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을 재통일하여 발전한 고려(후삼국을 통일하고 새 시대를 열다, 새로운 통치 체제를 마련하다)
과거 안에서(고등학교 한국사)/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2011. 3. 13. 22:54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1) 민족을 재통일하여 발전한 고려
1-1 후삼국을 통일하고 새 시대를 열다
1) 민족을 재통일하여 발전한 고려
1-1 후삼국을 통일하고 새 시대를 열다
통합의 리더십, 왕건
한국사의 여러 인물 중 여러분이 존경하는 다양한 인물이 있을 겁니다. ^^ (없으면 할 수 없고요 ㅠㅠ) 안중근 의사, 이순신 장군, 유관순 열사, 세종대왕, 광개토 대왕 기타 등등이 있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왕건이란 인물을 가장 좋아합니다. 왜 그러냐고요? 왕건이야 말로 진정한 통합의 리더십을 지녔던 사람이기에 그랬습니다 ^^
<진정한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했던 왕건>
왕건은 어찌되었든 후삼국의 통일을 이끈 승리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유리한 기록이 다소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가 늘 승자만을 위해 노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것을 감안할 때 왕건이 발휘했던 통합은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숙적이었던 견훤을 끌어안고 혼란한 시대를 도래하게 한 장본인이었던 신라 역시 끌어 안았습니다. 또한 수많은 호족들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게 됩니다. 이런 포용적인 힘 때문에 왕건의 출신이 그다지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결국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어찌되었든 분열된 나라를 다시 통합하고 일어선 고려라는 나라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봅시다. ^^
고구려 계승을 천명한 고려, 후삼국을 통일하다
신라 하대에 들어서면 강력한 왕권이 후퇴되고 귀족들이 발호하면서 나라는 혼란스러움의 극을 달립니다. 이런 혼란한 시대에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진 틈을 타 지방에서 호족들이 그 힘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고구려 계승을 천명한 고려, 후삼국을 통일하다
신라 하대에 들어서면 강력한 왕권이 후퇴되고 귀족들이 발호하면서 나라는 혼란스러움의 극을 달립니다. 이런 혼란한 시대에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진 틈을 타 지방에서 호족들이 그 힘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전제왕권이 약해지자 각 지방에서 카라, 소시, 2NE1 등등이 일어나 혼란에 빠진... 응? -_-;;>
지금 우리 시대에 각 종 걸그룹이 들이 난립하듯이 지방에 호족들이 난립하면서 각자의 세력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 호족들은 자신이 다스리던 지방에서 장군, 성주 등을 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이런 호족들을 규합하고 큰 세력으로 성장해난 것이 후고구려의 궁예, 후백제의 견훤, 고려의 왕건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왕건은 해상 무역을 통해 성장한 호족으로 처음에는 넓은 기반이 없었으나 궁예의 부하로 많은 전공을 세웠고 특히 나주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자신의 세력 발판을 마련합니다. 이후 궁예가 내가 미륵불(석가모니가 입멸한 뒤 56억 7천만년--;; 후에 중생을 구제하고자 나타나는 미래불)-_-!이라는 무리수를 두자 과감히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이 스스로 왕이 되어 고려를 건국합니다.
<나는 미륵 ㅋㅋㅋ(왼쪽 궁예), 이 새끼가 드디어 미쳤구나-_-;(오른쪽 왕건)>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고 특유의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호족 세력을 통합했으며 밖으로는 중국 5대(중국의 당이 망하고 북중국에 들어선 다섯 왕조를 5대라 한다. 또 같은 시기 북중국을 제외한 지방에서 10개국이 들어서는데 이들을 10국이라 하고 이 시대를 통칭 5대십국이라 한다. 960년 송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오대십국 시대는 종료된다)와 외교관계를 맺어 대외관계를 안정시키고 후백제와 경쟁했습니다. 반면 신라에는 우호적인 태도로 다가가 신라의 민심을 사는데 성공했고 이는 결국 신라전체가 935년에 고려에 귀순하는 사태로 이어집니다.
신라가 귀순을 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힘이 있다고 돈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행동을 하는데는 명분과 대의가 있어야했습니다. 명분과 대의가 따르는 행동은 정당화가 되었으며 그것은 백성의 마음을 모으는 힘을 발휘합니다.
<대의는 추상적인 가치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실질적인 효과를 낸다>
신라가 고려에 귀순했다는 사실이 왕건에게 대의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신라 왕이 가지고 있던 정통성이 왕건에게 가는 역사적 순간이었고 이로 인해 후삼국 간의 싸움은 결정적으로 고려에 기울었습니다. 왕건이 견훤에게 수많은 패배를 당하고도 결국 마지막에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신라를 병합한 왕건은 후백제를 계속 압박했습니다. 이 당시 후백제는 내부의 심각한 왕위계승으로 인한 갈등을 겪고 있었는데 심지어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쫓겨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합니다. 왕건은 견훤을 받아들여 자신의 후백제 토벌의 정당성을 한층 더 공공히 다졌고 결국 936년에 후백제군을 격파함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했습니다.
한편 발해가 거란에게 926년에 멸망하는 데 이때 발해 왕자 대광현이 많은 유민을 이끌고 고려에 귀순해옵니다. 왕건은 이들을 받아들여 진정한 의미의 민족 재통일을 달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통일 이후 왕건의 통합정책
원래 창업(나라를 여는 일)보다 수성(나라를 지키는 일)이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이제 막 통일을 한 왕건의 앞에는 수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습니다.
한편 발해가 거란에게 926년에 멸망하는 데 이때 발해 왕자 대광현이 많은 유민을 이끌고 고려에 귀순해옵니다. 왕건은 이들을 받아들여 진정한 의미의 민족 재통일을 달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통일 이후 왕건의 통합정책
원래 창업(나라를 여는 일)보다 수성(나라를 지키는 일)이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이제 막 통일을 한 왕건의 앞에는 수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습니다.
<통일하면 다 끝일 줄 알았지? 통일 이후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이다>
왕건이 해결해야 할 첫번째 일은 첫째도 민생안정, 둘째도 민생안정이었습니다. 신라 하대 귀족들의 과도한 수탈로 인해 피폐해진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금 부담을 가볍게 해주었고 흑창(곡식이 부족할 때 곡식을 꾸어주고 추수한 후에 갚게 하는 구제 기관, 고구려에 진대법도 이와 유사하다. 조선시대에 환곡으로 계승되었다)을 설치하여 백성들의 구제에 앞장 섰습니다. 그리고 흩어진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기 위해 불교를 적극 장려하여 연등회, 팔관회 등의 행사를 개최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모았습니다.
<다시 한 번 불심으로 대동단결! 불교는 민심을 모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생안정과 더불어 또 하나의 관심은 강대한 호족 세력을 어떻게 지배하느냐였습니다. 호족은 자기 지방에서는 왕처럼 지냈으므로 이들을 통제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건이 생각해낸 기발한 아이디어가 바로... 결혼-_-;
<왕건은 무려 29명의 부인을 받아들인다. 하렘인가-_-;>
왕건은 무려 29명의 여인을 자신의 부인으로 맞아들입니다. 하지만 이건 왕건이 순전히 여자를 밝혀서가 아니라;; 유력 호족들과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회유하기 위함이였습니다. 이외에도 자신의 성인 왕씨 성을 하사하여 자신의 일족으로 만드는 등의 정책을 펴나갔습니다. 이렇게 당근을 주는 정책을 펴는 반면 한편으로는 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기인제도와 사심관 제도를 사용했습니다. 기인제도는 일종의 볼모 제도로서 지방 호족의 자제를 서울에 인질로 잡아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 호족이나 잡아들이지 않고 그 지방의 유력한 호족의 자제만 잡아들였으니 그 당시에는 이런 장면도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너 임마 세력 얼마나 강해? 내 아들 볼모로 서울에 잡혀갔거든 깝치지마라-_->
이런 기인제도 외에도 사심관 제도로 당시 취약했던 지방 통치를 보완했습니다. 사심관 제도는 중앙에 올라온 지방의 유력자를 자기 출신 지역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자신의 지역을 통치하게끔 한 제도였습니다.
이외에도 왕건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나라 이름을 고려로 삼은 것만 보아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왕건은 적극적인 북진 정책을 펴나면서 평양을 서경으로 삼아 중시했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적대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청천강까지 영토를 넓힐 수 있었습니다.
유교가 새 시대의 원리가 되다
왕건의 후삼국 통일 이후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 사회를 지배하던 원리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신라는 골품제로 인해 여러모로 폐쇄적인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는 이런 폐쇄성을 극복해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폐쇄성을 극복하기 위해 새롭게 채택된 시대의 운영원리는 바로 유교였습니다.
이 시대에는 불교, 풍수지리설 등이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지만 정치에서는 유교 이념이 운영 원리로 채택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불교나 풍수지리설은 정치면에서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안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만약 다른 나라가 침범을 해왔을 때 불교 운영 원리를 따른다면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퇴각시킨다라는 정책을 채택한다면? -_-;; 가뭄이 들어 백성이 신음하는데 이게 다 욕심에서 비롯된 거라며 참선을 하면? -_-;; 답이 안 나오죠? 이 같은 이유로 불교나 풍수지리설은 현실적인 운영원리로 적합하지 못합니다.
이외에도 왕건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나라 이름을 고려로 삼은 것만 보아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왕건은 적극적인 북진 정책을 펴나면서 평양을 서경으로 삼아 중시했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적대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청천강까지 영토를 넓힐 수 있었습니다.
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1) 민족을 재통일하여 발전한 고려
1-2 새로운 통치 체제를 마련하다
1) 민족을 재통일하여 발전한 고려
1-2 새로운 통치 체제를 마련하다
유교가 새 시대의 원리가 되다
왕건의 후삼국 통일 이후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 사회를 지배하던 원리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신라는 골품제로 인해 여러모로 폐쇄적인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는 이런 폐쇄성을 극복해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폐쇄성을 극복하기 위해 새롭게 채택된 시대의 운영원리는 바로 유교였습니다.
이 시대에는 불교, 풍수지리설 등이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지만 정치에서는 유교 이념이 운영 원리로 채택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불교나 풍수지리설은 정치면에서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안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만약 다른 나라가 침범을 해왔을 때 불교 운영 원리를 따른다면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퇴각시킨다라는 정책을 채택한다면? -_-;; 가뭄이 들어 백성이 신음하는데 이게 다 욕심에서 비롯된 거라며 참선을 하면? -_-;; 답이 안 나오죠? 이 같은 이유로 불교나 풍수지리설은 현실적인 운영원리로 적합하지 못합니다.
<불교나 풍수지리설은 그 꿈은 높지만 현실운영원리로 들어가면 별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유교적 운영원리가 처음부터 확고히 고려 사회의 지배적 이념으로 자리 잡았던 것은 아닙니다. 유교적 운영원리는 광종 때부터 서서히 그 위치를 다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광종은 강대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던 호족을 누르기 위해 노비안검법(예전에 양인이었던 노비를 해방하는 법으로 당시 노비는 호족의 경제력과 군사력에 직결되어 있었기에 호족들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을 실시하는 한편 호족 자제들을 아무런 기준 없이 등용하던 인사 정책을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제도로 바꿉니다.
<과거제의 실시는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등용할 뿐 아니라 왕에게 충성하는 인재를 뽑을 수 있게 된다>
성종 때에 이르면 신라 6두품 세력들이 대거 정치에 참여하면서 유교 정치가 비로소 현실이 되기 시작합니다. 최승로는 시무 28조라는 유교 정치 이념을 제시했고 성종은 최승로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이로써 2성 6부의 중앙 관제가 마련되고 12목의 지방장관이 파견되면서 고려는 중앙 집권화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국자감이라는 교육기관도 정비되어 유학 교육은 더욱 장려되었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운영원리인 유교는 보다 합리적인 길을 제시했고 이로 인해 고려는 신라 보다는 좀 더 개방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통치의 구조가 완성되다
성종 때 유교적 운영원리가 지배 원리로 확고히 자리잡게 되자 이 유교적 운영원리에 맞추어 중앙 통치 조직과 지방행정도 조직됩니다. 중앙의 정치기구와 지방행정이 조직된다는 의미는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뼈대가 완성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고려 때 완성된 중앙 정치 조직과 지방 행정 조직을 하나씩 살펴볼까요? ^^
성종 때 조직된 2성 6부제는 당의 3성 6부제를 모방한 것이었으나 고려 만의 독자성이 잘 녹아있는 제도였습니다. 말하자면 짜장면에 된장 넣은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통치의 구조가 완성되다
성종 때 유교적 운영원리가 지배 원리로 확고히 자리잡게 되자 이 유교적 운영원리에 맞추어 중앙 통치 조직과 지방행정도 조직됩니다. 중앙의 정치기구와 지방행정이 조직된다는 의미는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뼈대가 완성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고려 때 완성된 중앙 정치 조직과 지방 행정 조직을 하나씩 살펴볼까요? ^^
성종 때 조직된 2성 6부제는 당의 3성 6부제를 모방한 것이었으나 고려 만의 독자성이 잘 녹아있는 제도였습니다. 말하자면 짜장면에 된장 넣은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찾아보니까 진짜 있더군요. 된장 짜장면-_-;;>
최고 중앙 관서는 중서성과 문하성을 합친 중서문화성이고 이곳의 장관인 문하시중이 국정을 총괄하는 가장 높은 관직이었습니다. 상서성은 실질적 행정을 담당하는 6부를 총괄했습니다만 실상 중서문화성에 아래에 있는 기관이었지요. 중추원은 군사 기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아주 중요한 기구였습니다만 삼사는 당의 제도와는 다르게 회계만을 담당하여 그 격이 떨어지는 기관이 되었습니다.
독자적인 고려만의 기구도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레알 된장기구인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입니다.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중서문화상과 중추원의 고관들인 재신과 추밀(줄여서 재추) 모여 회의를 하는 기구로 귀족들이 모여 회의를 하던 귀족 회의의 전통을 계승한 기구입니다. 또한 어사대는 감찰 기관으로 정치 잘잘못을 논하고 관리의 비리를 감사했습니다. 어사대는주로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더불어 대간으로 불렸습니다. 이들 대간은 왕의 잘못을 논하는 간쟁, 왕명을 시행하지 않고 돌려보내는 일종의 거부권인 봉박, 관리 임명과 법령의 개폐에 동의하는 서경권을 가졌습니다. 이런 기구가 존재했다는 것은 고려가 왕권과 신권이 조화된 정치를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의 중앙 정치 기구>
이제 지방 행정 기구를 알아볼까요? 고려의 행정 구역이 본격적으로 뼈대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성종 때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지방에 12목을 파견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이후 현종 때 8목으로 확정되면서 오도와 양계, 경기로 행정 구역이 정해집니다.
<5도 양계의 지도>
여기서 5도는 일반 행정 구역입니다. 이곳에는 안찰가 파견되어 도내를 순찰하는 임무를 맡았고 그 아래 주, 군, 현에는 지방관이 파견되는데 지방관이 파견되는 지역보다 그렇지 않은 지역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고려의 중앙통치구조는 완비되지 않았고 그 당시에는 그런 짜임새 있는 지방 통치 체제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적은 인원만을 파견했던 것입니다.
이외에도 고려의 지방행정 구역에 특이점은 바로 특별행정 구역에 있었습니다. 향, 소, 부곡은 특수 행정 구역으로 특정 물건을 생산해서 바치는 등의 일을 맡은 사람들이 주로 사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 사는 백성들의 처지는 다른 일반 행정 구역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낮았습니다. 이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속현도 일반 주현에 속해 있는 사람들 보다 더 낮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또 하나 고려에 존재했던 특별 구역 중 하나는 양계로 국경지역에 설치되어 군사적 임무를 맡았습니다. 양계는 일반 행정 구역인 도에서 처럼 주, 군, 현이 설치되지 않았고 군사적 요충지인 진이 설치되어 국경 방어를 담당했습니다. 고려는 이처럼 일반행정구역과 특수행정구역이라는 이원적 조직을 운영하여 각 지방을 다스렸습니다.
<고려의 이원적 지방 행정 체제>
지방과 중앙에 대해서 살펴보았으니 이제 군사제도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고려는 군사제도 역시 이원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중앙군은 왕의 친위 부대인 2군과 수도 및 국경을 방어하는 6위로 구성되었습니다. 중앙군은 직업 군인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이들은 병역복무에 대한 대가로 군적에 올라 군인전이라는 토지를 지급 받고 그 역할이 자손에게 대대로 세습되었습니다. (이에 관련해서 다른 가설도 있습니다만 교과서에 실린 전통적 견해를 따라 서술) 지방군은 일반 농민으로 구성되었으며 5도의 일반 군현을 지키는 주현군과 양계의 국경 수비를 전담하는 상비군인 주진군이 있었습니다.
관료와 귀족의 만남
보통 고려의 사회를 귀족 사회라고 표현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고려 사회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특징이 귀족의 특성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귀족의 특징인 무엇인가요? 바로 능력보다 혈통을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흥 AB형도 아닌 것들 천하다! 귀족은 능력보다 혈통을 중요시한다>
자 그렇다면 고려시대에는 어떤 점 때문에 능력보다 혈통을 더 중요시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음서와 공음전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려시대는 신라와 달리 골품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보고 인재를 등용했는데 이 과거 시험에서 공신 혹은 왕가의 친척이나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에게는 과거를 보지 않고도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어마어마한 혜택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음서입니다. 이는 어떤 한 가문이 대대로 관직을 세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귀족적 특성이 다분히 있는 것입니다.
또한 토지제도에서도 귀족적 특성이 엿보입니다. 고려의 토지제도는 전시과로서 관리로 국가에 일을 하는 사람에게 일정한 토지를 주고 그 토지에서 내는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이때 지급되는 토지가 밭(전지)과 떌감을 벨 수 있는 숲(시지)을 동시에 주어씩 때문에 전시과라고 부른 것입니다. 전시과는 국가에 봉사하는 기간 즉, 현직 관리로 일하는 기간만 받을 수 있는데 5품이상 관리는 여기서 제외가 되어 세습이 가능한 토지를 받았습니다. 이를 공음전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고려의 5품이상의 관리들은 음서와 공음전의 혜택을 기반으로 성장해나갔습니다. 이들이 바로 고려의 지배세력이 되는 문벌귀족들입니다.
미숙한 고려 사회?
고려는 조선과 다르게 지방에 모든 행정관이 파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를 보고 고려 사회는 조선 보다 미성숙한 사회라고 보기도 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고려 시대 때 왜 조선보다 지방에 행정관이 적게 파견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 자유롭게 얘기해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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