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2) 유교 정치의 이상을 꽃피운 조선
2-1 민본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통치 체제를 갖추다
2) 유교 정치의 이상을 꽃피운 조선
2-1 민본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통치 체제를 갖추다
조선은 무능한 나라일까?
우리가 역사를 배우면서 까고 까고 또 까는 나라가 하나 있습니다. 이토록 미칠 듯이 무한 까임을 당하는 나라가 바로 조선입니다. 여러분 조선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나요? 실질적 정치에는 관심없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했던 양반들, 상복을 몇 년 입느냐로 싸웠던 정치싸움, 무능력한 지배층 때문에 일본에게 망한 치욕스러운 나라. 이 모두가 사실은 일본이 설정한 '식민사학'이 조선을 깎아내리는 틀이라는 걸 알고 계십니까?
<일본이 설정한 식민사학의 잔재는 조선을 무능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러나 조선이 그렇게 무능했던 나라였을까요? 결론부터 얘기하면 아니였습니다. 조선이 건국의 이념으로 삼은 성리학은 백성을 어떻게 하면 잘 살게 할지 고민하는 학문이었습니다. 거기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어디까지나 공론(공공의 의견)을 중시하며 움직였습니다. 이러한 것만 봐도 조선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백성을 생각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조선이 세워지는 과정을 함께 살펴보도록 합시다. ^^
최초의 역성 혁명이 일어나다
고려 말기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권문세족들은 산과 강을 경계로 토지를 소유할 만큼 엄청난 토지를 차자하고 있었으며 또한 세금도 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고려 초기 부터 국가 종교였던 불교도 타락할 대로 타락하여 농민을 쥐어짜고 있었습니다. 농민들은 결국 세상을 등지고 산에 숨거나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 바로 신진 사대부였습니다. 이들은 성리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에 통감하고 권문세족과 불교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등장했습니다. 이들 신진 사대부는 처음에는 고려를 개혁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가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 새 왕국을 개창할 결심을 합니다.
이들은 이성계와 같은 신흥무인층과 손을 잡았는데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떠나는 도중 돌연 군사를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남아있던 권문세족들을 모두 제거하여 신진 사대부들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권력을 잡은 신진 사대부들은 토지 개혁(과전법)을 통하여 권문세족들의 토지를 빼앗고 자신들의 경제 기반을 다졌으며 국가 재정기반도 확충시켰습니다.
최초의 역성 혁명이 일어나다
고려 말기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권문세족들은 산과 강을 경계로 토지를 소유할 만큼 엄청난 토지를 차자하고 있었으며 또한 세금도 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고려 초기 부터 국가 종교였던 불교도 타락할 대로 타락하여 농민을 쥐어짜고 있었습니다. 농민들은 결국 세상을 등지고 산에 숨거나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 바로 신진 사대부였습니다. 이들은 성리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에 통감하고 권문세족과 불교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등장했습니다. 이들 신진 사대부는 처음에는 고려를 개혁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가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 새 왕국을 개창할 결심을 합니다.
이들은 이성계와 같은 신흥무인층과 손을 잡았는데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떠나는 도중 돌연 군사를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남아있던 권문세족들을 모두 제거하여 신진 사대부들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권력을 잡은 신진 사대부들은 토지 개혁(과전법)을 통하여 권문세족들의 토지를 빼앗고 자신들의 경제 기반을 다졌으며 국가 재정기반도 확충시켰습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고려 왕조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정몽주 일파는 온건파로 가고 새로운 나라를 나라를 개국하자는 정도전 일파는 개국파로 나뉘어 첨예한 대립을 거듭하다 온건파였던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게 맞아 죽습니다. 이로써 조선 건국에 방해되는 인물은 없어지고 1392년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가 개창됩니다.
<정몽주가 죽었다고 전해지는 선죽교, 아직도 혈흔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왕권과 신권의 절묘한 조화
조선은 백성을 근본을 삼고 덕에 의해 통치하는 유교 정치 이념에 따라 정부기구를 조직했습니다. 따라서 왕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신하가 왕권을 견제함으로써 정치 참여 인원을 늘려 왕이 잘못해도 바로 잡을 수 있는 정치체제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조선은 백성을 근본을 삼고 덕에 의해 통치하는 유교 정치 이념에 따라 정부기구를 조직했습니다. 따라서 왕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신하가 왕권을 견제함으로써 정치 참여 인원을 늘려 왕이 잘못해도 바로 잡을 수 있는 정치체제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조선의 중앙 정치 기구>
의정부는 대신들이 모여 회의하는 합좌 기구로 고려시대 식목도감, 도병마사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며 삼국시대의 귀족회의에서부터 그 기원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의정부 밑에서 실질적으로 행정 업무를 담당한 6조가 있었습니다. 보통은 국왕은 의정부를 거쳐서 6조의 업무를 보고 받았지만 왕권이 강할 때는 의정부의 동의 없이 직접 6조와 연결되었습니다. 의정부와 국왕이 상의하는 것을 의정부 서사제라 하며 의정부를 통하지 않고 국왕이 직접 6조와 통하는 것을 6조 직계제라 합니다. 6조 직계제는 태종과 세조 때 시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정치기구에서 보다 눈에 띄는 것은 바로 3사로 대표되는 왕권을 견제하는 신권기구들이였습니다. 3사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으로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사헌부, 국왕의 정치를 비판하는 사간원, 학술기관으로 국왕과 신하들이 같이 모여서 공부하면서 정책을 논의하던 홍문관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고려시대 대간이 가지고 있던 간쟁, 서경, 봉박의 권리를 가지고 국왕을 견제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정치기구에서 보다 눈에 띄는 것은 바로 3사로 대표되는 왕권을 견제하는 신권기구들이였습니다. 3사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으로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사헌부, 국왕의 정치를 비판하는 사간원, 학술기관으로 국왕과 신하들이 같이 모여서 공부하면서 정책을 논의하던 홍문관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고려시대 대간이 가지고 있던 간쟁, 서경, 봉박의 권리를 가지고 국왕을 견제했습니다.
<통초오옥 하여 주시옵소서~ㅠㅠ 왕이 듣기에는 짜증났겠지만 신권은 왕권을 견제하고 정치 참여의 폭을 넓혔다>
하지만 이렇게 신권만 강대했던 기구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의 비서 기관이었던 승정원과 왕의 특명에 의해 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가 있었는데 이것은 왕권을 유지하거나 강화하는 기구였습니다. 이 같은 조선의 통치체제는 경국대전이라는 책에 수록됨으로써 조선이 명실상부한 법치국가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왕의 힘이 모든 지방에 미치다
조선은 건국하면서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것을 천명하는데 그 의지가 어디에서 나타나냐면 바로 지방정치체제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조선은 8도로 행정구역을 나누고 향, 소, 부곡을 모두 폐지하여 행정구역을 모두 일원화하였습니다. 고려와 차이점이 느껴지시나요? ^^ 또한 고려때는 일부 지역만 지방관이 파견되었다면 조선은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어 왕이 직접 백성들을 돌보겠다는 뜻을 나타내었습니다.
왕의 힘이 모든 지방에 미치다
조선은 건국하면서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것을 천명하는데 그 의지가 어디에서 나타나냐면 바로 지방정치체제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조선은 8도로 행정구역을 나누고 향, 소, 부곡을 모두 폐지하여 행정구역을 모두 일원화하였습니다. 고려와 차이점이 느껴지시나요? ^^ 또한 고려때는 일부 지역만 지방관이 파견되었다면 조선은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어 왕이 직접 백성들을 돌보겠다는 뜻을 나타내었습니다.
<조선의 행정구역, 오늘날 행정구역과 거의 비슷하다>
지방 군현에 파견된 수령은 행정, 사법, 군사권 등 막대한 권한을 모두 장악했습니다. 수령의 힘이 강해지자 이때까지 지방에 강력한 유력자였던 향리는 그 지위가 격하되어 수령을 보좌하는 역할로 하락했습니다. 누군가 머리 속에 떠오르지요? 바로 이방이 그들입니다 ^^;
<지방의 향리들은 이제 이방과 같은 위치로 크게 격하되었다>
또한 각 도에는 관찰사가 파견되었습니다. 고려 시대때 안찰사가 파견되었던 것이랑 비교해볼 수 있겠지요? ^^ 이들은 각 군, 현에 파견된 수령을 관리, 감독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고려시대 안찰사가 임시직이었던 것에 비하여 관찰사는 그 지위가 보장되어서 안찰사보다 훨씬 힘이 강했답니다.
또한 향촌의 자치를 어느 정도 인정했는데 그것을 유향소라는 기구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유향소는 지방에 덕망있는 인사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수령을 보좌하면서 서울에 있는 경재소와 수시로 연락했습니다. 중앙 정부는 경재소를 통해 유향소를 통제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의 장악력을 높였습니다.
진정한 과거제가 시작되다
우리나라 본격적인 과거제의 시작은 고려시대부터입니다. 그러나 고려시대 과거제는 조선시대에 비해 약간 미흡하다고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하나는 과거를 치지 않고도 음서로 관직 진출이 가능했으며 무과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조선시대 들어서 이 두 가지를 보완하여 음서가 존재했지만 매우 낮은 관직만 허용했으며 무과를 새로 개설했습니다.
또한 향촌의 자치를 어느 정도 인정했는데 그것을 유향소라는 기구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유향소는 지방에 덕망있는 인사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수령을 보좌하면서 서울에 있는 경재소와 수시로 연락했습니다. 중앙 정부는 경재소를 통해 유향소를 통제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의 장악력을 높였습니다.
진정한 과거제가 시작되다
우리나라 본격적인 과거제의 시작은 고려시대부터입니다. 그러나 고려시대 과거제는 조선시대에 비해 약간 미흡하다고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하나는 과거를 치지 않고도 음서로 관직 진출이 가능했으며 무과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조선시대 들어서 이 두 가지를 보완하여 음서가 존재했지만 매우 낮은 관직만 허용했으며 무과를 새로 개설했습니다.
<조선시대 무과 재현 모습>
조선시대 과거는 크게 문과, 무과와 기술직을 뽑는 잡과로 구분되었습니다. 과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문과는 소과와 대과로 구분되어 소과는 초시와 복시를 통과하면 생원과 진사라는 호칭을 주고 지금의 대학과 비슷한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습니다. 여기서 공부를 한 사람들은 대과에 도전하는 데 대과 역시 초시, 복시로 나뉘고 여기서 선발된 33명은 임금 앞에서 보는 시험인 전시를 통하여 순위가 매겨졌습니다.
<조선시대 과거 재현>
조선의 과거제도는 음서의 폭이 좁아지고 과거의 제도가 정교화 됨에 따라 고려 시대가 가지고 있던 귀족적 특성이 떨어져 나가고 관료적인 체제로 정비되었습니다.
양인과 천민으로만 신분이 구별되다
이제 조선의 신분제도를 살펴볼 차례네요 ^^ 조선 시대로 들어서면서 고려시대때 존재했던 향, 소, 부곡이 차별 받던 평민들이 없어집니다. 이들은 대개 양인의 신분으로 편입되었으며 양인은 군대를 가고 세금을 내는 신분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과거 응시 자격도 있어 벼슬을 하는데 법적으로는 아무 제한이 없었습니다. 다만 돈이 없어서 시험을 준비하지 못할 뿐이었습니다 ㅠㅠ
조선은 법적으로는 두 개의 신분 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바로 양인과 천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사회가 복잡하게 됨에 따라 양인들은 양반, 중인, 상민으로 분화되어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이라는 4개의 계급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양반 혹은 사족들은 군역을 면제 받는 특혜를 누렸으며 중인들은 주로 기술직을 맡았습니다. 지금의 의사나 통역관 같은 전문직들이죠 ^^ 상민의 대부분은 농민이었습니다. 천민은 대부분 노비였으며 이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물건처럼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농자천하지대본! 농민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국가가 되다
계속 하는 얘기지만 조선은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삼은 나라였습니다. 유교 정치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민생 안정이며 민생이 안정 되려면 백성들이 농사를 안심하고 지어야만 했습니다.
양인과 천민으로만 신분이 구별되다
이제 조선의 신분제도를 살펴볼 차례네요 ^^ 조선 시대로 들어서면서 고려시대때 존재했던 향, 소, 부곡이 차별 받던 평민들이 없어집니다. 이들은 대개 양인의 신분으로 편입되었으며 양인은 군대를 가고 세금을 내는 신분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과거 응시 자격도 있어 벼슬을 하는데 법적으로는 아무 제한이 없었습니다. 다만 돈이 없어서 시험을 준비하지 못할 뿐이었습니다 ㅠㅠ
조선은 법적으로는 두 개의 신분 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바로 양인과 천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사회가 복잡하게 됨에 따라 양인들은 양반, 중인, 상민으로 분화되어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이라는 4개의 계급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양반 혹은 사족들은 군역을 면제 받는 특혜를 누렸으며 중인들은 주로 기술직을 맡았습니다. 지금의 의사나 통역관 같은 전문직들이죠 ^^ 상민의 대부분은 농민이었습니다. 천민은 대부분 노비였으며 이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물건처럼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농자천하지대본! 농민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국가가 되다
계속 하는 얘기지만 조선은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삼은 나라였습니다. 유교 정치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민생 안정이며 민생이 안정 되려면 백성들이 농사를 안심하고 지어야만 했습니다.
<농사는 조선 시대 최대의 관심사였다. 수많은 농사 관련 서적과 농사에 대한 토론이 이를 반증한다>
나라에서는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않고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방지하기 이해 사, 농, 공, 상이라는 말을 만들어 직업을 차별했고 이를 토대로 백성들을 농토에서 떠나지 못하게 강하게 결박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은 화폐 유통이 다른 나라보다 많이 늦어졌지만 16세기에 이르면 상공업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고 상공업과 무역이 활성되었습니다.
하지만 후대 상공업과 무역이 발달해도 여전히 가장 중요했던 것은 농사였겠지요? ^^ 왜냐하면 국가의 주요수입원은 농사를 짓는 데서 나왔으니까요. 농사를 잘 짓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세금을 어떻게 걷느냐 입니다. 특히 세종 시절에는 이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을 도입했습니다.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은 그 토지의 사정을 보고 세금을 걷는 방식입니다. 전분 6등법은 토지의 비옥도를 보고 토지가 비옥하냐 비옥하지 않느냐에 따라 1~6등전으로 등급을 매겨 세금을 징수하는 방법이고 연분 9등법은 그해에 농사가 어떻게 되었느냐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까지의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농민들이 세금을 깎으려고 했겠지요? ^^ 조선후기로 갈수록 이런 현상이 두드러져 인조 때 가면 세금이 최하 4두로 고정되는 영정법으로 바뀝니다.
농민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세금을 걷느냐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관리에게 월급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화폐가 유통되기 어려웠던 시절로 주로 토지를 매개로 월급을 주었습니다. 최초에 시행되었던 관리들의 월급제도는 과전법으로 경기도 지역의 토지의 수조권(세금을 걷을 권리)을 관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전은 관리가 죽으면 반납해야했지만 수신전(미망인에게 지급), 휼양전(미성년인 자식에게 지급)의 명목으로 세습이 가능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현직 관리들에게 줄 과전이 부족해졌고 세조 때는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마저 잘 안되자 성종 때는 관리들이 수조권을 직접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직접 수조권을 행사하여 대신 관리의 과전에서 대신 세금을 받아 다시 관리에게 그 수익금을 지급하는 관수관급제로 바뀌었습니다.
<부동산에 대한 규제가 심해지면 부동산을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커지는 것처럼 관료들은 수조권을 받기 어려워지자 토지를 소유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규제가 심해지면 다른 수단을 강구하게 되는게 인간이죠 ^^; 결국 관료들은 과전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기 보다는 자신이 직접 토지를 사유화하는 길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결국 국가는 관료들에게 수조권을 주는 것을 포기하고 녹봉만 지급하게 되었습니다.
평민들은 왜 과거를 볼 수 없었나?
조선시대 평민들은 법적 신분은 모두 양인으로 과거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과거를 보지도 않았거니와 과거를 보기도 힘들었는데 어떤 이유에서 그랬을까요? ^^
평민들은 왜 과거를 볼 수 없었나?
조선시대 평민들은 법적 신분은 모두 양인으로 과거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과거를 보지도 않았거니와 과거를 보기도 힘들었는데 어떤 이유에서 그랬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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