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2) 조선에서도 근대의 기운이 움트다
2-5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다
2-6 평등 사회를 향해 나아가다 


조선 후기 하부구조가 변하기 시작하다!

 제목에 이상한 얘기가 등장했네요. 하부구조? 하부구조는 무슨 말일까요? 자 이 얘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사람을 만나야 됩니다. 누구냐구요? 바로 Karl Marx!

 <조선 후기 얘기 하는데 왜 갑자기 맑스가 나올까? 바로 그의 사상 유물론 때문이다>

칼 맑스는  자신의 이론을 전개해나가면서 다음과 같은 이론을 전개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유물론이며 유물론에 따르면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지배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구요?

자, 한 사회를 두 가지 구조로 나눕니다. 하부구조는 경제에 관련된 것들 예를 들면 농업, 산업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상부구조는 하부구조를 기반으로 생겨나는 정치, 철학, 사상입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하부구조가 변화하면 하부구조를 기반으로 하는 상부구조도 변화합니다. 즉 생산력의 획기적인 변화가 발생하면 그 시대의 철학이나 정치체제도 바뀌게 되는데요. 예를 들면 프랑스 대혁명도 당시 생산력의 증대로 말미암아 상부구조가 그 변화의 힘에 의해 정치체제가 바뀌는 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어쨌든 조선 후기에 마르크스가 얘기하는 하부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지난 시간 얘기한 농업 생산력 증대도 그러하고 오늘 얘기를 할 상업의 발전도 그러합니다.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수공업도 활발해지면서 조선 시대 억눌려 있었던 상업이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합니다. 특히 대동법의 시행으로 상업이 더 활성화 되는데 국가에 관수품을 조달하던 공인은 상업 활성화를 이끌었스니다. 또한 국가에서 공식으로 인정해준 공인외에도 사상들이 점점 성장해나갔는데요. 그들은 시전상인들이 행사하는 금난전권(난전을 금지할 수 있는 권리)을 피해 4대문 밖에 있는 종루, 칠패, 이현, 송파에서 상권을 형성했습니다.

 <사대문 밖에 사상들의 난전들이 성행했다>

사상들이 더욱 성장하고 난전을 막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들의 금난전권이 폐지되기에 이르는데 이것이 신해통공이고 1791년에 일입니다. 금난전권이 폐지되자 상업의 발전은 이제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었습니다. 상업의 발달은 서울 뿐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 되어 지방에서도 상업이 활성화 되기에 이릅니다. 개성의 송상을 비롯하여 청과 주로 무역을 하던 의주의 만상, 일본과 무역을 하던 동래의 내상, 평양의 유상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전국에는 장시과 활발하게 열렸습니다. 또한 장시와 장시끼리 연결되어 유통망이 조직되었고 이러한 유통망을 기반으로 운송업이 발달합니다. 운송업에 전문적으로 종사한 상인들도 나타나는데 이들은 서울에 경강 상인들입니다. 이들은 주로 배를 가지고 서남 해안을 오고 갔습니다. 이런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자 부를 축적해나가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그들은 도고라고 불리는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독점적 도매상이 되었습니다. 

장시와 포구를 중심으로 유통 네트워크가 구축되다

상업이 발달하고 그에 따라 장시와 포구들이 발달하자 장시와 포구를 중심으로 일종의 유통망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보따리 장수들인 보부상은 장날에 맞추어 각 장시들을 순회하면서 각 장시들이 연계되었고 일부 지역 장시는 오일마다 장이 서는 것이 아니라 상설로 장이 열려 상업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조선후기 상업 유통망>

장시와 더불어 포구도 발달했는데 포구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기차가 발달하기 이전 시기 대부분의 교통로는 수로를 의지했기 때문에 포구가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포구는 주변에 장시와 연계되어 유통 거점이 되기도 했지요. 

이렇게 상업이 발달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자 숙박업이나 운송업, 창고업 등 상업에 필요한 여러가지 것들이 생겨나고 이를 담당하기 위해 객주, 여각이 발달했습니다. 

국내 상업 발달과 더불어 대외 무역도 활기를 띠었습니다. 국제 무역은 크게 개시와 후시로 나누는데 개시는 국가가 공식 허용한 무역이고 후시는 그렇지 않은 무역 형태를 말합니다. 개시 무역은 국가가 공식으로 허용하여 교역 물품과 교역량이 정해져 있어 이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후시 무역을 한 것입니다. 후시 무역이 확대되면서 지방의 상단 들이 성장하는데 이들이 앞서 말했던 만상, 송상, 내상들입니다.

<조선 후기 만상, 송상, 내상 등을 다룬 드라마 상도>

http://blog.naver.com/todaypia?Redirect=Log&logNo=130092794771&jumpingVid=7CDBE37545F0C0A1F23C675B389FA5C322ED(만상의 모습, 만상의 임승옥이 승부수를 던지는 장면)

쩐의 시대가 도래하다

조선 후기 상업이 발전한다는 것 까지는 잘 알았죠? 조선에서 상업이 발전하면서 획기적인 변화가 하나 일어나는데 그게 바로 화폐의 보급입니다. 우리나라 화폐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만들어지기만 했다 뿐이지 실제로 사용되는 건 바로 조선 후기에 와서입니다. 상업이 발전하자 사람들은 돈의 편리함에 대해서 알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화폐가 보급된 것이죠. 하지만 사람들이 화폐를 처음쓰다보니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게 바로 돈이 부족해주는 현상입니다. 

<돈이 좋아 하앍! 화폐의 중요성을 알자 화폐 자체를 쓰지 않고 모으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돈을 처음 가지게 되었을 때의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돈이 참 신기했겠지요. 돈으로 물건을 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람들이 곰곰히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 돈이 가장 가치가 높은 거구나. 그러고 돈을 안 쓰고 모으기만 했지요. 사실 돈의 진정한 가치는 돈을 쓰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으기만 하면 뭘 하나요. 그걸로 물건을 사야 돈으로서 역할을 하는거죠. 아무튼 화폐 유통이 초기이다 보니 사람들은 그런 인식이 부족했나 봅니다. 그래서 돈을 쓰지 않고 모으기만 하자 돈이 부족해지는 현상이 나타난거죠.

아무튼 이런 현상도 다 화폐 경제가 활성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났던 현상들입니다. 돈이 부족해졌다고 해서 이제는 화폐를 없앨 수 없었겠지요. 한번 구르기 시작한 돌은 멈출 수가 없는 법입니다. 화폐 경제가 발전해가면서 화폐 대신 어음, 환 등 신용 화폐 등도 생겨나고 대규모 상거래도 나타났는데 이것을 볼 때 조선의 상업이 기지개를 펴고 있으며 서서히 상업자본이 축적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 아니지 않나요?

영국과 조선의 발전 과정이 비슷하다고? 

<어서 많이 본 장면같지 않나? 데자뷰를 느끼는가?>

그것이 바로 유럽의 상업혁명 발전과정이랑 비슷하죠? 상업이 발달하면서 상인들을 중심으로 상업자본이 축적, 축전된 상업 자본이 수공업자들을 지배하기 시작하여 선대제가 나타나는 설명. 이게 일명 조선에도 자본주의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었다는 설명인데 사실 무리가 많은 설명입니다.

<무리수 자제염-_->

이런 설명은 왜 나오게 된걸까요? 이것은 일제가 조선은 무능한 나라였고 우리에게 먹힐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설명에 맞서기 위해 조선은 잘 발전하고 있었는데 일제가 침략해서 시망했다고 반론을 펴는 과정에서 탄생한 설명입니다. 예전에는 각광을 받는 이론이었으나 지금의 식민사학자라고 엄청 욕먹고 있는 이영훈 교수에게 이 이론이 무참히 짓밟힌 후로 거의 폐기처분 되었습니다. 왜 그런걸까요?

영국에서 자본주의가 싹트고 산업혁명이 발생한 것은 굉장히 굉장히 굉장히 우연한 계기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말이 좋아 상업자본이 축적되고 그것이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지만 그 연결고리가 매우 모호합니다. 따라서 영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의 산업화는 본질적으로 다른 나라에서 이식된 것입니다. 그러니 조선에도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런 주장은 자본주의와 산업화를 인간 역사 발전 필수 요소로 간주함으로써 그렇게 발전하지 못했던 다른 나라들을 싸그리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좀 어려운 얘기가 나왔는데 이런 사실 정도는 한국사를 배우는 입장에서 조금쯤은 기억해볼만 합니다. 아시겠지요? 역사는 다양한 사고와 논리가 중요하니까요.

신분질서가 요동치다

조선후기 농업, 상업, 수공업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잘 보았을 겁니다. 이런 것들은 앞서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모두 하부구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런 하부구조가 변화하면서 상부구조가 변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살펴볼 것은 바로 신분제입니다. 

졸부들이 갑자기 돈을 많이 가지면 원래부터 우리는 상류층인양 행세하고 싶기 마련! 조선후기에도 이와 비슷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농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부농,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업자본가, 수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독립 수공업자들이 나타나면서 기존의 신분질서가 흔들거립니다. 이런 신흥 자본가들은 공명첩이라는 것을 구입하여 합법적으로 신분상승을 이뤘습니다.

<임진왜란기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국가에서 실권 없는 벼슬을 돈 주고 팔았는데 그게 공명첩이다>

이런 합법적인 방법도 있었지만 족보를 사거나 혹은 위조하는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조선 후기 양반의 비율은 비약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합니다. 지금 주변을 보면 양반 아닌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ㅎㅎ

이렇게 부유한 층이 신분을 상승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반대로 신분이 내려 앉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잃고 하루하루 노동을 해서 살아가는 임노동자가 되거나 아니면 영세 상인으로 살아갔습니다. 양반 중에서도 일반농민과 다름 없을 정도로 몰락한 양반이 탄생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잔반입니다.

<교과서 그림에도 있는 자리 짜는 양반의 모습, 양반이라고 별 수 있나? 입에 풀칠하려면 일해야 된다!>

이처럼 조선 후기 신분 질서가 요동하면서 점점 양반은 늘고 상민이나 노비는 줄어드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바로 세금을 내고 군역의 의무를 지는 상민의 수가 없어지기에 이릅니다. 국가 입장에서 양반이 느는 것은 상관없지만 상민의 수가 줄어드는 것은 매우 치명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민의 수를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순조 때 천민이었던 공노비를 해방하여 상민으로 만드는 조치를 단행하기도 했습니다.

중간에 끼인 아이들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다

조선시대 이도 저도 아닌 중간에 낑긴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서얼과 중인들이었습니다. 서얼은 양반의 자식이지만 어머니가 정식 부인으로 인정받지 못한 첩이기 때문에 평민은 아닌데 양반은 아닌 굉장히 애매모호한 존재로 취급받았습니다.

 <홍길동이 대표적인 서얼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다는 대목에서 적서차별이 느껴진다>

서얼 뿐 아니라 주로 전문 기술직을 맡았던 중인들도 신분상승 욕구를 표출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중간 계층들의 신분상승 욕구는 신분질서가 동요하는 조선 후기에 더욱 분명해집니다. 서얼들은 집단 상소 운동을 전개하여 자신들의 관직 진출 제한을 없애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고 정조 때는 실제로 서얼들이 정치권에 진출하여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서얼들의 움직임을 보고 중인들도 자극을 받아 대규모 상소 운동을 벌였지만 중앙정부가 이런 요구를 무시했습니다. 대신 중인들끼리 똘똘 뭉쳐 그들만의 문화를 향유했는데요. 특히 시를 짓고 즐기는 일종의 동호회인 시사를 만들어 활동했습니다. 이런 문화는 양반들만 즐기던 것인데 중인들도 이 같은 문화를 즐김으로 해서 문화적인 신분차이가 없어지는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향촌에서 파워 게임이 시작되다

신분질서가 요동치면서 향촌 사회 내에서도 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새롭게 권력을 얻은 사람들인 부농층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기존 사족들을 밀어내고 향촌에서 지배권을 다지려고 했습니다. 이들 신흥 향촌 세력들을 신향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수령과 향리들과 결탁해서 향촌 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해나갔습니다. 

기존에 있던 사족들은 구향이라고 불렀는데 이들 앉아서 권력을 빼앗기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향과 구향간에 싸움이 일어났는데 이 싸움을 통해 득을 본 건 어이없게도 수령과 향리들이었어요 ^^; 구향과 신향 어느 한 쪽이 완벽하게 향촌의 지배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수령을 견제할만한 세력이 사라져버린 셈이 되었지요. 그래서 힘이 강해진 수령과 향리들이 마음껏 백성들을 수탈하게 되었고 그래서 대규모 민란이 19세기에 발생하게 됩니다. 슬픈 현실이네요 ㅠㅠ

왜 강이 주요 교통로로 사용되었을까?

조선 후기 상업 중심지를 보면 대부분 강을 끼고 발전했는데 그 이유는 조선시대 주요 교통로가 강이나 수운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조선시대는 육로 대신에 강을 교통로로 선택했을까요? 그 이유를 말해봅시다.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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