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1) 청과 일본, 근대 개혁 운동을 전개하다
1-3 일본, 부국강병과 대외 팽창을 도모하다 


흑선(黑船:검을 흑, 배 선), 일본을 깨우다

일본의 개화 과정의 대해서 알아봅시다. 일본은 인공섬 데지마에서 교역하던 네덜란드를 통해서 유럽 열강들의 소식을 듣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을 뿐. 서양 열강에 대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답답했던지 네덜란드 국왕 빌럼 2세는 아편전쟁의 경과를 일본 측에게 전하고 개국을 권유하기도 했습니다만 에도 막부는 가뿐하게 씹어주셨습니다 -_-

 <네덜란드 국왕 빌렘 2세, 신경 좀 써주려다가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_-;>

일본은 중국과 자신들은 다르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일단 섬나라니까 안심했던 측면도 없지 않아 있지요. 하지만 불안은 서서히 다가왔고 확실히 현실이 되었습니다. 일본 앞바다에 4척의 검은 배가 출현한 것입니다.

 <에도만에 상륙하는 페리제독의 쿠로후네(흑선)>

http://blog.naver.com/philosophy78?Redirect=Log&logNo=130054628419&jumpingVid=4D1509A929A6713F241077E9C9BFDF19CC52(쿠로후네의 모습을 그린 일본 사극)

일본에 열강들의 증기선이 나타났던 건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일반 사람들이 많이 사는 에도(도쿄) 앞바다에 증기선이 나타났던 것은 처음이라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당시 이 흑선을 이끌었던 페리제독은 일본에 개국과 통상을 요구했습니다. 막부는 1년 간의 시간을 달라 요구했고 미국은 알겠다면서 1년의 유예기간을 주고 철수합니다. 1년의 시간을 얻으면 뭔가 대책을 강구해야 할텐데 설마 진짜 다시 오겠어? 라는 생각이 막부를 지배했습니다. 여러분이랑 비슷하죠? ^^;; 하지만 미국은 약속을 칼같이 지켜 1년뒤인 1854년 7척의 흑선을 거느리고 에도 앞바다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막부는 흑선에 위용에 겁을 집어먹고 결국 불평등조약인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드디어 일본이 개국한 것입니다.

처음 미국의 관계에서 불평등 조약을 맺었던 일본은 이후 다른 나라들과도 불평등 조약을 맺었습니다. 최혜국 대우와 치외법권 등 안 좋은 조건은 다 붙었죠. 이런 조약 아래서 다른 열강들과 장사를 하니 제대로 될리가 있겠습니까? 무역은 만년 적자에 물가능 폭등했습니다. 모든 비난의 화살은 막부에 퍼부어졌으며 일반 백성들의 열강들에 대한 적개심이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왕을 높이고 서양 오랑캐를 몰아내자!

이때 이런 분위기를 이용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존왕양이파입니다. 말이 좀 어렵지요? 이제부터 선생님과 함께 존왕양이가 무슨 뜻인지 알아봅시다.

<메이지 천황, 메이지 천황 이전까지 일본 천황에게 실권은 없었다>

존왕이라는 것은 왕을 존중한다는 것, 즉 일본의 최고 통치자인 천황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아니 근데 최고 통치자인 천황을 뭐하러 더 높인다는 겁니까? 그 이유는 천황이 실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1185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이후부터 무사들이 막부에 모여서 정치를 하던 나라였습니다. 즉, 실권은 천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사들의 집단인 막부에 있었습니다. 막부의 최고 권력자인 쇼군이 사실상 일본 전체를 통치하고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천황은 그냥 일개 허수아비였지요.

존왕양이파들은 막부가 잘못된 정치를 했기 때문에 일본 상황이 힘들다고 판단하여 실권을 다시 천황에게 돌려주자는 운동을 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존왕입니다. 

그렇다면 양이는 무엇일까요? 양이는 더 쉽지요. 서양 오랑캐라는 뜻으로 서구 열강을 배척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양이는 생각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지 한번 볼까요?

<존왕양이파의 대표였던 조슈와 사쓰마의 위치>

당시 존왕양이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곳이 바로 조슈번과 사쓰마번이였습니다. 이 번이라는 것은 지방 영주를 뜻하는 것으로 조그만 나라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좋아요. 조슈와 사쓰마는 상대적으로 에도(도쿄)에서 먼 거리에 있어서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힘을 키웠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강력하게 양이를 추진하여 서구 열강들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때 가볍게 서구 열강들에게 발렸습니다-_-; 힘의 차이를 느낀 조슈와 사쓰마는 양이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서양의 기술을 배우는 것으로 선회했습니다. 

막부를 토벌하고 왕정이 복고되다

자, 그렇다면 존왕과 양이 중에 존왕만 남았네요? 그렇다면 존왕을 하게 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할까요? 천황에게 실권을 주면 간단하죠? 하지만 실권은 막부가 가지고 있지요. 그렇다면 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막부를 토벌하자! 도막파는 이렇게 결성됩니다.

<바람의 검심에 토막파의 암살자로 묘사되는 켄신>

토막파들은 결국 막부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그들이 원하던 존왕을 성공시킵니다. 드디어 막부가 무너지고 명실공히 일본의 최고 실질적 통치자는 천황이 됩니다. 

<교토에 있던 메이지 천황이 에도로 향하면서 왕정복고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http://club.cyworld.com/ClubV1/Home.cy/52945471(대정봉환)
http://blog.naver.com/philosophy78?Redirect=Log&logNo=130054628484&jumpingVid=D3B8E05174B9246F0780D3B32D2F617EC61B(천황의 나라, 일본)

하지만 천황이 실질적 통치자가 되었을까요? 잉? 아니죠. 천황이 왕정복고에서 어떤 역할을 했나요? 아무것도 없죠. 실질적인 역할을 토막파가 모두 맡아서 했으며 이 토막파들은 천황을 전면에 앞세우고 실질적은 정치는 자신들이 행하게 됩니다. 이러나 저러나 천황은 실권이 없게되네요. 

메이지 유신

아무튼 토막파는 천황을 중심으로 내세우면서 대규모 개혁을 단행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입니다. 메이지 유신은 서양을 따라잡겠다는 일념하에 시행되었던 개혁으로 주로 식산흥업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식산흥업이란 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서양의 산업화를 따라잡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더불어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여 이때까지 자신의 지역에서 왕처럼 행세하던 지방 영주들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아 중앙으로 일원화 시킵니다.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일본의 급진 사무라이들>

또한 서양이 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한 것을 따라잡기 위해 신분제 철폐를 단행하고 백성에게 국민 교육과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부과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서양을 급히 따라잡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실질적으로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도입했다고 생각한다면 곤란합니다. 

이외에도 외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이와쿠라 사절단을 파견합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불평등조약의 개정이라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으나 서양문물을 2년 동안 충분히 체험하여 일본의 근대화를 이끄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와 대외팽창, 기묘한 동거관계

우리는 민주주의 하면 보통 평화적인 것으로 알고있지요? 하지만 메이지 유신 시기에 일본의 민주주의는 그다지 평화적이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시기 일본은 서양 나라들과 불평등한 조약 때문에 대외무역에서 큰 적자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 밖으로 뻣어나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그 나라의 재물을 빼앗고자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 훗카이도가 일본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지금의 오키나와였던 류큐 왕국이 일본에 병합됩니다. 또한 타이완을 침략하기도 하는 등 대외 팽창에 온 힘을 모두 기울였지요.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이 대두한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 그의 주장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이여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재밌는 것은 대외팽창을 꾀하던 시기 일본은 민주주의 기본이 틀이 잡혔다는 것입니다. 헌법이 만들어지고 의회가 만들어졌는데 그렇다면 왜 일본은 대외팽창과 민주주의 동시 발전이라는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일본의 민주주의는 어디까지나 서구의 제도 겉모습을 흉내냈다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서구를 빨리 따라잡기 위해 서구 제도를 가져오긴 했지만 그것이 서구의 민주주의처럼 원활하게 운영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형적으로 천황 1인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명령 체계를 더 일사분란하게 하는 데 그 의미가 있었습니다.

천황에게 집중된 권력 좋기만 한걸까?

일본은 대일본 제국 헌법을 만들면서 모든 권력을 천황에게 집중했는데 과연 이것이 천황에게 좋기만 했을까요? 헌법을 만들 당시 왜 천황에게 권력을 집중시켰는지 생각해보고 이를 통해 토막파들이 얻으려고 했던 점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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