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을 재통일하여 발전한 고려(문벌 귀족 사회가 동요하다, 개방성을 띤 고려 사회, 귀족 문화의 꽃이 피다)
과거 안에서(고등학교 한국사)/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2011. 3. 15. 14:52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1) 민족을 재통일하여 발전한 고려
1-3 문벌 귀족 사회가 동요하다
오늘 수업은 잠깐 혼란 스러울 수도 있을 거에요. 교과서 중간을 건너뛰고 고려의 문화부터 해야되서 그래요 ^^ 너무 혼란스러워 하지 마시고 차분히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
막장드라마! 문벌 귀족
여러분 막장 드라마 많이 보죠? 막장 드라마 보면 항상 나오는 패턴이 뭔가요? 사실은 내가 내 딸이다 부터 시작해서 둘이 남매여서 이루어지면 안 되는데 사실 그 아이가 병원에서 바꿔치기 되어서 어쩌고 저쩌고...; 참 복잡하시죠?
<ㅠㅠ 얽히고 섥혀있는 가족 관계. 내가 이래서 드라마를 안 본다;>
그러나 여러분 고려시대에도 막장 드라마가 존재했다면 그것이 믿어지십니까? 긴 설명이 필요없고 고려 왕실과 그 당시 문벌 귀족의 하나였던 경원 이씨와의 가계도를 살펴봅시다.
<인종의 어머니인 문경 태후의 동생과 인종이 결혼했으니 인종은 이모들과 결혼한 셈이 된다>
딱 봐도 한 사람의 딸 들이 고려 왕들에게 시집을 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 당시 문벌귀족들은 혼인을 통해 자신들의 세력 기반을 다지고 앞 시간에 얘기했던 과거, 음서를 통해 관직을 독점했습니다. 또한 관직에 나가면서 그에 대한 댓가로 받는 과전과 더불어 5품 이상 관리나 공신이었던 이들은 공음전 역시 받아 경제적으로도 탄탄한 기반한 구축했습니다.
<세상은 돈과 권력! 문벌귀족은 이 모두를 음서와 공음전으로 확실히 틀어쥐었다>
문벌귀족의 대표적인 세력 중 하나였던 경주이씨의 이자겸은 그 위세가 자못대단했습니다. 인종 때에 이르러서는 두 딸을 왕에게 시집보내고 주요관직을 자신이 차지하고 왕에게 행해야하는 여러 격식을 폐지하여 왕처럼 지냈습니다. 왕처럼 지내다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결국 자신이 왕을 하고 싶겠지요? 그래서 이자겸은 척준경이라는 사람과 함께 1126년에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이자겸의 난이라고 합니다. 척준경은 당시 최고의 무장으로 강력한 군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윤관이 동북 9성을 개척할 때 여진족을 미친듯이 쓸어버리는데 적진에 돌입하여 적장을 배고 포로 두명을 구출해오는 등의 엄청난 일을 합니다. 그만큼 척준경의 무력이 강대했다는 뜻이죠. 아무튼 이런 강력한 척준경과 손을 잡았으니 이자겸이 눈에 뵈는 게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는 것이 자신을 철석같이 도울 줄만 알았던 척준경이 배신을 때립니다. ㅠㅠ
<아 그렇게 잘해줬것만 ㅠㅠ 성왕, 신라에 이은 또 하나의 배신의 역사가 탄생되다 ㅋ>
여진족도 바르던 척준경인데 이자겸쯤이야 허접이겠죠? 가뿐히 이자겸을 제거합니다. 이로써 문벌귀족 사회는 더욱 더 혼란이 가중되기에 이릅니다. 강대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없어지면 그 권력을 가지기 위해 다른 사람이 달려들기 마련이죠.
문벌귀족 사회의 혼란에 또 다시 기름을 들이부은 것은 바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었습니다. 묘청은 스님인데 이 스님은 배짱이 장난아니었나 봅니다. 풍수지리설을 내세우면서 서경에 천도하고 칭제(황제를 칭하고) 건원(연호를 쓰면)을 하면 주변 36개 나라가 모두 조공을 하고 당시 동북아의 최강국가였던 금나라를 정벌할 수 있을거라는 희대의 사기를 칩니다!
<벌거벗은 임금님급의 사기를 치는 묘청, 처음에 국왕이었던 인종도 혹한다>
<통촉 ㅠㅠ 문벌귀족들은 떼쓰기 스킬을 시전한다>
게다가 서경에 연이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자 막상 천도하려고 했던 인종 역시 떨떠름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생각처럼 서경천도가 진행되지 않자 묘청은 자작극을 꾸미기 시작합니다. 연못에다가 떡을 던져 떡에 있는 기름이 연못 위에 떠오르자 오색 영롱한 기운이 연못에 떠올랐다고 구라를 칩니다! -_- 구라도 길어지면 속는 사람이 알아차리는 법. 이로 인해 인종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서자 묘청은 서경을 중심으로 하여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로 정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결국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게 1년만에 제압당했습니다.
칼을 쓰는 무인의 시대
문벌귀족 사회는 일단 큰 위기는 넘겼으나 이 두번의 커다란 난은 그들에게 시한부 선언을 한거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문벌귀족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계속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며 개혁에 대한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더구다 오만방자해진 그들은 무신을 툭하면 무시했습니다. 특히 하급 군인들은 생계수단이었던 군인전마저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번번히 국가 잡역에 동원되자 불만이 높아졌습니다. 이와중에 무신들의 불만에 기름을 들이붓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문벌귀족 김부식의 아들이었던 김돈중은 무신 중 높은 위치에 있었던 정중부의 수염을 태웠는데 정중부가 이에 화가 나 김돈중을 크게 혼내자 김돈중의 아버지였던 김부식은 오히려 정중부를 벌주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무신들의 불만은 한계점에 이르렀고 결국 정중부, 이의방 등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켰는데 이를 무신정변(1170)이라고 합니다.
<무신정변, 보현원에서 문신들이 제거되고 무신들의 시대가 열리다>
무신들은 무력으로 그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았습니다. 조위총, 김보당 같은 인물들이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문벌귀족과 깊은 연관이 있던 교종의 불교사원인 귀법사도 난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무신들 간에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도 끊이지 않았는데 정중부, 이의방, 경대승, 이의민 등이 차례로 권력을 잡아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다 최충헌이 권력을 잡은 이후 무신정권도 안정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최씨정권은 총 4대에 걸쳐 60년간 유지되었습니다. 이들은 도방과 삼별초라는 사병집단을 두어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했으며 교정도감, 정방을 통해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또한 최씨 정권의 2대 집권자인 최우부터는 문신을 등용하기도 했는데 능문능리(能文能吏 : 능할 능, 글월 문, 능할 능, 아전 리)를 앞세운 관료를 등용했습니다. 능문능리란 학문이나 이론적 인재보다는 실재 행정에 밝은 인재를 뜻합니다. 이때 신진사대부들이 등용되기도 했으며 이규보 등이 유명했습니다.
몽골의 침입으로 등장한 권문세족
무신들의 정권은 정확히 100년이 지속되었는데 이들이 무너진 이유는 바로 몽골의 침입 때문이었습니다. 새롭게 초원의 강자로 등장한 몽골은 고려를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몽골의 압력에 무신정권은 강경하게 대응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강경하게 대응한 이유는 이들이 애국지사이거나 민족의 영웅이여서 그런게 아니고 몽골에 굴복하면 그들의 권력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최씨정권은 총 4대에 걸쳐 60년간 유지되었습니다. 이들은 도방과 삼별초라는 사병집단을 두어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했으며 교정도감, 정방을 통해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또한 최씨 정권의 2대 집권자인 최우부터는 문신을 등용하기도 했는데 능문능리(能文能吏 : 능할 능, 글월 문, 능할 능, 아전 리)를 앞세운 관료를 등용했습니다. 능문능리란 학문이나 이론적 인재보다는 실재 행정에 밝은 인재를 뜻합니다. 이때 신진사대부들이 등용되기도 했으며 이규보 등이 유명했습니다.
몽골의 침입으로 등장한 권문세족
무신들의 정권은 정확히 100년이 지속되었는데 이들이 무너진 이유는 바로 몽골의 침입 때문이었습니다. 새롭게 초원의 강자로 등장한 몽골은 고려를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몽골의 압력에 무신정권은 강경하게 대응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강경하게 대응한 이유는 이들이 애국지사이거나 민족의 영웅이여서 그런게 아니고 몽골에 굴복하면 그들의 권력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신들이 넘치는 기상과 절개가 있어서 몽골에 항복 안 한게 아니다. 그들은 단지 권력의 노예였을 뿐>
어쨌든 당시 세계최강이었던 몽골과의 전쟁은 고려의 패배로 끝나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무신들은 권력을 잃게 되고 대신 원나라와 친한 권문세족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권문세족은 원나라 황제의 고려 출신 황후였던 기황후의 친인척 관계이거나 혹은 원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였습니다. 이들은 학문적 소양이 많이 딸렸고 믿을 것을 오로지 원나라 밖에 없었습니다. 네, 전형적인 간신배가 연상되죠? ^^;
<딸랑딸랑. 머리에 든 건 없어도 간신배 짓은 잘할 수 있다 ^^;>
어쨌든 권문세족들은 원나라와 친하게 지낸 덕분에 큰소리를 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배운 건 별로 없지만 원나라한테 샤바샤바를 잘한 덕에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했고 중신들의 회의기구였던 도평의사사를 장악하여 엄청난 권력을 누렸습니다. 이들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고려 국와은 몽골 침입이후 대대로 몽골 공주와 결혼을 했기 때문에 원나라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원과 친했던 권문세족들을 건드릴 수 없었고 이를 안 권문세족들은 토지를 마음대로 늘리고 백성들을 쥐어 짜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당시 권문세족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는지 청산별곡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렇게 권문세족들의 횡포가 심해지자 이를 못 마땅하게 지켜본 세력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신진 사대부였습니다. 이들은 무신정권 때부터 천천히 관직에 진출했고 공민왕의 반원 개혁 정치 때 급격한 성장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성리학을 공부하여 학문적 소양이 우수한 편이었고 경제적으로 중소 지주로서 권문세족들의 대토지 소유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원나라를 싫어했고 대신 중원에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명에 대해 우호적이었습니다. 지금 이들의 힘은 미약했지만 나중에 조선의 건국을 이끌어 가는 주요 세력이 되었습니다.
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1) 민족을 재통일하여 발전한 고려
1-5 개방성을 띤 고려사회, 1-6 귀족 문화의 꽃이 피다
1) 민족을 재통일하여 발전한 고려
1-5 개방성을 띤 고려사회, 1-6 귀족 문화의 꽃이 피다
신분상승이 가능하며 진취적 여성이 있던 고려 시대
잠시 고려의 대외 관계는 건너뛰고 고려의 문화를 먼저 배워봅시다 ^^ 고려의 대외 관계는 할 얘기가 많아서 나중에 자세히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고려시대는 신라 사회와 비교하여 제한적이긴 하지만 신분 상승이 가능했습니다. 신라는 골품제라는 특유의 신분제가 있기 때문에 진골이 아니라면 높은 관직과 관등을 차지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고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방의 향리들은 과거를 통해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었고 군인들은 외적의 침입이 많았기 때문에 군공을 쌓아 무관으로 출세할 수도 있었습니다.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 진골이 아니라면 1~5품의 관등에 오를 수 조차 없었다>
특히 하극상(부하가 상관의 목을 치는!)의 시대였던 무신정권 기에는 천민 출신이지만 최고 권력자까지 오른 이의민이라는 인물까지 등장했습니다. 이에 자극 받은 하층민들은 신분 해방 운동을 벌였습니다. 신분해방운동에는 대표적으로 만적의 난이 있습니다. 만적은 이의민 집의 종으로 자신의 주인기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결국 난은 실패로 돌아갑니다만 신분 해방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대몽항쟁기간에는 군공이 쌓이면서 특수 행정 구역이었던 향, 소, 부곡이 일반 군현으로 승격되는 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인생역전! 전란은 백성들에게 괴로움을 가져다 주지만 신분 상승의 기회도 동시에 가져다 준다>
고려의 신분제 사회에 대해서 알아보았으니 이제 여성에 대해 알아봅시다.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여성사를 매우 좋아한답니다. ^^ (관심있으시면 한국 여성사 편지라는 책을 읽어보세요. 나는 좀 더 수준이 있는 책을 원한다고 하시면 '대중독재와 여성'이라는 책을 읽어보세요. 뒤에 책은 매우 많이 어렵습니다 ^^;;) 고려는 여성에 관해서는 개방된 사회였습니다. 어떻게 여성에 관해 개방된 사회인지 알 수 있냐면 재산 상속에 관한 것을 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어떤 사회든 재산 분배의 형태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느냐를 보면 그 계층이 그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자녀가 여자라도 균분 상속이 가능했습니다. 이것 한 가지만 봐도 여성이 상당히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고려가요 중 하나인 서경별곡에 보면 적극적인 여성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어 이 당시 고려 시대 여성들이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적극적인 여성에 관한 재미있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
이 같은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은 몽골이 우리나라에게 항복을 받으면서 수많은 공녀를 자신의 나라로 매년 끌고 갔는데 이로 인해 인구가 줄어들 것을 두려워하여 그에 대한 방편으로 박유가 일부다처제를 제안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엄청 혼나죠 ^^ 특히 재상들은 자신의 부인이 무서워서 이 법안에 찬성하지 않았다는 점을 봐도 고려시대에 여성의 지위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박유가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 지금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처를 하나 두는데 그치고 있으며 아들이 없는 자들까지도 감히 첩을 두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청컨데 여러 신하,관료들로 하여금 여러 처를 두게 하되 품위에 따라 그 수를 점차 줄이도록 하여 보통 사람에 이르러서는 1인 1첩을 둘 수 있도록 하며 여러 처에서 낳은 아들들도 역시 본처가 낳은 아들처럼 벼슬을 할 수 있게 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나라 안에 원한을 품고 있는 남자와 여자들이 없어지고 인구도 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부녀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원망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때마침 연등회 날 저녁 박유가 왕의 행차를 호휘하여 따라갔는데 어떤 노파가 그를 손가락질하면서 "첩을 두고자 요청한 자가 바로 저 놈의 늙은이다."라고 하니,듣는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서로 가리키니 거리마다 여자들이 무더기로 손가락질하였다. 당시 재상들 가운데 그 부인을 무서워하는 자들이있었기 때문에 그 건의를 정지하고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다. <고려사> |
이 같은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은 몽골이 우리나라에게 항복을 받으면서 수많은 공녀를 자신의 나라로 매년 끌고 갔는데 이로 인해 인구가 줄어들 것을 두려워하여 그에 대한 방편으로 박유가 일부다처제를 제안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엄청 혼나죠 ^^ 특히 재상들은 자신의 부인이 무서워서 이 법안에 찬성하지 않았다는 점을 봐도 고려시대에 여성의 지위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 재상들은 공처가였나 보다 ^^;>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운 고려
고려하면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화려한 문화입니다. 특히 고려 청자를 박물관에서 실물로 직접 본 사람이 있으면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연신 감탄을 하게 될 것입니다.
고려하면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화려한 문화입니다. 특히 고려 청자를 박물관에서 실물로 직접 본 사람이 있으면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연신 감탄을 하게 될 것입니다.
<국보 74호로 지정된 청자 오리형 수적(벼루에 물을 붓는 용기)>
하지만 고려 청자는 고려 귀족 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고려 시대에 이런 문화만 있었다고 생각하면 경기도 오산입니다. ^^ 음... 미안합니다-_-
<또 다시 무리수인가-_-;>
자 어쩄든 화려한 귀족문화로 대표되는 고려 청자 말고도 고려의 문화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고려는 불교가 국교인 국가로 불교에 관련된 유물과 유적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특히 여러 외적의 침입으로 인해 부처에 힘을 빌어 외적을 물리치려는 의도가 담긴 대장경이 많이 제조되었습니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이탈리아 장인들이 한땀 한땀... 아니 승려들이 한 글자 한 글자 정성들여 글자를 새겼다>
특히 몽골의 침입을 막기위해 제조된 팔만대장경은 2007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고 1995년에는 이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런 불교 문화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유학이 강조되고 과거가 실시 되면서 유교도 발전을 했습니다. 개인 문집이 많이 편찬되었는데 이규보의 동국이상집이 대표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알아볼 것은 고려 초기에 호족 문화에 관해서입니다. 호족들이 지배층일 당시 아직 사회가 혼란했으므로 호족들은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고 다른 사람들을 제압하기 위해 주로 규모가 큰 문화 유산들을 만들어내었습니다. 특히 관촉삭 석조 미륵보살 입상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대형 문화 유산을 건립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불교 문화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유학이 강조되고 과거가 실시 되면서 유교도 발전을 했습니다. 개인 문집이 많이 편찬되었는데 이규보의 동국이상집이 대표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알아볼 것은 고려 초기에 호족 문화에 관해서입니다. 호족들이 지배층일 당시 아직 사회가 혼란했으므로 호족들은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고 다른 사람들을 제압하기 위해 주로 규모가 큰 문화 유산들을 만들어내었습니다. 특히 관촉삭 석조 미륵보살 입상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대형 문화 유산을 건립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의 뒷모습,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대신 대형으로 만들다보니 세련된 맛은 떨어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도 이런 유산들은 그 당시 호족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어서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문벌귀족들은 왜 막장드라마를 썼는가?
선생님이 앞에 문벌귀족들이 막장드라마처럼 친인척끼리 결혼을 하기도 했다고 설명했지요? 이들이 왜 이런 결혼 형태를 보여주었는지를 잘 생각해봅시다. ^^ 정답은 수업 시간에 공개됩니다.
문벌귀족들은 왜 막장드라마를 썼는가?
선생님이 앞에 문벌귀족들이 막장드라마처럼 친인척끼리 결혼을 하기도 했다고 설명했지요? 이들이 왜 이런 결혼 형태를 보여주었는지를 잘 생각해봅시다. ^^ 정답은 수업 시간에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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