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4) 흥선대원군, 10년 권세를 쥐다
4-1 왕권을 강화하고 민생 안정을 추구하다

흥선대원군을 둘러싼 오해를 풀자

이번 시간부터 흥선대원군에 대해 배워볼텐데 먼저 흥선대원군에 대한 소소한 오해를 풀면서 시작해볼까 합니다. ^^ 우리가 보통 흥선대원군하면 척화비를 세운 사건으로 인해 개화를 가장 많이 반대한 인물, 꽉막힌 사람으로 인식하는 데 그게 정말 사실일까요?

<흥선대원군은 단지 개화를 반대하기만 한 척사파에 지나지 않는가?>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은 역사를 무조건 두 개의 대비되는 집단으로 가둬서 판단하려고 해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개화 vs 척사로 갈라놓고 흥선대원군은 어떠했는가를 보니 떡 하니 척화비를 세웠거든요. 그래서 척사를 대표하는 인물로 낙인 찍히고 조선의 개화를 늦춘 장본인이 되는 거죠. 하지만 그렇게만 판단해서 역사는 자신의 진정한 얼굴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먼저 역사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현대의 관점을 걷어내는 관점을 먼저합니다. 지금이야 그때 당시 개화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흥선대원군의 입장에서 개화는 민생 안정과 왕권 강화 보다는 떨어지는 문제였을 겁니다.

그래도 개화 못한 건 욕 먹어도 싸지 않냐고요? 병인양요가 왜 일어난지 혹시 아시나요? 병인양요는 흥선대원군이 프랑스 선교사를 박해하면서 일어난 사건인 병인박해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프랑스가 조선에 침입한 겁니다. 프랑스 선교사 탄압했으니 개화에 반대한 인물 맞지 않냐고요? 얘기는 끝까지 들어야죠 ^^ 흥선대원군은 당시 국내에 들어와있던 프랑스 세력을 이용해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생각처럼 안 되고 국내에 천주교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가 커지자 병인박해를 단행한겁니다. 어때요 이러니까 사람이 좀 달라보이죠?

<명성황후는 재평가를 넘어서 미화까지 되었다. 반면 흥선대원군의 평가는 아직 초라하다.>

http://blog.naver.com/rhaehfoi123?Redirect=Log&logNo=20088749528&jumpingVid=94AD05E5236322E1F1EB8BC92EF2F6859EFF(7분 9초쯤 내가 조선의 국모다 드립 시전-_-; 8분 30초에 다시 나온다.)

같은 시기 대립각을 세우던 명성화후는 내가 조선의 국모다 드립으로-_-; 재평가를 넘어서 상당히 미화가 되었지만 그에 비해 흥선대원군은 변변찮은 평가를 받은 것만 봐도 흥선대원군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물론 흥선대원군의 한계는 분명합니다. 어디까지나 왕권강화를 추구했으며 개화에 대한 필요성은 인식했지만 심각성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를 살았던 다른 정치가들을 생각하면 그는 상당히 깨였던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왕실의 위엄을 다시 세우다

세도정치 기간에 세도 가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약간은 무능한 왕을 앉히려고 했습니다. 뭐, 세자가 있으면 어쩔 수 없지만 후계자가 공석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죠. 철종도 원래는 일자무식의 나무꾼이었지만 세도 가문들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강화도령이라 불렸던 나무꾼 철종>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세도 가문들은 또 다시 누가 누가 멍청한 왕일까를 고르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마치 무한도전에서 박명수와 김태호 PD 둘 중 누가 더 잘생겼는가를 골랐던 처럼 말이죠 ^^;

<막장 매치업! 철종의 후계자를 정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왕위로 간택되었던 사람이 그 이름도 유명한 개똥이(고종의 아명)! 이름부터가 참 친숙하죠? 하지만 멍청한 왕을 골랐다고 안심할 때가 아니었으니 바로 왕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던 것이죠. 흥선대원군은 원래 왕족이었지만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아래에서 항상 감시 당하는 생활을 해야되었습니다. 그는 안동 김씨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건달행세를 하며 궁도령, 상갓집 개로 불리는 치욕을 당했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며 권력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 안동 김씨 세력을 약화시키고 당파, 지역, 신분을 가르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습니다. 그리고 조선 중기부터 최고 정무기관이었던 비변사를 없애고 의정부를 다시 최고 기관으로 부활시켰으며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을 편찬하여 경국대전 이래에 계속되었던 조선 법전 체제를 다시 정비했습니다. 또한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조리 혁파했는데 이때 그가 남긴 말이 인상적입니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하물며 서원은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유학자를 제사하는 곳인데, 지금은 도둑의 소굴이 되어 버렸으니 말할 것도 없다."

서원 철폐외에도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경복궁을 중건했는데 이때 부족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무리수를 좀 둡니다. 원납전이라는 기부금을 강제로 걷었으며 당백전이라는 고액화폐를 찍어 발행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화폐 가치를 낮추고 물가를 폭등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백성들도 강제로 동원하고 도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내게 하는 등 무리한 공사재정 마련은 양반뿐 아니라 백성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이렇게 중건된 경복궁은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는 데는 어느 정도 역할을 했지만 백성들의 원망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양반도 군포를 내다

흥선 대원군은 자신의 집권 이전에 일어난 전국적 농민 봉기를 지켜보면서 농민 봉기의 원인이 되는 되었던 삼정의 문란을 개선하고 했습니다. 특히 군포 제도는 획기적인 제도 개선을 이루었는데 상민들만 내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제를 마련했습니다.

<호포제로 인해 상민과 양반 모두 군포를 납부하게 되었다>

또한 그 동안 문제가 되던 환곡 제도는 관아에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안에서 덕망이 있는 사람을 뽑아 마을에서 자치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지방관이 운영하던 환곡제(위)를 마을 자치적으로 운영(아래)할 수 있게함으로써 환곡의 폐단을 막고자 했다>
 
또한 전정제도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양반과 지주들이 함부로 농민의 토지를 빼앗지 못하게 하고 세금을 안 내기 위해 토지 대장에서 누락시킨 은결을 찾아내는 데에도 주력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왜 그토록 경복궁을 중건하는데 집착했나?

오늘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에 대해 배우면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시켰다는 사실을 배웠는데요. 왜 흥선대원군은 그토록 경복궁을 중건시키려고 노력했을까요? 여러분에게 힌트를 드리기 위해서 제가 조선시대 궁궐제도에 대해 부연 설명을 좀 하자면 조선의 궁궐은 이원적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정통인 법궁이 있고 또 다른 궁궐인 이궁이 존재합니다. 조선 초기에는 경복궁이 법궁이고 이궁은 창덕궁과 창경궁이었는데요. 임진왜란 기에 경복궁이 소실 되면서 조선 중기 부터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이 되고 광해군 때 지어진 경희궁이 이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복궁이 다시 법궁이 되고 창덕궁과 창경궁이 이궁이 되지요. 경복궁이 법궁이 되었던 시기의 정치 상황과 흥선대원군이 추구하던 목표랑 연결지으면 쉽게 답이 나올겁니다. ^^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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