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남북으로 나뉘어 발전하다
4-2 발해의 건국과 발전
고구려 옛 땅에서 고구려의 뜻을 이은 나라가 일어나다
오늘은 발해의 역사를 배워볼 차례네요. 발해의 역사는 현재 중국, 러시아, 한국 이 세 나라가 서로 자기의 역사라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관련된 영상 하나를 잠깐 보죠.
<한국의 입장에서 본 발해사>
위의 동영상은 한국의 입장에서 발해를 바라본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죠? 하지만 이 주장의 한 가지 헛점이 있는데 고구려마저 중국사라고 주장하면 다시 고구려사를 한국사라고 주장해야 되는 맹점이 있습니다. 실제 여러분의 예상대로 중국은 발해사에 이어 고구려사 마저 자국사로 귀속시키려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결국 계속 합의점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실제 존재했던 역사들이 왜곡될 위험이 있습니다.
사실 과거의 역사를 현대 어떤 나라의 역사에 귀속시킨다는 것은 참 웃긴 일입니다. 과거에 존재했던 나라들이 현대의 나라와 얼마나 연관이 있고 우리가 자신들의 후손이라는 걸 알 수 있을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고구려인의 역사는 고구려인에게 돌려주자는 것입니다. 발해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소모적인 역사 점유 논쟁만 계속되면 훌륭했던 이 두 나라의 역사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참 슬픈일이죠. 정치적 입장 때문에 두 나라의 역사를 없애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발해의 역사는 어떤 모습일까요? 확실한 것은 발해는 고구려 옛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의 정신을 이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점입니다.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은 구당서에 따르면 고(구)려 별종으로 나오고 신당서에 따르면 속말말갈이 나옵니다. 하지만 대조영의 출신이 어떻든 간에 그는 고구려 사람으로 살았음은 분명하고 고구려를 계승하려 했음은 지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일본에 보낸 국서에도 발해의 왕은 고(구)려국왕으로 칭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제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네요. 발해는 고구려 뒤를 이은 나라이며 고구려의 정신을 간직한 사람들이 살았다고 말입니다.
발전하는 발해
발해는 건국 과정에서 당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면서 일어섰기 때문에 당과의 관계가 불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고구려를 멸망시킨는데 한 몫을 했던 신라와도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었지요. 발해는 주변이 적으로 둘러 쌓인 상황에서 무력으로 그 영역을 확장시켜 나갑니다. 특히 무왕 때는 흑수 말갈을 제압하고 과감하게 수군을 동원하여 당나라의 산둥 지방을 공격했습니다. 이쯤되면 뭔가 이미지가 떠오르죠?
네, 깡패국가였던 고구려의 정신을 발해가 확실히 계승하고 있는 것이 보이죠? ㅋㅋ 하지만 언제까지 깡패로 살 수는 없는 법. 문왕 때는 과감히 손을 씻기로 결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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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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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하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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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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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서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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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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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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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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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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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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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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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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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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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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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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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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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
발해의 3성 6부는 당나라의 3성 6부와 다르게 실무기관이었던 정당성에 그 권력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당성 아래의 6부 역시 둘로 나누어 충, 인, 의는 좌사정에 속하고 지, 예, 신은 우사정에 속했던 것도 특이했던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왕 때 신라와의 친선 관계도 도모하여 사신을 교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라와의 관계는 발해 역사 내내 별로 좋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조금 더 다루어 보죠 ^^
발해는 9세기 초 선왕 때 들어가면 전성기를 맞는데 이때 신라와도 직접 국경을 맞대었으며 지방행정 구역도 5경 15부 62주로 정리가 됩니다.
이렇게 발전을 거듭하는 발해를 보고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이 동아시아에서 장안 다음 가는 큰 도시라였던 걸 봐서는 발해의 국력이 어느 정도 인지 가늠할 수 있겠지요?
또한 발해는 오랜기간 동안 연호를 썼던 국가로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으며 비록 발해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왕으로 책봉 받기는 했으나 내부적으로 황제국가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외왕내제(外王內帝:바깥 외, 임금 왕, 안 내, 임금 제) 체제라 합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천손이라 칭하는 것을 보아서는 발해인들 스스로 큰 자부심을 가졌던 것이 여실히 보입니다.
발해의 멸망, 그러나 그들의 문화는 남았다
이렇게 잘 나가던 발해도 10세기 초에 거란에 의해 멸망 당하고 맙니다. 발해 멸망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는데 백두산 화산 폭발설, 귀족들 내분설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설득력을 얻고 있지 못합니다.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를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은 약 200년간이나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어느 운동 하나 성공하지 못하고 발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발해가 향유했던 문화는 아직 까지 남아 있습니다. 특히 지배층의 문화였던 고구려 문화에 당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피지배층이 대부분 말갈족이었기 때문에 말갈 문화 요소도 뒤섞여 발해는 다분히 다문화적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4) 남북국으로 나뉘어 발전하다
4-3 남북국, 활발한 국제 교규를 통해 발전하다
남북국, 활발한 교류를 통해 국제 사회에 존재감을 알리다
남북국 시대에 남국이었던 신라, 북국이었던 발해는 활발한 교류를 전개했습니다. 특히 신라는 통일 이후 안정을 누리면서 당과의 교류를 다져나갔습니다. 어느 정도였나면 당과 자주 왕래하던 산둥 반도 지역에 신라 마을인 신라방과 신라촌이 세워졌으며 신라소라는 관청, 신라원이라는 절까지 세워졌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왕래가 자주 있었는지 짐작할만 합니다.
이제 퀴즈를 한 번 풀어보지요. 고대 시절에도 교역이 활성했다는 것을 앞선 수업 시간에 배웠겠지요? 하지만 교역이 활발하다고 해서 그것이 현대의 교역과 같을까요? 고대의 교역과 현대의 교역은 어떤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을 계급사회가 같는 특징과 결부시켜서 해석해봅시다. 정답은 수업시간에 공개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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