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은 싸우면서 큰다!
우리 보통 하는 말이 있지요?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그런데 역사에서도 이런 말이 어울리는 나라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려입니다.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야 ^^;;>
<우리나라의 북쪽 국경 변천과정, 고려 후기에 가면 상당한 정도로 영토가 확장된다>
유난히 외부의 침략도 많았지만 그것을 잘 이겨내었던 고려. 지금부터 고려가 어떻게 외부 침략을 이겨내고 혹은 굴복하면서 북쪽의 영토가 어떤 과정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지 살펴보겠습니다.
호족, 거란에 굴하지 않는다
고려의 대외관계 변화는 고려 지배층의 성격에 따라 파악해볼 수 있습니다. 고려 초기 지배층은 호족들로 이들은 지방의 유력가였고 자기 지역에서는 왕과 같았기 때문에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중국 것보다는 우리나라 것에 만족했고 당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당당한 사람들이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는 때에 고려를 넘보는 외부 세력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거란이었습니다. 거란은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송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고 중국 본토를 넘보고 있었습니다. 거란은 송나라 치기 위해서는 배후의 고려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또한 고려는 송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고려 정벌의 필요성이 부각되었습니다.
<송과 고려는 친선, 거란은 고려와 적대 관계에 놓여 있었다. 요는 후방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한편 고려는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고 태조 왕건때 부터 적극적인 북진 정책을 펴나가고 있었던 상태로 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던 거란과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 더 관계가 나빠져 거란이 선물로 보내온 낙타 50여 마리를 굶겨 죽였습니다.
거란은 고려가 계속 송과 손을 잡아 자신들과 대적할 경우 국제사회에서 고립될 위험이 있으므로 고려 정벌을 단행하기에 이릅니다. 총 3차례에 걸쳐서 거란이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고려의 지배층들인 호족은 거란에 침입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1차 침입에서는 서희가 외교 담판을 벌여 거란군이 물러가고 강동 6주를 차지했습니다. 대신 고려 역시 송과 국교를 단절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거란 역시 어느 정도 목적은 달성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끊겠다고 한 말은 사실이었을까요? 우리 모두 알고 있지요? 그간의 배신의 흑역사들을 ㅋㅋ 당연히 이것도 구라였습니다 ^^;
<그럼 바구니에 있는 다시다는 뭔가? ㅋ 거란 역시 구라빨에 속아넘어가고 말았다>
<귀주대첩>
고려가 거란에 승리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는 고려, 송, 요 삼국이 세력 균형을 이루어 평화가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평화롭다고 해서 마냥 평화를 만끽하면 안되겠죠? 고려는 이 시기 또 다른 외침에 대비하여 북쪽에 천리 장성을 쌓았습니다.
이 시대 마지막 호족들, 여진을 정벌하다
거란-고려 전쟁에서 고려의 승리로 한동안 고려는 안정을 찾았지만 12세기 초무렵 여진족이 고려 북쫑 변경에 나타나 고려에 깔짝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꼴을 눈뜨고는 못보는 우리 호족들은 여진족을 토벌하기 위해 전략을 짭니다. 이때 윤관을 대장으로 한 별무반이 새롭게 조직되는데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으로 구성되어 여진족을 토벌했습니다. 이들은 동북방 지역에 9성을 쌓고 여진족을 몰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윤관이 쌓은 동북9성>
하지만 동북지방은 여진족들의 중요한 터전이었기 때문에 여진족들은 이 동북 9성을 빼았으려 쉴새없이 쳐들어 왔으며 한편으로는 다시는 나쁜 짓 안하겠다며 고려 국왕한테 애걸복걸 하기도 했습니다.
<동북9성 제발 주세요 ㅠㅠ 흐헝 ㅠㅠ 돌려주셔서 감사해요 ㅠㅠ>
결국 여진에 간청과 동북9성을 끝까지 지키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고려 정부는 동북9성을 반환하기로 합니다. 동북9성을 발판으로 성장한 여진은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을 건국합니다. 여진이 세운 금나라는 매우 강성하여 송나라 마저 정복하여 남쪽으로 밀어내기에 이릅니다. 이제 강대해진 금은 고려와 입장이 반대가 되어 군신관계를 요구합니다. 예전에 호족들이었다면 이 제의를 받아들이기 곤란했지만 그 동안 고려 내부에서도 지배층의 변동이 있어 문벌귀족이 지배세력이었습니다. 이들은 변화보다 안정을 추구했기 때문에 금과의 사대관계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로써 동아시아에서 유지되었던 세력균형을 깨어지고 금이라는 강자가 국제사회를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몽골과 맞선 무신들
금이 일어서고 한 동안 국제사회는 금에 의해 주도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13세기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나라를 끝장내는 종결자가 등장했으니 그 이름도 유명한 징기스칸이었습니다.
<몽골제국의 판도, 그들의 말발굽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당연히 몽골은 고려와도 접촉을 했는데 그 첫만남은 유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강동성 전투에서 몽골과 고려는 처음으로 만난 이후 몽골은 과대한 공물을 고려에게 요구했습니다. 특히 몽골 사신은 오만방자한 행동을 하여 고려 사람들의 불만을 샀습니다. 이처럼 양국 간에 관계가 지극히 좋지 않을 때 불미스러운 사거인 발생하는데 몽골의 사신이었던 제구유가 고려와 몽골 국경지대에서 피살당하자 양국 간의 관계는 겉잡을 수 없이 나빠졌습니다. 몽골은 고려와의 관계를 끊고 살리타가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니 이것이 고려-몽골 전쟁의 시작입니다.
1차 침입은 개경에서 방어했지만 몽골과의 육지에서 싸우면 질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챈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항전 태세를 갖춥니다. 결국 이렇게 되면 불쌍한 것은 백성들입니다. 총 일곱차례에 걸쳐 40년이나 침입한 몽골군은 육지를 철저히 휩쓸었고 백성들이 농사를 짓는 농토는 황폐화되었으며 수많은 문화 유산들이 불에 탔습니다.
<몽고의 침입, 고려의 백성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백성들은 이렇게 힘이 든 와중에도 몽골군과 맞서 싸워 승리하기도 했는데 처인성에서는 당시 일반 군현보다 신분이 떨어지는 부곡민을 이끌고 몽골 장수 살리타를 죽였습니다. 또한 충주성에서는 노비로 구성된 군대가 몽골군을 물리쳤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활약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쟁으로 인한 신분 상승이라는 강력한 동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40년 동안의 몽골항쟁은 백성들에게 극심한 고통만 남긴 채 몽골에 항복하는 것으로 결론이 맺어졌습니다. 더불어 몽골과의 항전을 주장하던 무신정권도 종말을 맞고 맙니다. 그런데 이때 무신정권 하에서 큰 세력을 누리던 무신들의 사병 집단인 삼별초는 몽골과의 항전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삼별초 항쟁의 지도, 삼별초는 민족적 항쟁인가?>
삼별초는 진도,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겨가며 몽골과의 항전을 수행했지만 결국 고려 관군과 몽골군 연합에 진압되고 맙니다. 이들이 몽골군에 대항한 것은 어디까지나 무신정권 하에서 누려오던 자신의 권력을 놓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지 민족적 대의를 가지고 몽골군에게 대항했던 것은 아닙니다. 특히 제주도까지 옮겨서 수행했던 항전은 제주도 백성들에게도 고통이었습니다. 제주도 백성들에게 삼별초나 몽골군이나 마찬가지 침략군이었습니다.
삼별초 항쟁이 마무리되고 더 이상 고려에는 몽골에 대항할만한 세력이 없어졌습니다. 몽골은 고려에 굴욕적인 강화 조건을 강요했습니다. 고려 국왕은 원나라 황제의 딸과 결혼을 해야 했으며 다루가치가 파견되어 고려 내정에 간섭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외왕내제 체제를 유지하며 대내적으로 황제국 행세를 하던 고려는 더 이상 황제국을 자처할 수 없었으며 폐하는 전하로, 짐은 과인으로 태자는 세자로 그 격이 제후국으로 떨어졌습니다. 또한 몽골이 준비하던 일본원정 준비도 고려가 담당해야 했으며 영토의 일부마저 빼앗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굴욕적인 강화조치는 공민왕의 개혁 조치로 사라지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 남아있었습니다. 공민왕의 개혁 시기에도 외침이 끊임없었는데 이때는 왜구, 홍건적들이 줄기차게 침공했고 이들을 최영, 이성계 등이 막아내면서 고려 후기에 신흥 무인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고려 후기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이들을 격퇴하면서 신흥 무인세력이 성장한다>
우리나라의 영어 이름이 Korea인건 다들 아시죠? 그런데 우리나라의 외국 명칭이 고려라는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우리나라의 기록이 서양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루브룩이라는 선교사가 몽골 동쪽에 카울리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당시 프랑스 국왕이었던 루이 9세에게 보고하면서 최초로 등장했습니다. 이후 카울레, 카우리로불리다가 차츰 코리아로 자리를 잡아가게 됩니다. ^^
자, 그럼 코리아라는 이름을 알리게 된 고려의 대외관계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11세기에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면서 고려, 송, 요 간에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는 걸 여러분은 잘 아실 겁니다. 특히 고려는 그 당시 우수했던 송의 문하를 받아들이기 위해 송과의 교류에 적극 신경을 썼습니다. 특히 송의 상인들과 고려의 상인들은 수시로 송과 고려를 왔다갔다 했습니다. 송의 상인들의 활발한 교역 덕분에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고려에 들어오게 됩니다. 아라비아 상인들은 '대식국' 사람들로 기록이 되어 있으며 이들은 국제 무역항이었던 벽란도를 통해 서역의 물건이었던 수은, 향료, 산호 등을 가지고 왔습니다.
<고려 초기 교역>
고려 후기에도 교역은 끊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고려가 원에 복속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려는 원제국의 일원으로 활발해지는 동서 문화 교류에 일원이 되었습니다.
쌍화점의 의미
여러분 쌍화점이라는 고려가요를 아시나요?
<이거 말고-_->
쌍화점은 회회아비가 등장하고 회회아비가 한 여인에 손목을 쥐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이 고려가요를 보고 고려 시대 상이 어땠을지 고려의 대외관계와 고려 여성의 지위를 감안해서 생각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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