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4) 근대 국가 건설을 지향하다
4-1 개화사상은 어떻게 형성·발전 하였을까? 


북학론, 개화사상의 뿌리가 되다

한 시대를 주름 잡았던 사상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상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자극을 주었던 다른 사상이 있고 시대 환경이 그 사상을 만드는 것이죠. 개화사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이 일본과 서구에 문을 열었던 그 시기에 개화사상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고 이전부터 개화 사상의 뿌리가 되는 사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북학론이었습니다.

북학론은 청과 적극적인 교류를 주장하던 사람들이였습니다. 당시 청에는 많은 서양 선교사와 서양 서적들이 있었는데 이것을 통해 북학파 실학자들은 자연스럽게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됩니다. 천주교도 그렇게 해서 들어오게 된 것이구요. 

<정약전의 영정, 그는 천주교 신자였다. 서양 서적을 공부하다 신자가 된 사례다>

이처럼 청과 교류를 주장했던 사람들은 서양 문물도 같이 접했고 또한 그런 사상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전파하면서 개화사상까지 이어져오게 됩니다. 하지만 개화사상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이런 양반들 보다는 중인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오경석은 역관 출신으로  청에 일찍부터 드나들면서 청의 사정과 서양문물에 대해 남들보다 일찍 눈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중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힘이 없었고 대신 양반 자제들을 뽑아 가르치기로 결심합니다. 또한 이런 이들의 개화사상에 공감한 양반이 있었으니 그니 북한론을 주장했던 박지원의 손자였던 박규수였습니다.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 이 세 사람이 함께 개화사상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서양의 나라와 역사를 소개한 해국도지, 유럽나라의 모습을 그린 부분이다>

이들은 주로 해국도지, 영환지략이라는 새로운 책을 통해 서양의 지리와 문물, 역사를 접하고 당시 국제 정세와 서양에 대해 남들보다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양의 침략에 맞서려면 하루 빨리 개항을 하여 서양의 발달된 기술을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표적인 통상개화론자인 박규수 역시 어디까지나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을 뿐입니다. 즉, 유교적 원리는 지키면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얘기였지요. 뭐 그래도 기존의 유학자보다는 훨씬 더 개방적인 인물이었다고 봐야겠습니다.

개화파가 형성되나 개화의 방법을 서로 달리 생각하다

어찌되었든 간에 개화사상을 가진 이 세명 밑으로 상당히 똘똘한 양반 자제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바로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으로 나중에 조선의 개화를 이끌어갈 주역으로 성장하는 사람들이죠. 주로 박규수의 사랑방에 모여서 당시 정세에 대해 토론해나가며 조선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모색했습니다.

 <박규수 집터에 있는 백송, 이곳에서 개화파 인물들이 꿈을 키웠다>

특히 김옥균은 벼슬길에 나서면서 일본에 조사 시찰단으로 파견되었는데 그곳에서 서양 기술 뿐만 아니라 사상과 제도까지 받아들일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이런 사상을 문명개화론이라 부릅니다. 주로 김옥균과 같이 동문수학했던 박영효, 서광범 등은 김옥균의 입장에 대체로 동의했습니다.

반면 이들과 다르게 개화를 모색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으로 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들입니다. 이들은 청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유교 논리를 고수하며 서양의 기술만 받아들이고자 했는데 이를 동도서기론이라 합니다. 개화 방법에 있어서 두 가지 입장차이가 나타난 것입니다.

문명개화론을 주장하는 입장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범으로 삼아 근대적인 사상과 제도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했습니다. 또한 임오군란으로 청국의 영향력이 강해진 시점에서 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청과의 사대관계를 폐지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생각이 달랐는데 그들은 청이 조선이 개화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존재이며 서양의 사상과 제도까지는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입장차이는 서로 다른 당파 성립으로 이어졌습니다. 급진개화를 주장하는 김옥균 일파는 자신들을 개화당 또는 독립당으로 부르고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는 김홍집 일파를 수구당 또는 사대당으로 불렀습니다. 이들의 갈등의 골은 깊어져만 갔습니다. 

왜 하필 사랑채야?

여러분 박규수 사랑채에 모여서 당시 조선의 정세에 대해 얘기를 하곤 했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왜 하필 사랑채에서 얘기를 했을까요? 이번 기회에 한옥의 구조에 대해서 조금 알아보는 시간을 수업시간에 가지겠습니다. ^^ 
Posted by Avila
,

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3) 개화 정책의 추진과 반발
3-3 임오군란, 개화에서 소외된 민중의 반발 


청나라, 조선을 지배하려 하다

조선이 근대화와 개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나라는 어느 나라일까요? 일본이라구요? 뙈행! 단순히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ㅎㅎ

 <아니라고 이것들아! 땡이라고 ㅋㅋ>

조선의 근대화에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은 바로 청나라입니다. 왜 청나라가 일까요? 여러분 생각을 조금 더 하면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청나라는 오랫 동안 조선에 영향력을 끼치던 나라였습니다. 어떻게요? 바로 사대와 조공을 통해서 말이죠. 

기본적으로 사대와 조공은 종속관계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전에도 설명했지만 사대를 하면서 작은 나라는 안정과 주변국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릴 수 있습니다. 큰 나라는 작은 나라의 침입에서 해방되고 내부에 더 신경을 쓸 수 있지요. 따라서 이 관계는 기본적으로 서로 간섭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즉, 근대화 이후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가 관계를 맺는 방법인 식민지, 보호국은 사대와 조공과 질적으로 다른 관계였습니다.  

<조선을 지배하려는 두  나라, 청과 일본. 러시아가 두 나라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다>

하지만 청이 제국주의 침략을 받고 나라가 어려워지자 사대와 조공 관계를 달리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청은 제국주의 침략에서 벗어나고 동시에 스스로도 제국주의 길을 걷기 위해 사대와 조공 관계를 근대적 식민지, 보호국 관계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청은 사대와 조공 관계를 이용하여 서구 열강으로부터 조선을 보호국화 하려 했으며 이런 청의 시도는 개화파에게 크나큰 위협으로 느껴졌습니다.

개화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

청나라의 위협과 더불어 일반 백성들은 개화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개항 이후 조선은 기본적으로 일본, 서양 열강들에 불평등 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무역에 있어서 막대한 손해가 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은 많은 양의 쌀을 제한 없이 사들여가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불만은 계속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중앙에서는 신식군대와 구식군대의 차별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구식 군대였던 2군영에 대한 대우가 매우 형편없었는데 13개월 만에 지급받은 쌀에는 쌀보다 겨와 모래가 훨씬 많았습니다. 결국 쌓여있던 구식 군인들의 불만은 폭발했고 이들은 임오군란(1882)에 일으켰습니다.

 
<임오군란의 전개과정>

임오군란은 구식 군인의 불만에서 부터 시작되었지만 개화 정책으로 인한 일반 백성들의 불만도 이때같이 터져나오게 됩니다. 서울 하층민들과 합세한 구식군인들은 정부 고관대작(특히 민씨일가)의 집을 불태우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습니다. 이들은 나아가 창덕궁까지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찾으려 했으나 찾는데 명성황후는 이미 종적을 감춘지 오래였습니다. 사태가 커지자 이들은 흥선대원군에게 지지를 호소했고 결국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은 재집권하면서 그 간 개혁을 진행시키던 통리기무아문이나 별기군을 없애고 기존의 삼군부와 5군영 체제로 바꿉니다. 

하지만 민씨 일가는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민씨 일가는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청에게 연락을 취했고 청은 이것을 기회로 여겨 일본 군대의 출동을 막고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신속히 군대를 출동시켜 임오군란을 진압시켰습니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군란의 책임을 물어 청나라로 압송됩니다.

 

<임오군란을 통해 조선 내 청세력이 확대된다. 청나라 대표 군인이던 위안스카이가 임오군란 후 조선에 주둔한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 내에서 청의 세력은 날로 확대되어 갑니다. 청나라는 군란을 진압한 후에도 3000명의 군사를 조선에 주둔시켰습니다. 이때 중국의 유명한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위안스카이도 우리나라에 오게 됩니다. 또한 뮐렌도르프 등 외국 고문을 파견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고히했습니다. 이어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라는 조약에서는 조선을 청의 속방으로 규정하면서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 내륙 시장까지 진출할 수 있는 특권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한편 일본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는데 이들은 임오군란 당시 일본 공사관이 불탄 책임을 물어 제물포조약을 조선 측에 강요했습니다. 주요 내용으로는 사과 사절단 파견과 주모자 처벌, 배상금 지불, 공사관 경비를 위한 일본군 주둔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었는데 고종은 이 요구를 모두 수용하고 맙니다.

청나라는 왜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을까?

오늘 배운 내용을 보면 청나라가 계속해서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만들려고 하는 움직임이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청은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을까요? 당시 청나라의 국제적 입장을 고려해서 얘기해보도록 합시다. ^^ 

Posted by Avila
,

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3) 개화 정책의 추진과 반발
3-1 정부, 개화 정책을 추진하다
3-2 보수적 유생층,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다 


조선, 근대를 위해 노력하다

조선은 강화도 조약과 서구 열강과의 협정 체결로 인해 서서히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보통 여러분이 개화 하면 기타 다른 나라와 교류를 하는 것만 생각하지만 개화의 본질은 거기에만 있지 않습니다. 제도, 기술, 의식 등 모두 다 근대화를 시키는 것이 바로 개화입니다. 여기서 근대화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서구 열강처럼 되자는 의미가 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식 같은 것들은 바로 서구 사람들처럼 바뀔 수 있을까요? 그러기 힘들겠죠? 그래서 우선은 제도와 기술을 배우기 위해 노력합니다. 먼저 제도 변화에 관한 부분 부터 살펴봅시다.

먼저 기존의 의정부와 6조가 있었던 제도는 사라지고 근대적 행정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새롭게 설치했습니다. 이 통리기무아문은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참고하여 만든 것입니다. 통리기무아문 밑에는 실무를 담당하는 12사를 설치했습니다. 그러니까 의정부-6조 시스템이 통리기무아문-12사 시스템으로 바뀐겁니다. 이해되죠? 

<신식 군대인 별기군, 일본인 교관에 의해 훈련되었다>

제도 중에서 이 시기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뭐니뭐니 해도 바로 군사제도입니다. 힘을 키우지 않으면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에게 먹혔던 시대이기 때문에 강한 병사를 갖는 것은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조선의 중후기 군사제도는 5군영 체제였는데요. 이 5군영을 무위영과 장어영 2군영으로 축소시키고 대신 신식 군대를 따로 양성했는데 그것이 별기군입니다. 그러니까 2군영은 구식군대, 별기군은 신식군대입니다. 별기군은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여 신경을 써서 가르쳤습니다. 

가까운 나라는 어떠한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던 근대화는 기본적으로 서구를 따라잡고자 했던 것이기 때문에 진짜 근대화는 어떤 모습인지에 대한 모델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 다른 나라를 보고 배우고자 하는 사절단이 유독 많이 파견되었는데요. 그 중에서 조선은 특히 서구 열강 보다는 옆 나라인 청과 일본을 보고 근대화가 무엇인지 가늠해보고자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도 조선의 근대화 과정이 상당히 특이한 것임을 느낄 수 있죠?

조선은 개항이 늦은 만큼 이미 개항을 하여 서구 열강을 따라잡고자 했던 청, 일본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서구 열강보다는 청과 일본의 영향이 지대했습니다. 그래서 일본과 청 두 나라는 적극적으로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시키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조선도 자연스럽게 이 두 나라를 통하여 근대 문물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태극기, 제4차 수신사 때 박영효가 제작한 것이다>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에 끊어졌던 사절단이 다시 파견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수신사입니다. 기존의 통신사가 우리나라 문물을 전파했던 역할이 있었지만 수신사는 반대로 근대화된 일본의 모습을 배우러 간 것입니다. 또한 새롭게 신설된 기구인 통리기무아문에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일본을 배우고자 조사 시찰단을 파견했습니다. 청을 배우기 위해서는 영선사를 파견했습니다. 주로 서구의 근대식 무기 제조와 군사 훈련을 배우고자 했는데 돈이 없는 관계로-_-; 1년만에 돌아왔습니다. 돈은 없어도 열심히 듣고 배운 것은 있는지 근대식 무기 제조 공장인 기기창을 귀국 후에 만들었습니다.

위정척사 한심한 운동일까?

이렇게 정부에서 여러 방향으로 개화를 모색하고 있을 때 유생층들은 이런 정부의 움직임을 달갑게 보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서양의 학문과 문하를 사(邪:간사할 사)한 것으로 보고 이를 배척하고 정(正:바를 정)한 성리학을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음, 여러분의 입장에서 굉장히 한심해 보일 수도 있겠네요. 그렇죠? 그런데 과연 이들의 주장은 한심한 것이 었을까요? 
 

<이차돈의 순교화, 새로운 문화가 들어올 때 저항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나라 불교가 들어왔을 때 아무런 저항없이 들어왔나요?  아니죠? 이차돈의 순교 전설도 전하고 영주 부석사 창건 설화에도 알 수 있듯이 불교가 처음에 전해 질 때 토착세력들의 반발이 거셌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위정척사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반발이 일어났던 것 뿐입니다. 하물며 근대화라는 것은 폭력성을 수반하는 것인데 아무런 저항없이 그대로 수용되었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한심한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자, 그러면 위정척사 운동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봅시다. 위정척사운동은 시대 상황에 따라 총 세가지로 구분됩니다. 1860년대에는 아직 조선이 개항을 하지 않았을 때였고 두 번의 서양 세력의 침략이 있었을 때였습니다. 따라서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했던 사람들은 통상 수교를 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1870년대에는 우리나라가 강화도 조약 체결해서 개항을 했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위정척사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강화도 조약 체결을 주도했던 일본을 서양 오랑캐와 같이 취급하면서 왜양일체론을 폅니다. 특히 최익현등의 글을 보면 개항의 문제점과 조선 산업의 취약성을 꼬집고 있어 위정척사운동파들이 무턱대고 개항에 반대만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한 최익현, 그는 정말 대쪽같은 선비였다>

1880년대에는 조선책략이 유행하던 시기로 이 책에 대해 유생들이 대규모 비판을 가합니다. 영남만인소라는 상소문이 올라와 정부 개화 정책을 비판하며 서양과 수교에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특히 조선책략에 가한 위정척사파들의 반박은 새겨들을만한 충고였습니다.

나중에 위정척사운동은 항일의병운동으로도 이어졌습니다. 위정척사운동은 구체제를 옹호했던 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운동이라 한계가 명확한 것이긴 했지만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성을 간파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박정양과 홍영식이 추구하던 이상적 개화모습은?

교과서 125페이지에 사료 읽기를 보면 박정양과 홍영식의 개화사상이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료를 읽고 두 인물이 지향했던 개화를 청과 일본의 사례에서 하나씩 찾아보는 시간을 가질게요 ^^

Posted by Avila
,


주제

고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사실을 자세히 알 수 있도록 우거왕의 입장에서 하루 일기 쓰기(A4).

작성방법

글씨 크기 12, 글씨체 굴림, 줄 간격 160, 여백 위, 아래, 오른쪽, 왼쪽 30. A4 한 페이지 분량. 80% 이상 채울 것.

제출요령

1) 4/14 목요일까지 한국사 수업시간에 제출
2) mijurang@gmail.com 으로 4/14 목요일 11시 59분까지 제출

채점

기본점수 4점, 미제출시 0점. 만점은 10점. 

일기 작성 예시

1학년 0반 0번 김중근
BC 109년 3월 13일 날씨 맑음

  오늘은 내 생일이다. 옆에 부족에서 토산물을 바쳤는데 우리 왕궁에 있는 흔한 것이라 나 좀 삐진듯? 하지만 삐진 기분을 풀고 열심히 정무를 돌보려고 했다. 한나라 군사들과 전쟁을 하는 장소에 가서 전쟁 상황을 보는데 군사들의 무장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 철기 무기가 더 필요한 것 같다.  

참고자료

한국사 교과서 pp 16 - 17(주로 17페이지)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2002),『한국생활사박물관 2』, 사계절
송호정(2007),『고조선을 왜 비파형 동검의 나라라고 하나요』, 다섯수레

'과거 안에서(고등학교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사 수행 평가  (0) 2011.06.07
Posted by Avila
,
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2) 개황과 불평등 조약 체제
2-1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다
2-2 서양 열강에도 문호를 열다

따라쟁이 일본, 서양의 포함외교를 따라하여 조선의 문을 열다

일본하면 모방을 잘하는 나라로 어느 새인가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일본은 서양에게 자신들이 굴욕적으로 개국을 한 사건을 잊지않고 그대로 조선에게 행했으니 이를 운요호 사건이라 합니다.

<운요호의 모습, 일본은 자신들이 미국에게 당한 것과 똑같은 행동을 조선에 선보인다>

운요호 사건은 일본이 조선을 개국하기 위해 일으킨 일종의 무력시위였는데요. 그렇다면 일본은 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려 했을까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주장한 일본의 주권선과 이익선>

여러분들은 일본을 제국주의 열강에 한 나라로 기억하고 있겠지만 사실 조선을 개국시킬 당시 일본은 그런 자신감은 없었습니다. 이들은 서구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자신들의 독립을 지켜나갈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정치가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일본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선 일본의 주권이 미치는 주권선만 지킬 것이 아니라 일본 독립과 존망에 관계는 되는 주권선 밖의 이익선까지 지켜야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당시 이익선은 조선 전체를 포함하고 있었고 일본은 조선이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거나 보호국 상태로 전락하는 상태를 두려워했습니다. 조선이 곧 열강의 식민지나 보호국이 되면 자신의 독립이 위험해지기 때문이었죠. 따라서 어떻게든 조선을 중립국으로 놔두거나 일본 자신이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누리고자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서구 열강이 조선에 개입해서 강제로 조선을 개항시키기 전에 일본이 미리 개입해서 조선을 개항시켰던 것이죠.

그렇다면 순전히 일본의 의지에 의해서만 조선이 개국되었던 걸까요?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쓰던 흥선대원군은 뒤로 물러가고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고종 밑에 많은 개화파가 일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었던 박규수가 하루빨리 개화를 하여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주장을 펴고 있었습니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그는 북학론의 학맥을 이어받고 개화를 주장했다>

따라서 일본의 사정과 조선의 사정이 맞아 떨어지면서 개국에 대한 협상은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으며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지 1년 뒤인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이 체결됩니다.

조선, 청과 일본 사이에서 끼인 존재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은 최초의 근대 조약을 맺게 됩니다. 그렇다면 한, 중, 일 삼국이 어떤 시기 누구에 의해서 근대적 조약을 맺게 되었는지 한 번 알아볼까요?

 

조약 체결 시기

조약 체결 상대

1842년 난징조약

영국

일본

1854년 미일화친조약

미국

조선

1876년 강화도조약

일본

<한, 중, 일 삼국의 근대 조약 체결 시기와 상대 국가>

이 표를 보고 뭔가 느껴지시는게 없나요? 보면 조선에 특이한 점이 2가지 발견됩니다. 하나는 조약 체결 상대가 서구 열강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점, 두 번째는 청과 일본 보다 20~30년 늦게 근대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점이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조선이 처한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조선은 어떻게 보면 서양 열강들에게 별로 주목받는 국가는 아니였습니다. (러시아는 제외입니다. 그들은 얼지않은 항구가 필요했으니까 조선이 꼭 필요했지요) 하지만 이제 서양 열강의 침입의 위협을 받고 있던 청과 일본에게는 조선은 매우 중요한 나라였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이익선에 넣어 자신들의 독립을 지키려고 했고 청나라는 서양에게 패배한 설욕을 갚고 자신들도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조공국이었던 조선을 식민지로 변화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렇기에 조선은 서양 열강이 아닌 이웃 나라였던 일본에 의해 개국되었으며 개국 시기도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히 늦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시나요?

조선이 자주 독립국이라고? 독립국에 걸맞는 대우를 해줘라!

자, 이제 본격적으로 조선 최초의 근대 조약인 강화도 조약의 세부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합시다. 강화도 조약에 첫번 째 조항에 보면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말 조선을 기만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라는 조항은 청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조항에 불과했고 나머지 조항들은 온통 조선에게 불리한 것들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도 전혀 없었습니다. 이는 당시 신흥 공업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던 일본과 다르게 산업화가 전혀되지 않은 조선에게는 치명타였습니다. 또한 치외법권이 인정되었고 일본의 조선 해안에 대한 측량권도 그대로 용인되었으니 이걸 평등한 조약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조선책략, 조선의 외교 방향을 결정하다

조선이 일본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나서도 조선은 막 바로 다른 서양 열강과 조약을 체결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과 조약을 체결한 것은 과거 전통적인 일본과의 교역관계를 회복한 것쯤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전히 다른 서양 열강들과의 조약체결을 꺼려했는데 서양 열강과 조약 체결에 불을 당기게 만든 책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조선 책략입니다.

<황쭌셴의 조선책략, 당연하게도 한자로 써있다^^;>

조선책략에서는 러시아를 잠정적인 적국으로 설정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조선이 취해야할 방책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 방책은 연미(미국과 연합하고), 결일(일본과 맺고), 친중(중국과 친하라) 것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결일과 친중은 이미 충족이 되어 있었죠. 일본하고 얼마전에 강화도 조약을 맺었으니 되었고 중국이야 수백년 동안 친분 관계를 유지했으니 남은 것은 미국과 연합하는 것만이 있었습니다.

<영남만인소, 미국과 연합하는 것에 대한 유생들의 반대의 목소리다>

이에 유생들이 크게 반발하여 이만손을 중심으로 영남만인소를 올리기도 했지만 미국과 수교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미국과 조약을 맺게 되는데 이는 청의 소개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청은 당시 일본에게 조선의 주도권을 뺏길 것 같아 노심초사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청은 미국을 소개해주면서 조선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어찌되었든 미국과 조약 체결을 순조롭게 이루어져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조약 내용은 우리에게 유리했던 관세 부과 조항 등이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치외 법권, 최혜국 대우 등이 있었기 때문에 불평등 조약이라는 사실은 다름이 없었습니다.

조선이 미국과 수교하자 뒤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의 서구 열강들과 본격적으로 조약을 체결했으며 기본적으로 전부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특히 러시아를 제외하고 다른 나라들은 청나라가 조선과 조약을 맺을 수 있도록 알선하였는데 이것은 다른 서구 열강들에게 청이 조선이 자신의 보호국임을 주장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던 것이었습니다.
Posted by Avila
,

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1) 청과 일본, 근대 개혁 운동을 전개하다
1-3 일본, 부국강병과 대외 팽창을 도모하다 


흑선(黑船:검을 흑, 배 선), 일본을 깨우다

일본의 개화 과정의 대해서 알아봅시다. 일본은 인공섬 데지마에서 교역하던 네덜란드를 통해서 유럽 열강들의 소식을 듣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을 뿐. 서양 열강에 대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답답했던지 네덜란드 국왕 빌럼 2세는 아편전쟁의 경과를 일본 측에게 전하고 개국을 권유하기도 했습니다만 에도 막부는 가뿐하게 씹어주셨습니다 -_-

 <네덜란드 국왕 빌렘 2세, 신경 좀 써주려다가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_-;>

일본은 중국과 자신들은 다르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일단 섬나라니까 안심했던 측면도 없지 않아 있지요. 하지만 불안은 서서히 다가왔고 확실히 현실이 되었습니다. 일본 앞바다에 4척의 검은 배가 출현한 것입니다.

 <에도만에 상륙하는 페리제독의 쿠로후네(흑선)>

http://blog.naver.com/philosophy78?Redirect=Log&logNo=130054628419&jumpingVid=4D1509A929A6713F241077E9C9BFDF19CC52(쿠로후네의 모습을 그린 일본 사극)

일본에 열강들의 증기선이 나타났던 건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일반 사람들이 많이 사는 에도(도쿄) 앞바다에 증기선이 나타났던 것은 처음이라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당시 이 흑선을 이끌었던 페리제독은 일본에 개국과 통상을 요구했습니다. 막부는 1년 간의 시간을 달라 요구했고 미국은 알겠다면서 1년의 유예기간을 주고 철수합니다. 1년의 시간을 얻으면 뭔가 대책을 강구해야 할텐데 설마 진짜 다시 오겠어? 라는 생각이 막부를 지배했습니다. 여러분이랑 비슷하죠? ^^;; 하지만 미국은 약속을 칼같이 지켜 1년뒤인 1854년 7척의 흑선을 거느리고 에도 앞바다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막부는 흑선에 위용에 겁을 집어먹고 결국 불평등조약인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드디어 일본이 개국한 것입니다.

처음 미국의 관계에서 불평등 조약을 맺었던 일본은 이후 다른 나라들과도 불평등 조약을 맺었습니다. 최혜국 대우와 치외법권 등 안 좋은 조건은 다 붙었죠. 이런 조약 아래서 다른 열강들과 장사를 하니 제대로 될리가 있겠습니까? 무역은 만년 적자에 물가능 폭등했습니다. 모든 비난의 화살은 막부에 퍼부어졌으며 일반 백성들의 열강들에 대한 적개심이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왕을 높이고 서양 오랑캐를 몰아내자!

이때 이런 분위기를 이용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존왕양이파입니다. 말이 좀 어렵지요? 이제부터 선생님과 함께 존왕양이가 무슨 뜻인지 알아봅시다.

<메이지 천황, 메이지 천황 이전까지 일본 천황에게 실권은 없었다>

존왕이라는 것은 왕을 존중한다는 것, 즉 일본의 최고 통치자인 천황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아니 근데 최고 통치자인 천황을 뭐하러 더 높인다는 겁니까? 그 이유는 천황이 실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1185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이후부터 무사들이 막부에 모여서 정치를 하던 나라였습니다. 즉, 실권은 천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사들의 집단인 막부에 있었습니다. 막부의 최고 권력자인 쇼군이 사실상 일본 전체를 통치하고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천황은 그냥 일개 허수아비였지요.

존왕양이파들은 막부가 잘못된 정치를 했기 때문에 일본 상황이 힘들다고 판단하여 실권을 다시 천황에게 돌려주자는 운동을 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존왕입니다. 

그렇다면 양이는 무엇일까요? 양이는 더 쉽지요. 서양 오랑캐라는 뜻으로 서구 열강을 배척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양이는 생각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지 한번 볼까요?

<존왕양이파의 대표였던 조슈와 사쓰마의 위치>

당시 존왕양이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곳이 바로 조슈번과 사쓰마번이였습니다. 이 번이라는 것은 지방 영주를 뜻하는 것으로 조그만 나라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좋아요. 조슈와 사쓰마는 상대적으로 에도(도쿄)에서 먼 거리에 있어서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힘을 키웠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강력하게 양이를 추진하여 서구 열강들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때 가볍게 서구 열강들에게 발렸습니다-_-; 힘의 차이를 느낀 조슈와 사쓰마는 양이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서양의 기술을 배우는 것으로 선회했습니다. 

막부를 토벌하고 왕정이 복고되다

자, 그렇다면 존왕과 양이 중에 존왕만 남았네요? 그렇다면 존왕을 하게 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할까요? 천황에게 실권을 주면 간단하죠? 하지만 실권은 막부가 가지고 있지요. 그렇다면 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막부를 토벌하자! 도막파는 이렇게 결성됩니다.

<바람의 검심에 토막파의 암살자로 묘사되는 켄신>

토막파들은 결국 막부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그들이 원하던 존왕을 성공시킵니다. 드디어 막부가 무너지고 명실공히 일본의 최고 실질적 통치자는 천황이 됩니다. 

<교토에 있던 메이지 천황이 에도로 향하면서 왕정복고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http://club.cyworld.com/ClubV1/Home.cy/52945471(대정봉환)
http://blog.naver.com/philosophy78?Redirect=Log&logNo=130054628484&jumpingVid=D3B8E05174B9246F0780D3B32D2F617EC61B(천황의 나라, 일본)

하지만 천황이 실질적 통치자가 되었을까요? 잉? 아니죠. 천황이 왕정복고에서 어떤 역할을 했나요? 아무것도 없죠. 실질적인 역할을 토막파가 모두 맡아서 했으며 이 토막파들은 천황을 전면에 앞세우고 실질적은 정치는 자신들이 행하게 됩니다. 이러나 저러나 천황은 실권이 없게되네요. 

메이지 유신

아무튼 토막파는 천황을 중심으로 내세우면서 대규모 개혁을 단행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입니다. 메이지 유신은 서양을 따라잡겠다는 일념하에 시행되었던 개혁으로 주로 식산흥업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식산흥업이란 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서양의 산업화를 따라잡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더불어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여 이때까지 자신의 지역에서 왕처럼 행세하던 지방 영주들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아 중앙으로 일원화 시킵니다.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일본의 급진 사무라이들>

또한 서양이 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한 것을 따라잡기 위해 신분제 철폐를 단행하고 백성에게 국민 교육과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부과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서양을 급히 따라잡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실질적으로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도입했다고 생각한다면 곤란합니다. 

이외에도 외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이와쿠라 사절단을 파견합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불평등조약의 개정이라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으나 서양문물을 2년 동안 충분히 체험하여 일본의 근대화를 이끄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와 대외팽창, 기묘한 동거관계

우리는 민주주의 하면 보통 평화적인 것으로 알고있지요? 하지만 메이지 유신 시기에 일본의 민주주의는 그다지 평화적이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시기 일본은 서양 나라들과 불평등한 조약 때문에 대외무역에서 큰 적자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 밖으로 뻣어나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그 나라의 재물을 빼앗고자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 훗카이도가 일본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지금의 오키나와였던 류큐 왕국이 일본에 병합됩니다. 또한 타이완을 침략하기도 하는 등 대외 팽창에 온 힘을 모두 기울였지요.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이 대두한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 그의 주장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이여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재밌는 것은 대외팽창을 꾀하던 시기 일본은 민주주의 기본이 틀이 잡혔다는 것입니다. 헌법이 만들어지고 의회가 만들어졌는데 그렇다면 왜 일본은 대외팽창과 민주주의 동시 발전이라는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일본의 민주주의는 어디까지나 서구의 제도 겉모습을 흉내냈다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서구를 빨리 따라잡기 위해 서구 제도를 가져오긴 했지만 그것이 서구의 민주주의처럼 원활하게 운영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형적으로 천황 1인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명령 체계를 더 일사분란하게 하는 데 그 의미가 있었습니다.

천황에게 집중된 권력 좋기만 한걸까?

일본은 대일본 제국 헌법을 만들면서 모든 권력을 천황에게 집중했는데 과연 이것이 천황에게 좋기만 했을까요? 헌법을 만들 당시 왜 천황에게 권력을 집중시켰는지 생각해보고 이를 통해 토막파들이 얻으려고 했던 점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Posted by Avila
,

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1) 청과 일본, 근대 개혁 운동을 전개하다
1-1 서양 세력, 동아시아에 다가오다
1-2 청, 내우외환 속에서 개혁을 시도하다 


포함외교, 감히 누가 누굴 야만이라고 하는가?

여러분들 유럽에 대표적인 나라 중에 영국이 있지요? 영국 하면 신사의 나라로 알고있는데 지금 우리가 배우는 시기 서양 세력은 과연 신사적이기만 했을까요? 

<서구 열강들이 주로 썼던 방식은 포함외교, 대포로 무장한 배를 다른 나라 앞바다에 들이밀고 장사를 요구한다>
 
얘들은 신사적이기는 커녕 상당히 불량배스러운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군함은 물론이고 상선도 대포로 무장시킨 다음 다른 나라 앞바다에 나타나 무장한 배로 상대방을 협박하고 장사를 요구했습니다. 이를 포함외교라고도 합니다. 이런 포함외교를 펼치면서 이들은 아시아에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이들은 교역하던 물품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_-(신사랑 거리가 점점 멀어지죠?), 또 아메리카 대륙에서 삥 뜯어온 은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아시아로부터는 도자기, 비단, 향료 등을 수입했습니다.

중국, 갑부가 되다

유럽 아이들이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을 착취하면서 돈을 좀 만졌지만 실제로 그 돈은 전부 중국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특히 중국산 비단, 도자기, 차 등은 유럽 대륙에서 엄청난 인기였으므로 유럽 국가들은 중국과 무역에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고도 이들 물품을 수입했습니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돈 없어서 중국 물건을 못샀는데 지금은 돈 좀 버니까 그걸 막 사들인 거죠.

<유럽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은은 대부분 중국으로 빨려들어간다>

당시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청은 이런 유럽인들의 무역을 허용했는데 오직 광저우를 통해서 무역하도록 했습니다. 이때 무역 형태는 공행무역으로 청나라 정부로부터 서양인과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가 받은 상인인 공행을 통해서만 무역할수있도록 했습니다.  이런 제한적 무역형태는 유럽인들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었고 유럽은 일방적으로 손해만 보는 형태였습니다만 청의 경우 유럽과의 무역을 조공의 한 형태로 생각했고 유럽의 제품도 전혀 필요없었기 때문에 이런 무역형태는 아편전쟁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서양과 통교한 나라, 일본

일본은 해양 국가로 일찍부터 서양과 통교했습니다. 특히 네덜란드와는 깊은 관계를 가졌습니다. 일본은 전국시대 이미 포르투갈 및 에스파냐와 접촉해서 크리스트교를 받으들이고 유럽의 총과 화약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때 들어온 포르투갈 총을 개량한게 임진왜란 때 쓰인 무기 조총입니다.

 <임진왜란 때 쓰인 무기 조총은 포르투갈 총을 개량한 것이다>

전국 시대가 끝나고 에도 막부가 들어서자 서양 나라에 대한 통상을 거부하고 크리스트교를 금지했습니다. 다만 네덜란드 만은 계속 교역을 했습니다. 네덜란드와의 교역은 인공섬인 데지마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일본은 데지마를 통해 서양 소식을 계속 접하면서 서양 학문을 연구하는 학풍도 생겨났는데 이것을 난학이라고 합니다. 

아편전쟁, 열강 제국주의 얼굴을 중국에 들이밀다

이전까지 중국과 나름대로  평화적인 무역을 하던 영국은 청과의 무역 손해가 점점 심해졌습니다. 이 손해를 메꿀 방법을 곰곰히 생각을 해보다가 생각난 것이 바로 아편입니다.

 <19세기말 삼각 무역의 형태>

영국은 막대한 무역 적자를 메꾸기 위해 당시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인도를 끌어들였습니다. 영국은 중국에 안 팔리는 면직물을 인도에 팔고 인도에서 아편을 생산해서 청에게 팔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청은 아편 무역으로 인해 막대한 은을 영국에 지불하게 되고 영국은 이로써 청과의 무역 손해를 메꿀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 국민은 아편에 중독되어 갔습니다. 청나라 정부는 아편의 심각성을 느끼고 임칙서를 광저우에 파견하여 불법 아편 무역을 모두 적발하고 아편을 모두 파기했습니다.

영국은 이것을 핑계삼아 중국을 공격했는데 이것이 바로 제 1차 아편전쟁입니다. 청나라는 영국 군에 화력에 밀려 아편전쟁에서 크게 패했습니다. 영국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달은 청은 강화조약을 체결하는데 그것이 난징조약입니다. 이것은 청나라 최초의 근대조약이자 불평등조약입니다. 상하이를 비롯한 5개 항구가 개항되고 파기한 아편의 손해 배상으로 은 600만냥을 지불했으며 홍콩을 영국에게 넘겨주었습니다.

http://cafe.naver.com/killhistory.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880&(아편전쟁)

또한 이듬해 다시 조약이 개정되면서 더욱 더 불평등한 조약이 맺어지는데 이 조약에는 영국의 영사가 자국민 재판을 본국의 법으로 하는 치외법권이 포함되어 있으며 외국과 어떤 조약을 체결할 때 가장 유리한 대우의 조약을 상대국에도 부여하는 최혜국 조약까지 삽입되면서 청나라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과 일본에게도 알려지며 동아시아에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나다

청나라가 비참하게 패배한 후 청나라 사정은 날로 악화되었습니다. 전쟁 배상금을 갚느라 백성들의 생활은 곤궁해졌습니다. 나라의 상황이 안 좋으면 안 좋을수록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기 마련! 청나라 크리스트교 사상에 영향을 받고 부패한 만주족 국가 청나라를 타도하자는 움직임의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태평천국 운동은 토지를 고르게 분배하고 남녀가 평등한 사회 건설을 주장했습니다. 이런 사상은 백성들의 지지를 크게 받았고 날로 세력이 확장되었습니다. 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요? 이렇게 나라가 혼란한 와중에 무역 개방의 확대를 요구하며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전쟁은 애로호 사건을 기점으로 일어났는데 애로호 사건이란 청의 관리가 영국의 배에 올라 이 배의 승무원들을 해적 행위를 한 혐의로 연행하고 영국 국기를 내린 사건입니다. 영국에서는 이를 영국 국기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여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제2차 아편저쟁도 가뿐하게 발려주신(-_-;) 청나라는 톈진 조약과 베이징 조약을 통해 더 안습적인 상황으로 빠집니다. 더 많은 항구가 개항되고 크리스트교 포교와 아편 무역도 공인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러시아는 베이징 조약을 중재했다는 이유로 청의 연해주를 그냥 먹어버리는 상황까지 발생합니다.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는 꿈에 그리던 얼지 않은 항구를 획득한다>

열강들은 청나라를 굴복시키자 태평천국운동이 거슬리기 시작합니다. 태평천국운동은 멸만흥한(만주족 청을 멸망시키고 한나라 국가를 다시 세운다)이라는 구호를 내세우기도 했지만 반외세적 성향을 강하게 보였습니다. 따라서 열강들은 이 운동을 진압해야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 지배층도 이들의 평등 사상을 용납하지 못해 같이 진압에 나서면서 태평천국운동은 진압되었습니다. 

중국의 몸으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

서양에게 크게 패하자 중국 내부에서 변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태평천국 운동의 진압과정에서 서양 무기의 우수성을 실감했던 사람들은 중국의 몸으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원칙(중체서용) 아래 양무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양무운동은 주로 서양의 기술 중 무기 기술에 관심이 있었다>

양무운동은 주로 서양의 기술 중 무기 기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서양의 과학기술이 보급되어 무기는 물론 교통과 통신 수단이 정비되었습니다. 하지만 중체서용이라는 것 자체가 한계가 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중국의 정신을 지킨다는 점에서 제도상의 변화는 꾀할 수 없었고 또 문명이라는 것을 정신과 기술로 무자드르듯이 나누기가 어려웠죠. 기술이 들어오면 정신도 들어오기 마련이니까요. 어쩄든 이와 같은 점 때문에 양무운동은 실패로 끝났는데 양무운동이 실패로 끝났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청프전쟁과 청일전쟁의 패배입니다. 이에 청의 낡은 제도를 개혁하자는 변법자강론이 등장했습니다. 

영국은 왜 청나라에 아편을 팔았는가?

오늘 아편전쟁에 대해서 공부했는데요. 아편은 마약류로 무역 상품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곤란한 것입니다. 그럼 왜 영국은 이처럼 무역상품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아편을 청에게 팔았을까요?
Posted by Avila
,

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4) 흥선대원군, 10년 권세를 쥐다
4-2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실시하다 


외국과 마찰이 일어나다

조선 후기, 서양 열강들이 서서히 조선에 접근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안 좋은 의도로 말이죠 ^^; 자신들의 상품을 팔 시장 확대 측면도 있었고 자신들이 믿는 종교를 포교한다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열강들과 조선이 접촉하면서 곳곳에서 마찰이 일어납니다. 대표적으로 천주교 박해사건이 있습니다. 

<병인박해때 많은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 선교사가 죽은 절두산>

1860년, 러시아가 청으로부터 연해주를 획득하고 조선에 국경을 맞대면서 러시아는 조선에 무역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흥선대원군은 국내에 들어와있던 프랑스 선교사 세력을 이용하여 러시아를 막으려고 했으나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습니다. 국내에서 천주교를 금지 시켜야 한다는 여론도 거세지자 흥선대원군은 대대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병인박해(1866)입니다.

외국과의 마찰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병인 박해가 일어나던 해에 미국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과 무역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나타났는데 이들은 약탈 행위를 자행하고 사람을 죽이는 행위까지 하자 평안 감사였던 박규수의 명으로 제너럴 셔먼호는 파괴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상선이던 제너럴 셔먼호>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조선에 들어와 무역을 요구했으나 모두 거절 당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오페르트는 미국인 자본가와 프랑스 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덕산군 관아를 습격하고 밤늦게 흥선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이에 격노한 흥선 대원군은 서양 세력에 더 강경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서양 세력이 침공하다

프랑스는 병인박해에 대한 책임을 조선에 물어 1866년에 침공했습니다. 총 두차례 걸쳐 침입한 프랑스 군은 1차 침입 때는 강화도 침략을 위해 이 근처 지리를 작성하고 해도만을 작성했습니다. 2차 침입에서는 본격적으로 강화도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들은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 조선군에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로부터 프랑스군은 한달 동안이나 강화도를 점령하였습니다.

<프랑스 함대의 1, 2차 침입로>

양헌수는 프랑스의 막대한 화력을 인지하고 정면 공격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심야에 군을 움직여 정족산성을 점령하였습니다. 프랑스 군은 이를 알아차리고 정족산성을 공격했지만 조선군을 이기지 못하고 후퇴했습니다. 이 싸움으로 인해 프랑스 군대는 충분히 조선에 복수를 했다고 판단 군을 철수시켰습니다. 그들은 후퇴하면서 외규장각 도서와 은괴 등을 약탈했습니다. 썩을 놈들이죠? -_-

하지만 세상은 넓고 썩은 놈들은 많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열강 세력이 침입을 감행하는데 그들은 바로 미국입니다.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핑계로 신미년에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며 쳐들어왔습니다. 이것이 신미양요입니다. 미국은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강화도를 공격했습니다. 이때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이 격렬하게 항전했지만 어재연 장군이 죽는 등 미국에 크게 패했습니다.

 <미군에게 빼앗긴 어재연 장군의 수(帥:장수 수)자 깃발>

 큰 승리를 거두고 미군은 이제 곧 자신들이 요구하는 통상을 조선이 곧 수용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왠걸 우리의 흥선대원군은 똥고집 쟁이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장기전에 대비하며 서양 오랑캐랑 상종을 하지 않겠다고 천명했습니다. 미군은 자신들의 예상이 빗나가자 적잖이 당황했으며 여러 가지 사정이 겹치자 결국 철수하고 맙니다. 흥선대원군은 신미양요를 승리한 전쟁으로 인식하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움으로써 서양 세력과 통상하지 않겠다는 뜻을 천명했습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했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는 내용의 척화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승리한 전쟁인가?

과거 우리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서구에 맞서서 승리한 전쟁으로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파견된 서양 군대의 규모나 전투의 면면을 들여다 보면 조선의 힘이 강해서 승리한 전쟁이라고 보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자유롭게 얘기해봅시다. ^^ 
Posted by Avila
,
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4) 흥선대원군, 10년 권세를 쥐다
4-1 왕권을 강화하고 민생 안정을 추구하다

흥선대원군을 둘러싼 오해를 풀자

이번 시간부터 흥선대원군에 대해 배워볼텐데 먼저 흥선대원군에 대한 소소한 오해를 풀면서 시작해볼까 합니다. ^^ 우리가 보통 흥선대원군하면 척화비를 세운 사건으로 인해 개화를 가장 많이 반대한 인물, 꽉막힌 사람으로 인식하는 데 그게 정말 사실일까요?

<흥선대원군은 단지 개화를 반대하기만 한 척사파에 지나지 않는가?>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은 역사를 무조건 두 개의 대비되는 집단으로 가둬서 판단하려고 해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개화 vs 척사로 갈라놓고 흥선대원군은 어떠했는가를 보니 떡 하니 척화비를 세웠거든요. 그래서 척사를 대표하는 인물로 낙인 찍히고 조선의 개화를 늦춘 장본인이 되는 거죠. 하지만 그렇게만 판단해서 역사는 자신의 진정한 얼굴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먼저 역사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현대의 관점을 걷어내는 관점을 먼저합니다. 지금이야 그때 당시 개화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흥선대원군의 입장에서 개화는 민생 안정과 왕권 강화 보다는 떨어지는 문제였을 겁니다.

그래도 개화 못한 건 욕 먹어도 싸지 않냐고요? 병인양요가 왜 일어난지 혹시 아시나요? 병인양요는 흥선대원군이 프랑스 선교사를 박해하면서 일어난 사건인 병인박해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프랑스가 조선에 침입한 겁니다. 프랑스 선교사 탄압했으니 개화에 반대한 인물 맞지 않냐고요? 얘기는 끝까지 들어야죠 ^^ 흥선대원군은 당시 국내에 들어와있던 프랑스 세력을 이용해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생각처럼 안 되고 국내에 천주교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가 커지자 병인박해를 단행한겁니다. 어때요 이러니까 사람이 좀 달라보이죠?

<명성황후는 재평가를 넘어서 미화까지 되었다. 반면 흥선대원군의 평가는 아직 초라하다.>

http://blog.naver.com/rhaehfoi123?Redirect=Log&logNo=20088749528&jumpingVid=94AD05E5236322E1F1EB8BC92EF2F6859EFF(7분 9초쯤 내가 조선의 국모다 드립 시전-_-; 8분 30초에 다시 나온다.)

같은 시기 대립각을 세우던 명성화후는 내가 조선의 국모다 드립으로-_-; 재평가를 넘어서 상당히 미화가 되었지만 그에 비해 흥선대원군은 변변찮은 평가를 받은 것만 봐도 흥선대원군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물론 흥선대원군의 한계는 분명합니다. 어디까지나 왕권강화를 추구했으며 개화에 대한 필요성은 인식했지만 심각성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를 살았던 다른 정치가들을 생각하면 그는 상당히 깨였던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왕실의 위엄을 다시 세우다

세도정치 기간에 세도 가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약간은 무능한 왕을 앉히려고 했습니다. 뭐, 세자가 있으면 어쩔 수 없지만 후계자가 공석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죠. 철종도 원래는 일자무식의 나무꾼이었지만 세도 가문들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강화도령이라 불렸던 나무꾼 철종>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세도 가문들은 또 다시 누가 누가 멍청한 왕일까를 고르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마치 무한도전에서 박명수와 김태호 PD 둘 중 누가 더 잘생겼는가를 골랐던 처럼 말이죠 ^^;

<막장 매치업! 철종의 후계자를 정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왕위로 간택되었던 사람이 그 이름도 유명한 개똥이(고종의 아명)! 이름부터가 참 친숙하죠? 하지만 멍청한 왕을 골랐다고 안심할 때가 아니었으니 바로 왕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던 것이죠. 흥선대원군은 원래 왕족이었지만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아래에서 항상 감시 당하는 생활을 해야되었습니다. 그는 안동 김씨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건달행세를 하며 궁도령, 상갓집 개로 불리는 치욕을 당했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며 권력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 안동 김씨 세력을 약화시키고 당파, 지역, 신분을 가르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습니다. 그리고 조선 중기부터 최고 정무기관이었던 비변사를 없애고 의정부를 다시 최고 기관으로 부활시켰으며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을 편찬하여 경국대전 이래에 계속되었던 조선 법전 체제를 다시 정비했습니다. 또한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조리 혁파했는데 이때 그가 남긴 말이 인상적입니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하물며 서원은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유학자를 제사하는 곳인데, 지금은 도둑의 소굴이 되어 버렸으니 말할 것도 없다."

서원 철폐외에도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경복궁을 중건했는데 이때 부족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무리수를 좀 둡니다. 원납전이라는 기부금을 강제로 걷었으며 당백전이라는 고액화폐를 찍어 발행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화폐 가치를 낮추고 물가를 폭등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백성들도 강제로 동원하고 도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내게 하는 등 무리한 공사재정 마련은 양반뿐 아니라 백성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이렇게 중건된 경복궁은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는 데는 어느 정도 역할을 했지만 백성들의 원망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양반도 군포를 내다

흥선 대원군은 자신의 집권 이전에 일어난 전국적 농민 봉기를 지켜보면서 농민 봉기의 원인이 되는 되었던 삼정의 문란을 개선하고 했습니다. 특히 군포 제도는 획기적인 제도 개선을 이루었는데 상민들만 내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제를 마련했습니다.

<호포제로 인해 상민과 양반 모두 군포를 납부하게 되었다>

또한 그 동안 문제가 되던 환곡 제도는 관아에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안에서 덕망이 있는 사람을 뽑아 마을에서 자치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지방관이 운영하던 환곡제(위)를 마을 자치적으로 운영(아래)할 수 있게함으로써 환곡의 폐단을 막고자 했다>
 
또한 전정제도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양반과 지주들이 함부로 농민의 토지를 빼앗지 못하게 하고 세금을 안 내기 위해 토지 대장에서 누락시킨 은결을 찾아내는 데에도 주력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왜 그토록 경복궁을 중건하는데 집착했나?

오늘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에 대해 배우면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시켰다는 사실을 배웠는데요. 왜 흥선대원군은 그토록 경복궁을 중건시키려고 노력했을까요? 여러분에게 힌트를 드리기 위해서 제가 조선시대 궁궐제도에 대해 부연 설명을 좀 하자면 조선의 궁궐은 이원적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정통인 법궁이 있고 또 다른 궁궐인 이궁이 존재합니다. 조선 초기에는 경복궁이 법궁이고 이궁은 창덕궁과 창경궁이었는데요. 임진왜란 기에 경복궁이 소실 되면서 조선 중기 부터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이 되고 광해군 때 지어진 경희궁이 이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복궁이 다시 법궁이 되고 창덕궁과 창경궁이 이궁이 되지요. 경복궁이 법궁이 되었던 시기의 정치 상황과 흥선대원군이 추구하던 목표랑 연결지으면 쉽게 답이 나올겁니다. ^^
Posted by Avila
,

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3) 격동의 19세기, 조선의 당면 과제는?
3-1 지배층의 수탈 속에서 사회 불안은 깊어만가고 …… 
3-2 세상을 바꾸려는 움직임 


쉴드를 쳐줄래야 쳐줄 수 없는 막장 정치!

조선 왕조의 역사적 평가가 일제에 의해 많이 훼손되면서 조선 왕조의 역사적 평가를 회복하려는 역사학계에 움직임이 일제 강점기 동안과 광복 후에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조선 왕조를 대놓고 폄하하는 분위기는의 사라졌다고 보시면 됩니다만... 한 가지 도저히 쉴드를 쳐줄 수 없는 막장 정치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세도정치입니다.

<세도정치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 막장-_->

세도정치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그 과정을 봅시다. 탕평정치에 대한 기억을 잠깐 떠올려볼까요? 국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붕당 정치에 개입하여 왕권으로 각 붕당을 누름으로써 탕평 정치를 시행했습니다. 자연히 왕에게 권력은 집중되었습니다. 더 이상 신하의 무리인 붕당은 정치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국왕과 그 친위세력 일부가 정치를 행해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갑작스럽게 권력의 정점이던 국왕이 병사하자 자연스럽게 국왕이 가지고 있던 권력은 국왕의 친위세력들에게 계승되었고 그 친위세력들의 주인공은 바로 조선조 내내 그 세력을 꺾으려고 기를 썼던 외척이었습니다.

<권력의 정점인 국왕이 죽자 권력은 국왕 친위세력이 독점하게 된다>

세도정치는 몇몇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형태였습니다. 특히 권력을 독점했던 유명한 가문들이 바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이었는데 이들은 권력은 나는 새도 떨어트릴 정도였으며 부패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가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세도정치를 행했다>

이들은 비변사의 주요 관직을 독점했고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특히 관직 매매와 같은 비리가 성행했고 과거 시험 부정을 저지르기도 하는 등 조선 초기와 중기를 거치면서 닦아놨던 정치체제가 무너졌습니다. 중앙에서 세도 정치가 행해지자 지방의 사정도 악화되어 갔습니다. 세도정치가들에게 관직을 사서 수령이 되었던 이들은 본전을 뽑기 위해 미친듯이 백성들을 수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내 생일인데 겨우 요것만 바쳐? 수령과 아전들의 수탈은 극에 달했다>

이들의 수탈은 흔히 삼정의 문란이라는 단어로 설명됩니다. 삼정은 국가 주요 재정 수입원을 말하는데 하나는 토지세(전정), 또 하나는 군정(군포), 마지막은 환곡입니다. 이들은 이 세 가지 세금을 정해진 것보다 많이 걷거나 편법을 써 백성들을 쥐어짰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문란했던 것은 바로 환곡입니다. 환곡은 곡식이 없는 춘궁기 때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다시 돌려받는 제도인데 이 과정에서 수령과 아전들은 필요 이상의 이자를 많이 받아챙겼습니다. 어떤는 이자를 본전보다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바로잡고자 정부에서는 암행어사를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미봉책에 불과했고 오히려 어떤 고을에서는 암행어사가 수령에게 잡히거나 수령과 결탁하는 상황도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조낸 멋져 보이는 암행어사와 마패, 하지만 현실은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았다>

괴상하게 생긴 배가 나타나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 내부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자본주의가 독점 자본주의로 발전하고 식민지를 과열 팽창하는 제국주의가 나타나면서 열강들이 아시아에 있는 국가들에게 침략의 손길을 뻗쳤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도 심심찮게 서양 배가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이양선(異樣船:: 다를 이, 모양 양, 배 선)입니다. 이양선은 다른 모양의 배라는 뜻입니다. 조선 사람들 눈에는 서양의 배가 신기하게 보였을 겁니다.

<열강들의 이양선>

이런 이양선들은 우리나라 해안의 깊이나 지도를 그리거나 무역을 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은 이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청나라가 서구에 굴복했던 소식을 접했기 때문에 열강들의 요구에 쉽사리 응하지 않았습니다.

혼란한 시대는 구원자를 바란다

세도정치 기에 백성들은 갈수록 삶이 힘들어지자 현실의 삶을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언서의 출현과 구원 신앙의 발흥입니다. 예언서들은 지금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후천개벽상을 주장했고 미륵 신앙이 후삼국 시대에 이어 등장하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런 예언 사상이나 미륵 신앙은 예전에도 우리나라에 있던 것으로 별로 특이할 건 없었지만 이 시기 주목할 만한 신앙이 출현하는데 그것이 바로 천주교입니다. 천주교는 17세기에 북학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청에서 학문 연구 차원에서 들여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자생적으로 이 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점차 민간으로 확산되어나갔습니다.

<배론 신학당의 모습, 천주교 신학을 가르치는 곳으로 1855년에 만들어졌다>

천주교 사상이 민중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는 것과 내세의 영생을 약속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믿었습니다. 그러나 초기 천주교는 제사를 우상 숭배라 생각했기에 제사를 거부해서 정부의 거센 탄압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프랑스 선교사들이 국내에 들어와서 활동을 하면서 그 교세가 날로 확장되어 갔습니다.

이런 천주교의 유입에 자극을 받아 국내에도 새로운 종교가 탄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이었습니다. 동학은 천주교 사상에 영향을 받고 국내에 이미 있던 사상들을 혼합했습니다.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이라는 것을 내세웠으며 보국안민을 내세워 열강들의 침략 움직임에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동학의 포교 지역>

또한 동학은 후찬개벽을 주장하며 수령들의 수탈에 지친 민중들에게 큰 지지를 얻어 날로 교세가 확장되어 갔습니다. 동학의 교세가 날로 확장되어가자 이것을 가만두고 볼 수 없었던 정부는 최제우에게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명을 씌어 처형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최제우의 죽음에도 동학의 교세 확장은 막을 수 없었으며 오히려 억울한 최제우의 죽음을 풀어달라는 움직임인 교조 신원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후에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으로 연결되는 도화선이 되기도 합니다.

풀들이 일어나다!

계속된 지배층의 수탈로 인해 더 이상 살길이 막막해진 민초들은 농사를 짓던 농기구를 잡고 지배체제의 모순에 맞서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연약한 풀들이 힘차게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소작료를 깍거나 납세를 거부하는 항조나 거세와 억울한 일을 알리는 벽서나 소청과 같은 작은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종래에는 농민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대표적인 농민 봉기 중 하나인 홍경래의 난>

홍경래의 난은 대표적인 농민봉기 중 하나로 농민 뿐 아니라 신흥 상공업 세력과 광산 노동자들이 참가했습니다. 이들은 평안도 지역에 대한 차별을 호소하며 지배층의 수탈에 강하게 저항했습니다. 1862년에는 단성 농민 봉기와 진주 농민 봉기를 거치면서 전국적으로 농민 봉기가 확대되어 이를 임술 농민 봉기라 불렀습니다. 정부는 이런 사태에 대해 심각성을 느끼고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을 방안에 대해 논의했으며 암행어사를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삼정이정청에서 나온 대안 중 조세제도를 혁신적으로 바꾸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의견이 기존의 조세제도는 그대로 두고 그 운영반향만 개선하자는 의견이어서 농민들의 불만을 잠재우지 못했습니다.

ㄱ자 교회는 어떤 까닭으로 지어졌나?

<전북 익산에 있는 두동교회의 내부모습>

위에 그림은 전북 익산에 있는 두동교회의 내부모습입니다. 두동교회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개신교 교회 건물인데요. 독특하게도 ㄱ자 형태로 건물이 지어졌습니다. 왜 이런 교회 건축양식이 나타나게 되었을까요? 힌트를 드리면 교과서에 있는 초기 천주교 미사 모습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
Posted by Avila
,