리 복색을 제정하여 지배체제를 정비하여 고대 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참, 그리고 백제가 고구려와 같은 부여 계통이라는 것은 아시죠? 예전에는 삼국사기 기록에 따라 백제를 건국했던 세력이 고구려계 유이민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고구려, 백제 모두 공통의 분모를 부여 계통으로 생각하고 있는 학설이 나오고 있습니다. 뭐가 되었든 간에 고구려와 백제는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위는 고구려의 돌무지 무덤인 장군총, 아래는 백제의 돌무지 무덤인 석촌동 고분군. 비슷한 양식이다>

가장 발전이 느렸던 신라

이제 삼국 중에서 가장 발전이 느렸던 신라에 대해서 얘기해봅시다. 신라는 상대적으로 한반도 남동쪽에 치우친 바람에 유이민들이 많이 들어오지 않았고 토착세력들이 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신라는 원래 진한의 한 소국이었던 사로국에서 출발하였으며 6부족 연맹체였습니다. 그런데 이 신라라는 나라는 희한한 것이 박, 석, 김씨 세 명의 왕이 돌아가면서 왕을 했습니다.

<왕도 돌아가면서 하자!>

왕을 돌아가면서 하니 그게 어디 왕 같았겠습니까? 그래서 신라에서는 왕을 왕이라 부르지 않고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등으로 불렀습니다. 특히 이사금이라는 뜻은 그 이름의 연원이 옛말에 이(齒)가 많은 사람, 즉 연장자는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한 것에서 유래하였죠. 왕의 칭호를 봐서도 왕권이 다른 국가보다 상당히 '허접'했음을 우리는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왕권이 본격적으로 강해진 것은 4세기 후반 내물왕때입니다. 내물왕은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여서 진한 전역을 장악하고 자신이 가, 간들 중에 가장 으뜸이라는 뜻의 마립간(대군장)을 왕호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때가 되면 박, 석, 김이 돌아가면서 왕을 하던 것이 이제는 오로지 김씨만 혼자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들이 내물왕 혼자 힘으로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르기 대장, 내물왕. 가야, 왜한테 다굴맞자 고구려에게 일러 바친다>

내물왕이 다스리는 신라는 당시 가야, 왜 연합에게 엄청난 다굴을 맞고 당시 동북아의 최강자였던 고구려에게 일러 바칩니다. 당시 고구려는 자신이 주도하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내물왕의 신라를 자신의 휘하로 삼아 고구려가 명실공히 천하의 중심임을 선포하고 싶었습니다. 서로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자 고구려는 가야와 왜의 공격을 쫓아내었고 신라는 이를 이용하여 내부적으로 마립간의 권위를 높였습니다. 대신 한동안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지요.

대단한 초등학생이었던 가야

우리는 보통 이런 말을 많이 듣곤 합니다. 얘는 머리는 좋은 데 공부를 안해서... 그 말에 딱 맞는 국가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가야였습니다. 가야는 낙동강 하류 지역에 자리 잡은 연맹 왕국이었습니다. 비교적이 철이 풍부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지요. 3세기 즈음에는 금관가야가 가야 연맹의 대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를 전기 가야 연맹이라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역에서 생산되는 철을 바탕으로 낙랑과 왜를 연결시키는 중계 무역을 하면서 계속 해서 수준 높은 철기 문화를 발전시킵니다.

<왼쪽은 가야의 철제 갑옷, 오른쪽은 가야 보다 더 늦은 시기의 일본의 철제 갑옷. 가야의 기술력을 알 수 있다>

위에 있는 그림만 봐도 가야가 수준 높은 철기 문화를 향유 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겠지요? 이처럼 가야는 장래가 촉망 받는 국가였으나 신라를 지원하기 위해 내려온 고구려 군대에 패배하면서 쇠락의 길에 빠져듭니다. 전기 가야 연맹이 쇠퇴하자 5세기 후반 부터는 전기 가야 연맹을 대신하여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 연맹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이미 고대 국가의 기틀을 갖춘 백제와 신라 틈바구니 끼어서 성장하지 못하다가 결국 신라에 병합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관복의 색깔에 담겨 있는 이치

삼국이 고대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중앙 관제를 정리하는데 그 중에서 두드러진 특징이 관복의 색깔을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백제는 6품 이상은 자줏빛 옷을 입고 11품 이상은 붉은 옷, 16품 이상은 푸른 옷을 입게 했습니다. 신라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1~5품은 자색, 6~9품은 비색, 10~11품은 청색, 12~17품은 황색을 입게 했습니다. 아마 고구려도 그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왜 구태여 관리의 품계에 따라 색깔을 다르게 넣었을까요? 연맹국가에서 고대국가로 넘어가는 시기와 관련 지어 한 번 잘 생각해보세요. ^^ 정답은 수업 시간에 공개됩니다. 
Posted by Avila
,
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국가
2) 고조선과 여러 나라의 성장
2-2 철기 문화를 기반으로 등장한 여러 나라

익숙하지 않은 나라, 그러나 알고보면 뿌리가 되는 나라

음... 이 단원은 어떤 얘기를 먼저 시작할까 고민을 많이했습니다. 사실 별로 재밌게 얘기를 풀고 나갈만한 실마리가 부족한 단원이여서 ^^; 여러분이 좀 이해를 해주세요.

여러분이랑 제가 나름 세대차이가 나잖아요? ㅠㅠ 그래서 저랑 같은 드라마 봤는지 모르겠네요. 혹시 드라마 주몽아시나요? 드라마 주몽에서 보면 주몽 역할을 맡은 송일국이 어느 나라 왕자로 나오지요? 바로 부여입니다.

<완전 불쌍한 부여 왕자로 나왔던 송일국>

주몽이 나중에 고구려를 세운 건 모두 알고 계시죠? '삼국사기'란 책에 보면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건국설화가 나옵니다. 뭐 한나라의 건국설화답게 온갖 뻥(-_-;;)이 난무합니다. 그런 건국설화를 제가 일일이 얘기하기는 힘들고 다만 주목할만한 대목이 한 군데 있는데 그것은 주몽이 부여의 왕자였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버뜨!!! 백제 역시 부여의 일족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책인 '주서'라는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백제는 그 선대가 대개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이다. (중략) 왕의 성은 부여씨이고 '어라하'라고 부르며, 백성들은 왕을 '건길지'라고 부르는데, 모두 왕이라는 뜻이다." 
                                                                                                                        『주서』권49 열전 제41

백제가 부여의 별종이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백제가 부여의 한 갈래라는 말입니다. 또한 왕의 성이 부여씨라는 것을 보면 백제가 부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실들을 볼 때 한국 고대사의 중심 국가였던 고구려, 백제 모두 부여의 일족으로 자처한 것을 보면 부여가 우리나라 역사에 매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아는게 거의 없다고 말하는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자료가 없기 때문이죠

<부여에 관한 자료? 그런거 없다>

부여에 관한 기록은 중국 역사책에 남아있는 단편적인 몇 줄의 기록이 전부입니다. 우리는 그 기록을 보고 부여의 모습을 추측할 수 밖에 없습니다.

힘이 약한 왕?

자 그럼 부여의 모습을 그려볼까요? 선생님은 먼저 교과서에 나와 있는 '흉년은 왕의 책임?'이라는 설명이 재밌네요. 우리가 흔히 아는 왕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보통 우리가 그리는 왕의 모습은 대략 다음과 같지 않을까요?

<꽃돌이로 친위대를 만들거나...>

<맘에 안들면 사약 크리!>

하지만 교과서에 설명을 보면 흉년 들었다고 왕을 죽이자고 하네요? 이거 어떻게 된거죠? 조선시대 때는 왕의 명령이라면 사약도 벌컥벌컥 마시고 부족하면 한잔 더달라고 하던 그런 모습이 아니네요? ;; 오히려 왕을 죽이려고 하다니! 이것은 이 당시에 왕의 힘이 그다지 강하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증거입니다. 왜 왕의 힘은 강하지 않았을까요?

사정은 이렇습니다. 비교적 근처에 있으면서 비슷한 풍습을 가지고 있는 부족들끼리 외부에 거대한 침입에 맞서서 같이 대항하자는 약속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서로 협력을 하자고 약속한 부족들 간에 일종의 연맹체가 생기는 거죠. 이것을 연맹왕국이라합니다. 이들은 연맹의 대표를 선출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연맹왕국의 왕입니다. 이 연맹왕국의 왕은 이 연맹을 구성하는 부족에서 상대적으로 힘이 강한 부족의 족장이 맡게 됩니다. 그렇다면 왕의 힘은 절대적으로 강할까요? 아니겠지요? 왕은 그 왕국의 대표자일뿐 다른 족장들 역시 왕에 못지 않은 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잘 이해가 안 된다고요? 예를 들어보죠 ^^

<반장은 반을 대표할 뿐 다른 학생들을 지배하지 않는다>

여러분 반에서 각자 학급임원을 뽑았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뽑힌 반장, 부반장이 여러분보다 막대한 힘을 가지고 여러분을 지배하려 하나요? 그건 아니죠? ^^ 반장 역시 여러분과 똑같은 학생 중 한명입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반을 대표하여 여러가지 다른 일을 수행한다는 점이죠. 이 시기 연맹왕국의 왕도 학급의 반장처럼 다른 여러 부족을 대표하여 왕의 되었을 뿐이지 그 세력은 그 다지 강하지 않았답니다.

이제 이해가 되시죠? 부여 얘기로 다시 돌아오면 부여도 일종의 연맹왕국이었습니다. 부여는 왕 아래에 마가, 우가, 저가, 구가라는 관리가 있었는데 이를 사출도라고 합니다. 부여는 이 마가, 우가, 저가, 구가가 이끄는 네 개의 큰 부족과 부여의 왕으로 대표되는 부족이 연맹하여 만들어진 연맹왕국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총 5개의 부족 연맹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게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가(加), 간(干) 따위의 말이 으뜸, 수장, 군장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미 친숙한 표현입니다. 잘 모르겠다고요? 징기스칸을 들어봤잖아요. 칸, 간, 가 따위의 말이 모두 으뜸, 수장이라는 말이랍니다. 여하튼 이들 '가'들은 왕을 선출하기도 하고 왕에게 흉년의 책임을 묻는 등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입니다.

참 마지막 한 가지 더! 부여에 참 끔찍한 풍속이 하나 있어요. 혹시 순장이라고 아시나요? 왕이 죽으면 왕이 가지고 있던 물건과 함께 산 사람들을 같이 묻는 풍속인데 비단 부여에서만 나타났던 것은 아니고 고대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풍속이랍니다.

깡패국가, 고구려


한국 고대사 얘기를 하면 빠지지 않는 나라가 바로 고구려입니다. 한국인들 모두 고구려에 대해 막연한 향수를 가지고 있으며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요. 대한민국의 영어식 표현인 'Korea'가 고구려에서 나온 것임을 감안한다면 고구려가 한국사에 끼치고 있는 영향이 매우 지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고구려가 깡패 국가였다는 믿어지시나요? 

<나 고구려야 몰라? 내가 왕년에 껌 좀 씹고 침 좀 뱉었거든?>

왜 고구려가 깡패국가일까요? 아 이거 또 선생이라는 사람이 아무런 증거 없이 애먼 나라(?) 비난하는 거냐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제가 없는 말 지어내겠습니까? 고구려에 삥뜯기에 관해서는 분명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기록을 볼까요?

"나라가 작고 큰 나라 사이에서 핍박받더니 마침내 (고)구려에 신속하였다. (고)구려는 다시 그 중에서 대인을 사자로 삼아 서로 맡아 주관토록 하고 또 대가로 하여금 세금을 통틀어 책임지게 하니 맥포와 물고기, 소금, 바다 속 식물을 천리에서 짊어 메고 이르렀다. 또 미녀를 보내 비첩으로 삼게 하였는데 노복과 같은 것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중 옥저에 관한 내용

어이쿠, 이거 기록을 보니 각종 산물을 바치는 것도 모자라 미녀까지 바치네요? 이쯤되면 한 가지 단어가 떠오릅니다. 그건 바로...

<빠, 빵셔틀 -_-??>

그렇다. 옥저는 바로 빵셔틀이었던 것! 옥저 근처에 있던 동예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어요. 결국 옥저, 동예는 두 국가는 고구려의 강력한 압박과 수탈로 인해 연맹왕국 단계에도 가보지도 못하고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슬픈 얘기네요. ㅠㅠ 자, 이제 이쯤 되면 고구려가 깡패국가라는 것에 대해서 다들 동의하시죠?

그렇다면 고구려는 왜 이렇게 주변 나라의 삥이나 뜻으면서 못된 짓을 했던 걸까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먹을 것이 없었다는 것!

<배고픈데 먹을 것 따윈 없다-_-;>

고구려가 자리 잡은 지역은 넓은 들이 없는 산악 지대였고 이들은 농사를 지어도 먹을 게 부족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주변 국가를 정복, 약탈하게 됩니다. 나름 사연이 다 있지요?

그렇다면 좀 더 고구려의 모습을 살펴볼까요? 고구려도 부여처럼 5부족이 연맹한 연맹국가였습니다. 5부족은 소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계루부로 왕을 배출하던 부는 계루부였습니다. 고구려도 부여처럼 상가, 고추가등과 같은 가(加)들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중대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諸加:모두 제, 더할 가)회의를 열어 그 사람을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노비로 삼았다고 하네요. 고구려 역시 '가'의 힘이 매우 강해보이죠?

훈훈한 시골 마을, 옥저와 동예

앞에서도 잠깐 옥저와 동예 얘기가 나왔지만 이 두 나라는 훈훈한 시골 마을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들어요. 옥저와 동예는 함경도와 강원도의 북부 동해안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서 토지는 비옥하고 많은 특산품이 나서 생활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왕이 없었고 각 마을마다 읍군, 삼로라고 불리는 군장이 있었다는 점도 시골 마을을 보는 느낌이지요.

<평화롭고 아름다운 호빗마을. 아니 그런 곳과 비슷한 옥저와 동예!>

또한 시골에서는 전통이 다른 곳보다 강하게 남아 있듯이 옥저와 동예에도 신석기 시대 전통이 남아있습니다. 신석기 시대 공동체적인 풍습을 반영하듯이 옥저에서는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했다가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 무덤에 안치시키는 골장제(骨葬制: 뼈 골, 매장할 장, 법도 제)라는 풍습이 있었고 동예는 씨족 사회의 전통이 남아 족외혼을 엄격히 지켰으며 서로의 영역을 지키고 만약 그 영역을 침범했을 경우 책화(禍: 꾸짖을 책, 재앙 화)하여 노비나 소, 말로 배상하게 하였습니다.

신비함이 있는 곳, 삼한

여러 초기 국가들 중에 이제 삼한이 남았네요. 삼한의 실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많습니다. 가장 먼저 발견되는 기록을 보면 삼한의 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한반도 남부에 있던 진(辰)이라는 국가입니다. 이전 시간에 고조선의 성장과 멸망을 다루면서 고조선이 한(漢)과 이 진(辰)이라는 나라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시도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죠? 바로 그 진입니다. 다만 이 진이라는 나라가 정말 실체가 있었느냐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

어쩄든 이 진을 바탕으로 마한, 진한, 변한의 연맹체가 등장합니다. 이 중에서 가장 세력이 강했던 것이 마한! 마한은 총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국가인 목지국은 마한왕 혹은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를 주도해나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낙동강 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한 변한이 있었고 대구와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진한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 12개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자, 재미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볼까요? 삼한에는 정치적 지배자인 신지, 읍차라는 사람이 존재했는데 이런 정치적 지배자 외에도 종교적 지도자였던 천군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이게 뭐가 흥미로운거야 라고 하실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조금만 더 들어봐요. 흥미로울 테니 ㅋ 종교적 지배자는 신성한 지역인 소도라는 곳을 다스렸는데 만약 죄인이 이곳으로 도망와서 숨는다면? 그 누구도 소도에 숨어든 죄인을 잡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87년 6월 항쟁당시 명동성당도 소도와 같은 곳이었다>

한참 뒤에 배우겠지만 한국 현대사에도 소도 같은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명동성당이었습니다. 명동성당에 숨어든 시위자들을 공권력을 동원해서 잡아들일 수 없었지요. 그만큼 이곳은 바깥 세상과는 다르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삼한 사회가 제정(政:제사 제, 정치 정) 분리 사회라는 것 입니다. 이제 더 이상 종교적 지배자가 정치적 힘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이외에도 삼한에 특이할만 점은 바로 벼농사입니다. 일찍부터 벼농사가 발달한 이 지역에서는 저수지 유적이 발견되어 김제 벽골제, 제천 의림지 등 많은 저수지 유적들이 있습니다. 또한 변한 지역에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이것을 화폐처럼 사용하기도 했고 낙랑과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어요.

<김제 벽골제의 제방(위)와 덩이쇠(아래)>

하늘에 제사를 드리자! 

다 끝난 줄 알았죠? ㅎㅎ 아직 두 가지 더 남았습니다. 제가 설명 안 하고 넘어간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행사와 특이한 결혼 풍습이 그것입니다. 초기 국가들의 기록에 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제천행사인데 부여는 12월에 영고, 고구려는 10월에 동맹, 동예는 10월에 무천, 삼한은 5월에 수릿날과 10월에 계절제가 있습니다. 사실 이 같은 풍습은 지금도 내려오고 있습니다. 추석과 설날이 일종의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행위라고 할 수 있지요.

<아직도 지내는 제사가 제천행사의 일종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나라들은 왜 공통적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냈을까요? 우리의 명절 때 모습을 잘 생각해봅시다. 모든 가족들이 일단 큰 집으로 모입니다. 그러면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여러 친척들을 보고 우리가 가족이라는 느낌을 받겠죠? 옛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천행사를 통해 여러 부족들을 모으게되고 그 결과 단결과 결속을 강화가 됩니다. 이런 큰 행사를 통해서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죠. 농사가 잘 되는 것을 비는 것은 당연한 것이구요 ^^

특이한 결혼 형태

<결혼! 설레는 분들 많이 계시죠?>

결혼, 저도 아직 안했는데 이 단어 들으면 막연한 환상이 떠오르기도 하고 설레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구려와 옥저에는 조금 특이한 형태의 결혼제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서옥제와 민며느리제입니다. 고구려의 서옥제는 남자가 혼인을 한 뒤 일정 기간 신부 집 뒤에 서옥이라는 조그마한 집을 짓고 살다가 자식이 태어나 다 크게 되면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남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혼인 풍속입니다. 옥저의 민며느리제는 서옥제와는 반대로 여자 나이가 10살쯤 되면 혼인을 약속하고 신랑 집에서 여자를 맞이하여 다 클때까지 길러 아내로 삼는 것입니다. 여자가 어른이 되면 친정으로 되돌려 보내는데 이때 친정에서는 돈을 요구합니다. 요구한 돈을 지불하면 여자는 다시 신랑 집으로 돌아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많이 이상하지요? 왜 이 같은 결혼 제도가 나타났는지에 대해 고대사회의 특징과 관련해서 한 번 곰곰히 생각해볼까요? 오늘의 문제이고 수업 시간에 정답을 공개됩니다!
Posted by Avila
,


  안녕하세요? ^^ 이곳에 올리는 수업자료는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과 거의 비슷하게 올라갑니다. 다른 성격의 자료들은 다른 게시판에 올릴 겁니다. 어쨌든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겠지요? 바로 수업에 들어가봅시다.

  여러분, 역사 하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전 정말 역사를 좋아해서 평생 이 과목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 먹어 대학교에서 4년 내내 열심히 배웠습니다. 정말 재미도 있었구요. 이런 저를 보고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진 않겠죠? ㅠㅠ>

 

  아마 대다수 학생들은 역사가 암기과목이다, 따분하고 지루하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제가 너무 지레 짐작했나요? ^^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역사 선택 비율이 해마다 떨어지고 있는 것이 그 증거기도 하죠.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한국사 선택비율, 여러분의 잘못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역사 과목에 흥미를 못 느끼는 건 이것이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아닐까요? 솔직히 1884년 갑신정변 일어나고 1894년 갑오개혁 일어나고 그 다음에 어쩌구 하는 알 수 없는 연도들로 채워진 역사 과목이 여러분의 흥미를 더욱 떨어트린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섭니다. 사실 역사라는 과목은 우리의 삶이에요. 왜 그런지 보실까요?

<최근 김수현이 열연한 별에서 온 그대> 

  이 인간이 역사 얘기 하는데 왜 뜬금 없이 별에서 온 그대 얘기를 하는 지 궁금하시죠? 별건 아닙니다. 제가 김수현 대학 선배라서요. 후훗. 죄송합니다-_-;; 사실 김수현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별에서 온 그대는 잘 알죠. 별에서 온 그대는 외계인이라는 다소 황당한 소재를 가지고 드라마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죠. 왜 일까요? 그것은 여러분이 500년을 넘나든 인물인 도민준에게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드라마를 보면서 500년이라는 시간의 장벽을 느꼈나요? 그렇지 않았죠? 그것은 우리가 과거의 인물에게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는 뜻이고 다시 말하면 과거의 사람이나 지금의 사람이나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즉, 사람 사는 건 거기서 거기라는 얘기, 우리들의 인생이 바로 시간이 지나면 역사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자, 이제 역사 해볼만한가요? 본격적으로 수업에 들어가봅시다.


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국가의 발전
1 선사 문화와 한민족의 기원
주제 1 선사 문화의 발전

선사시대, 문자가 없다네!

  먼저 알아볼 시대는 선사(先史: 먼저 선, 역사 사)시대입니다. 여러분 선사는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일까요? 먼저 선(先), 역사 사(史). 선사라는 말은 역사 앞에 선행한 시대를 얘기합니다. 역사란 과거에 지나간 시간을 얘기하는데 그 보다 더 과거가 있다니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럼 선생님이 예를 들어 볼게요. 여러분 역사, 사실을 어디서 배우나요? 책에서 배우죠?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고 한국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책에서 배웁니다. 이 책은 역사학자들이 옛날 '문자 기록'을 보고 다듬어서 다시 엮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사라는 것은 곧 문자가 있어야 기록되고 그것을 통해 옛날 일을 알 수 있다는 뜻이 되네요. 하지만 만약 문자가 없다면? 옛날일을 알수 없게 되죠. 즉, 역사라는 것이 존재하기 힘들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시대를 역사 이전의 역사라는 의미에서 선사시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기록이 없는 이 시대의 이야기를 어떻게 우린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수업을 하다가 쓰러졌다고 생각해봅시다 ㅠㅠ>


 

  제가 수업하다가 쓰러져서 묻혔다고 생각해봅시다. ㅠㅠ 그게 200년 후에 누군가에 의해서 발굴되었어요. 제 주변에 뭐가 많이 묻혀있을까요? 네, 바로 분필이죠. 사람들은 200년 전 분필이라는 물건이 어떤 용도로 어디에서 많이 쓰였고 어떤 사람들이 많이 썼는지를 분석할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뭐하는 사람인지도 금방 알 수 있겠지요? 이처럼 선사시대 때는 문자 기록이 없으므로 절대적으로 과거에 사용했던 물건(유물)에 비추어서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유추할 수 있는 겁니다.

돌로 만든 도구로 그 시대상을 알아보다.

  그럼 선사시대에 많이 나온 유물은 무엇이 있을까요? 바로 돌로 만든 도구들입니다. 한자로 석기(石器: 돌 석, 그릇 기)라고 부르는거에요. 이 석기의 형태를 보고 좀 오래되고 투박한 형태들을 구석기 시대 것으로 약간 세련되고 갈아만든 형태의 것을 신석기 시대 것으로 분류한답니다.

<구석기 시대의 뗀석기>

<신석기 시대의 간석기>

뗀석기로 사냥하고 불을 써 동물을 쫓다

  구석기 시대의 시대상을 알아볼까요? 우리나라의 구석기는 약 70만년 전에 시작되었어요.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게 된 경위가 우여곡절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은 일제시대때 발견했는데 당시 자신들 나라에 구석기 유적이 발견 안되는데 식민지인 조선에서 구석기 유적이 나오자 일본은 열이 받았습니다-_-! 그래서 그 유적을 고대로 다시 묻어버리죠;; 그래서 한동안 잊혀졌다가 해방 이후에 다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됩니다. 사설이 길었네요. 본격적으로 구석기 시대상을 볼까요? 여러분들은 영상을 더 좋아할 것 같아서 영상을 준비했습니다. 영화 '불을 찾아서'의 영상입니다.


<불을 쓰는 구석기인>


<도구를 제작하는 구석기인>

  영화를 보면 구석기인들의 생활상을 조금 엿 볼수 있습니다. 구석기인들은 불을 사용해서 동물과 추위에 맞서 싸웠고 또한 돌을 사용해서 여러가지 도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특히 구석기인들이 자주 사용했던 도구는 뗀석기라 불리는 것입니다. 뗀석기는 돌끼리 부딪혀서 떨어져 나간 파편의 날카로운 부분을 다듬어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제작방법과 쓰임새는 다음과 같아요.

<뗀석기 제작법>

<뗀석기의 쓰임새>

  사실 위에 있는 다양한 구석기가 처음부터 다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찍개, 주먹도끼와 같이 단순한 도구가 만드러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다양한 석기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뗀석기 하나 가지고 다양한 작업에 모두 사용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뗀석기 하나 당 오직 하나의 용도로만 사용하게 됩니다. 후기로 가면 슴베찌르개와 같이 아주 작고 정교한 석기들도 나오는데 이러한 작은 석기의 출현은 기존의 대형동물을 사냥하던 시대에서 점차 토끼와 같은 소형동물이 많아지면서 석기도 같이 작아진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씁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구석기인들은 뗀석기를 사용하기도 하고 불을 사용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동물과는 구별되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문자는 없지만 언어를 사용했다는 점이 또 동물하고는 다른 점이었어요. 언어를 사용하면 자연히 서로 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했겠지요? 그래서 말을 통해 선대에서 겪었던 경험이나 문화 같은 것은 전달 할 수 있었다고 생각이 되어지네요.

  그렇다면 구석기인들은 먹고사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구석기인들은 농사를 짓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주로 열매를 따먹는 채집을 하거나 동물을 사냥하면서 먹고 살았죠. 그렇다면 열매가 떨어지거나 사냥을 할 동물이 없어지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요. 이동을 했습니다. 

<엄마 찾아 아니 먹이 찾아 삼만리!>

  이동생활을 했기 때문에 집을 공들여 지을 필요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동굴에서 생활을 하거나 아니면 간단하게나마 막집이라는 것을 지었습니다. 막집이라는 이름만 봐도 집에 별로 공을 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

  구석기인들의 생활을 알아보았는데 구석기인들이 미개하다고 느껴지시나요? 그렇다면 입장을 바꿔서 1000년 후 사람들이 지금 우리 시대를 보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들도 우리를 미개하다고 여기지 않을까요?

<누군가 여러분을 업신여기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기분 나쁘지 않나? ^^;;>

  그래서 역사는 그 시대 상황을 생각해야해요. 구석기인들은 그 시대 상황에 맞게 나름대로 환경에 적응한 거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지금의 환경에 적응한거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그들도 우리와 다를바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죠.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사랑도 하고 감정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사람이거든요 ^^

  감정을 느낀 사람들이였느니까 당연히 그 감정을 표현했겠죠?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느낀 감정을 표현한 물건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요 예를 들어 물고기를 새긴 조각이나 사람 얼굴을 새긴 사슴뼈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제작한 확실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마음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네요.

<물고기를 새긴 조각,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어떤 감정으로 이런 조각을 남겼을까요?>


토기가 제작되고 농사가 시작되다

  이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봅시다. 우리나라의 신석기는 기원전 8000년경 부터 시작되요. 여러분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면 놀랄만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뭘까요? 농사요? 물론 농사 짓는 것은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지요. 그래서 신석기 혁명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농사가 시작된 것보다 더 빨리 나타난 변화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토기의 출현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응 왜 갑자기 사랑과 영혼??>

  음, 이 영화 아시는 분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마 모르실텐데 ^^;; 도자기 빚는 신으로 유명한 바로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인데요. 특히 이 장면이 명장면이죠. 도자기는 토기라고 할 수도 있는데 토기를 만든다는 말은 비로소 인간다운 삶에 가까워졌다는 뜻도 되요. 흙을 빚고 굽는 것은 굉장히 까다로운 작업인데 이제 그런 작업을 수행하고 거기에 음식을 담아 먹을 수도 있게 되었으니 놀랍지 않습니까? 갑자기 도자기 빗는 장면이 새삼 다르게 보이나요? 아니면 말구요 ㅠㅠ;

<바닥이 뾰족하고 표면에 빗살무늬가 있는 것이 우리나라 신석기를 대표하는 빗살무늬 토기입니다>

  토기의 출현과 더불어 또 한가지 중요한 변화는 농경의 시작입니다. 농경의 시작은 어떤 변화를 가져다 주었을까요? 농사를 짓게 되면 어떤 변화가 올지 한 번 생각해봅시다. 씨를 뿌렸습니다. 그 씨가 자라서 열매가 맺겠지요? 그 동안 사람이 옆에서 계속 돌봐주어야 하겠지요? 얼라리 그러면 옆에 계속 있어야겠네요. 맞습니다. 농경의 시작과 더불어 인간은 드디어 정착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움집이라는 집도 짓게 되는 것이죠. 자세히 보시고 싶다면 서울 암사동에 유적지가 있으니 거기로 가보는 것도 좋아요 ^^


<암사동 선사유적지 움집>

  하지만 농경이 시작되었음에도 식량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아요. 왜일까요? 아직까지는 농업기술이 지금처럼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생산량이 적기 때문에 농사만 짓고는 살 수 없었어요.

 

<생산량이 적어서 현기증이 나잖아요! ㅠㅠ>

   네 맞아요. 아직 생산량이 적어 배가 고파 현기즈이 나요. ㅠㅠ 그렇기 때문에 신석기 시대에도 여전히 사냥과 채집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신석기 시대 들어 또 한가지 중요한 활동은 바로 물고기잡이에요. 어로(漁撈: 고기잡을 어, 잡을 로)라고도 표현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이 시기에 낚시바늘 따위가 많이 출토되요. 자연히 주거 지역도 강가나 바닷가에 많이 형성됩니다.
 

<신석기 시대 낚시 바늘>


  먹을 것이 충분치 않았으니 남는 식량도 없었겠지요? 남는 식량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날 그 날 생산한 식량을 나누겠죠? 이때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게 식량을 분배받습니다. 각자 맡은 바 일을 모두 충실하게 수행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사회였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였지요. 따라서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계급 같은 것이 출현하지 않았지요. 족장은 있지만 족장은 대개 나이 많은 사람이자 존경 받는 사람이지 큰 권력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신석기인들은 평등한 공동체를 형성해 나갔습니다.

  신석기인들이 살던 공동체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혈연을 바탕으로한 공동체, 유식한 말로 씨족이라 하는데 이 씨족은 언니, 누나, 아들, 딸, 삼촌, 이모 등등 자기 가족들 끼리 모여살았지요. 하지만 같은 가족끼리만 보여살면 어떻게 될까요? 너무 자기 가족 밖에 모르겠죠? 바깥하고 교류할 기회가 줄어드는 거에요. 그래서 이 시기에는 결혼만큼은 씨족 내부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씨족 밖에서 하는 것이 원칙이 되었습니다. 이를 족외혼(族外婚: 겨레 족, 바깥 외, 혼인할 혼)이라 합니다.  이 족외혼을 통해 씨족은 단위가 더 커져서 부족이 되지요. 아마 이런 형태로 바깥하고 교류하지 않았을까 역사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어요. ^^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신석기 시대는 구석기 시대에 비해 다양한 활동이 많이 추가가 되었지요? 이런 다양한 활동들은 모두 자연에 기반한 것이었어요. 그래서 자연에 대한 관심이 구석기 시대보다 많이 높아졌어요. 농사를 짓다보니 비는 왜 내릴까? 천둥은 왜 칠까 궁금해진거죠. 그래서 어떤 대단한 존재가 그것을 움직이나 보다라고 생각을 하게되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크게 세 가지 형태의 믿음이 있었는데요. 태양이나 물과 같은 자연물이나 자연 현상에 정령이 있다고 믿는 행위를 애니미즘이라고 합니다. 비슷한 형태의 신앙이 지금에도 내려오고 있어요. 혹시 등산을 가게 되거나 시골에 내려가게 되면 뭐 엄청 커다란 바위라든가 오래된 나무 따위가 신령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사람들이 소원을 비는 형태 있지요? 그런 것도 모두 애니미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을 중개해주는 역할인 무당과 무당이 쓰는 주술을 믿는 형태가 있어요. 이것이 바로 샤머니즘으로 지금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요? 곳곳에 아직 죽은 사람과 접신(?)하는 많은 무속인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동물이나 식물을 부족의 수호신인 상징으로 섬기는 형태입니다. 이런 것을 토테미즘이라고 해요. 단군신화에도 이런 모습이 보여요. 현대에도 이런 모습이 간혹있지요. 혹시 야구 좋아하시나요? 저는 삼성 라이온즈의 팬인데요 ^^ 삼성 라이온즈 하면 팀의 상징이 사자지요. 삼성이라는 프로야구팀을 하나의 부족으로 생각한다면 삼성 부족의 상징은 바로 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이런 종교 형태가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에게 유물이 있습니다! 이 시기에 종교적 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어요.

<중앙에 조개가면, 조개 가면 양 옆에는 뼈치레걸이(몸에 하는 장신구 따위입니다. 팔찌나 귀걸이 같은 거죠)  아래 있는 건 낚시 도구에요. 낚시도구는 종교하고는 관련 없습니다 ^^;>


  출토된 유물 중 역사학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바로 조개가면과 팔찌입니다. 이 조개가면은 주술적 성격이 강하지 않았나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구석기와 신석기 주거지역의 차이?

자 여러분 모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수고하셨구요 ^^ 끝으로 문제를 하나 낼까 합니다. 자 먼저 지도를 보시죠.

<구석기 유적지 분포>

<신석기 유적지 분포>


  다음은 서로 다른 두 시기의 유적지 분포입니다. 이 지도를 보고 구석기 시대의 주거지와 신석기 시대의 주거지가 어떻게 달랐을지 유추해볼 수 있을까요? 정답은 이 다음줄을 드래그로 긁으면 짠하고 나옵니다!

  정답 : 거주지가 구석기 시대는 내륙 지방인 반면 신석기는 주로 해안지역이나 강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신석기 시대에 물고기 잡이 활동이 매우 중요해졌음을 의미합니다.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수업자료이기 때문에 틀린 부분이 있으면 댓글로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태클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

  이 글은 2011년도에 작성되어 교육과정에 의해 2014년도에 수정되었습니다. 수정된 내용은 구석기 석기 변화 파트, 예술작품 추가, 홍산문화 삭제 및 이미지 교체입니다. 교육과정이 바뀌면서 홍산문화가 삭제되었는데 이전 글을 지우기는 아까워 뒤에 붙였습니다.  

---------------------------------------------------------------------------------------------------

신기한 선사 문화, 홍산문화(교육과정 바뀌면서 제외됨)

끝으로 책에 나와 있는 홍산 문화 얘기를 해야겠네요. 홍산문화는 여러분이 처음 접하는 것이고 아마 생소할 겁니다 ^^ 일단 위치부터 보실까요?

<대릉하라고 표시된 곳이 보이시죠? 저쪽이 홍산문화입니다.>

홍산문화는 지금으로부터 약 3500~3000년전의 문명이에요. 이 유적에서 재밌는 유적들이 많이 발굴되었습니다. 출토된 유물들의 사진은 이 블로그(http://blog.naver.com/paxzim?Redirect=Log&logNo=70068116492)에 가시면 볼 수 있어요. 이 문명이 주목 받는 것은 중국의 황하 문명의 할아버지뻘 되는 양사오 문화보다 연대가 앞섰다는 겁니다. 그리고 중국 문화와도 구별 되는 것들이 많았죠. 한때는 고조선 성립의 배경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속단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아요. 우리나라 유물과도 다른 계통이 유물이 많이 존재해요 ^^; 따라서 이 문화가 중국의 것이나 우리나라의 것이다라고 확정지어 말할 수 없지요. 다만 확실한 것은 중국의 문화든 우리나라 문화든 이 문화와 연관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Posted by Avil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