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2) 조선에서도 근대의 기운이 움트다
2-7 실학, 부국안민을 위한 개혁을 주장하다
2-8 문화의 주체가 다양해지다 


농민이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

조선 후기 하부구조가 변화를 일으키면서 상부구조였던 사상도 변하시작합니다. 바로 새로운 학문 경향인 실학이 나타났는데요. 이 실학은 성리학에서 벗어난 완전히 새로운 이론이기 보다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면서 파생한 새로운 학문으로 파악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후대에 실학자라고 불리는 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뉩니다. 농업을 중시하는 학자들, 그리고 상업을 중시하는 학자들입니다. 농업을 중시하는 학자들은 대표적으로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농민이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고 생각했지요.

<농민이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 농당당!>

이들은 농민들이 당당하기 위해서는 농민들이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고 안정적으로 토지를 경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조선 시대 소수의 지주들에게 토지가 집중되어있는 현실을 개혁하여 다수의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유형원은 균전론을 주장했습니다. 균전론의 내용은 모든 토지 소유를 국가의 것으로 하고 백성들에게 일정량의 토지를 고르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균전론이지요. 하지만 이 균전론은 신분질서 자체를 부정한 토지제도가 아니여서 사대부들은 농민 보다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했습니다. 또한 상인은 농민이 받는 토지 절반만 지급하는 등 기존의 신분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 있습니다.

또 다른 농당당의 대표인 이익은 한전론을 주장했습니다. 한전론은 토지 소유의 하한선을 설정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이 정도의 토지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경계를 주장한 것이죠. 그것이 바로 영업전입니다. 영업전은 농민들이 생활하는 데 있어 최소 이정도의 토지는 가지고 있어야 것을 설정한 토지입니다. 이 영업전은 원칙적으로 매매가 안 되고 영업전 이외의 토지는 자유롭게 매매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점진적으로 토지 제도를 개혁해나간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있었지만 여전히 대규모 토지 소유를 막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농당당의 대표자는 바로 유명한 정약용입니다. 정약용은 두 가지 토지 제도를 주장했습니다. 하나는 여전론이고 하나는 정전론입니다. 농당당 대표 중에 유일하게 두 가지의 토지제도를 주장했죠? 그만큼 농민의 생활에 관심이 많은 학자였습니다. 그럼 여전론과 정전론 제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지요.

여전론은 공동 경작과 공동 분배를 바탕으로 한 토지제도 입니다. 말이 어렵죠? 내용은 쉽습니다. 즉, 개인 소유의 토지가 하나도 없고 토지를 한 사회의 소유로 하는 겁니다. 즉, 공동소유하는 거죠. 그리고 공동 소유한 토지를 공동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일한 만큼 배부 해주는 겁니다. 어딘가 많이 본듯한 이론이지 않아요?

<ㅋ 또 난가? 정약용의 여전론은 사회주의 이론과 비슷하다>

여전론은 개인 소유의 토지가 없고 마을이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측면에서 사회주의와 비슷합니다. 생산수단을 개인의 소유가 아닌 사회의 소유로 하는 것이 사회주의 사상의 핵심이니까 정약용의 여전론이 그런 점에서 비슷하죠. 

정약용은 여전론 자체가 당장 실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토지제도를 강구했는데 그것이 바로 정전론입니다. 정전론은 예전 중국에도 있던 제도인데 토지를 井자로 구획하는 겁니다. 그러면 토지가 9개로 구획이 되죠? 그리고 8개 가구에 토지를 하나씩 배분합니다. 그러면 하나가 남죠? 하나 남은 토지는 8가구가 공동으로 경작하고 거기서 나는 곡식은 세금으로 냅니다. 이해가 되나요?

상업은 하늘이다!

이제 실학의 또 다른 계파인 상하당을 만나러 가시죠!

<상업은 하늘이다! 어디 건방지게 농업이 떠들고 있어!>

상하당의 대표적인 실학자는 바로 유수원, 박지원, 박제가 등입니다. 이들은 농업보다 상업이 살아야 나라가 더 힘이 세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북학파로서 청과 교류하여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유수원은 사농공상 순으로 되어있는 직업차별을 없애고 모두 동등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박지원은 주로 소설로서 놀고 먹는 양반을 비판하기도 했는데 특히 허생전에서는 우리나라의 취약한 상업의 유통구조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허생전에서 선비가 장사를 하는 모습이 묘사되고 조선 상업 유통의 취약성을 여실히 비판한다>

상하당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인물은 박제가입니다. 박제가는 이전에 선비들이 가지고 있던 근검, 절약 정신을 비판하고 재물이란 적당히 소비를 해야지만 다시 생산을 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원리와 비슷한 것으로 소비가 생산을 촉진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이 시기 벌써 그런 생각을 가진 인물이 있었다는 점이 눈여겨봐야할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실학이 대두하면서 또 하나 크게 바뀐 점이 바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입니다. 왜 갑자기 우리 것에 관한 관심이 증가했을까요?

실학은 실사구시 정신으로 성립한 학문입니다. 즉,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태도입니다. 때문에 당장 눈에 보이는 사실을 탐구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더니 그게 우리나라였던 겁니다! 자기 나라의 역사, 지리, 글을 연구해야 진정한 학문을 탐구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이 시기 우리나라 고유의 역사와 지리, 글에 대해 연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하는 움직임은 옛날부터 있었지만 조선 중기 시절에는 중국 중심 사관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학이 대두하면서 그 움직임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동사강목은 중국 중심 사관을 비판하고 민족사의 독자적 정통성을 수립했습니다. 유득공의 경우 발해고를 저술해 발해에 대한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발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지리 쪽에서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이중환의 택리지가 눈여겨 볼만합니다. 대동여지도는 아주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지도로 목판에 새겼다는 점에서 대량생산을 시도하려 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택리지는 일종의 지리서로 각 지방의 자연환경, 풍속 등이 자세히 적혀 있어 그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대동여지도, 한 권의 책을 펼치면 이런 모습이 된다>

끝으로 우리 한글에 대한 관심도 높아저서 훈민정음을 연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가 이 시기 편찬되었습니다.

과학기술이 쑥쑥

또 한 번 얘기가 나오지만 실학은 실사구시의 학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현상이나 현실 문제에 관심이게 마련이어서 과학, 기술에 관한 관심도 남달랐습니다. 특히 서양의 과학, 기술이 청을 통해 전파되면서 서양 것이라도 과학과 기술이 조선의 실정에 맞다고 판단하여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서양의 달력인 시헌력이 도입되기 시작했고 세계 지도인 곤여만국전도가 전래되었습니다. 특히 곤여만국전도는 당시대부들의 세계관을 바꾸어놓기도 했습니다.

<곤여만국전도, 서양 선교사 마태오 리치에 의해 들어왔다>

이외에도 정약용은 서양의 서적을 보고 거중기를 고안하기도 하는 등 서양 과학기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우리나라 것으로 소화해서 발전시켰습니다. 

실학의 의미는 뭘까?

실학은 실사구시학을 바탕으로 발전한 학문입니다. 우리나라 교과서에서는 실학과 성리학을 전혀 다른 학문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실학은 성리학에서 나온 학문이니 만큼 그 뿌리는 성리학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실학과 성리학이 아주 같다고는 할 수 없는데 실학이 성리학에 비해 다른 점은 성리학 보다는 좀 더 사실과 제도 등 현상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역사, 지리, 글에 관심이 많아지고 토지제도나 상공업 진흥 등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뭐 저는 동의하지 않지만 ^^; 이 이야기는 나중에 시간이 되면 심화 파트에서 다루기로 하지요.)

문화를 향유하는 계층이 넓어지다

조선 후기 하부구조의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문화를 향유하는 계층의 폭도 증가됩니다. 농업생산력 증가와 상공업의 발전으로 일반 서민들도 문화를 즐길만한 여유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들 서민은 양반문화처럼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형식을 바탕으로 예술활동을 합니다. 특히 길이의 제한이 없는 사설시조와 같은 것들이 이 당시 서민 문화가 어떤 것인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터비 리를 물고 두험 우희 치라 안자

 것넌 山(산) 라보니 白松骨(백송골)이 잇거 가슴이 금즉여 풀덕 여 내다가 두험 아래 쟛바지거고

 모쳐라 낸 낼싀만졍 에헐질 번괘라.

<진본 청구영언> - 작자미상 


이 사설시조를 보면 그 당시 서민들이 현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지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런 사설시조 외에도 한글소설이 등장하고 판소리와 탈춤이 등장을 하여 서민 문화를 좀 더 풍요롭게 만들었고 또 이런 문화를 통해 민중의 의식 수준은 높아져 갔습니다.

서민 문화 발달은 다른 영역에도 자극을 주었는데 특히 그림에서 두드러졌습니다. 특히 풍속화가 발달했는데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그림이 많아 조선 후기 삶을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됩니다.

<위는 김홍도의 장터길, 아래는 신윤복의 주유청강>

또 하나 산수화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이전까지 산수화는 실제 풍경을 보지 않고 상상으로 그린 것이 대부분 이었지만 진경 산수화는 실제 경치를 보고 그렸다는 점이 다르고 중국의 경치가 아닌 우리나라 경치를 그렸다는 데서 우리나라 풍경에 관한 자부심을 볼 수 있습니다.

<정선의 금강전도>

특히 이 시기에는 서양 화법에서 도입된 원근법도 사용되어 보다 다양한 화풍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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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2) 조선에서도 근대의 기운이 움트다
2-5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다
2-6 평등 사회를 향해 나아가다 


조선 후기 하부구조가 변하기 시작하다!

 제목에 이상한 얘기가 등장했네요. 하부구조? 하부구조는 무슨 말일까요? 자 이 얘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사람을 만나야 됩니다. 누구냐구요? 바로 Karl Marx!

 <조선 후기 얘기 하는데 왜 갑자기 맑스가 나올까? 바로 그의 사상 유물론 때문이다>

칼 맑스는  자신의 이론을 전개해나가면서 다음과 같은 이론을 전개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유물론이며 유물론에 따르면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지배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구요?

자, 한 사회를 두 가지 구조로 나눕니다. 하부구조는 경제에 관련된 것들 예를 들면 농업, 산업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상부구조는 하부구조를 기반으로 생겨나는 정치, 철학, 사상입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하부구조가 변화하면 하부구조를 기반으로 하는 상부구조도 변화합니다. 즉 생산력의 획기적인 변화가 발생하면 그 시대의 철학이나 정치체제도 바뀌게 되는데요. 예를 들면 프랑스 대혁명도 당시 생산력의 증대로 말미암아 상부구조가 그 변화의 힘에 의해 정치체제가 바뀌는 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어쨌든 조선 후기에 마르크스가 얘기하는 하부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지난 시간 얘기한 농업 생산력 증대도 그러하고 오늘 얘기를 할 상업의 발전도 그러합니다.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수공업도 활발해지면서 조선 시대 억눌려 있었던 상업이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합니다. 특히 대동법의 시행으로 상업이 더 활성화 되는데 국가에 관수품을 조달하던 공인은 상업 활성화를 이끌었스니다. 또한 국가에서 공식으로 인정해준 공인외에도 사상들이 점점 성장해나갔는데요. 그들은 시전상인들이 행사하는 금난전권(난전을 금지할 수 있는 권리)을 피해 4대문 밖에 있는 종루, 칠패, 이현, 송파에서 상권을 형성했습니다.

 <사대문 밖에 사상들의 난전들이 성행했다>

사상들이 더욱 성장하고 난전을 막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들의 금난전권이 폐지되기에 이르는데 이것이 신해통공이고 1791년에 일입니다. 금난전권이 폐지되자 상업의 발전은 이제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었습니다. 상업의 발달은 서울 뿐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 되어 지방에서도 상업이 활성화 되기에 이릅니다. 개성의 송상을 비롯하여 청과 주로 무역을 하던 의주의 만상, 일본과 무역을 하던 동래의 내상, 평양의 유상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전국에는 장시과 활발하게 열렸습니다. 또한 장시와 장시끼리 연결되어 유통망이 조직되었고 이러한 유통망을 기반으로 운송업이 발달합니다. 운송업에 전문적으로 종사한 상인들도 나타나는데 이들은 서울에 경강 상인들입니다. 이들은 주로 배를 가지고 서남 해안을 오고 갔습니다. 이런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자 부를 축적해나가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그들은 도고라고 불리는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독점적 도매상이 되었습니다. 

장시와 포구를 중심으로 유통 네트워크가 구축되다

상업이 발달하고 그에 따라 장시와 포구들이 발달하자 장시와 포구를 중심으로 일종의 유통망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보따리 장수들인 보부상은 장날에 맞추어 각 장시들을 순회하면서 각 장시들이 연계되었고 일부 지역 장시는 오일마다 장이 서는 것이 아니라 상설로 장이 열려 상업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조선후기 상업 유통망>

장시와 더불어 포구도 발달했는데 포구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기차가 발달하기 이전 시기 대부분의 교통로는 수로를 의지했기 때문에 포구가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포구는 주변에 장시와 연계되어 유통 거점이 되기도 했지요. 

이렇게 상업이 발달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자 숙박업이나 운송업, 창고업 등 상업에 필요한 여러가지 것들이 생겨나고 이를 담당하기 위해 객주, 여각이 발달했습니다. 

국내 상업 발달과 더불어 대외 무역도 활기를 띠었습니다. 국제 무역은 크게 개시와 후시로 나누는데 개시는 국가가 공식 허용한 무역이고 후시는 그렇지 않은 무역 형태를 말합니다. 개시 무역은 국가가 공식으로 허용하여 교역 물품과 교역량이 정해져 있어 이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후시 무역을 한 것입니다. 후시 무역이 확대되면서 지방의 상단 들이 성장하는데 이들이 앞서 말했던 만상, 송상, 내상들입니다.

<조선 후기 만상, 송상, 내상 등을 다룬 드라마 상도>

http://blog.naver.com/todaypia?Redirect=Log&logNo=130092794771&jumpingVid=7CDBE37545F0C0A1F23C675B389FA5C322ED(만상의 모습, 만상의 임승옥이 승부수를 던지는 장면)

쩐의 시대가 도래하다

조선 후기 상업이 발전한다는 것 까지는 잘 알았죠? 조선에서 상업이 발전하면서 획기적인 변화가 하나 일어나는데 그게 바로 화폐의 보급입니다. 우리나라 화폐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만들어지기만 했다 뿐이지 실제로 사용되는 건 바로 조선 후기에 와서입니다. 상업이 발전하자 사람들은 돈의 편리함에 대해서 알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화폐가 보급된 것이죠. 하지만 사람들이 화폐를 처음쓰다보니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게 바로 돈이 부족해주는 현상입니다. 

<돈이 좋아 하앍! 화폐의 중요성을 알자 화폐 자체를 쓰지 않고 모으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돈을 처음 가지게 되었을 때의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돈이 참 신기했겠지요. 돈으로 물건을 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람들이 곰곰히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 돈이 가장 가치가 높은 거구나. 그러고 돈을 안 쓰고 모으기만 했지요. 사실 돈의 진정한 가치는 돈을 쓰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으기만 하면 뭘 하나요. 그걸로 물건을 사야 돈으로서 역할을 하는거죠. 아무튼 화폐 유통이 초기이다 보니 사람들은 그런 인식이 부족했나 봅니다. 그래서 돈을 쓰지 않고 모으기만 하자 돈이 부족해지는 현상이 나타난거죠.

아무튼 이런 현상도 다 화폐 경제가 활성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났던 현상들입니다. 돈이 부족해졌다고 해서 이제는 화폐를 없앨 수 없었겠지요. 한번 구르기 시작한 돌은 멈출 수가 없는 법입니다. 화폐 경제가 발전해가면서 화폐 대신 어음, 환 등 신용 화폐 등도 생겨나고 대규모 상거래도 나타났는데 이것을 볼 때 조선의 상업이 기지개를 펴고 있으며 서서히 상업자본이 축적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 아니지 않나요?

영국과 조선의 발전 과정이 비슷하다고? 

<어서 많이 본 장면같지 않나? 데자뷰를 느끼는가?>

그것이 바로 유럽의 상업혁명 발전과정이랑 비슷하죠? 상업이 발달하면서 상인들을 중심으로 상업자본이 축적, 축전된 상업 자본이 수공업자들을 지배하기 시작하여 선대제가 나타나는 설명. 이게 일명 조선에도 자본주의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었다는 설명인데 사실 무리가 많은 설명입니다.

<무리수 자제염-_->

이런 설명은 왜 나오게 된걸까요? 이것은 일제가 조선은 무능한 나라였고 우리에게 먹힐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설명에 맞서기 위해 조선은 잘 발전하고 있었는데 일제가 침략해서 시망했다고 반론을 펴는 과정에서 탄생한 설명입니다. 예전에는 각광을 받는 이론이었으나 지금의 식민사학자라고 엄청 욕먹고 있는 이영훈 교수에게 이 이론이 무참히 짓밟힌 후로 거의 폐기처분 되었습니다. 왜 그런걸까요?

영국에서 자본주의가 싹트고 산업혁명이 발생한 것은 굉장히 굉장히 굉장히 우연한 계기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말이 좋아 상업자본이 축적되고 그것이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지만 그 연결고리가 매우 모호합니다. 따라서 영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의 산업화는 본질적으로 다른 나라에서 이식된 것입니다. 그러니 조선에도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런 주장은 자본주의와 산업화를 인간 역사 발전 필수 요소로 간주함으로써 그렇게 발전하지 못했던 다른 나라들을 싸그리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좀 어려운 얘기가 나왔는데 이런 사실 정도는 한국사를 배우는 입장에서 조금쯤은 기억해볼만 합니다. 아시겠지요? 역사는 다양한 사고와 논리가 중요하니까요.

신분질서가 요동치다

조선후기 농업, 상업, 수공업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잘 보았을 겁니다. 이런 것들은 앞서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모두 하부구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런 하부구조가 변화하면서 상부구조가 변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살펴볼 것은 바로 신분제입니다. 

졸부들이 갑자기 돈을 많이 가지면 원래부터 우리는 상류층인양 행세하고 싶기 마련! 조선후기에도 이와 비슷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농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부농,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업자본가, 수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독립 수공업자들이 나타나면서 기존의 신분질서가 흔들거립니다. 이런 신흥 자본가들은 공명첩이라는 것을 구입하여 합법적으로 신분상승을 이뤘습니다.

<임진왜란기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국가에서 실권 없는 벼슬을 돈 주고 팔았는데 그게 공명첩이다>

이런 합법적인 방법도 있었지만 족보를 사거나 혹은 위조하는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조선 후기 양반의 비율은 비약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합니다. 지금 주변을 보면 양반 아닌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ㅎㅎ

이렇게 부유한 층이 신분을 상승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반대로 신분이 내려 앉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잃고 하루하루 노동을 해서 살아가는 임노동자가 되거나 아니면 영세 상인으로 살아갔습니다. 양반 중에서도 일반농민과 다름 없을 정도로 몰락한 양반이 탄생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잔반입니다.

<교과서 그림에도 있는 자리 짜는 양반의 모습, 양반이라고 별 수 있나? 입에 풀칠하려면 일해야 된다!>

이처럼 조선 후기 신분 질서가 요동하면서 점점 양반은 늘고 상민이나 노비는 줄어드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바로 세금을 내고 군역의 의무를 지는 상민의 수가 없어지기에 이릅니다. 국가 입장에서 양반이 느는 것은 상관없지만 상민의 수가 줄어드는 것은 매우 치명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민의 수를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순조 때 천민이었던 공노비를 해방하여 상민으로 만드는 조치를 단행하기도 했습니다.

중간에 끼인 아이들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다

조선시대 이도 저도 아닌 중간에 낑긴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서얼과 중인들이었습니다. 서얼은 양반의 자식이지만 어머니가 정식 부인으로 인정받지 못한 첩이기 때문에 평민은 아닌데 양반은 아닌 굉장히 애매모호한 존재로 취급받았습니다.

 <홍길동이 대표적인 서얼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다는 대목에서 적서차별이 느껴진다>

서얼 뿐 아니라 주로 전문 기술직을 맡았던 중인들도 신분상승 욕구를 표출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중간 계층들의 신분상승 욕구는 신분질서가 동요하는 조선 후기에 더욱 분명해집니다. 서얼들은 집단 상소 운동을 전개하여 자신들의 관직 진출 제한을 없애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고 정조 때는 실제로 서얼들이 정치권에 진출하여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서얼들의 움직임을 보고 중인들도 자극을 받아 대규모 상소 운동을 벌였지만 중앙정부가 이런 요구를 무시했습니다. 대신 중인들끼리 똘똘 뭉쳐 그들만의 문화를 향유했는데요. 특히 시를 짓고 즐기는 일종의 동호회인 시사를 만들어 활동했습니다. 이런 문화는 양반들만 즐기던 것인데 중인들도 이 같은 문화를 즐김으로 해서 문화적인 신분차이가 없어지는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향촌에서 파워 게임이 시작되다

신분질서가 요동치면서 향촌 사회 내에서도 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새롭게 권력을 얻은 사람들인 부농층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기존 사족들을 밀어내고 향촌에서 지배권을 다지려고 했습니다. 이들 신흥 향촌 세력들을 신향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수령과 향리들과 결탁해서 향촌 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해나갔습니다. 

기존에 있던 사족들은 구향이라고 불렀는데 이들 앉아서 권력을 빼앗기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향과 구향간에 싸움이 일어났는데 이 싸움을 통해 득을 본 건 어이없게도 수령과 향리들이었어요 ^^; 구향과 신향 어느 한 쪽이 완벽하게 향촌의 지배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수령을 견제할만한 세력이 사라져버린 셈이 되었지요. 그래서 힘이 강해진 수령과 향리들이 마음껏 백성들을 수탈하게 되었고 그래서 대규모 민란이 19세기에 발생하게 됩니다. 슬픈 현실이네요 ㅠㅠ

왜 강이 주요 교통로로 사용되었을까?

조선 후기 상업 중심지를 보면 대부분 강을 끼고 발전했는데 그 이유는 조선시대 주요 교통로가 강이나 수운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조선시대는 육로 대신에 강을 교통로로 선택했을까요? 그 이유를 말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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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원 II에 해당하는 프린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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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2) 조선에서도 근대의 기운이 움트다
2-3  민심 수습을 위한 수취 체제의 개편
2-4 피지배층, 생산력 증대에 노력하다

조선은 고요의 나라? 천만에!

선생님이 예전에 했던 큰 착각 중에 하나이기도 하며 지금은 가장 듣기 싫은 소리 중 하나가 바로 조선은 고요의 나라, 우리나라는 침략을 당하기만 한 나라라는 얘기입니다. 이건 진짜 대표적으로 잘못된 얘기이며 개풀 뜯어먹는 소리입니다-_- 아니 사람사는 나라가 어떻게 조용하기만 하고 우리는 침략한 적이 없다는 건 도대체 어디서 나온 얘기입니까? 조선만 해도 4군 6진의 개척, 쓰시마섬 정벌, 나선 정벌 등은 다 다른 나라 얘기인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이번 시간에는 조선에 대한 대표적 오해 중 조선은 발전이 없었다는 오해를 깨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조선은 500년 내내 침체 되어 있는 나라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약동하는 나라였습니다. 약동하는 조선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대동법입니다. 전근대 시대 대표적인 세금 수취 제도는 바로 당나라 때 마련된 조용조 제도입니다. 조용조는 총 세가지 세금으로 구성되어있으며 밭에서 나는 곡물의 일정량 이상을 받는 조, 백성들을 징발하여 군대를 보내거나 공사판에 보내는 용, 또 하나는 지역 특산물을 바치는 조가 그것입니다. 대동법은 바로 특산물 세금인 조에 관련된 것입니다.

<특산물 세금인 조는 연산군 시절 부터 맛탱이가 가기 시작한다>

처음에 특산물 세금은 그런대로 잘 거둬지는 편이었으나 놀기 좋아하기로 손에 꼽히는 연산군 시절에 가면 슬슬 맛이 가기 시작합니다. 가령 예전에는 특산물로 한 가지만 바치면 되었던 것이 세가지로 늘고 그 고장에서 나지 않는 세금을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울릉도에서 오징어 대신에 조랑말을 바치라 하는 지경에 까지 이릅니다. 지금이야 부당한 세금이 청구되면 따지면 되겠지만 그때는 서슬퍼런 연산군 시절; 어쩔 수 없이 안나는 것도 구해다 바쳐야죠 뭐.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방납상인입니다.

<방납상인들, 딱 봐도 존내 못되게 생겼다>

<방납의 폐단, 1분 18초부터>

국가에서 요구하는 특산물을 바칠 수 없게 되자 지역 주민들은 방납 상인을 통해 특산물을 사서 바쳤는데 이때 방납상인들이 중간에 챙겨먹는 이득이 상당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이 비용으로 인해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세금이란게 한 번 늘리기는 쉬워도 늘어난 세금을 다시 줄이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후 이런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제도가 논의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선조 때 이이가 특산물을 받는 대신 토지에 따라 쌀로 대신 받는 수미법입니다. 대동법 역시 이 논의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http://cafe.naver.com/kwakhisedu.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68&(대동법의 시행)

대동법의 핵심은 이때까지 가구별로 징수되던 특산물을 대신하여 토지 결수 별로 쌀로 징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토지가 많은 사람이 기본적으로 많은 세금을 부담하는 형태로 농민들에게 크게 유리한 형태의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시행되기까지는 100년이 걸렸는데 일단 방납이라는 것이 큰 특권을 형성하면서 지배층 일부도 이 방납의 특권과 결탁되어 있었기 때문에 완벽히 사라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또한 대동법은 특산물을 아예 받지 않고 쌀로만 받는 방법이기 때문에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특유의 끈기와 뚝심을 발휘하여 결국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게 만들었고 백성들은 큰 부담을 덜게 되었습니다. 또한 대동법으로 받은 쌀로 국가는 특산물을 사야했으므로 정부로 부터 돈을 받아 특산물을 사는 공인이라는 상인이 등장하여 상공업을 발전하는데도 대동법이 기여를 했습니다.

대동법 이외에 또 다른 문제는 바로 군역이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양인개병제로 양인이면 누구나 군역 의무를 져야했지만 조선 왕조가 평화를 구가하는 동안 군역 의무가 부실해졌으며 포 2필만 내면 군역 의무를 면제 해주는 편법이 나타나기에 이릅니다.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면서 결국 이 편법은 정식법으로 정착되어 방군수포제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 군역은 문제가 아주 많았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이제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군포가 부과되고 이미 죽어 없는 사람에게까지 군포가 부과되었습니다. 이런 형태를 황구첨정, 백골징포라 하는데 조선의 수취체제 문란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언급되곤 합니다.

이런 폐단을 고치고자 여러가지 방안이 논의되었습니다. 특히 양반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이 도마에 올라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여하자는 호포법이 거론되었으나 끝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호포법은 신분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양반과 평민 사이에 차이가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 한 양반들이 반대를 하여 무산되고 맙니다. 대신 군포를 1년에 1필만 납부하면 되는 균역법을 실시하게 되는데 이게 문제가 좀 있습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니? 공짜폰이라고 정말 공짜였던 경우가 있었는지 기억을 떠올려 보자>

자 그러면 원래 2필씩 내던 군포가 1필로 줄어들게 되는데 그러면 재정이 1/2로 줄어드는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어딨습니까? 부족한 재원은 다른 대서 걷을 수 밖에요. 토지 1결마다 2두씩 결작미를 거두었으며 그외에도 어장세, 선박세, 염전세가 새로 신설되었으며 부유한 평민에게 선무군과포라는 새로운 세금이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어찌되었든 조선 후기로 가면서 대동법, 균역법 등의 세금제도가 개선되면서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는 듯 보였으나 언제나 그렇듯 늘 토지 소유주들이 자신의 부담을 농민들에게 떠넘기는 불행의 흑역사가 또 다시 되풀이 됩니다. ㅠㅠ 결국 강력한 왕권이 지켜주던 탕평시기를 지나고 세도정치기에 들어서면서 이런 모순은 더 극대화 되고 백성들의 민심은 폭발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는데 이것이 삼정의 문란에서 부터 민란으로 이어지는 역사입니다.

놀부는 진짜 나쁜놈인가?

이제까지 조선 시대 세금 제도의 개선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이제는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 증가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놀부 모두 아시죠? 우리는 예전부터 흥부, 놀부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는데 보통 흥부는 착한 사람 놀부는 나쁜 넘이로 알고 있는데 이거 맞는건가요?

<우리가 익히 아는 흥부와 놀부의 이미지, 그런데 대책없이 자식만 많이 낳은 흥부는 책임없냐?-_->

사실 흥부와 놀부 이야기만 단순한 권선징악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 증대와 관련하여 농부들 사이에서 나타난 새로운 신분 계층을 얘기해주고 있는 겁니다.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이 증대하면서 일부 농부들은 자본을 축적하여 부농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놀부이죠. 하지만 많은 농부들은 이 부농에 밀려 일자리를 잃으면서 매우 궁핍한 처지에 이르는데 이게 바로 흥부죠. 흥부와 놀부는 조선 후기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겁니다.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 증대와 관련해서 이영훈의 소농사회론도 그 힘을 얻고 있습니다만 교과서에 그 설명이 나오지 않고 여러분이 알기에 수준이 높기 때문에 나중에 따로 언급하지요 ^^)

그렇다면 갑자기 농업 생산량이 막 늘어나지는 않았을텐데 그 이유를 알아보러 가봅시다. 가장 큰 이유로는 바로 모내기의 보급입니다. 한자로는 이앙법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의 획기적인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모내기는 물은 모를 모판에서 기른 후 논에다 옮겨 심는 것으로 물만 충분하면 많은 수확량을 가져다 준다>

조선 초기에는 주로 논에다 직접 벼씨를 뿌리는 직파법을 썼습니다. 이 방법은 물이 없어도 수확은 가능했지만 생산량이 많지 못하고 노동력이 훨씬 많이 드는 번거로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내기가 보급되면서 노동력이 절감되고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농업 생산량이 증가했습니다.

이 모내기 법이 보급되면서 논에 물을 빼고 모가 모판에서 자라는 동안 보리를 심고 수확하는 이모작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논농사가 개선되자 밭농사도 개선되었는데 이제까지 밭고랑 위에다 씨앗을 뿌리는 농종법 대신 고랑과 고랑 사이에 씨앗을 뿌리는 견종법이 도입되었습니다.

<농종법과 견종법>

이런 농사 방법의 개량으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증대되고 농민층의 계층 분화 현상도 뚜렷해졌습니다.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놀부처럼 부농이 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흥부처럼 경작지를 잃고 하루하루 일하고 먹고 사는 임노동자가 되었습니다.

계층분화가 지속되면서 한 번 돈 맛을 본 부농들은 본격적으로 상품작물 재배를 위해 힘쓰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농업은 자기가 먹고 살것을 재배하는 것이 본격적으로 팔기 위한 농업으로 전환되기 시작했으며 인삼, 면화, 담배, 채소 등의 작물들이 재배되었으며 쌀의 상품화도 진전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전보다 농업 생산량이 증대되니 경작을 하는 소작인의 권리도 늘어나 일부 지역에서는 타조법(지주와 경작인이 절반씩 수확량을 나눠받는 방식) 대신에 일정 액수의 지대를 정해놓은 고정 지대제인 도조법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도조법은 정해진 지대만 내면 경작하는 사람이 자유롭게 재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타조보다 농업 생산성이 더욱 높았습니다. 그리고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가 이전처럼 종속적인 관계가 아닌 계약적인 관계로 전환되어 갔습니다.

수공업과 광업도 성장하다

비단 농업에서만 괄목할만한 성장이 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동법 실시와 쌀의 상품화가 진행되면서 상업과 공업이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국가가 사농공상에 입각해서 상업과 공업을 누르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관영 수공업은 쇠퇴하고 민간 수공업이 발전했으며 영국에서 보았던 선대제 수공업 방식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광업도 수공업의 발전과 함께 발달했는데 광업의 발달은 청과의 무역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청은 유럽에서 막대한 은이 들어오면서 은의 유통량이 많아져 은을 세금으로 받는 지정은제를 시행했습니다. 따라서 다른 나라의 대외무역에서도 은을 선호하여 조선도 청과의 무역에서 은을 납부하기 위해 은광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개인의 광산 개발을 허용하고 세금을 받아내는 정책인 설점수세를 시행하는 한편 광산 개발이 큰 이익이 되자 몰래 광산을 개발하는 잠채도 성행했습니다. 광산 개발이 활성화 되면서 경작지를 잃은 임노동자들이 광산에 일하기도 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광산 개발 형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광산 경연인은 덕대라고 하는데 이들은 상인으로 부터 자본을 조달받아 직접 채굴업자인 혈주와 노동자를 고용하여 광산을 운영했습니다.

조선 후기는 자본주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

이런 점을 보고 몇몇 학자들은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고 해서 자본주의 맹아론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소 섣부른 의견이었는데요. 왜 이런 주장이 나왔고 이 주장이 어째서 신빙성이 없는지 혹은 자신이 신빙성이 있다고 믿으면 그 이유에 대해서 자유롭게 얘기해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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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2) 조선에서도 근대의 기운이 움트다
2-1 영·정조, 탕평책을 통해 정국을 주도하다 
2-2 국제적인 평화 분위기가 펼쳐지다 


붕당이 당쟁이라고? 붕당은 정당정치의 기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선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바로 당파싸움입니다. 혹자는 조선이 당파싸움 때문에 멸망했다고 평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견해입니다. 왜냐하면 당파싸움 때문에 조선이 멸망했다는 주장은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배하면서 퍼트린 설이기 때문이죠.

 <이놈들은 진짜 미화하는데 전문가인거 같다-_- 조선을 어떻게든 무능한 나라로 만들어 식민지배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붕당정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당쟁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당쟁과 붕당이 얼마나 다른지 한 번 살펴봅시다. 당쟁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당에 이익을 기반으로 해서 움직이는 겁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생겨나는 다툼은 국가 정책을 개선하는 방향이 아닌 소모적인 공방일 뿐 국가 정책은 1g도 도움 안 됩니다. 그러나 붕당은 공론으로 움직입니다. 공론은 여러 사림들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여론 같은 것이죠. 이 공론은 한 사람의 이익이 아니라 공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붕당이 오늘날 정당 정치와 유사한 면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붕당정치가 늘 긍정적이지만 않았습니다. 붕당정치가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지 시작하는 것은 '환국'이 나타나면서부터 입니다. 경신환국(1680년) 때 이르면 각 붕당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형태가 아닌 일당 독재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정치싸움에서 밀린 붕당은 대부분 숙청당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숙종 때 두드러지게 나타난 환국, 붕당 간의 공존이 인정되지 않고 일당 독재가 시작된다>

하지만 환국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붕당은 어디까지나 토론에 기반을 둔 정책 경쟁이자 학문을 바탕으로한 것이었기에 긍정적인 면이 많았습니다. 이런 붕당정치는 조선이 진정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건국되어 유교 이념에 충실했던 국가임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붕당 정치 기간에 주로 집권당은 서인이었습니다. 서인들은 16세기 초에 계속된 변란으로 인해 정기적으로 열리던 비변사(16세기초 왜구와 여진의 침입이 잦아지자 국방문제를 담당하는 기구로 설치되었으며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기구화 되었다. 이후 의정부를 밀어내고 최고 정무기관이 되었다)의 고위직을 독점하여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조선후기 중앙군인 5군영(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금위영,수어청) 중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은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던 것을 핑계로 설치되어 서인 정권의 군사적 기반을 강화시켜주었습니다. 서인들은 비변사와 새로 설치된 군영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확고히 다져나갔습니다.

이렇게 서인들이 확고한 권력기반을 구축해놓았기 때문에 서인들이 대부분 정국을 주도해나갔으며 남인은 제한적으로 정치참여를 하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남인은 두 차례 예송 논쟁을 일으킬 정도로 서인 정권의 라이벌로 성장해나갔습니다. 숙종 때는 한시적으로 권력을 잡기도 했습니다.

<예송논쟁은 상복을 어떻게 입는 가에 대한 예법을 가지고 벌어진 논쟁이다>

예송논쟁은 상복을 어떻게 입는 가에 대해 벌어진 논쟁으로 쉽게 얘기해서 왕을 사대부로 파악할 것이냐 아니면 왕은 사대부의 예에서 벗어나게 할 것인 가를 두고 일어난 논쟁입니다. 지금 보기에는 한심해 보이는 논쟁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굉장히 중요했던 논쟁으로 조선 사회가 지향하는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서인은 왕도 역시 사대부의 예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인은 왕은 사대부가 아니라 별개로 취급해야 한다고 맞섭니다. 결과는 제1차는 서인의 승리 제2차는 남인의 승리로 끝나는데 어찌되었든 왕 역시 사대부로 파악할 정도로 조선에 성리학이 완전히 뿌리 내렸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처럼 예송 논쟁을 거치면서 까지는 붕당의 원리는 그럭저럭 지켜졌지만 숙종 때 환국을 거치면서 붕당 정치의 원리는 파탄이 나고 위에 설명드렸던 붕당정치의 안 좋은 폐해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특히 숙종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환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그 피해는 더 심했습니다.

탕평정치가 시작되다

이처럼 붕당의 폐해가 드러나자 영조 때 붕당을 없애고 탕평을 하려는 시도가 나타났습니다. 이후 영, 정조기를 탕평 정치 시기라고 하며 붕당보다 왕권이 우위서게 되는 시기가 도래합니다. 어떻게 보면 조선이 애초에 지향했던 유교 정치의 원리와는 조금 다른 형태로 붕당정치의 폐해가 낳은 기형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탕평정치가 영조 때 부터 시작된다>

영조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여러가지 개혁 정치를 펴나가는데 붕당의 근원이 되었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기 시작했으며 그 동안 붕당의 원인이 되었던 막강한 인사권을 가진 이조 전랑의 힘을 축소시켰습니다. 이외에도 백성들의 군포 부담을 덜어주는 법인 균역법을 실시하였고 가혹한 형벌을 개선했습니다. 그리고 조선 초기 기본 법전이었던 경국대전을 다시 한 번 손질하여 속대전이라는 새로운 법전을 펴내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영조의 탕평정치는 한계가 있었는 데 그것은 원칙적으로 탕평책을 찬성하는 온건한 계열인 완론만 등용했고 또한 영조 후기에 가면 탕평파가 국왕의 친위파화가 진행되면서 외척에게 권력이 집중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세자를 죽이는 사건으로 이해 또 다른 붕당인 시파(사도세자의 죽음에 반대), 벽파(사도 세자의 죽음에 찬성)를 낳기 도 했습니다.

<영조의 탕평정치가 한계에 이르자 정조는 다른 탕평정치를 모색한다>

영조가 죽고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영조의 손자인 정조가 등극하면서 탕평정치는 또 다른 정국을 맞습니다. 비교적 온건한 계열을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해나갔던 영조의 완론탕평과 달리 정조는 급진적인 세력까지 통합하면서 이른바 준론탕평을 펴나가기 시작합니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여 일종에 비서기구로 역할하게 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시켜나갔으며 군사기반인 장용영을 설치하였습니다. 또한 수원화성을 쌓아 이곳을 새로운 중심지로 만들 구상을 가지고 있었고, 공노비 해방과 서얼 등용 등의 일을 영조 임금 보다 더 강대한 왕권을 바탕으로 개혁정치를 과감히 시행해 나갔습니다.

<정조 임금은 아버지 능을 방문한다는 것을 구실로 자주 수원에 능행을 나갔다. 이를 통해 백성과 직접 접촉했다>

결국 정조는 사대부를 통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백성과 소통하려 했습니다. 이는 그만큼 왕권이 강해졌다는 것을 미하며 탕평정치를 통해 왕이 사대부의 세력을 능가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러분 왕권이 강하다고 좋을까요?

<왕권이 강하다고 좋은 걸까? 한 곳에 집중된 권력은 권력의 소유자가 사라질 때 파국을 맞이한다>

탕평정치는 붕당을 없애는 것과 동시에 국왕 친위세력을 키운 것과 같습니다. 이후 조선은 그토록 경계했던 외척의 발호를 경험했으며 이는 거의 전적으로 탕평정치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왕에게 권력을 모이고 그 과정에서 권력을 향유했던 계층들은 국와 중심에 있던 친척들이 되었던 것이죠. 어찌보면 탕평정치는 세도정치의 씨앗을 안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북벌론에서 북학론으로

이제 잠깐 화제를 전환해서 북벌론과 북학론 얘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 우리가 북벌론에 대해서는 잠깐 집고 넘어갔지요? 북벌론은 병자호란 때 당한 치욕을 갚고자 하는 운동으로 그 현실성이 떨어졌다고 앞시간에 배웠을 겁니다. 북벌운동은 다분히 성리학적 질서를 반영한 것으로 청나라를 여전히 중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랑캐로 인식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입니다. 하지만 사대부들이 그렇게 현실 인식이 떨어지기만 했을까요? 이후 청나라가 태평성대를 구가하자 청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론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때 청을 통해 서양문물이 많이 들어옵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이죠? ^^

<백두산 정계비, 청과의 국경 분쟁을 마무리한 기념으로 세운 것이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청과의 관계에서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바로 국경 문제입니다. 청나라는 자신들이 일어난 지역인 만주를 신성시하며 그 지역에 사람을 살지 못하게 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그것을 깨고 들어가 인삼을 캐는 등 문제가 발생하자 국경선을 확정하는 문제로 청나라 사신과 조선의 사신들이 몇 차례 회담을 하여 그 회담 내용을 비에 적었습니다. 이것이 백두산 정계비인데 현재도 간도 문제 때문에 한 번씩 언급되고 있습니다. 사실 제 입장에서는 백두산 정계비 내용이 어떻든 간에 간도는 돌려받기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이미 간도에 조선족보다 한족들이 훨씬 많이 살고 있고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다하더라도 그들은 어디까지나 중국인으로 교육받고 중국인으로 살았는데 그곳이 우리의 영토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죠. 제 생각은 그렇다는 겁니다 ^^;

조선과 일본, 외교 관계를 회복하다

이제는 일본 과의 관계를 알아봅시다. 임진왜란 이후로 조선과 일본은 엄청난 원수지간으로 남았을 줄 알았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생각은 땡!

<일본과 조선은 원수? 뙈행!>

그렇다면 서로 심각한 전쟁까지 한 두 나라가 어째서 원수 지간으로 남지 않았던 걸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이 전 시간에 말했던 명나라 중심의 국제질서가 붕괴되면서입니다. 조선은 북방에 후금과의 문제 때문에 후방 일본과 언제까지 적대적으로 지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일본 나름대로 명나라 중심 국제질서에 이탈하기는 했지만 중국과 교역을 할 창구가 필요했으며 명나라에 책봉을 받지 않고도 에도 막부 쇼군의 위신을 높일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양측의 이런 필요가 맞아떨어져 총 12차례의 통신사가 파견되었습니다. 초기 통신사들은 막부 쇼군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극직한 대접을 받았지만 후기로 가면서 에도 막부의 권위가 안정되자 통신사를 굳이 받아들일 필요를 못느꼈고 조선 통신사에 대한 과도한 예의와 비용이 문제시 도면서 나중에는 쓰시마 섬에만 머무르다 돌아가다가 19세기에 들어서면 더 이상 파견되지 않기에 이릅니다.

탕평정치는 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는가?

여러분 오늘 탕평정치에 대해서 배웠지요? 그렇다면 오늘 배운 내용을 잘 떠올려보면서 어째서 탕평정치가 붕당정치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는 지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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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1) 서양에서 먼저 근대가 시작되다
1-2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산업사회로 나아가다
1-3 제국주의 열강이 앞다투어 식민지를 넓히다 


두번째 물결이 밀려오다

여러분 혹시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라는 책을 보셨나요? 음... 안봤겠죠?;; 어쨌든 거기에 보면 인류는 세번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하는데 첫번째는 농업혁명으로 농사가 처음 시작된 것이고 두번째는 산업혁명으로 인간의 힘 외에 다른 동력을 사용하여 대량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체제를 수립합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우리가 실감하고 있는 정보혁명으로 인터넷의 발명으로 밀려온 변화를 얘기합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산업혁명이 발생했는지 알아봅시다. 산업혁명이 진행되기 전에 상업 자본이 먼저 축적되기 시작했는데요.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인해 유럽은 광대한 해외시장을 얻었으며 아메리카에서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이 들어왔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막대한 은이 유럽으로 흘러들어온다>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막대한 은을 바탕으로 유럽의 상인들은 자신의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자신들이 직접 상품 생산에 나섰습니다. 그들은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수공업자들을 고용합니다. 여러 수공업자들을 고용해서 그들에게 미리 원료와 임금을 지급하고 완제품을 거둬 가는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이를 선대제라고 하며 다수의 수공업자들이 모여 생산하는 방식을 매뉴팩처라고 부릅니다. 이런 방식은 자본가가 중심이 되어 노동자를 고용하는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이후 산업혁명를 발판으로 이런 방식은 더욱 심화됩니다.


<산업혁명이 시작되다>

산업혁명은 먼저 영국에서 시작됩니다. 산업혁명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나 수력의 힘을 이용하지 않고 기계의 힘으로 대량의 상품을 생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산업혁명이 영국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영국의 상황을 봅시다.

<양이 사람을 잡아먹다, 인클로저 운동이 영국에서 일어난다>

영국은 당시 인클로저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인클로저(Enclosure)이라는 뜻은 자신의 땅에 울타리를 친다는 의미로 이제까지 농사 짓는 토지에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양을 기르는 것을 말합니다. 지주들이 양을 길러 면직물을 만드는 원료를 공급하는 것이 농사를 짓는 것보다 더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로 인해 대다수 농사 짓는 농민들은 자신의 농토를 잃고 거리로 나안게 됩니다. 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런 값싼 노동력이 풍부해지고 면직물을 수요도 급증하자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면직물을 생산할 방법이 고안되기에 이릅니다. 그것이 바로 증기기관의 발명이고 이런 증기기관은 인간과 수력 외의 동력을 사용하여 기계를 돌려 면직물을 빠른 시간에 대량으로 생산을 했습니다.

<와트의 증기기관, 허접해 보이지만 인류의 역사를 바꿨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곧 다른 나라에도 퍼져 나갔으며 증기기관 외의 기술도 눈부시게 발전하기에 이릅니다. 증기기관차가 발명되어 철도가 개통되어 과거의 시간과 공간을 해체시켰습니다. 또한 전신과 전화도 발명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상품을 팔 수 있는 시장을 확대시켰습니다. 

이렇게 시장이 확대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좋을 줄 알았죠? ㅋㅋ 원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안 좋은 점이 발생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본가의 횡포입니다.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독점했기 때문에 자본가 밑에서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노동자 계급이 나타납니다. 노동자 계급은 자본가에 비해서 수는 많았지만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독점한 바람에 힘이 약했습니다. 반면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틀어쥐고 노동자들을 최대한 부려 최대의 이윤을 얻으려했습니다. 이 당시 나타났단 안 좋은 상황이 바로 어린아이까지 최대 19시간가까이 노동시키는 악행이 나타났습니다. 이에 노동자들은 점점 힘을 합쳐 노동자들에게 대항할 결심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입니다.

 <산업혁명 당시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을 다룬 영화 제르미날>

사회주의는 자본가가 독점한 생산수단을 사회화 하자고 주장을 했기 때문에 사회주의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주장은 마르크스에 의해서 체계화 되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모순이 심화되면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을 일으켜 유산계급(부르주아)을 타도하여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최종적으로는 공산사회를 건설한다고 했습니다. 이때 계급이 소멸된다고 했는데 사회주의 실험은 소련이 붕괴도면서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지요. 이 얘기는 아주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

자본주의가 갈때까지 가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산업 혁명으로 인해 서양에 자본주의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지금이야 독점 자본을 견제하는 법도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것들이 없었기 때문에 거대 자본이 엄청난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영국에는 1% 소수의 기업이 원료의 70%, 생산의 50%를 점유하게 됩니다. 이 거대 자본은 다른 소자본 회사를 인수하거나 경영권을 장악하면서 더 강해졌고 국가를 압박할 만한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이 거대 자본은 자신의 자본을 투자하여 새로운 이윤을 창출할 곳을 찾는데 국내 시장은 이미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고 포화상태이기 때문에 눈을 해외로 돌립니다. 국가를 압박할 힘까지 있었던 이들은 국가를 압박하여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제국주의의 시초입니다. 

<제국주의 풍자만화, 식민지 백성들에게 남는 것이라고는 아무짝에 도움이 안 되는 성경 뿐이었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적극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해 나가는 과정에서 백인 우월주의와 사회 진화론을 내세우며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며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우월한 문명을 전파한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종교인 기독교를 원주민에게 전파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은 식민지 상태는 처참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식민지의 원주민들이 고통을 받는 대신 제국주의 열강들은 막대한 이윤을 창출할 수 있었습니다. 식민지가 큰 이윤을 벌어주는 것으로 확인되자 이제 서양에 있는 왠만한 나라들은 식민지를 개척하려 혈안이 되어 세계 각지는 제국주의 열강의 손에 의해 분할되었습니다. 특히 영국은 아프리카의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고 이집트에서 케이프타운까지를 잇는 종단정책을 펼쳤습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모로코에서 마다가스카르를 잇는 횡단 정책을 펼쳤는데 이 두 제국주의 국가들은 파쇼다에서 충돌하게 됩니다. 이제 영국, 프랑스 뿐 아니라 뒤늦게 통일을 이룬 독일과 이탈리아 역시 식민지 쟁탈전에 나서고 미국도 역시 나서게 됨으로써 세계의 대부분은 단 몇개의 나라가 지배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버립니다.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분할된 세계지도>

중국에서 왜 산업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는가?

역사에 조금 관심있는 학생이라면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을겁니다. 왜 서양에서 먼저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동양 최대 문명을 자랑하던 중국은 왜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제부터 여러분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답안을 저에게 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 이 문제에 대해 따로 정해진 정답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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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전 접근
1) 서양에서 먼저 근대가 시작되다
1-1 시민 혁명을 계기로 근대 국민 국가가 수립되다

신민(臣民)이 국민(國民)으로!

드디어 3단원이네요. 그런데 3단원을 딱 피자마자 어? 한국사 시간인데 왠 세계사? 하실겁니다. 여러분 국사에서 한국사로 바뀐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원래 한국의 역사는 세계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국 역시 세계의 여러 나라의 하나이며 세계의 움직임에 한국의 역사도 발맞추어 나간 것입니다. 자, 그럼 한국이 조선 후기에 접어들고 있을 때 서양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봅시다.

유럽권에서 가장 큰 변화를 일으켰던 사건이 무엇이 있을까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단연 충격적인 사건은 바로 프랑스 대혁명(1789)입니다. 왜 그럴까요? 왕이 시민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 때문이죠.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이 같은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 혁명이 끌고온 파급을 생각한다면 프랑스 대혁명 때 루이 16세가 죽었던 것은 전 유럽을 충격으로 빠트렸습니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루이16세, 1분부터 2분10초까지>

그렇다면 왜 이 같은 혁명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일까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시간을 조금 거슬러 갈 필요가 있습니다. 중세 유럽은 이른바 봉건 사회로 불리는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는 왕의 권력이 약하고 지방 영주의 세력이 강했습니다. 지방 영주는 자신의 지역을 독자적으로 통치하며 힘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왕은 힘이 강해지고 지방 영주들의 힘은 약해졌습니다. 힘이 약해진 지방 영주들은 중앙으로 올라와 왕의 관리가 되고 귀족의 칭호를 획득했습니다. 중앙으로 진출한 귀족들의 세력은 여전히 강했습니다. 왕은 이들 귀족을 누르기 위해 귀족은 아니나 똑똑했던 시민(부르주아)를 대거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입니다.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부르주아는 돈이 많은 평민 출신들이었다>

이들을 끌어들인 건 매우 적절한 판단이어서 왕은 귀족과 부르주아의 세력 균형 속에 절대 왕정을 수립했습니다. 하지만 부르주아들은 절대 왕정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정치 참여는 제한되었으며 귀족의 특권이 여전히 남아있는 상황에서 부르주아들은 점차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르주아들이 환영할만한 사상이 등장했으니 그것이 바로 사회계약설입니다.

<사회계약설을 주장한 홉스의 책 리바이어던의 표지, 왕권이 다른 사람의 권력이 모여 이루어진 것으로 표현했다>

사회계약설의 주요한 내용은 자연상태에 있는 인간이 개인들의 필요에 의해 사회를 구성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맨 처음한 것이 홉스였는데 그는 군주권을 옹호할 생각으로 군주의 권력은 자연상태를 피하기 위한 인간이 자신의 권한을 모두 양도한 것이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절대 왕권을 옹호한 듯 보이지만 결국 왕권이 하늘에서 부여받는 것(왕권신수설)이 아니라 인간들의 계약에 의해 구성된다는 생각을 표명함으로써 획기적인 생각의 전환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로크는 홉스의 생각을 비판하며 인간은 자연권을 모두 양도하지 않았으며 만약 국가로부터 자신의 자연권을 침해받는 다면 이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특히 이 저항권은 영국의 명예혁명의 바탕이 되고 미국의 독립혁명의 바탕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찌되었든 이런 생각들을 계몽사상이라 하고 이런 사상이 특히 부르주아 사이에서 유행함으로써 부르주아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영국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나 절대 왕정을 무너뜨리고 의회를 기본으로 한 입헌군주제를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영국의 식미지였던 북아메리카의 13개 주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독립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독립전쟁에서 13개주가 승리하면서 최초의 왕 없는 국가인 미국이 탄생했습니다. 이제 혁명의 불길은 프랑스로 옮겨갔습니다.

<앙시앵레짐, 구제도의 모순. 1, 2 신분은 온갖 특권을 누리며 세금을 내지 않지만 3신분은 그렇지 못했다>

프랑스의 상황은 심각했습니다. 구제도의 모순이라 불리는 문제가 프랑스 사회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소수의 1, 2신분들은 온갖 특권을 독점하고 세금 조차 내지 않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인 3 신분은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면서도 정치 참여는 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독립전쟁을 도와주느라 재정이 파탄난 프랑스 정부는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3부회의를 소집합니다.

원래 이 3부회는 귀족들이 소집을 요구한 것으로 3부회를 소집하여 왕권을 억누르고 귀족의 권한을 강화시키려는 계산이었으나 오히려 제 3신분의 불만이 이 회의에서 터져나옵니다. 그래서 프랑스 대혁명을 일컬어 귀족이 먼저 시작했다고 말을 합니다. 어쨌든 3부회의에서 제 3신분은 이제까지 투표방식을 거부하고 머리수 표결과 제3신분 대표수의 증원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국왕이 들어주지 않자 제 3신분은 스스로 국민 의회를 만들고 자신들이 진실로 국민을 대표하는 기구임을 선언했습니다.

<테니스 코트의 선언, 국민의회가 유일한 국민의 대표 기구임을 선언했다>

하지만 국왕을 비롯한 귀족들은 국민의회를 인정하지 않고 이를 해산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드디어 대다수 시민들이 국민의회를 지키기 위해 들고 일어설 결심을 합니다. 흥분한 시민들은 무장을 하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입니다. 이 감옥에는 혁명투사가 잡혀 있지 않았고 무기도 넉넉치 않았지만 왕권의 상징이던 바스티유를 습격함으로써 왕과 시민들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맙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 약 500% 미화된 베르사유의 장미, 동영상 보면 손발이 퇴갤한다>

비록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이 멍청한 짓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것은 시민들이 혁명에 힘을 실어준 장면이며 이로 인해 프랑스 대혁명은 승리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성공하고 인권 선언이 받아들여지자 백성들은 이제 신민이 아닌 국민으로 불리게 됩니다. 더 이상 왕의 통치 대상이 아닌 스스로 주권자를 자처하게 되었으며 이제 모든 프랑스 국민들은 시토아앵(citoyen)으로 불리우며 이제 프랑스뿐만이 아닌 전 유럽에 혁명을 퍼트리기 위해 나아갔습니다.



<라 마르세예즈, 프랑스 혁명을 무위로 돌리려 외국 군대가 침입하자 혁명과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지방에서 의용군이 파리를 수호하기 위해 올라왔다. 이때 불린 군가가 라 마르세예즈이다. 5분부터 7분까지>

국민이 주인이다. 하지만 진짜?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제 백성은 주권을 행사하는 국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정말 사실일까요? 사실 모두가 주인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국민이라는 말은 브루주아들이 대다수 농민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용한 입에 발린 말일 뿐 실상 투표권은 재산에 의해 제한되는 등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은 갈길이 멀었습니다. 미국은 최초의 공화국이었지만 가장 많은 노예를 가진 나라 중에 하나이기도 했으며 여성들은 여전히 정치 참여자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투표권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꾸준히 있어왔습니다. 미국에서는 남북 전쟁을 거치면서 투표권이 확대되어가고 노예제가 공식 폐지되었으며 프랑스에서는 7월 혁명, 2월 혁명을 거치면서 투표권이 확대되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아직 여성의 참정권은 20세기에 가서야 획득합니다. 게다가 미국의 노예제 폐지는 이름만 폐지일 뿐 흑인 노예는 이제 분리라는 또다른 차별을 받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아직 갈길이 멀었습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일뿐!>

왜 재산으로 투표권에 차등을 두었을까?

프랑스 혁명 이후 국민들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는데 투표권이 부여되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그 기준을 재산으로 나누었습니다. 왜 프랑스 혁명 초기에 투표권의 기준을 재산으로 두었을까요? 당시 신분제 철폐와 부르주아가 유력한 정치 세력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답해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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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2) 유교 정치의 이상을 꽃피운 조선
2-4 국제 관계의 안정 속에서 실리를 취하다
2-5 동아시아 정세 변화로 왜란과 호란이 일어나다 


사대와 조공은 나쁜 건가?

우리가 보통 조선하면 중국에게 사대를 해서 자존심이 없는 나라로 많이 비춰집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옳은 얘기일까요? 


 <사대와 조공은 그저 굽신굽신의 상징인가?>

우리는 지금부터 사대와 조공의 본질을 이해해 보도록 합시다. 자, 먼저 현대 외교 관계를 생각해보죠. 지금 국제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국제 기구가 있지요? 맞습니다. 바로 UN(국제연합)입니다. 국제연합은 국제평화군이라는 것을 운용하면서 분쟁 지역에 개입하고 평화를 수호하려 노력합니다. 즉, 국제사회에 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려는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과거에도 이러한 것이 있지 않았을까요?

과거에도 이러한 것이 존재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대관계를 통해서 얻어지는 조공-책봉관계입니다. 사대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인데 사대를 함으로해서 작은 나라 큰 나라에게 안정을 보장받습니다. 그럼 사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느냐? 여러분 친구 사이에 친해질려면 어떻게 하죠? 선물을 주죠. 예전에 국제사회에서 오가던 선물을 조공이라고 했습니다. 작은 나라는 조공이라는 선물을 받쳤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라고 선물을 받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큰나라는 작은 나라에게 벼슬을 내리는 데 이것을 책봉이라 하며 조공의 답례입니다. 이와 같은 국제사회의 질서를 조공-책봉관계라고 하는데 이것은 큰 나라가 작은 나라 모두를 상대해야 하는 위험을 덜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의 침입을 덜고 이웃나라가 침입을 할 시 큰 나라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조선이 건국할 당시 명나라가 가장 큰 나라이며 명이 국제질서를 주도하고 있었습니다.이런 국제질서에 가담한다는 것은 조선으로서는 국제사회에서 안전을 보장받는 동시에 명이라는 문명국의 혜택을 받는 국가라는 점을 확고히 하면서 대외적으로 조선의 위치를 높일 수 있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사대는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고 오히려 장점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명과는 사대를 주변국과는 교린을 유지했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제 사대 관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셨을 겁니다. 이제 사대관계를 이해했으니 사대를 넘어서 교린이라는 외교관계를 이해해봅시다. 교린은 주변 이웃 국가들과 관계를 맺는 방법으로 이는 사대와 같은 상하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였습니다. 이해되시나요? 특히 북방의 여진과 남쪽의 일본과 이 교린 관계를 맺었습니다. 

북방의 여진족을 조선은 회유하기 위해 귀순을 장려하거나 무역소를 설치하기도 했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자 세종때는 4군6진을 개척하여 북방의 영토를 개척했습니다. 이로서 오늘날의 국경성이 거의 완비되었습니다. 일본과의 관계는 여진족 보다 더 심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초기에는 이를 다스리려 쓰시마섬을 정복하는 강경책을 폈지만 나중에는 회유책으로 돌아서 3포를 개항하고 무역을 제한적으로 허락했습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쌀, 면화 등이 부족하여 우리나라 수입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명이 주도하는 국제질서가 붕괴되고 대외관계가 혼란에 빠지다

16세기 후반 명이 주도하는 국제질서가 동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일본의 정치상황이 혼란해지면서 명이 주도하던 국제질서에서 이탈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알고 있을 일본의 전국시대, 왜냐? 게임의 소재로 엄청 사용되었거든 ㅋㅋ>

자 여기서 일본 전국시대가 게임의 소재로 쓰인 것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전국시대 상황이 도래하면서 일본을 대표할만할 세력이 없어졌다는 뜻이죠. 전국시대 이전에 일본은 무로마치 막부라는 일본 세력을 대표할만한 정치세력이 있었지만 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무로마치 막부는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대표성을 상실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명나라에게 책봉받을 만한 일본의 정치세력이 없어졌다는 뜻이며 자연히 일본이 명나라가 주도하는 국제질서에서 이탈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탈! 일본이 맛이 가면서 국제질서가 동요된다>

일본은 명이 주도하던 국제질서에서 튕겨져 나가자 평화롭던 대외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일본의 중앙정부는 더 이상 일본을 대표하지 못하고 지방에 대한 힘을 상실하자 지방에 왜구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3포왜란, 을묘왜변 등 제법 큰 규모의 왜란을 일으키면서 평화롭던 국제사회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던 조선은 국방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원래는 양인들은 모두 군대를 가야하는 양인개병제가 채택되었지만 포를 납부하면 군역을 면제해주는 방군수포제가 확대되면서 국방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일본의 침입을 막기가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반면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한 상황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하면서 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이제 다시 일본을 대표할만한 정부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통일된 일본은 명이 주도한 국제질서에 다시 복속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전국시대 혼란기를 거치면서 자신들의 강함을 깨닫고 자부심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천하질서를 꿈꾸기 시작했고 이것이 조선의 비극이었던 임진왜란의 출발점입니다.

<동래순절도,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했다. 뒤에 퇴각하는 조선군의 모습이 있다>

일본군이 처음에 조선에 처들어올때의 명분은 바로 정명가도! 명나라를 치게 길을 빌려달라였습니다. 이 문장의 담겨져 있는 뜻을 보더라도 일본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천하관을 꿈꿨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세계관을 위한 첫번째 대상이 된 것이 바로 조선이었죠. 임진왜란의 진행과정에 대해서 부연설명을 일일이 하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여러분들도 잘 알것이고 전쟁 후에 임진왜란이 끼친 영향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죠 ^^

임진왜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은 수군과 의병 그리고 명의 원군에 있었습니다. 수군의 승리를 통해 제해권을 장악하여 일본의 서해진출 계획을 꺾었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거점만 점령한 상태였기 때문에 각지에서 일어났던 의병들은 일본군을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마지막으로 명나라 원군이 참전하면서 아직까지는 명이 주도하는 국제질서 체제가 원활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조선은 그에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명이 참전함으로써 과시하게 되어 일본군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후금이 흥기하고 새로운 국제질서가 수립되다

임진왜란은 명이 이끄는 국제질서의 확실한 사망선고와 파탄을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이제 더 이상 명나라 주도하는 국제질서에 속하지 않고 벗어나 독자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패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어나 일본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출병을 한 탓에 국력이 많이 쇠약해져 여진족의 침입을 막아내기가 힘들어졌으며 이는 결국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건국되는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누가뭐라해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조선이었습니다. 조선은 전국토가 황폐해졌으며 각 종 토지 대장과 호적등이 소실되어 세금을 걷는데 큰 지장이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임란으로 동요된 국제질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여진족의 강성은 이후에 국제사회의 판도를 뒤흔들 만한 큰 사건이었습니다.


<여진의 흥기로 명과 조선은 다시 혼란의 소용돌이로 들어간다>

 여진족은 강성해지자 후금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명의 영토를 빼앗으며 성장해나갔습니다. 조선은 필연적으로 명과 후금 사이에서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고 이때 임금이었던 광해군은 이 두 나라 사이에서 눈치를 보면서 이른 바 후세에 중립외교로 평가받는 외교 전략을 펼칩니다. 뭐 하지만 이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많으니까 수업시간에 더 깊이 다뤄 보도록 합시다 ^^

여하튼 이런 광해군의 정책에 반대하던 세력으로 서인이 있었는데 서인은 광해군이 자신이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자 유교 윤리를 어겼다는 이유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세웁니다. 이것이 인조 반정이었습니다. 조선의 정치관계가 급변하던 이 시기에 대외관계도 급변하는데 조선을 건드리지 않으려던 후금의 칸 누르하치가 죽고 조선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던 홍타이자가 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후금의 2대 칸 홍타이지, 그는 아버지와 달리 대 조선 강경파였다>

후금은 명이 주도하던 국제질서를 깨고 자신만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구축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명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에 가장 충실한 나라인 조선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후금은 조선을 명이 이끄는 국제질서에서 이탈시킴으로 해서 자신이 꿈꾸는 국제질서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 같은 이유로 총 2번에 걸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습니다.

<서인정권은 후금과 거리를 두고 싶어했다>

당시 조선은 서인정권이 들어서면서 광해군이 집권하던 시절에 비해 후금과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서인정권의 태도 역시 호란을 일으킨 하나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이 모든 것들 맞물려 호란이 일어났는데 첫번째 정묘호란 때는 형제관계를 맺는 것으로 사태가 수습되었으나 두번째 병자호란 때는 그런 것으로 사태가 수습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후금의 칸이 황제를 칭했기 때문입니다. 황제라는 것은 명이 주도하는 국제질서를 완벽히 거부하고 자신의 질서를 재구축하겠다는 얘기였고 조선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전쟁이 발발했으며 이 전쟁의 중요성은 청태종인 홍타이지가 직접 군대를 지휘한데서 드러납니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항전했지만 강성한 청의 군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의 임금이었던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했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청나라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선은 정신적으로 항복하지 않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청을 여전히 오랑캐로 여기고 중화의 정통 계승자는 조선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나중에 소중화의식, 조선중화론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청에게 당한 치욕을 씻자는 의미로 청을 정벌하자는 북벌론이 대두하기도 합니다.

 <청에게 모욕을 갚자는 북볼론, 하지만 현실성은 없었다>

 청은 왜 조선에게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강요했을까?

 <치욕적인 항복의식이었던 삼배구고두례>

http://gall.dcinside.com/list.php?id=chuno&no=70041&page=1&search_pos=-70258&k_type=1000&keyword=%EB%8C%80%EA%B8%B0%EB%A6%AC&bbs=(인조의 삼전도 항복의식)

 청은 남한산성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세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번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라는 것을 강요했습니다. 또한 청 태종 자신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삼전도비를 세울 것을 지시했는데 청은 왜 이토록 조선에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강요했던 것일까요? 당시 국제관계 속에서 이를 파악해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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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2) 유교 정치의 이상을 꽃피운 조선
2-2 사림,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다
2-3 민족 문화가 크게 발전하다 


선비가 숲을 이루다

고려 왕조는 500년 동안 호족, 문벌귀족, 무신, 권문세족, 신진사대부 총 4번의 권력 교체가 일어났지만 조선은 단 한 번의 권력 교체가 일어났습니다. 그 주인공들이 바로 사림(士林: 선비 사, 수풀 림)입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조선은 우리가 알기로 선비의 나라라고 알고 있는데 왜 갑자기 선비들이 숲처럼 등장했다고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

<선비들이 숲처럼 많이 등장하다!>

사림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먼저 알아보는게 가장 좋겠지요? ^^ 여러분들 조선이 개국할 당시 조선 개국에 반대하는 온건 신진사대부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나요? 이들은 성리학 이론에 충실하여 충신불사이군을 내세우며 조선 개국에 끝내 반대했습니다. 일부는 죽임을 당하거나 또 일부는 은둔했는데 은둔하기만 하면 심심하잖아요? 또한 이들은 공부도 많이 했기 때문에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은둔하고 있는 동안 제자들에게 전수했습니다. 그래서 이들 밑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리학을 공부했습니다. 바로 이들이 사림입니다.

세월이 오랜 시간 지나자 사림의 수가 늘어났습니다. 사림의 수가 늘어나고 조선이 개국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자 사림들이 서서히 정치에 참여하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은 세상을 다스리는 학문인 성리학을 공부했기 때문이었죠. 세상을 다스리는 학문을 공부했는데 언제까지 숨어 있을 수 있었을까요? 드디어 성종 때가 되면 이들은 서서히 조선의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합니다.

<사림들이 정치세력으로 등장함에 따라 당시 부패했던 훈구세력과 날카롭게 대립한다>

그렇다면 사림들이 정치세력으로 전면적으로 나서기 전에 정치를 담당하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그들은 바로 조선 개국에 적극 참여했으며 세조 때의 정변을 통해 공신으로 지위를 굳힌 훈구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개국초에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개국했습니다. 이들은 성리학에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나라를 운영하면서 다른 학문도 받아들일 필요성을 느끼고 탄력적으로 다른 학문도 받아들였습니다.

언뜻 들으면 탄력적이라는 말은 좋은 말 같지요? 하지만 탄력적이라는 얘기는 그만큼 원리 원칙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말도 됩니다. 훈구파들은 원리 원칙을 어기고 공신인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등 세월이 지나면서 부패해졌습니다. 성리학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사림들은 이런 훈구파들이 눈에 차지 않았습니다. 곧 사림들은 훈구파와 날카롭게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http://home.ebs.co.kr/reViewLink.jsp?command=vod&client_id=home2441&menu_seq=4&enc_seq=3009391&out_cp=naver(훈구와 사림의 다툼)

<훈구와 사림의 비교>

특히 사림들은 바른 말을 잘했기 때문에 삼사 등으로 주로 진출하여 왕과 대신들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비판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성리학적 정치에 이상향이었던 향촌 자치 등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이 같은 주장은 훈구 세력에게는 굉장히 기분 좋지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때문에 훈구세력은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4차례 사화를 일으켰습니다. 사화는 선비들이 화를 당했다는 뜻으로 사림들이 훈구 세력에게 정치적으로 패배한 사건을 의미합니다. 사림들은 4차례 사화를 당하면서 큰 위기에 빠집니다.

사림, 굴하지 않고 결국 그들의 세상을 열다

앞에서 제가 사림들이 크게 4차례 사화를 당했다고 했지요? 사화라는 게 규모가 상당히 커서 대부분의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사림은 결국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여 훈구 세력을 밀어내고 정치적 주도권을 잡습니다. 역사는 이유가 중요하다고 제가 항상 수업 시간에 얘기했죠? 이들은 어째서 중앙 정치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을까요?

<사림은 향약을 통해 향촌 지역의 민심을 장악했다>

사림들은 향약을 보급하면서 백성들에게 까지 성리학을 보급했는데 이것을 통해 향촌에서 사림의 지지 기반을 확고히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또한 각 지역에 성리학을 공부하는 한편 자신들이 받드는 선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서원을 만들어 자신들끼리 결속을 다졌습니다.

<공부하겠다는 데 반대할 명분이 있을까? 사림은 서원을 세워 자신들의 제자를 키우고 결속력을 강화한다>

결국 이 두 가지 발판을 이용해 사림들은 정치적 주도권을 훈구 세력으로부터 빼앗아 올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정치 세력의 주도권을 잡은 이후로 조선은 이제 백성들까지 성리학적 질서를 받아들이는 단계까지 오게됩니다.

하지만 성공한 세력들은 저 마다의 견해 차이가 존재하는 법. 사림은 정치 주도권을 장악한 이후에 정치적 견해 차이와 이조 전랑(이조 정랑과 이조 좌랑을 합쳐 부르는 말로 3품 이하 문관들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다)의 자리를 가지고 사림 간에 첨예하게 대립하게 됩니다. 특히 이조 전랑 자리는 자신들의 학맥에 있는 사람을 등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리였기 때문에 대립이 격화되었으며 결국 선조 때 동인과 서인으로 사림이 분열되면서 이후 이들의 정치를 붕당 정치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붕당 정치는 소모적인 당쟁이 아니며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하여 서로 나은 대안을 제시하고 서로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견제하는 어찌보면 정당 정치의 기초적 형태라는 것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

<조선 붕당의 흐름, 여기서 국사 공부를 좌절했던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ㅠ>

민본 사상을 바탕에 둔 문화가 싹트다

자, 이제 문화사 얘기를 해봅시다. 정치사와 문화사를 나누는 것도 상당히 웃긴 일이긴 하지만 교과서 구성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할 수 없지요. ^^; 원래 문화라는 것은 그 당시 정치 세력과 시대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조선은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수립된 나라이기 때문에 조선 전기 문화는 이 민본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이 민본사상의 완성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훈민정음입니다.

<훈민정음은 백성들이 의사소통을 쉽게 하고 유교 윤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고 창제되었다>

<조선의 문화>

훈민정음은 백성들도 문자를 알고 공부를 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만든 문자로써 만약 백성들이 글을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 창제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했던 문자입니다. 그러나 조선 왕조에서는 백성을 근본으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유교윤리를 보급하려 했기에 훈민정음 창제로 그것이 이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백성을 중심으로 생각했던 사례는 조선 전기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백성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농사를 위해 우리 실정에 맞는 농서인 농사직설이 편찬되었고 또한 농사에 필요한 날짜와 절기를 알기 위해 새로운 달력인 칠정산이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수 많은 천체 관측기구가 만들어지고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 농사에 필요한 기상 관측을 위해 조선 왕조가 노력했던 흔적이 보입니다. 또한 우리 나라 풍토에 알맞는 의서들도 만들어졌고 국방력 강화를 위한 신기전, 화차, 거북선등도 이때에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모든 문화와 기술의 경향은 한마디로 민본에 있습니다. 백성을 근본에 두고 백성을 생각했던 마음이 문화나 기술에도 적극 반영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민본외에도 조선 전기 문화를 결정지었던 중요한 특징이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주성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명나라와 대립하기도 하는 등 중국이라고 해서 무조건 한 수 접어주는 모습은 조선 초에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대 역시 작은 나라로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강구되었을 뿐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런 자주적 기풍이 문화에도 반영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때 적극적으로 단군의 후예라는 인식이 성립되었다. 고려 시기만 해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자주적 기풍은 민족적 기원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져 단군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졌습니다. 뭐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정했으니 그것만 봐도 단군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지요 ^^ 또한 우리 민족 사서인 동국통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이 편찬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정한 것에는 또 다른 불편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기자 조선 계승의식입니다. 기자 조선이란 말이 좀 생소할 수도 있는데 지금부터 알아봅시다 ^^

<기자의 초상화, 물론 상상도이다 ^^;>

기자는 중국 현자 중에 한 사람으로 중국 은나라 주왕의 폭정에 대해 적극 간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원래 우리도 그렇지만 싫은 소리 계속하면 짜증나잖아요? 그래서 주왕도 기자를 감옥에 가둡니다. 주왕은 이후 주나라의 무왕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는데 이때 기자도 풀려납니다. 주 무왕은 기자를 등용하려 했지만 기자가 거부하는데 여기서 재밌는 기록이 하나 전해옵니다. 그것은 주 무왕에 의해 이 기자가 조선왕에 봉해졌다는 얘기입니다. 이를 기자조선설이라고 하는데 이에 따르면 우리 단군조선 이후에 중국인인 기자가 조선을 지배했다는 얘기됩니다. 지금이야 이 얘기가 불쾌한 얘기지만 그 당시에는 중국이 문명의 상징이었으니까 기자가 조선에 왔다는 것 자체를 매우 자랑스러워 했고 그랬기에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은 기자의 조선을 잇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역사는 역시 한가지 면만 생각하면 안 되겠죠? ^^

마지막으로 지리 서적에 관한 얘기를 해야겠네요. 우리는 보통 조선 왕조 내내 지리학적 지식이 부족하다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만들 때도 논란이 많았던 것으로 아는데 그것은 좀 큰 오해입니다 ^^; 특히 조선의 건국 초에는 나라를 다스릴 정보가 많이 필요했으므로 적극적으로 지리서적을 편찬했습니다. 팔도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조선의 지리학적 지식이 후기에 비해 크게 보잘 것 없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팔도지리지>

그리고 대동여지도 얘기 중에 가장 웃긴 것이 전국 답사를 해서 지도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김정호가 초인도 아니고 모든 조선 땅을 돌아보지 않았을 겁니다 ^^; 답사를 가기도 했겠지만 예전 지도 역시 참고한 끝에 대동여지도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죠. 아시겠죠? ^^

성리학이 심화되어 조선에 만발하다

조선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성리학입니다. 하지만 조선 왕조가 처음부터 성리학의 꽃을 피웠던 것은 아닙니다. 한 학문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려면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요. 게다가 처음 조선의 개국을 주도했던 사대부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성리학만을 고집하지는 않아서 탄력적으로 다른 학문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건 훈구파할 때 배웠지요? ^^ 하지만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점점 사림 세력들이 정치 주도권을 잡아나가는 과정에서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연구가 뿌리 내리기 시작합니다.

 

<퇴계 이황, 동양의 주자로 불리지만 우리에겐 천원 할배에 불과하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나타나는 것이 이기론입니다. 이기론은 성리학에 가장 중심이 되는 원리로 조선시대 수많은 유학자들이 이를 연구했습니다. 특히 퇴계 이황은 이기론을 정립하는 데 큰 공헌을 세운 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이언적의 주리론을 더욱 심화 발전 시켰습니다. 이황의 주리론은 세상을 움직이는 근본원리인 이를 중요시한 것입니다.


 <5천원 아저씨인 율곡 이이,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5만원권 여사로 아들 위에 있다 ^^;>

반면 율곡 이이는 서경덕의 주기론을 계승하면서 이황의 주리론도 나름대로 받아들여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그의 주기론은 실제 나타나는 현상인 기를 중요시했습니다. 두 학자의 이와 같은 차이는 그 당시 정치상황을 감안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황의 경우 아직 사림이 정치적 주도 세력으로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적인 기를 강조하기 보다는 원리, 원칙을 강조하는 이를 깊게 연구했고 이제 사림이 완전히 정치적 주도 세력으로 떠오른 율곡 이이 대에는 현실적 현상을 연구하는 기를 연구한 것입니다. 이 같은 정치 상황 차이에 주목 한다면 두 학자의 학문적 차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이런 학문 차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입장차이로도 이루어져 나중에 붕당이 탄생하는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성리학자들의 학맥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림의 계보, 영남은 경상도 지방을 뜻하며 기호는 경기와 충청 지방을 말한다>

 정치세력에 따라 바뀌었던 양반문화

조선의 지배층은 양반으로 이들이 향유했던 문화를 바로 양반문화라고합니다. 하지만 양반이라고 해도 조선 초기와 중기 양반에 대한 성격은 사뭇달랐습니다. 개국초의 양반들은 훈구파라고 불리우며 성리학 외에도 다양한 문화를 수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그런 그들의 성격이 그들이 향유했던 문화에도 나타났는데요. 유교를 고집한 그림 보다는 도교나 노장사상이 녹아있는 그림도 제법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몽유도원도나 고사관수도에 나타납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의 꿈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으며 당대 유명한 문사들이 이 그림에 대한 찬을 달았다>

하지만 사림이 집권하고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양반 문화에 변화가 생기는데 주로 소박함, 지조 등을 나타내는 작품들이 나타납니다. 서원이 많이 건축되었으며 선비의 지조를 나타내는 매화, 난, 국화, 대나무를 그린 사군자의 문인화가 유행했습니다. 또한 도자기도 화려함 보다는 소박, 담백한 맛이 있는 백자가 유행했습니다.

 <사림들의 단아함이 느껴지는 백자, 허접해 보인다고? 이 백자는 미국에서 경매 결과 12억원에 팔렸다>

또한 한글 보급이 확대되면서 그에 따른 가사. 시조 문학이 발전했으며 황진이, 신사임당 같은 여류 문인들의 활동도 눈에 두드러졌습니다. 

사림들이 학맥에 따라 정치적 입장이 달랐던 까닭은?

사림들이 주도권을 잡은 이후로 붕당정치가 전개되어 나가는데 이 붕당은 주로 같이 공부를 한 사이거나 스승과 제자 사이에 주로 형성되었습니다. 정당에 일종이라고도 볼 수 있는 붕당이 왜 학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지 그 이유를 말할 수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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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2) 유교 정치의 이상을 꽃피운 조선
2-1 민본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통치 체제를 갖추다

조선은 무능한 나라일까?

우리가 역사를 배우면서 까고 까고 또 까는 나라가 하나 있습니다. 이토록 미칠 듯이 무한 까임을 당하는 나라가 바로 조선입니다. 여러분 조선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나요? 실질적 정치에는 관심없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했던 양반들, 상복을 몇 년 입느냐로 싸웠던 정치싸움, 무능력한 지배층 때문에 일본에게 망한 치욕스러운 나라. 이 모두가 사실은 일본이 설정한 '식민사학'이 조선을 깎아내리는 틀이라는 걸 알고 계십니까?

<일본이 설정한 식민사학의 잔재는 조선을 무능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러나 조선이 그렇게 무능했던 나라였을까요? 결론부터 얘기하면 아니였습니다. 조선이 건국의 이념으로 삼은 성리학은 백성을 어떻게 하면 잘 살게 할지 고민하는 학문이었습니다. 거기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어디까지나 공론(공공의 의견)을 중시하며 움직였습니다. 이러한 것만 봐도 조선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백성을 생각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조선이 세워지는 과정을 함께 살펴보도록 합시다. ^^

최초의 역성 혁명이 일어나다

고려 말기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권문세족들은 산과 강을 경계로 토지를 소유할 만큼 엄청난 토지를 차자하고 있었으며 또한 세금도 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고려 초기 부터 국가 종교였던 불교도 타락할 대로 타락하여 농민을 쥐어짜고 있었습니다. 농민들은 결국 세상을 등지고 산에 숨거나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 바로 신진 사대부였습니다. 이들은 성리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에 통감하고 권문세족과 불교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등장했습니다. 이들 신진 사대부는 처음에는 고려를 개혁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가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 새 왕국을 개창할 결심을 합니다.

이들은 이성계와 같은 신흥무인층과 손을 잡았는데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떠나는 도중 돌연 군사를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남아있던 권문세족들을 모두 제거하여 신진 사대부들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권력을 잡은 신진 사대부들은 토지 개혁(과전법)을 통하여 권문세족들의 토지를 빼앗고 자신들의 경제 기반을 다졌으며 국가 재정기반도 확충시켰습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고려 왕조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정몽주 일파는 온건파로 가고 새로운 나라를 나라를 개국하자는 정도전 일파는 개국파로 나뉘어 첨예한 대립을 거듭하다 온건파였던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게 맞아 죽습니다. 이로써 조선 건국에 방해되는 인물은 없어지고 1392년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가 개창됩니다.

<정몽주가 죽었다고 전해지는 선죽교, 아직도 혈흔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왕권과 신권의 절묘한 조화

조선은 백성을 근본을 삼고 덕에 의해 통치하는 유교 정치 이념에 따라 정부기구를 조직했습니다. 따라서 왕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신하가 왕권을 견제함으로써 정치 참여 인원을 늘려 왕이 잘못해도 바로 잡을 수 있는 정치체제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조선의 중앙 정치 기구>

의정부는 대신들이 모여 회의하는 합좌 기구로 고려시대 식목도감, 도병마사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며 삼국시대의 귀족회의에서부터 그 기원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의정부 밑에서 실질적으로 행정 업무를 담당한 6조가 있었습니다. 보통은 국왕은 의정부를 거쳐서 6조의 업무를 보고 받았지만 왕권이 강할 때는 의정부의 동의 없이 직접 6조와 연결되었습니다. 의정부와 국왕이 상의하는 것을 의정부 서사제라 하며 의정부를 통하지 않고 국왕이 직접 6조와 통하는 것을 6조 직계제라 합니다. 6조 직계제는 태종과 세조 때 시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정치기구에서 보다 눈에 띄는 것은 바로 3사로 대표되는 왕권을 견제하는 신권기구들이였습니다. 3사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으로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사헌부, 국왕의 정치를 비판하는 사간원, 학술기관으로 국왕과 신하들이 같이 모여서 공부하면서 정책을 논의하던 홍문관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고려시대 대간이 가지고 있던 간쟁, 서경, 봉박의 권리를 가지고 국왕을 견제했습니다.

<통초오옥 하여 주시옵소서~ㅠㅠ 왕이 듣기에는 짜증났겠지만 신권은 왕권을 견제하고 정치 참여의 폭을 넓혔다>

하지만 이렇게 신권만 강대했던 기구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의 비서 기관이었던 승정원과 왕의 특명에 의해 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가 있었는데 이것은 왕권을 유지하거나 강화하는 기구였습니다. 이 같은 조선의 통치체제는 경국대전이라는 책에 수록됨으로써 조선이 명실상부한 법치국가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왕의 힘이 모든 지방에 미치다

조선은 건국하면서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것을 천명하는데 그 의지가 어디에서 나타나냐면 바로 지방정치체제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조선은 8도로 행정구역을 나누고 향, 소, 부곡을 모두 폐지하여 행정구역을 모두 일원화하였습니다. 고려와 차이점이 느껴지시나요? ^^ 또한 고려때는 일부 지역만 지방관이 파견되었다면 조선은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어 왕이 직접 백성들을 돌보겠다는 뜻을 나타내었습니다.

<조선의 행정구역, 오늘날 행정구역과 거의 비슷하다>

지방 군현에 파견된 수령은 행정, 사법, 군사권 등 막대한 권한을 모두 장악했습니다. 수령의 힘이 강해지자 이때까지 지방에 강력한 유력자였던 향리는 그 지위가 격하되어 수령을 보좌하는 역할로 하락했습니다. 누군가 머리 속에 떠오르지요? 바로 이방이 그들입니다 ^^;

<지방의 향리들은 이제 이방과 같은 위치로 크게 격하되었다>

또한 각 도에는 관찰사가 파견되었습니다. 고려 시대때 안찰사가 파견되었던 것이랑 비교해볼 수 있겠지요? ^^ 이들은 각 군, 현에 파견된 수령을 관리, 감독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고려시대 안찰사가 임시직이었던 것에 비하여 관찰사는 그 지위가 보장되어서 안찰사보다 훨씬 힘이 강했답니다.

또한 향촌의 자치를 어느 정도 인정했는데 그것을 유향소라는 기구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유향소는 지방에 덕망있는 인사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수령을 보좌하면서 서울에 있는 경재소와 수시로 연락했습니다. 중앙 정부는 경재소를 통해 유향소를 통제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의 장악력을 높였습니다.

진정한 과거제가 시작되다

우리나라 본격적인 과거제의 시작은 고려시대부터입니다. 그러나 고려시대 과거제는 조선시대에 비해 약간 미흡하다고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하나는 과거를 치지 않고도 음서로 관직 진출이 가능했으며 무과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조선시대 들어서 이 두 가지를 보완하여 음서가 존재했지만 매우 낮은 관직만 허용했으며 무과를 새로 개설했습니다.


<조선시대 무과 재현 모습>

조선시대 과거는 크게 문과, 무과와 기술직을 뽑는 잡과로 구분되었습니다. 과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문과는 소과와 대과로 구분되어 소과는 초시와 복시를 통과하면 생원과 진사라는 호칭을 주고 지금의 대학과 비슷한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습니다. 여기서 공부를 한 사람들은 대과에 도전하는 데 대과 역시 초시, 복시로 나뉘고 여기서 선발된 33명은 임금 앞에서 보는 시험인 전시를 통하여 순위가 매겨졌습니다.


 
<조선시대 과거 재현>

조선의 과거제도는 음서의 폭이 좁아지고 과거의 제도가 정교화 됨에 따라 고려 시대가 가지고 있던 귀족적 특성이 떨어져 나가고 관료적인 체제로 정비되었습니다.

양인과 천민으로만 신분이 구별되다

이제 조선의 신분제도를 살펴볼 차례네요 ^^ 조선 시대로 들어서면서 고려시대때 존재했던 향, 소, 부곡이 차별 받던 평민들이 없어집니다. 이들은 대개 양인의 신분으로 편입되었으며 양인은 군대를 가고 세금을 내는 신분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과거 응시 자격도 있어 벼슬을 하는데 법적으로는 아무 제한이 없었습니다. 다만 돈이 없어서 시험을 준비하지 못할 뿐이었습니다 ㅠㅠ

조선은 법적으로는 두 개의 신분 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바로 양인과 천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사회가 복잡하게 됨에 따라 양인들은 양반, 중인, 상민으로 분화되어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이라는 4개의 계급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양반 혹은 사족들은 군역을 면제 받는 특혜를 누렸으며 중인들은 주로 기술직을 맡았습니다. 지금의 의사나 통역관 같은 전문직들이죠 ^^ 상민의 대부분은 농민이었습니다. 천민은 대부분 노비였으며 이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물건처럼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농자천하지대본! 농민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국가가 되다

계속 하는 얘기지만 조선은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삼은 나라였습니다. 유교 정치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민생 안정이며 민생이 안정 되려면 백성들이 농사를 안심하고 지어야만 했습니다.

<농사는 조선 시대 최대의 관심사였다. 수많은 농사 관련 서적과 농사에 대한 토론이 이를 반증한다>

나라에서는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않고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방지하기 이해 사, 농, 공, 상이라는 말을 만들어 직업을 차별했고 이를 토대로 백성들을 농토에서 떠나지 못하게 강하게 결박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은 화폐 유통이 다른 나라보다 많이 늦어졌지만 16세기에 이르면 상공업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고 상공업과 무역이 활성되었습니다.

하지만 후대 상공업과 무역이 발달해도 여전히 가장 중요했던 것은 농사였겠지요? ^^ 왜냐하면 국가의 주요수입원은 농사를 짓는 데서 나왔으니까요. 농사를 잘 짓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세금을 어떻게 걷느냐 입니다. 특히 세종 시절에는 이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을 도입했습니다.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은 그 토지의 사정을 보고 세금을 걷는 방식입니다. 전분 6등법은 토지의 비옥도를 보고 토지가 비옥하냐 비옥하지 않느냐에 따라 1~6등전으로 등급을 매겨 세금을 징수하는 방법이고 연분 9등법은 그해에 농사가 어떻게 되었느냐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까지의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농민들이 세금을 깎으려고 했겠지요? ^^ 조선후기로 갈수록 이런 현상이 두드러져 인조 때 가면 세금이 최하 4두로 고정되는 영정법으로 바뀝니다.

농민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세금을 걷느냐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관리에게 월급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화폐가 유통되기 어려웠던 시절로 주로 토지를 매개로 월급을 주었습니다. 최초에 시행되었던 관리들의 월급제도는 과전법으로 경기도 지역의 토지의 수조권(세금을 걷을 권리)을 관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전은 관리가 죽으면 반납해야했지만 수신전(미망인에게 지급), 휼양전(미성년인 자식에게 지급)의 명목으로 세습이 가능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현직 관리들에게 줄 과전이 부족해졌고 세조 때는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마저 잘 안되자 성종 때는 관리들이 수조권을 직접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직접 수조권을 행사하여 대신 관리의 과전에서 대신 세금을 받아 다시 관리에게 그 수익금을 지급하는 관수관급제로 바뀌었습니다.

<부동산에 대한 규제가 심해지면 부동산을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커지는 것처럼 관료들은 수조권을 받기 어려워지자 토지를 소유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규제가 심해지면 다른 수단을 강구하게 되는게 인간이죠 ^^; 결국 관료들은 과전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기 보다는 자신이 직접 토지를 사유화하는 길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결국 국가는 관료들에게 수조권을 주는 것을 포기하고 녹봉만 지급하게 되었습니다.

평민들은 왜 과거를 볼 수 없었나?

조선시대 평민들은 법적 신분은 모두 양인으로 과거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과거를 보지도 않았거니와 과거를 보기도 힘들었는데 어떤 이유에서 그랬을까요? ^^
Posted by Av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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