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원 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국가의 프린트입니다. 주로 내용 요약 정리에 해당됩니다. 열공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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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
3) 삼국, 교류와 경쟁 속에서 발전하다
3-3 삼국 간의 항쟁, 최후의 승자는 신라

17:1의 전설을 쓰다

자, 벌써 삼국통일까지 왔네요. 이제 삼국이 어떻게 통일 되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성장을 했던 시기는 중국의 5호 16국 시대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중국에 수많은 나라들이 난립하면서 서로가 자기 잘났다고 떠들어대던 시기였습니다. 자기들끼리 치고박고 싸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고구려, 백제, 신라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삼국은 이 틈을 이용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죠.

<미자, 옥자, 말자, 숙자... 이건 장난이고 수많은 나라가 난립한다! 결국 지도는 걸레가 된다>

하지만 드디어 5호 16국의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한 왕조가 나타났으니 그것이 바로 '수'입니다.(589년, 수가 중원을 통일함) 중국에 통일왕조가 출현하면 필연적으로 주변에 있는 나라는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중국은 자신이 늘 천하의 중심을 자처했으므로 중국 왕조가 통일되면 주변의 국가들과의 충돌은 피할수가 없게 됩니다. 특히나 고구려 같은 깡패국가는 중국이 보기에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지요. 따라서 중국 통일 왕조였던 수나라는 고구려를 제압하고자 했습니다. 수는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 새롭게 한강 유역을 차지했던 신라와 연합을 합니다. 이것은 뒤이어 일어난 당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중국과 신라의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고구려는 돌궐, 신라에게 배신당한 백제, 백제와 친한 왜와 손을 잡았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십자외교로 동서지연과 남북진영의 대립은 이제 현실이 되었습니다.


 
<동서진영과 남북진영이 십자형으로 들어섰다해서 십자외교라 불린다>

동서진영과 남북진영의 심화되면서 고구려에는 전쟁 위기가 고조됩니다. 전쟁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먼저 수나라의 요서 지역에 선빵을 날립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현이 남기신 유명한 말이 있다. 선빵은 필승!>

고구려의 선빵에 놀란 수나라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달달 긁어모아서 113만에 이르는 대군을 조직했습니다.

<고구려야 형 왔다. 딱 10초 준다. 항복해라>

하지만 고구려는 대단한 깡패였습니다. 고구려는 깡패 중에 깡패였던 을지문덕 장군을 출동시켰고 을지문덕 장군은 살수에서 수의 군대를 싸그리 몰살 시켰습니다. 이때 살아서 돌아간 자는 2700명에 불과했다고 중국 사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17:1의 전설을 만들어낸 고구려, 다 덤벼라!>

엄청난 물량을 쏟아붇고도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못한 수나라는 결국 자신이 먼저 멸망하고 맙니다. 수가 망한 뒤를 이은 나라가 바로 당나라 입니다. 당나라는 수가 망한 것을 거울 삼아 처음에는 고구려에게 우호적으로 접근했습니다. 하지만 당태종이 즉위하면서 고구려를 적극적으로 공격하겠다는 뜻을 드러냈습니다.

고구려는 이에 대비하여 요동에 천리장성을 쌓고 전쟁에 대비했습니다. 당 태종은 고구려를 공략하기 하기 직접 군사를 공격했지만 결국 안시성에서 고구려에게 패배하고 맙니다.

<당의 고구려 침입 경로>

고구려는 이처럼 중국에 침입을 훌륭하게 막아냄으로써 결과적으로 백제, 신라까지도 보호하는 이른바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파도 심하면 둑이 깎여 나가듯 수, 당과의 전쟁으로 인해 고구려의 국력은 크게 약해지기에 이릅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무너지다

고구려가 수, 당과 치열한 싸움을 할 동안에 신라는 백제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나라가 큰 위험에 처했습니다. 결국 백제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내고자 김춘추를 보내 고구려에 접근했으나 고구려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싸늘했습니다. 과거 고구려의 땅이었던 곳을 내놓지 않으면 동맹을 맺어줄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결국 라는 백제를 무너뜨려줄 파트너로 당을 골랐습니다. 당 역시 계속된 고구려 공략 실패로 돌파구가 필요했기에 신라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로써 나-당 연합군이 결성되었습니다.

나-당 연합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백제는 지배층 사이의 내분과 의자왕의 실정으로 이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계백이 이끄는 5천의 결사대가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고 백제가 멸망했습니다.(660)


<백제의 마지막을 다룬 영화, 황산벌>

백제가 멸망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의 제2의 타겟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초유의 깡패국가!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멋지게 막아냅니다. 그러나속된 전쟁으로 국력은 쇠퇴하였고 권력을 혼자 독점했던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고구려 지도층은 구심점을 잃고 분열을 하였습니다. 결국 고구려는 668년에 재침입한 나-당 연합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고구려와 나당연합군 간에 전쟁을 그린 영화 평양성>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저는 야구를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뉴욕 양키스의 선수였던 요게 베라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저는 이 말이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직후에 신라에게 해당된다고 봅니다. 백제, 고구려가 멸망했지만 당나라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신라에게 대동강이남의 땅을 준다는 약속을 어기고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 고구려 땅에 안동도호부, 신라 땅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땅 모두를 통치하겠다는 야욕을 보였습니다. 신라는 속고 말았던 것이죠. 아마도 백제 성왕의 저주가 아닌지?;;

<믿지 말라니까 그러네... 자기가 속이고 나서 당하냐?>

더욱이 신라를 괴롭혔던 것은 백제, 고구려가 멸망당한 이후에도 잔존세력들의 끊임없는 부흥운동이었습니다. 특히나 백제 지역의 부흥 운동은 워낙 거세서 다시 한 번 나-당 연합군이 나서서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백제 부흥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백제 부흥운동은 신라가 적극적으로 진압했지만 고구려 부흥운동을 달랐습니다. 어차피 고구려 지역을 모두 수복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한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뒤에서 도와주어 당군을 몰아낼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나라는 당나라 나름대로 고구려의 마지막 보장왕을 조선왕에 봉하며 고구려 유민을 회유하고자 했지만 고구려를 부흥하려는 움직임을 멈추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는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당나라의 야욕에 맞설 결심을 하고 고구려, 백제 유민을 규합하여 당에 대항했습니다. 매소성에서 당의 20만 대군을 대파하고 기벌포에서 당의 수군을 물리침으로써 신라는 당나라를 이 땅에서 몰아내고 마침내 삼국통일을 달성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보였던 나당 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돌아갔다>

보통 신라의 통일 업적에 대해서는 모두 잘 아실 것 같습니다. 뭐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한계가 있으나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어쩌구 이런 말이 있는데 저는 구태여 그런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 다만  신라는 당시 시대 상황에 최선을 다한 행동을 보여준 것이고 또한 신라가 마지막에는 당군을 스스로 몰아냄으로써 대동강 이북 지역에 일종에 힘의 공백 상태를 만들어내었다는 점을 놓게 평가하고 싶네요. 이 때문에 발해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국가
3) 삼국, 교류와 경쟁 속에서 발전하다
3-4 활발한 문화 교류를 통해 발전한 삼국

같은 말을 쓰면 하는 생각도 비슷해진다

삼국과 가야는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진 특징은 한자를 받아들이고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특징인지 잘 모르시겠다면 대답해드리는 것이 인지상정! 지도를 보시죠.

<색칠한 부분이 한자문화권, 동북아공동체가 논의될 수 있는 바탕은 한자에 있다>

한, 중, 일 삼국은 겉으로 볼 때 서로 상당히 다른 문화를 공유하고 있지만 대신 이 삼국이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한자문화권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한자를 사용했던 것으로 나타나지만 삼국시대 때 활발히 중국문화를 수용하면서 한자 문화가 단단히 뿌리내리게 됩니다.

<광개토대왕비의 한자, 한자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이 정도 글을 써내기가 불가능하다>

이로써 한자를 기반으로 한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중국에서 들어오는 학문과 종교를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됩니다. 사람이 같은 말을 쓰면 사고가 비슷해진다고 하듯이 우리나라는 한자의 영향으로 인해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삼국간에 교류 양상을 보면 고구려는 자리 잡은 위치로 인해 북방 민족, 서역, 북중국의 나라와 교류하였으며 백제는 뱃길을 통해 주로 남중국, 왜와 교류하였습니다. 신라는 처음에는 중국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서 고구려를 통해 중국과 교류했지만 이후 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직접 중국과 교류할 수 있게되었습니다. 가야는 백제처럼 뱃길을 통해 중국, 왜와 교류하면서 철기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신라에 정복당한 뒤에는 신라 문화 형성에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삼국의 서로 다른 문화>

삼국은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다른 문화를 향유해온 것 같지만 알고보면 세 나라가 교류도 많이 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신라에 불교를 전해주었고 백제는 건축가를 보내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인 황료사의 9층 목탑을 건축하는데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삼국은 모두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기와나 반가상 같은 비슷한 형태를 보이는 예술품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열린 고대

보통 고대를 열린 시대라고 말을 많이 합니다. 이 말 뜻은 상대적으로 폐쇄적이었던 조선, 명,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비해 이때는 동북아시아의 나라들이 아주 멀리 떨어진 국가와도 교류를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로 고구려 사신이 중앙아시아의 도시 중 하나인 사마르칸트 벽화에 등장하기도 하고 신라에서는 동로마제국의 유리병인 로만 글라스가 수입되기도 했습니다.

<사마르칸트 지역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사신(위)와 경주에서 출토된 유리 봉수병>

이처럼 이 시기 역사는 한반도에만 국한해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국제적인 문화 흐름이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 지금 세계화하고 있지만 이 시기 이미 세계는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

일본과 한국의 나라들, 깊은 관계를 맺다

앞서 고대가 열린 고대라고 말씀드렸죠? 이 시기에 먼 나라와의 교류도 활발했지만 가까운 나라와의 교류는 그 보다 훨씬 더 활발했습니다. 특히 일본은 삼국과 가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발전을 했습니다. 

삼국 중 일본과 가장 친했던 백제는 유교와 의학, 천문과 역법을 전해주었고 불교와 더불어 불상 조각, 건축을 전파함으로써 일본 고대 문화 중 하나인 아스카 문화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고구려 역시 불교, 회화와 같은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었습니다. 특히 고구려의 승려인 담징은 5경과 종이, 먹을 전달해주었고 호류지의 금당벽화를 그려주기도 하는 등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 다른 고구려 승려 혜관은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기도 했습니다. 신라는 조선술과 축제술(먹고 노는 기술이 아니라 둑이나 제방을 쌓는 기술을 뜻해요 ^^)을 전파했습니다. 가야는 일본의 토기인 스에키에 영향을 주었으며 가야의 철이 일본에 수출되어 일본에서 철기 문화가 발달하는데 영향을 주었답니다. ^^

<백제 건축자들이 만든 호류지(법륭사, 위)와 담징이 호류지 금당에 그린 벽화(아래)>

자 여기까지는 교과서에서 전하는 얘기. 하지만 고대 한-일 관계를 단순히 이렇게만 파악할 수 있을까요? 한국은 늘 문화를 일방적으로 전파하는 쪽이었을까요? 

<위는 우리나라 광주에서 발견된 일본양식의 무덤, 아래는 일본에서 발견되는 무덤>

<왼쪽 위는 백제 고분군에서 나온 신발과 왼쪽 아래는 일본에서 출토된 신발, 오른쪽 위는 신라의 말안장과 아래는 일본에서 출토된 말안장>

위에서는 보는 것처럼 일본과 비슷한 형태의 유물이 우리나라에서 다수 출토되고 있지만 대다수는 근, 현대 일본과의 좋지 않은 추억 때문에 이런 유물들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역사를 마주 대하지 못하겠지요? 어쨌든 이런 유물이 출토된다는 것은 일본과 한국 간에 보다 긴밀한 관계가 있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해서 일본이 한국의 남방 영토를 점유했다는 임나일본부설, 남선경영설이 신빙성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 한국과 일본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는 관계가 아니 서로 밀접하게 연관이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모두 잘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네요 ^^

말과 풍습이 달랐던 백제

중국 역사책에 보면 백제에 관한 재밌는 기록이 보입니다. 백제 지배층과 지배를 받는 피지배계층 간에 언어가 다르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또한 백제는 삼국 중에 가장 많은 무덤 양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백제는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살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비추어 볼때 백제가 왜 멸망했는지에 대한 궁금증 중 하나를 풀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위의 자료를 보고 백제가 멸망한 이유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 정답은 수업시간에 공개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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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
3) 삼국, 교류와 경쟁 속에서 발전하다
3-2 삼국 간의 상호 항쟁이 본격화되다

싸움을 하기 전에 헬스를 해 몸의 근력을 키우자!

지난 시간까지는 삼국이 어떻게 고대국가로서 기틀을 잡아가는 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삼국 간에 치열했던 항쟁에 대해서 배워 봅시다.

<테크트리 올리고 발전을 했으면(위) 전쟁을 하는 건 당연지사!(아래)>

여러분이 좋아하는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에서도 보면 적과 싸우기 전에 먼저 발전을 열심히 하지요? 미네랄 캐고 가스 채취하고 건물 올리고 그래야지만 자신이 원하는 병력을 뽑을 수 있으니까요. 삼국 간의 항쟁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고대국가 기틀을 다지고 내정을 충분히 다진 뒤에 밖으로 뻗어 나가게 됩니다. 

이때 삼국이 내정을 다지는 와중에 공통적인 특성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바로 율령 반포와 불교 수용입니다. 율령 반포와 불교 수용은 고대 국가들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도대체 율령과 불교가 어떤 역할을 했기에 왕권을 강화하는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일까요? 이제부터 하나 하나씩 살펴보죠.

자 먼저 율령은 어떻게 왕의 힘을 강화시켜주었을까요? 국가를 원활하게 통치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바로 법입니다. 여러분들은 잘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살다보면 우리는 늘 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만 살고 있습니다. 

<법을 어기게 되면 우리는 감옥에 갇혀 사회와 격리됩니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현대와 같은 법이 존재할까요? 옛날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다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때 당시에도 법이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사용하는 법과 형태가 다를 입니다. 어떤 형태였는지 한 번 볼까요?

A라는 사람이 물건을 훔치다가 잡혔습니다. 그러면 마을에 나이가 많고 지혜로운 사람 앞으로 끌려갑니다. 이 사람을 B라고 해봅시다. B는 경험과 지식이 많으므로 이전에 마을에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는지 생각해보고 그때 이 같은 경우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참고하여 판결을 내립니다. 이러한 형태를 관습법이라 합니다.

관습법은 공동체 안에서의 약속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왕과 같은 권력자도 관습법을 따라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다면 왕의 말을 잘 따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맞아요. 왕의 말을 곧 법으로 만들어 기록하면 됩니다! 이것을 율령이라고 합니다.

율령에 대해서는 알아보았으니 이제 불교가 어떻게 왕권을 강화시켰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봅시다. 불교하면 종교 같은데 불교가 어째서 왕권을 강화시키게 되었을까요? 그 당시에는 선생님이 앞서 설명했던 애니미즘, 샤머니즘, 토테미즘, 천손사상 등의 신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수많은 종교가 난립하면 모시는 신의 수는 어떨까요? 천차만별이겠지요?

<온갖 잡신들이 판치는 세상이었던 고대>

하지만 불교가 유입되면서 이런 신들은 정리가 되기 시작합니다. 불교는 이런 토착신앙 보다 잘 짜여진 교리를 바탕으로 한 고등종교였습니다. 불교의 유입으로 인해 여러 많은 신들이 불교 안으로 흡수되었습니다. 이제 부처의 말씀만을 따르면 되는 상황이 도래하게 된 것이죠.

<불심으로 대동단결!>

왕은 불교가 온갖 잡신을 통합하고 부처 중심의 세상을 만들자 이것을 이용합니다. 즉, 부처를 국왕과 동일 선상에 놓는 사상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온갖 잡신들이 부처에 의해 통합된 것처럼 여러 귀족들이 국왕의 힘 앞에 통합되기를 바란 것이죠. 그리고 이런 국왕의 의도는 잘 먹혀 들어가 불교를 통해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하는데 성공합니다. 

또한 이 시기 국가들은 전성기를 맞으면서 독자적인 천하관을 내세우는데요. 그 증거로 대왕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거나 독자적인 연호 사용, 역사 편찬이 있습니다. 특히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것은 시간 마저 자국 왕을 중심으로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그 국가의 자신감을 나타내어 주는 좋은 증거입니다. 

이제 고대국가들은 율령 반포와 불교 수용을 통하여 내부에 축적된 힘을 밖으로 뻗어내기 시작합니다. 본격적으로 삼국항쟁의 막이 오른 것입니다. 그 치열했던 싸움의 현장을 만나러 가보시죠!

먼저 치고나가는 백제

고구려, 백제, 신라 중에서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것은 바로 백제였습니다. 저번 시간에 말했던 것처럼 백제는 나름대로 명당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삼국 항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정하게 됩니다. 백제는 율령 반포시기가 정확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대체로 근초고왕 때 율령 반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하는데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야말로 추측에 불과합니다. ^^; 

백제의 전성기를 주도한 왕은 근초고왕으로 남쪽으로는 한반도 남부의 큰 세력이었던 마한 전 지역을 통합했고 북으로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했습니다. 심지어 백제와 고구려의 싸움으로 고구려의 왕이었던 고국원왕이 죽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 만큼 백제와 고구려 간의 싸움이 치열했던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서울 석촌동에 있는 백제고분군, 현재 근초고왕의 고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진짜 그런지는 확실치 않다>

또한 백제에 관해서는 신기한 기록이 중국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백제가 중국에 자신의 군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 백제가 실제로 중국을 공략할만한 능력이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백제가 요서에 공략했다는 기록은 중국 남쪽 왕조 사서에만 편중되어서 나오기 때문에 그것 역시 고려해봐야할 점입니다. 최근 역사학자들은 백제 해상 무역왕국으로 중국의 요서, 산둥과 일본 규슈 지방을 연결하는 중심 국가가 아니었는지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고구려라는 깡패국가의 왕을 없앨정도로 잘 나가던 백제는 5세기에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왜냐구요? 그 분이 오셨습니다 ㄷㄷㄷ

<형왔다. 내 앞에서 다 버러우 타는거다>

그 분의 출현

고구려는 백제 전성기인 4세기 후반에 전연이라는 중국 왕조 중 하나에 해당되는 나라에 침입을 받고 백제의 공격으로 왕이 죽는 등 큰 위기에 빠졌습니다. 이런 큰 국가적 위기 상황에 소수림왕이 등극하게 됩니다. 소수림왕은 전연에 대항하기 위해 또 다른 중국의 왕국인 전진과 친교를 맺어 전연을 견제하기에 이릅니다. 

<5호 16국 시대 당시의 지도, 고구려는 전진과 친교를 맺어 전연을 견제하는데 성공했다>


바깥이 안정되자 소수림왕은 내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하여 인재를 인재를 기르고 율령을 반포했습니다. 또한 삼국 중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이때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아니었고 이미 민간에 퍼져 있는 불교를 공인해주는 수준이었을 걸로 짐작합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소수림왕은 이 같은 개혁 조치로 고구려 왕권은 매우 견고해져서 이제 귀족을 압도할 수준이 되었습니다.

<귀족들은 이 본좌 앞에서 망언을 할 수 없다!>

내치를 다진 소수림왕 이후 드디어 우리는 그분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다 아시죠? 바로 우리나라의 레전드 아니고 그냥 전설인 깡패. 광개토대왕! 중국, 백제, 왜, 가야, 부여 이놈저놈 가리지 않고 마구 패줍니다. 이때 고구려의 국력은 크게 확장됩니다. 교과서에 있는 지도를 참조해봅시다. ^^

광개토대왕 사후 주변 이웃 나라는 편할줄 알았더니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들인 장수왕은 중국과의 싸움은 멈췄지만 한반도 남쪽에 있는 백제, 신라만을 패야겠다고 결심하고 수도를 과감히 남쪽 평양성으로 천도(427)합니다.
 

<난 무조건 한놈만... 아니 두놈만 패!>

장수왕의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동맹을 맺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나제동맹(433)이고 나중에 결혼동맹으로 까지 발전합니다. 하지만 제가 고구려는 깡패국가라고 했지요? 중국도 막 패던 국가였는데 백제, 신라가 편먹는다고 해서 뭐 어쩔 수 있겠습니까? 가볍게 발려주시고 백제는 급기야 한강유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수도였던 한성이 함락되고 왕이 죽는 참사가 일어납니다. 백제는 부랴부랴 웅진으로 천도(475)했지만 한 동안 고구려의 기침소리에도 놀래야만 했습니다.

믿을 놈 하다 없다!

<고구려의 침략으로 인해 왕을 잃은 백제는 한 동안 쭈구리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침략을 받고 한동안 쭈구리 신세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백제는 서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안구에 습기차던 시절을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하는데요. 무령왕 시절에는 남쪽 중국 왕조와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국제 사회에서 그 위치를 인정받고 22담로를 두어 지방 통치 조직을 정비하였습니다. 백제가 본격적으로 다시 비상하기 시작하는 것은 성왕 시절입니다. 성왕은 그 동안 임시 수도 역할을 하던 웅진에서 넓은 벌판의 부여로 수도를 천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고치고 중앙에 관서를 22부로 재정비하고 불교를 적극 장려했습니다.

국력이 다시 강해진 백제는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슬슬 다시 넘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뭔가 찝찝하지요. 백제 혼자서 고구려를 당해낼 자신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를 치기 위해 신라와 협력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한강 하류 지역은 백제가 한강 상류 지역은 신라가 차지하기로 하늘땅 별땅 약속을 했지요. 하지만...

<여성분들이 제일 믿지 말아야 하는 말이다 ㅠ 백제에게는 신라 믿지?가 여기에 해당된다>

세상에 믿을 놈이 하나도 없습니다. 신라가 아주 상큼하게도 배신을 때려줍니다. 바로 진흥왕은 과감하게 백제와의 약속을 깨고 한강 하류마저 점륭하면서 한강 유역을 다시 신라가 차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신라는 언제 이만큼 힘을 키운걸까요? 우리가 아는 신라는 매우 조그마한 나라로 광개토대왕이 겨우 목숨 구해준 걸로 아는데 그 동안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시골 촌놈이 드디어 성공하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비해 고대국가 발전이 가장 느린 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라는 나라가 동남쪽으로 치우쳐 있을 뿐아니라 그나마도 소백산맥으로 가로 막혀 있어서 외부에 자극을 받아들이기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만큼 족장의 세력이 매우 오래 남아있었습니다. 이런 신라가 본격적으로 나라가 말전하는 것은 지증왕때입니다. 지증왕은 지방 제도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적 국가가 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활발한 정복산업을 벌여 이사부를 시켜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마립간이라 불리던 왕의 칭호도 세련되게 중국식으로 '왕'으로 고쳤습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뉴요커의 트렌드에 따라간거죠.

<울릉도와 독도는 이때부터 우리나라 역사에 편입되었다>

법흥왕 때는 신라는 더욱 발전을 하게 됩니다. 이때 율령이 반포되면서 왕은 다른 귀족보다 더 우월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왕은 귀족회의에 최고 대표자가 되지 않게 됩니다. 이제 귀족회의의 최고 대표자는 상대등이 됩니다. 또한 병부가 설치되면서 통치 체제가 정비되고 우여곡절 끝에 불교가 공인 되면서 신라는 통합의 길로 나아갑니다. 또한 오랜 숙원 산업이던 금관가야를 병합하면서 영토가 더 넓어지게 되지요.

진흥왕 때는 법흥왕 때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앞서 말했던 것처럼 백제와 연합을 하여 한강 상류를 차지한 뒤 백제를 배신하고 한강 하류마저 빼앗는 쾌거를 이룩하게 됩니다.

<이순재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열연했던 진흥왕, 미실에게 독살당할 만큼 허접한 왕은 아니었다>

한강 하류를 빼앗긴 성왕은 정말 화가 났습니다.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건 개로왕이 고구려에게 패배하여 죽은 이후 오랜 숙원 사업이었으니까요. 성왕은 다시 한 번 군사를 모아 쳐들어가지만 안 될놈은 안 된다고 그만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포기하면 편할텐데 안 될놈은 뭘 해도 안 된다, 안습의 성왕>

어쨌든 진흥왕의 정복사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대가야를 정복하여 마침내 가야연맹이 멸망했으며 함경도 지역 일부까지 진출합니다. 원래 잘 나가면 자랑을 하고 싶기 마련이지요? 진흥왕도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인증'을 하기에 이릅니다.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 순수비를 통해서 자시느이 업적을 자랑하고 인증한 것이죠.

<진흥왕이 부릅니다. 나 이런 사람이야!>

신라는 이후 한강 유역을 바탕으로 드디어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인적, 물적 자원을 확충해서 삼국 항쟁에서 주도권을 차지하였습니다.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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