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정치의 이상을 꽃피운 조선(국제 관계의 안정 속에서 실리를 취하다, 동아시아 정세 변화로 왜란과 호란이 일어나다)
과거 안에서(고등학교 한국사)/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2011. 3. 22. 09:52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2) 유교 정치의 이상을 꽃피운 조선
2-4 국제 관계의 안정 속에서 실리를 취하다
2-5 동아시아 정세 변화로 왜란과 호란이 일어나다
사대와 조공은 나쁜 건가?
우리가 보통 조선하면 중국에게 사대를 해서 자존심이 없는 나라로 많이 비춰집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옳은 얘기일까요?
<사대와 조공은 그저 굽신굽신의 상징인가?>
우리는 지금부터 사대와 조공의 본질을 이해해 보도록 합시다. 자, 먼저 현대 외교 관계를 생각해보죠. 지금 국제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국제 기구가 있지요? 맞습니다. 바로 UN(국제연합)입니다. 국제연합은 국제평화군이라는 것을 운용하면서 분쟁 지역에 개입하고 평화를 수호하려 노력합니다. 즉, 국제사회에 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려는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과거에도 이러한 것이 있지 않았을까요?
과거에도 이러한 것이 존재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대관계를 통해서 얻어지는 조공-책봉관계입니다. 사대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인데 사대를 함으로해서 작은 나라 큰 나라에게 안정을 보장받습니다. 그럼 사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느냐? 여러분 친구 사이에 친해질려면 어떻게 하죠? 선물을 주죠. 예전에 국제사회에서 오가던 선물을 조공이라고 했습니다. 작은 나라는 조공이라는 선물을 받쳤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라고 선물을 받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큰나라는 작은 나라에게 벼슬을 내리는 데 이것을 책봉이라 하며 조공의 답례입니다. 이와 같은 국제사회의 질서를 조공-책봉관계라고 하는데 이것은 큰 나라가 작은 나라 모두를 상대해야 하는 위험을 덜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의 침입을 덜고 이웃나라가 침입을 할 시 큰 나라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조선이 건국할 당시 명나라가 가장 큰 나라이며 명이 국제질서를 주도하고 있었습니다.이런 국제질서에 가담한다는 것은 조선으로서는 국제사회에서 안전을 보장받는 동시에 명이라는 문명국의 혜택을 받는 국가라는 점을 확고히 하면서 대외적으로 조선의 위치를 높일 수 있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사대는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고 오히려 장점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명과는 사대를 주변국과는 교린을 유지했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제 사대 관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셨을 겁니다. 이제 사대관계를 이해했으니 사대를 넘어서 교린이라는 외교관계를 이해해봅시다. 교린은 주변 이웃 국가들과 관계를 맺는 방법으로 이는 사대와 같은 상하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였습니다. 이해되시나요? 특히 북방의 여진과 남쪽의 일본과 이 교린 관계를 맺었습니다.
북방의 여진족을 조선은 회유하기 위해 귀순을 장려하거나 무역소를 설치하기도 했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자 세종때는 4군6진을 개척하여 북방의 영토를 개척했습니다. 이로서 오늘날의 국경성이 거의 완비되었습니다. 일본과의 관계는 여진족 보다 더 심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초기에는 이를 다스리려 쓰시마섬을 정복하는 강경책을 폈지만 나중에는 회유책으로 돌아서 3포를 개항하고 무역을 제한적으로 허락했습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쌀, 면화 등이 부족하여 우리나라 수입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명이 주도하는 국제질서가 붕괴되고 대외관계가 혼란에 빠지다
16세기 후반 명이 주도하는 국제질서가 동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일본의 정치상황이 혼란해지면서 명이 주도하던 국제질서에서 이탈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알고 있을 일본의 전국시대, 왜냐? 게임의 소재로 엄청 사용되었거든 ㅋㅋ>
<이탈! 일본이 맛이 가면서 국제질서가 동요된다>
반면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한 상황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하면서 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이제 다시 일본을 대표할만한 정부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통일된 일본은 명이 주도한 국제질서에 다시 복속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전국시대 혼란기를 거치면서 자신들의 강함을 깨닫고 자부심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천하질서를 꿈꾸기 시작했고 이것이 조선의 비극이었던 임진왜란의 출발점입니다.
<동래순절도,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했다. 뒤에 퇴각하는 조선군의 모습이 있다>
일본군이 처음에 조선에 처들어올때의 명분은 바로 정명가도! 명나라를 치게 길을 빌려달라였습니다. 이 문장의 담겨져 있는 뜻을 보더라도 일본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천하관을 꿈꿨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세계관을 위한 첫번째 대상이 된 것이 바로 조선이었죠. 임진왜란의 진행과정에 대해서 부연설명을 일일이 하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여러분들도 잘 알것이고 전쟁 후에 임진왜란이 끼친 영향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죠 ^^
임진왜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은 수군과 의병 그리고 명의 원군에 있었습니다. 수군의 승리를 통해 제해권을 장악하여 일본의 서해진출 계획을 꺾었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거점만 점령한 상태였기 때문에 각지에서 일어났던 의병들은 일본군을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마지막으로 명나라 원군이 참전하면서 아직까지는 명이 주도하는 국제질서 체제가 원활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조선은 그에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명이 참전함으로써 과시하게 되어 일본군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후금이 흥기하고 새로운 국제질서가 수립되다
임진왜란은 명이 이끄는 국제질서의 확실한 사망선고와 파탄을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이제 더 이상 명나라 주도하는 국제질서에 속하지 않고 벗어나 독자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패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어나 일본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출병을 한 탓에 국력이 많이 쇠약해져 여진족의 침입을 막아내기가 힘들어졌으며 이는 결국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건국되는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누가뭐라해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조선이었습니다. 조선은 전국토가 황폐해졌으며 각 종 토지 대장과 호적등이 소실되어 세금을 걷는데 큰 지장이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임란으로 동요된 국제질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여진족의 강성은 이후에 국제사회의 판도를 뒤흔들 만한 큰 사건이었습니다.
<여진의 흥기로 명과 조선은 다시 혼란의 소용돌이로 들어간다>
여진족은 강성해지자 후금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명의 영토를 빼앗으며 성장해나갔습니다. 조선은 필연적으로 명과 후금 사이에서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고 이때 임금이었던 광해군은 이 두 나라 사이에서 눈치를 보면서 이른 바 후세에 중립외교로 평가받는 외교 전략을 펼칩니다. 뭐 하지만 이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많으니까 수업시간에 더 깊이 다뤄 보도록 합시다 ^^
여하튼 이런 광해군의 정책에 반대하던 세력으로 서인이 있었는데 서인은 광해군이 자신이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자 유교 윤리를 어겼다는 이유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세웁니다. 이것이 인조 반정이었습니다. 조선의 정치관계가 급변하던 이 시기에 대외관계도 급변하는데 조선을 건드리지 않으려던 후금의 칸 누르하치가 죽고 조선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던 홍타이자가 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후금의 2대 칸 홍타이지, 그는 아버지와 달리 대 조선 강경파였다>
<서인정권은 후금과 거리를 두고 싶어했다>
바로 후금의 칸이 황제를 칭했기 때문입니다. 황제라는 것은 명이 주도하는 국제질서를 완벽히 거부하고 자신의 질서를 재구축하겠다는 얘기였고 조선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전쟁이 발발했으며 이 전쟁의 중요성은 청태종인 홍타이지가 직접 군대를 지휘한데서 드러납니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항전했지만 강성한 청의 군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의 임금이었던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했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청나라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선은 정신적으로 항복하지 않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청을 여전히 오랑캐로 여기고 중화의 정통 계승자는 조선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나중에 소중화의식, 조선중화론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청에게 당한 치욕을 씻자는 의미로 청을 정벌하자는 북벌론이 대두하기도 합니다.
<청에게 모욕을 갚자는 북볼론, 하지만 현실성은 없었다>
청은 왜 조선에게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강요했을까?
<치욕적인 항복의식이었던 삼배구고두례>
http://gall.dcinside.com/list.php?id=chuno&no=70041&page=1&search_pos=-70258&k_type=1000&keyword=%EB%8C%80%EA%B8%B0%EB%A6%AC&bbs=(인조의 삼전도 항복의식)
청은 남한산성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세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번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라는 것을 강요했습니다. 또한 청 태종 자신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삼전도비를 세울 것을 지시했는데 청은 왜 이토록 조선에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강요했던 것일까요? 당시 국제관계 속에서 이를 파악해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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