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3 근대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다
3-3 대한 제국, 황제권을 강화하여 국권을 공고히 하겠다 


아, 쪽팔려...

이 시간에는 고종과 대한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해봐야겠네요. 먼저 이전에 우리가 배웠던 역사적 사실을 잠깐 되짚어 봐야겠네요. 이 전에 일본이 친러파가 득세한 우리나라 정치 상황을 역전 시키기 위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에 대해 배웠죠? 자신의 아내가 죽자 고종은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잘못하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부랴부랴 러시아 공사관으로 야반도주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아관파천입니다.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고종의 모습>

아관파천 후 1년이나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릅니다. 그러나 일국의 왕이 남의 나라 대사관에서 지낸다는 게 얼마나 쪽팔린 일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고종에게 환궁을 요구합니다. 각지에서 환궁에 대한 요청이 계속 오자 고종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자기도 쪽팔리겠죠? 그래도 일국의 왕이라는 사람이 남의 나라 대사관 신세를 졌으니까요. 

 <사람으로서, 아니 왕으로서 쪽팔려 ㅠㅠ>

그래서 이 쪽팔림을 만회하고자  엄청나게 화려한 행사를 기획합니다. 바로 황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죠. 이런 결단이 가능했던 것은 청일전쟁에서 종주국으로 자처하던 청의 패배 때문이었습니다. 청의 간섭이 없어지자 조선은 황제국을 칭하게 되고 고종은 황제가 되었습니다.

 <고종이 즉위식을 거행했던 원구단 황궁우, 황제만이 쓸 수 있는 팔각 지붕을 사용했다>

겉으로 강해보이는 황제, 하지만...

고종이 황제국임을 선포하고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꿉니다. 겉으로는 광장히 강해보이는 황제였고 의식도 화려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만큼 황제는 강했을까요?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먼저 고종이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환궁한 사정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먼저 경운궁의 위치를 볼까요?
 

<경운궁(덕수궁)의 위치 , 주변에 각국의 대사관이 포진한 모습이 보인다. 여차하면 그쪽으로 튀겠다는 얘기다>

각 국 공사관이 궁궐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는 일본이 다시 한 번 을미사변 같은 행위를 할 경우 여차하면 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대한제국의 상황은 위태로웠습니다. 이 위태로워 보이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고종이 빼어든 카드는 바로 황제권 강화였습니다.

<내가 킹왕짱이다! 고종은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대한국 국제를 반포한다>

고종은 개혁을 추진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황제권의 강화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황제권을 정점으로한 개혁을 구상했고 황제를 가장 권력의 중심에 두는 대한국 국제를 반포했습니다. 대한국 국제는 지금의 헌법과 유사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1조에 대한제국이 자주 독립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제2조, 3조에서는 대한제국이 만세불면의 전제 정치이며 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명시하여 황제가 권력의 정점에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고종은 막강한 황제권 아래 구본신참(옛 것을 기본으로 하고 새것을 첨가한다)을 구호로 삼아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아무래도 개혁의 구호가 구본신참인 것을 볼 때 독립협회나 갑오개혁, 갑신정변에서 추구했던 개혁 보다는 상당히 보수적인 색깔이 강했습니다. 제도의 변화는 미미한 편이었고 서양의 기술과 기계를 받아들이는 동도서기론 입장에 좀 더 가까웠죠.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앞에서 동도서기론을 내세웠던 개혁들이 실패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결국 대한제국의 개혁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주변 열강들의 간섭 속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래도 건질 것이 있었다

대한제국의 개혁은 거의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건질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광무양전이라고 불리는 토지 조사 사업이었습니다. 

 <우오오오 득템!! 광무개혁 성과는 미미했지만 광무양전의 개혁 성과는 건질 것이 있었다>

광무양전은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말이 어렵다구요? 쉽게말해서 국가가 토지 소유권에 대해 확인해준 거죠. 이게 왜 중요하냐구요? 국가라는 강한 힘을 가진 기구가 토지에 대해 누구 것인지 확인해주면 바로 그 다음부터 국가가 토지 거래에 관해 관여할 수 있게 되는거죠. 즉, 국가가 토지에 관련한 사항 등을 장악했다는 의미가 되죠. 또한 이전에 명분상 토지를 가지고 있던 사람과 실제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일치시킴으로써 토지를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게 했습니다. 아 이런 삐이이이이~ 어렵다고요? ㅠㅠ

쉽게말해 개인과 개인 간의 거래에 국가라는 강력한 힘을 가진 기구가 끼어들었다는 거죠. 개인 간의 사적인 거래가 국가가 관여해서 공적인 거래로 바뀌는 거고 앞으로 토지에 관한 거래를 국가가 장악하겠다는 뜻이죠. 사적인 영역이 공적인 영역으로 바뀌는 순간이며 이게 근대화를 설명하는 핵심 사항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자 이래도 모르겠으면 나랑 광무양전이라는 인연이 없다--;; 생각하시고 광무양전은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해주었다 라고만 이해하셔도 될 것 같아요. ^^ 제가 설명을 제대로 못하는 불찰이죠 뭐 ^^;;

간도 색다르게 보자

교과서에서 간도와 독도를 다루고 있는데 사실 이 부분은 상당히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런걸까요? 이제부터 저랑 알아가봅시다 ^^

(주의!! 이 뒤에 얘기는 동의하기 힘들수도 있고 교과서에 서술된 내용이라는 차이가 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은 항상 여러 가지 시선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역사 교과서는 역사에 관한 이야기만 담고 있는게 아니라 정치적 이야기를 항상 내포하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이와 관한 문제는 나중에 제가 따로 다뤄보도록 할게요 ^^)

간도에 대한 문제의 처음 시작은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던 때로 거슬로 올라갑니다. 청나라는 만주 지역을 자신들이 일어난 신성한 지역이라고 하여 그 일대를 봉금지대로 설정해놓습니다. 이것은 여기에 살던 만주족(청을 세운 민족)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한족(기존에 중국에 살던 민족)의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족의 유입은 차단할 수 있었으나 조선 사람이 이곳에 때때로 넘어가는 일이 생겼습니다.

<크크 빈집이다-_-!! 사람이 많이 살지 않던 만주 지역에 조선인이 자주 넘어감으로써 문제가 생긴다>

조선인들은 이곳에서 인삼을 캐거나 하는 일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청나라 사람들과 다툼이 생기면서 청나라 조정에서 봉금 지역이었던 만주에 조선인들이 자주 넘어가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러자 국경 문제도 마무리 지을겸, 만주족이 신성시 여기던 백두산을 자신의 영토로 삼기 위해서 사절단을 조선에 파견합니다. 협상결과 동쪽은 압록강 서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국경을 삼는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 당시만해도 사람들은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인식했던듯 합니다.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도 보면 그 사실이 나와있고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확실히 국경선을 그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것처럼 토문강은 송화강 지류라고 인식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럼 이런 주장은 왜 나오게 되는걸까요?

문제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뒤 170년뒤에 일어납니다. 이때는 세도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였습니다. 여러분 알죠? 세도정치가 어떤 정치형태인지? 막 to the 장 -_-

<이딴 정권 아래서 살 수 없다 ㅠㅠ, 세도정치를 피해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로 넘어온다>

세도정치를 피해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로 넘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만주, 연해주 등지에 많은 조선인들이 살게되고 조선인들만의 부락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청나라는 남하해오던 러시아의 압박을 느껴 만주 지역에 봉금을 차츰해제하고 한족의 이주를 허용합니다. 근데 막상 봉금을 해제하니 어라?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죠. 청과 조선은 다시 국경분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때 새삼스럽게 다시 문제가 된 것이 바로 동위토문이라는 백두산 정계비의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170년전 백두산 정계비는 굉장히 애매하게 국경을 정한 것이었기고 실제 토문강이 어떤 위치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런 애매함 때문에 청나라는 토문강을 두만강이라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조선은 이제 만주 지역을 직접 관리를 의사를 내비치면서 토문강을 송화강의 한 지류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양국이 만주 지역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전에는 별 문제가 없던 것이 문제가 되고 말았죠.

<두만강과 토문강의 위치, 출처는 http://nestofpnix.egloos.com. 간도문제에 대해 명쾌한 정리가 있기도합니다>

이렇게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면서 합의점에 도달하지못하고 있을 때,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청나라가 일본에게 패배를 하게됩니다. 청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대한제국은 간도에 관리를 파견하고 이 지역을 함경도 행정구역으로 편입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간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게된 배경입니다.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나라가 간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저는 회의적이라고 봅니다. 역사적 증거도 빈약하거니와 만약 역사적으로 간도가 명백히 우리 것이라는 가정을 깔아도 지금 간도를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이미 간도 지역에는 조선족 보다는 한족이 많이 삽니다. 게다가 조선족 사람들은 과연 자기 스스로를 한국인이라 생각할까요? 우리는 늘 조선족이라하면 멸시하는 태도를 가지면서 이럴 때만 한민족이라 찾으면 조선족 입장에서는 얼마나 웃기게 생각할까요? 아무튼 간도 영유권에 관해서는 저는 조금 회의적입니다.

그렇다면 독도는?

음, 이제 독도가 남았군요. 이 인간 간도에서 대해서 말하는 꼬락서니 보니 독도에 대해서 이상하게 얘기하는거 아니야? -_- 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절.대.로.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독도는 대한민국 영토임이 분명합니다.

<독도는 우리영토입니다. 흠, 이런 생각까지 인증해야한다니 조금 슬프네요ㅠ>

독도에 대한 영토분쟁은 왜 발생하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공도정책 때문에 그렇습니다. 공도정책이란 조선 초기에 시행된 정책으로 섬에서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섬에 떨어져 살면서 왕명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길까는 우려때문에 생긴겁니다. 하지만 섬을 비운다고 사람이 안 살겠습니까? 바로 사람이 살기 시작하는데 일본인들이 이 주변에 고기 많은 것을 알고 접근해왔습니다. 이것 때문에 조선정부와 일본정부 간에 다툼이 발생했고 그 중심에 안용복이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들어와 고기잡는 모습을 보고 분계한 안용복은 일본인들을 쫓으려고 하다가 일본 어부들에 의해 사로잡혀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울릉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며 조선인 어부의 출입을 막아달라고 조선정부에 서찰을 보냅니다. 이 서찰을 보고 일본의 흉계를 알아챈 조선 정부는 처음에는 외교적 마찰을 피하려고 했으나 후에 일본인의 울릉도 출입에 대해 엄히 꾸짖고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조선정부는 섬에 사람이 살지 않도록 지시했지만 영토를 포기하지 않고 관리를 하려는 시도를 보여줬고 이를 통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조선 말기가 되면 공도정책을 포기하고 울릉도에 사람이 살게됨으로써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로 확고히 굳어지게 됩니다.

자 어딘가 비슷해보이지 않나요? 만주 지역이 빈땅이어서 인삼을 캐러갔던 조선인과 울릉도가 빈땅이서 고기를 잡으러 갔던 일본인의 모습이? 간도와 독도 문제는 어딘가 닮은 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유리한대로 간도와 독도를 제 각각 해석할 수 있지만 그것은 옳지 못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사태이던 간에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밀지 말고 한 가지 잣대를 적용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참, 그리고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http://orumi.egloos.com/4500362의 포스팅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역사에 관한 재밌는 사실이 많은 블로그로 꼭 한번 들려보세요 ^^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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