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5) 열강의 경제 침탈이 가속화되다
5-1 일본과 청 상인의 경제 침투
5-2 청과 일본의 경제 침탈에 맞서다 


개항으로 외세의 경제 침탈이 심화되다


개항 이후 조선은 본격적으로 세계 자본주의 시장체제에 편입되었습니다. 하지만 개항 과정이 폭력적이고 조선에서 준비도 전혀 없었습니다. 또한 외국과 체결한 조약이 모두 불평등조약이어서 조선의 취약한 경제 상태가 그대로 열강 앞에 노출되어 있었지요. 

특히 일본과 청은 조선의 경제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나라였습니다. 일본은 강화도 조약의 유리한 조항 내용을 이용하여 조선 경제를 적극적으로 잠식해나갔습니다. 급격한 공업화를 하느라 농업이 몰락했던 일본은 쌀이 많이 부족했는데 주로 쌀과 잡곡, 콩을 많이 수입했습니다. 조선에 주로 수출했던 제품은 주로 영국산 면제품이었습니다. 일본은 영국산 면제품을 중국에서 싼 값에 사들여 조선에는 비싼 값에 팔아 그 대금으로 쌀과 잡곡, 콩을 수입하는 형태였습니다. 이것을 미, 면 교환체제라고 부릅니다. 

<인천항에서 수출되는 쌀, 일본은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조선쌀 수입에 열을 올렸다>

일본은 이런 무역을 하면서 일본 화폐를 사용하고 수출입 상품에 관세를 매기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치외법권 마저 적용되면서 약탈에 가까운 무역 활동을 벌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농촌 면공업은 거의 몰락했으며 쌀값은 폭등했습니다. 쌀값 폭등으로 인해 지주 계층은 더 큰 이익을 거두기도 했지만 대다수 농민은 몰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인 계층도 일본 상인의 진출로 말미암아 몰락했는데 그 중 일부는 일본 상인이 개항 초기에 개항장에서만 무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여 일본 상인 대신 내륙에 물건을 팔아줌으로써 부를 축적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청나라는 어땠을까요? 청은 조선이 개항하던 초기에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임오군란 이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면서 조선 내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청수륙무역장정에는 청나라 상인들은 정부에가만 받으면 개항장 밖에 장사를 할 수 있다는 조약이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 상인들은 개항장을 넘어 내륙까지 적극적으로 진출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시죠? 다른 나라들은 모두 최혜국 조항이 있었다는 것을요. 이후 다른 나라들도 최혜국 대우 조항에 의해 내륙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내륙과 개항장을 연결해주던 중개상인들은 몰락헀습니다.

<청과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액>

위 그래프를 보면 청나라가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은 이후 꾸준히 조선에서 영향력을 확대해나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나라 상인들의 세력이 확대해 나가자 일본은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결국 조선에서 청나라 상인의 세력 확장 때문에 나중에 전쟁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청일전쟁입니다.

한편 조선 정부는 계속 손해를 보는 무역 체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특히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무관세 규정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1883년 조일통상장정에서 관세권이 설정되고 쌀의 무제한 수출을 막는 방곡령 선포등이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주는 게 있으면 잃는 법도 있는 법. 일본의 요구로 최혜국 대우 조항이 들어가고 맙니다.

경제 침탈을 막기 위한 노력

그렇다면 조선은 외국 상인들의 경제적 침탈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을까요? 그건 아니었습니다. 외국 자본에 대항하기 위한 움직임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요. 외국 상인들의 막대한 자본과 경쟁하기 위해 조선의 상인들은 동업자들을 모아 자본의 규모를 불려 상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 중 대동상회는 꽤 큰 규모의 회사로 발전하여 해외 무역에도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정부에서는 일본의 경제 침탈에 맞서 세곡을 효율적으로 운반하기 위해 증기선을 구입하기도 하고 해운 회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일본 자본에 잠식되는 슬픈 현실을 맞이하긴 하지만요 ^^;

<광제호의 모습>

이외에도 일본 상인들이 무분별하게 곡물을 사가는 행위를 막기 위해 방곡령이 시행되기도 했습니다. 방곡령이란 곡식이 나가는 걸 금지한다는 뜻으로 일본이 제한 없이 쌀을 수입해가는 걸 방지하는 법령이었습니다. 처음에 방곡령이 일어난 곳은 함경도로 당시 함경도 관찰사인 조병식이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선포하는 것 까지는 매우매우 좋았는데 일본이 또 다시 트집을 잡기 시작합니다. 일본은 방곡령 통보를 늦게 받았다는 구실을 달아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해 배상금을 받아내는 행위를 저지릅니다-_- 나쁜 놈들이죠?

이외에도 청, 일본 상인들의 상권 확대에 맞서 시전 상인이 철시 운동을 벌이는 등 적극적으로 우리 상권을 수호하려 노력했습니다. 이후 시전 상인들은 황국 중앙 총상회를 조직해서 상권 수호 운동을 더욱 발전시켜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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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4) 근대 국가 건설을 지향하다
4-2 갑신정변, 최초로 근대 국가 수립을 지향하다 


개화당,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임오군란 이후 청의 입김이 거세지면서 급진개화파 보다는 온건개화파가 힘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온건개화파는 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청을 모델로 한 양무운동식 개화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급진개화파가 꿈꾸던 개혁을 실행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 불리한 상황을 역전하고자 급진개화파의 김옥균은 한 가지 승부수를 띄웁니다. 당시 조선은 개화 정책 추진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빠져있었습니다. 당시 온건개화파들은 이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청에서 파견한 서양인 고문이던 뮐렌도르프의 의견을 채택했습니다. 뮐렌도르프는 당오전이라는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여 재정난을 바로 잡으려고 했습니다.

<청나라에서 파견한 독일인 고문 묄렌도르프(위), 그가 발행한 당오전(아래>

그러나 당오전은 대표적인 악화입니다. 화폐의 액면 가치는 상평통보에 5배지만 실제 가치는 2배밖에 안 되어 혼란만 초래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옥균은 자신이 직접 재정난을 타계하고자 고종에게 일본에 차관을 들여오겠다고 했습니다. 고종의 허락을 얻은 김옥균은 차관을 반드시 들여오겠다고 장담했으나 결과는 시망-_-; 고종은 크게 실망했고 온건개화파 역시 당오전의 실패를 급진 개화파에게 덮어 씌우면서 급진개화파는 급격하게 고종의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급진개화파가 절망에 빠져있을 때, 청나라가 프랑스와 전쟁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청나라는 프랑스와 전쟁에 병력을 보충하고자 조선에 있는 청나라 군사 절반을 빼내갔습니다. 급진개화파는 더 이상 고종의 신임을 얻지 못하겠다고 판단하고 청나라 군사가 절반으로 줄어 있을 때를 노려 쿠데타를 감행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갑신정변입니다.


<갑신정변 전개과정>

<갑신정변 진행도>

급진개화파는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군사를 타국에서 빌릴 결심을 했습니다. 처음에 미국과 접촉했으나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나 청국의 세력 확대를 불편한 눈으로 지켜보던 일본 공사가 이들을 지원하기로 결심하고 거사 날짜가 잡혔습니다. 거사 날짜는 지금의 우체국에 해당되는 우정국이 개국하는 축하연으로 잡았습니다. 이날 급진개화파들은 온건개화파들을 주살하고 자신들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이들은 갑신 정강 14개조를 발표하여 그들의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주요 내용은 청과 사대 관계 청산, 내각 제 수립, 문벌 폐지, 재정 일원화, 상업의 자유로운 발전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정권은 3일로 끝났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갑신정변 소식들은 청군은 곧바로 군대를 다시 조선으로 파견했고 이 소식을 접한 일본은 청군과 대결을 피하여 철수 했습니다. 결국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급진 개화파 인물들은 대부분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갑신정변의 주모자였던 김옥균은 정변 실패후 일본에 망명한 뒤에 암살당했다>

근대 국가의 청사진은 제시했으나...

갑신정변의 의의와 한계는 분명합니다. 먼저 의의부터 살펴보죠. 이들은 청의 간섭을 배제하고 사대 관계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는 점이 높게 사줄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대와 조공 관계는 속국 관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평등한 관계라고 보기에도 힘들다>

먼저 사대와 조공은 굉장히 애매한 관계라는 점입니다. 사대와 조공을 한다고 해서 그 나라가 완전히 속국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죠. 어찌됐든 사대와 조공을 하는 나라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한 것이고 엄연한 독립국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대 받는 나라와 사대 하는 나라가 평등한 관계라고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애매한 국가관계는 근대국가끼리 맺는 조약에 늘 걸림돌이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청나라가 조선과 서구 열강 사이에서 조약을 맺을 때 다리를 놔준 것이죠.

또 중요한 점은 이들이 평등을 내세웠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들은 태생이 기득권층이므로 진정한 평등을 바라지 않았을 겁니다. 근대국가가 되는 필수적인 요소가 평등이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한 것이지 이들은 평민들의 삶을 공감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간에 평등을 주장했다는 것이 앞으로 조선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알려줬다는 점에서 높이살만한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들은 소수 엘리트 지식인이에 불과했고 평민들의 삶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평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것이 이들의 한계였습니다. 즉, 위에서 개혁을 하면 자연스럽게 아래에 있는 백성들을 그대로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엘리트들이 범하는 전형적인 오류입니다.

<천한 것들이 까라면 까야지 뭔 말이 많어?>

마지막으로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또 다른 외세에 의존하려고 했다는 점은 갑신정변의 큰 약점이기도 합니다.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의 입김은 더욱 거세지며 일본은 책임을 오히려 조선 측에 돌리면서 조선의 상황은 더욱 안 좋아집니다. 특히 갑신정변 이후 텐진 조약이 체결되는데 이 조약은 청과 일본이 군대를 파견하기 전에 서로에게 알려준다는 조항이 들어가는데 이것이 이후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 때 일본이 개입하는 빌미를 만들고 마니 정말 슬픈이지요.

중립화론이 고개를 들고 개화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다

갑신정변 이후 갈수록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고종은 이 내정 간섭을 막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입니다. 갑신정변에 별로 교훈을 얻지 못했나 봅니다-_- 이 사실을 알아 챈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거합니다. 이렇게 되자 청, 영국, 일본, 러시아 4개국이 조선을 두고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독일 부영사였던 부들러는 이런 열강들의 각축을 막고자 조선을 중립화하면 어떻게냐고 제의를 했습니다. 유길준 역시 비슷한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중립화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중립화론은 실패로 끝났지만 개화에 대한 노력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갑신정변은 비록 실패했으나 여전히 개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정부는 동도서기론 입장에서 외국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근대 학교인 육영 공원, 군사 학교인 연무 공원, 광산을 전담하는 광무국, 전신사무를 관장하던 전보국 등을 설치했습니다. 

<육영공원의 모습, 외국인 교사가 조선 사람을 가르치고 있다>

한편으로 갑신정변을 진압하기는 했지만 청의 간섭에 부담을 느낀 조선은 일본과 미국에 공사관을 설치했습니다. 원래 열강들은 조선에 공사가 아닌 영사를 파견했습니다. 영사는 공사보다 급이 한 단계 낮은데 이것은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한다는 얘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은 일본과 미국에 공사관을 설치했습니다. 즉, 조선이 청에 종주권에 안에 있는 나라가 아닌 동등한 나라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이었지요.

하지만 이 같은 개화 노력은 민씨 일파의 부패와 청의 간섭 때문에 성과를 거두기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농민들은 갈수록 힘들어지는 상황에 정부의 개화 정책은 공감을 얻기가 힘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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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4) 근대 국가 건설을 지향하다
4-1 개화사상은 어떻게 형성·발전 하였을까? 


북학론, 개화사상의 뿌리가 되다

한 시대를 주름 잡았던 사상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상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자극을 주었던 다른 사상이 있고 시대 환경이 그 사상을 만드는 것이죠. 개화사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이 일본과 서구에 문을 열었던 그 시기에 개화사상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고 이전부터 개화 사상의 뿌리가 되는 사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북학론이었습니다.

북학론은 청과 적극적인 교류를 주장하던 사람들이였습니다. 당시 청에는 많은 서양 선교사와 서양 서적들이 있었는데 이것을 통해 북학파 실학자들은 자연스럽게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됩니다. 천주교도 그렇게 해서 들어오게 된 것이구요. 

<정약전의 영정, 그는 천주교 신자였다. 서양 서적을 공부하다 신자가 된 사례다>

이처럼 청과 교류를 주장했던 사람들은 서양 문물도 같이 접했고 또한 그런 사상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전파하면서 개화사상까지 이어져오게 됩니다. 하지만 개화사상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이런 양반들 보다는 중인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오경석은 역관 출신으로  청에 일찍부터 드나들면서 청의 사정과 서양문물에 대해 남들보다 일찍 눈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중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힘이 없었고 대신 양반 자제들을 뽑아 가르치기로 결심합니다. 또한 이런 이들의 개화사상에 공감한 양반이 있었으니 그니 북한론을 주장했던 박지원의 손자였던 박규수였습니다.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 이 세 사람이 함께 개화사상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서양의 나라와 역사를 소개한 해국도지, 유럽나라의 모습을 그린 부분이다>

이들은 주로 해국도지, 영환지략이라는 새로운 책을 통해 서양의 지리와 문물, 역사를 접하고 당시 국제 정세와 서양에 대해 남들보다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양의 침략에 맞서려면 하루 빨리 개항을 하여 서양의 발달된 기술을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표적인 통상개화론자인 박규수 역시 어디까지나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을 뿐입니다. 즉, 유교적 원리는 지키면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얘기였지요. 뭐 그래도 기존의 유학자보다는 훨씬 더 개방적인 인물이었다고 봐야겠습니다.

개화파가 형성되나 개화의 방법을 서로 달리 생각하다

어찌되었든 간에 개화사상을 가진 이 세명 밑으로 상당히 똘똘한 양반 자제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바로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으로 나중에 조선의 개화를 이끌어갈 주역으로 성장하는 사람들이죠. 주로 박규수의 사랑방에 모여서 당시 정세에 대해 토론해나가며 조선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모색했습니다.

 <박규수 집터에 있는 백송, 이곳에서 개화파 인물들이 꿈을 키웠다>

특히 김옥균은 벼슬길에 나서면서 일본에 조사 시찰단으로 파견되었는데 그곳에서 서양 기술 뿐만 아니라 사상과 제도까지 받아들일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이런 사상을 문명개화론이라 부릅니다. 주로 김옥균과 같이 동문수학했던 박영효, 서광범 등은 김옥균의 입장에 대체로 동의했습니다.

반면 이들과 다르게 개화를 모색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으로 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들입니다. 이들은 청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유교 논리를 고수하며 서양의 기술만 받아들이고자 했는데 이를 동도서기론이라 합니다. 개화 방법에 있어서 두 가지 입장차이가 나타난 것입니다.

문명개화론을 주장하는 입장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범으로 삼아 근대적인 사상과 제도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했습니다. 또한 임오군란으로 청국의 영향력이 강해진 시점에서 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청과의 사대관계를 폐지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생각이 달랐는데 그들은 청이 조선이 개화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존재이며 서양의 사상과 제도까지는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입장차이는 서로 다른 당파 성립으로 이어졌습니다. 급진개화를 주장하는 김옥균 일파는 자신들을 개화당 또는 독립당으로 부르고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는 김홍집 일파를 수구당 또는 사대당으로 불렀습니다. 이들의 갈등의 골은 깊어져만 갔습니다. 

왜 하필 사랑채야?

여러분 박규수 사랑채에 모여서 당시 조선의 정세에 대해 얘기를 하곤 했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왜 하필 사랑채에서 얘기를 했을까요? 이번 기회에 한옥의 구조에 대해서 조금 알아보는 시간을 수업시간에 가지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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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3) 개화 정책의 추진과 반발
3-3 임오군란, 개화에서 소외된 민중의 반발 


청나라, 조선을 지배하려 하다

조선이 근대화와 개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나라는 어느 나라일까요? 일본이라구요? 뙈행! 단순히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ㅎㅎ

 <아니라고 이것들아! 땡이라고 ㅋㅋ>

조선의 근대화에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은 바로 청나라입니다. 왜 청나라가 일까요? 여러분 생각을 조금 더 하면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청나라는 오랫 동안 조선에 영향력을 끼치던 나라였습니다. 어떻게요? 바로 사대와 조공을 통해서 말이죠. 

기본적으로 사대와 조공은 종속관계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전에도 설명했지만 사대를 하면서 작은 나라는 안정과 주변국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릴 수 있습니다. 큰 나라는 작은 나라의 침입에서 해방되고 내부에 더 신경을 쓸 수 있지요. 따라서 이 관계는 기본적으로 서로 간섭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즉, 근대화 이후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가 관계를 맺는 방법인 식민지, 보호국은 사대와 조공과 질적으로 다른 관계였습니다.  

<조선을 지배하려는 두  나라, 청과 일본. 러시아가 두 나라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다>

하지만 청이 제국주의 침략을 받고 나라가 어려워지자 사대와 조공 관계를 달리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청은 제국주의 침략에서 벗어나고 동시에 스스로도 제국주의 길을 걷기 위해 사대와 조공 관계를 근대적 식민지, 보호국 관계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청은 사대와 조공 관계를 이용하여 서구 열강으로부터 조선을 보호국화 하려 했으며 이런 청의 시도는 개화파에게 크나큰 위협으로 느껴졌습니다.

개화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

청나라의 위협과 더불어 일반 백성들은 개화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개항 이후 조선은 기본적으로 일본, 서양 열강들에 불평등 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무역에 있어서 막대한 손해가 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은 많은 양의 쌀을 제한 없이 사들여가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불만은 계속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중앙에서는 신식군대와 구식군대의 차별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구식 군대였던 2군영에 대한 대우가 매우 형편없었는데 13개월 만에 지급받은 쌀에는 쌀보다 겨와 모래가 훨씬 많았습니다. 결국 쌓여있던 구식 군인들의 불만은 폭발했고 이들은 임오군란(1882)에 일으켰습니다.

 
<임오군란의 전개과정>

임오군란은 구식 군인의 불만에서 부터 시작되었지만 개화 정책으로 인한 일반 백성들의 불만도 이때같이 터져나오게 됩니다. 서울 하층민들과 합세한 구식군인들은 정부 고관대작(특히 민씨일가)의 집을 불태우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습니다. 이들은 나아가 창덕궁까지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찾으려 했으나 찾는데 명성황후는 이미 종적을 감춘지 오래였습니다. 사태가 커지자 이들은 흥선대원군에게 지지를 호소했고 결국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은 재집권하면서 그 간 개혁을 진행시키던 통리기무아문이나 별기군을 없애고 기존의 삼군부와 5군영 체제로 바꿉니다. 

하지만 민씨 일가는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민씨 일가는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청에게 연락을 취했고 청은 이것을 기회로 여겨 일본 군대의 출동을 막고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신속히 군대를 출동시켜 임오군란을 진압시켰습니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군란의 책임을 물어 청나라로 압송됩니다.

 

<임오군란을 통해 조선 내 청세력이 확대된다. 청나라 대표 군인이던 위안스카이가 임오군란 후 조선에 주둔한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 내에서 청의 세력은 날로 확대되어 갑니다. 청나라는 군란을 진압한 후에도 3000명의 군사를 조선에 주둔시켰습니다. 이때 중국의 유명한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위안스카이도 우리나라에 오게 됩니다. 또한 뮐렌도르프 등 외국 고문을 파견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고히했습니다. 이어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라는 조약에서는 조선을 청의 속방으로 규정하면서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 내륙 시장까지 진출할 수 있는 특권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한편 일본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는데 이들은 임오군란 당시 일본 공사관이 불탄 책임을 물어 제물포조약을 조선 측에 강요했습니다. 주요 내용으로는 사과 사절단 파견과 주모자 처벌, 배상금 지불, 공사관 경비를 위한 일본군 주둔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었는데 고종은 이 요구를 모두 수용하고 맙니다.

청나라는 왜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을까?

오늘 배운 내용을 보면 청나라가 계속해서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만들려고 하는 움직임이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청은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을까요? 당시 청나라의 국제적 입장을 고려해서 얘기해보도록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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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3) 개화 정책의 추진과 반발
3-1 정부, 개화 정책을 추진하다
3-2 보수적 유생층,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다 


조선, 근대를 위해 노력하다

조선은 강화도 조약과 서구 열강과의 협정 체결로 인해 서서히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보통 여러분이 개화 하면 기타 다른 나라와 교류를 하는 것만 생각하지만 개화의 본질은 거기에만 있지 않습니다. 제도, 기술, 의식 등 모두 다 근대화를 시키는 것이 바로 개화입니다. 여기서 근대화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서구 열강처럼 되자는 의미가 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식 같은 것들은 바로 서구 사람들처럼 바뀔 수 있을까요? 그러기 힘들겠죠? 그래서 우선은 제도와 기술을 배우기 위해 노력합니다. 먼저 제도 변화에 관한 부분 부터 살펴봅시다.

먼저 기존의 의정부와 6조가 있었던 제도는 사라지고 근대적 행정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새롭게 설치했습니다. 이 통리기무아문은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참고하여 만든 것입니다. 통리기무아문 밑에는 실무를 담당하는 12사를 설치했습니다. 그러니까 의정부-6조 시스템이 통리기무아문-12사 시스템으로 바뀐겁니다. 이해되죠? 

<신식 군대인 별기군, 일본인 교관에 의해 훈련되었다>

제도 중에서 이 시기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뭐니뭐니 해도 바로 군사제도입니다. 힘을 키우지 않으면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에게 먹혔던 시대이기 때문에 강한 병사를 갖는 것은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조선의 중후기 군사제도는 5군영 체제였는데요. 이 5군영을 무위영과 장어영 2군영으로 축소시키고 대신 신식 군대를 따로 양성했는데 그것이 별기군입니다. 그러니까 2군영은 구식군대, 별기군은 신식군대입니다. 별기군은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여 신경을 써서 가르쳤습니다. 

가까운 나라는 어떠한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던 근대화는 기본적으로 서구를 따라잡고자 했던 것이기 때문에 진짜 근대화는 어떤 모습인지에 대한 모델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 다른 나라를 보고 배우고자 하는 사절단이 유독 많이 파견되었는데요. 그 중에서 조선은 특히 서구 열강 보다는 옆 나라인 청과 일본을 보고 근대화가 무엇인지 가늠해보고자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도 조선의 근대화 과정이 상당히 특이한 것임을 느낄 수 있죠?

조선은 개항이 늦은 만큼 이미 개항을 하여 서구 열강을 따라잡고자 했던 청, 일본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서구 열강보다는 청과 일본의 영향이 지대했습니다. 그래서 일본과 청 두 나라는 적극적으로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시키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조선도 자연스럽게 이 두 나라를 통하여 근대 문물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태극기, 제4차 수신사 때 박영효가 제작한 것이다>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에 끊어졌던 사절단이 다시 파견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수신사입니다. 기존의 통신사가 우리나라 문물을 전파했던 역할이 있었지만 수신사는 반대로 근대화된 일본의 모습을 배우러 간 것입니다. 또한 새롭게 신설된 기구인 통리기무아문에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일본을 배우고자 조사 시찰단을 파견했습니다. 청을 배우기 위해서는 영선사를 파견했습니다. 주로 서구의 근대식 무기 제조와 군사 훈련을 배우고자 했는데 돈이 없는 관계로-_-; 1년만에 돌아왔습니다. 돈은 없어도 열심히 듣고 배운 것은 있는지 근대식 무기 제조 공장인 기기창을 귀국 후에 만들었습니다.

위정척사 한심한 운동일까?

이렇게 정부에서 여러 방향으로 개화를 모색하고 있을 때 유생층들은 이런 정부의 움직임을 달갑게 보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서양의 학문과 문하를 사(邪:간사할 사)한 것으로 보고 이를 배척하고 정(正:바를 정)한 성리학을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음, 여러분의 입장에서 굉장히 한심해 보일 수도 있겠네요. 그렇죠? 그런데 과연 이들의 주장은 한심한 것이 었을까요? 
 

<이차돈의 순교화, 새로운 문화가 들어올 때 저항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나라 불교가 들어왔을 때 아무런 저항없이 들어왔나요?  아니죠? 이차돈의 순교 전설도 전하고 영주 부석사 창건 설화에도 알 수 있듯이 불교가 처음에 전해 질 때 토착세력들의 반발이 거셌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위정척사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반발이 일어났던 것 뿐입니다. 하물며 근대화라는 것은 폭력성을 수반하는 것인데 아무런 저항없이 그대로 수용되었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한심한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자, 그러면 위정척사 운동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봅시다. 위정척사운동은 시대 상황에 따라 총 세가지로 구분됩니다. 1860년대에는 아직 조선이 개항을 하지 않았을 때였고 두 번의 서양 세력의 침략이 있었을 때였습니다. 따라서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했던 사람들은 통상 수교를 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1870년대에는 우리나라가 강화도 조약 체결해서 개항을 했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위정척사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강화도 조약 체결을 주도했던 일본을 서양 오랑캐와 같이 취급하면서 왜양일체론을 폅니다. 특히 최익현등의 글을 보면 개항의 문제점과 조선 산업의 취약성을 꼬집고 있어 위정척사운동파들이 무턱대고 개항에 반대만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한 최익현, 그는 정말 대쪽같은 선비였다>

1880년대에는 조선책략이 유행하던 시기로 이 책에 대해 유생들이 대규모 비판을 가합니다. 영남만인소라는 상소문이 올라와 정부 개화 정책을 비판하며 서양과 수교에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특히 조선책략에 가한 위정척사파들의 반박은 새겨들을만한 충고였습니다.

나중에 위정척사운동은 항일의병운동으로도 이어졌습니다. 위정척사운동은 구체제를 옹호했던 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운동이라 한계가 명확한 것이긴 했지만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성을 간파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박정양과 홍영식이 추구하던 이상적 개화모습은?

교과서 125페이지에 사료 읽기를 보면 박정양과 홍영식의 개화사상이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료를 읽고 두 인물이 지향했던 개화를 청과 일본의 사례에서 하나씩 찾아보는 시간을 가질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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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2) 개황과 불평등 조약 체제
2-1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다
2-2 서양 열강에도 문호를 열다

따라쟁이 일본, 서양의 포함외교를 따라하여 조선의 문을 열다

일본하면 모방을 잘하는 나라로 어느 새인가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일본은 서양에게 자신들이 굴욕적으로 개국을 한 사건을 잊지않고 그대로 조선에게 행했으니 이를 운요호 사건이라 합니다.

<운요호의 모습, 일본은 자신들이 미국에게 당한 것과 똑같은 행동을 조선에 선보인다>

운요호 사건은 일본이 조선을 개국하기 위해 일으킨 일종의 무력시위였는데요. 그렇다면 일본은 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려 했을까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주장한 일본의 주권선과 이익선>

여러분들은 일본을 제국주의 열강에 한 나라로 기억하고 있겠지만 사실 조선을 개국시킬 당시 일본은 그런 자신감은 없었습니다. 이들은 서구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자신들의 독립을 지켜나갈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정치가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일본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선 일본의 주권이 미치는 주권선만 지킬 것이 아니라 일본 독립과 존망에 관계는 되는 주권선 밖의 이익선까지 지켜야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당시 이익선은 조선 전체를 포함하고 있었고 일본은 조선이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거나 보호국 상태로 전락하는 상태를 두려워했습니다. 조선이 곧 열강의 식민지나 보호국이 되면 자신의 독립이 위험해지기 때문이었죠. 따라서 어떻게든 조선을 중립국으로 놔두거나 일본 자신이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누리고자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서구 열강이 조선에 개입해서 강제로 조선을 개항시키기 전에 일본이 미리 개입해서 조선을 개항시켰던 것이죠.

그렇다면 순전히 일본의 의지에 의해서만 조선이 개국되었던 걸까요?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쓰던 흥선대원군은 뒤로 물러가고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고종 밑에 많은 개화파가 일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었던 박규수가 하루빨리 개화를 하여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주장을 펴고 있었습니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그는 북학론의 학맥을 이어받고 개화를 주장했다>

따라서 일본의 사정과 조선의 사정이 맞아 떨어지면서 개국에 대한 협상은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으며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지 1년 뒤인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이 체결됩니다.

조선, 청과 일본 사이에서 끼인 존재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은 최초의 근대 조약을 맺게 됩니다. 그렇다면 한, 중, 일 삼국이 어떤 시기 누구에 의해서 근대적 조약을 맺게 되었는지 한 번 알아볼까요?

 

조약 체결 시기

조약 체결 상대

1842년 난징조약

영국

일본

1854년 미일화친조약

미국

조선

1876년 강화도조약

일본

<한, 중, 일 삼국의 근대 조약 체결 시기와 상대 국가>

이 표를 보고 뭔가 느껴지시는게 없나요? 보면 조선에 특이한 점이 2가지 발견됩니다. 하나는 조약 체결 상대가 서구 열강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점, 두 번째는 청과 일본 보다 20~30년 늦게 근대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점이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조선이 처한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조선은 어떻게 보면 서양 열강들에게 별로 주목받는 국가는 아니였습니다. (러시아는 제외입니다. 그들은 얼지않은 항구가 필요했으니까 조선이 꼭 필요했지요) 하지만 이제 서양 열강의 침입의 위협을 받고 있던 청과 일본에게는 조선은 매우 중요한 나라였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이익선에 넣어 자신들의 독립을 지키려고 했고 청나라는 서양에게 패배한 설욕을 갚고 자신들도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조공국이었던 조선을 식민지로 변화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렇기에 조선은 서양 열강이 아닌 이웃 나라였던 일본에 의해 개국되었으며 개국 시기도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히 늦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시나요?

조선이 자주 독립국이라고? 독립국에 걸맞는 대우를 해줘라!

자, 이제 본격적으로 조선 최초의 근대 조약인 강화도 조약의 세부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합시다. 강화도 조약에 첫번 째 조항에 보면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말 조선을 기만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라는 조항은 청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조항에 불과했고 나머지 조항들은 온통 조선에게 불리한 것들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도 전혀 없었습니다. 이는 당시 신흥 공업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던 일본과 다르게 산업화가 전혀되지 않은 조선에게는 치명타였습니다. 또한 치외법권이 인정되었고 일본의 조선 해안에 대한 측량권도 그대로 용인되었으니 이걸 평등한 조약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조선책략, 조선의 외교 방향을 결정하다

조선이 일본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나서도 조선은 막 바로 다른 서양 열강과 조약을 체결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과 조약을 체결한 것은 과거 전통적인 일본과의 교역관계를 회복한 것쯤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전히 다른 서양 열강들과의 조약체결을 꺼려했는데 서양 열강과 조약 체결에 불을 당기게 만든 책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조선 책략입니다.

<황쭌셴의 조선책략, 당연하게도 한자로 써있다^^;>

조선책략에서는 러시아를 잠정적인 적국으로 설정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조선이 취해야할 방책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 방책은 연미(미국과 연합하고), 결일(일본과 맺고), 친중(중국과 친하라) 것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결일과 친중은 이미 충족이 되어 있었죠. 일본하고 얼마전에 강화도 조약을 맺었으니 되었고 중국이야 수백년 동안 친분 관계를 유지했으니 남은 것은 미국과 연합하는 것만이 있었습니다.

<영남만인소, 미국과 연합하는 것에 대한 유생들의 반대의 목소리다>

이에 유생들이 크게 반발하여 이만손을 중심으로 영남만인소를 올리기도 했지만 미국과 수교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미국과 조약을 맺게 되는데 이는 청의 소개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청은 당시 일본에게 조선의 주도권을 뺏길 것 같아 노심초사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청은 미국을 소개해주면서 조선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어찌되었든 미국과 조약 체결을 순조롭게 이루어져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조약 내용은 우리에게 유리했던 관세 부과 조항 등이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치외 법권, 최혜국 대우 등이 있었기 때문에 불평등 조약이라는 사실은 다름이 없었습니다.

조선이 미국과 수교하자 뒤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의 서구 열강들과 본격적으로 조약을 체결했으며 기본적으로 전부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특히 러시아를 제외하고 다른 나라들은 청나라가 조선과 조약을 맺을 수 있도록 알선하였는데 이것은 다른 서구 열강들에게 청이 조선이 자신의 보호국임을 주장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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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1) 청과 일본, 근대 개혁 운동을 전개하다
1-3 일본, 부국강병과 대외 팽창을 도모하다 


흑선(黑船:검을 흑, 배 선), 일본을 깨우다

일본의 개화 과정의 대해서 알아봅시다. 일본은 인공섬 데지마에서 교역하던 네덜란드를 통해서 유럽 열강들의 소식을 듣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을 뿐. 서양 열강에 대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답답했던지 네덜란드 국왕 빌럼 2세는 아편전쟁의 경과를 일본 측에게 전하고 개국을 권유하기도 했습니다만 에도 막부는 가뿐하게 씹어주셨습니다 -_-

 <네덜란드 국왕 빌렘 2세, 신경 좀 써주려다가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_-;>

일본은 중국과 자신들은 다르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일단 섬나라니까 안심했던 측면도 없지 않아 있지요. 하지만 불안은 서서히 다가왔고 확실히 현실이 되었습니다. 일본 앞바다에 4척의 검은 배가 출현한 것입니다.

 <에도만에 상륙하는 페리제독의 쿠로후네(흑선)>

http://blog.naver.com/philosophy78?Redirect=Log&logNo=130054628419&jumpingVid=4D1509A929A6713F241077E9C9BFDF19CC52(쿠로후네의 모습을 그린 일본 사극)

일본에 열강들의 증기선이 나타났던 건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일반 사람들이 많이 사는 에도(도쿄) 앞바다에 증기선이 나타났던 것은 처음이라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당시 이 흑선을 이끌었던 페리제독은 일본에 개국과 통상을 요구했습니다. 막부는 1년 간의 시간을 달라 요구했고 미국은 알겠다면서 1년의 유예기간을 주고 철수합니다. 1년의 시간을 얻으면 뭔가 대책을 강구해야 할텐데 설마 진짜 다시 오겠어? 라는 생각이 막부를 지배했습니다. 여러분이랑 비슷하죠? ^^;; 하지만 미국은 약속을 칼같이 지켜 1년뒤인 1854년 7척의 흑선을 거느리고 에도 앞바다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막부는 흑선에 위용에 겁을 집어먹고 결국 불평등조약인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드디어 일본이 개국한 것입니다.

처음 미국의 관계에서 불평등 조약을 맺었던 일본은 이후 다른 나라들과도 불평등 조약을 맺었습니다. 최혜국 대우와 치외법권 등 안 좋은 조건은 다 붙었죠. 이런 조약 아래서 다른 열강들과 장사를 하니 제대로 될리가 있겠습니까? 무역은 만년 적자에 물가능 폭등했습니다. 모든 비난의 화살은 막부에 퍼부어졌으며 일반 백성들의 열강들에 대한 적개심이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왕을 높이고 서양 오랑캐를 몰아내자!

이때 이런 분위기를 이용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존왕양이파입니다. 말이 좀 어렵지요? 이제부터 선생님과 함께 존왕양이가 무슨 뜻인지 알아봅시다.

<메이지 천황, 메이지 천황 이전까지 일본 천황에게 실권은 없었다>

존왕이라는 것은 왕을 존중한다는 것, 즉 일본의 최고 통치자인 천황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아니 근데 최고 통치자인 천황을 뭐하러 더 높인다는 겁니까? 그 이유는 천황이 실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1185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이후부터 무사들이 막부에 모여서 정치를 하던 나라였습니다. 즉, 실권은 천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사들의 집단인 막부에 있었습니다. 막부의 최고 권력자인 쇼군이 사실상 일본 전체를 통치하고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천황은 그냥 일개 허수아비였지요.

존왕양이파들은 막부가 잘못된 정치를 했기 때문에 일본 상황이 힘들다고 판단하여 실권을 다시 천황에게 돌려주자는 운동을 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존왕입니다. 

그렇다면 양이는 무엇일까요? 양이는 더 쉽지요. 서양 오랑캐라는 뜻으로 서구 열강을 배척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양이는 생각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지 한번 볼까요?

<존왕양이파의 대표였던 조슈와 사쓰마의 위치>

당시 존왕양이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곳이 바로 조슈번과 사쓰마번이였습니다. 이 번이라는 것은 지방 영주를 뜻하는 것으로 조그만 나라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좋아요. 조슈와 사쓰마는 상대적으로 에도(도쿄)에서 먼 거리에 있어서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힘을 키웠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강력하게 양이를 추진하여 서구 열강들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때 가볍게 서구 열강들에게 발렸습니다-_-; 힘의 차이를 느낀 조슈와 사쓰마는 양이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서양의 기술을 배우는 것으로 선회했습니다. 

막부를 토벌하고 왕정이 복고되다

자, 그렇다면 존왕과 양이 중에 존왕만 남았네요? 그렇다면 존왕을 하게 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할까요? 천황에게 실권을 주면 간단하죠? 하지만 실권은 막부가 가지고 있지요. 그렇다면 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막부를 토벌하자! 도막파는 이렇게 결성됩니다.

<바람의 검심에 토막파의 암살자로 묘사되는 켄신>

토막파들은 결국 막부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그들이 원하던 존왕을 성공시킵니다. 드디어 막부가 무너지고 명실공히 일본의 최고 실질적 통치자는 천황이 됩니다. 

<교토에 있던 메이지 천황이 에도로 향하면서 왕정복고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http://club.cyworld.com/ClubV1/Home.cy/52945471(대정봉환)
http://blog.naver.com/philosophy78?Redirect=Log&logNo=130054628484&jumpingVid=D3B8E05174B9246F0780D3B32D2F617EC61B(천황의 나라, 일본)

하지만 천황이 실질적 통치자가 되었을까요? 잉? 아니죠. 천황이 왕정복고에서 어떤 역할을 했나요? 아무것도 없죠. 실질적인 역할을 토막파가 모두 맡아서 했으며 이 토막파들은 천황을 전면에 앞세우고 실질적은 정치는 자신들이 행하게 됩니다. 이러나 저러나 천황은 실권이 없게되네요. 

메이지 유신

아무튼 토막파는 천황을 중심으로 내세우면서 대규모 개혁을 단행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입니다. 메이지 유신은 서양을 따라잡겠다는 일념하에 시행되었던 개혁으로 주로 식산흥업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식산흥업이란 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서양의 산업화를 따라잡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더불어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여 이때까지 자신의 지역에서 왕처럼 행세하던 지방 영주들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아 중앙으로 일원화 시킵니다.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일본의 급진 사무라이들>

또한 서양이 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한 것을 따라잡기 위해 신분제 철폐를 단행하고 백성에게 국민 교육과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부과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서양을 급히 따라잡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실질적으로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도입했다고 생각한다면 곤란합니다. 

이외에도 외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이와쿠라 사절단을 파견합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불평등조약의 개정이라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으나 서양문물을 2년 동안 충분히 체험하여 일본의 근대화를 이끄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와 대외팽창, 기묘한 동거관계

우리는 민주주의 하면 보통 평화적인 것으로 알고있지요? 하지만 메이지 유신 시기에 일본의 민주주의는 그다지 평화적이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시기 일본은 서양 나라들과 불평등한 조약 때문에 대외무역에서 큰 적자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 밖으로 뻣어나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그 나라의 재물을 빼앗고자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 훗카이도가 일본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지금의 오키나와였던 류큐 왕국이 일본에 병합됩니다. 또한 타이완을 침략하기도 하는 등 대외 팽창에 온 힘을 모두 기울였지요.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이 대두한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 그의 주장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이여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재밌는 것은 대외팽창을 꾀하던 시기 일본은 민주주의 기본이 틀이 잡혔다는 것입니다. 헌법이 만들어지고 의회가 만들어졌는데 그렇다면 왜 일본은 대외팽창과 민주주의 동시 발전이라는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일본의 민주주의는 어디까지나 서구의 제도 겉모습을 흉내냈다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서구를 빨리 따라잡기 위해 서구 제도를 가져오긴 했지만 그것이 서구의 민주주의처럼 원활하게 운영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형적으로 천황 1인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명령 체계를 더 일사분란하게 하는 데 그 의미가 있었습니다.

천황에게 집중된 권력 좋기만 한걸까?

일본은 대일본 제국 헌법을 만들면서 모든 권력을 천황에게 집중했는데 과연 이것이 천황에게 좋기만 했을까요? 헌법을 만들 당시 왜 천황에게 권력을 집중시켰는지 생각해보고 이를 통해 토막파들이 얻으려고 했던 점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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