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원 3단원에 해당하는 프린트입니다. ^^ 시험기간 얼마 안남았는데 열심히 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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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4) 흥선대원군, 10년 권세를 쥐다
4-2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실시하다 


외국과 마찰이 일어나다

조선 후기, 서양 열강들이 서서히 조선에 접근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안 좋은 의도로 말이죠 ^^; 자신들의 상품을 팔 시장 확대 측면도 있었고 자신들이 믿는 종교를 포교한다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열강들과 조선이 접촉하면서 곳곳에서 마찰이 일어납니다. 대표적으로 천주교 박해사건이 있습니다. 

<병인박해때 많은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 선교사가 죽은 절두산>

1860년, 러시아가 청으로부터 연해주를 획득하고 조선에 국경을 맞대면서 러시아는 조선에 무역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흥선대원군은 국내에 들어와있던 프랑스 선교사 세력을 이용하여 러시아를 막으려고 했으나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습니다. 국내에서 천주교를 금지 시켜야 한다는 여론도 거세지자 흥선대원군은 대대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병인박해(1866)입니다.

외국과의 마찰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병인 박해가 일어나던 해에 미국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과 무역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나타났는데 이들은 약탈 행위를 자행하고 사람을 죽이는 행위까지 하자 평안 감사였던 박규수의 명으로 제너럴 셔먼호는 파괴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상선이던 제너럴 셔먼호>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조선에 들어와 무역을 요구했으나 모두 거절 당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오페르트는 미국인 자본가와 프랑스 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덕산군 관아를 습격하고 밤늦게 흥선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이에 격노한 흥선 대원군은 서양 세력에 더 강경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서양 세력이 침공하다

프랑스는 병인박해에 대한 책임을 조선에 물어 1866년에 침공했습니다. 총 두차례 걸쳐 침입한 프랑스 군은 1차 침입 때는 강화도 침략을 위해 이 근처 지리를 작성하고 해도만을 작성했습니다. 2차 침입에서는 본격적으로 강화도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들은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 조선군에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로부터 프랑스군은 한달 동안이나 강화도를 점령하였습니다.

<프랑스 함대의 1, 2차 침입로>

양헌수는 프랑스의 막대한 화력을 인지하고 정면 공격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심야에 군을 움직여 정족산성을 점령하였습니다. 프랑스 군은 이를 알아차리고 정족산성을 공격했지만 조선군을 이기지 못하고 후퇴했습니다. 이 싸움으로 인해 프랑스 군대는 충분히 조선에 복수를 했다고 판단 군을 철수시켰습니다. 그들은 후퇴하면서 외규장각 도서와 은괴 등을 약탈했습니다. 썩을 놈들이죠? -_-

하지만 세상은 넓고 썩은 놈들은 많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열강 세력이 침입을 감행하는데 그들은 바로 미국입니다.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핑계로 신미년에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며 쳐들어왔습니다. 이것이 신미양요입니다. 미국은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강화도를 공격했습니다. 이때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이 격렬하게 항전했지만 어재연 장군이 죽는 등 미국에 크게 패했습니다.

 <미군에게 빼앗긴 어재연 장군의 수(帥:장수 수)자 깃발>

 큰 승리를 거두고 미군은 이제 곧 자신들이 요구하는 통상을 조선이 곧 수용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왠걸 우리의 흥선대원군은 똥고집 쟁이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장기전에 대비하며 서양 오랑캐랑 상종을 하지 않겠다고 천명했습니다. 미군은 자신들의 예상이 빗나가자 적잖이 당황했으며 여러 가지 사정이 겹치자 결국 철수하고 맙니다. 흥선대원군은 신미양요를 승리한 전쟁으로 인식하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움으로써 서양 세력과 통상하지 않겠다는 뜻을 천명했습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했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는 내용의 척화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승리한 전쟁인가?

과거 우리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서구에 맞서서 승리한 전쟁으로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파견된 서양 군대의 규모나 전투의 면면을 들여다 보면 조선의 힘이 강해서 승리한 전쟁이라고 보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자유롭게 얘기해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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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4) 흥선대원군, 10년 권세를 쥐다
4-1 왕권을 강화하고 민생 안정을 추구하다

흥선대원군을 둘러싼 오해를 풀자

이번 시간부터 흥선대원군에 대해 배워볼텐데 먼저 흥선대원군에 대한 소소한 오해를 풀면서 시작해볼까 합니다. ^^ 우리가 보통 흥선대원군하면 척화비를 세운 사건으로 인해 개화를 가장 많이 반대한 인물, 꽉막힌 사람으로 인식하는 데 그게 정말 사실일까요?

<흥선대원군은 단지 개화를 반대하기만 한 척사파에 지나지 않는가?>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은 역사를 무조건 두 개의 대비되는 집단으로 가둬서 판단하려고 해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개화 vs 척사로 갈라놓고 흥선대원군은 어떠했는가를 보니 떡 하니 척화비를 세웠거든요. 그래서 척사를 대표하는 인물로 낙인 찍히고 조선의 개화를 늦춘 장본인이 되는 거죠. 하지만 그렇게만 판단해서 역사는 자신의 진정한 얼굴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먼저 역사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현대의 관점을 걷어내는 관점을 먼저합니다. 지금이야 그때 당시 개화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흥선대원군의 입장에서 개화는 민생 안정과 왕권 강화 보다는 떨어지는 문제였을 겁니다.

그래도 개화 못한 건 욕 먹어도 싸지 않냐고요? 병인양요가 왜 일어난지 혹시 아시나요? 병인양요는 흥선대원군이 프랑스 선교사를 박해하면서 일어난 사건인 병인박해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프랑스가 조선에 침입한 겁니다. 프랑스 선교사 탄압했으니 개화에 반대한 인물 맞지 않냐고요? 얘기는 끝까지 들어야죠 ^^ 흥선대원군은 당시 국내에 들어와있던 프랑스 세력을 이용해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생각처럼 안 되고 국내에 천주교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가 커지자 병인박해를 단행한겁니다. 어때요 이러니까 사람이 좀 달라보이죠?

<명성황후는 재평가를 넘어서 미화까지 되었다. 반면 흥선대원군의 평가는 아직 초라하다.>

http://blog.naver.com/rhaehfoi123?Redirect=Log&logNo=20088749528&jumpingVid=94AD05E5236322E1F1EB8BC92EF2F6859EFF(7분 9초쯤 내가 조선의 국모다 드립 시전-_-; 8분 30초에 다시 나온다.)

같은 시기 대립각을 세우던 명성화후는 내가 조선의 국모다 드립으로-_-; 재평가를 넘어서 상당히 미화가 되었지만 그에 비해 흥선대원군은 변변찮은 평가를 받은 것만 봐도 흥선대원군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물론 흥선대원군의 한계는 분명합니다. 어디까지나 왕권강화를 추구했으며 개화에 대한 필요성은 인식했지만 심각성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를 살았던 다른 정치가들을 생각하면 그는 상당히 깨였던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왕실의 위엄을 다시 세우다

세도정치 기간에 세도 가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약간은 무능한 왕을 앉히려고 했습니다. 뭐, 세자가 있으면 어쩔 수 없지만 후계자가 공석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죠. 철종도 원래는 일자무식의 나무꾼이었지만 세도 가문들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강화도령이라 불렸던 나무꾼 철종>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세도 가문들은 또 다시 누가 누가 멍청한 왕일까를 고르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마치 무한도전에서 박명수와 김태호 PD 둘 중 누가 더 잘생겼는가를 골랐던 처럼 말이죠 ^^;

<막장 매치업! 철종의 후계자를 정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왕위로 간택되었던 사람이 그 이름도 유명한 개똥이(고종의 아명)! 이름부터가 참 친숙하죠? 하지만 멍청한 왕을 골랐다고 안심할 때가 아니었으니 바로 왕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던 것이죠. 흥선대원군은 원래 왕족이었지만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아래에서 항상 감시 당하는 생활을 해야되었습니다. 그는 안동 김씨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건달행세를 하며 궁도령, 상갓집 개로 불리는 치욕을 당했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며 권력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 안동 김씨 세력을 약화시키고 당파, 지역, 신분을 가르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습니다. 그리고 조선 중기부터 최고 정무기관이었던 비변사를 없애고 의정부를 다시 최고 기관으로 부활시켰으며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을 편찬하여 경국대전 이래에 계속되었던 조선 법전 체제를 다시 정비했습니다. 또한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조리 혁파했는데 이때 그가 남긴 말이 인상적입니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하물며 서원은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유학자를 제사하는 곳인데, 지금은 도둑의 소굴이 되어 버렸으니 말할 것도 없다."

서원 철폐외에도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경복궁을 중건했는데 이때 부족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무리수를 좀 둡니다. 원납전이라는 기부금을 강제로 걷었으며 당백전이라는 고액화폐를 찍어 발행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화폐 가치를 낮추고 물가를 폭등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백성들도 강제로 동원하고 도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내게 하는 등 무리한 공사재정 마련은 양반뿐 아니라 백성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이렇게 중건된 경복궁은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는 데는 어느 정도 역할을 했지만 백성들의 원망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양반도 군포를 내다

흥선 대원군은 자신의 집권 이전에 일어난 전국적 농민 봉기를 지켜보면서 농민 봉기의 원인이 되는 되었던 삼정의 문란을 개선하고 했습니다. 특히 군포 제도는 획기적인 제도 개선을 이루었는데 상민들만 내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제를 마련했습니다.

<호포제로 인해 상민과 양반 모두 군포를 납부하게 되었다>

또한 그 동안 문제가 되던 환곡 제도는 관아에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안에서 덕망이 있는 사람을 뽑아 마을에서 자치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지방관이 운영하던 환곡제(위)를 마을 자치적으로 운영(아래)할 수 있게함으로써 환곡의 폐단을 막고자 했다>
 
또한 전정제도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양반과 지주들이 함부로 농민의 토지를 빼앗지 못하게 하고 세금을 안 내기 위해 토지 대장에서 누락시킨 은결을 찾아내는 데에도 주력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왜 그토록 경복궁을 중건하는데 집착했나?

오늘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에 대해 배우면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시켰다는 사실을 배웠는데요. 왜 흥선대원군은 그토록 경복궁을 중건시키려고 노력했을까요? 여러분에게 힌트를 드리기 위해서 제가 조선시대 궁궐제도에 대해 부연 설명을 좀 하자면 조선의 궁궐은 이원적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정통인 법궁이 있고 또 다른 궁궐인 이궁이 존재합니다. 조선 초기에는 경복궁이 법궁이고 이궁은 창덕궁과 창경궁이었는데요. 임진왜란 기에 경복궁이 소실 되면서 조선 중기 부터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이 되고 광해군 때 지어진 경희궁이 이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복궁이 다시 법궁이 되고 창덕궁과 창경궁이 이궁이 되지요. 경복궁이 법궁이 되었던 시기의 정치 상황과 흥선대원군이 추구하던 목표랑 연결지으면 쉽게 답이 나올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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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3) 격동의 19세기, 조선의 당면 과제는?
3-1 지배층의 수탈 속에서 사회 불안은 깊어만가고 …… 
3-2 세상을 바꾸려는 움직임 


쉴드를 쳐줄래야 쳐줄 수 없는 막장 정치!

조선 왕조의 역사적 평가가 일제에 의해 많이 훼손되면서 조선 왕조의 역사적 평가를 회복하려는 역사학계에 움직임이 일제 강점기 동안과 광복 후에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조선 왕조를 대놓고 폄하하는 분위기는의 사라졌다고 보시면 됩니다만... 한 가지 도저히 쉴드를 쳐줄 수 없는 막장 정치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세도정치입니다.

<세도정치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 막장-_->

세도정치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그 과정을 봅시다. 탕평정치에 대한 기억을 잠깐 떠올려볼까요? 국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붕당 정치에 개입하여 왕권으로 각 붕당을 누름으로써 탕평 정치를 시행했습니다. 자연히 왕에게 권력은 집중되었습니다. 더 이상 신하의 무리인 붕당은 정치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국왕과 그 친위세력 일부가 정치를 행해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갑작스럽게 권력의 정점이던 국왕이 병사하자 자연스럽게 국왕이 가지고 있던 권력은 국왕의 친위세력들에게 계승되었고 그 친위세력들의 주인공은 바로 조선조 내내 그 세력을 꺾으려고 기를 썼던 외척이었습니다.

<권력의 정점인 국왕이 죽자 권력은 국왕 친위세력이 독점하게 된다>

세도정치는 몇몇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형태였습니다. 특히 권력을 독점했던 유명한 가문들이 바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이었는데 이들은 권력은 나는 새도 떨어트릴 정도였으며 부패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가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세도정치를 행했다>

이들은 비변사의 주요 관직을 독점했고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특히 관직 매매와 같은 비리가 성행했고 과거 시험 부정을 저지르기도 하는 등 조선 초기와 중기를 거치면서 닦아놨던 정치체제가 무너졌습니다. 중앙에서 세도 정치가 행해지자 지방의 사정도 악화되어 갔습니다. 세도정치가들에게 관직을 사서 수령이 되었던 이들은 본전을 뽑기 위해 미친듯이 백성들을 수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내 생일인데 겨우 요것만 바쳐? 수령과 아전들의 수탈은 극에 달했다>

이들의 수탈은 흔히 삼정의 문란이라는 단어로 설명됩니다. 삼정은 국가 주요 재정 수입원을 말하는데 하나는 토지세(전정), 또 하나는 군정(군포), 마지막은 환곡입니다. 이들은 이 세 가지 세금을 정해진 것보다 많이 걷거나 편법을 써 백성들을 쥐어짰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문란했던 것은 바로 환곡입니다. 환곡은 곡식이 없는 춘궁기 때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다시 돌려받는 제도인데 이 과정에서 수령과 아전들은 필요 이상의 이자를 많이 받아챙겼습니다. 어떤는 이자를 본전보다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바로잡고자 정부에서는 암행어사를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미봉책에 불과했고 오히려 어떤 고을에서는 암행어사가 수령에게 잡히거나 수령과 결탁하는 상황도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조낸 멋져 보이는 암행어사와 마패, 하지만 현실은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았다>

괴상하게 생긴 배가 나타나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 내부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자본주의가 독점 자본주의로 발전하고 식민지를 과열 팽창하는 제국주의가 나타나면서 열강들이 아시아에 있는 국가들에게 침략의 손길을 뻗쳤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도 심심찮게 서양 배가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이양선(異樣船:: 다를 이, 모양 양, 배 선)입니다. 이양선은 다른 모양의 배라는 뜻입니다. 조선 사람들 눈에는 서양의 배가 신기하게 보였을 겁니다.

<열강들의 이양선>

이런 이양선들은 우리나라 해안의 깊이나 지도를 그리거나 무역을 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은 이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청나라가 서구에 굴복했던 소식을 접했기 때문에 열강들의 요구에 쉽사리 응하지 않았습니다.

혼란한 시대는 구원자를 바란다

세도정치 기에 백성들은 갈수록 삶이 힘들어지자 현실의 삶을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언서의 출현과 구원 신앙의 발흥입니다. 예언서들은 지금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후천개벽상을 주장했고 미륵 신앙이 후삼국 시대에 이어 등장하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런 예언 사상이나 미륵 신앙은 예전에도 우리나라에 있던 것으로 별로 특이할 건 없었지만 이 시기 주목할 만한 신앙이 출현하는데 그것이 바로 천주교입니다. 천주교는 17세기에 북학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청에서 학문 연구 차원에서 들여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자생적으로 이 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점차 민간으로 확산되어나갔습니다.

<배론 신학당의 모습, 천주교 신학을 가르치는 곳으로 1855년에 만들어졌다>

천주교 사상이 민중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는 것과 내세의 영생을 약속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믿었습니다. 그러나 초기 천주교는 제사를 우상 숭배라 생각했기에 제사를 거부해서 정부의 거센 탄압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프랑스 선교사들이 국내에 들어와서 활동을 하면서 그 교세가 날로 확장되어 갔습니다.

이런 천주교의 유입에 자극을 받아 국내에도 새로운 종교가 탄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이었습니다. 동학은 천주교 사상에 영향을 받고 국내에 이미 있던 사상들을 혼합했습니다.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이라는 것을 내세웠으며 보국안민을 내세워 열강들의 침략 움직임에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동학의 포교 지역>

또한 동학은 후찬개벽을 주장하며 수령들의 수탈에 지친 민중들에게 큰 지지를 얻어 날로 교세가 확장되어 갔습니다. 동학의 교세가 날로 확장되어가자 이것을 가만두고 볼 수 없었던 정부는 최제우에게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명을 씌어 처형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최제우의 죽음에도 동학의 교세 확장은 막을 수 없었으며 오히려 억울한 최제우의 죽음을 풀어달라는 움직임인 교조 신원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후에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으로 연결되는 도화선이 되기도 합니다.

풀들이 일어나다!

계속된 지배층의 수탈로 인해 더 이상 살길이 막막해진 민초들은 농사를 짓던 농기구를 잡고 지배체제의 모순에 맞서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연약한 풀들이 힘차게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소작료를 깍거나 납세를 거부하는 항조나 거세와 억울한 일을 알리는 벽서나 소청과 같은 작은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종래에는 농민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대표적인 농민 봉기 중 하나인 홍경래의 난>

홍경래의 난은 대표적인 농민봉기 중 하나로 농민 뿐 아니라 신흥 상공업 세력과 광산 노동자들이 참가했습니다. 이들은 평안도 지역에 대한 차별을 호소하며 지배층의 수탈에 강하게 저항했습니다. 1862년에는 단성 농민 봉기와 진주 농민 봉기를 거치면서 전국적으로 농민 봉기가 확대되어 이를 임술 농민 봉기라 불렀습니다. 정부는 이런 사태에 대해 심각성을 느끼고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을 방안에 대해 논의했으며 암행어사를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삼정이정청에서 나온 대안 중 조세제도를 혁신적으로 바꾸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의견이 기존의 조세제도는 그대로 두고 그 운영반향만 개선하자는 의견이어서 농민들의 불만을 잠재우지 못했습니다.

ㄱ자 교회는 어떤 까닭으로 지어졌나?

<전북 익산에 있는 두동교회의 내부모습>

위에 그림은 전북 익산에 있는 두동교회의 내부모습입니다. 두동교회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개신교 교회 건물인데요. 독특하게도 ㄱ자 형태로 건물이 지어졌습니다. 왜 이런 교회 건축양식이 나타나게 되었을까요? 힌트를 드리면 교과서에 있는 초기 천주교 미사 모습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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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2) 조선에서도 근대의 기운이 움트다
2-7 실학, 부국안민을 위한 개혁을 주장하다
2-8 문화의 주체가 다양해지다 


농민이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

조선 후기 하부구조가 변화를 일으키면서 상부구조였던 사상도 변하시작합니다. 바로 새로운 학문 경향인 실학이 나타났는데요. 이 실학은 성리학에서 벗어난 완전히 새로운 이론이기 보다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면서 파생한 새로운 학문으로 파악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후대에 실학자라고 불리는 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뉩니다. 농업을 중시하는 학자들, 그리고 상업을 중시하는 학자들입니다. 농업을 중시하는 학자들은 대표적으로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농민이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고 생각했지요.

<농민이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 농당당!>

이들은 농민들이 당당하기 위해서는 농민들이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고 안정적으로 토지를 경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조선 시대 소수의 지주들에게 토지가 집중되어있는 현실을 개혁하여 다수의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유형원은 균전론을 주장했습니다. 균전론의 내용은 모든 토지 소유를 국가의 것으로 하고 백성들에게 일정량의 토지를 고르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균전론이지요. 하지만 이 균전론은 신분질서 자체를 부정한 토지제도가 아니여서 사대부들은 농민 보다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했습니다. 또한 상인은 농민이 받는 토지 절반만 지급하는 등 기존의 신분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 있습니다.

또 다른 농당당의 대표인 이익은 한전론을 주장했습니다. 한전론은 토지 소유의 하한선을 설정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이 정도의 토지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경계를 주장한 것이죠. 그것이 바로 영업전입니다. 영업전은 농민들이 생활하는 데 있어 최소 이정도의 토지는 가지고 있어야 것을 설정한 토지입니다. 이 영업전은 원칙적으로 매매가 안 되고 영업전 이외의 토지는 자유롭게 매매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점진적으로 토지 제도를 개혁해나간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있었지만 여전히 대규모 토지 소유를 막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농당당의 대표자는 바로 유명한 정약용입니다. 정약용은 두 가지 토지 제도를 주장했습니다. 하나는 여전론이고 하나는 정전론입니다. 농당당 대표 중에 유일하게 두 가지의 토지제도를 주장했죠? 그만큼 농민의 생활에 관심이 많은 학자였습니다. 그럼 여전론과 정전론 제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지요.

여전론은 공동 경작과 공동 분배를 바탕으로 한 토지제도 입니다. 말이 어렵죠? 내용은 쉽습니다. 즉, 개인 소유의 토지가 하나도 없고 토지를 한 사회의 소유로 하는 겁니다. 즉, 공동소유하는 거죠. 그리고 공동 소유한 토지를 공동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일한 만큼 배부 해주는 겁니다. 어딘가 많이 본듯한 이론이지 않아요?

<ㅋ 또 난가? 정약용의 여전론은 사회주의 이론과 비슷하다>

여전론은 개인 소유의 토지가 없고 마을이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측면에서 사회주의와 비슷합니다. 생산수단을 개인의 소유가 아닌 사회의 소유로 하는 것이 사회주의 사상의 핵심이니까 정약용의 여전론이 그런 점에서 비슷하죠. 

정약용은 여전론 자체가 당장 실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토지제도를 강구했는데 그것이 바로 정전론입니다. 정전론은 예전 중국에도 있던 제도인데 토지를 井자로 구획하는 겁니다. 그러면 토지가 9개로 구획이 되죠? 그리고 8개 가구에 토지를 하나씩 배분합니다. 그러면 하나가 남죠? 하나 남은 토지는 8가구가 공동으로 경작하고 거기서 나는 곡식은 세금으로 냅니다. 이해가 되나요?

상업은 하늘이다!

이제 실학의 또 다른 계파인 상하당을 만나러 가시죠!

<상업은 하늘이다! 어디 건방지게 농업이 떠들고 있어!>

상하당의 대표적인 실학자는 바로 유수원, 박지원, 박제가 등입니다. 이들은 농업보다 상업이 살아야 나라가 더 힘이 세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북학파로서 청과 교류하여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유수원은 사농공상 순으로 되어있는 직업차별을 없애고 모두 동등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박지원은 주로 소설로서 놀고 먹는 양반을 비판하기도 했는데 특히 허생전에서는 우리나라의 취약한 상업의 유통구조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허생전에서 선비가 장사를 하는 모습이 묘사되고 조선 상업 유통의 취약성을 여실히 비판한다>

상하당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인물은 박제가입니다. 박제가는 이전에 선비들이 가지고 있던 근검, 절약 정신을 비판하고 재물이란 적당히 소비를 해야지만 다시 생산을 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원리와 비슷한 것으로 소비가 생산을 촉진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이 시기 벌써 그런 생각을 가진 인물이 있었다는 점이 눈여겨봐야할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실학이 대두하면서 또 하나 크게 바뀐 점이 바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입니다. 왜 갑자기 우리 것에 관한 관심이 증가했을까요?

실학은 실사구시 정신으로 성립한 학문입니다. 즉,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태도입니다. 때문에 당장 눈에 보이는 사실을 탐구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더니 그게 우리나라였던 겁니다! 자기 나라의 역사, 지리, 글을 연구해야 진정한 학문을 탐구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이 시기 우리나라 고유의 역사와 지리, 글에 대해 연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하는 움직임은 옛날부터 있었지만 조선 중기 시절에는 중국 중심 사관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학이 대두하면서 그 움직임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동사강목은 중국 중심 사관을 비판하고 민족사의 독자적 정통성을 수립했습니다. 유득공의 경우 발해고를 저술해 발해에 대한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발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지리 쪽에서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이중환의 택리지가 눈여겨 볼만합니다. 대동여지도는 아주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지도로 목판에 새겼다는 점에서 대량생산을 시도하려 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택리지는 일종의 지리서로 각 지방의 자연환경, 풍속 등이 자세히 적혀 있어 그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대동여지도, 한 권의 책을 펼치면 이런 모습이 된다>

끝으로 우리 한글에 대한 관심도 높아저서 훈민정음을 연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가 이 시기 편찬되었습니다.

과학기술이 쑥쑥

또 한 번 얘기가 나오지만 실학은 실사구시의 학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현상이나 현실 문제에 관심이게 마련이어서 과학, 기술에 관한 관심도 남달랐습니다. 특히 서양의 과학, 기술이 청을 통해 전파되면서 서양 것이라도 과학과 기술이 조선의 실정에 맞다고 판단하여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서양의 달력인 시헌력이 도입되기 시작했고 세계 지도인 곤여만국전도가 전래되었습니다. 특히 곤여만국전도는 당시대부들의 세계관을 바꾸어놓기도 했습니다.

<곤여만국전도, 서양 선교사 마태오 리치에 의해 들어왔다>

이외에도 정약용은 서양의 서적을 보고 거중기를 고안하기도 하는 등 서양 과학기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우리나라 것으로 소화해서 발전시켰습니다. 

실학의 의미는 뭘까?

실학은 실사구시학을 바탕으로 발전한 학문입니다. 우리나라 교과서에서는 실학과 성리학을 전혀 다른 학문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실학은 성리학에서 나온 학문이니 만큼 그 뿌리는 성리학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실학과 성리학이 아주 같다고는 할 수 없는데 실학이 성리학에 비해 다른 점은 성리학 보다는 좀 더 사실과 제도 등 현상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역사, 지리, 글에 관심이 많아지고 토지제도나 상공업 진흥 등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뭐 저는 동의하지 않지만 ^^; 이 이야기는 나중에 시간이 되면 심화 파트에서 다루기로 하지요.)

문화를 향유하는 계층이 넓어지다

조선 후기 하부구조의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문화를 향유하는 계층의 폭도 증가됩니다. 농업생산력 증가와 상공업의 발전으로 일반 서민들도 문화를 즐길만한 여유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들 서민은 양반문화처럼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형식을 바탕으로 예술활동을 합니다. 특히 길이의 제한이 없는 사설시조와 같은 것들이 이 당시 서민 문화가 어떤 것인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터비 리를 물고 두험 우희 치라 안자

 것넌 山(산) 라보니 白松骨(백송골)이 잇거 가슴이 금즉여 풀덕 여 내다가 두험 아래 쟛바지거고

 모쳐라 낸 낼싀만졍 에헐질 번괘라.

<진본 청구영언> - 작자미상 


이 사설시조를 보면 그 당시 서민들이 현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지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런 사설시조 외에도 한글소설이 등장하고 판소리와 탈춤이 등장을 하여 서민 문화를 좀 더 풍요롭게 만들었고 또 이런 문화를 통해 민중의 의식 수준은 높아져 갔습니다.

서민 문화 발달은 다른 영역에도 자극을 주었는데 특히 그림에서 두드러졌습니다. 특히 풍속화가 발달했는데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그림이 많아 조선 후기 삶을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됩니다.

<위는 김홍도의 장터길, 아래는 신윤복의 주유청강>

또 하나 산수화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이전까지 산수화는 실제 풍경을 보지 않고 상상으로 그린 것이 대부분 이었지만 진경 산수화는 실제 경치를 보고 그렸다는 점이 다르고 중국의 경치가 아닌 우리나라 경치를 그렸다는 데서 우리나라 풍경에 관한 자부심을 볼 수 있습니다.

<정선의 금강전도>

특히 이 시기에는 서양 화법에서 도입된 원근법도 사용되어 보다 다양한 화풍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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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2) 조선에서도 근대의 기운이 움트다
2-5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다
2-6 평등 사회를 향해 나아가다 


조선 후기 하부구조가 변하기 시작하다!

 제목에 이상한 얘기가 등장했네요. 하부구조? 하부구조는 무슨 말일까요? 자 이 얘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사람을 만나야 됩니다. 누구냐구요? 바로 Karl Marx!

 <조선 후기 얘기 하는데 왜 갑자기 맑스가 나올까? 바로 그의 사상 유물론 때문이다>

칼 맑스는  자신의 이론을 전개해나가면서 다음과 같은 이론을 전개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유물론이며 유물론에 따르면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지배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구요?

자, 한 사회를 두 가지 구조로 나눕니다. 하부구조는 경제에 관련된 것들 예를 들면 농업, 산업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상부구조는 하부구조를 기반으로 생겨나는 정치, 철학, 사상입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하부구조가 변화하면 하부구조를 기반으로 하는 상부구조도 변화합니다. 즉 생산력의 획기적인 변화가 발생하면 그 시대의 철학이나 정치체제도 바뀌게 되는데요. 예를 들면 프랑스 대혁명도 당시 생산력의 증대로 말미암아 상부구조가 그 변화의 힘에 의해 정치체제가 바뀌는 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어쨌든 조선 후기에 마르크스가 얘기하는 하부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지난 시간 얘기한 농업 생산력 증대도 그러하고 오늘 얘기를 할 상업의 발전도 그러합니다.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수공업도 활발해지면서 조선 시대 억눌려 있었던 상업이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합니다. 특히 대동법의 시행으로 상업이 더 활성화 되는데 국가에 관수품을 조달하던 공인은 상업 활성화를 이끌었스니다. 또한 국가에서 공식으로 인정해준 공인외에도 사상들이 점점 성장해나갔는데요. 그들은 시전상인들이 행사하는 금난전권(난전을 금지할 수 있는 권리)을 피해 4대문 밖에 있는 종루, 칠패, 이현, 송파에서 상권을 형성했습니다.

 <사대문 밖에 사상들의 난전들이 성행했다>

사상들이 더욱 성장하고 난전을 막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들의 금난전권이 폐지되기에 이르는데 이것이 신해통공이고 1791년에 일입니다. 금난전권이 폐지되자 상업의 발전은 이제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었습니다. 상업의 발달은 서울 뿐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 되어 지방에서도 상업이 활성화 되기에 이릅니다. 개성의 송상을 비롯하여 청과 주로 무역을 하던 의주의 만상, 일본과 무역을 하던 동래의 내상, 평양의 유상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전국에는 장시과 활발하게 열렸습니다. 또한 장시와 장시끼리 연결되어 유통망이 조직되었고 이러한 유통망을 기반으로 운송업이 발달합니다. 운송업에 전문적으로 종사한 상인들도 나타나는데 이들은 서울에 경강 상인들입니다. 이들은 주로 배를 가지고 서남 해안을 오고 갔습니다. 이런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자 부를 축적해나가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그들은 도고라고 불리는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독점적 도매상이 되었습니다. 

장시와 포구를 중심으로 유통 네트워크가 구축되다

상업이 발달하고 그에 따라 장시와 포구들이 발달하자 장시와 포구를 중심으로 일종의 유통망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보따리 장수들인 보부상은 장날에 맞추어 각 장시들을 순회하면서 각 장시들이 연계되었고 일부 지역 장시는 오일마다 장이 서는 것이 아니라 상설로 장이 열려 상업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조선후기 상업 유통망>

장시와 더불어 포구도 발달했는데 포구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기차가 발달하기 이전 시기 대부분의 교통로는 수로를 의지했기 때문에 포구가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포구는 주변에 장시와 연계되어 유통 거점이 되기도 했지요. 

이렇게 상업이 발달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자 숙박업이나 운송업, 창고업 등 상업에 필요한 여러가지 것들이 생겨나고 이를 담당하기 위해 객주, 여각이 발달했습니다. 

국내 상업 발달과 더불어 대외 무역도 활기를 띠었습니다. 국제 무역은 크게 개시와 후시로 나누는데 개시는 국가가 공식 허용한 무역이고 후시는 그렇지 않은 무역 형태를 말합니다. 개시 무역은 국가가 공식으로 허용하여 교역 물품과 교역량이 정해져 있어 이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후시 무역을 한 것입니다. 후시 무역이 확대되면서 지방의 상단 들이 성장하는데 이들이 앞서 말했던 만상, 송상, 내상들입니다.

<조선 후기 만상, 송상, 내상 등을 다룬 드라마 상도>

http://blog.naver.com/todaypia?Redirect=Log&logNo=130092794771&jumpingVid=7CDBE37545F0C0A1F23C675B389FA5C322ED(만상의 모습, 만상의 임승옥이 승부수를 던지는 장면)

쩐의 시대가 도래하다

조선 후기 상업이 발전한다는 것 까지는 잘 알았죠? 조선에서 상업이 발전하면서 획기적인 변화가 하나 일어나는데 그게 바로 화폐의 보급입니다. 우리나라 화폐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만들어지기만 했다 뿐이지 실제로 사용되는 건 바로 조선 후기에 와서입니다. 상업이 발전하자 사람들은 돈의 편리함에 대해서 알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화폐가 보급된 것이죠. 하지만 사람들이 화폐를 처음쓰다보니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게 바로 돈이 부족해주는 현상입니다. 

<돈이 좋아 하앍! 화폐의 중요성을 알자 화폐 자체를 쓰지 않고 모으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돈을 처음 가지게 되었을 때의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돈이 참 신기했겠지요. 돈으로 물건을 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람들이 곰곰히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 돈이 가장 가치가 높은 거구나. 그러고 돈을 안 쓰고 모으기만 했지요. 사실 돈의 진정한 가치는 돈을 쓰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으기만 하면 뭘 하나요. 그걸로 물건을 사야 돈으로서 역할을 하는거죠. 아무튼 화폐 유통이 초기이다 보니 사람들은 그런 인식이 부족했나 봅니다. 그래서 돈을 쓰지 않고 모으기만 하자 돈이 부족해지는 현상이 나타난거죠.

아무튼 이런 현상도 다 화폐 경제가 활성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났던 현상들입니다. 돈이 부족해졌다고 해서 이제는 화폐를 없앨 수 없었겠지요. 한번 구르기 시작한 돌은 멈출 수가 없는 법입니다. 화폐 경제가 발전해가면서 화폐 대신 어음, 환 등 신용 화폐 등도 생겨나고 대규모 상거래도 나타났는데 이것을 볼 때 조선의 상업이 기지개를 펴고 있으며 서서히 상업자본이 축적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 아니지 않나요?

영국과 조선의 발전 과정이 비슷하다고? 

<어서 많이 본 장면같지 않나? 데자뷰를 느끼는가?>

그것이 바로 유럽의 상업혁명 발전과정이랑 비슷하죠? 상업이 발달하면서 상인들을 중심으로 상업자본이 축적, 축전된 상업 자본이 수공업자들을 지배하기 시작하여 선대제가 나타나는 설명. 이게 일명 조선에도 자본주의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었다는 설명인데 사실 무리가 많은 설명입니다.

<무리수 자제염-_->

이런 설명은 왜 나오게 된걸까요? 이것은 일제가 조선은 무능한 나라였고 우리에게 먹힐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설명에 맞서기 위해 조선은 잘 발전하고 있었는데 일제가 침략해서 시망했다고 반론을 펴는 과정에서 탄생한 설명입니다. 예전에는 각광을 받는 이론이었으나 지금의 식민사학자라고 엄청 욕먹고 있는 이영훈 교수에게 이 이론이 무참히 짓밟힌 후로 거의 폐기처분 되었습니다. 왜 그런걸까요?

영국에서 자본주의가 싹트고 산업혁명이 발생한 것은 굉장히 굉장히 굉장히 우연한 계기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말이 좋아 상업자본이 축적되고 그것이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지만 그 연결고리가 매우 모호합니다. 따라서 영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의 산업화는 본질적으로 다른 나라에서 이식된 것입니다. 그러니 조선에도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런 주장은 자본주의와 산업화를 인간 역사 발전 필수 요소로 간주함으로써 그렇게 발전하지 못했던 다른 나라들을 싸그리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좀 어려운 얘기가 나왔는데 이런 사실 정도는 한국사를 배우는 입장에서 조금쯤은 기억해볼만 합니다. 아시겠지요? 역사는 다양한 사고와 논리가 중요하니까요.

신분질서가 요동치다

조선후기 농업, 상업, 수공업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잘 보았을 겁니다. 이런 것들은 앞서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모두 하부구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런 하부구조가 변화하면서 상부구조가 변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살펴볼 것은 바로 신분제입니다. 

졸부들이 갑자기 돈을 많이 가지면 원래부터 우리는 상류층인양 행세하고 싶기 마련! 조선후기에도 이와 비슷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농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부농,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업자본가, 수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독립 수공업자들이 나타나면서 기존의 신분질서가 흔들거립니다. 이런 신흥 자본가들은 공명첩이라는 것을 구입하여 합법적으로 신분상승을 이뤘습니다.

<임진왜란기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국가에서 실권 없는 벼슬을 돈 주고 팔았는데 그게 공명첩이다>

이런 합법적인 방법도 있었지만 족보를 사거나 혹은 위조하는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조선 후기 양반의 비율은 비약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합니다. 지금 주변을 보면 양반 아닌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ㅎㅎ

이렇게 부유한 층이 신분을 상승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반대로 신분이 내려 앉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잃고 하루하루 노동을 해서 살아가는 임노동자가 되거나 아니면 영세 상인으로 살아갔습니다. 양반 중에서도 일반농민과 다름 없을 정도로 몰락한 양반이 탄생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잔반입니다.

<교과서 그림에도 있는 자리 짜는 양반의 모습, 양반이라고 별 수 있나? 입에 풀칠하려면 일해야 된다!>

이처럼 조선 후기 신분 질서가 요동하면서 점점 양반은 늘고 상민이나 노비는 줄어드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바로 세금을 내고 군역의 의무를 지는 상민의 수가 없어지기에 이릅니다. 국가 입장에서 양반이 느는 것은 상관없지만 상민의 수가 줄어드는 것은 매우 치명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민의 수를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순조 때 천민이었던 공노비를 해방하여 상민으로 만드는 조치를 단행하기도 했습니다.

중간에 끼인 아이들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다

조선시대 이도 저도 아닌 중간에 낑긴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서얼과 중인들이었습니다. 서얼은 양반의 자식이지만 어머니가 정식 부인으로 인정받지 못한 첩이기 때문에 평민은 아닌데 양반은 아닌 굉장히 애매모호한 존재로 취급받았습니다.

 <홍길동이 대표적인 서얼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다는 대목에서 적서차별이 느껴진다>

서얼 뿐 아니라 주로 전문 기술직을 맡았던 중인들도 신분상승 욕구를 표출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중간 계층들의 신분상승 욕구는 신분질서가 동요하는 조선 후기에 더욱 분명해집니다. 서얼들은 집단 상소 운동을 전개하여 자신들의 관직 진출 제한을 없애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고 정조 때는 실제로 서얼들이 정치권에 진출하여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서얼들의 움직임을 보고 중인들도 자극을 받아 대규모 상소 운동을 벌였지만 중앙정부가 이런 요구를 무시했습니다. 대신 중인들끼리 똘똘 뭉쳐 그들만의 문화를 향유했는데요. 특히 시를 짓고 즐기는 일종의 동호회인 시사를 만들어 활동했습니다. 이런 문화는 양반들만 즐기던 것인데 중인들도 이 같은 문화를 즐김으로 해서 문화적인 신분차이가 없어지는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향촌에서 파워 게임이 시작되다

신분질서가 요동치면서 향촌 사회 내에서도 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새롭게 권력을 얻은 사람들인 부농층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기존 사족들을 밀어내고 향촌에서 지배권을 다지려고 했습니다. 이들 신흥 향촌 세력들을 신향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수령과 향리들과 결탁해서 향촌 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해나갔습니다. 

기존에 있던 사족들은 구향이라고 불렀는데 이들 앉아서 권력을 빼앗기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향과 구향간에 싸움이 일어났는데 이 싸움을 통해 득을 본 건 어이없게도 수령과 향리들이었어요 ^^; 구향과 신향 어느 한 쪽이 완벽하게 향촌의 지배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수령을 견제할만한 세력이 사라져버린 셈이 되었지요. 그래서 힘이 강해진 수령과 향리들이 마음껏 백성들을 수탈하게 되었고 그래서 대규모 민란이 19세기에 발생하게 됩니다. 슬픈 현실이네요 ㅠㅠ

왜 강이 주요 교통로로 사용되었을까?

조선 후기 상업 중심지를 보면 대부분 강을 끼고 발전했는데 그 이유는 조선시대 주요 교통로가 강이나 수운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조선시대는 육로 대신에 강을 교통로로 선택했을까요? 그 이유를 말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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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2) 조선에서도 근대의 기운이 움트다
2-3  민심 수습을 위한 수취 체제의 개편
2-4 피지배층, 생산력 증대에 노력하다

조선은 고요의 나라? 천만에!

선생님이 예전에 했던 큰 착각 중에 하나이기도 하며 지금은 가장 듣기 싫은 소리 중 하나가 바로 조선은 고요의 나라, 우리나라는 침략을 당하기만 한 나라라는 얘기입니다. 이건 진짜 대표적으로 잘못된 얘기이며 개풀 뜯어먹는 소리입니다-_- 아니 사람사는 나라가 어떻게 조용하기만 하고 우리는 침략한 적이 없다는 건 도대체 어디서 나온 얘기입니까? 조선만 해도 4군 6진의 개척, 쓰시마섬 정벌, 나선 정벌 등은 다 다른 나라 얘기인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이번 시간에는 조선에 대한 대표적 오해 중 조선은 발전이 없었다는 오해를 깨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조선은 500년 내내 침체 되어 있는 나라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약동하는 나라였습니다. 약동하는 조선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대동법입니다. 전근대 시대 대표적인 세금 수취 제도는 바로 당나라 때 마련된 조용조 제도입니다. 조용조는 총 세가지 세금으로 구성되어있으며 밭에서 나는 곡물의 일정량 이상을 받는 조, 백성들을 징발하여 군대를 보내거나 공사판에 보내는 용, 또 하나는 지역 특산물을 바치는 조가 그것입니다. 대동법은 바로 특산물 세금인 조에 관련된 것입니다.

<특산물 세금인 조는 연산군 시절 부터 맛탱이가 가기 시작한다>

처음에 특산물 세금은 그런대로 잘 거둬지는 편이었으나 놀기 좋아하기로 손에 꼽히는 연산군 시절에 가면 슬슬 맛이 가기 시작합니다. 가령 예전에는 특산물로 한 가지만 바치면 되었던 것이 세가지로 늘고 그 고장에서 나지 않는 세금을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울릉도에서 오징어 대신에 조랑말을 바치라 하는 지경에 까지 이릅니다. 지금이야 부당한 세금이 청구되면 따지면 되겠지만 그때는 서슬퍼런 연산군 시절; 어쩔 수 없이 안나는 것도 구해다 바쳐야죠 뭐.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방납상인입니다.

<방납상인들, 딱 봐도 존내 못되게 생겼다>

<방납의 폐단, 1분 18초부터>

국가에서 요구하는 특산물을 바칠 수 없게 되자 지역 주민들은 방납 상인을 통해 특산물을 사서 바쳤는데 이때 방납상인들이 중간에 챙겨먹는 이득이 상당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이 비용으로 인해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세금이란게 한 번 늘리기는 쉬워도 늘어난 세금을 다시 줄이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후 이런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제도가 논의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선조 때 이이가 특산물을 받는 대신 토지에 따라 쌀로 대신 받는 수미법입니다. 대동법 역시 이 논의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http://cafe.naver.com/kwakhisedu.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68&(대동법의 시행)

대동법의 핵심은 이때까지 가구별로 징수되던 특산물을 대신하여 토지 결수 별로 쌀로 징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토지가 많은 사람이 기본적으로 많은 세금을 부담하는 형태로 농민들에게 크게 유리한 형태의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시행되기까지는 100년이 걸렸는데 일단 방납이라는 것이 큰 특권을 형성하면서 지배층 일부도 이 방납의 특권과 결탁되어 있었기 때문에 완벽히 사라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또한 대동법은 특산물을 아예 받지 않고 쌀로만 받는 방법이기 때문에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특유의 끈기와 뚝심을 발휘하여 결국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게 만들었고 백성들은 큰 부담을 덜게 되었습니다. 또한 대동법으로 받은 쌀로 국가는 특산물을 사야했으므로 정부로 부터 돈을 받아 특산물을 사는 공인이라는 상인이 등장하여 상공업을 발전하는데도 대동법이 기여를 했습니다.

대동법 이외에 또 다른 문제는 바로 군역이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양인개병제로 양인이면 누구나 군역 의무를 져야했지만 조선 왕조가 평화를 구가하는 동안 군역 의무가 부실해졌으며 포 2필만 내면 군역 의무를 면제 해주는 편법이 나타나기에 이릅니다.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면서 결국 이 편법은 정식법으로 정착되어 방군수포제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 군역은 문제가 아주 많았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이제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군포가 부과되고 이미 죽어 없는 사람에게까지 군포가 부과되었습니다. 이런 형태를 황구첨정, 백골징포라 하는데 조선의 수취체제 문란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언급되곤 합니다.

이런 폐단을 고치고자 여러가지 방안이 논의되었습니다. 특히 양반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이 도마에 올라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여하자는 호포법이 거론되었으나 끝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호포법은 신분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양반과 평민 사이에 차이가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 한 양반들이 반대를 하여 무산되고 맙니다. 대신 군포를 1년에 1필만 납부하면 되는 균역법을 실시하게 되는데 이게 문제가 좀 있습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니? 공짜폰이라고 정말 공짜였던 경우가 있었는지 기억을 떠올려 보자>

자 그러면 원래 2필씩 내던 군포가 1필로 줄어들게 되는데 그러면 재정이 1/2로 줄어드는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어딨습니까? 부족한 재원은 다른 대서 걷을 수 밖에요. 토지 1결마다 2두씩 결작미를 거두었으며 그외에도 어장세, 선박세, 염전세가 새로 신설되었으며 부유한 평민에게 선무군과포라는 새로운 세금이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어찌되었든 조선 후기로 가면서 대동법, 균역법 등의 세금제도가 개선되면서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는 듯 보였으나 언제나 그렇듯 늘 토지 소유주들이 자신의 부담을 농민들에게 떠넘기는 불행의 흑역사가 또 다시 되풀이 됩니다. ㅠㅠ 결국 강력한 왕권이 지켜주던 탕평시기를 지나고 세도정치기에 들어서면서 이런 모순은 더 극대화 되고 백성들의 민심은 폭발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는데 이것이 삼정의 문란에서 부터 민란으로 이어지는 역사입니다.

놀부는 진짜 나쁜놈인가?

이제까지 조선 시대 세금 제도의 개선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이제는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 증가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놀부 모두 아시죠? 우리는 예전부터 흥부, 놀부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는데 보통 흥부는 착한 사람 놀부는 나쁜 넘이로 알고 있는데 이거 맞는건가요?

<우리가 익히 아는 흥부와 놀부의 이미지, 그런데 대책없이 자식만 많이 낳은 흥부는 책임없냐?-_->

사실 흥부와 놀부 이야기만 단순한 권선징악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 증대와 관련하여 농부들 사이에서 나타난 새로운 신분 계층을 얘기해주고 있는 겁니다.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이 증대하면서 일부 농부들은 자본을 축적하여 부농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놀부이죠. 하지만 많은 농부들은 이 부농에 밀려 일자리를 잃으면서 매우 궁핍한 처지에 이르는데 이게 바로 흥부죠. 흥부와 놀부는 조선 후기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겁니다.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 증대와 관련해서 이영훈의 소농사회론도 그 힘을 얻고 있습니다만 교과서에 그 설명이 나오지 않고 여러분이 알기에 수준이 높기 때문에 나중에 따로 언급하지요 ^^)

그렇다면 갑자기 농업 생산량이 막 늘어나지는 않았을텐데 그 이유를 알아보러 가봅시다. 가장 큰 이유로는 바로 모내기의 보급입니다. 한자로는 이앙법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의 획기적인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모내기는 물은 모를 모판에서 기른 후 논에다 옮겨 심는 것으로 물만 충분하면 많은 수확량을 가져다 준다>

조선 초기에는 주로 논에다 직접 벼씨를 뿌리는 직파법을 썼습니다. 이 방법은 물이 없어도 수확은 가능했지만 생산량이 많지 못하고 노동력이 훨씬 많이 드는 번거로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내기가 보급되면서 노동력이 절감되고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농업 생산량이 증가했습니다.

이 모내기 법이 보급되면서 논에 물을 빼고 모가 모판에서 자라는 동안 보리를 심고 수확하는 이모작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논농사가 개선되자 밭농사도 개선되었는데 이제까지 밭고랑 위에다 씨앗을 뿌리는 농종법 대신 고랑과 고랑 사이에 씨앗을 뿌리는 견종법이 도입되었습니다.

<농종법과 견종법>

이런 농사 방법의 개량으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증대되고 농민층의 계층 분화 현상도 뚜렷해졌습니다.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놀부처럼 부농이 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흥부처럼 경작지를 잃고 하루하루 일하고 먹고 사는 임노동자가 되었습니다.

계층분화가 지속되면서 한 번 돈 맛을 본 부농들은 본격적으로 상품작물 재배를 위해 힘쓰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농업은 자기가 먹고 살것을 재배하는 것이 본격적으로 팔기 위한 농업으로 전환되기 시작했으며 인삼, 면화, 담배, 채소 등의 작물들이 재배되었으며 쌀의 상품화도 진전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전보다 농업 생산량이 증대되니 경작을 하는 소작인의 권리도 늘어나 일부 지역에서는 타조법(지주와 경작인이 절반씩 수확량을 나눠받는 방식) 대신에 일정 액수의 지대를 정해놓은 고정 지대제인 도조법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도조법은 정해진 지대만 내면 경작하는 사람이 자유롭게 재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타조보다 농업 생산성이 더욱 높았습니다. 그리고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가 이전처럼 종속적인 관계가 아닌 계약적인 관계로 전환되어 갔습니다.

수공업과 광업도 성장하다

비단 농업에서만 괄목할만한 성장이 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동법 실시와 쌀의 상품화가 진행되면서 상업과 공업이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국가가 사농공상에 입각해서 상업과 공업을 누르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관영 수공업은 쇠퇴하고 민간 수공업이 발전했으며 영국에서 보았던 선대제 수공업 방식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광업도 수공업의 발전과 함께 발달했는데 광업의 발달은 청과의 무역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청은 유럽에서 막대한 은이 들어오면서 은의 유통량이 많아져 은을 세금으로 받는 지정은제를 시행했습니다. 따라서 다른 나라의 대외무역에서도 은을 선호하여 조선도 청과의 무역에서 은을 납부하기 위해 은광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개인의 광산 개발을 허용하고 세금을 받아내는 정책인 설점수세를 시행하는 한편 광산 개발이 큰 이익이 되자 몰래 광산을 개발하는 잠채도 성행했습니다. 광산 개발이 활성화 되면서 경작지를 잃은 임노동자들이 광산에 일하기도 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광산 개발 형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광산 경연인은 덕대라고 하는데 이들은 상인으로 부터 자본을 조달받아 직접 채굴업자인 혈주와 노동자를 고용하여 광산을 운영했습니다.

조선 후기는 자본주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

이런 점을 보고 몇몇 학자들은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고 해서 자본주의 맹아론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소 섣부른 의견이었는데요. 왜 이런 주장이 나왔고 이 주장이 어째서 신빙성이 없는지 혹은 자신이 신빙성이 있다고 믿으면 그 이유에 대해서 자유롭게 얘기해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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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2) 조선에서도 근대의 기운이 움트다
2-1 영·정조, 탕평책을 통해 정국을 주도하다 
2-2 국제적인 평화 분위기가 펼쳐지다 


붕당이 당쟁이라고? 붕당은 정당정치의 기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선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바로 당파싸움입니다. 혹자는 조선이 당파싸움 때문에 멸망했다고 평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견해입니다. 왜냐하면 당파싸움 때문에 조선이 멸망했다는 주장은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배하면서 퍼트린 설이기 때문이죠.

 <이놈들은 진짜 미화하는데 전문가인거 같다-_- 조선을 어떻게든 무능한 나라로 만들어 식민지배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붕당정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당쟁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당쟁과 붕당이 얼마나 다른지 한 번 살펴봅시다. 당쟁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당에 이익을 기반으로 해서 움직이는 겁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생겨나는 다툼은 국가 정책을 개선하는 방향이 아닌 소모적인 공방일 뿐 국가 정책은 1g도 도움 안 됩니다. 그러나 붕당은 공론으로 움직입니다. 공론은 여러 사림들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여론 같은 것이죠. 이 공론은 한 사람의 이익이 아니라 공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붕당이 오늘날 정당 정치와 유사한 면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붕당정치가 늘 긍정적이지만 않았습니다. 붕당정치가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지 시작하는 것은 '환국'이 나타나면서부터 입니다. 경신환국(1680년) 때 이르면 각 붕당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형태가 아닌 일당 독재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정치싸움에서 밀린 붕당은 대부분 숙청당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숙종 때 두드러지게 나타난 환국, 붕당 간의 공존이 인정되지 않고 일당 독재가 시작된다>

하지만 환국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붕당은 어디까지나 토론에 기반을 둔 정책 경쟁이자 학문을 바탕으로한 것이었기에 긍정적인 면이 많았습니다. 이런 붕당정치는 조선이 진정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건국되어 유교 이념에 충실했던 국가임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붕당 정치 기간에 주로 집권당은 서인이었습니다. 서인들은 16세기 초에 계속된 변란으로 인해 정기적으로 열리던 비변사(16세기초 왜구와 여진의 침입이 잦아지자 국방문제를 담당하는 기구로 설치되었으며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기구화 되었다. 이후 의정부를 밀어내고 최고 정무기관이 되었다)의 고위직을 독점하여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조선후기 중앙군인 5군영(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금위영,수어청) 중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은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던 것을 핑계로 설치되어 서인 정권의 군사적 기반을 강화시켜주었습니다. 서인들은 비변사와 새로 설치된 군영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확고히 다져나갔습니다.

이렇게 서인들이 확고한 권력기반을 구축해놓았기 때문에 서인들이 대부분 정국을 주도해나갔으며 남인은 제한적으로 정치참여를 하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남인은 두 차례 예송 논쟁을 일으킬 정도로 서인 정권의 라이벌로 성장해나갔습니다. 숙종 때는 한시적으로 권력을 잡기도 했습니다.

<예송논쟁은 상복을 어떻게 입는 가에 대한 예법을 가지고 벌어진 논쟁이다>

예송논쟁은 상복을 어떻게 입는 가에 대해 벌어진 논쟁으로 쉽게 얘기해서 왕을 사대부로 파악할 것이냐 아니면 왕은 사대부의 예에서 벗어나게 할 것인 가를 두고 일어난 논쟁입니다. 지금 보기에는 한심해 보이는 논쟁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굉장히 중요했던 논쟁으로 조선 사회가 지향하는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서인은 왕도 역시 사대부의 예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인은 왕은 사대부가 아니라 별개로 취급해야 한다고 맞섭니다. 결과는 제1차는 서인의 승리 제2차는 남인의 승리로 끝나는데 어찌되었든 왕 역시 사대부로 파악할 정도로 조선에 성리학이 완전히 뿌리 내렸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처럼 예송 논쟁을 거치면서 까지는 붕당의 원리는 그럭저럭 지켜졌지만 숙종 때 환국을 거치면서 붕당 정치의 원리는 파탄이 나고 위에 설명드렸던 붕당정치의 안 좋은 폐해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특히 숙종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환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그 피해는 더 심했습니다.

탕평정치가 시작되다

이처럼 붕당의 폐해가 드러나자 영조 때 붕당을 없애고 탕평을 하려는 시도가 나타났습니다. 이후 영, 정조기를 탕평 정치 시기라고 하며 붕당보다 왕권이 우위서게 되는 시기가 도래합니다. 어떻게 보면 조선이 애초에 지향했던 유교 정치의 원리와는 조금 다른 형태로 붕당정치의 폐해가 낳은 기형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탕평정치가 영조 때 부터 시작된다>

영조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여러가지 개혁 정치를 펴나가는데 붕당의 근원이 되었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기 시작했으며 그 동안 붕당의 원인이 되었던 막강한 인사권을 가진 이조 전랑의 힘을 축소시켰습니다. 이외에도 백성들의 군포 부담을 덜어주는 법인 균역법을 실시하였고 가혹한 형벌을 개선했습니다. 그리고 조선 초기 기본 법전이었던 경국대전을 다시 한 번 손질하여 속대전이라는 새로운 법전을 펴내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영조의 탕평정치는 한계가 있었는 데 그것은 원칙적으로 탕평책을 찬성하는 온건한 계열인 완론만 등용했고 또한 영조 후기에 가면 탕평파가 국왕의 친위파화가 진행되면서 외척에게 권력이 집중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세자를 죽이는 사건으로 이해 또 다른 붕당인 시파(사도세자의 죽음에 반대), 벽파(사도 세자의 죽음에 찬성)를 낳기 도 했습니다.

<영조의 탕평정치가 한계에 이르자 정조는 다른 탕평정치를 모색한다>

영조가 죽고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영조의 손자인 정조가 등극하면서 탕평정치는 또 다른 정국을 맞습니다. 비교적 온건한 계열을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해나갔던 영조의 완론탕평과 달리 정조는 급진적인 세력까지 통합하면서 이른바 준론탕평을 펴나가기 시작합니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여 일종에 비서기구로 역할하게 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시켜나갔으며 군사기반인 장용영을 설치하였습니다. 또한 수원화성을 쌓아 이곳을 새로운 중심지로 만들 구상을 가지고 있었고, 공노비 해방과 서얼 등용 등의 일을 영조 임금 보다 더 강대한 왕권을 바탕으로 개혁정치를 과감히 시행해 나갔습니다.

<정조 임금은 아버지 능을 방문한다는 것을 구실로 자주 수원에 능행을 나갔다. 이를 통해 백성과 직접 접촉했다>

결국 정조는 사대부를 통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백성과 소통하려 했습니다. 이는 그만큼 왕권이 강해졌다는 것을 미하며 탕평정치를 통해 왕이 사대부의 세력을 능가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러분 왕권이 강하다고 좋을까요?

<왕권이 강하다고 좋은 걸까? 한 곳에 집중된 권력은 권력의 소유자가 사라질 때 파국을 맞이한다>

탕평정치는 붕당을 없애는 것과 동시에 국왕 친위세력을 키운 것과 같습니다. 이후 조선은 그토록 경계했던 외척의 발호를 경험했으며 이는 거의 전적으로 탕평정치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왕에게 권력을 모이고 그 과정에서 권력을 향유했던 계층들은 국와 중심에 있던 친척들이 되었던 것이죠. 어찌보면 탕평정치는 세도정치의 씨앗을 안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북벌론에서 북학론으로

이제 잠깐 화제를 전환해서 북벌론과 북학론 얘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 우리가 북벌론에 대해서는 잠깐 집고 넘어갔지요? 북벌론은 병자호란 때 당한 치욕을 갚고자 하는 운동으로 그 현실성이 떨어졌다고 앞시간에 배웠을 겁니다. 북벌운동은 다분히 성리학적 질서를 반영한 것으로 청나라를 여전히 중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랑캐로 인식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입니다. 하지만 사대부들이 그렇게 현실 인식이 떨어지기만 했을까요? 이후 청나라가 태평성대를 구가하자 청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론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때 청을 통해 서양문물이 많이 들어옵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이죠? ^^

<백두산 정계비, 청과의 국경 분쟁을 마무리한 기념으로 세운 것이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청과의 관계에서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바로 국경 문제입니다. 청나라는 자신들이 일어난 지역인 만주를 신성시하며 그 지역에 사람을 살지 못하게 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그것을 깨고 들어가 인삼을 캐는 등 문제가 발생하자 국경선을 확정하는 문제로 청나라 사신과 조선의 사신들이 몇 차례 회담을 하여 그 회담 내용을 비에 적었습니다. 이것이 백두산 정계비인데 현재도 간도 문제 때문에 한 번씩 언급되고 있습니다. 사실 제 입장에서는 백두산 정계비 내용이 어떻든 간에 간도는 돌려받기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이미 간도에 조선족보다 한족들이 훨씬 많이 살고 있고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다하더라도 그들은 어디까지나 중국인으로 교육받고 중국인으로 살았는데 그곳이 우리의 영토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죠. 제 생각은 그렇다는 겁니다 ^^;

조선과 일본, 외교 관계를 회복하다

이제는 일본 과의 관계를 알아봅시다. 임진왜란 이후로 조선과 일본은 엄청난 원수지간으로 남았을 줄 알았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생각은 땡!

<일본과 조선은 원수? 뙈행!>

그렇다면 서로 심각한 전쟁까지 한 두 나라가 어째서 원수 지간으로 남지 않았던 걸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이 전 시간에 말했던 명나라 중심의 국제질서가 붕괴되면서입니다. 조선은 북방에 후금과의 문제 때문에 후방 일본과 언제까지 적대적으로 지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일본 나름대로 명나라 중심 국제질서에 이탈하기는 했지만 중국과 교역을 할 창구가 필요했으며 명나라에 책봉을 받지 않고도 에도 막부 쇼군의 위신을 높일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양측의 이런 필요가 맞아떨어져 총 12차례의 통신사가 파견되었습니다. 초기 통신사들은 막부 쇼군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극직한 대접을 받았지만 후기로 가면서 에도 막부의 권위가 안정되자 통신사를 굳이 받아들일 필요를 못느꼈고 조선 통신사에 대한 과도한 예의와 비용이 문제시 도면서 나중에는 쓰시마 섬에만 머무르다 돌아가다가 19세기에 들어서면 더 이상 파견되지 않기에 이릅니다.

탕평정치는 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는가?

여러분 오늘 탕평정치에 대해서 배웠지요? 그렇다면 오늘 배운 내용을 잘 떠올려보면서 어째서 탕평정치가 붕당정치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는 지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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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1) 서양에서 먼저 근대가 시작되다
1-2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산업사회로 나아가다
1-3 제국주의 열강이 앞다투어 식민지를 넓히다 


두번째 물결이 밀려오다

여러분 혹시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라는 책을 보셨나요? 음... 안봤겠죠?;; 어쨌든 거기에 보면 인류는 세번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하는데 첫번째는 농업혁명으로 농사가 처음 시작된 것이고 두번째는 산업혁명으로 인간의 힘 외에 다른 동력을 사용하여 대량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체제를 수립합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우리가 실감하고 있는 정보혁명으로 인터넷의 발명으로 밀려온 변화를 얘기합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산업혁명이 발생했는지 알아봅시다. 산업혁명이 진행되기 전에 상업 자본이 먼저 축적되기 시작했는데요.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인해 유럽은 광대한 해외시장을 얻었으며 아메리카에서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이 들어왔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막대한 은이 유럽으로 흘러들어온다>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막대한 은을 바탕으로 유럽의 상인들은 자신의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자신들이 직접 상품 생산에 나섰습니다. 그들은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수공업자들을 고용합니다. 여러 수공업자들을 고용해서 그들에게 미리 원료와 임금을 지급하고 완제품을 거둬 가는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이를 선대제라고 하며 다수의 수공업자들이 모여 생산하는 방식을 매뉴팩처라고 부릅니다. 이런 방식은 자본가가 중심이 되어 노동자를 고용하는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이후 산업혁명를 발판으로 이런 방식은 더욱 심화됩니다.


<산업혁명이 시작되다>

산업혁명은 먼저 영국에서 시작됩니다. 산업혁명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나 수력의 힘을 이용하지 않고 기계의 힘으로 대량의 상품을 생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산업혁명이 영국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영국의 상황을 봅시다.

<양이 사람을 잡아먹다, 인클로저 운동이 영국에서 일어난다>

영국은 당시 인클로저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인클로저(Enclosure)이라는 뜻은 자신의 땅에 울타리를 친다는 의미로 이제까지 농사 짓는 토지에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양을 기르는 것을 말합니다. 지주들이 양을 길러 면직물을 만드는 원료를 공급하는 것이 농사를 짓는 것보다 더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로 인해 대다수 농사 짓는 농민들은 자신의 농토를 잃고 거리로 나안게 됩니다. 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런 값싼 노동력이 풍부해지고 면직물을 수요도 급증하자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면직물을 생산할 방법이 고안되기에 이릅니다. 그것이 바로 증기기관의 발명이고 이런 증기기관은 인간과 수력 외의 동력을 사용하여 기계를 돌려 면직물을 빠른 시간에 대량으로 생산을 했습니다.

<와트의 증기기관, 허접해 보이지만 인류의 역사를 바꿨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곧 다른 나라에도 퍼져 나갔으며 증기기관 외의 기술도 눈부시게 발전하기에 이릅니다. 증기기관차가 발명되어 철도가 개통되어 과거의 시간과 공간을 해체시켰습니다. 또한 전신과 전화도 발명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상품을 팔 수 있는 시장을 확대시켰습니다. 

이렇게 시장이 확대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좋을 줄 알았죠? ㅋㅋ 원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안 좋은 점이 발생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본가의 횡포입니다.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독점했기 때문에 자본가 밑에서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노동자 계급이 나타납니다. 노동자 계급은 자본가에 비해서 수는 많았지만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독점한 바람에 힘이 약했습니다. 반면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틀어쥐고 노동자들을 최대한 부려 최대의 이윤을 얻으려했습니다. 이 당시 나타났단 안 좋은 상황이 바로 어린아이까지 최대 19시간가까이 노동시키는 악행이 나타났습니다. 이에 노동자들은 점점 힘을 합쳐 노동자들에게 대항할 결심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입니다.

 <산업혁명 당시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을 다룬 영화 제르미날>

사회주의는 자본가가 독점한 생산수단을 사회화 하자고 주장을 했기 때문에 사회주의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주장은 마르크스에 의해서 체계화 되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모순이 심화되면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을 일으켜 유산계급(부르주아)을 타도하여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최종적으로는 공산사회를 건설한다고 했습니다. 이때 계급이 소멸된다고 했는데 사회주의 실험은 소련이 붕괴도면서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지요. 이 얘기는 아주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

자본주의가 갈때까지 가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산업 혁명으로 인해 서양에 자본주의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지금이야 독점 자본을 견제하는 법도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것들이 없었기 때문에 거대 자본이 엄청난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영국에는 1% 소수의 기업이 원료의 70%, 생산의 50%를 점유하게 됩니다. 이 거대 자본은 다른 소자본 회사를 인수하거나 경영권을 장악하면서 더 강해졌고 국가를 압박할 만한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이 거대 자본은 자신의 자본을 투자하여 새로운 이윤을 창출할 곳을 찾는데 국내 시장은 이미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고 포화상태이기 때문에 눈을 해외로 돌립니다. 국가를 압박할 힘까지 있었던 이들은 국가를 압박하여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제국주의의 시초입니다. 

<제국주의 풍자만화, 식민지 백성들에게 남는 것이라고는 아무짝에 도움이 안 되는 성경 뿐이었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적극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해 나가는 과정에서 백인 우월주의와 사회 진화론을 내세우며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며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우월한 문명을 전파한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종교인 기독교를 원주민에게 전파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은 식민지 상태는 처참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식민지의 원주민들이 고통을 받는 대신 제국주의 열강들은 막대한 이윤을 창출할 수 있었습니다. 식민지가 큰 이윤을 벌어주는 것으로 확인되자 이제 서양에 있는 왠만한 나라들은 식민지를 개척하려 혈안이 되어 세계 각지는 제국주의 열강의 손에 의해 분할되었습니다. 특히 영국은 아프리카의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고 이집트에서 케이프타운까지를 잇는 종단정책을 펼쳤습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모로코에서 마다가스카르를 잇는 횡단 정책을 펼쳤는데 이 두 제국주의 국가들은 파쇼다에서 충돌하게 됩니다. 이제 영국, 프랑스 뿐 아니라 뒤늦게 통일을 이룬 독일과 이탈리아 역시 식민지 쟁탈전에 나서고 미국도 역시 나서게 됨으로써 세계의 대부분은 단 몇개의 나라가 지배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버립니다.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분할된 세계지도>

중국에서 왜 산업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는가?

역사에 조금 관심있는 학생이라면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을겁니다. 왜 서양에서 먼저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동양 최대 문명을 자랑하던 중국은 왜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제부터 여러분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답안을 저에게 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 이 문제에 대해 따로 정해진 정답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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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전 접근
1) 서양에서 먼저 근대가 시작되다
1-1 시민 혁명을 계기로 근대 국민 국가가 수립되다

신민(臣民)이 국민(國民)으로!

드디어 3단원이네요. 그런데 3단원을 딱 피자마자 어? 한국사 시간인데 왠 세계사? 하실겁니다. 여러분 국사에서 한국사로 바뀐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원래 한국의 역사는 세계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국 역시 세계의 여러 나라의 하나이며 세계의 움직임에 한국의 역사도 발맞추어 나간 것입니다. 자, 그럼 한국이 조선 후기에 접어들고 있을 때 서양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봅시다.

유럽권에서 가장 큰 변화를 일으켰던 사건이 무엇이 있을까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단연 충격적인 사건은 바로 프랑스 대혁명(1789)입니다. 왜 그럴까요? 왕이 시민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 때문이죠.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이 같은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 혁명이 끌고온 파급을 생각한다면 프랑스 대혁명 때 루이 16세가 죽었던 것은 전 유럽을 충격으로 빠트렸습니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루이16세, 1분부터 2분10초까지>

그렇다면 왜 이 같은 혁명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일까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시간을 조금 거슬러 갈 필요가 있습니다. 중세 유럽은 이른바 봉건 사회로 불리는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는 왕의 권력이 약하고 지방 영주의 세력이 강했습니다. 지방 영주는 자신의 지역을 독자적으로 통치하며 힘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왕은 힘이 강해지고 지방 영주들의 힘은 약해졌습니다. 힘이 약해진 지방 영주들은 중앙으로 올라와 왕의 관리가 되고 귀족의 칭호를 획득했습니다. 중앙으로 진출한 귀족들의 세력은 여전히 강했습니다. 왕은 이들 귀족을 누르기 위해 귀족은 아니나 똑똑했던 시민(부르주아)를 대거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입니다.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부르주아는 돈이 많은 평민 출신들이었다>

이들을 끌어들인 건 매우 적절한 판단이어서 왕은 귀족과 부르주아의 세력 균형 속에 절대 왕정을 수립했습니다. 하지만 부르주아들은 절대 왕정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정치 참여는 제한되었으며 귀족의 특권이 여전히 남아있는 상황에서 부르주아들은 점차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르주아들이 환영할만한 사상이 등장했으니 그것이 바로 사회계약설입니다.

<사회계약설을 주장한 홉스의 책 리바이어던의 표지, 왕권이 다른 사람의 권력이 모여 이루어진 것으로 표현했다>

사회계약설의 주요한 내용은 자연상태에 있는 인간이 개인들의 필요에 의해 사회를 구성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맨 처음한 것이 홉스였는데 그는 군주권을 옹호할 생각으로 군주의 권력은 자연상태를 피하기 위한 인간이 자신의 권한을 모두 양도한 것이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절대 왕권을 옹호한 듯 보이지만 결국 왕권이 하늘에서 부여받는 것(왕권신수설)이 아니라 인간들의 계약에 의해 구성된다는 생각을 표명함으로써 획기적인 생각의 전환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로크는 홉스의 생각을 비판하며 인간은 자연권을 모두 양도하지 않았으며 만약 국가로부터 자신의 자연권을 침해받는 다면 이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특히 이 저항권은 영국의 명예혁명의 바탕이 되고 미국의 독립혁명의 바탕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찌되었든 이런 생각들을 계몽사상이라 하고 이런 사상이 특히 부르주아 사이에서 유행함으로써 부르주아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영국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나 절대 왕정을 무너뜨리고 의회를 기본으로 한 입헌군주제를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영국의 식미지였던 북아메리카의 13개 주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독립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독립전쟁에서 13개주가 승리하면서 최초의 왕 없는 국가인 미국이 탄생했습니다. 이제 혁명의 불길은 프랑스로 옮겨갔습니다.

<앙시앵레짐, 구제도의 모순. 1, 2 신분은 온갖 특권을 누리며 세금을 내지 않지만 3신분은 그렇지 못했다>

프랑스의 상황은 심각했습니다. 구제도의 모순이라 불리는 문제가 프랑스 사회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소수의 1, 2신분들은 온갖 특권을 독점하고 세금 조차 내지 않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인 3 신분은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면서도 정치 참여는 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독립전쟁을 도와주느라 재정이 파탄난 프랑스 정부는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3부회의를 소집합니다.

원래 이 3부회는 귀족들이 소집을 요구한 것으로 3부회를 소집하여 왕권을 억누르고 귀족의 권한을 강화시키려는 계산이었으나 오히려 제 3신분의 불만이 이 회의에서 터져나옵니다. 그래서 프랑스 대혁명을 일컬어 귀족이 먼저 시작했다고 말을 합니다. 어쨌든 3부회의에서 제 3신분은 이제까지 투표방식을 거부하고 머리수 표결과 제3신분 대표수의 증원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국왕이 들어주지 않자 제 3신분은 스스로 국민 의회를 만들고 자신들이 진실로 국민을 대표하는 기구임을 선언했습니다.

<테니스 코트의 선언, 국민의회가 유일한 국민의 대표 기구임을 선언했다>

하지만 국왕을 비롯한 귀족들은 국민의회를 인정하지 않고 이를 해산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드디어 대다수 시민들이 국민의회를 지키기 위해 들고 일어설 결심을 합니다. 흥분한 시민들은 무장을 하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입니다. 이 감옥에는 혁명투사가 잡혀 있지 않았고 무기도 넉넉치 않았지만 왕권의 상징이던 바스티유를 습격함으로써 왕과 시민들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맙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 약 500% 미화된 베르사유의 장미, 동영상 보면 손발이 퇴갤한다>

비록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이 멍청한 짓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것은 시민들이 혁명에 힘을 실어준 장면이며 이로 인해 프랑스 대혁명은 승리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성공하고 인권 선언이 받아들여지자 백성들은 이제 신민이 아닌 국민으로 불리게 됩니다. 더 이상 왕의 통치 대상이 아닌 스스로 주권자를 자처하게 되었으며 이제 모든 프랑스 국민들은 시토아앵(citoyen)으로 불리우며 이제 프랑스뿐만이 아닌 전 유럽에 혁명을 퍼트리기 위해 나아갔습니다.



<라 마르세예즈, 프랑스 혁명을 무위로 돌리려 외국 군대가 침입하자 혁명과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지방에서 의용군이 파리를 수호하기 위해 올라왔다. 이때 불린 군가가 라 마르세예즈이다. 5분부터 7분까지>

국민이 주인이다. 하지만 진짜?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제 백성은 주권을 행사하는 국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정말 사실일까요? 사실 모두가 주인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국민이라는 말은 브루주아들이 대다수 농민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용한 입에 발린 말일 뿐 실상 투표권은 재산에 의해 제한되는 등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은 갈길이 멀었습니다. 미국은 최초의 공화국이었지만 가장 많은 노예를 가진 나라 중에 하나이기도 했으며 여성들은 여전히 정치 참여자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투표권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꾸준히 있어왔습니다. 미국에서는 남북 전쟁을 거치면서 투표권이 확대되어가고 노예제가 공식 폐지되었으며 프랑스에서는 7월 혁명, 2월 혁명을 거치면서 투표권이 확대되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아직 여성의 참정권은 20세기에 가서야 획득합니다. 게다가 미국의 노예제 폐지는 이름만 폐지일 뿐 흑인 노예는 이제 분리라는 또다른 차별을 받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아직 갈길이 멀었습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일뿐!>

왜 재산으로 투표권에 차등을 두었을까?

프랑스 혁명 이후 국민들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는데 투표권이 부여되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그 기준을 재산으로 나누었습니다. 왜 프랑스 혁명 초기에 투표권의 기준을 재산으로 두었을까요? 당시 신분제 철폐와 부르주아가 유력한 정치 세력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답해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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