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2) 조선에서도 근대의 기운이 움트다
2-7 실학, 부국안민을 위한 개혁을 주장하다
2-8 문화의 주체가 다양해지다 


농민이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

조선 후기 하부구조가 변화를 일으키면서 상부구조였던 사상도 변하시작합니다. 바로 새로운 학문 경향인 실학이 나타났는데요. 이 실학은 성리학에서 벗어난 완전히 새로운 이론이기 보다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면서 파생한 새로운 학문으로 파악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후대에 실학자라고 불리는 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뉩니다. 농업을 중시하는 학자들, 그리고 상업을 중시하는 학자들입니다. 농업을 중시하는 학자들은 대표적으로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농민이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고 생각했지요.

<농민이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 농당당!>

이들은 농민들이 당당하기 위해서는 농민들이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고 안정적으로 토지를 경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조선 시대 소수의 지주들에게 토지가 집중되어있는 현실을 개혁하여 다수의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유형원은 균전론을 주장했습니다. 균전론의 내용은 모든 토지 소유를 국가의 것으로 하고 백성들에게 일정량의 토지를 고르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균전론이지요. 하지만 이 균전론은 신분질서 자체를 부정한 토지제도가 아니여서 사대부들은 농민 보다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했습니다. 또한 상인은 농민이 받는 토지 절반만 지급하는 등 기존의 신분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 있습니다.

또 다른 농당당의 대표인 이익은 한전론을 주장했습니다. 한전론은 토지 소유의 하한선을 설정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이 정도의 토지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경계를 주장한 것이죠. 그것이 바로 영업전입니다. 영업전은 농민들이 생활하는 데 있어 최소 이정도의 토지는 가지고 있어야 것을 설정한 토지입니다. 이 영업전은 원칙적으로 매매가 안 되고 영업전 이외의 토지는 자유롭게 매매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점진적으로 토지 제도를 개혁해나간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있었지만 여전히 대규모 토지 소유를 막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농당당의 대표자는 바로 유명한 정약용입니다. 정약용은 두 가지 토지 제도를 주장했습니다. 하나는 여전론이고 하나는 정전론입니다. 농당당 대표 중에 유일하게 두 가지의 토지제도를 주장했죠? 그만큼 농민의 생활에 관심이 많은 학자였습니다. 그럼 여전론과 정전론 제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지요.

여전론은 공동 경작과 공동 분배를 바탕으로 한 토지제도 입니다. 말이 어렵죠? 내용은 쉽습니다. 즉, 개인 소유의 토지가 하나도 없고 토지를 한 사회의 소유로 하는 겁니다. 즉, 공동소유하는 거죠. 그리고 공동 소유한 토지를 공동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일한 만큼 배부 해주는 겁니다. 어딘가 많이 본듯한 이론이지 않아요?

<ㅋ 또 난가? 정약용의 여전론은 사회주의 이론과 비슷하다>

여전론은 개인 소유의 토지가 없고 마을이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측면에서 사회주의와 비슷합니다. 생산수단을 개인의 소유가 아닌 사회의 소유로 하는 것이 사회주의 사상의 핵심이니까 정약용의 여전론이 그런 점에서 비슷하죠. 

정약용은 여전론 자체가 당장 실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토지제도를 강구했는데 그것이 바로 정전론입니다. 정전론은 예전 중국에도 있던 제도인데 토지를 井자로 구획하는 겁니다. 그러면 토지가 9개로 구획이 되죠? 그리고 8개 가구에 토지를 하나씩 배분합니다. 그러면 하나가 남죠? 하나 남은 토지는 8가구가 공동으로 경작하고 거기서 나는 곡식은 세금으로 냅니다. 이해가 되나요?

상업은 하늘이다!

이제 실학의 또 다른 계파인 상하당을 만나러 가시죠!

<상업은 하늘이다! 어디 건방지게 농업이 떠들고 있어!>

상하당의 대표적인 실학자는 바로 유수원, 박지원, 박제가 등입니다. 이들은 농업보다 상업이 살아야 나라가 더 힘이 세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북학파로서 청과 교류하여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유수원은 사농공상 순으로 되어있는 직업차별을 없애고 모두 동등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박지원은 주로 소설로서 놀고 먹는 양반을 비판하기도 했는데 특히 허생전에서는 우리나라의 취약한 상업의 유통구조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허생전에서 선비가 장사를 하는 모습이 묘사되고 조선 상업 유통의 취약성을 여실히 비판한다>

상하당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인물은 박제가입니다. 박제가는 이전에 선비들이 가지고 있던 근검, 절약 정신을 비판하고 재물이란 적당히 소비를 해야지만 다시 생산을 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원리와 비슷한 것으로 소비가 생산을 촉진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이 시기 벌써 그런 생각을 가진 인물이 있었다는 점이 눈여겨봐야할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실학이 대두하면서 또 하나 크게 바뀐 점이 바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입니다. 왜 갑자기 우리 것에 관한 관심이 증가했을까요?

실학은 실사구시 정신으로 성립한 학문입니다. 즉,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태도입니다. 때문에 당장 눈에 보이는 사실을 탐구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더니 그게 우리나라였던 겁니다! 자기 나라의 역사, 지리, 글을 연구해야 진정한 학문을 탐구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이 시기 우리나라 고유의 역사와 지리, 글에 대해 연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하는 움직임은 옛날부터 있었지만 조선 중기 시절에는 중국 중심 사관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학이 대두하면서 그 움직임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동사강목은 중국 중심 사관을 비판하고 민족사의 독자적 정통성을 수립했습니다. 유득공의 경우 발해고를 저술해 발해에 대한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발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지리 쪽에서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이중환의 택리지가 눈여겨 볼만합니다. 대동여지도는 아주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지도로 목판에 새겼다는 점에서 대량생산을 시도하려 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택리지는 일종의 지리서로 각 지방의 자연환경, 풍속 등이 자세히 적혀 있어 그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대동여지도, 한 권의 책을 펼치면 이런 모습이 된다>

끝으로 우리 한글에 대한 관심도 높아저서 훈민정음을 연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가 이 시기 편찬되었습니다.

과학기술이 쑥쑥

또 한 번 얘기가 나오지만 실학은 실사구시의 학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현상이나 현실 문제에 관심이게 마련이어서 과학, 기술에 관한 관심도 남달랐습니다. 특히 서양의 과학, 기술이 청을 통해 전파되면서 서양 것이라도 과학과 기술이 조선의 실정에 맞다고 판단하여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서양의 달력인 시헌력이 도입되기 시작했고 세계 지도인 곤여만국전도가 전래되었습니다. 특히 곤여만국전도는 당시대부들의 세계관을 바꾸어놓기도 했습니다.

<곤여만국전도, 서양 선교사 마태오 리치에 의해 들어왔다>

이외에도 정약용은 서양의 서적을 보고 거중기를 고안하기도 하는 등 서양 과학기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우리나라 것으로 소화해서 발전시켰습니다. 

실학의 의미는 뭘까?

실학은 실사구시학을 바탕으로 발전한 학문입니다. 우리나라 교과서에서는 실학과 성리학을 전혀 다른 학문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실학은 성리학에서 나온 학문이니 만큼 그 뿌리는 성리학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실학과 성리학이 아주 같다고는 할 수 없는데 실학이 성리학에 비해 다른 점은 성리학 보다는 좀 더 사실과 제도 등 현상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역사, 지리, 글에 관심이 많아지고 토지제도나 상공업 진흥 등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뭐 저는 동의하지 않지만 ^^; 이 이야기는 나중에 시간이 되면 심화 파트에서 다루기로 하지요.)

문화를 향유하는 계층이 넓어지다

조선 후기 하부구조의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문화를 향유하는 계층의 폭도 증가됩니다. 농업생산력 증가와 상공업의 발전으로 일반 서민들도 문화를 즐길만한 여유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들 서민은 양반문화처럼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형식을 바탕으로 예술활동을 합니다. 특히 길이의 제한이 없는 사설시조와 같은 것들이 이 당시 서민 문화가 어떤 것인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터비 리를 물고 두험 우희 치라 안자

 것넌 山(산) 라보니 白松骨(백송골)이 잇거 가슴이 금즉여 풀덕 여 내다가 두험 아래 쟛바지거고

 모쳐라 낸 낼싀만졍 에헐질 번괘라.

<진본 청구영언> - 작자미상 


이 사설시조를 보면 그 당시 서민들이 현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지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런 사설시조 외에도 한글소설이 등장하고 판소리와 탈춤이 등장을 하여 서민 문화를 좀 더 풍요롭게 만들었고 또 이런 문화를 통해 민중의 의식 수준은 높아져 갔습니다.

서민 문화 발달은 다른 영역에도 자극을 주었는데 특히 그림에서 두드러졌습니다. 특히 풍속화가 발달했는데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그림이 많아 조선 후기 삶을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됩니다.

<위는 김홍도의 장터길, 아래는 신윤복의 주유청강>

또 하나 산수화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이전까지 산수화는 실제 풍경을 보지 않고 상상으로 그린 것이 대부분 이었지만 진경 산수화는 실제 경치를 보고 그렸다는 점이 다르고 중국의 경치가 아닌 우리나라 경치를 그렸다는 데서 우리나라 풍경에 관한 자부심을 볼 수 있습니다.

<정선의 금강전도>

특히 이 시기에는 서양 화법에서 도입된 원근법도 사용되어 보다 다양한 화풍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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