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2) 유교 정치의 이상을 꽃피운 조선 2-4 국제 관계의 안정 속에서 실리를 취하다 2-5 동아시아 정세 변화로 왜란과 호란이 일어나다
사대와 조공은 나쁜 건가?
우리가 보통 조선하면 중국에게 사대를 해서 자존심이 없는 나라로 많이 비춰집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옳은 얘기일까요?
<사대와 조공은 그저 굽신굽신의 상징인가?>
우리는 지금부터 사대와 조공의 본질을 이해해 보도록 합시다. 자, 먼저 현대 외교 관계를 생각해보죠. 지금 국제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국제 기구가 있지요? 맞습니다. 바로 UN(국제연합)입니다. 국제연합은 국제평화군이라는 것을 운용하면서 분쟁 지역에 개입하고 평화를 수호하려 노력합니다. 즉, 국제사회에 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려는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과거에도 이러한 것이 있지 않았을까요?
과거에도 이러한 것이 존재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대관계를 통해서 얻어지는 조공-책봉관계입니다. 사대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인데 사대를 함으로해서 작은 나라 큰 나라에게 안정을 보장받습니다. 그럼 사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느냐? 여러분 친구 사이에 친해질려면 어떻게 하죠? 선물을 주죠. 예전에 국제사회에서 오가던 선물을 조공이라고 했습니다. 작은 나라는 조공이라는 선물을 받쳤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라고 선물을 받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큰나라는 작은 나라에게 벼슬을 내리는 데 이것을 책봉이라 하며 조공의 답례입니다. 이와 같은 국제사회의 질서를 조공-책봉관계라고 하는데 이것은 큰 나라가 작은 나라 모두를 상대해야 하는 위험을 덜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의 침입을 덜고 이웃나라가 침입을 할 시 큰 나라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조선이 건국할 당시 명나라가 가장 큰 나라이며 명이 국제질서를 주도하고 있었습니다.이런 국제질서에 가담한다는 것은 조선으로서는 국제사회에서 안전을 보장받는 동시에 명이라는 문명국의 혜택을 받는 국가라는 점을 확고히 하면서 대외적으로 조선의 위치를 높일 수 있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사대는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고 오히려 장점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명과는 사대를 주변국과는 교린을 유지했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제 사대 관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셨을 겁니다. 이제 사대관계를 이해했으니 사대를 넘어서 교린이라는 외교관계를 이해해봅시다. 교린은 주변 이웃 국가들과 관계를 맺는 방법으로 이는 사대와 같은 상하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였습니다. 이해되시나요? 특히 북방의 여진과 남쪽의 일본과 이 교린 관계를 맺었습니다.
북방의 여진족을 조선은 회유하기 위해 귀순을 장려하거나 무역소를 설치하기도 했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자 세종때는 4군6진을 개척하여 북방의 영토를 개척했습니다. 이로서 오늘날의 국경성이 거의 완비되었습니다. 일본과의 관계는 여진족 보다 더 심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초기에는 이를 다스리려 쓰시마섬을 정복하는 강경책을 폈지만 나중에는 회유책으로 돌아서 3포를 개항하고 무역을 제한적으로 허락했습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쌀, 면화 등이 부족하여 우리나라 수입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명이 주도하는 국제질서가 붕괴되고 대외관계가 혼란에 빠지다
16세기 후반 명이 주도하는 국제질서가 동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일본의 정치상황이 혼란해지면서 명이 주도하던 국제질서에서 이탈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알고 있을 일본의 전국시대, 왜냐? 게임의 소재로 엄청 사용되었거든 ㅋㅋ>
자 여기서 일본 전국시대가 게임의 소재로 쓰인 것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전국시대 상황이 도래하면서 일본을 대표할만할 세력이 없어졌다는 뜻이죠. 전국시대 이전에 일본은 무로마치 막부라는 일본 세력을 대표할만한 정치세력이 있었지만 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무로마치 막부는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대표성을 상실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명나라에게 책봉받을 만한 일본의 정치세력이 없어졌다는 뜻이며 자연히 일본이 명나라가 주도하는 국제질서에서 이탈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탈! 일본이 맛이 가면서 국제질서가 동요된다>
일본은 명이 주도하던 국제질서에서 튕겨져 나가자 평화롭던 대외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일본의 중앙정부는 더 이상 일본을 대표하지 못하고 지방에 대한 힘을 상실하자 지방에 왜구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3포왜란, 을묘왜변 등 제법 큰 규모의 왜란을 일으키면서 평화롭던 국제사회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던 조선은 국방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원래는 양인들은 모두 군대를 가야하는 양인개병제가 채택되었지만 포를 납부하면 군역을 면제해주는 방군수포제가 확대되면서 국방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일본의 침입을 막기가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반면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한 상황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하면서 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이제 다시 일본을 대표할만한 정부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통일된 일본은 명이 주도한 국제질서에 다시 복속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전국시대 혼란기를 거치면서 자신들의 강함을 깨닫고 자부심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천하질서를 꿈꾸기 시작했고 이것이 조선의 비극이었던 임진왜란의 출발점입니다.
<동래순절도,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했다. 뒤에 퇴각하는 조선군의 모습이 있다>
일본군이 처음에 조선에 처들어올때의 명분은 바로 정명가도! 명나라를 치게 길을 빌려달라였습니다. 이 문장의 담겨져 있는 뜻을 보더라도 일본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천하관을 꿈꿨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세계관을 위한 첫번째 대상이 된 것이 바로 조선이었죠. 임진왜란의 진행과정에 대해서 부연설명을 일일이 하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여러분들도 잘 알것이고 전쟁 후에 임진왜란이 끼친 영향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죠 ^^
임진왜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은 수군과 의병 그리고 명의 원군에 있었습니다. 수군의 승리를 통해 제해권을 장악하여 일본의 서해진출 계획을 꺾었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거점만 점령한 상태였기 때문에 각지에서 일어났던 의병들은 일본군을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마지막으로 명나라 원군이 참전하면서 아직까지는 명이 주도하는 국제질서 체제가 원활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조선은 그에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명이 참전함으로써 과시하게 되어 일본군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후금이 흥기하고 새로운 국제질서가 수립되다
임진왜란은 명이 이끄는 국제질서의 확실한 사망선고와 파탄을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이제 더 이상 명나라 주도하는 국제질서에 속하지 않고 벗어나 독자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패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어나 일본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출병을 한 탓에 국력이 많이 쇠약해져 여진족의 침입을 막아내기가 힘들어졌으며 이는 결국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건국되는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누가뭐라해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조선이었습니다. 조선은 전국토가 황폐해졌으며 각 종 토지 대장과 호적등이 소실되어 세금을 걷는데 큰 지장이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임란으로 동요된 국제질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여진족의 강성은 이후에 국제사회의 판도를 뒤흔들 만한 큰 사건이었습니다.
<여진의 흥기로 명과 조선은 다시 혼란의 소용돌이로 들어간다>
여진족은 강성해지자 후금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명의 영토를 빼앗으며 성장해나갔습니다. 조선은 필연적으로 명과 후금 사이에서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고 이때 임금이었던 광해군은 이 두 나라 사이에서 눈치를 보면서 이른 바 후세에 중립외교로 평가받는 외교 전략을 펼칩니다. 뭐 하지만 이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많으니까 수업시간에 더 깊이 다뤄 보도록 합시다 ^^
여하튼 이런 광해군의 정책에 반대하던 세력으로 서인이 있었는데 서인은 광해군이 자신이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자 유교 윤리를 어겼다는 이유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세웁니다. 이것이 인조 반정이었습니다. 조선의 정치관계가 급변하던 이 시기에 대외관계도 급변하는데 조선을 건드리지 않으려던 후금의 칸 누르하치가 죽고 조선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던 홍타이자가 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후금의 2대 칸 홍타이지, 그는 아버지와 달리 대 조선 강경파였다>
후금은 명이 주도하던 국제질서를 깨고 자신만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구축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명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에 가장 충실한 나라인 조선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후금은 조선을 명이 이끄는 국제질서에서 이탈시킴으로 해서 자신이 꿈꾸는 국제질서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 같은 이유로 총 2번에 걸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습니다.
<서인정권은 후금과 거리를 두고 싶어했다>
당시 조선은 서인정권이 들어서면서 광해군이 집권하던 시절에 비해 후금과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서인정권의 태도 역시 호란을 일으킨 하나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이 모든 것들 맞물려 호란이 일어났는데 첫번째 정묘호란 때는 형제관계를 맺는 것으로 사태가 수습되었으나 두번째 병자호란 때는 그런 것으로 사태가 수습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후금의 칸이 황제를 칭했기 때문입니다. 황제라는 것은 명이 주도하는 국제질서를 완벽히 거부하고 자신의 질서를 재구축하겠다는 얘기였고 조선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전쟁이 발발했으며 이 전쟁의 중요성은 청태종인 홍타이지가 직접 군대를 지휘한데서 드러납니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항전했지만 강성한 청의 군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의 임금이었던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했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청나라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선은 정신적으로 항복하지 않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청을 여전히 오랑캐로 여기고 중화의 정통 계승자는 조선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나중에 소중화의식, 조선중화론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청에게 당한 치욕을 씻자는 의미로 청을 정벌하자는 북벌론이 대두하기도 합니다.
청은 남한산성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세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번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라는 것을 강요했습니다. 또한 청 태종 자신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삼전도비를 세울 것을 지시했는데 청은 왜 이토록 조선에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강요했던 것일까요? 당시 국제관계 속에서 이를 파악해봅시다 ^^
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2) 유교 정치의 이상을 꽃피운 조선 2-2 사림,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다 2-3 민족 문화가 크게 발전하다
선비가 숲을 이루다
고려 왕조는 500년 동안 호족, 문벌귀족, 무신, 권문세족, 신진사대부 총 4번의 권력 교체가 일어났지만 조선은 단 한 번의 권력 교체가 일어났습니다. 그 주인공들이 바로 사림(士林: 선비 사, 수풀 림)입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조선은 우리가 알기로 선비의 나라라고 알고 있는데 왜 갑자기 선비들이 숲처럼 등장했다고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
<선비들이 숲처럼 많이 등장하다!>
사림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먼저 알아보는게 가장 좋겠지요? ^^ 여러분들 조선이 개국할 당시 조선 개국에 반대하는 온건 신진사대부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나요? 이들은 성리학 이론에 충실하여 충신불사이군을 내세우며 조선 개국에 끝내 반대했습니다. 일부는 죽임을 당하거나 또 일부는 은둔했는데 은둔하기만 하면 심심하잖아요? 또한 이들은 공부도 많이 했기 때문에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은둔하고 있는 동안 제자들에게 전수했습니다. 그래서 이들 밑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리학을 공부했습니다. 바로 이들이 사림입니다.
세월이 오랜 시간 지나자 사림의 수가 늘어났습니다. 사림의 수가 늘어나고 조선이 개국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자 사림들이 서서히 정치에 참여하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은 세상을 다스리는 학문인 성리학을 공부했기 때문이었죠. 세상을 다스리는 학문을 공부했는데 언제까지 숨어 있을 수 있었을까요? 드디어 성종 때가 되면 이들은 서서히 조선의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합니다.
<사림들이 정치세력으로 등장함에 따라 당시 부패했던 훈구세력과 날카롭게 대립한다>
그렇다면 사림들이 정치세력으로 전면적으로 나서기 전에 정치를 담당하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그들은 바로 조선 개국에 적극 참여했으며 세조 때의 정변을 통해 공신으로 지위를 굳힌 훈구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개국초에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개국했습니다. 이들은 성리학에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나라를 운영하면서 다른 학문도 받아들일 필요성을 느끼고 탄력적으로 다른 학문도 받아들였습니다.
언뜻 들으면 탄력적이라는 말은 좋은 말 같지요? 하지만 탄력적이라는 얘기는 그만큼 원리 원칙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말도 됩니다. 훈구파들은 원리 원칙을 어기고 공신인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등 세월이 지나면서 부패해졌습니다. 성리학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사림들은 이런 훈구파들이 눈에 차지 않았습니다. 곧 사림들은 훈구파와 날카롭게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사림들은 바른 말을 잘했기 때문에 삼사 등으로 주로 진출하여 왕과 대신들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비판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성리학적 정치에 이상향이었던 향촌 자치 등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이 같은 주장은 훈구 세력에게는 굉장히 기분 좋지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때문에 훈구세력은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4차례 사화를 일으켰습니다. 사화는 선비들이 화를 당했다는 뜻으로 사림들이 훈구 세력에게 정치적으로 패배한 사건을 의미합니다. 사림들은 4차례 사화를 당하면서 큰 위기에 빠집니다.
사림, 굴하지 않고 결국 그들의 세상을 열다
앞에서 제가 사림들이 크게 4차례 사화를 당했다고 했지요? 사화라는 게 규모가 상당히 커서 대부분의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사림은 결국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여 훈구 세력을 밀어내고 정치적 주도권을 잡습니다. 역사는 이유가 중요하다고 제가 항상 수업 시간에 얘기했죠? 이들은 어째서 중앙 정치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을까요?
<사림은 향약을 통해 향촌 지역의 민심을 장악했다>
사림들은 향약을 보급하면서 백성들에게 까지 성리학을 보급했는데 이것을 통해 향촌에서 사림의 지지 기반을 확고히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또한 각 지역에 성리학을 공부하는 한편 자신들이 받드는 선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서원을 만들어 자신들끼리 결속을 다졌습니다.
<공부하겠다는 데 반대할 명분이 있을까? 사림은 서원을 세워 자신들의 제자를 키우고 결속력을 강화한다>
결국 이 두 가지 발판을 이용해 사림들은 정치적 주도권을 훈구 세력으로부터 빼앗아 올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정치 세력의 주도권을 잡은 이후로 조선은 이제 백성들까지 성리학적 질서를 받아들이는 단계까지 오게됩니다.
하지만 성공한 세력들은 저 마다의 견해 차이가 존재하는 법. 사림은 정치 주도권을 장악한 이후에 정치적 견해 차이와 이조 전랑(이조 정랑과 이조 좌랑을 합쳐 부르는 말로 3품 이하 문관들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다)의 자리를 가지고 사림 간에 첨예하게 대립하게 됩니다. 특히 이조 전랑 자리는 자신들의 학맥에 있는 사람을 등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리였기 때문에 대립이 격화되었으며 결국 선조 때 동인과 서인으로 사림이 분열되면서 이후 이들의 정치를 붕당 정치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붕당 정치는 소모적인 당쟁이 아니며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하여 서로 나은 대안을 제시하고 서로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견제하는 어찌보면 정당 정치의 기초적 형태라는 것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
<조선 붕당의 흐름, 여기서 국사 공부를 좌절했던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ㅠ>
민본 사상을 바탕에 둔 문화가 싹트다
자, 이제 문화사 얘기를 해봅시다. 정치사와 문화사를 나누는 것도 상당히 웃긴 일이긴 하지만 교과서 구성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할 수 없지요. ^^; 원래 문화라는 것은 그 당시 정치 세력과 시대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조선은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수립된 나라이기 때문에 조선 전기 문화는 이 민본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이 민본사상의 완성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훈민정음입니다.
<훈민정음은 백성들이 의사소통을 쉽게 하고 유교 윤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고 창제되었다>
<조선의 문화>
훈민정음은 백성들도 문자를 알고 공부를 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만든 문자로써 만약 백성들이 글을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 창제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했던 문자입니다. 그러나 조선 왕조에서는 백성을 근본으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유교윤리를 보급하려 했기에 훈민정음 창제로 그것이 이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백성을 중심으로 생각했던 사례는 조선 전기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백성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농사를 위해 우리 실정에 맞는 농서인 농사직설이 편찬되었고 또한 농사에 필요한 날짜와 절기를 알기 위해 새로운 달력인 칠정산이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수 많은 천체 관측기구가 만들어지고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 농사에 필요한 기상 관측을 위해 조선 왕조가 노력했던 흔적이 보입니다. 또한 우리 나라 풍토에 알맞는 의서들도 만들어졌고 국방력 강화를 위한 신기전, 화차, 거북선등도 이때에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모든 문화와 기술의 경향은 한마디로 민본에 있습니다. 백성을 근본에 두고 백성을 생각했던 마음이 문화나 기술에도 적극 반영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민본외에도 조선 전기 문화를 결정지었던 중요한 특징이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주성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명나라와 대립하기도 하는 등 중국이라고 해서 무조건 한 수 접어주는 모습은 조선 초에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대 역시 작은 나라로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강구되었을 뿐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런 자주적 기풍이 문화에도 반영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때 적극적으로 단군의 후예라는 인식이 성립되었다. 고려 시기만 해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자주적 기풍은 민족적 기원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져 단군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졌습니다. 뭐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정했으니 그것만 봐도 단군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지요 ^^ 또한 우리 민족 사서인 동국통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이 편찬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정한 것에는 또 다른 불편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기자 조선 계승의식입니다. 기자 조선이란 말이 좀 생소할 수도 있는데 지금부터 알아봅시다 ^^
<기자의 초상화, 물론 상상도이다 ^^;>
기자는 중국 현자 중에 한 사람으로 중국 은나라 주왕의 폭정에 대해 적극 간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원래 우리도 그렇지만 싫은 소리 계속하면 짜증나잖아요? 그래서 주왕도 기자를 감옥에 가둡니다. 주왕은 이후 주나라의 무왕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는데 이때 기자도 풀려납니다. 주 무왕은 기자를 등용하려 했지만 기자가 거부하는데 여기서 재밌는 기록이 하나 전해옵니다. 그것은 주 무왕에 의해 이 기자가 조선왕에 봉해졌다는 얘기입니다. 이를 기자조선설이라고 하는데 이에 따르면 우리 단군조선 이후에 중국인인 기자가 조선을 지배했다는 얘기됩니다. 지금이야 이 얘기가 불쾌한 얘기지만 그 당시에는 중국이 문명의 상징이었으니까 기자가 조선에 왔다는 것 자체를 매우 자랑스러워 했고 그랬기에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은 기자의 조선을 잇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역사는 역시 한가지 면만 생각하면 안 되겠죠? ^^
마지막으로 지리 서적에 관한 얘기를 해야겠네요. 우리는 보통 조선 왕조 내내 지리학적 지식이 부족하다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만들 때도 논란이 많았던 것으로 아는데 그것은 좀 큰 오해입니다 ^^; 특히 조선의 건국 초에는 나라를 다스릴 정보가 많이 필요했으므로 적극적으로 지리서적을 편찬했습니다. 팔도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조선의 지리학적 지식이 후기에 비해 크게 보잘 것 없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팔도지리지>
그리고 대동여지도 얘기 중에 가장 웃긴 것이 전국 답사를 해서 지도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김정호가 초인도 아니고 모든 조선 땅을 돌아보지 않았을 겁니다 ^^; 답사를 가기도 했겠지만 예전 지도 역시 참고한 끝에 대동여지도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죠. 아시겠죠? ^^
성리학이 심화되어 조선에 만발하다
조선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성리학입니다. 하지만 조선 왕조가 처음부터 성리학의 꽃을 피웠던 것은 아닙니다. 한 학문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려면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요. 게다가 처음 조선의 개국을 주도했던 사대부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성리학만을 고집하지는 않아서 탄력적으로 다른 학문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건 훈구파할 때 배웠지요? ^^ 하지만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점점 사림 세력들이 정치 주도권을 잡아나가는 과정에서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연구가 뿌리 내리기 시작합니다.
<퇴계 이황, 동양의 주자로 불리지만 우리에겐 천원 할배에 불과하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나타나는 것이 이기론입니다. 이기론은 성리학에 가장 중심이 되는 원리로 조선시대 수많은 유학자들이 이를 연구했습니다. 특히 퇴계 이황은 이기론을 정립하는 데 큰 공헌을 세운 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이언적의 주리론을 더욱 심화 발전 시켰습니다. 이황의 주리론은 세상을 움직이는 근본원리인 이를 중요시한 것입니다.
<5천원 아저씨인 율곡 이이,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5만원권 여사로 아들 위에 있다 ^^;>
반면 율곡 이이는 서경덕의 주기론을 계승하면서 이황의 주리론도 나름대로 받아들여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그의 주기론은 실제 나타나는 현상인 기를 중요시했습니다. 두 학자의 이와 같은 차이는 그 당시 정치상황을 감안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황의 경우 아직 사림이 정치적 주도 세력으로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적인 기를 강조하기 보다는 원리, 원칙을 강조하는 이를 깊게 연구했고 이제 사림이 완전히 정치적 주도 세력으로 떠오른 율곡 이이 대에는 현실적 현상을 연구하는 기를 연구한 것입니다. 이 같은 정치 상황 차이에 주목 한다면 두 학자의 학문적 차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이런 학문 차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입장차이로도 이루어져 나중에 붕당이 탄생하는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성리학자들의 학맥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림의 계보, 영남은 경상도 지방을 뜻하며 기호는 경기와 충청 지방을 말한다>
정치세력에 따라 바뀌었던 양반문화
조선의 지배층은 양반으로 이들이 향유했던 문화를 바로 양반문화라고합니다. 하지만 양반이라고 해도 조선 초기와 중기 양반에 대한 성격은 사뭇달랐습니다. 개국초의 양반들은 훈구파라고 불리우며 성리학 외에도 다양한 문화를 수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그런 그들의 성격이 그들이 향유했던 문화에도 나타났는데요. 유교를 고집한 그림 보다는 도교나 노장사상이 녹아있는 그림도 제법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몽유도원도나 고사관수도에 나타납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의 꿈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으며 당대 유명한 문사들이 이 그림에 대한 찬을 달았다>
하지만 사림이 집권하고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양반 문화에 변화가 생기는데 주로 소박함, 지조 등을 나타내는 작품들이 나타납니다. 서원이 많이 건축되었으며 선비의 지조를 나타내는 매화, 난, 국화, 대나무를 그린 사군자의 문인화가 유행했습니다. 또한 도자기도 화려함 보다는 소박, 담백한 맛이 있는 백자가 유행했습니다.
<사림들의 단아함이 느껴지는 백자, 허접해 보인다고? 이 백자는 미국에서 경매 결과 12억원에 팔렸다>
또한 한글 보급이 확대되면서 그에 따른 가사. 시조 문학이 발전했으며 황진이, 신사임당 같은 여류 문인들의 활동도 눈에 두드러졌습니다.
사림들이 학맥에 따라 정치적 입장이 달랐던 까닭은?
사림들이 주도권을 잡은 이후로 붕당정치가 전개되어 나가는데 이 붕당은 주로 같이 공부를 한 사이거나 스승과 제자 사이에 주로 형성되었습니다. 정당에 일종이라고도 볼 수 있는 붕당이 왜 학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지 그 이유를 말할 수 있을까요? ^^
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2) 유교 정치의 이상을 꽃피운 조선 2-1 민본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통치 체제를 갖추다
조선은 무능한 나라일까?
우리가 역사를 배우면서 까고 까고 또 까는 나라가 하나 있습니다. 이토록 미칠 듯이 무한 까임을 당하는 나라가 바로 조선입니다. 여러분 조선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나요? 실질적 정치에는 관심없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했던 양반들, 상복을 몇 년 입느냐로 싸웠던 정치싸움, 무능력한 지배층 때문에 일본에게 망한 치욕스러운 나라. 이 모두가 사실은 일본이 설정한 '식민사학'이 조선을 깎아내리는 틀이라는 걸 알고 계십니까?
<일본이 설정한 식민사학의 잔재는 조선을 무능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러나 조선이 그렇게 무능했던 나라였을까요? 결론부터 얘기하면 아니였습니다. 조선이 건국의 이념으로 삼은 성리학은 백성을 어떻게 하면 잘 살게 할지 고민하는 학문이었습니다. 거기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어디까지나 공론(공공의 의견)을 중시하며 움직였습니다. 이러한 것만 봐도 조선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백성을 생각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조선이 세워지는 과정을 함께 살펴보도록 합시다. ^^
최초의 역성 혁명이 일어나다
고려 말기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권문세족들은 산과 강을 경계로 토지를 소유할 만큼 엄청난 토지를 차자하고 있었으며 또한 세금도 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고려 초기 부터 국가 종교였던 불교도 타락할 대로 타락하여 농민을 쥐어짜고 있었습니다. 농민들은 결국 세상을 등지고 산에 숨거나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 바로 신진 사대부였습니다. 이들은 성리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에 통감하고 권문세족과 불교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등장했습니다. 이들 신진 사대부는 처음에는 고려를 개혁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가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 새 왕국을 개창할 결심을 합니다.
이들은 이성계와 같은 신흥무인층과 손을 잡았는데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떠나는 도중 돌연 군사를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남아있던 권문세족들을 모두 제거하여 신진 사대부들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권력을 잡은 신진 사대부들은 토지 개혁(과전법)을 통하여 권문세족들의 토지를 빼앗고 자신들의 경제 기반을 다졌으며 국가 재정기반도 확충시켰습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고려 왕조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정몽주 일파는 온건파로 가고 새로운 나라를 나라를 개국하자는 정도전 일파는 개국파로 나뉘어 첨예한 대립을 거듭하다 온건파였던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게 맞아 죽습니다. 이로써 조선 건국에 방해되는 인물은 없어지고 1392년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가 개창됩니다.
<정몽주가 죽었다고 전해지는 선죽교, 아직도 혈흔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왕권과 신권의 절묘한 조화 조선은 백성을 근본을 삼고 덕에 의해 통치하는 유교 정치 이념에 따라 정부기구를 조직했습니다. 따라서 왕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신하가 왕권을 견제함으로써 정치 참여 인원을 늘려 왕이 잘못해도 바로 잡을 수 있는 정치체제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조선의 중앙 정치 기구>
의정부는 대신들이 모여 회의하는 합좌 기구로 고려시대 식목도감, 도병마사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며 삼국시대의 귀족회의에서부터 그 기원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의정부 밑에서 실질적으로 행정 업무를 담당한 6조가 있었습니다. 보통은 국왕은 의정부를 거쳐서 6조의 업무를 보고 받았지만 왕권이 강할 때는 의정부의 동의 없이 직접 6조와 연결되었습니다. 의정부와 국왕이 상의하는 것을 의정부 서사제라 하며 의정부를 통하지 않고 국왕이 직접 6조와 통하는 것을 6조 직계제라 합니다. 6조 직계제는 태종과 세조 때 시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정치기구에서 보다 눈에 띄는 것은 바로 3사로 대표되는 왕권을 견제하는 신권기구들이였습니다. 3사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으로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사헌부, 국왕의 정치를 비판하는 사간원, 학술기관으로 국왕과 신하들이 같이 모여서 공부하면서 정책을 논의하던 홍문관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고려시대 대간이 가지고 있던 간쟁, 서경, 봉박의 권리를 가지고 국왕을 견제했습니다.
<통초오옥 하여 주시옵소서~ㅠㅠ 왕이 듣기에는 짜증났겠지만 신권은 왕권을 견제하고 정치 참여의 폭을 넓혔다>
하지만 이렇게 신권만 강대했던 기구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의 비서 기관이었던 승정원과 왕의 특명에 의해 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가 있었는데 이것은 왕권을 유지하거나 강화하는 기구였습니다. 이 같은 조선의 통치체제는 경국대전이라는 책에 수록됨으로써 조선이 명실상부한 법치국가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왕의 힘이 모든 지방에 미치다
조선은 건국하면서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것을 천명하는데 그 의지가 어디에서 나타나냐면 바로 지방정치체제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조선은 8도로 행정구역을 나누고 향, 소, 부곡을 모두 폐지하여 행정구역을 모두 일원화하였습니다. 고려와 차이점이 느껴지시나요? ^^ 또한 고려때는 일부 지역만 지방관이 파견되었다면 조선은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어 왕이 직접 백성들을 돌보겠다는 뜻을 나타내었습니다.
<조선의 행정구역, 오늘날 행정구역과 거의 비슷하다>
지방 군현에 파견된 수령은 행정, 사법, 군사권 등 막대한 권한을 모두 장악했습니다. 수령의 힘이 강해지자 이때까지 지방에 강력한 유력자였던 향리는 그 지위가 격하되어 수령을 보좌하는 역할로 하락했습니다. 누군가 머리 속에 떠오르지요? 바로 이방이 그들입니다 ^^;
<지방의 향리들은 이제 이방과 같은 위치로 크게 격하되었다>
또한 각 도에는 관찰사가 파견되었습니다. 고려 시대때 안찰사가 파견되었던 것이랑 비교해볼 수 있겠지요? ^^ 이들은 각 군, 현에 파견된 수령을 관리, 감독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고려시대 안찰사가 임시직이었던 것에 비하여 관찰사는 그 지위가 보장되어서 안찰사보다 훨씬 힘이 강했답니다.
또한 향촌의 자치를 어느 정도 인정했는데 그것을 유향소라는 기구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유향소는 지방에 덕망있는 인사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수령을 보좌하면서 서울에 있는 경재소와 수시로 연락했습니다. 중앙 정부는 경재소를 통해 유향소를 통제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의 장악력을 높였습니다.
진정한 과거제가 시작되다
우리나라 본격적인 과거제의 시작은 고려시대부터입니다. 그러나 고려시대 과거제는 조선시대에 비해 약간 미흡하다고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하나는 과거를 치지 않고도 음서로 관직 진출이 가능했으며 무과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조선시대 들어서 이 두 가지를 보완하여 음서가 존재했지만 매우 낮은 관직만 허용했으며 무과를 새로 개설했습니다.
<조선시대 무과 재현 모습>
조선시대 과거는 크게 문과, 무과와 기술직을 뽑는 잡과로 구분되었습니다. 과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문과는 소과와 대과로 구분되어 소과는 초시와 복시를 통과하면 생원과 진사라는 호칭을 주고 지금의 대학과 비슷한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습니다. 여기서 공부를 한 사람들은 대과에 도전하는 데 대과 역시 초시, 복시로 나뉘고 여기서 선발된 33명은 임금 앞에서 보는 시험인 전시를 통하여 순위가 매겨졌습니다.
<조선시대 과거 재현>
조선의 과거제도는 음서의 폭이 좁아지고 과거의 제도가 정교화 됨에 따라 고려 시대가 가지고 있던 귀족적 특성이 떨어져 나가고 관료적인 체제로 정비되었습니다.
양인과 천민으로만 신분이 구별되다
이제 조선의 신분제도를 살펴볼 차례네요 ^^ 조선 시대로 들어서면서 고려시대때 존재했던 향, 소, 부곡이 차별 받던 평민들이 없어집니다. 이들은 대개 양인의 신분으로 편입되었으며 양인은 군대를 가고 세금을 내는 신분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과거 응시 자격도 있어 벼슬을 하는데 법적으로는 아무 제한이 없었습니다. 다만 돈이 없어서 시험을 준비하지 못할 뿐이었습니다 ㅠㅠ
조선은 법적으로는 두 개의 신분 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바로 양인과 천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사회가 복잡하게 됨에 따라 양인들은 양반, 중인, 상민으로 분화되어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이라는 4개의 계급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양반 혹은 사족들은 군역을 면제 받는 특혜를 누렸으며 중인들은 주로 기술직을 맡았습니다. 지금의 의사나 통역관 같은 전문직들이죠 ^^ 상민의 대부분은 농민이었습니다. 천민은 대부분 노비였으며 이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물건처럼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농자천하지대본! 농민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국가가 되다
계속 하는 얘기지만 조선은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삼은 나라였습니다. 유교 정치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민생 안정이며 민생이 안정 되려면 백성들이 농사를 안심하고 지어야만 했습니다.
<농사는 조선 시대 최대의 관심사였다. 수많은 농사 관련 서적과 농사에 대한 토론이 이를 반증한다>
나라에서는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않고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방지하기 이해 사, 농, 공, 상이라는 말을 만들어 직업을 차별했고 이를 토대로 백성들을 농토에서 떠나지 못하게 강하게 결박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은 화폐 유통이 다른 나라보다 많이 늦어졌지만 16세기에 이르면 상공업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고 상공업과 무역이 활성되었습니다.
하지만 후대 상공업과 무역이 발달해도 여전히 가장 중요했던 것은 농사였겠지요? ^^ 왜냐하면 국가의 주요수입원은 농사를 짓는 데서 나왔으니까요. 농사를 잘 짓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세금을 어떻게 걷느냐 입니다. 특히 세종 시절에는 이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을 도입했습니다.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은 그 토지의 사정을 보고 세금을 걷는 방식입니다. 전분 6등법은 토지의 비옥도를 보고 토지가 비옥하냐 비옥하지 않느냐에 따라 1~6등전으로 등급을 매겨 세금을 징수하는 방법이고 연분 9등법은 그해에 농사가 어떻게 되었느냐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까지의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농민들이 세금을 깎으려고 했겠지요? ^^ 조선후기로 갈수록 이런 현상이 두드러져 인조 때 가면 세금이 최하 4두로 고정되는 영정법으로 바뀝니다.
농민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세금을 걷느냐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관리에게 월급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화폐가 유통되기 어려웠던 시절로 주로 토지를 매개로 월급을 주었습니다. 최초에 시행되었던 관리들의 월급제도는 과전법으로 경기도 지역의 토지의 수조권(세금을 걷을 권리)을 관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전은 관리가 죽으면 반납해야했지만 수신전(미망인에게 지급), 휼양전(미성년인 자식에게 지급)의 명목으로 세습이 가능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현직 관리들에게 줄 과전이 부족해졌고 세조 때는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마저 잘 안되자 성종 때는 관리들이 수조권을 직접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직접 수조권을 행사하여 대신 관리의 과전에서 대신 세금을 받아 다시 관리에게 그 수익금을 지급하는 관수관급제로 바뀌었습니다.
<부동산에 대한 규제가 심해지면 부동산을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커지는 것처럼 관료들은 수조권을 받기 어려워지자 토지를 소유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규제가 심해지면 다른 수단을 강구하게 되는게 인간이죠 ^^; 결국 관료들은 과전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기 보다는 자신이 직접 토지를 사유화하는 길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결국 국가는 관료들에게 수조권을 주는 것을 포기하고 녹봉만 지급하게 되었습니다.
평민들은 왜 과거를 볼 수 없었나?
조선시대 평민들은 법적 신분은 모두 양인으로 과거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과거를 보지도 않았거니와 과거를 보기도 힘들었는데 어떤 이유에서 그랬을까요? ^^
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1) 민족을 재통일하여 발전한 고려 1-4 고려와 이웃 나라들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
우리 보통 하는 말이 있지요?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그런데 역사에서도 이런 말이 어울리는 나라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려입니다.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야 ^^;;>
고려는 유난히 외침이 많았던 나라입니다. 초기에는 거란의 3차례에 걸친 침입이 있었고 그 이후 여진족의 잦은 침입으로 여진족을 정벌하러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고려중기에는 몽골에 여러 차례 침입을 해와 전 국토가 초토화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또한 고려 후기에는 중국의 홍건적, 일본의 왜구들이 계속 침입하였습니다. 이처럼 고려는 수 많은 외침을 받았고 어떤 때는 그 침략을 훌륭히 막아내었지만 그렇지 못하여 굴복했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고려의 북쪽 국경은 점점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우리나라의 북쪽 국경 변천과정, 고려 후기에 가면 상당한 정도로 영토가 확장된다>
유난히 외부의 침략도 많았지만 그것을 잘 이겨내었던 고려. 지금부터 고려가 어떻게 외부 침략을 이겨내고 혹은 굴복하면서 북쪽의 영토가 어떤 과정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지 살펴보겠습니다.
호족, 거란에 굴하지 않는다
고려의 대외관계 변화는 고려 지배층의 성격에 따라 파악해볼 수 있습니다. 고려 초기 지배층은 호족들로 이들은 지방의 유력가였고 자기 지역에서는 왕과 같았기 때문에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중국 것보다는 우리나라 것에 만족했고 당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당당한 사람들이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는 때에 고려를 넘보는 외부 세력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거란이었습니다. 거란은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송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고 중국 본토를 넘보고 있었습니다. 거란은 송나라 치기 위해서는 배후의 고려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또한 고려는 송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고려 정벌의 필요성이 부각되었습니다.
<송과 고려는 친선, 거란은 고려와 적대 관계에 놓여 있었다. 요는 후방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한편 고려는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고 태조 왕건때 부터 적극적인 북진 정책을 펴나가고 있었던 상태로 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던 거란과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 더 관계가 나빠져 거란이 선물로 보내온 낙타 50여 마리를 굶겨 죽였습니다.
거란은 고려가 계속 송과 손을 잡아 자신들과 대적할 경우 국제사회에서 고립될 위험이 있으므로 고려 정벌을 단행하기에 이릅니다. 총 3차례에 걸쳐서 거란이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고려의 지배층들인 호족은 거란에 침입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1차 침입에서는 서희가 외교 담판을 벌여 거란군이 물러가고 강동 6주를 차지했습니다. 대신 고려 역시 송과 국교를 단절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거란 역시 어느 정도 목적은 달성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끊겠다고 한 말은 사실이었을까요? 우리 모두 알고 있지요? 그간의 배신의 흑역사들을 ㅋㅋ 당연히 이것도 구라였습니다 ^^;
<그럼 바구니에 있는 다시다는 뭔가? ㅋ 거란 역시 구라빨에 속아넘어가고 말았다>
고려가 계속 거란 몰래 송과 교류를 하자 거란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알지요? 깨달았을 때가 가장 늦었다는 것을 ㅋㅋ 거란은 송과의 관계를 끊고 고려 국왕이 요나라 황제를 알현하라는 조건을 걸고 재차 침입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고려는 잘 막아내었고 3차 침입에서는 강감찬이 구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침으로써 고려-거란 전쟁은 고려의 승리로 돌아갑니다.
<귀주대첩>
고려가 거란에 승리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는 고려, 송, 요 삼국이 세력 균형을 이루어 평화가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평화롭다고 해서 마냥 평화를 만끽하면 안되겠죠? 고려는 이 시기 또 다른 외침에 대비하여 북쪽에 천리 장성을 쌓았습니다.
이 시대 마지막 호족들, 여진을 정벌하다
거란-고려 전쟁에서 고려의 승리로 한동안 고려는 안정을 찾았지만 12세기 초무렵 여진족이 고려 북쫑 변경에 나타나 고려에 깔짝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꼴을 눈뜨고는 못보는 우리 호족들은 여진족을 토벌하기 위해 전략을 짭니다. 이때 윤관을 대장으로 한 별무반이 새롭게 조직되는데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으로 구성되어 여진족을 토벌했습니다. 이들은 동북방 지역에 9성을 쌓고 여진족을 몰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윤관이 쌓은 동북9성>
하지만 동북지방은 여진족들의 중요한 터전이었기 때문에 여진족들은 이 동북 9성을 빼았으려 쉴새없이 쳐들어 왔으며 한편으로는 다시는 나쁜 짓 안하겠다며 고려 국왕한테 애걸복걸 하기도 했습니다.
<동북9성 제발 주세요 ㅠㅠ 흐헝 ㅠㅠ 돌려주셔서 감사해요 ㅠㅠ>
결국 여진에 간청과 동북9성을 끝까지 지키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고려 정부는 동북9성을 반환하기로 합니다. 동북9성을 발판으로 성장한 여진은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을 건국합니다. 여진이 세운 금나라는 매우 강성하여 송나라 마저 정복하여 남쪽으로 밀어내기에 이릅니다. 이제 강대해진 금은 고려와 입장이 반대가 되어 군신관계를 요구합니다. 예전에 호족들이었다면 이 제의를 받아들이기 곤란했지만 그 동안 고려 내부에서도 지배층의 변동이 있어 문벌귀족이 지배세력이었습니다. 이들은 변화보다 안정을 추구했기 때문에 금과의 사대관계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로써 동아시아에서 유지되었던 세력균형을 깨어지고 금이라는 강자가 국제사회를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몽골과 맞선 무신들
금이 일어서고 한 동안 국제사회는 금에 의해 주도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13세기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나라를 끝장내는 종결자가 등장했으니 그 이름도 유명한 징기스칸이었습니다.
<몽골제국의 판도, 그들의 말발굽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당연히 몽골은 고려와도 접촉을 했는데 그 첫만남은 유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강동성 전투에서 몽골과 고려는 처음으로 만난 이후 몽골은 과대한 공물을 고려에게 요구했습니다. 특히 몽골 사신은 오만방자한 행동을 하여 고려 사람들의 불만을 샀습니다. 이처럼 양국 간에 관계가 지극히 좋지 않을 때 불미스러운 사거인 발생하는데 몽골의 사신이었던 제구유가 고려와 몽골 국경지대에서 피살당하자 양국 간의 관계는 겉잡을 수 없이 나빠졌습니다. 몽골은 고려와의 관계를 끊고 살리타가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니 이것이 고려-몽골 전쟁의 시작입니다.
1차 침입은 개경에서 방어했지만 몽골과의 육지에서 싸우면 질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챈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항전 태세를 갖춥니다. 결국 이렇게 되면 불쌍한 것은 백성들입니다. 총 일곱차례에 걸쳐 40년이나 침입한 몽골군은 육지를 철저히 휩쓸었고 백성들이 농사를 짓는 농토는 황폐화되었으며 수많은 문화 유산들이 불에 탔습니다.
<몽고의 침입, 고려의 백성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백성들은 이렇게 힘이 든 와중에도 몽골군과 맞서 싸워 승리하기도 했는데 처인성에서는 당시 일반 군현보다 신분이 떨어지는 부곡민을 이끌고 몽골 장수 살리타를 죽였습니다. 또한 충주성에서는 노비로 구성된 군대가 몽골군을 물리쳤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활약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쟁으로 인한 신분 상승이라는 강력한 동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40년 동안의 몽골항쟁은 백성들에게 극심한 고통만 남긴 채 몽골에 항복하는 것으로 결론이 맺어졌습니다. 더불어 몽골과의 항전을 주장하던 무신정권도 종말을 맞고 맙니다. 그런데 이때 무신정권 하에서 큰 세력을 누리던 무신들의 사병 집단인 삼별초는 몽골과의 항전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삼별초 항쟁의 지도, 삼별초는 민족적 항쟁인가?>
삼별초는 진도,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겨가며 몽골과의 항전을 수행했지만 결국 고려 관군과 몽골군 연합에 진압되고 맙니다. 이들이 몽골군에 대항한 것은 어디까지나 무신정권 하에서 누려오던 자신의 권력을 놓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지 민족적 대의를 가지고 몽골군에게 대항했던 것은 아닙니다. 특히 제주도까지 옮겨서 수행했던 항전은 제주도 백성들에게도 고통이었습니다. 제주도 백성들에게 삼별초나 몽골군이나 마찬가지 침략군이었습니다.
삼별초 항쟁이 마무리되고 더 이상 고려에는 몽골에 대항할만한 세력이 없어졌습니다. 몽골은 고려에 굴욕적인 강화 조건을 강요했습니다. 고려 국왕은 원나라 황제의 딸과 결혼을 해야 했으며 다루가치가 파견되어 고려 내정에 간섭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외왕내제 체제를 유지하며 대내적으로 황제국 행세를 하던 고려는 더 이상 황제국을 자처할 수 없었으며 폐하는 전하로, 짐은 과인으로 태자는 세자로 그 격이 제후국으로 떨어졌습니다. 또한 몽골이 준비하던 일본원정 준비도 고려가 담당해야 했으며 영토의 일부마저 빼앗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굴욕적인 강화조치는 공민왕의 개혁 조치로 사라지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 남아있었습니다. 공민왕의 개혁 시기에도 외침이 끊임없었는데 이때는 왜구, 홍건적들이 줄기차게 침공했고 이들을 최영, 이성계 등이 막아내면서 고려 후기에 신흥 무인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고려 후기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이들을 격퇴하면서 신흥 무인세력이 성장한다>
고려, Korea를 알리다
우리나라의 영어 이름이 Korea인건 다들 아시죠? 그런데 우리나라의 외국 명칭이 고려라는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우리나라의 기록이 서양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루브룩이라는 선교사가 몽골 동쪽에 카울리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당시 프랑스 국왕이었던 루이 9세에게 보고하면서 최초로 등장했습니다. 이후 카울레, 카우리로불리다가 차츰 코리아로 자리를 잡아가게 됩니다. ^^
자, 그럼 코리아라는 이름을 알리게 된 고려의 대외관계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11세기에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면서 고려, 송, 요 간에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는 걸 여러분은 잘 아실 겁니다. 특히 고려는 그 당시 우수했던 송의 문하를 받아들이기 위해 송과의 교류에 적극 신경을 썼습니다. 특히 송의 상인들과 고려의 상인들은 수시로 송과 고려를 왔다갔다 했습니다. 송의 상인들의 활발한 교역 덕분에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고려에 들어오게 됩니다. 아라비아 상인들은 '대식국' 사람들로 기록이 되어 있으며 이들은 국제 무역항이었던 벽란도를 통해 서역의 물건이었던 수은, 향료, 산호 등을 가지고 왔습니다.
<고려 초기 교역>
고려 후기에도 교역은 끊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고려가 원에 복속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려는 원제국의 일원으로 활발해지는 동서 문화 교류에 일원이 되었습니다.
쌍화점의 의미
여러분 쌍화점이라는 고려가요를 아시나요?
<이거 말고-_->
쌍화점은 회회아비가 등장하고 회회아비가 한 여인에 손목을 쥐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이 고려가요를 보고 고려 시대 상이 어땠을지 고려의 대외관계와 고려 여성의 지위를 감안해서 생각해시기 바랍니다. ^^
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1) 민족을 재통일하여 발전한 고려 1-3 문벌 귀족 사회가 동요하다
오늘 수업은 잠깐 혼란 스러울 수도 있을 거에요. 교과서 중간을 건너뛰고 고려의 문화부터 해야되서 그래요 ^^ 너무 혼란스러워 하지 마시고 차분히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
막장드라마! 문벌 귀족
여러분 막장 드라마 많이 보죠? 막장 드라마 보면 항상 나오는 패턴이 뭔가요? 사실은 내가 내 딸이다 부터 시작해서 둘이 남매여서 이루어지면 안 되는데 사실 그 아이가 병원에서 바꿔치기 되어서 어쩌고 저쩌고...; 참 복잡하시죠?
<ㅠㅠ 얽히고 섥혀있는 가족 관계. 내가 이래서 드라마를 안 본다;>
그러나 여러분 고려시대에도 막장 드라마가 존재했다면 그것이 믿어지십니까? 긴 설명이 필요없고 고려 왕실과 그 당시 문벌 귀족의 하나였던 경원 이씨와의 가계도를 살펴봅시다.
<인종의 어머니인 문경 태후의 동생과 인종이 결혼했으니 인종은 이모들과 결혼한 셈이 된다>
딱 봐도 한 사람의 딸 들이 고려 왕들에게 시집을 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 당시 문벌귀족들은 혼인을 통해 자신들의 세력 기반을 다지고 앞 시간에 얘기했던 과거, 음서를 통해 관직을 독점했습니다. 또한 관직에 나가면서 그에 대한 댓가로 받는 과전과 더불어 5품 이상 관리나 공신이었던 이들은 공음전 역시 받아 경제적으로도 탄탄한 기반한 구축했습니다.
<세상은 돈과 권력! 문벌귀족은 이 모두를 음서와 공음전으로 확실히 틀어쥐었다>
이렇게 자기들끼리만 해쳐먹은니까 다른 사람들이 배가 많이 아프겠죠? 그래서 문벌귀족에 반발하는 반란이 일어났는데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도 바로 이런 문벌귀족이 독점적인 세력을 형성한 상태에서 일어났습니다.
문벌귀족의 대표적인 세력 중 하나였던 경주이씨의 이자겸은 그 위세가 자못대단했습니다. 인종 때에 이르러서는 두 딸을 왕에게 시집보내고 주요관직을 자신이 차지하고 왕에게 행해야하는 여러 격식을 폐지하여 왕처럼 지냈습니다. 왕처럼 지내다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결국 자신이 왕을 하고 싶겠지요? 그래서 이자겸은 척준경이라는 사람과 함께 1126년에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이자겸의 난이라고 합니다. 척준경은 당시 최고의 무장으로 강력한 군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윤관이 동북 9성을 개척할 때 여진족을 미친듯이 쓸어버리는데 적진에 돌입하여 적장을 배고 포로 두명을 구출해오는 등의 엄청난 일을 합니다. 그만큼 척준경의 무력이 강대했다는 뜻이죠. 아무튼 이런 강력한 척준경과 손을 잡았으니 이자겸이 눈에 뵈는 게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는 것이 자신을 철석같이 도울 줄만 알았던 척준경이 배신을 때립니다. ㅠㅠ
<아 그렇게 잘해줬것만 ㅠㅠ 성왕, 신라에 이은 또 하나의 배신의 역사가 탄생되다 ㅋ>
여진족도 바르던 척준경인데 이자겸쯤이야 허접이겠죠? 가뿐히 이자겸을 제거합니다. 이로써 문벌귀족 사회는 더욱 더 혼란이 가중되기에 이릅니다. 강대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없어지면 그 권력을 가지기 위해 다른 사람이 달려들기 마련이죠.
문벌귀족 사회의 혼란에 또 다시 기름을 들이부은 것은 바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었습니다. 묘청은 스님인데 이 스님은 배짱이 장난아니었나 봅니다. 풍수지리설을 내세우면서 서경에 천도하고 칭제(황제를 칭하고) 건원(연호를 쓰면)을 하면 주변 36개 나라가 모두 조공을 하고 당시 동북아의 최강국가였던 금나라를 정벌할 수 있을거라는 희대의 사기를 칩니다!
<벌거벗은 임금님급의 사기를 치는 묘청, 처음에 국왕이었던 인종도 혹한다>
하지만 옆에서 보고 있던 문벌귀족 역시 당하고 있지 만은 않았습니다. 수도를 서경으로 천도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온갖 기득권이 있는 개경을 떠난다는 얘기와 일맥상통합니다. 수도를 떠나서 뉴타운 개발되면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는 것은 당연지사! 문벌귀족들은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안 된다고 소리칩니다.
<통촉 ㅠㅠ 문벌귀족들은 떼쓰기 스킬을 시전한다>
게다가 서경에 연이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자 막상 천도하려고 했던 인종 역시 떨떠름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생각처럼 서경천도가 진행되지 않자 묘청은 자작극을 꾸미기 시작합니다. 연못에다가 떡을 던져 떡에 있는 기름이 연못 위에 떠오르자 오색 영롱한 기운이 연못에 떠올랐다고 구라를 칩니다! -_- 구라도 길어지면 속는 사람이 알아차리는 법. 이로 인해 인종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서자 묘청은 서경을 중심으로 하여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로 정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결국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게 1년만에 제압당했습니다.
칼을 쓰는 무인의 시대
문벌귀족 사회는 일단 큰 위기는 넘겼으나 이 두번의 커다란 난은 그들에게 시한부 선언을 한거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문벌귀족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계속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며 개혁에 대한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더구다 오만방자해진 그들은 무신을 툭하면 무시했습니다. 특히 하급 군인들은 생계수단이었던 군인전마저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번번히 국가 잡역에 동원되자 불만이 높아졌습니다. 이와중에 무신들의 불만에 기름을 들이붓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문벌귀족 김부식의 아들이었던 김돈중은 무신 중 높은 위치에 있었던 정중부의 수염을 태웠는데 정중부가 이에 화가 나 김돈중을 크게 혼내자 김돈중의 아버지였던 김부식은 오히려 정중부를 벌주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무신들의 불만은 한계점에 이르렀고 결국 정중부, 이의방 등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켰는데 이를 무신정변(1170)이라고 합니다.
<무신정변, 보현원에서 문신들이 제거되고 무신들의 시대가 열리다>
무신들은 무력으로 그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았습니다. 조위총, 김보당 같은 인물들이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문벌귀족과 깊은 연관이 있던 교종의 불교사원인 귀법사도 난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무신들 간에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도 끊이지 않았는데 정중부, 이의방, 경대승, 이의민 등이 차례로 권력을 잡아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다 최충헌이 권력을 잡은 이후 무신정권도 안정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최씨정권은 총 4대에 걸쳐 60년간 유지되었습니다. 이들은 도방과 삼별초라는 사병집단을 두어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했으며 교정도감, 정방을 통해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또한 최씨 정권의 2대 집권자인 최우부터는 문신을 등용하기도 했는데 능문능리(能文能吏 : 능할 능, 글월 문, 능할 능, 아전 리)를 앞세운 관료를 등용했습니다. 능문능리란 학문이나 이론적 인재보다는 실재 행정에 밝은 인재를 뜻합니다. 이때 신진사대부들이 등용되기도 했으며 이규보 등이 유명했습니다.
몽골의 침입으로 등장한 권문세족
무신들의 정권은 정확히 100년이 지속되었는데 이들이 무너진 이유는 바로 몽골의 침입 때문이었습니다. 새롭게 초원의 강자로 등장한 몽골은 고려를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몽골의 압력에 무신정권은 강경하게 대응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강경하게 대응한 이유는 이들이 애국지사이거나 민족의 영웅이여서 그런게 아니고 몽골에 굴복하면 그들의 권력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신들이 넘치는 기상과 절개가 있어서 몽골에 항복 안 한게 아니다. 그들은 단지 권력의 노예였을 뿐>
어쨌든 당시 세계최강이었던 몽골과의 전쟁은 고려의 패배로 끝나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무신들은 권력을 잃게 되고 대신 원나라와 친한 권문세족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권문세족은 원나라 황제의 고려 출신 황후였던 기황후의 친인척 관계이거나 혹은 원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였습니다. 이들은 학문적 소양이 많이 딸렸고 믿을 것을 오로지 원나라 밖에 없었습니다. 네, 전형적인 간신배가 연상되죠? ^^;
<딸랑딸랑. 머리에 든 건 없어도 간신배 짓은 잘할 수 있다 ^^;>
어쨌든 권문세족들은 원나라와 친하게 지낸 덕분에 큰소리를 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배운 건 별로 없지만 원나라한테 샤바샤바를 잘한 덕에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했고 중신들의 회의기구였던 도평의사사를 장악하여 엄청난 권력을 누렸습니다. 이들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고려 국와은 몽골 침입이후 대대로 몽골 공주와 결혼을 했기 때문에 원나라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원과 친했던 권문세족들을 건드릴 수 없었고 이를 안 권문세족들은 토지를 마음대로 늘리고 백성들을 쥐어 짜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당시 권문세족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는지 청산별곡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렇게 권문세족들의 횡포가 심해지자 이를 못 마땅하게 지켜본 세력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신진 사대부였습니다. 이들은 무신정권 때부터 천천히 관직에 진출했고 공민왕의 반원 개혁 정치 때 급격한 성장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성리학을 공부하여 학문적 소양이 우수한 편이었고 경제적으로 중소 지주로서 권문세족들의 대토지 소유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원나라를 싫어했고 대신 중원에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명에 대해 우호적이었습니다. 지금 이들의 힘은 미약했지만 나중에 조선의 건국을 이끌어 가는 주요 세력이 되었습니다.
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1) 민족을 재통일하여 발전한 고려 1-5 개방성을 띤 고려사회, 1-6 귀족 문화의 꽃이 피다
신분상승이 가능하며 진취적 여성이 있던 고려 시대
잠시 고려의 대외 관계는 건너뛰고 고려의 문화를 먼저 배워봅시다 ^^ 고려의 대외 관계는 할 얘기가 많아서 나중에 자세히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고려시대는 신라 사회와 비교하여 제한적이긴 하지만 신분 상승이 가능했습니다. 신라는 골품제라는 특유의 신분제가 있기 때문에 진골이 아니라면 높은 관직과 관등을 차지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고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방의 향리들은 과거를 통해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었고 군인들은 외적의 침입이 많았기 때문에 군공을 쌓아 무관으로 출세할 수도 있었습니다.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 진골이 아니라면 1~5품의 관등에 오를 수 조차 없었다>
특히 하극상(부하가 상관의 목을 치는!)의 시대였던 무신정권 기에는 천민 출신이지만 최고 권력자까지 오른 이의민이라는 인물까지 등장했습니다. 이에 자극 받은 하층민들은 신분 해방 운동을 벌였습니다. 신분해방운동에는 대표적으로 만적의 난이 있습니다. 만적은 이의민 집의 종으로 자신의 주인기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결국 난은 실패로 돌아갑니다만 신분 해방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대몽항쟁기간에는 군공이 쌓이면서 특수 행정 구역이었던 향, 소, 부곡이 일반 군현으로 승격되는 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인생역전! 전란은 백성들에게 괴로움을 가져다 주지만 신분 상승의 기회도 동시에 가져다 준다>
고려의 신분제 사회에 대해서 알아보았으니 이제 여성에 대해 알아봅시다.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여성사를 매우 좋아한답니다. ^^ (관심있으시면 한국 여성사 편지라는 책을 읽어보세요. 나는 좀 더 수준이 있는 책을 원한다고 하시면 '대중독재와 여성'이라는 책을 읽어보세요. 뒤에 책은 매우 많이 어렵습니다 ^^;;) 고려는 여성에 관해서는 개방된 사회였습니다. 어떻게 여성에 관해 개방된 사회인지 알 수 있냐면 재산 상속에 관한 것을 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어떤 사회든 재산 분배의 형태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느냐를 보면 그 계층이 그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자녀가 여자라도 균분 상속이 가능했습니다. 이것 한 가지만 봐도 여성이 상당히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고려가요 중 하나인 서경별곡에 보면 적극적인 여성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어 이 당시 고려 시대 여성들이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적극적인 여성에 관한 재미있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
박유가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 지금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처를 하나 두는데 그치고 있으며 아들이 없는 자들까지도 감히 첩을 두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청컨데 여러 신하,관료들로 하여금 여러 처를 두게 하되 품위에 따라 그 수를 점차 줄이도록 하여 보통 사람에 이르러서는 1인 1첩을 둘 수 있도록 하며 여러 처에서 낳은 아들들도 역시 본처가 낳은 아들처럼 벼슬을 할 수 있게 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나라 안에 원한을 품고 있는 남자와 여자들이 없어지고 인구도 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부녀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원망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때마침 연등회 날 저녁 박유가 왕의 행차를 호휘하여 따라갔는데 어떤 노파가 그를 손가락질하면서 "첩을 두고자 요청한 자가 바로 저 놈의 늙은이다."라고 하니,듣는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서로 가리키니 거리마다 여자들이 무더기로 손가락질하였다. 당시 재상들 가운데 그 부인을 무서워하는 자들이있었기 때문에 그 건의를 정지하고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다. <고려사>
이 같은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은 몽골이 우리나라에게 항복을 받으면서 수많은 공녀를 자신의 나라로 매년 끌고 갔는데 이로 인해 인구가 줄어들 것을 두려워하여 그에 대한 방편으로 박유가 일부다처제를 제안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엄청 혼나죠 ^^ 특히 재상들은 자신의 부인이 무서워서 이 법안에 찬성하지 않았다는 점을 봐도 고려시대에 여성의 지위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 재상들은 공처가였나 보다 ^^;>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운 고려
고려하면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화려한 문화입니다. 특히 고려 청자를 박물관에서 실물로 직접 본 사람이 있으면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연신 감탄을 하게 될 것입니다.
<국보 74호로 지정된 청자 오리형 수적(벼루에 물을 붓는 용기)>
하지만 고려 청자는 고려 귀족 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고려 시대에 이런 문화만 있었다고 생각하면 경기도 오산입니다. ^^ 음... 미안합니다-_-
<또 다시 무리수인가-_-;>
자 어쩄든 화려한 귀족문화로 대표되는 고려 청자 말고도 고려의 문화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고려는 불교가 국교인 국가로 불교에 관련된 유물과 유적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특히 여러 외적의 침입으로 인해 부처에 힘을 빌어 외적을 물리치려는 의도가 담긴 대장경이 많이 제조되었습니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이탈리아 장인들이 한땀 한땀... 아니 승려들이 한 글자 한 글자 정성들여 글자를 새겼다>
특히 몽골의 침입을 막기위해 제조된 팔만대장경은 2007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고 1995년에는 이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런 불교 문화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유학이 강조되고 과거가 실시 되면서 유교도 발전을 했습니다. 개인 문집이 많이 편찬되었는데 이규보의 동국이상집이 대표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알아볼 것은 고려 초기에 호족 문화에 관해서입니다. 호족들이 지배층일 당시 아직 사회가 혼란했으므로 호족들은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고 다른 사람들을 제압하기 위해 주로 규모가 큰 문화 유산들을 만들어내었습니다. 특히 관촉삭 석조 미륵보살 입상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대형 문화 유산을 건립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의 뒷모습,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대신 대형으로 만들다보니 세련된 맛은 떨어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도 이런 유산들은 그 당시 호족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어서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문벌귀족들은 왜 막장드라마를 썼는가?
선생님이 앞에 문벌귀족들이 막장드라마처럼 친인척끼리 결혼을 하기도 했다고 설명했지요? 이들이 왜 이런 결혼 형태를 보여주었는지를 잘 생각해봅시다. ^^ 정답은 수업 시간에 공개됩니다.
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1) 민족을 재통일하여 발전한 고려 1-1 후삼국을 통일하고 새 시대를 열다
통합의 리더십, 왕건
한국사의 여러 인물 중 여러분이 존경하는 다양한 인물이 있을 겁니다. ^^ (없으면 할 수 없고요 ㅠㅠ) 안중근 의사, 이순신 장군, 유관순 열사, 세종대왕, 광개토 대왕 기타 등등이 있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왕건이란 인물을 가장 좋아합니다. 왜 그러냐고요? 왕건이야 말로 진정한 통합의 리더십을 지녔던 사람이기에 그랬습니다 ^^
<진정한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했던 왕건>
왕건은 어찌되었든 후삼국의 통일을 이끈 승리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유리한 기록이 다소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가 늘 승자만을 위해 노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것을 감안할 때 왕건이 발휘했던 통합은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숙적이었던 견훤을 끌어안고 혼란한 시대를 도래하게 한 장본인이었던 신라 역시 끌어 안았습니다. 또한 수많은 호족들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게 됩니다. 이런 포용적인 힘 때문에 왕건의 출신이 그다지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결국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어찌되었든 분열된 나라를 다시 통합하고 일어선 고려라는 나라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봅시다. ^^
고구려 계승을 천명한 고려, 후삼국을 통일하다
신라 하대에 들어서면 강력한 왕권이 후퇴되고 귀족들이 발호하면서 나라는 혼란스러움의 극을 달립니다. 이런 혼란한 시대에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진 틈을 타 지방에서 호족들이 그 힘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전제왕권이 약해지자 각 지방에서 카라, 소시, 2NE1 등등이 일어나 혼란에 빠진... 응? -_-;;>
지금 우리 시대에 각 종 걸그룹이 들이 난립하듯이 지방에 호족들이 난립하면서 각자의 세력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 호족들은 자신이 다스리던 지방에서 장군, 성주 등을 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이런 호족들을 규합하고 큰 세력으로 성장해난 것이 후고구려의 궁예, 후백제의 견훤, 고려의 왕건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왕건은 해상 무역을 통해 성장한 호족으로 처음에는 넓은 기반이 없었으나 궁예의 부하로 많은 전공을 세웠고 특히 나주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자신의 세력 발판을 마련합니다. 이후 궁예가 내가 미륵불(석가모니가 입멸한 뒤 56억 7천만년--;; 후에 중생을 구제하고자 나타나는 미래불)-_-!이라는 무리수를 두자 과감히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이 스스로 왕이 되어 고려를 건국합니다.
<나는 미륵 ㅋㅋㅋ(왼쪽 궁예), 이 새끼가 드디어 미쳤구나-_-;(오른쪽 왕건)>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고 특유의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호족 세력을 통합했으며 밖으로는 중국 5대(중국의 당이 망하고 북중국에 들어선 다섯 왕조를 5대라 한다. 또 같은 시기 북중국을 제외한 지방에서 10개국이 들어서는데 이들을 10국이라 하고 이 시대를 통칭 5대십국이라 한다. 960년 송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오대십국 시대는 종료된다)와 외교관계를 맺어 대외관계를 안정시키고 후백제와 경쟁했습니다. 반면 신라에는 우호적인 태도로 다가가 신라의 민심을 사는데 성공했고 이는 결국 신라전체가 935년에 고려에 귀순하는 사태로 이어집니다.
신라가 귀순을 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힘이 있다고 돈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행동을 하는데는 명분과 대의가 있어야했습니다. 명분과 대의가 따르는 행동은 정당화가 되었으며 그것은 백성의 마음을 모으는 힘을 발휘합니다.
<대의는 추상적인 가치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실질적인 효과를 낸다>
신라가 고려에 귀순했다는 사실이 왕건에게 대의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신라 왕이 가지고 있던 정통성이 왕건에게 가는 역사적 순간이었고 이로 인해 후삼국 간의 싸움은 결정적으로 고려에 기울었습니다. 왕건이 견훤에게 수많은 패배를 당하고도 결국 마지막에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신라를 병합한 왕건은 후백제를 계속 압박했습니다. 이 당시 후백제는 내부의 심각한 왕위계승으로 인한 갈등을 겪고 있었는데 심지어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쫓겨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합니다. 왕건은 견훤을 받아들여 자신의 후백제 토벌의 정당성을 한층 더 공공히 다졌고 결국 936년에 후백제군을 격파함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했습니다.
한편 발해가 거란에게 926년에 멸망하는 데 이때 발해 왕자 대광현이 많은 유민을 이끌고 고려에 귀순해옵니다. 왕건은 이들을 받아들여 진정한 의미의 민족 재통일을 달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통일 이후 왕건의 통합정책
원래 창업(나라를 여는 일)보다 수성(나라를 지키는 일)이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이제 막 통일을 한 왕건의 앞에는 수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습니다.
<통일하면 다 끝일 줄 알았지? 통일 이후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이다>
왕건이 해결해야 할 첫번째 일은 첫째도 민생안정, 둘째도 민생안정이었습니다. 신라 하대 귀족들의 과도한 수탈로 인해 피폐해진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금 부담을 가볍게 해주었고 흑창(곡식이 부족할 때 곡식을 꾸어주고 추수한 후에 갚게 하는 구제 기관, 고구려에 진대법도 이와 유사하다. 조선시대에 환곡으로 계승되었다)을 설치하여 백성들의 구제에 앞장 섰습니다. 그리고 흩어진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기 위해 불교를 적극 장려하여 연등회, 팔관회 등의 행사를 개최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모았습니다.
<다시 한 번 불심으로 대동단결! 불교는 민심을 모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생안정과 더불어 또 하나의 관심은 강대한 호족 세력을 어떻게 지배하느냐였습니다. 호족은 자기 지방에서는 왕처럼 지냈으므로 이들을 통제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건이 생각해낸 기발한 아이디어가 바로... 결혼-_-;
<왕건은 무려 29명의 부인을 받아들인다. 하렘인가-_-;>
왕건은 무려 29명의 여인을 자신의 부인으로 맞아들입니다. 하지만 이건 왕건이 순전히 여자를 밝혀서가 아니라;; 유력 호족들과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회유하기 위함이였습니다. 이외에도 자신의 성인 왕씨 성을 하사하여 자신의 일족으로 만드는 등의 정책을 펴나갔습니다. 이렇게 당근을 주는 정책을 펴는 반면 한편으로는 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기인제도와 사심관 제도를 사용했습니다. 기인제도는 일종의 볼모 제도로서 지방 호족의 자제를 서울에 인질로 잡아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 호족이나 잡아들이지 않고 그 지방의 유력한 호족의 자제만 잡아들였으니 그 당시에는 이런 장면도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너 임마 세력 얼마나 강해? 내 아들 볼모로 서울에 잡혀갔거든 깝치지마라-_->
이런 기인제도 외에도 사심관 제도로 당시 취약했던 지방 통치를 보완했습니다. 사심관 제도는 중앙에 올라온 지방의 유력자를 자기 출신 지역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자신의 지역을 통치하게끔 한 제도였습니다.
이외에도 왕건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나라 이름을 고려로 삼은 것만 보아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왕건은 적극적인 북진 정책을 펴나면서 평양을 서경으로 삼아 중시했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적대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청천강까지 영토를 넓힐 수 있었습니다.
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1) 민족을 재통일하여 발전한 고려 1-2 새로운 통치 체제를 마련하다
유교가 새 시대의 원리가 되다
왕건의 후삼국 통일 이후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 사회를 지배하던 원리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신라는 골품제로 인해 여러모로 폐쇄적인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는 이런 폐쇄성을 극복해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폐쇄성을 극복하기 위해 새롭게 채택된 시대의 운영원리는 바로 유교였습니다.
이 시대에는 불교, 풍수지리설 등이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지만 정치에서는 유교 이념이 운영 원리로 채택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불교나 풍수지리설은 정치면에서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안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만약 다른 나라가 침범을 해왔을 때 불교 운영 원리를 따른다면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퇴각시킨다라는 정책을 채택한다면? -_-;; 가뭄이 들어 백성이 신음하는데 이게 다 욕심에서 비롯된 거라며 참선을 하면? -_-;; 답이 안 나오죠? 이 같은 이유로 불교나 풍수지리설은 현실적인 운영원리로 적합하지 못합니다.
<불교나 풍수지리설은 그 꿈은 높지만 현실운영원리로 들어가면 별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유교적 운영원리가 처음부터 확고히 고려 사회의 지배적 이념으로 자리 잡았던 것은 아닙니다. 유교적 운영원리는 광종 때부터 서서히 그 위치를 다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광종은 강대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던 호족을 누르기 위해 노비안검법(예전에 양인이었던 노비를 해방하는 법으로 당시 노비는 호족의 경제력과 군사력에 직결되어 있었기에 호족들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을 실시하는 한편 호족 자제들을 아무런 기준 없이 등용하던 인사 정책을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제도로 바꿉니다.
<과거제의 실시는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등용할 뿐 아니라 왕에게 충성하는 인재를 뽑을 수 있게 된다>
성종 때에 이르면 신라 6두품 세력들이 대거 정치에 참여하면서 유교 정치가 비로소 현실이 되기 시작합니다. 최승로는 시무 28조라는 유교 정치 이념을 제시했고 성종은 최승로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이로써 2성 6부의 중앙 관제가 마련되고 12목의 지방장관이 파견되면서 고려는 중앙 집권화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국자감이라는 교육기관도 정비되어 유학 교육은 더욱 장려되었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운영원리인 유교는 보다 합리적인 길을 제시했고 이로 인해 고려는 신라 보다는 좀 더 개방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통치의 구조가 완성되다
성종 때 유교적 운영원리가 지배 원리로 확고히 자리잡게 되자 이 유교적 운영원리에 맞추어 중앙 통치 조직과 지방행정도 조직됩니다. 중앙의 정치기구와 지방행정이 조직된다는 의미는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뼈대가 완성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고려 때 완성된 중앙 정치 조직과 지방 행정 조직을 하나씩 살펴볼까요? ^^
성종 때 조직된 2성 6부제는 당의 3성 6부제를 모방한 것이었으나 고려 만의 독자성이 잘 녹아있는 제도였습니다. 말하자면 짜장면에 된장 넣은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찾아보니까 진짜 있더군요. 된장 짜장면-_-;;>
최고 중앙 관서는 중서성과 문하성을 합친 중서문화성이고 이곳의 장관인 문하시중이 국정을 총괄하는 가장 높은 관직이었습니다. 상서성은 실질적 행정을 담당하는 6부를 총괄했습니다만 실상 중서문화성에 아래에 있는 기관이었지요. 중추원은 군사 기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아주 중요한 기구였습니다만 삼사는 당의 제도와는 다르게 회계만을 담당하여 그 격이 떨어지는 기관이 되었습니다.
독자적인 고려만의 기구도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레알 된장기구인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입니다.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중서문화상과 중추원의 고관들인 재신과 추밀(줄여서 재추) 모여 회의를 하는 기구로 귀족들이 모여 회의를 하던 귀족 회의의 전통을 계승한 기구입니다. 또한 어사대는 감찰 기관으로 정치 잘잘못을 논하고 관리의 비리를 감사했습니다. 어사대는주로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더불어 대간으로 불렸습니다. 이들 대간은 왕의 잘못을 논하는 간쟁, 왕명을 시행하지 않고 돌려보내는 일종의 거부권인 봉박, 관리 임명과 법령의 개폐에 동의하는 서경권을 가졌습니다. 이런 기구가 존재했다는 것은 고려가 왕권과 신권이 조화된 정치를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의 중앙 정치 기구>
이제 지방 행정 기구를 알아볼까요? 고려의 행정 구역이 본격적으로 뼈대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성종 때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지방에 12목을 파견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이후 현종 때 8목으로 확정되면서 오도와 양계, 경기로 행정 구역이 정해집니다.
<5도 양계의 지도>
여기서 5도는 일반 행정 구역입니다. 이곳에는 안찰가 파견되어 도내를 순찰하는 임무를 맡았고 그 아래 주, 군, 현에는 지방관이 파견되는데 지방관이 파견되는 지역보다 그렇지 않은 지역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고려의 중앙통치구조는 완비되지 않았고 그 당시에는 그런 짜임새 있는 지방 통치 체제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적은 인원만을 파견했던 것입니다.
이외에도 고려의 지방행정 구역에 특이점은 바로 특별행정 구역에 있었습니다. 향, 소, 부곡은 특수 행정 구역으로 특정 물건을 생산해서 바치는 등의 일을 맡은 사람들이 주로 사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 사는 백성들의 처지는 다른 일반 행정 구역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낮았습니다. 이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속현도 일반 주현에 속해 있는 사람들 보다 더 낮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또 하나 고려에 존재했던 특별 구역 중 하나는 양계로 국경지역에 설치되어 군사적 임무를 맡았습니다. 양계는 일반 행정 구역인 도에서 처럼 주, 군, 현이 설치되지 않았고 군사적 요충지인 진이 설치되어 국경 방어를 담당했습니다. 고려는 이처럼 일반행정구역과 특수행정구역이라는 이원적 조직을 운영하여 각 지방을 다스렸습니다.
<고려의 이원적 지방 행정 체제>
지방과 중앙에 대해서 살펴보았으니 이제 군사제도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고려는 군사제도 역시 이원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중앙군은 왕의 친위 부대인 2군과 수도 및 국경을 방어하는 6위로 구성되었습니다. 중앙군은 직업 군인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이들은 병역복무에 대한 대가로 군적에 올라 군인전이라는 토지를 지급 받고 그 역할이 자손에게 대대로 세습되었습니다. (이에 관련해서 다른 가설도 있습니다만 교과서에 실린 전통적 견해를 따라 서술) 지방군은 일반 농민으로 구성되었으며 5도의 일반 군현을 지키는 주현군과 양계의 국경 수비를 전담하는 상비군인 주진군이 있었습니다.
관료와 귀족의 만남
보통 고려의 사회를 귀족 사회라고 표현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고려 사회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특징이 귀족의 특성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귀족의 특징인 무엇인가요? 바로 능력보다 혈통을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흥 AB형도 아닌 것들 천하다! 귀족은 능력보다 혈통을 중요시한다>
자 그렇다면 고려시대에는 어떤 점 때문에 능력보다 혈통을 더 중요시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음서와 공음전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려시대는 신라와 달리 골품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보고 인재를 등용했는데 이 과거 시험에서 공신 혹은 왕가의 친척이나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에게는 과거를 보지 않고도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어마어마한 혜택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음서입니다. 이는 어떤 한 가문이 대대로 관직을 세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귀족적 특성이 다분히 있는 것입니다.
또한 토지제도에서도 귀족적 특성이 엿보입니다. 고려의 토지제도는 전시과로서 관리로 국가에 일을 하는 사람에게 일정한 토지를 주고 그 토지에서 내는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이때 지급되는 토지가 밭(전지)과 떌감을 벨 수 있는 숲(시지)을 동시에 주어씩 때문에 전시과라고 부른 것입니다. 전시과는 국가에 봉사하는 기간 즉, 현직 관리로 일하는 기간만 받을 수 있는데 5품이상 관리는 여기서 제외가 되어 세습이 가능한 토지를 받았습니다. 이를 공음전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고려의 5품이상의 관리들은 음서와 공음전의 혜택을 기반으로 성장해나갔습니다. 이들이 바로 고려의 지배세력이 되는 문벌귀족들입니다.
미숙한 고려 사회?
고려는 조선과 다르게 지방에 모든 행정관이 파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를 보고 고려 사회는 조선 보다 미성숙한 사회라고 보기도 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고려 시대 때 왜 조선보다 지방에 행정관이 적게 파견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 자유롭게 얘기해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