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4) 근대 국가 건설을 지향하다
4-1 개화사상은 어떻게 형성·발전 하였을까? 


북학론, 개화사상의 뿌리가 되다

한 시대를 주름 잡았던 사상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상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자극을 주었던 다른 사상이 있고 시대 환경이 그 사상을 만드는 것이죠. 개화사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이 일본과 서구에 문을 열었던 그 시기에 개화사상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고 이전부터 개화 사상의 뿌리가 되는 사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북학론이었습니다.

북학론은 청과 적극적인 교류를 주장하던 사람들이였습니다. 당시 청에는 많은 서양 선교사와 서양 서적들이 있었는데 이것을 통해 북학파 실학자들은 자연스럽게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됩니다. 천주교도 그렇게 해서 들어오게 된 것이구요. 

<정약전의 영정, 그는 천주교 신자였다. 서양 서적을 공부하다 신자가 된 사례다>

이처럼 청과 교류를 주장했던 사람들은 서양 문물도 같이 접했고 또한 그런 사상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전파하면서 개화사상까지 이어져오게 됩니다. 하지만 개화사상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이런 양반들 보다는 중인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오경석은 역관 출신으로  청에 일찍부터 드나들면서 청의 사정과 서양문물에 대해 남들보다 일찍 눈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중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힘이 없었고 대신 양반 자제들을 뽑아 가르치기로 결심합니다. 또한 이런 이들의 개화사상에 공감한 양반이 있었으니 그니 북한론을 주장했던 박지원의 손자였던 박규수였습니다.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 이 세 사람이 함께 개화사상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서양의 나라와 역사를 소개한 해국도지, 유럽나라의 모습을 그린 부분이다>

이들은 주로 해국도지, 영환지략이라는 새로운 책을 통해 서양의 지리와 문물, 역사를 접하고 당시 국제 정세와 서양에 대해 남들보다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양의 침략에 맞서려면 하루 빨리 개항을 하여 서양의 발달된 기술을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표적인 통상개화론자인 박규수 역시 어디까지나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을 뿐입니다. 즉, 유교적 원리는 지키면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얘기였지요. 뭐 그래도 기존의 유학자보다는 훨씬 더 개방적인 인물이었다고 봐야겠습니다.

개화파가 형성되나 개화의 방법을 서로 달리 생각하다

어찌되었든 간에 개화사상을 가진 이 세명 밑으로 상당히 똘똘한 양반 자제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바로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으로 나중에 조선의 개화를 이끌어갈 주역으로 성장하는 사람들이죠. 주로 박규수의 사랑방에 모여서 당시 정세에 대해 토론해나가며 조선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모색했습니다.

 <박규수 집터에 있는 백송, 이곳에서 개화파 인물들이 꿈을 키웠다>

특히 김옥균은 벼슬길에 나서면서 일본에 조사 시찰단으로 파견되었는데 그곳에서 서양 기술 뿐만 아니라 사상과 제도까지 받아들일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이런 사상을 문명개화론이라 부릅니다. 주로 김옥균과 같이 동문수학했던 박영효, 서광범 등은 김옥균의 입장에 대체로 동의했습니다.

반면 이들과 다르게 개화를 모색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으로 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들입니다. 이들은 청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유교 논리를 고수하며 서양의 기술만 받아들이고자 했는데 이를 동도서기론이라 합니다. 개화 방법에 있어서 두 가지 입장차이가 나타난 것입니다.

문명개화론을 주장하는 입장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범으로 삼아 근대적인 사상과 제도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했습니다. 또한 임오군란으로 청국의 영향력이 강해진 시점에서 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청과의 사대관계를 폐지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생각이 달랐는데 그들은 청이 조선이 개화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존재이며 서양의 사상과 제도까지는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입장차이는 서로 다른 당파 성립으로 이어졌습니다. 급진개화를 주장하는 김옥균 일파는 자신들을 개화당 또는 독립당으로 부르고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는 김홍집 일파를 수구당 또는 사대당으로 불렀습니다. 이들의 갈등의 골은 깊어져만 갔습니다. 

왜 하필 사랑채야?

여러분 박규수 사랑채에 모여서 당시 조선의 정세에 대해 얘기를 하곤 했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왜 하필 사랑채에서 얘기를 했을까요? 이번 기회에 한옥의 구조에 대해서 조금 알아보는 시간을 수업시간에 가지겠습니다. ^^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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