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3) 개화 정책의 추진과 반발
3-1 정부, 개화 정책을 추진하다
3-2 보수적 유생층,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다 


조선, 근대를 위해 노력하다

조선은 강화도 조약과 서구 열강과의 협정 체결로 인해 서서히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보통 여러분이 개화 하면 기타 다른 나라와 교류를 하는 것만 생각하지만 개화의 본질은 거기에만 있지 않습니다. 제도, 기술, 의식 등 모두 다 근대화를 시키는 것이 바로 개화입니다. 여기서 근대화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서구 열강처럼 되자는 의미가 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식 같은 것들은 바로 서구 사람들처럼 바뀔 수 있을까요? 그러기 힘들겠죠? 그래서 우선은 제도와 기술을 배우기 위해 노력합니다. 먼저 제도 변화에 관한 부분 부터 살펴봅시다.

먼저 기존의 의정부와 6조가 있었던 제도는 사라지고 근대적 행정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새롭게 설치했습니다. 이 통리기무아문은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참고하여 만든 것입니다. 통리기무아문 밑에는 실무를 담당하는 12사를 설치했습니다. 그러니까 의정부-6조 시스템이 통리기무아문-12사 시스템으로 바뀐겁니다. 이해되죠? 

<신식 군대인 별기군, 일본인 교관에 의해 훈련되었다>

제도 중에서 이 시기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뭐니뭐니 해도 바로 군사제도입니다. 힘을 키우지 않으면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에게 먹혔던 시대이기 때문에 강한 병사를 갖는 것은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조선의 중후기 군사제도는 5군영 체제였는데요. 이 5군영을 무위영과 장어영 2군영으로 축소시키고 대신 신식 군대를 따로 양성했는데 그것이 별기군입니다. 그러니까 2군영은 구식군대, 별기군은 신식군대입니다. 별기군은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여 신경을 써서 가르쳤습니다. 

가까운 나라는 어떠한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던 근대화는 기본적으로 서구를 따라잡고자 했던 것이기 때문에 진짜 근대화는 어떤 모습인지에 대한 모델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 다른 나라를 보고 배우고자 하는 사절단이 유독 많이 파견되었는데요. 그 중에서 조선은 특히 서구 열강 보다는 옆 나라인 청과 일본을 보고 근대화가 무엇인지 가늠해보고자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도 조선의 근대화 과정이 상당히 특이한 것임을 느낄 수 있죠?

조선은 개항이 늦은 만큼 이미 개항을 하여 서구 열강을 따라잡고자 했던 청, 일본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서구 열강보다는 청과 일본의 영향이 지대했습니다. 그래서 일본과 청 두 나라는 적극적으로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시키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조선도 자연스럽게 이 두 나라를 통하여 근대 문물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태극기, 제4차 수신사 때 박영효가 제작한 것이다>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에 끊어졌던 사절단이 다시 파견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수신사입니다. 기존의 통신사가 우리나라 문물을 전파했던 역할이 있었지만 수신사는 반대로 근대화된 일본의 모습을 배우러 간 것입니다. 또한 새롭게 신설된 기구인 통리기무아문에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일본을 배우고자 조사 시찰단을 파견했습니다. 청을 배우기 위해서는 영선사를 파견했습니다. 주로 서구의 근대식 무기 제조와 군사 훈련을 배우고자 했는데 돈이 없는 관계로-_-; 1년만에 돌아왔습니다. 돈은 없어도 열심히 듣고 배운 것은 있는지 근대식 무기 제조 공장인 기기창을 귀국 후에 만들었습니다.

위정척사 한심한 운동일까?

이렇게 정부에서 여러 방향으로 개화를 모색하고 있을 때 유생층들은 이런 정부의 움직임을 달갑게 보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서양의 학문과 문하를 사(邪:간사할 사)한 것으로 보고 이를 배척하고 정(正:바를 정)한 성리학을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음, 여러분의 입장에서 굉장히 한심해 보일 수도 있겠네요. 그렇죠? 그런데 과연 이들의 주장은 한심한 것이 었을까요? 
 

<이차돈의 순교화, 새로운 문화가 들어올 때 저항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나라 불교가 들어왔을 때 아무런 저항없이 들어왔나요?  아니죠? 이차돈의 순교 전설도 전하고 영주 부석사 창건 설화에도 알 수 있듯이 불교가 처음에 전해 질 때 토착세력들의 반발이 거셌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위정척사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반발이 일어났던 것 뿐입니다. 하물며 근대화라는 것은 폭력성을 수반하는 것인데 아무런 저항없이 그대로 수용되었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한심한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자, 그러면 위정척사 운동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봅시다. 위정척사운동은 시대 상황에 따라 총 세가지로 구분됩니다. 1860년대에는 아직 조선이 개항을 하지 않았을 때였고 두 번의 서양 세력의 침략이 있었을 때였습니다. 따라서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했던 사람들은 통상 수교를 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1870년대에는 우리나라가 강화도 조약 체결해서 개항을 했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위정척사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강화도 조약 체결을 주도했던 일본을 서양 오랑캐와 같이 취급하면서 왜양일체론을 폅니다. 특히 최익현등의 글을 보면 개항의 문제점과 조선 산업의 취약성을 꼬집고 있어 위정척사운동파들이 무턱대고 개항에 반대만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한 최익현, 그는 정말 대쪽같은 선비였다>

1880년대에는 조선책략이 유행하던 시기로 이 책에 대해 유생들이 대규모 비판을 가합니다. 영남만인소라는 상소문이 올라와 정부 개화 정책을 비판하며 서양과 수교에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특히 조선책략에 가한 위정척사파들의 반박은 새겨들을만한 충고였습니다.

나중에 위정척사운동은 항일의병운동으로도 이어졌습니다. 위정척사운동은 구체제를 옹호했던 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운동이라 한계가 명확한 것이긴 했지만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성을 간파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박정양과 홍영식이 추구하던 이상적 개화모습은?

교과서 125페이지에 사료 읽기를 보면 박정양과 홍영식의 개화사상이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료를 읽고 두 인물이 지향했던 개화를 청과 일본의 사례에서 하나씩 찾아보는 시간을 가질게요 ^^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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