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3) 격동의 19세기, 조선의 당면 과제는?
3-1 지배층의 수탈 속에서 사회 불안은 깊어만가고 …… 
3-2 세상을 바꾸려는 움직임 


쉴드를 쳐줄래야 쳐줄 수 없는 막장 정치!

조선 왕조의 역사적 평가가 일제에 의해 많이 훼손되면서 조선 왕조의 역사적 평가를 회복하려는 역사학계에 움직임이 일제 강점기 동안과 광복 후에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조선 왕조를 대놓고 폄하하는 분위기는의 사라졌다고 보시면 됩니다만... 한 가지 도저히 쉴드를 쳐줄 수 없는 막장 정치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세도정치입니다.

<세도정치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 막장-_->

세도정치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그 과정을 봅시다. 탕평정치에 대한 기억을 잠깐 떠올려볼까요? 국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붕당 정치에 개입하여 왕권으로 각 붕당을 누름으로써 탕평 정치를 시행했습니다. 자연히 왕에게 권력은 집중되었습니다. 더 이상 신하의 무리인 붕당은 정치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국왕과 그 친위세력 일부가 정치를 행해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갑작스럽게 권력의 정점이던 국왕이 병사하자 자연스럽게 국왕이 가지고 있던 권력은 국왕의 친위세력들에게 계승되었고 그 친위세력들의 주인공은 바로 조선조 내내 그 세력을 꺾으려고 기를 썼던 외척이었습니다.

<권력의 정점인 국왕이 죽자 권력은 국왕 친위세력이 독점하게 된다>

세도정치는 몇몇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형태였습니다. 특히 권력을 독점했던 유명한 가문들이 바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이었는데 이들은 권력은 나는 새도 떨어트릴 정도였으며 부패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가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세도정치를 행했다>

이들은 비변사의 주요 관직을 독점했고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특히 관직 매매와 같은 비리가 성행했고 과거 시험 부정을 저지르기도 하는 등 조선 초기와 중기를 거치면서 닦아놨던 정치체제가 무너졌습니다. 중앙에서 세도 정치가 행해지자 지방의 사정도 악화되어 갔습니다. 세도정치가들에게 관직을 사서 수령이 되었던 이들은 본전을 뽑기 위해 미친듯이 백성들을 수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내 생일인데 겨우 요것만 바쳐? 수령과 아전들의 수탈은 극에 달했다>

이들의 수탈은 흔히 삼정의 문란이라는 단어로 설명됩니다. 삼정은 국가 주요 재정 수입원을 말하는데 하나는 토지세(전정), 또 하나는 군정(군포), 마지막은 환곡입니다. 이들은 이 세 가지 세금을 정해진 것보다 많이 걷거나 편법을 써 백성들을 쥐어짰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문란했던 것은 바로 환곡입니다. 환곡은 곡식이 없는 춘궁기 때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다시 돌려받는 제도인데 이 과정에서 수령과 아전들은 필요 이상의 이자를 많이 받아챙겼습니다. 어떤는 이자를 본전보다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바로잡고자 정부에서는 암행어사를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미봉책에 불과했고 오히려 어떤 고을에서는 암행어사가 수령에게 잡히거나 수령과 결탁하는 상황도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조낸 멋져 보이는 암행어사와 마패, 하지만 현실은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았다>

괴상하게 생긴 배가 나타나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 내부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자본주의가 독점 자본주의로 발전하고 식민지를 과열 팽창하는 제국주의가 나타나면서 열강들이 아시아에 있는 국가들에게 침략의 손길을 뻗쳤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도 심심찮게 서양 배가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이양선(異樣船:: 다를 이, 모양 양, 배 선)입니다. 이양선은 다른 모양의 배라는 뜻입니다. 조선 사람들 눈에는 서양의 배가 신기하게 보였을 겁니다.

<열강들의 이양선>

이런 이양선들은 우리나라 해안의 깊이나 지도를 그리거나 무역을 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은 이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청나라가 서구에 굴복했던 소식을 접했기 때문에 열강들의 요구에 쉽사리 응하지 않았습니다.

혼란한 시대는 구원자를 바란다

세도정치 기에 백성들은 갈수록 삶이 힘들어지자 현실의 삶을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언서의 출현과 구원 신앙의 발흥입니다. 예언서들은 지금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후천개벽상을 주장했고 미륵 신앙이 후삼국 시대에 이어 등장하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런 예언 사상이나 미륵 신앙은 예전에도 우리나라에 있던 것으로 별로 특이할 건 없었지만 이 시기 주목할 만한 신앙이 출현하는데 그것이 바로 천주교입니다. 천주교는 17세기에 북학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청에서 학문 연구 차원에서 들여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자생적으로 이 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점차 민간으로 확산되어나갔습니다.

<배론 신학당의 모습, 천주교 신학을 가르치는 곳으로 1855년에 만들어졌다>

천주교 사상이 민중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는 것과 내세의 영생을 약속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믿었습니다. 그러나 초기 천주교는 제사를 우상 숭배라 생각했기에 제사를 거부해서 정부의 거센 탄압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프랑스 선교사들이 국내에 들어와서 활동을 하면서 그 교세가 날로 확장되어 갔습니다.

이런 천주교의 유입에 자극을 받아 국내에도 새로운 종교가 탄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이었습니다. 동학은 천주교 사상에 영향을 받고 국내에 이미 있던 사상들을 혼합했습니다.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이라는 것을 내세웠으며 보국안민을 내세워 열강들의 침략 움직임에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동학의 포교 지역>

또한 동학은 후찬개벽을 주장하며 수령들의 수탈에 지친 민중들에게 큰 지지를 얻어 날로 교세가 확장되어 갔습니다. 동학의 교세가 날로 확장되어가자 이것을 가만두고 볼 수 없었던 정부는 최제우에게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명을 씌어 처형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최제우의 죽음에도 동학의 교세 확장은 막을 수 없었으며 오히려 억울한 최제우의 죽음을 풀어달라는 움직임인 교조 신원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후에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으로 연결되는 도화선이 되기도 합니다.

풀들이 일어나다!

계속된 지배층의 수탈로 인해 더 이상 살길이 막막해진 민초들은 농사를 짓던 농기구를 잡고 지배체제의 모순에 맞서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연약한 풀들이 힘차게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소작료를 깍거나 납세를 거부하는 항조나 거세와 억울한 일을 알리는 벽서나 소청과 같은 작은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종래에는 농민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대표적인 농민 봉기 중 하나인 홍경래의 난>

홍경래의 난은 대표적인 농민봉기 중 하나로 농민 뿐 아니라 신흥 상공업 세력과 광산 노동자들이 참가했습니다. 이들은 평안도 지역에 대한 차별을 호소하며 지배층의 수탈에 강하게 저항했습니다. 1862년에는 단성 농민 봉기와 진주 농민 봉기를 거치면서 전국적으로 농민 봉기가 확대되어 이를 임술 농민 봉기라 불렀습니다. 정부는 이런 사태에 대해 심각성을 느끼고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을 방안에 대해 논의했으며 암행어사를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삼정이정청에서 나온 대안 중 조세제도를 혁신적으로 바꾸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의견이 기존의 조세제도는 그대로 두고 그 운영반향만 개선하자는 의견이어서 농민들의 불만을 잠재우지 못했습니다.

ㄱ자 교회는 어떤 까닭으로 지어졌나?

<전북 익산에 있는 두동교회의 내부모습>

위에 그림은 전북 익산에 있는 두동교회의 내부모습입니다. 두동교회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개신교 교회 건물인데요. 독특하게도 ㄱ자 형태로 건물이 지어졌습니다. 왜 이런 교회 건축양식이 나타나게 되었을까요? 힌트를 드리면 교과서에 있는 초기 천주교 미사 모습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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