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도 근대의 기운이 움트다(영·정조, 탕평책을 통해 정국을 주도하다, 국제적인 평화 분위기가 펼쳐지다)
과거 안에서(고등학교 한국사)/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2011. 3. 25. 16:11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2) 조선에서도 근대의 기운이 움트다
2-1 영·정조, 탕평책을 통해 정국을 주도하다
2-2 국제적인 평화 분위기가 펼쳐지다
붕당이 당쟁이라고? 붕당은 정당정치의 기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선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바로 당파싸움입니다. 혹자는 조선이 당파싸움 때문에 멸망했다고 평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견해입니다. 왜냐하면 당파싸움 때문에 조선이 멸망했다는 주장은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배하면서 퍼트린 설이기 때문이죠.
<이놈들은 진짜 미화하는데 전문가인거 같다-_- 조선을 어떻게든 무능한 나라로 만들어 식민지배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붕당정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당쟁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당쟁과 붕당이 얼마나 다른지 한 번 살펴봅시다. 당쟁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당에 이익을 기반으로 해서 움직이는 겁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생겨나는 다툼은 국가 정책을 개선하는 방향이 아닌 소모적인 공방일 뿐 국가 정책은 1g도 도움 안 됩니다. 그러나 붕당은 공론으로 움직입니다. 공론은 여러 사림들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여론 같은 것이죠. 이 공론은 한 사람의 이익이 아니라 공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붕당이 오늘날 정당 정치와 유사한 면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붕당정치가 늘 긍정적이지만 않았습니다. 붕당정치가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지 시작하는 것은 '환국'이 나타나면서부터 입니다. 경신환국(1680년) 때 이르면 각 붕당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형태가 아닌 일당 독재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정치싸움에서 밀린 붕당은 대부분 숙청당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숙종 때 두드러지게 나타난 환국, 붕당 간의 공존이 인정되지 않고 일당 독재가 시작된다>
하지만 환국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붕당은 어디까지나 토론에 기반을 둔 정책 경쟁이자 학문을 바탕으로한 것이었기에 긍정적인 면이 많았습니다. 이런 붕당정치는 조선이 진정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건국되어 유교 이념에 충실했던 국가임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붕당 정치 기간에 주로 집권당은 서인이었습니다. 서인들은 16세기 초에 계속된 변란으로 인해 정기적으로 열리던 비변사(16세기초 왜구와 여진의 침입이 잦아지자 국방문제를 담당하는 기구로 설치되었으며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기구화 되었다. 이후 의정부를 밀어내고 최고 정무기관이 되었다)의 고위직을 독점하여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조선후기 중앙군인 5군영(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금위영,수어청) 중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은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던 것을 핑계로 설치되어 서인 정권의 군사적 기반을 강화시켜주었습니다. 서인들은 비변사와 새로 설치된 군영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확고히 다져나갔습니다.
이렇게 서인들이 확고한 권력기반을 구축해놓았기 때문에 서인들이 대부분 정국을 주도해나갔으며 남인은 제한적으로 정치참여를 하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남인은 두 차례 예송 논쟁을 일으킬 정도로 서인 정권의 라이벌로 성장해나갔습니다. 숙종 때는 한시적으로 권력을 잡기도 했습니다.
붕당 정치 기간에 주로 집권당은 서인이었습니다. 서인들은 16세기 초에 계속된 변란으로 인해 정기적으로 열리던 비변사(16세기초 왜구와 여진의 침입이 잦아지자 국방문제를 담당하는 기구로 설치되었으며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기구화 되었다. 이후 의정부를 밀어내고 최고 정무기관이 되었다)의 고위직을 독점하여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조선후기 중앙군인 5군영(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금위영,수어청) 중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은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던 것을 핑계로 설치되어 서인 정권의 군사적 기반을 강화시켜주었습니다. 서인들은 비변사와 새로 설치된 군영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확고히 다져나갔습니다.
이렇게 서인들이 확고한 권력기반을 구축해놓았기 때문에 서인들이 대부분 정국을 주도해나갔으며 남인은 제한적으로 정치참여를 하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남인은 두 차례 예송 논쟁을 일으킬 정도로 서인 정권의 라이벌로 성장해나갔습니다. 숙종 때는 한시적으로 권력을 잡기도 했습니다.
<예송논쟁은 상복을 어떻게 입는 가에 대한 예법을 가지고 벌어진 논쟁이다>
예송논쟁은 상복을 어떻게 입는 가에 대해 벌어진 논쟁으로 쉽게 얘기해서 왕을 사대부로 파악할 것이냐 아니면 왕은 사대부의 예에서 벗어나게 할 것인 가를 두고 일어난 논쟁입니다. 지금 보기에는 한심해 보이는 논쟁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굉장히 중요했던 논쟁으로 조선 사회가 지향하는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서인은 왕도 역시 사대부의 예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인은 왕은 사대부가 아니라 별개로 취급해야 한다고 맞섭니다. 결과는 제1차는 서인의 승리 제2차는 남인의 승리로 끝나는데 어찌되었든 왕 역시 사대부로 파악할 정도로 조선에 성리학이 완전히 뿌리 내렸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처럼 예송 논쟁을 거치면서 까지는 붕당의 원리는 그럭저럭 지켜졌지만 숙종 때 환국을 거치면서 붕당 정치의 원리는 파탄이 나고 위에 설명드렸던 붕당정치의 안 좋은 폐해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특히 숙종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환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그 피해는 더 심했습니다.
탕평정치가 시작되다
이처럼 붕당의 폐해가 드러나자 영조 때 붕당을 없애고 탕평을 하려는 시도가 나타났습니다. 이후 영, 정조기를 탕평 정치 시기라고 하며 붕당보다 왕권이 우위서게 되는 시기가 도래합니다. 어떻게 보면 조선이 애초에 지향했던 유교 정치의 원리와는 조금 다른 형태로 붕당정치의 폐해가 낳은 기형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송 논쟁을 거치면서 까지는 붕당의 원리는 그럭저럭 지켜졌지만 숙종 때 환국을 거치면서 붕당 정치의 원리는 파탄이 나고 위에 설명드렸던 붕당정치의 안 좋은 폐해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특히 숙종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환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그 피해는 더 심했습니다.
탕평정치가 시작되다
이처럼 붕당의 폐해가 드러나자 영조 때 붕당을 없애고 탕평을 하려는 시도가 나타났습니다. 이후 영, 정조기를 탕평 정치 시기라고 하며 붕당보다 왕권이 우위서게 되는 시기가 도래합니다. 어떻게 보면 조선이 애초에 지향했던 유교 정치의 원리와는 조금 다른 형태로 붕당정치의 폐해가 낳은 기형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탕평정치가 영조 때 부터 시작된다>
영조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여러가지 개혁 정치를 펴나가는데 붕당의 근원이 되었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기 시작했으며 그 동안 붕당의 원인이 되었던 막강한 인사권을 가진 이조 전랑의 힘을 축소시켰습니다. 이외에도 백성들의 군포 부담을 덜어주는 법인 균역법을 실시하였고 가혹한 형벌을 개선했습니다. 그리고 조선 초기 기본 법전이었던 경국대전을 다시 한 번 손질하여 속대전이라는 새로운 법전을 펴내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영조의 탕평정치는 한계가 있었는 데 그것은 원칙적으로 탕평책을 찬성하는 온건한 계열인 완론만 등용했고 또한 영조 후기에 가면 탕평파가 국왕의 친위파화가 진행되면서 외척에게 권력이 집중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세자를 죽이는 사건으로 이해 또 다른 붕당인 시파(사도세자의 죽음에 반대), 벽파(사도 세자의 죽음에 찬성)를 낳기 도 했습니다.
하지만 영조의 탕평정치는 한계가 있었는 데 그것은 원칙적으로 탕평책을 찬성하는 온건한 계열인 완론만 등용했고 또한 영조 후기에 가면 탕평파가 국왕의 친위파화가 진행되면서 외척에게 권력이 집중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세자를 죽이는 사건으로 이해 또 다른 붕당인 시파(사도세자의 죽음에 반대), 벽파(사도 세자의 죽음에 찬성)를 낳기 도 했습니다.
<영조의 탕평정치가 한계에 이르자 정조는 다른 탕평정치를 모색한다>
영조가 죽고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영조의 손자인 정조가 등극하면서 탕평정치는 또 다른 정국을 맞습니다. 비교적 온건한 계열을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해나갔던 영조의 완론탕평과 달리 정조는 급진적인 세력까지 통합하면서 이른바 준론탕평을 펴나가기 시작합니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여 일종에 비서기구로 역할하게 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시켜나갔으며 군사기반인 장용영을 설치하였습니다. 또한 수원화성을 쌓아 이곳을 새로운 중심지로 만들 구상을 가지고 있었고, 공노비 해방과 서얼 등용 등의 일을 영조 임금 보다 더 강대한 왕권을 바탕으로 개혁정치를 과감히 시행해 나갔습니다.
<정조 임금은 아버지 능을 방문한다는 것을 구실로 자주 수원에 능행을 나갔다. 이를 통해 백성과 직접 접촉했다>
결국 정조는 사대부를 통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백성과 소통하려 했습니다. 이는 그만큼 왕권이 강해졌다는 것을 미하며 탕평정치를 통해 왕이 사대부의 세력을 능가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러분 왕권이 강하다고 좋을까요?
<왕권이 강하다고 좋은 걸까? 한 곳에 집중된 권력은 권력의 소유자가 사라질 때 파국을 맞이한다>
탕평정치는 붕당을 없애는 것과 동시에 국왕 친위세력을 키운 것과 같습니다. 이후 조선은 그토록 경계했던 외척의 발호를 경험했으며 이는 거의 전적으로 탕평정치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왕에게 권력을 모이고 그 과정에서 권력을 향유했던 계층들은 국와 중심에 있던 친척들이 되었던 것이죠. 어찌보면 탕평정치는 세도정치의 씨앗을 안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북벌론에서 북학론으로
이제 잠깐 화제를 전환해서 북벌론과 북학론 얘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 우리가 북벌론에 대해서는 잠깐 집고 넘어갔지요? 북벌론은 병자호란 때 당한 치욕을 갚고자 하는 운동으로 그 현실성이 떨어졌다고 앞시간에 배웠을 겁니다. 북벌운동은 다분히 성리학적 질서를 반영한 것으로 청나라를 여전히 중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랑캐로 인식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입니다. 하지만 사대부들이 그렇게 현실 인식이 떨어지기만 했을까요? 이후 청나라가 태평성대를 구가하자 청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론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때 청을 통해 서양문물이 많이 들어옵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이죠? ^^
북벌론에서 북학론으로
이제 잠깐 화제를 전환해서 북벌론과 북학론 얘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 우리가 북벌론에 대해서는 잠깐 집고 넘어갔지요? 북벌론은 병자호란 때 당한 치욕을 갚고자 하는 운동으로 그 현실성이 떨어졌다고 앞시간에 배웠을 겁니다. 북벌운동은 다분히 성리학적 질서를 반영한 것으로 청나라를 여전히 중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랑캐로 인식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입니다. 하지만 사대부들이 그렇게 현실 인식이 떨어지기만 했을까요? 이후 청나라가 태평성대를 구가하자 청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론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때 청을 통해 서양문물이 많이 들어옵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이죠? ^^
<백두산 정계비, 청과의 국경 분쟁을 마무리한 기념으로 세운 것이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청과의 관계에서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바로 국경 문제입니다. 청나라는 자신들이 일어난 지역인 만주를 신성시하며 그 지역에 사람을 살지 못하게 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그것을 깨고 들어가 인삼을 캐는 등 문제가 발생하자 국경선을 확정하는 문제로 청나라 사신과 조선의 사신들이 몇 차례 회담을 하여 그 회담 내용을 비에 적었습니다. 이것이 백두산 정계비인데 현재도 간도 문제 때문에 한 번씩 언급되고 있습니다. 사실 제 입장에서는 백두산 정계비 내용이 어떻든 간에 간도는 돌려받기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이미 간도에 조선족보다 한족들이 훨씬 많이 살고 있고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다하더라도 그들은 어디까지나 중국인으로 교육받고 중국인으로 살았는데 그곳이 우리의 영토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죠. 제 생각은 그렇다는 겁니다 ^^;
조선과 일본, 외교 관계를 회복하다
이제는 일본 과의 관계를 알아봅시다. 임진왜란 이후로 조선과 일본은 엄청난 원수지간으로 남았을 줄 알았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생각은 땡!
조선과 일본, 외교 관계를 회복하다
이제는 일본 과의 관계를 알아봅시다. 임진왜란 이후로 조선과 일본은 엄청난 원수지간으로 남았을 줄 알았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생각은 땡!
<일본과 조선은 원수? 뙈행!>
그렇다면 서로 심각한 전쟁까지 한 두 나라가 어째서 원수 지간으로 남지 않았던 걸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이 전 시간에 말했던 명나라 중심의 국제질서가 붕괴되면서입니다. 조선은 북방에 후금과의 문제 때문에 후방 일본과 언제까지 적대적으로 지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일본 나름대로 명나라 중심 국제질서에 이탈하기는 했지만 중국과 교역을 할 창구가 필요했으며 명나라에 책봉을 받지 않고도 에도 막부 쇼군의 위신을 높일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양측의 이런 필요가 맞아떨어져 총 12차례의 통신사가 파견되었습니다. 초기 통신사들은 막부 쇼군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극직한 대접을 받았지만 후기로 가면서 에도 막부의 권위가 안정되자 통신사를 굳이 받아들일 필요를 못느꼈고 조선 통신사에 대한 과도한 예의와 비용이 문제시 도면서 나중에는 쓰시마 섬에만 머무르다 돌아가다가 19세기에 들어서면 더 이상 파견되지 않기에 이릅니다.
탕평정치는 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는가?
여러분 오늘 탕평정치에 대해서 배웠지요? 그렇다면 오늘 배운 내용을 잘 떠올려보면서 어째서 탕평정치가 붕당정치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는 지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
탕평정치는 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는가?
여러분 오늘 탕평정치에 대해서 배웠지요? 그렇다면 오늘 배운 내용을 잘 떠올려보면서 어째서 탕평정치가 붕당정치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는 지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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