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전 접근
1) 서양에서 먼저 근대가 시작되다
1-1 시민 혁명을 계기로 근대 국민 국가가 수립되다

신민(臣民)이 국민(國民)으로!

드디어 3단원이네요. 그런데 3단원을 딱 피자마자 어? 한국사 시간인데 왠 세계사? 하실겁니다. 여러분 국사에서 한국사로 바뀐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원래 한국의 역사는 세계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국 역시 세계의 여러 나라의 하나이며 세계의 움직임에 한국의 역사도 발맞추어 나간 것입니다. 자, 그럼 한국이 조선 후기에 접어들고 있을 때 서양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봅시다.

유럽권에서 가장 큰 변화를 일으켰던 사건이 무엇이 있을까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단연 충격적인 사건은 바로 프랑스 대혁명(1789)입니다. 왜 그럴까요? 왕이 시민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 때문이죠.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이 같은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 혁명이 끌고온 파급을 생각한다면 프랑스 대혁명 때 루이 16세가 죽었던 것은 전 유럽을 충격으로 빠트렸습니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루이16세, 1분부터 2분10초까지>

그렇다면 왜 이 같은 혁명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일까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시간을 조금 거슬러 갈 필요가 있습니다. 중세 유럽은 이른바 봉건 사회로 불리는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는 왕의 권력이 약하고 지방 영주의 세력이 강했습니다. 지방 영주는 자신의 지역을 독자적으로 통치하며 힘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왕은 힘이 강해지고 지방 영주들의 힘은 약해졌습니다. 힘이 약해진 지방 영주들은 중앙으로 올라와 왕의 관리가 되고 귀족의 칭호를 획득했습니다. 중앙으로 진출한 귀족들의 세력은 여전히 강했습니다. 왕은 이들 귀족을 누르기 위해 귀족은 아니나 똑똑했던 시민(부르주아)를 대거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입니다.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부르주아는 돈이 많은 평민 출신들이었다>

이들을 끌어들인 건 매우 적절한 판단이어서 왕은 귀족과 부르주아의 세력 균형 속에 절대 왕정을 수립했습니다. 하지만 부르주아들은 절대 왕정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정치 참여는 제한되었으며 귀족의 특권이 여전히 남아있는 상황에서 부르주아들은 점차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르주아들이 환영할만한 사상이 등장했으니 그것이 바로 사회계약설입니다.

<사회계약설을 주장한 홉스의 책 리바이어던의 표지, 왕권이 다른 사람의 권력이 모여 이루어진 것으로 표현했다>

사회계약설의 주요한 내용은 자연상태에 있는 인간이 개인들의 필요에 의해 사회를 구성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맨 처음한 것이 홉스였는데 그는 군주권을 옹호할 생각으로 군주의 권력은 자연상태를 피하기 위한 인간이 자신의 권한을 모두 양도한 것이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절대 왕권을 옹호한 듯 보이지만 결국 왕권이 하늘에서 부여받는 것(왕권신수설)이 아니라 인간들의 계약에 의해 구성된다는 생각을 표명함으로써 획기적인 생각의 전환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로크는 홉스의 생각을 비판하며 인간은 자연권을 모두 양도하지 않았으며 만약 국가로부터 자신의 자연권을 침해받는 다면 이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특히 이 저항권은 영국의 명예혁명의 바탕이 되고 미국의 독립혁명의 바탕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찌되었든 이런 생각들을 계몽사상이라 하고 이런 사상이 특히 부르주아 사이에서 유행함으로써 부르주아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영국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나 절대 왕정을 무너뜨리고 의회를 기본으로 한 입헌군주제를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영국의 식미지였던 북아메리카의 13개 주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독립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독립전쟁에서 13개주가 승리하면서 최초의 왕 없는 국가인 미국이 탄생했습니다. 이제 혁명의 불길은 프랑스로 옮겨갔습니다.

<앙시앵레짐, 구제도의 모순. 1, 2 신분은 온갖 특권을 누리며 세금을 내지 않지만 3신분은 그렇지 못했다>

프랑스의 상황은 심각했습니다. 구제도의 모순이라 불리는 문제가 프랑스 사회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소수의 1, 2신분들은 온갖 특권을 독점하고 세금 조차 내지 않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인 3 신분은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면서도 정치 참여는 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독립전쟁을 도와주느라 재정이 파탄난 프랑스 정부는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3부회의를 소집합니다.

원래 이 3부회는 귀족들이 소집을 요구한 것으로 3부회를 소집하여 왕권을 억누르고 귀족의 권한을 강화시키려는 계산이었으나 오히려 제 3신분의 불만이 이 회의에서 터져나옵니다. 그래서 프랑스 대혁명을 일컬어 귀족이 먼저 시작했다고 말을 합니다. 어쨌든 3부회의에서 제 3신분은 이제까지 투표방식을 거부하고 머리수 표결과 제3신분 대표수의 증원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국왕이 들어주지 않자 제 3신분은 스스로 국민 의회를 만들고 자신들이 진실로 국민을 대표하는 기구임을 선언했습니다.

<테니스 코트의 선언, 국민의회가 유일한 국민의 대표 기구임을 선언했다>

하지만 국왕을 비롯한 귀족들은 국민의회를 인정하지 않고 이를 해산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드디어 대다수 시민들이 국민의회를 지키기 위해 들고 일어설 결심을 합니다. 흥분한 시민들은 무장을 하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입니다. 이 감옥에는 혁명투사가 잡혀 있지 않았고 무기도 넉넉치 않았지만 왕권의 상징이던 바스티유를 습격함으로써 왕과 시민들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맙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 약 500% 미화된 베르사유의 장미, 동영상 보면 손발이 퇴갤한다>

비록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이 멍청한 짓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것은 시민들이 혁명에 힘을 실어준 장면이며 이로 인해 프랑스 대혁명은 승리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성공하고 인권 선언이 받아들여지자 백성들은 이제 신민이 아닌 국민으로 불리게 됩니다. 더 이상 왕의 통치 대상이 아닌 스스로 주권자를 자처하게 되었으며 이제 모든 프랑스 국민들은 시토아앵(citoyen)으로 불리우며 이제 프랑스뿐만이 아닌 전 유럽에 혁명을 퍼트리기 위해 나아갔습니다.



<라 마르세예즈, 프랑스 혁명을 무위로 돌리려 외국 군대가 침입하자 혁명과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지방에서 의용군이 파리를 수호하기 위해 올라왔다. 이때 불린 군가가 라 마르세예즈이다. 5분부터 7분까지>

국민이 주인이다. 하지만 진짜?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제 백성은 주권을 행사하는 국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정말 사실일까요? 사실 모두가 주인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국민이라는 말은 브루주아들이 대다수 농민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용한 입에 발린 말일 뿐 실상 투표권은 재산에 의해 제한되는 등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은 갈길이 멀었습니다. 미국은 최초의 공화국이었지만 가장 많은 노예를 가진 나라 중에 하나이기도 했으며 여성들은 여전히 정치 참여자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투표권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꾸준히 있어왔습니다. 미국에서는 남북 전쟁을 거치면서 투표권이 확대되어가고 노예제가 공식 폐지되었으며 프랑스에서는 7월 혁명, 2월 혁명을 거치면서 투표권이 확대되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아직 여성의 참정권은 20세기에 가서야 획득합니다. 게다가 미국의 노예제 폐지는 이름만 폐지일 뿐 흑인 노예는 이제 분리라는 또다른 차별을 받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아직 갈길이 멀었습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일뿐!>

왜 재산으로 투표권에 차등을 두었을까?

프랑스 혁명 이후 국민들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는데 투표권이 부여되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그 기준을 재산으로 나누었습니다. 왜 프랑스 혁명 초기에 투표권의 기준을 재산으로 두었을까요? 당시 신분제 철폐와 부르주아가 유력한 정치 세력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답해봅시다. ^^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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