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도 근대의 기운이 움트다(민심 수습을 위한 수취 체제의 개편, 피지배층 생산력 증대에 노력하다)
과거 안에서(고등학교 한국사)/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2011. 3. 27. 21:09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2) 조선에서도 근대의 기운이 움트다
2-3 민심 수습을 위한 수취 체제의 개편
2-4 피지배층, 생산력 증대에 노력하다
2) 조선에서도 근대의 기운이 움트다
2-3 민심 수습을 위한 수취 체제의 개편
2-4 피지배층, 생산력 증대에 노력하다
조선은 고요의 나라? 천만에!
선생님이 예전에 했던 큰 착각 중에 하나이기도 하며 지금은 가장 듣기 싫은 소리 중 하나가 바로 조선은 고요의 나라, 우리나라는 침략을 당하기만 한 나라라는 얘기입니다. 이건 진짜 대표적으로 잘못된 얘기이며 개풀 뜯어먹는 소리입니다-_- 아니 사람사는 나라가 어떻게 조용하기만 하고 우리는 침략한 적이 없다는 건 도대체 어디서 나온 얘기입니까? 조선만 해도 4군 6진의 개척, 쓰시마섬 정벌, 나선 정벌 등은 다 다른 나라 얘기인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이번 시간에는 조선에 대한 대표적 오해 중 조선은 발전이 없었다는 오해를 깨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조선은 500년 내내 침체 되어 있는 나라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약동하는 나라였습니다. 약동하는 조선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대동법입니다. 전근대 시대 대표적인 세금 수취 제도는 바로 당나라 때 마련된 조용조 제도입니다. 조용조는 총 세가지 세금으로 구성되어있으며 밭에서 나는 곡물의 일정량 이상을 받는 조, 백성들을 징발하여 군대를 보내거나 공사판에 보내는 용, 또 하나는 지역 특산물을 바치는 조가 그것입니다. 대동법은 바로 특산물 세금인 조에 관련된 것입니다.
<특산물 세금인 조는 연산군 시절 부터 맛탱이가 가기 시작한다>
처음에 특산물 세금은 그런대로 잘 거둬지는 편이었으나 놀기 좋아하기로 손에 꼽히는 연산군 시절에 가면 슬슬 맛이 가기 시작합니다. 가령 예전에는 특산물로 한 가지만 바치면 되었던 것이 세가지로 늘고 그 고장에서 나지 않는 세금을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울릉도에서 오징어 대신에 조랑말을 바치라 하는 지경에 까지 이릅니다. 지금이야 부당한 세금이 청구되면 따지면 되겠지만 그때는 서슬퍼런 연산군 시절; 어쩔 수 없이 안나는 것도 구해다 바쳐야죠 뭐.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방납상인입니다.
<방납상인들, 딱 봐도 존내 못되게 생겼다>
<방납의 폐단, 1분 18초부터>
국가에서 요구하는 특산물을 바칠 수 없게 되자 지역 주민들은 방납 상인을 통해 특산물을 사서 바쳤는데 이때 방납상인들이 중간에 챙겨먹는 이득이 상당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이 비용으로 인해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세금이란게 한 번 늘리기는 쉬워도 늘어난 세금을 다시 줄이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후 이런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제도가 논의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선조 때 이이가 특산물을 받는 대신 토지에 따라 쌀로 대신 받는 수미법입니다. 대동법 역시 이 논의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http://cafe.naver.com/kwakhisedu.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68&(대동법의 시행)
대동법의 핵심은 이때까지 가구별로 징수되던 특산물을 대신하여 토지 결수 별로 쌀로 징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토지가 많은 사람이 기본적으로 많은 세금을 부담하는 형태로 농민들에게 크게 유리한 형태의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시행되기까지는 100년이 걸렸는데 일단 방납이라는 것이 큰 특권을 형성하면서 지배층 일부도 이 방납의 특권과 결탁되어 있었기 때문에 완벽히 사라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또한 대동법은 특산물을 아예 받지 않고 쌀로만 받는 방법이기 때문에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특유의 끈기와 뚝심을 발휘하여 결국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게 만들었고 백성들은 큰 부담을 덜게 되었습니다. 또한 대동법으로 받은 쌀로 국가는 특산물을 사야했으므로 정부로 부터 돈을 받아 특산물을 사는 공인이라는 상인이 등장하여 상공업을 발전하는데도 대동법이 기여를 했습니다.
대동법 이외에 또 다른 문제는 바로 군역이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양인개병제로 양인이면 누구나 군역 의무를 져야했지만 조선 왕조가 평화를 구가하는 동안 군역 의무가 부실해졌으며 포 2필만 내면 군역 의무를 면제 해주는 편법이 나타나기에 이릅니다.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면서 결국 이 편법은 정식법으로 정착되어 방군수포제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 군역은 문제가 아주 많았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이제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군포가 부과되고 이미 죽어 없는 사람에게까지 군포가 부과되었습니다. 이런 형태를 황구첨정, 백골징포라 하는데 조선의 수취체제 문란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언급되곤 합니다.
이런 폐단을 고치고자 여러가지 방안이 논의되었습니다. 특히 양반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이 도마에 올라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여하자는 호포법이 거론되었으나 끝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호포법은 신분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양반과 평민 사이에 차이가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 한 양반들이 반대를 하여 무산되고 맙니다. 대신 군포를 1년에 1필만 납부하면 되는 균역법을 실시하게 되는데 이게 문제가 좀 있습니다.
http://cafe.naver.com/kwakhisedu.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68&(대동법의 시행)
대동법의 핵심은 이때까지 가구별로 징수되던 특산물을 대신하여 토지 결수 별로 쌀로 징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토지가 많은 사람이 기본적으로 많은 세금을 부담하는 형태로 농민들에게 크게 유리한 형태의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시행되기까지는 100년이 걸렸는데 일단 방납이라는 것이 큰 특권을 형성하면서 지배층 일부도 이 방납의 특권과 결탁되어 있었기 때문에 완벽히 사라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또한 대동법은 특산물을 아예 받지 않고 쌀로만 받는 방법이기 때문에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특유의 끈기와 뚝심을 발휘하여 결국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게 만들었고 백성들은 큰 부담을 덜게 되었습니다. 또한 대동법으로 받은 쌀로 국가는 특산물을 사야했으므로 정부로 부터 돈을 받아 특산물을 사는 공인이라는 상인이 등장하여 상공업을 발전하는데도 대동법이 기여를 했습니다.
대동법 이외에 또 다른 문제는 바로 군역이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양인개병제로 양인이면 누구나 군역 의무를 져야했지만 조선 왕조가 평화를 구가하는 동안 군역 의무가 부실해졌으며 포 2필만 내면 군역 의무를 면제 해주는 편법이 나타나기에 이릅니다.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면서 결국 이 편법은 정식법으로 정착되어 방군수포제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 군역은 문제가 아주 많았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이제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군포가 부과되고 이미 죽어 없는 사람에게까지 군포가 부과되었습니다. 이런 형태를 황구첨정, 백골징포라 하는데 조선의 수취체제 문란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언급되곤 합니다.
이런 폐단을 고치고자 여러가지 방안이 논의되었습니다. 특히 양반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이 도마에 올라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여하자는 호포법이 거론되었으나 끝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호포법은 신분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양반과 평민 사이에 차이가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 한 양반들이 반대를 하여 무산되고 맙니다. 대신 군포를 1년에 1필만 납부하면 되는 균역법을 실시하게 되는데 이게 문제가 좀 있습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니? 공짜폰이라고 정말 공짜였던 경우가 있었는지 기억을 떠올려 보자>
자 그러면 원래 2필씩 내던 군포가 1필로 줄어들게 되는데 그러면 재정이 1/2로 줄어드는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어딨습니까? 부족한 재원은 다른 대서 걷을 수 밖에요. 토지 1결마다 2두씩 결작미를 거두었으며 그외에도 어장세, 선박세, 염전세가 새로 신설되었으며 부유한 평민에게 선무군과포라는 새로운 세금이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어찌되었든 조선 후기로 가면서 대동법, 균역법 등의 세금제도가 개선되면서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는 듯 보였으나 언제나 그렇듯 늘 토지 소유주들이 자신의 부담을 농민들에게 떠넘기는 불행의 흑역사가 또 다시 되풀이 됩니다. ㅠㅠ 결국 강력한 왕권이 지켜주던 탕평시기를 지나고 세도정치기에 들어서면서 이런 모순은 더 극대화 되고 백성들의 민심은 폭발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는데 이것이 삼정의 문란에서 부터 민란으로 이어지는 역사입니다.
놀부는 진짜 나쁜놈인가?
이제까지 조선 시대 세금 제도의 개선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이제는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 증가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놀부 모두 아시죠? 우리는 예전부터 흥부, 놀부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는데 보통 흥부는 착한 사람 놀부는 나쁜 넘이로 알고 있는데 이거 맞는건가요?
어찌되었든 조선 후기로 가면서 대동법, 균역법 등의 세금제도가 개선되면서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는 듯 보였으나 언제나 그렇듯 늘 토지 소유주들이 자신의 부담을 농민들에게 떠넘기는 불행의 흑역사가 또 다시 되풀이 됩니다. ㅠㅠ 결국 강력한 왕권이 지켜주던 탕평시기를 지나고 세도정치기에 들어서면서 이런 모순은 더 극대화 되고 백성들의 민심은 폭발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는데 이것이 삼정의 문란에서 부터 민란으로 이어지는 역사입니다.
놀부는 진짜 나쁜놈인가?
이제까지 조선 시대 세금 제도의 개선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이제는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 증가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놀부 모두 아시죠? 우리는 예전부터 흥부, 놀부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는데 보통 흥부는 착한 사람 놀부는 나쁜 넘이로 알고 있는데 이거 맞는건가요?
<우리가 익히 아는 흥부와 놀부의 이미지, 그런데 대책없이 자식만 많이 낳은 흥부는 책임없냐?-_->
사실 흥부와 놀부 이야기만 단순한 권선징악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 증대와 관련하여 농부들 사이에서 나타난 새로운 신분 계층을 얘기해주고 있는 겁니다.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이 증대하면서 일부 농부들은 자본을 축적하여 부농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놀부이죠. 하지만 많은 농부들은 이 부농에 밀려 일자리를 잃으면서 매우 궁핍한 처지에 이르는데 이게 바로 흥부죠. 흥부와 놀부는 조선 후기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겁니다.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 증대와 관련해서 이영훈의 소농사회론도 그 힘을 얻고 있습니다만 교과서에 그 설명이 나오지 않고 여러분이 알기에 수준이 높기 때문에 나중에 따로 언급하지요 ^^)
그렇다면 갑자기 농업 생산량이 막 늘어나지는 않았을텐데 그 이유를 알아보러 가봅시다. 가장 큰 이유로는 바로 모내기의 보급입니다. 한자로는 이앙법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의 획기적인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그렇다면 갑자기 농업 생산량이 막 늘어나지는 않았을텐데 그 이유를 알아보러 가봅시다. 가장 큰 이유로는 바로 모내기의 보급입니다. 한자로는 이앙법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의 획기적인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모내기는 물은 모를 모판에서 기른 후 논에다 옮겨 심는 것으로 물만 충분하면 많은 수확량을 가져다 준다>
조선 초기에는 주로 논에다 직접 벼씨를 뿌리는 직파법을 썼습니다. 이 방법은 물이 없어도 수확은 가능했지만 생산량이 많지 못하고 노동력이 훨씬 많이 드는 번거로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내기가 보급되면서 노동력이 절감되고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농업 생산량이 증가했습니다.
이 모내기 법이 보급되면서 논에 물을 빼고 모가 모판에서 자라는 동안 보리를 심고 수확하는 이모작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논농사가 개선되자 밭농사도 개선되었는데 이제까지 밭고랑 위에다 씨앗을 뿌리는 농종법 대신 고랑과 고랑 사이에 씨앗을 뿌리는 견종법이 도입되었습니다.
이 모내기 법이 보급되면서 논에 물을 빼고 모가 모판에서 자라는 동안 보리를 심고 수확하는 이모작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논농사가 개선되자 밭농사도 개선되었는데 이제까지 밭고랑 위에다 씨앗을 뿌리는 농종법 대신 고랑과 고랑 사이에 씨앗을 뿌리는 견종법이 도입되었습니다.
<농종법과 견종법>
이런 농사 방법의 개량으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증대되고 농민층의 계층 분화 현상도 뚜렷해졌습니다.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놀부처럼 부농이 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흥부처럼 경작지를 잃고 하루하루 일하고 먹고 사는 임노동자가 되었습니다.
계층분화가 지속되면서 한 번 돈 맛을 본 부농들은 본격적으로 상품작물 재배를 위해 힘쓰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농업은 자기가 먹고 살것을 재배하는 것이 본격적으로 팔기 위한 농업으로 전환되기 시작했으며 인삼, 면화, 담배, 채소 등의 작물들이 재배되었으며 쌀의 상품화도 진전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전보다 농업 생산량이 증대되니 경작을 하는 소작인의 권리도 늘어나 일부 지역에서는 타조법(지주와 경작인이 절반씩 수확량을 나눠받는 방식) 대신에 일정 액수의 지대를 정해놓은 고정 지대제인 도조법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도조법은 정해진 지대만 내면 경작하는 사람이 자유롭게 재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타조보다 농업 생산성이 더욱 높았습니다. 그리고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가 이전처럼 종속적인 관계가 아닌 계약적인 관계로 전환되어 갔습니다.
수공업과 광업도 성장하다
비단 농업에서만 괄목할만한 성장이 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동법 실시와 쌀의 상품화가 진행되면서 상업과 공업이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국가가 사농공상에 입각해서 상업과 공업을 누르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관영 수공업은 쇠퇴하고 민간 수공업이 발전했으며 영국에서 보았던 선대제 수공업 방식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광업도 수공업의 발전과 함께 발달했는데 광업의 발달은 청과의 무역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청은 유럽에서 막대한 은이 들어오면서 은의 유통량이 많아져 은을 세금으로 받는 지정은제를 시행했습니다. 따라서 다른 나라의 대외무역에서도 은을 선호하여 조선도 청과의 무역에서 은을 납부하기 위해 은광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개인의 광산 개발을 허용하고 세금을 받아내는 정책인 설점수세를 시행하는 한편 광산 개발이 큰 이익이 되자 몰래 광산을 개발하는 잠채도 성행했습니다. 광산 개발이 활성화 되면서 경작지를 잃은 임노동자들이 광산에 일하기도 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광산 개발 형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광산 경연인은 덕대라고 하는데 이들은 상인으로 부터 자본을 조달받아 직접 채굴업자인 혈주와 노동자를 고용하여 광산을 운영했습니다.
조선 후기는 자본주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
이런 점을 보고 몇몇 학자들은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고 해서 자본주의 맹아론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소 섣부른 의견이었는데요. 왜 이런 주장이 나왔고 이 주장이 어째서 신빙성이 없는지 혹은 자신이 신빙성이 있다고 믿으면 그 이유에 대해서 자유롭게 얘기해봅시다. ^^
계층분화가 지속되면서 한 번 돈 맛을 본 부농들은 본격적으로 상품작물 재배를 위해 힘쓰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농업은 자기가 먹고 살것을 재배하는 것이 본격적으로 팔기 위한 농업으로 전환되기 시작했으며 인삼, 면화, 담배, 채소 등의 작물들이 재배되었으며 쌀의 상품화도 진전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전보다 농업 생산량이 증대되니 경작을 하는 소작인의 권리도 늘어나 일부 지역에서는 타조법(지주와 경작인이 절반씩 수확량을 나눠받는 방식) 대신에 일정 액수의 지대를 정해놓은 고정 지대제인 도조법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도조법은 정해진 지대만 내면 경작하는 사람이 자유롭게 재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타조보다 농업 생산성이 더욱 높았습니다. 그리고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가 이전처럼 종속적인 관계가 아닌 계약적인 관계로 전환되어 갔습니다.
수공업과 광업도 성장하다
비단 농업에서만 괄목할만한 성장이 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동법 실시와 쌀의 상품화가 진행되면서 상업과 공업이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국가가 사농공상에 입각해서 상업과 공업을 누르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관영 수공업은 쇠퇴하고 민간 수공업이 발전했으며 영국에서 보았던 선대제 수공업 방식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광업도 수공업의 발전과 함께 발달했는데 광업의 발달은 청과의 무역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청은 유럽에서 막대한 은이 들어오면서 은의 유통량이 많아져 은을 세금으로 받는 지정은제를 시행했습니다. 따라서 다른 나라의 대외무역에서도 은을 선호하여 조선도 청과의 무역에서 은을 납부하기 위해 은광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개인의 광산 개발을 허용하고 세금을 받아내는 정책인 설점수세를 시행하는 한편 광산 개발이 큰 이익이 되자 몰래 광산을 개발하는 잠채도 성행했습니다. 광산 개발이 활성화 되면서 경작지를 잃은 임노동자들이 광산에 일하기도 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광산 개발 형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광산 경연인은 덕대라고 하는데 이들은 상인으로 부터 자본을 조달받아 직접 채굴업자인 혈주와 노동자를 고용하여 광산을 운영했습니다.
조선 후기는 자본주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
이런 점을 보고 몇몇 학자들은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고 해서 자본주의 맹아론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소 섣부른 의견이었는데요. 왜 이런 주장이 나왔고 이 주장이 어째서 신빙성이 없는지 혹은 자신이 신빙성이 있다고 믿으면 그 이유에 대해서 자유롭게 얘기해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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