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
4) 남북으로 나뉘어 발전하다
4-2 발해의 건국과 발전

고구려 옛 땅에서 고구려의 뜻을 이은 나라가 일어나다

오늘은 발해의 역사를 배워볼 차례네요. 발해의 역사는 현재 중국, 러시아, 한국 이 세 나라가 서로 자기의 역사라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관련된 영상 하나를 잠깐 보죠.


<한국의 입장에서 본 발해사>

위의 동영상은 한국의 입장에서 발해를 바라본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죠? 하지만 이 주장의 한 가지 헛점이 있는데 고구려마저 중국사라고 주장하면 다시 고구려사를 한국사라고 주장해야 되는 맹점이 있습니다. 실제 여러분의 예상대로 중국은 발해사에 이어 고구려사 마저 자국사로 귀속시키려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결국 계속 합의점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실제 존재했던 역사들이 왜곡될 위험이 있습니다.

사실 과거의 역사를 현대 어떤 나라의 역사에 귀속시킨다는 것은 참 웃긴 일입니다. 과거에 존재했던 나라들이 현대의 나라와 얼마나 연관이 있고 우리가 자신들의 후손이라는 걸 알 수 있을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고구려인의 역사는 고구려인에게 돌려주자는 것입니다. 발해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소모적인 역사 점유 논쟁만 계속되면 훌륭했던 이 두 나라의 역사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참 슬픈일이죠. 정치적 입장 때문에 두 나라의 역사를 없애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발해의 역사는 어떤 모습일까요? 확실한 것은 발해는 고구려 옛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의 정신을 이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점입니다.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은 구당서에 따르면 고(구)려 별종으로 나오고 신당서에 따르면 속말말갈이 나옵니다. 하지만 대조영의 출신이 어떻든 간에 그는 고구려 사람으로 살았음은 분명하고 고구려를 계승하려 했음은 지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일본에 보낸 국서에도 발해의 왕은 고(구)려국왕으로 칭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제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네요. 발해는 고구려 뒤를 이은 나라이며 고구려의 정신을 간직한 사람들이 살았다고 말입니다.

발전하는 발해

발해는 건국 과정에서 당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면서 일어섰기 때문에 당과의 관계가 불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고구려를 멸망시킨는데 한 몫을 했던 신라와도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었지요. 발해는 주변이 적으로 둘러 쌓인 상황에서 무력으로 그 영역을 확장시켜 나갑니다. 특히 무왕 때는 흑수 말갈을 제압하고 과감하게 수군을 동원하여 당나라의 산둥 지방을 공격했습니다. 이쯤되면 뭔가 이미지가 떠오르죠?

<형 잊었냐? 나 고구려의 후예 거든?>

네, 깡패국가였던 고구려의 정신을 발해가 확실히 계승하고 있는 것이 보이죠? ㅋㅋ 하지만 언제까지 깡패로 살 수는 없는 법. 문왕 때는 과감히 손을 씻기로 결심합니다.

 
<문왕, 손 씻고 착실한 국가가 되기로 결심하다>

문왕은 험악했던 당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내실을 다져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받아들였습니다만 그것을 발해만의 독자적인 형식으로 운영했습니다.

 
 
 
 
 
 
 
 
 
 
황제
 
 
 
 
 
 
 
 
 
 
 
 
 
 
 
 
 
 
 
 
 
 
 
 
 
 
 
 
 
 
 
 
 
 
 
 
 
 
 
 
 
 
 
 
 
 
 
 
 
 
 
 
 
 
 
 
 
문하성
 
 
 
 
 
상서성
 
 
 
 
 
중서성
 
 
 
 
 
 
 
 
 
 
 
 
 
 
 
 
 
 
 
 
 
 
 
 
 
 
 
 
 
 
 
 
 
 
 
 
 
 
 
 
 
 
 
 
 
 
 
 
 
 
 
 
 
 
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










 
 
 
 
 
 
 
 
 
 
 
 
 
 
 
 
 
 
 
 
 
 
 
 
 
 
 
 
 
 
 
 
 
 
 
 
 
 
 
 
 
 
 
 
 
 
 
 
 
 
 
 
 
 
 
 
 
 
 
 
 
 
 
 
 
   
 
선조성
 
 
 
 
 
정당성
 
 
 
 
 
중대성
 
 
 
 
 
 
 
 
 
 
 
 
 
 
 
 
 
 
 
 
 
 
 
 
 
 
 
 
 
 
 
 
 
 
 
 
 
 
 
 
 
 
 
 
 
 
 
 
 
 
 
 
 
 
충부
 
인부
 
의부
 
지부
 
예부
 
신부









<위는 당나라의 3성 6부, 아래는 발해의 3성 6부. 발해는 실무기관인 정당성(상서성)에 권력이 집중되었다>

발해의 3성 6부는 당나라의 3성 6부와 다르게 실무기관이었던 정당성에 그 권력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당성 아래의 6부 역시 둘로 나누어 충, 인, 의는 좌사정에 속하고 지, 예, 신은 우사정에 속했던 것도 특이했던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왕 때 신라와의 친선 관계도 도모하여 사신을 교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라와의 관계는 발해 역사 내내 별로 좋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조금 더 다루어 보죠 ^^

발해는 9세기 초 선왕 때 들어가면 전성기를 맞는데 이때 신라와도 직접 국경을 맞대었으며 지방행정 구역도 5경 15부 62주로 정리가 됩니다.

<발해의 지방 행정 구역>

<전성기 발해의 강역도>

이렇게 발전을 거듭하는 발해를 보고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이 동아시아에서 장안 다음 가는 큰 도시라였던 걸 봐서는 발해의 국력이 어느 정도 인지 가늠할 수 있겠지요?

또한
발해는 오랜기간 동안 연호를 썼던 국가로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으며 비록 발해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왕으로 책봉 받기는 했으나 내부적으로 황제국가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외왕내제(外王內帝:바깥 외, 임금 왕, 안 내, 임금 제) 체제라 합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천손이라 칭하는 것을 보아서는 발해인들 스스로 큰 자부심을 가졌던 것이 여실히 보입니다.

발해의 멸망, 그러나 그들의 문화는 남았다

이렇게 잘 나가던
발해도 10세기 초에 거란에 의해 멸망 당하고 맙니다. 발해 멸망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는데 백두산 화산 폭발설, 귀족들 내분설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설득력을 얻고 있지 못합니다.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를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은 약 200년간이나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어느 운동 하나 성공하지 못하고 발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발해가 향유했던 문화는 아직 까지 남아 있습니다. 특히 배층의 문화였던 고구려 문화에 당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피지배층이 대부분 말갈족이었기 때문에 말갈 문화 요소도 뒤섞여 발해는 다분히 다문화적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위는 발해 집자리의 온돌(고구려 문화), 중간은 정효공주묘(중국식 전축묘), 맨 아래는 말갈계 토기가 섞여 있다>

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
4) 남북국으로 나뉘어 발전하다
4-3 남북국, 활발한 국제 교규를 통해 발전하다

남북국, 활발한 교류를 통해 국제 사회에 존재감을 알리다

남북국 시대에 남국이었던 신라, 북국이었던 발해는 활발한 교류를 전개했습니다. 특히 신라는 통일 이후 안정을 누리면서 당과의 교류를 다져나갔습니다. 어느 정도였나면 당과 자주 왕래하던 산둥 반도 지역에 신라 마을인 신라방과 신라촌이 세워졌으며 신라소라는 관청, 신라원이라는 절까지 세워졌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왕래가 자주 있었는지 짐작할만 합니다.

<산둥 반도 일대는 지금의 코리아 타운과 비슷한 곳이였을 것이다>

또한 신라는 당과의 교류에만 그쳤던 것이 아니라 동남아, 서역과도 활발한 교류를 전개했습니다. 특히 이슬람 서적인 지라학 총서에는 신라의 모습이 소개되기 까지 했습니다.

<이슬람의 지도에 신라는 섬나라로 묘사되어 있다. 신라 모습의 묘사에는 다소 과장이 섞여 있긴 하다 ^^>

또 신라의 국제 교류하면 이 사람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바로 해상왕 장보고! 그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당시에 국제교류를 주도했습니다. 이때 신라에서 들어오는 교역품에는 타슈켄트의 보석, 캄보디아와 보르네오 그리고 자바 지방의 모직물, 스마트라와 참파의 향료 등이었는데 귀족들이 사치가 심하자 흥덕왕이 교서를 내려 금지시킬 정도였습니다. 장보고의 청해진이 어느 정도로 국제 교역을 활성화시켰는지 알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위는 왕건이자, 장보고이자, 대조영인 그 분 ^^; 아래는 청해진 유적지입니다>

이제 발해의 교역을 살펴봅시다. 발해는 건국 초부터 꾸준히 일본과 교류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시 일본으로 가는 바닷길이 굉장히 위험함에도 일본과의 교류 관계를 유지하려 했는데 그 이유는 건국 초 당과 적대 관계, 신라와 적대 관게였기 때문에 신라의 배후를 위협할만한 세력을 찾기 위해 그 파트너를 일본으로 고른 것이었습니다. 물론 발해 생각처럼 일본인 움직여 주진 않았습니다. ^^; 이후 당과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유학생을 파견했는데 유독 신라와의 관계만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발해인이 당에 사신으로 갔을 때 신라인보다 상석을 요구한 경우가 있었고 당시 당에 유학간 유학생들이 치는 시험인 빈공과에서 발해와 신라는 라이벌 의식을 보이면서 서로 1등을 차지하려고 경쟁하였습니다.

<승부다! 너한테 만은 안 진다!>

하지만 늘 싸울 수만은 없었겠지요? 발해, 신라는 서로의 필요에 따라 교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증거로 신라도라는 무역로가 남아있습니다.

<발해의 5대 교통로>

고대의 교역과 현대의 교역은 어떤 점이 다를까?

이제 퀴즈를 한 번 풀어보지요. 고대 시절에도 교역이 활성했다는 것을 앞선 수업 시간에 배웠겠지요? 하지만
교역이 활발하다고 해서 그것이 현대의 교역과 같을까요? 대의 교역과 현대의 교역은 어떤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을 계급사회가 같는 특징과 결부시켜서 해석해봅시다. 정답은 수업시간에 공개되요 ^^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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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남북국으로 나뉘어 발전하다
4-1 통일 신라의 발전

남북국 시대?

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한국사는 본격적으로 남북국 시대로 접어듭니다. 그런데 가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 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럼 나라가 하나만 있어야지 왜 남북국시대죠? 적어도 남국과 북국이 있다는 소리인데 이게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_-!


<이것이 레알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이다>

흠, 사정을 한 번 들어볼까요? 바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수한 이후 동시대에 공존한 나라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나라는 고구려 유민 출신이었던 대조영이 세웠던 발해입니다.

<발해 지도>

남북국 시대라는 말은 발해 역시 한국사의 하나의 영역으로 간주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라를 남국, 발해를 북국으로 파악해 이 두 나라의 역사를 모두 한국사로 파악함으로써 한국사가 전개되었던 지역을 좀 더 넓게 보는 것이죠.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남북국이라고? 그럼 삼국통일하려고 이때까지 뼈빠지게 싸운 나는 뭐가 되냐?-_->

바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다는 의미가 자칫 퇴색해져 버리는 겁니다. 발해를 한국사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면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이라고 할 수 있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상당히 어색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통일하려고 당나라 끌어들이고 수많은 전쟁터를 누볐던 김춘추, 김유신 등은 조금 허탈해지겠죠? ^^; 따라서 역사학계에서는 이 용어를 가지고 논란이 있으며 아직 마땅한 대체어를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실제 그 당시 역사기록에도 신라가 발해를 북국으로 불렀던 것이 남아있는 만큼 남북국이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도 타당해보이며 한국사를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그 취지는 좋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초의 민족의식이 싹트다

신라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로서 민족의 통일을 이루어냈다고 평가합니다. 그렇다면 민족이란 무엇일까요?  이 부분을 하기 전에 여러분이 생각하는 민족의 정의는 무엇인지 묻고 싶네요. 우리가 민족하는 말은 많이 쓰지만 정작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가르키는지 모를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약간 오덕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그 의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


<오덕오덕할수도 있지만 16분 34초부터 17분까지만 보세요 ^^>

자 어떻습니까? 민족이라는 것은? 민족을 형성하는 요인 중에는 혈연, 지역, 언어 기타 등등도 있겠지만 자기 자신이 어떤 민족인지 자각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우리는 민족이라고 자각을 할 수 있었던 시절이 언제부터였을까요? 역사학자들은 조심스럽게 그것이 삼국통일 이후 부터 천천히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삼국통일 이전에 고조선이라는 최초의 국가가 있고 부여, 옥저, 동예, 삼한, 가야,고구려, 백제, 신라 수많은 나라가 난립했지만 그 어느 나라도 우리는 고조선의 후손이며 우리 모두는 한민족이다라고 내세운 나라는 없었습니다. 다만 서로 비슷한 말을 쓰고 풍습이 비슷하다는 정도였지요.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민족이 될 수 없었지요.

<언어와 풍습이 같다고 민족이 될 수 있나? 2프로 부족하다!>

서로 같은 민족이 되기에는 어색했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백성들은 통일된 이후 본격적으로 하나가 되어가기 시작합니다. 신라는 일통삼한(一統三韓: 하나 일, 거느릴 통, 석 삼, 한나라 한)을 내세우며 세 나라가 마침내 하나의 집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내적으로는 옛 고구려, 백제 지배층을 신라의 골품 제도 안으로 편입시켜 같은 지배층으로 인정했으며 지방 행정 구역도 9주로 개편하여 신라, 백제, 고구려 지역에 각 3주씩 설치하여 모두 같은 국민이라는 것을 표방했습니다. 그리고 병역의무도 신라인은 물론 고구려, 백제, 말갈 사람까지 모두 포함하여 중앙군단인 9서당을 편성했습니다. 지금이야 군대가는 것이 매우 싫겠지만 군대를 가서 병역의무를 진다는 것은 그 나라의 국민으로 인정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군대에 피정복민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피정복민을 이제 동등한 백성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죠 ^^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세 나라 백성은 완전히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일단 신라의 통일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라 고구려, 백제의 백성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아무래도 백제의 백성이 많게 됩니다. 제가 동등하게 9주를 설치했다고 하지만 사실 새롭게 설치된 주는 주로 백제, 가야 지역에 편중되어 있습니다.

<새롭게 설치된 주들은 주로 백제, 가야 지역이다. 고구려 옛 땅은 기존의 한주, 삭주, 명주가 확장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 지배층을 신라 지배층과 같은 골품제도 안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점으로 인해 시간이 지나 결국 고구려, 백제는 신라가 약해진 틈을 타 서로 자신들의 뿌리를 다시 찾습니다. 그것이 결국 후삼국시대로 이어지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완전한 하나의 민족이 되지 못했기에 이들이 다시 찢어지는 것은 예견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신라왕은 킹왕짱!

신라의 민족 융합책을 보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통일 이후 신라의 발전 양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 먼저 신라는 천년이나 지속되었던 왕국인 만큼 이에 따른 시대 구분도 존재합니다.

 

상대

중대

하대

시기

건국(BC57)~진덕여왕(AD654)

무열왕(654)~혜공왕(780)

선덕왕(780)~경순왕(935)

왕위계승

성골

무열왕 직계

내물왕 방계

주요관직

-

시중

상대등

정치체제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

전제 왕권

귀족 연립 체제


위의 표는 신라 시기에 대한 시대 구분 표입니다. 통일 이후 신라 전성기에 해당되는 시기는 중대로 이 시기는 무열왕의 직계 후손들이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면서 왕권을 공고히 다지며 전제왕권(專制王權, 오로지 전, 절제할 제, 임금 왕, 권세 권)을 구축했습니다. 그런데 전제왕권은 무엇일까요?


<영화 300에 나오는 크세르크세르 1세가 대표적인 전제왕권의 예라고 볼 수 있다>

전제왕권은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나라를 지배하는 형태입니다. 과연 전제왕권이라는 표현이 옳으냐는 문제점도 있긴 하지만 교과서에서 일단 전제왕권으로 표현하고 있는 만큼 그 문제는 살짜쿵 넘어가보도록 해보죠 ^^ 시간이 난다면 재밌는 사실들!에서 좀 더 다뤄볼까 합니다.

그렇다면 신라의 왕은 어떻게 해서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게 되었을까요?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독점하는 데 이 방법처럼 빠른게 없습니다. 바로 숙청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문왕 뒤를 이어 즉위한 신문왕은 귀족 세력들을 하는 꼬라지를 보니 통일된 국가를 이끌어갈 자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신문왕, 귀족들을 없애버릴 결심을 하다>

마침 김흠돌의 모반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귀족 세력를 싸그리 없애버리게 됩니다. 귀족 세력의 힘이 꺽이게 되자 이제까지 귀족을 대표했던 상대등 보다 왕명을 수행하는 집사부의 시중의 권한이 더 강해지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말 안 듣고 뻣뻣한 진골 귀족들보다 왕의 말을 잘 들었던 6두품 세력들을 주로 등용하여 자신을 보좌하게 했습니다. 이런 전제왕권 시기에 지방행정 조직도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되며 유학 사상이 강조되며 국학이라는 교육기관이 설치되어 전제 왕권을 뒷받침했습니다.

토지제도도 왕권이 강해짐에 따라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귀족들이 소유했던 녹읍(녹읍 안에 살던 백성들 노동력 징발 가능)을 폐지하고 대신 관료전(관료전 안에 살던 백성들 노동력 징발 불가, 조세를 걷을 수 있는 권리만 있음)을 지급했습니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함으로써 귀족을 통해서 백성을 지배하기 보다는 왕이 직접 백성을 지배하겠다는 의도를 보였습니다. 어때요? 이 시기 신라 왕의 힘이 킹왕짱이라는 게 느껴지시나요?

전제 왕권이 무너지고 혼란한 시절이 도래하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영원할 것 같던 신라왕의 힘도 결국 쇠퇴하고 맙니다. 혜공왕 말기에 귀족들이 96각간의 난을 일으키는데 이 때 이후로 강대하던 왕의 힘도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 심지어 혜공왕은 이찬 김지정이 일으킨 반란에 죽는 참사가 일어납니다. 혜공왕이 죽고 선덕왕이 왕위에 오르는 이 시대를 신라 하대로 부르며 이후부터는 내물왕 방계들이 왕이 됩니다.

이쯤되면 왕의 힘이라는 게 거의 없어지는 게 당연합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잘 생각해봅시다. 이때까지 왕이 혼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는데 그 권력을 휘두르던 왕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죠? 자연스럽게 왕이 휘두르던 권력은 귀족들에게 분산되고 귀족들은 그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면서 나라는 개막장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겁니다.

<신라 하대의 상황, 개판이다>

자 어느 정도 개판이었을까요?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완전히 회복하여 이제까지 왕이 지급해주던 관료전은 폐지되고 다시 녹읍이 부활됩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마음대로 토지를 소유하며 자신들의 토지 규모를 늘리고 농민들을 쥐어 짜 자신들의 뱃속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이제 왕도 해보고 싶어서 서로 왕이 되겠다고 치고 받고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로 155년 20명의 왕이 교체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왕의 권력은 더욱 더 보잘 것 없이 됩니다.

<155년 동안 20명의 왕이 교체되었다고? ㅋ 그러고도 니가 왕이니?>

왕의 힘은 갈수록 약해지고 귀족들을 막을 만한 사람은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조용히 힘을 키우던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지방에 호족이었습니다. 호족들은 자신의 근거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여 백성들을 실질적으로 다스렸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해상왕 장보고도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 해상호족의 일족으로 볼 수 있지요.

<장보고도 일종의 호족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당에서 유학했던 6두품 세력들도 신라 말기 혼란한 상황을 보면서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유교를 깊이 공부했기 때문에 고대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는 골품제를 비판했습니다. 이렇듯 신라 하대 사회에서 호족, 6두품 세력들이 성장하고 있었고 새로운 사상도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불교 경전 보다 참선을 중요시 하는 선종이 나타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으며 풍수지리설 역시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같은 사상의 변화 역시 새로운 사회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5소경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자 이제 문제를 풀어봐야지요? 신라는 통일 이후 수도가 동쪽에 치우친 것을 보완하기 위해 5소경을 만듭니다. 이 5소경에는 그 지역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멸망한 나라의 지배계층을 주로 이주시켰는데 어떤 이유에서 그랬을까요? 정답은 수업시간에 공개됩니다. ^^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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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사회탐구영역 국사 11번문제>

이 문제는 전형적인 자료 제시형 문제로 수능에서 자주 등장하는 스타일입니다. 자료를 잘 분석하여 알 맞는 보기를 고르면 되겠네요. 먼저 (가)는 고구려에 대한 설명입니다. 동쪽에 큰 수혈에 있다는 것은 고구려 수도에 있던 국동대혈을 뜻하는 것이고 10월에 열리는 큰 제사는 10월에 행해지는 동맹을 일컸는 것입니다. (나)는 백제에 대한 설명입니다. 왕의 성씨가 부여씨이고 나라 안에 8대성이 있는 것은 백제의 큰 특징입니다. ① 4세기 중반은 백제의 전성기에 해당되는 시기입니다. 백제와 고구려의 군사적 충돌은 369년 치양성 싸움부터 인데 치양성이 황해도 지역에 있으므로 맞는 말입니다. ② 고구려가 백제를 후원한 것은 여제동맹 때의 일로 여제동맹은 642년에 체결됩니다. 따라서 7세기 중반에 관한 설명입니다. ③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수도를 함락시킨 적은 없습니다. 근초고왕때 평양성을 공격한적은 있지만 평양성을 함락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를 함락한 적은 있는데 그것은 장수왕때 일로 475년입니다. ④ 백제와 고구려가 결혼 동맹을 맺은 적은 없습니다. 신라와 백제가 결혼동맹을 493년에 맺었습니다. ⑤ 백제가 고구려가 지배하던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한 적은 없었습니다. 신라가 고구려의 함경도 지역에 일시적으로 진출한 적이 있는데 6세기 중반에 일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①입니다. 정답지를 바로 고르기는 어려운 문제이고 오히려 나머지 지문을 오답으로 처리하여 푸는 것이 쉽게 푸는 방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2011학년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주관 9월 모의고사 사회탐구영역 국사 2번 문제>

지도를 보고 푸는 문제네요. 먼저 지도를 잘 봅시다. (가)의 수도 변천 과정을 보아하니 졸본->국내성->평양 순으로 이동했던 고구려네요. (나)의 수도 변천을 과정을 보니 한성->웅진->사비로 이동했던 백제입니다. ㉠은 국내성이고요 ㉡은 한성입니다. 고구려는 AD 3년에 국내성으로 천도해 427년에 평양성으로 천도할 때까지의 시기이고 백제는 BC 18년 건국부터 고구려에게 패배하여 웅진으로 후퇴하는 475년까지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① 고구려는 신라에 침입했던 왜를 격퇴한 것은 광개토대왕 시절로 이 시기에 해당됩니다. ② 경당은 고구려의 교육기관으로 전기에 설치된 관학인 태학과 비교하면 사학이였고 후기에 설치된 기관입니다. 평양 천도 이후에 각 처에 설치되었습니다. 따라서 옳지 않은 설명입니다. ③ 고흥이 서기를 편찬한 시기는 근초고왕 시절로 맞는 설명입니다. ④ 불교를 공인한 것은 384년으로 맞는 설명입니다. ⑤ 오늘날 황해도 지역을 놓고 다툰것은 백제는 근초고왕, 고구려는 고국원왕 시절로 맞는 설명입니다. 정답은 ②입니다. 난이도가 굉장히 있는 문제 였습니다.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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